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원한 아기 판다 푸바오는 중국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당당하게 시작하였다. 얼마 전 푸바오를 사랑하는 두 명의 팬이 필자를 찾아왔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중국의 푸바오를 눈물로 걱정하며 물었다. "우리가 푸바오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라고. 그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필자 또한 숨을 고르며 진심을 담아 답해주었다. "진짜로 열악한 환경에 있는 동물들을 찾아서 도움을 주세요." 그리고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과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하셔야 한다고. 그것이 푸바오를 사랑하고 통했던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다행히 두 분의 팬은 해답을 얻으신 듯 울음을 멈추고 돌아갔다.
야생동물을 보살피는 일을 하며, 특히 바오 가족의 세계관 중심에 있으면서 때때로 변화하는 상황마다 나는 혹은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늘 생각한다. 필자 또한 푸바오를 가장 사랑하는 팬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푸바오를 사랑하고 푸바오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판다를 열광적으로 좋아함과 동시에 더 많은 멸종위기 동물에 대한 정보도 분명히 함께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좋아하는 한 판다의 넘치는 행복만을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야생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바오 가족에 대한 '팬-심'을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올바른 다음 과제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한 판다만의 행복을 계속 고집한다면, 아쉽게도 아름다워야 할 우리의 행복한 이야기는 결코 해피엔딩이 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진심으로 바란다. 판다를 좋아하는 마음이 확장되고 발전하여 자연과 사회에 이로운 행동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마음과 감정이 먼저 많아지기를. 올바른 행동 실천은 자연스럽게 그다음이 될 것이다.
떠오르는 생각을 관찰하는 것도 사색입니다. 그것은 명상이 아니고 망상이라고 그래요.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명상인데, 실제로 명상을 해보면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명상을 하지 않을 때보다 생각이 더 많이 떠올라요. 그럴 때 그런 생각에 구애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독서를 할 때 고요한 곳에 가서 독서를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시끄러운 곳에서도 독서에 집중을 하면 차 소리나 바깥소리 등이 안 들립니다. 그런 소리가 없어서 안 들리는 게 아니라 소리가 있는데도 들리지 않아요. 그것처럼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 알아차림에 집중하게 되면 머릿속에서는 엄마 생각이 떠올랐다가, 커피 생각이 떠올랐다가, 여자 생각이 떠올랐다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그에 따른 스토리를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망상이란 생각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엄마와 어디 어디 갔었지’, ‘내가 그때 이렇게 할 걸’ 하고 생각하는 것은 집중을 놓치고 생각에 끌려간 것입니다. 명상에서는 이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에 내가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생각을 따라가서 스토리를 만들지는 않아야 합니다. 꼬리를 물고 따라가지 말아야 해요. 생각이 떠오르든지 말든지, 바깥에 차 소리가 들리든지 말든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든지 말든지, 어떤 것에도 상관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함 소리가 들릴 때 ‘저 사람이 왜 저러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저렇게 고함을 치고 그래’ 이렇게 스토리를 만들면 망상이 됩니다. 고함 소리는 그저 들릴 뿐 내가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숨이 들어올 때 숨이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는 숨이 나가는 줄 알게 됩니다. 화두를 참구 할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들면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만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명상을 할 때 이런저런 생각은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나 생각을 이어가는 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생각을 이어가는 것은 망상이고 사색입니다. 여러분들이 명상할 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기울이고 있으면 앉아서 골똘히 생각하는 거예요. ‘방금 스님이 뭐라고 했지?’ 하면서 법륜 스님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부처님은 무아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하면서 부처님을 생각해도 망상입니다. 앉아서 법륜 스님의 건강을 걱정해도 그것은 망상을 피우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술 마시고 자극적이고 기름진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이 평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은 밥을 먹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땀 흘려 일하고, 저녁에 돌아와 씻고 편히 자는 게 평범한 일상이에요. 5,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요즘 와서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일 뿐입니다. 80억 인구 중에 질문자가 기대하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에 속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평범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특별한 삶을 사는 겁니다.
피부에 아토피가 생기는 건 체질입니다. 전생에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내린 벌도 아니에요. 복숭아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생기는 사람이 있고,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어서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다른 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으면 복숭아를 안 먹으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복숭아를 먹을 수 있는데 왜 나는 못 먹지'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복숭아를 먹을 수 있지만 나는 못 먹는 게 자연스러움입니다. 산에 가면 야생 열매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있고 못 먹는 열매가 있는 것처럼, 피부에 아토피가 난다는 것은 복숭아를 먹으면 알레르기가 생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동물은 먹어도 괜찮은 열매가 사람이 먹으면 몸에서 독이 되는 음식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음식은 안 먹으면 되지 무슨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꼭 복숭아를 먹을 수 있어야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에요. 체질에 안 맞는 건 안 먹으면 됩니다.
질문자도 체질에 맞게 살면 돼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어도 약간의 부작용만 있지, 증상이 심하지 않은데, 아토피가 있는 사람은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저도 냉기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겨울만 되면 피부가 가렵고 피가 날 정도로 힘듭니다. 추운 곳에 있다가 더운 곳으로 오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현상이 있어요. 이런 증상은 체질이기 때문에 특별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겨울이 올 때마다 가려우면 긁으며 살든지, 식사나 생활을 더 조심해서 하면 됩니다. 조금이라도 가려움을 유발할 만한 음식이 있으면 겨울에는 안 먹어야 해요. 그리고 항상 피부에 냉기가 닿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체질에 맞춰서 생활하면 돼요.
봄에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콧물이 줄줄 흐른다면, 미리 대비하면 됩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면 약을 먹든지, 마스크를 쓰고 살든지, 그냥 코를 흘리고 살든지, 결정해서 지금 조건에 맞게 대비를 해서 살면 됩니다. 더우면 옷을 적게 입고, 추우면 옷을 더 입으면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옷을 겹겹이 입고 다니는데 나만 왜 얇게 입고 다녀야 합니까’ 또는 ‘다른 사람들은 다 옷을 가볍게 입고 다니는데 나는 왜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합니까’ 하는 얘기는 너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자기 체질에 맞게 사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럽고 평범한 삶이에요.
육체적으로 아무리 건강해도 한 끼 음식을 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몸에 아토피가 좀 있다고 그렇게 큰일로 여기는 것은 너무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 아닐까요. 오히려 ‘나는 체질이 자연 친화적인 사람이구나. 그래서 인공적인 것과는 좀 맞지 않네’ 이런 관점을 가져보세요. 가능하면 자연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생활하고, 거기에서 뭔가 아이디어를 내어서 수입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살면 됩니다.
자기 나이, 자기 건강, 자기 상태에 맞게끔 살아가는 게 평범한 삶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병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병을 조금씩 안고 살면서 예방할 수 있는 일은 예방하는 겁니다. 어떤 음식이 먹고 싶더라도 그걸 먹고 내가 가려워진다면 ‘이 음식은 다른 사람에게는 맛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독이구나’ 하고 그 음식을 안 먹어야 합니다. 관점을 그렇게 가지고 살아가면 지금 당장 아무 문제가 없어요. 눈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자꾸 남을 쳐다보면서 ‘저 사람은 안 가려운데 왜 나만 가려운가?’ 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질문자는 기후 위기 시대에 친환경적인 자연 생태 속에서 생채식을 하며 살아가는 미래 지향적 삶을 체질적으로 타고났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은 식단 조절이나 운동을 안 해도 살만하다는 방증입니다. 피부가 가렵다고 해도 견딜 만한가 봅니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 보여도 ‘여기에 독이 들었다.’ 하는 말을 듣고 ‘그래도 조금만 먹어보면 안 될까?’ 하는 사람은 없어요. 종류와 색깔과 맛에 관계없이 독이 들었다 하면 그걸로 딱 끝이 나야 합니다. 운동을 해야 몸이 좋아진다고 하면 운동을 하는 것이고, 생채식을 해야 한다면 생채식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되면 그냥 안 되는 대로 살면 됩니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면 가르쳐 줄 수 있지만, 질문자 본인이 이렇게 하면 좋은 줄 알면서도 안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어요. 하느님이 오시고 부처님이 오셔도 해결이 안 됩니다. 하기 싫은데 어떡합니까?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돼요. 안 하면 어떻게 되냐고요? 죽든지 계속 아프든지 하겠지요. 그럼 안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기 싫은 마음에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기 싫은 게 뭐가 중요해요. 이걸 하는 게 좋다면 그냥 하는 것이고, 그래도 하기 싫으면 그냥 고통을 겪는 겁니다. 거기에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욕구를 알아차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욕구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알아차린 후에 뭘 어떻게 한다는 건 의도가 있는 겁니다. ‘먹어야 한다’, ‘먹지 말아야 한다’, ‘뭘 해야 한다’ 하는 건 다 의도가 들어간 것입니다. 어떤 의도를 갖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것은 힘이 안 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바다를 보면서 ‘파도가 들어오는구나’, ‘파도가 나가는구나’, ‘햇빛이 났구나’, ‘구름이 흐르는구나’ 이렇게만 하지 ‘구름을 멈춰야 한다’, ‘햇빛이 나와야 한다’ 이러지는 않잖아요. 그것처럼 ‘지금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먹어야지’ 이러면 욕구를 따라가게 되고, ‘참아야지’ 이러면 욕구에 저항하게 되는데, 둘 다 자신의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의도를 갖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먹고 싶다고 먹는 것과 먹고 싶어도 참는 것은 정 반대 같은데, 둘 다 공통점은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욕구를 따르고자 하는 의도가 있고, 다른 하나는 욕구에 저항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욕구를 따르면 과보를 받게 되고, 욕구에 저항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기 때문에 결국 이래도 문제이고 저래도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면 기분이 좋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즉, 고락(苦樂)을 계속 겪게 됩니다.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린 후 그걸 따라서 ‘먹어야지’ 또는 ‘안 먹어야지’ 하는 의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먹지 않으니까 과보를 받지 않게 되고, 저항하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알아차림이 지속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다가 ‘먹어야지’ 하거나 ‘그래도 안 먹어야지’ 이렇게 되기 때문에 결국 참는 게 됩니다. 다만 ‘먹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먹고 싶어 할 때마다 질문자가 참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과 참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을 구분하기 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결국은 안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이 현실에서는 같기 때문에 구분이 좀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참는 것은 의도가 있어서 에너지가 들어가니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알아차림은 그냥 ‘먹고 싶어 하는구나’, ‘저 사람이 길을 가는구나’, ‘저 사람은 빨간 옷을 입었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들지 않습니다. ‘나도 저 옷을 입어 봐야지’라든지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지?’ 이러면 에너지가 드는데,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들지 않습니다.
질문자는 처음에 ‘그렇구나’ 하고 잘 알아차려 놓고는 그다음에 ‘안 먹어야지’ 하기 때문에 참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하고는 ‘먹어야지’ 하면서 욕구를 따르게 되니까 알아차림을 유지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냥 다만 ‘먹고 싶어 하는구나’,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알아차림은 한 번만 하는 게 아니고, 찰나 찰나를 계속 알아차려야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알아차렸지만, 두 번째에 놓치면 바로 욕구를 따라가거나 저항하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란 찰나를 말합니다. 그 찰나 찰나에 알아차림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지켜본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장마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인접국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하계 기후의 특성으로, 이 때문에 장마를 '제5의 계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반도의 경우 장마전선이 공급하는 강수는 전체 강수량의 약 30% 이상을 차지하여, 한반도에 위치한 대부분의 하천은 매우 높은 하상계수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