지상으로 나오자 맑게 개어있는 하늘이 둘을 맞이해 주었다. 맑고 푸르며 높디높은 하늘이 내가 언제 없어졌었냐는듯 강렬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았었다. 잠시 그런 풍경을 바라보던 소녀는 당신에게 다가가 파일벙커를 들지 않은 한쪽손을 자신의 양 손으로 잡아주었다. 인사라도 하려는걸까 싶은 찰나에 소녀는 당신의 손을 잡은 그대로 마치 기도를 하는듯 자세를 취하더니ㅡ
빛이 소녀와 당신의 몸을 감싸안았다. 당황하는 당신의 눈 앞에 헤실헤실 웃는 소녀가 살짝 피곤한듯 반쯤 감긴 눈으로 이야기 했다.
"짠, 선물이야. 위험한 일을 하는 그럼에도 꿋꿋이 나아가는 언니에게 주는 내 작은 선물"
명함을 받고는 이리저리 보다가 이내 웃으며 배웅해 주었다. 딱, 한번. 위험에서 그 목숨을 구할수 있는 축복 정말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신을 모시는 무녀로서 하루에 단 한번정도 해줄수있는 배려 ......뭐, 어차피 나 자신은 크게 일은 없으니 이런 호의는 언제고 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언니에게는....조금 다르게 느껴지려나
멀어지는 당신을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는 나 또한 터벅터벅 초원을 걸어갔다. 언제고, 언제까지고....또 다른 인연을 만날때 까지.
언제나처럼 평화로이 운항중인 로도스 함. 한번씩 함선에 구멍이 뚫린다던가 말이 복도를 돌아 다닌다던가 어째서인지 함선 바닥의 마찰력이 0이 되버리는 일도 생겨나지만 아무렴 어떠랴 초인들을 모아둔 집단에서 이런 자그마한 애교같은 사건들이야 별 일 아닌 것이겠지
하지만 그런 로도스 함에서도 별 일이라고 할 일은 있으니 하나는 임무 수행이고 하나는 구조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어느 외부인의 무단 침입이었다.
CCTV에야 갈고리가 함의 갑판 펜스에 걸리는게 보였지만 너무 작은 움직임을 그 누가 신경쓰겠나 그렇기에 어느 망토를 쓴 괴인이 함 내에 침입중인것을 로도스에서 알게된 것은 어느 연구원이 창문을 타고 오르는 괴인을 발견하고 경보를 울린 때였으며 부랴부랴 뛰어온 요원들을 앞에둔 괴인은 이런 짓을 벌인만큼 격렬하게 저항을.....하지 않았다.
이런때에 마침 근처에 있던 당신은 무슨 일인가 하고 설렁설렁 갑판으로 가 보았다가 꽤나 익숙한 망토와 머리카락 색을 지닌 어느 소녀가 몸집이 커다란 요원의 손에 마치, 꼬마아이 마냥 대롱대롱 들려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 "
그 소녀는 당신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는 겨우 겨우 작게 소리내어 인사를 해 주었다.
험악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선민들이 내가 올라오자마자 달려들어서는 제압하더니 순식간에 후드를 벗겨버리고는 멍청한 표정을 짓는걸 보고 꽤나 많은 생각을 할수있었다. '아, 여기 엄연한 선민들의 생활공간이었지 참.' 하고
전후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입구는 못찾겠어서 일단 괜찮겠지하고 올랐던게 화근이었을까. 나는 언니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힐수밖에 없었고 언니의 방으로 가면서 수근거리는 다른 선민들을 보며 후드를 내리 눌러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정말 부끄러워 죽을것 같았으니까.
방으로 가는 길엔 무언가 말이 많았다. 하긴, 어던 간 큰 녀석이 로도스에 불법 침입할 생각을 하겠는가. 그것이 이런 어린 소녀라면 더욱이.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과도한 관심은 별로 뜻하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알케미스트는 수많은 시선들을 손을 휘적거리며 치우고선 에제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안내된 방은, 무엇보다도 공방이라는 표현이 시의적절했다. 다만, 거기에 중세라는 표현을 덧붙여서. 방 한 쪽에 놓인 선반과, 그 안에 놓인 무수한 약병들. 탁자 위의 수많은 플라스크와 연결된 호스들. 종이에 일일이 직접 쓰여진 수많은 기록들과, 불을 피울 소형 화로, 그리고 믹서기.
"냄새가 조금 독하려나."
그렇게 말하며, 알케미스트는 선반을 뒤적거려 약을 하나 꺼냈다. 뚜껑을 열자, 아까까지 방 안에 가득 찼던 쓴 냄새가 사라졌다.
여긴 실험실인걸까. 아마 언니가 자신의 방이라 이야기 할 만큼 오래, 자주 머무는 것이겠지 이리 저리 둘러보면 이곳 저곳에 정갈히 놓여져있는 약품들과 플라스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들을 조합해서 방금같은 마술을 부릴수 있는걸까? 그러고보면 그때도 뭔가 약같은걸 만들려고 했었지.
그리고 소녀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광석충 무리를 만난 것이라던가, 광석병 환자들을 도왔던 것이라던가, 설원에서 오로라를 보고 그걸 사진과 그림으로 남긴 것이라던가. 사실, 떠나고 난뒤 몰라 숨어서 사진을 한장 찍었다던가 -심지어 그것을 당신에게 보여주기 까지 했다-
신이 나는듯 이야기하는 소녀를 보며 정말 보이는 그대로의 나잇대의 소녀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시간이 지났는데 이 아이는 그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고
아주 거짓말은 아닌가. 요리는 좋다. ㅈ리 과정에서 영양소가 현화하거나 증대하는 식재도 있으니.
"그래도 평소에 잘 먹어둬야 해."
그래야 키도 조 크고 그러지. 하는 뒷말은 쏙 삼켰다.
그리고, 자신이 여기서 어떻게 지내는지라.
"음... 뭐, 보는 대로?"
알케미스트는 뒤편에 아직 그대로 있는 기자재들을 바라보았다. 쓰지 않을 때에도, 웬만하면 곧바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도록 저렇게 놔둔다. 그야 연금술은 발상이 중요하니까. ...라기보다는, 저걸 정리할 정도로 오래 놀게 둘 것 같지가 않으니 근야 두는 감도 있지만. 그래도 청결은 신경쓰고 있다. 괜히 조합이 어그러지면 또 폭발하는 수가 있으니.
언니는 자신의 뒤편의 실험기구들을 가리키며 이야기해 주었다. 저걸 하루종일 만진다고 .......저것 '만' 하루종일? 운동은 안하는걸까. 왜인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곧바로 입 밖으로 꺼내는건 예의가 아닐테니 속에서 고이 접어두고 다시 뒷편의 도구들로 시선을 옮겼다.
형형색색의 액체들과 재료들이 즐비하여 색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가 먼저 눈에 띄었다. 이따가 정리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물건들과는 달리 저건 무슨 작용을 하는 건지도 모르는 것들이니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응, 저것들은 어떤거야?"
.......둘러보다가 발견한 찬장의 술병들에서는 시선을 돌리고 언니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저것과 연관되는것 보다는 언니와 이야기를 하는게 좋지 않을까
상처 회복 포션의 재료 중 하나인 흡혈초는, 수혈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 빠져나간 피 대신 혈관을 돌면서 세포들에게 산소를 공급하고, 할 일을 다하면 땀 등을 통해 노폐물로서 배출된다. 그래서일까, 흡혈초는 붉었다. 약초 상태일 땐 잘 못 느끼지만, 이렇게 물약의 형태로 가공하고 난 후라면...
정말이지,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핏빛을 띄게 된다. 아무런 부작용도 없건만, 단지 색깔 대문에 꺼림칙해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연금술은, 아츠가 아니다. 엄연한 물리현상에 기반한 학문. 장밋빛보다는, 이렇게. 핏빛의 끈적하고 암울한 현실이 산재한 녀석이다. 현실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아니."
그러므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사람의 뇌는 아직까지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밝혀진 부분보다 안 밝혀진 부분이 많고, 그것은 꽤 먼 미래까지 그럴 것이다. 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도 힘겨워하는데, 남의 생각을 그대로 엿볼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독심술은 아직까지 아츠로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인연이란 참으로 잔인한 개념이다. 왔을 때는 온 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앉아있다가, 갈 때는 자신의 배는 되는 무언가를 통째로 뜯어가버린다. 뜯겨나간 빈 자리는, 절대로 채울 수 없다. 허나, 무시하기엔 상처가 너무나도 아프다. 그러니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혹시 하는 생각을 놓지 못하는 거다.
누구에게나 그런 인연이 있다. 그것은 이 자유분방한 소녀에게도 마찬가지겠지. 저만한 나이라면, 아직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나이인데.
"좋아, 안 될 거 없지!"
다시 눈을 뜨고, 평소처럼 돌아온 에제를 알케미스트는 어깨 위에 올렸다. 에제가 당황하는 건 둘째치고, 허리에서 요상한 소리가 좀 크게 났지만 괜찮을거다. 아마. 여기 널린게 상처 회복 물약이니까, 응. 괜찮을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알케미스트는 말했다.
그러면, 어느 쪽이 괜찮을까. 알케미스트는 잠깐 생각했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바람이 잘 들어도 너무 잘 드는 로도스인만큼 정비 스탭들은 항상 동분서주하지만, 그렇게 고생하는 만큼 인력이 가장 많이 할당된 곳도 거기다. 당연하지만 정비가 선체의 구멍을 메꾸는 일만을 뜻하는 건 아니므로, 사고 빈도와 별개로 언제나 그곳에 상주하고 있는 인원들이 있기도 하고. 그리고 사람이 많은 곳은, 아까 보았듯 별로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다면야, 남는 곳은 한 곳 뿐.
"좋아, 그럼 먼저 사서가 태업중인 도서관으로 가 보실까."
사실 아직도 그 가이노이드가 기록 보관 담당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코드네임이 사서니까 사서라고 부르는 걸 뭐라 할 수는 없겠지, 하하.
알케미스트는 평소보다 살짝 무거워진 걸음을 성큼성큼 옮기며, 에제와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문득,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어가 들렸다. 신님, 신님이라. 그러고보면 그 설산에서 한 번 만났달까, 그랬었지. 에제의 얼굴과 에제의 목소리였으나, 에제와는 다른. 굽어살피는 듯한 분위기는 특히 기억에 남았다.
에제의 곁에서 늘 함께하지만, 에제가 아니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존재. 그것이 단순히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아니라 결론을 내린 순간부터, 당연하지만 흥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 신서라는 것은 빼들고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읽고 있는 에제. 알케미스트는 그런 에제의 어깨 너머로, 신서의 내용을 읽어보려 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신통찮았다. 한참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겉모습처럼, 안쪽 내용 또한 도대체 뭐라는지 모를 문자로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케미스트가 알기로, 현재에 이런 글자를 쓰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딘가 그림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아마 고대에 쓰던 문자 체계인 듯 싶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저런 고대 문자에도 통달하게 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뭐, 갑자기 들불처럼 일어난 호기심이었으니, 사그라드는 것 또한 빨랐다. 알케미스트는 옅은 아쉬움을 느꼈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