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이 없어졌어요. 그전에는 내가 이만큼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많았고, 어떤 장면에선 내가 연기적으로 돋보이도록, 상황을 뚫고 나와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근데 제대를 기점으로 전체 안에서 어우러지는 법을 알게 됐죠. 방송 환경이라는 게 어떤 한 개인의 독보적 영향력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공간이니까, 결국은 서로 배려하고 어우러질 때 상대도 나도 빛날 수 있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덜어냈어요. 일 외의 부분에서 제가 좀 부정적으로 상황을 직면하는 태도가 많았거든요. 생각이 많은 편이라 경우의 수도 굉장히 많이 띄워두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면에서 심플하게 접근해요.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되도록이면 깊이 파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어떤 걸 너무 잘하려고 하면, 거기에 갇혀서 다른 걸 놓치더라고요. 그럼 또 후회가 늘고, 그 마음이 오히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독이 되더군요.
저는 현장에 충실한 편인 것 같아요. 촬영장을 벗어난 후의 이불 킥은 제 정신 건강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니까. 하하. 그 많은 스태프를 다시 모아서 재촬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 보니 현장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더블 체크하는 편이에요. 정작 방송된 후에는 잘 보지 않으려고 해요. 저 신에서 왜 그랬을까, 그 감정이 아닌데… 단점만 찾게 되거든요. 이불 킥 연장전 들어가봐야 감정만 소모될 뿐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지금까지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모험을 즐기려고 노력했죠. 하하. 앞으로는 모험하는 쪽에 더 힘을 실어보려고 해요. 내 안의 저항 정신을 깨우려고 노력하는 중이고요. 언제나 좋은 결과를 손에 쥘 수는 없잖아요. 그런 행운이 언제까지 저를 감싸주기도 어려울 테고. 지금까지는 선택과 결과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 주기를 벗어나볼까 싶기도 해요. 욕심도 버리고 양보하는 법도 알게 되니 시야가 넓어지더라고요.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루어지면 다행한 일이에요.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필요하다면 다시 노력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두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다 좋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인생을 길게 살아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결과까지 꼭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었다고 해서 결과까지 꼭 나쁘다고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을 놓치면 감정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불편한 마음을 알아차렸는데도 그 마음이 진정이 안 됩니다’ 라는 말에는 이미 ‘화를 진정시켜야 된다’는 전제가 있는 거예요. 의도하거나 의지를 내면 이미 마음이 긴장하게 됩니다. 또 실패가 따릅니다. 감정을 억제해야 되는데 억제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후회하게 됩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편안한 가운데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화가 일어나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으면 ‘내가 화를 냈구나’ 하고 아는 거예요.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가 불편하면 ‘부모님과 대화하니까 내 마음이 불편하구나’ 하고 자각하면 됩니다. 만약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미 화를 냈다면 상대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만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알아차린 후 다음 단계는 없습니다. 굳이 다음 단계가 있다면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는 다음 단계가 있어요. 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밖으로 화를 내게 됩니다. 화를 냈을 때는 화를 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상대에게 사과를 해야해요.
더 자세히 말하면 먼저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을 놓치면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미 감정이 일어났다면 그 때는 감정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행동을 합니다. 이미 행동을 했다면 반성을 하고 참회해야합니다. 타인에게 감정대로 행동해서 피해를 줬다면 참회를 해야해요.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니니까 참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이 일어났다면 ‘내가 느낌을 놓쳤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밖으로 행동까지 했다면 ‘아, 내가 감정을 놓쳤구나’, ‘마음을 놓쳤구나’ 이렇게 알면 됩니다. 이렇게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붙잡고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바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컵의 물을 반쯤 쏟았어요. ‘안 넘어졌으면 안 쏟았을 거 아니야?’ 하거나 ‘절반이나 쏟다니! 하고 후회한다고 해서 쏟아진 물이 다시 담기지는 않습니다. 절반을 쏟았으면 ‘넘어졌는데 그래도 절반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어난 일은 똑같지만 나한테 더 좋습니다.
박사가 되고 싶다, 공무원이 되고 싶다, 정치인이 되고 싶다, 기업인이 되고 싶다, 이런 목표를 갖는다고 해서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표는 다 이루어질 수 없어요. 목표는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목표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항상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게 꼭 나쁜 결과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이치를 알면 목표가 이루어지면 다행이고, 안 이루어지면 가볍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목표를 이루고 싶으면 한 번 더 시도해 보면 되지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꼭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질 수 없는데 다 이루어져야 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괴로움은 원하는 게 있어서 생긴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