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다, 그리고 푸르다. 상반된 색상을 가진 슈트는 알케미스트의 빈약한 눈썰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적지 않은 힘을 품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처럼 후방지원을 특기로 삼을 줄 알았고, 이후 한 번 들었을 때도 별다른 상상은 해 보지 못 했건만. 설마, 설마. 이런 방법이었을 줄은.
각종 시약이 플라스크 속에서 들끓고, 증류된 액체가 관을 따라 비커 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진다. 새하얀 꽃에서 꽃잎을 두어 장 떼내 집어넣고, 충분히 섞어준 뒤 타키온의 꼬리털을 넣는다. 그 뒤 플라스크의 뚜껑을 막은 뒤 흔들고, 그것을 관 속으로 밀어넣어 기화된 각종 시약들이 뭉쳐 만들어진 초록색 기체와 끊임없이 섞여간 끝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플라스크를 건네받은 타키온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제작 과정은 뭐라 표현할 수 없었으나 완성품은 확실히 어떤 음료수 같은 색이었고, 그에 걸맞게 목에선 괜찮은 청량감이 느껴졌다. 탄산은 없었으나, 기묘하게도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 그와 별개로 몸에도 제법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과연, 허투루 연금술사를 자칭한 것은 아니라는 거겠지.
로봇답게 살풍경한 방도 아니고, 성격에 맞춰 어지러운 방도 아니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이질적이지만, 그냥 세월이 느껴질 뿐인 무척이나 평범한 방.
다만 안쪽에 손님맞이용 의자랑 테이블이 있다는 점이 특기사항 정도려나.
"앉아 있어. 커피 타 올 테니까."
"어, 아니. 내 몫은 내가 타면 안 될까?"
"어허, 아무리 내가 로봇이라지만 체면이 있지. 손님은 손님답게 가만히 있어."
알케미스트의 나약한 육체는 금속 내골격의 강대한 힘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정말 가만히 앉아있어도 되는 걸까, 끊임없이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 마셔."
알케미스트는 그녀가 커피를 타 준다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커피보단 홍차 쪽이 취향이라곤 하지만…. 역시, 역시 이건 좀 아니다.
"…커피 어딨어?"
"? 거기 있잖아."
"내 눈엔 커피색 각설탕들 밖에 안 보이는데."
그것도 커피잔 위로 손가락 한 마디 쯤 더 쌓인.
"쯧쯧, 이래서 휴-먼이란. 모처럼 성인 하루 권장 칼로리에 맞춰서 준비해 줬더니만."
"사람 당분 중독으로 죽일 일 있어?!"
알케미스트가 황당해하며 소리치자, 라이브러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불만이면 서로 바꾸든가."
그렇게 바꾼 커피는 또 생각보다 먹을 만 했다. 알케미스트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나는 걸 느꼈으나,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 각설탕들을 한 입에 털어넣고 우적우적 씹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무슨 말이던 간에 목구멍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본론부터 말하자. 솔직히 우리가 방과 후에 삼삼오오 모여서 분식집 가는 여고생들 같은 사이는 아니잖아?"
"확실히. 나이를 따지자면 나도 너도 여고생은 아니긴 하지."
"…자꾸 말 돌리지 마. 너는 로봇이고, 명령권자가 있을 거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쓰리톱중 하나. 더 파고들면 크리스겠지."
라이브러리안은 조용히 웃었다.
"솔직히 보여줄만한 건 다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에이, 이건 좀 더 이따가 밝히려고 했는데."
그녀는 투덜거리며 품 속에 손을 집어넣었고─ 밖으로 나온 그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성질도 급해라, 좀만 기다려 봐."
쭈욱 뻗은 라이브러리안의 오른 검지가 갈라지더니, 안에서 스피커를 닮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기계음이 섞였지만 익숙하기 짝이 없는 인물의 목소리 또한 흘러나왔다.
[─연금술은 변수가 많아. 결과물조차도 재료로 쓸 수 있기에, 레시피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오죽하면 그 본인조차도 만들어진 약품의 정확한 효능을 모를 때가 가끔 있지.]
[알케미스트의 적극적인 협조로 웬만한 레시피들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래도 역시 로도스는 모든 약품의 효능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껴. 전 기록관이자─]
"어이쿠, 여기까지."
그 손가락에서 나오던 C의 목소리가 멎었다. 손가락을 거두어들인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생글생글 웃으며 알케미스트를 바라봤을 뿐.
"넌 지금은 델타의 오퍼레이터 아니었어?"
"은퇴한 일러스트레이터한테도 외주 형식으로 작업물을 맡기곤 하잖아? 그런 거야."
솔직히 말해서, 알케미스트에게도 그닥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있고, 만들 수 있는 약품의 숫자는 그녀 본인도 제대로 계측하지 못 한다. 심지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하물며 거기에 실수와 즉각적인 번뜩임까지 첨가한다면 그 양은 가히 천문학적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겠지. 그러다 보면 당연히, 그녀의 인지를 벗어난 약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어떤 실험을 하기도, 그렇다고 그냥 폐기하기에도 좀 그런 것들. 그 계륵들을 나서서 해결해 준다는데 말릴 이유가 있을까.
"근데 로도스는 치료제 개발로 항상 바쁘잖아. 이런 거 실험할 여유가 있어?"
"전-혀 문제없지. 우리 사장님이 구태여 날 보낸 이유가 있거든."
"아, 혹시 그런 거야? 로봇이니까 혼자서도 성분 분석이나 아니면 시뮬레이트 같은 게 가능해?"
"아니? 어디가 오염되어도 통째로 붕괴시켜 도려낼 수 있어선데?"
"…."
"하하, 로봇 조-크."
기록에 이상한 사족을 붙이는 건 아닐까. 알케미스트는 그게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럼, 여기서? 아니면 따로 설비같은 거 필요해?"
"여기서."
라이브러리안은 또다시 검지에서 기다란 막대 두 개를 꺼내 보였다.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초라했다.
"진짜 그거면 되는 거야?"
"방금 발언은 로도스의 기술력을 무시하는 발언이라고 해석하면 되는 건가?"
쳇, 알케미스트는 얌전히 가방에서 물건들을 꺼내어 조립했다. 가구들 사이의 빈 공간을 꽉 채우는 크기의 간이공방이 완성되고, 알케미스트는 그곳에 재료들을 늘어놓았다.
널부러진 재료들 속에서, 알케미스트가 꺼낸 것은 비누풀과 연꽃잎. 비누풀을 연꽃잎으로 감싼 뒤 문지르자, 하얀 거품이 송글송글 나오기 시작한다. 그걸 끓고 있는 물 속에 그대로 투척. 골고루 섞이도록 잘 저어주고. 잘 섞였으면 그곳에 기름나무 진액을 넣어준 뒤 다시 가열. 이제 그걸 플라스크 속에 넣고, 증류수를 1:1 비율로 넣고 흔들어 주면.
"완성."
플라스크 속에 담긴 한없이 투명한 액체. 언뜻 보면 그냥 물을 담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실직고하자면, 알케미스트는 어쩌면 도망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을 품었었다. 아무리 신체의 말단부라고 한들, 크기가 그만큼이나 커진 것이다. 그 크기와 무게. 이리저리 걸리는 건 둘 째 치더라도, 무게중심 때문에 웬만하면 서 있는 것 조차 버거울 것이 분명했다. 특히 쿠란타의 꼬리는 페로나 필라인과는 다르게 그 움직임이 무척이나 제한적인 편이다. 길게 뻗어나온 부분은 다 털이고, 실제 꼬리는 손가락 두세 마디 길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몸 쓰는 일은 나랑 비슷하게 못 할 것 같았는데…."
그 발명품들, 필생의 역작이 확실하다. 그 거대화한 꼬리를 어떻게 거추장스러운 정도로 넘길 수 있는지. 복도에 발자국이 남은 걸 보고 얼마나 식겁했는지 모른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효과를 즉시 해제하는 약과 함께 마시면 몸이 형광빛으로 빛나는 약 - 이건 대체 왜 달라고 한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됐다. - 을 대가로 겨우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그 사이에 있던 사건의 밀도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 벌써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알케미스트는 일단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가서 할 것도 딱히 없지만, 지금은 그냥 가만히 누워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창문을 넘어오는 햇살을 이불 삼는다면, 아마 나른하게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알케미스트가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알케미스트는 다급히 창문을 통해 날씨를 확인했으나, 하늘은 아까 타키온에게 준 약처럼 맑고 청명했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 무슨 일인가 싶어 갑판으로 달려가니, 이미 자신 외에도 다른 스탭이나 오퍼레이터들이 얼핏 보였다. 알케미스트는 그 중 의료 스탭으로 보이는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 알케미스트 씨?"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번개가?"
"아…, 그게…."
의료 스탭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설명을 이어갔다.
"타케미카즈치 씨가…, 앞에 원석충 무리가 보인다는 말을 듣자마자 말릴 새도 없이 달려나가셔서…."
"타케미카즈치?!"
타케미카즈치. 진홍빛의 장발과 딱 봐도 그 드센 성격을 알 수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여인. 첫 자기소개 때는 뇌신 재단의 비서라고 소개했던가, 출신과 코드네임에 걸맞게 아츠 또한 뇌전 계열. 스스로 환자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대로 중증의 광석병과 더불어 사지가 모조리 기계로 대체된, 어찌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 하지만 특유의 가학성이 가득한 언행과, 진정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머리에 전류를 쏴 댈 정도로 불같은 성격을 겪는다면 어찌 감히 그녀를 동정할 수 있을까.
당장 얌전히 대기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도 머리에 뇌전을 한 방 쏘고 난 뒤에 동의했던 그녀가 아닌가. 무언가가 터진다면 십중팔구는 그녀가 원인이었을 거라고 알케미스트는 생각했다.
"차라리 다행인가…?"
스트레스를 쌓는다는 건 폭탄을 쌓는다는 말과 같다. 그것도 언제 터질지 만든 사람조차 알지 못하는 불발탄을. 특히나 타케미카즈치같이 끓는 점이 낮은 이들은 그게 더욱 두드러진다. 멀리 갈 것 없이, 방금 쳤던 번개가 로도스나 다른 팀원들을 향해 떨어졌다고만 생각해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이다.
"로도스는 아직 운행 중이야?"
"아뇨, 원석충 무리가 지나가는 걸 기다리기 위해 잠깐 멈춘 상태예요."
자칫하면 오퍼레이터를 그대로 버려두고 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이건 확실히 다행이다. 아니, 자신만 해도 놀라서 여기까지 뛰쳐나오지 않았던가. 지금도, 점점 갑판엔 사람들이 들어차는 형국이다. 별 말이 없어도 그녀가 낙오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라고, 역시 이만한 인원수는 살짝 불안하다.
"사람을 좀 물려야겠는데."
딱히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와 같이 다녔던 사람 중 하나로써 제법 느낀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그녀는 소위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딱히 좋아할 것 같진 않다는 점이다.
"내가 여기 사람들을 돌려보낼테니까, 저기 안쪽에서 방송 좀 해 줄 수 있어?"
"아, 네. 그렇지만 뭐라고?"
"대충 바깥의 번개는 타케미카즈치니까, 다들 신경 쓰지 말고 자기 할 일 하라고 해. 누가 뭐라고 하면 내가 시켰다고 하고."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의료 스탭이 로도스 안쪽으로 사라진 걸 확인하고, 알케미스트는 박수를 쳐 시선을 모았다.
"뭐를 그리 재밌게 보고 있어? 잔치는 끝났으니까 다들 방으로 돌아가서 일 봐, 일."
군중은 "누구야?" "알케미스트. 몰라?" "으엑, 진짜 알케미스트야?" 같은 소리로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의료 스탭의 뒤를 따라 로도스의 안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법 시끄러웠던 갑판은 이제 그녀 이외엔 남지 않았으며, 마침 안쪽에서도 타이밍 좋게 방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케미스트는 아까 보았던 얼굴 다섯을 암기해 놓으며 뒤를 돌아봤다. 때마침, 다시 한 번 번개가 쳤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폭발의 중심지에서 바위들이 비산하는 게 보일 정도다. 그야말로 경천동지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위력. 허나 그럼에도 원석충들은 검게 그을렸을지언정 죽진 않았다. 배를 까뒤집은 채, 간헐적으로 다리를 움찔거릴 뿐인 모습.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아플때까지 찌릿찌릿하게 해줄테니까 느긋하게 즐겨도 좋아?"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해 짐작했을 때, 아마 일부러 빗맞히거나 한 게 아닐까. 그 추측이 사실이라는 듯, 쾅쾅대는 소리는 제법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저만한 위력의 아츠를 가지고, 고작해야 원석충을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늘어지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과연 그녀는 얼마나 많은 원석충을 직접 잡아왔던 걸까? 그 대상을 생명으로 확장한다면, 그 숫자는 과연 얼마나 늘어날까?
낙뢰를 두 번이나 더 떨어트리고 나서야, 원석충들은 드디어 몰살당할 수 있었다. 국소규모의 재앙이라도 있던 듯한 모습이었다. 그 일대의 땅을 집어삼킨 거대한 구덩이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새까맣게 탄화되어, 마치 무저갱을 연상케 했다. 그 중심부에서 타케미카즈치가 걸어나왔다. 로도스와 현장은 멀지도, 그렇다고 그리 가깝지도 않았건만 그녀는 그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하더니 어느새 갑판 난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오, 이게 누구야. 연금술사 양반 아냐?"
이런 얼굴을 보고 뭐라고 했더라.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한바탕 날뛰고 온 탓인지, 무척이나 시원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표정이 제법 죽상인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봐?"
의수와 의족을 철컥거리며, 그녀는 갑판 안쪽으로 넘어왔다. 보통 의수나 의족을 단 환자들은 그 부분을 감추려는 양상을 많이 보인다. 장애인이라 하면 감염자만큼은 아니어도 대표적인 차별의 대상이니만큼,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보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그녀는 의수와 의족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넘어, 아예 알아달라는 듯 무척이나 티를 내고 다닌다. 수시로 자신을 환자라 자칭하면서, 정작 그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행동. 그러나 정작 살펴보면 이보다 더 심각한 환자를 찾기가 힘든.
솔직히 말하자. 알케미스트는 타케미카즈치에게 옅은 불쾌감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그녀의 방약무인한 언행 때문일까? 아니면 환자라는 명함을 내세워, 자신의 행동에 면죄부를 팔아먹고 있는 것으로 비춰져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사그라들기 직전 무엇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일념으로 어느 때보다도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촛불처럼 느껴져서일까?
사람의 마음은 천 길 물속보다도 깊다고 했던가.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나 보다. 그렇기에 알케미스트는 대신 명확한 것에 집중했다. 자신은 의사고, 그녀는 환자였음에. 알케미스트는 의사로서 그녀에게 한 마디를 해 주기 위해 자리에 남았다.
아츠라는 것은 오리지늄이 이루어 내는 물리법칙을 초월한 현상. 그렇기에 감염자들은 남들보다 강력한 아츠를 다룰 수 있었으나, 당연하게도 그만한 대가가 따랐으니.
"환자잖아."
아츠의 남용은 광석병을 촉진시키며. 타케미카즈치는 중증의 감염자였다.
"흐음? 주치의도 아닌 녀석에게 그런 말 들을 생각은 없는데."
"그 주치의가 부재중일 때를 대비해 대타로 준비한 게 바로 나거든. 적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는 말아줬으면 하는데."
타케미카즈치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나중에 의사양반이 알아서 잘 고쳐 주시겠지."
목숨이 직결된 문제이건만, 별 것 아니라는 듯 낄낄대는 모습에 알케미스트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걸로 됐다. 알케미스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잠깐만."
그 때, 타케미카즈치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모처럼 만났는데 말이야, 그냥 가기엔 좀 심심하잖아. 마침 나는 지금 기분이 제법 좋은 상태거든, 어떄?
친목이라도 다져보자고 덧붙이는 타케미카즈치. 알케미스트 자신 또한 최초엔 그럴 목적이 있기는 했으나…, 당연하다는 듯이 타케미카즈치는 그 목록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누가 감히 저 오만불손한 폭군에게 먼저 친해지자 다가가겠는가. 하지만 상대가 먼저 신청한 자리를 걷어찰 수도 없는 일.
"하아…, 잠시만 기다려."
알케미스트는 가방을 열었다. 다양한 도구들과 재료들이 가방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금세 완성한 공방.
거기에 추가로, 알케미스트는 가방에서 병 두 개를 추가로 더 꺼냈다. 압생트(Absinthe), 그리고 샴페인(Champagne).
뭐, 별 건 없다. 단순히 둘을 섞을 뿐인 간단한 작업. 압생트의 병을 따자 특유의 짙은 허브의 향기가 올라온다. 그걸 타케미카즈치도 느꼈는지, 어깨 너머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뭐야, 술? 부업은 바텐더가 아니라 의사라면서?"
"취미거든? 그리고 아직 완성 아니니까 좀만 기다려."
유리잔 둘에 압생트가 1/3 즈음 채워지고, 알케미스트는 이번엔 샴페인을 들었다. 특유의 탄산 가득한 소리를 뒤로하고, 황금을 닮은 액체가 초록빛 술과 함께 격렬하게 어우러진다. 그 끝에 남은 것은, 황금을 간직하되 그 속내가 적나라하게 비춰지는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 두 잔.
"자, 받아."
"생각보다 분위기 같은 걸 중시하는 타입인가 봐?"
"남이사."
타케미카즈치는 콧바람을 한 번 불어주곤, 자리에 앉았다. 알케미스트 또한, 자신 몫의 잔을 들고 맞은 편에 앉았다.
"글쎄, 평소에 궁금했던 거라도 물어보면 어때? 아, 평소라기엔 시간이 좀 짧았나? 어쨌든."
궁금한 것, 궁금했던 것이라. 보통 이런 때는 시시콜콜한 것을 묻겠지. 좋아하는 것, 특기, 취미 따위의 것들. 하지만, 상대를 생각하면 만족할만한 답변은 얻기 힘들겠지. 술도 있겠다, 그녀는 아예 조금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뇌신 재단의 비서라고 했지?"
타케미카즈치의 눈이 살짝 커졌다.
"휘유~ 처음부터 세게 나오는데? 보통은 취미나 특기 같은 걸 묻지 않던가?"
"글쎄, 평소에 궁금했던 게 이거라."
"흐음. 뭐, 좋아. 뇌신 재단의 유일 및 전속 비서, 타케미카즈치. 로도스와 뇌신 재단 간의 계약에 따라 지금은 로도스에서 오퍼레이터로 일하고 있지. 자세한 내용은 기밀이니까 묻지 마."
"그래, 역시 뇌신 재단이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폭발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만한 성장세로 굴지의 대기업이 된 곳. 그리고 그 방법이, 감염자와 비감염자들의 갈등을 통한 무구들의 대량 판매. 시기 또한 리유니온 무브먼트가 본격적으로 발족했을 때라, 마케팅의 효과는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그렇게 용문 내에서조차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커졌으면서, 아직도 둘 사이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감염자들의 불구대천의 원수.
당연하지만, 알케미스트는 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그녀가 당당하게 싫어한다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인 것이다.
갑작스레 뒤통수에 느껴지는 - 그닥 강렬하지는 않았던 - 신호에 타케미카즈치는 순간적으로 손에 든 것을 놓치고 말았다. 조금 남아있는 내용물을 공중에 흩뿌리며 자유낙하던 유리잔은 이내 외마디 파열음을 남기며 수천 개의 조각이 되어 날아갔다. 그녀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아야야…. 아무튼, 너! 그것도 폭력이야, 어? 언어폭력 몰라 언어폭력?!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라도 해 줄까?!"
"너…?"
"남의 각오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말이야! 그리고 나는 명실방부한 연금술사고, 부업 의사고! 그냠 음주가 좀 취미일 뿐이거든?!"
"지금 뭘…."
"애초에 니가 어떻게 비서냐! 응?! 딱히 이지적이지도 세련되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타케미카즈치가 뭐라 말하기 전에, 알케미스트는 속마음을 폭포수처럼 내뱉었다. 이건 아까의 복수다. 혼자서 멋대로 떠들었으니, 이번엔 이 쪽이 멋대로 떠든 것이다.
밤과 낮의 경계에 위치하여, 그렇기 때문에 저녁(夕)의 태양(陽)이라 불리우는 시간. 죽기 직전에 가장 화려한 것은 자연조차도 예외가 아니라는 듯, 비평선 끝자락에 두 발을 걸친 태양은 온 하늘을 붉게 불태우며 조용하지만 아름답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달은 이미 반대편 하늘에 희미하면서도 드높게 떠올라 있어, 천구(天球)가 완전히 뒤집어질 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알케미스트는 겨우겨우 타케미카즈치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사람한테 전기를 그렇게 거리낌 없이 쏴대다니…, 분명 전에 여러번 해 봤을 거야…."
아직 보진 못했으나, 분명 벌겋게 부어올라 있을 귀는 아직도 만지면 이상한 감각이 든다. 그러고보면 괴롭혀지면서 이상한 소리를 제법 냈던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른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다. 지금으로선 그저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랄 수 밖에.
탁, 탁. 규칙적인 소리가 복도를 채운다. 발소리라기엔 지나치게 가볍고, 또한 선명한 소리. 옛날에 선생님이 지시봉으로 화이트보드를 두드릴 때 비슷한 소리가 났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가 알기로,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은 한 명 뿐이다.
"마리?"
눈을 감은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을 감고, 그 대신이라는 듯 한 손에 지팡이를 든 소녀.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윤기 나는 금발과 고급스러운 초록색의 원피스를 본다면, 어느 귀족집이나 부호의 따님으로서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알케미스트는 안다.
천수국을 닮은 소녀의 코드네임은 마리골드. 가족이나 친지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한, 그녀와 똑같은 델타의 오퍼레이터다.
"응? 알케─"
익숙한 목소리에 소녀는 알고 있는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말을 끝맺기 전에, 소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었다.
메리의 방은 단적으로 말해 살풍경했다. 기본적으로 달려있는 전등. 잠을 자기 위한 침대, 혹시 모르니 놔둔 책상과 의자. 그마저도 메리에겐 전등은 딱히 필요가 없는 듯 보였다. 창문 너머의 황혼은 결코 밝지 않았건만, 소녀는 개의치 않고 들어가 침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응. 누추하지만 들어와."
"어, 실례할게?"
알케미스트는 의자를 끌고 와 메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으음. 그래서, 무슨 일이야? 메리."
초대를 받아서 오긴 왔지만, 역시 이런 방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녀는 평소에 항상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또 언제나 '이브'랑 함께 있으니 별다른 가구를 들여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 거겠지. 그 점에 입각해 알케미스트는 왜 자신을 불렀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고, 그 말을 들은 메리는 가볍게 투덜거렸다.
"실은 말이야, 이브가 맨날 바쁘다면서 메리랑은 놀아주지 않는 거 있지. 으응. 그치만 이브, 최근엔 계속 서류업무가 바쁘다면서 필요할 때가 아니면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서류업무…."
이브는, 아마 메리의 또 다른 인격으로 추정되는 존재다. 광석병의 영향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것인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메리에게 있어 둘도 없는 친구이자.
"공무-? 으응, 메리는 그런 어려운 말 몰라. 그치만 이브, 임무 때가 아니면 먼저 말도 잘 안 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