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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m18GD4M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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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3 (파란날) 22: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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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3 (파란날) 22:59:32

"그래서, 이것이... 밀레니엄에서 제작하여 배송한 '발전기'...라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비서실장님! 이것이 바로, 우리 밀레니엄 학원의 엔지니어부에서 특수 용도로 제작한 다목적 멀티충전 발전기입니다!"

붉은겨울 학원 내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위대하신 체리노님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진 붉은 수염 혁명광장.

오늘 아침, 혁명광장에 위치한 체리노님의 동상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상만큼 거대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의 기계.. 같은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외견만 둘러보았을 때는, 마치 카이저 전자에서 새롭게 내놓은 에어컨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었지요.

"어째서.. 밀레니엄 학원에서 이런 기계를 제작하여 배송한건가요? 우리 붉은겨울 학원은 제작 의뢰를 부탁한 적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교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하! 그 부분이 궁금하셨군요!"

제 질문을 듣자마자 눈을 빛내며 안경을 치켜세운 노란 머릿결의 학생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울 대비를 위해 최근 키보토스 전역의 기상 예보를 종합해본 결과, 평소보다 훨씬 강한 한파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거기에 며칠 전, 공용 기숙사의 보일러가 또 다시 고장났다는 제보를 받은 선생님이 걱정이 되신다는 이유로 붉은겨울 학원의 보일러를 보수해달라는 의뢰를 하셨지요!"

추측은 했었지만. 역시 샬레의 선생님이 부탁하신 것이군요. 하지만, 그리 걱정하실 문제는 아니었지만 말이죠.

저저번 쿠데타의 여파로 망가졌던 공용 기숙사의 보일러는 용역부의 초과근무달성을 통하여 달성하려 했습니다만..

생각해보니 가벼운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잠깐, 그런데 선생님은 보수 작업을 의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거대한 기계가 배송된거죠?

"그 눈빛은! 마치 '보수 작업을 의뢰받았는데 어째서 다목적 멀티충전 발전기라는 역작이 탄생된 것인지?'라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이군요! 후후. 그렇게 칭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엔지니어부는 붉은겨울 학원의 보일러 보수를 위해 여러방면으로 설계를 진행했습니다만, 최근 다가오는 강력한 한파를 대비하기에는

기존의 보일러 시설을 보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계산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주어진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는게 저희 엔지니어들의 사명! 비록 더 많은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덜컹-!

"어라, 누군가 손님이라도 방문하신-"

"...너희들, 이 청구서는 뭘까나...?"

"으, 으아아!! 냉혹한 계산의 회계가....!"

무언가 부산스런 소리와 함께, 학생의 모습을 송출해주던 홀로그램이 꺼져버렸습니다. 누군가 중요한 손님이라도 마중나가신 것 같네요.

"즉, 요약하자면 평소보다 더 추워질 겨울에 대비해서 밀레니엄 엔지니어부가 보일러 수리 대신 발전기를 완성, 붉은겨울 학원까지 배송했다는 거군요.

과연. 밀레니엄 학원은 이런 거대하고도 최신기술이 들어간 발전기를 그저 다른 학원을 도와주기 위하여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학원..

3대 대형 학원에 들어갈 만한 포용력을 증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붉은겨울 학원에서도 밀레니엄에 대한 교류를 더욱 진지하게 고려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추진하고 계신 쳬론카 초콜릿의 홍보 활동을 확대하는 방안도...

"으응? 토모에. 이 에어컨처럼 생긴 거대한 기계는 뭔가?"

"아. 서기장님. 이 것은.."

체리노 회장님에게는 조금 간단하게 설명드리는게 좋겠네요. D.U.를 중심으로 밀레니엄 학원이 붉은겨울 학원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으니깐..

"...서방의 학원에서 보낸, 붉은겨울과의 친교를 위한 선물입니다."

****

체리노 회장님께서는 서방의 학원에서 보낸 엄청난 크기의 다용도 발전기를 확인하신 후, 서방의 학원에 대한 다수의 칭찬과

벌써 드높아진 붉은겨울의 위상을 자랑스러워 하시더니 금방 사무국 본관으로 복귀하셨습니다.

저렇게 들뜨신 것을 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귀여운 체리노 회장님의 모습을 잔뜩 볼 수 있을거란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군요. 그러고 보니,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작동법을 듣지 못했군요. 이 발전기."

밀레니엄의 학원과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겨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아무리 발전기가 거대하고 여러 기능을 담고있다고 한들, 작동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이 발전기는 발전기가 아니라 체리노 회장님의 동상을 가려버리는 흉물로밖에...

"-라고 생각한 당신! 지금 하단에 보이시는 녹색 버튼을 눌러주세요!"

"어라, 밀레니엄의 엔지니어부...? 어디서 목소리가 나오는건가요? 아까같은 홀로그램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일단 들려온 목소리대로 녹색 버튼을 눌러볼까요.

꾸욱.

버튼을 누르자마자, 버튼 아래의 공간이 덜컹 하며 열렸습니다. 그 안에는 두꺼운 메뉴얼처럼 보이는 책과, 방금 전 밀레니엄 소속의 학생의 얼굴 부분만 송출되고 있는 작은 홀로그램이 보입니다.

"설명하죠! 이 기능은 갑작스런 연락 두절과 같은 돌발 상황으로 인해 사용법을 전달해드리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한 기능으로, 간단한 수준으로 구현된 AI가

주변 상황을 분석하여 최적의 구동 타이밍을 찾아낸 다음 녹음된 음성을 재생시키는 방식으로-"

"흠, 흠. 엔지니어부 소속의... 혹시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편하게 코토리라고 불러주세요!"

"코토리 양. 당신의 설명은 이 기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히 필요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학원에서 요구하는 직무를 맡고있는 엄연한 사무국의 일원.

언제까지나 설명을 듣고 있다가는 업무 진행에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ㄴ, 네. 그.. 그렇지요...?"

"그런 의미에서, 발전기에 대한 설명을 빠르고 간단하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후 다른 학생들에게 작동법을 전달할 때에도 복잡하게 긴 설명 대신 짧고 간편한 설명이 보다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말이죠."

"알겠습니다아.."

아까보다 기운이 없어진 코토리 양은 침울한 목소리로 짧고 간결하게 발전기에 대한 설명과 조정법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도 지금 당장은 설명을 전부 암기하고 있을 시간은 없으니, 두꺼운 메뉴얼을 펼쳐 설명을 꼼꼼히 옮겨 적었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보더라도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요.

"...설명 감사합니다, 코토리 양. 덕분에.. 어라?"

필기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홀로그램은 사라져있었습니다. 배터리라도 다 된 모양일까요?

어라. 손목시계를 보아하니 어느새 등교시간이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분명 일찍 출발했는데도,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네요.

저는 메뉴얼을 원래 있던 곳으로 조심스럽게 넣어둔 뒤, 사무국 본관으로 약간은 빠르게 걸어갔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거든요.

체리노 회장님이 붉은겨울 학원 바깥으로 외부 업무를 나가시는 중요한 날입니다.

물론, 체리노 회장님의 외부 업무를 위한 짐을 싸는 영광스러운 일도 저의 몫이지요. 출발 시간 전까지 빠르게 짐을 싸려면, 서둘러야겠습니다.

*****

"어디보자... 푹신한 배게. 확인. 외부 학원에서도 체리노 회장님의 위대한 업적을 전파하기 위한 홍보물도 확인. 그리고..."

이쯤 되면 급양부에서 연락이 올때가 되었을텐데.. 아. 왔네요.

"네. 토모에입니다. 급양부장, 부탁드린 푸딩은... 네. 문제없이 준비되었다니 다행입니다. 10분 안에 찾으러 가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떠나는 체리노 회장님을 위한 푸딩 21개도 문제 없이 준비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익숙한 붉은겨울 학원을 벗어나 대업을 이루시려면, 하루 3푸딩 정도는 당연히 챙겨드려야죠. 암.

"그리고... 쳬론카 12개입 상자도 확인. 맞다. 만일을 대비한 예비용 수염도..."

이 정도면 체리노 회장님도 걱정 없이 외부 활동을 진행할 수 있겠죠. 가방을 얼추 갈무리 하고 급양부에서 받아온 푸딩도 소중하게 포장하여 마무리 한 뒤 다시금 혁명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수행원과 함께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체리노 회장님은, 저를 보시고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비서실장. 짐은 준비 되었는가?"

"네. 서기장님.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음. 훌륭하군, 비서실장! 나중에 돌아오면 특별 훈장을 수여하겠네!"

"영광입니다. 서기장님."

몰래 주머니에 핫팩을 넣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체리노 회장님은, 수행원들과 함께 차를 타고 학원 바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보지 못할테니, 마지막으로 길게 시선에 담아두는 편이 좋겠지요.

"일주일... 이네요."

체리노 회장님이 없는 일주일이지만, 회장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나마 걱정되는 것은, 또 다시 어디선가 준비되고 있을 쿠데타와 평소보다 혹독하게 들이닥칠 한파지만.. 우리 붉은겨울 학원은 어지간한 추위로는 꿈적도 하지 않을테니 실질적인 걱정은 하나 뿐입니다.

정말로, 이 발전기를 가동시켜야 할 만큼 엄청난 추위가 몰아치지 않는 이상... 말이죠.

하지만 보통 최악의 상황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기껏해야 기숙사의 동파 정도가 일어날 정도의 혹한이겠죠.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요?

2 이름 없음 (.t7ky1YOj.)

2024-02-10 (파란날) 23:54:46


별 일이 있었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떠난 후, 3시간이 지난 지금. 조금씩 추워지던 날씨는 어느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첫 눈이 온다는 사실 자체는 놀라운 점은 아니지만, 그 시기가 평년보다 3주 일찍 온다는 것은..

밀레니엄 학원에서 평소보다 혹독한 한파가 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회장님이 없을 이런 취약한 때를 노리고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눈이 많이 오는 정도로만 끝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겠지요. 대자연은 우리 붉은겨울 학원이 숙청할 수 없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

슬슬 사무국의 일도 거의 처리해가던 참에 오늘은 이쯤 하고, 기상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겠습니다.

이 혹한이 어느정도로, 얼마나 길게 갈지부터 알아두지 못하면 기본적인 계획도..

따르르르릉-

저 수화기는 분명 사무국 직통선을 연결한 쪽이었죠. 직통선을 알고있는 부서와 학생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벌써 무슨 일이 생긴걸까요..?

"네. 붉은겨울 사무국..."

"비서실장님!! 큰일입니다!"

"잠시 진정하고 말씀해주세요. 번호를 보니 붉은겨울 수염공항인데.. 공항에 무슨 일이 있나요?"

"폭설... 몇 시간 전부터 갑작스레 폭설이 내리기 시작해서..

방금 전에.. 총학생회로부터 공항 운행의 전면 중단을 통보받았습니다."

****

직통선의 연결이 끊어진 직후, 총학생회에게 연락을 해보려고 했으나 그것 마저도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폭설로 인해서 신호가 방해받고 있는 것이겠죠.

....아니면, 저번 쿠데타로 인해 망가진 전파탑의 수리가 아직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거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직접 공항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빠르게 의복을 정돈하고, 모자를 쓰고나서 사무국을 나서자 매서운 눈보라가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분명 전화가 오기 전에는 조금 거센 눈발 수준이었는데..

확실히 이상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위험합니다.

이 상태로 간다면,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붉은겨울 학원은 눈 속에 파묻히고 말것 입니다.

공항으로 향하기 전에, 핸드폰을 꺼내 붉은겨울 수염공항을 담당하고 있는 학생에게 모모톡을 남겨놔야 겠지요.

[지금 가겠습니다. 총학생회와의 연락은 되고 있나요?]

모모톡을 보내도, 읽었다는 표시가 뜨지 않습니다. 분명 바쁜 상황이겠죠.

신호가 전달되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와. 이거 봐! 벌써 눈이 오고있어!"

"눈이네. 그런데, 너무 많이 오고있지 않아? 방금 전만 해도 조금 많이 오는 수준이었는데...

이 정도면 잠깐 교실에 머물렀다가 기숙사로 가는게 낫지 않아?"

"이 정도 눈보라도 버티지 못하면 붉은겨울 출신이라고 말할수도 없다구! 자자. 얼른 가자!"

사무국 근처에 주차되어 있을 체리노 회장님 전용 차량을 찾으러 달려가는 도중에 여러 학생들을 마주쳤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타고 가신 차량은 외부 학원 방문용 특수 차량이었으니, 분명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눈보라가 더 심해질 수도 말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건 공항을 확인하고 나서도 할 수 있을 거에요. 아마도.

학생들을 지나쳐 체리노 회장님의 전용 주차 구역에 고이 주차되어 있는 차를 발견한 저는, 금방 시동을 걸고 공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저번에 회장님이 늦잠을 자서 지각할 위기에 처했을 때, 이미 이 차량의 운전권한을 양도 받았으니... 나중에 돌아오셨을 때 혼나진 않을거에요.

다행히도 아직은 운전하는 게 방해가 될 정도로 엄청난 폭설은 아니지만, 아까부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집니다.

후우. 라디오라도 들으면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겠어요. 어디, 버튼이.. 아. 여기 있었네요.

[ ---대한 체리노 회장님이 외부 학원으로의 여정을 떠난 지금, 우리 붉은--- 도 회장님의 행보에 걸맞는 모범적인 학업 성취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

<붉은 곰>의 방송이 잡혔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송 중 하나이지요. 볼륨을 살짝만 더..

[ ---음으로 넘어가서, 오늘의 기상 예보--- 날씨--- 예상보다 낮은-- ]

볼륨을 조절함과 동시에, 들려오던 방송의 잡음이 더더욱 심해집니다. 게다가, 방금은 날씨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었는데..

공항으로 가까워지면서 전파탑에서 멀어져서 그런 것일까요? 아까부터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점점 희미해져가는 라디오의 목소리와 대비되듯, 차량의 창 밖으로는 붉은겨울 학원의 자랑 중 하나. 붉은겨울 수염공항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평소처럼 날씨가 맑은 날에는 수염공항의 혁명적인 광경을 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급하게 공항의 통제실 근처에 차를 세운 저는 서둘러 통제실로 향하는 계단의 문을 열었습니다.

****

벌컥-

"...비, 비서실장님! 오셨습니까!"

방금 전까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공항의 관제부원은 저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경례를 취했습니다.

"우선 상황 보고부터 부탁드립니다. 총학생회의 통보가... 사실인건가요?"

"네. 비서실장님. 통신이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받은 회신에 따르면... 붉은겨울로 향하는 모든 비행편을 회항시킨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저희도 추가적인 교신을 시도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습니다. 아예 전달이 되지 않은 걸지도.."

"결국 총학과의 연결은 끊겨버린거군요. 하아.."

머리가 약간 지끈거립니다. 붉은겨울 학원의 자랑인 수염공항을 이렇게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잠깐만요.

회항이라.. 회항.... 설마.

"....관제부원. 회항의 결정은 총학생회의 규칙에 따른 것인가요? 아니면, 붉은겨울 수염공항의 내규에 따른 것인가요?"

"ㄴ, 네. 잠시만요... 아. 우리 붉은겨울 수염공항의 내규에 의거하여 회항시켰다고 전달 받았습니다. 비서실장님."

"공항 내규에... 따랐다는 것은..."

붉은겨울 수염공항은 체리노 회장님의 이름과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항상 비행편의 정시운영에 대한 신뢰를 목숨같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신뢰를 깰 만큼의 긴급상황이나 천재지변의 사항의 경우, 항공기를 회항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는 내규를 어쩔 수 없이 총학의 공항 관련 규정에 따라 추가했었지요.

즉, 총학이 수염공항의 내규에 따라 회항을 지시했다는 것은...

"천재지변...."

문득 고개를 든 저는, 통유리로 이루어진 통제실의 전방을 바라보았습니다.

평소라면, 넓디 넓은 수염공항의 전경과 여러 항공기가 착륙하고 있는 광경이 보여야 했지만.

지금은. 그저 하얗고 하얀.... 도화지보다도 하얗게 보이는, 거친 눈보라로 이루어진 백색의 벽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회장님...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저의 공허한 한 마디는, 전달되지도 못한 채 너무나 하얀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

40분 동안 실시한 외부 조사 활동의 결론은 생각보다 절망적이었습니다.

이건, 조금 심한 한파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아까 목격한 눈보라로 이루어진 하얀색 벽은 마치, 그 누구도 지나가게 할 수 없다는 듯이..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는 순간, 엄청난 속력의 바람과 눈보라로 인해 다시 안쪽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몇 명은 바람에 휩쓸려 튕겨져 나가기까지 했고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항이 붉은겨울 학원 내에서도 외곽 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 즉, 대다수의 학원 시설은 하얀 벽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는겁니다.

저 하얀 벽도 다가오려는 낌새가 없다는 점도 그나마 밝은 소식이지만, 이래서야...

"영락없이 갇힌 모양새군요. 그것도... 눈보라로 이루어진 장벽으로."

체리노 회장님을 볼 면목이 없어집니다. 회장님이 학원을 떠나계시는 일주일 동안, 자랑스러운 붉은겨울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이끌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저기, 비서실장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관제부원이 눈으로 가득 찬 장갑을 벗어내 안 쪽에 차있는 눈을 긁어내며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네요. 이런 일은 저의 예상을 벗어난 천재지변이지만...

이런 천재지변도 보란듯이 극복해 보이는 것이, 우리 붉은겨울 학원이 체리노 회장님께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부터 해야할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공항을 담당하시는 모든 관제부원들은, 이 시간부로 공항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켜주세요."

"정지.. 말씀이십니까?"

"네. 그리고 모두 각자의 짐을 챙긴 뒤, 20분 안에 통제실 앞의 체리노 회장님의 전용 차량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붉은겨울 학원으로 돌아갈테니깐요."

"네. 알겠습니다!"

제 말을 들은 관제부원들이 모두 일사분란하게 흩어집니다. 저도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겠죠. 서둘러 차량을 준비시켜야겠습니다.

몇몇 부원들이 통제실을 오가는 계단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동안, 저는 체리노 회장님의 전용차량을 탑승이 편하도록 보다 가까운 위치에 주차시켰습니다.

붉은겨울 학원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며 커다란 리무진을 사야한다고 억지를 부리시던 회장님의 혜안이 이런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군요. 역시, 체리노 회장님..

"관제부원 전원, 탑승 완료했습니다. 비서실장님!"

핫.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동안에 공항의 관제부원 모두가 차량에 탑승해있었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관제부원.

이제, 붉은겨울 학원으로 전속력으로 돌아갈테니 꽉 붙잡으세요!"

더 눈이 쌓여 학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전에, 저는 전속력으로 엑셀을 밟아 공항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학원에 도착하고 나면... 가장 먼저 발전기를 확인해봐야 겠습니다. 어쩌면 이 상황을 해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3 이름 없음 (.t7ky1YOj.)

2024-02-10 (파란날) 23:59:12


체리노 회장님의 위대한 동상 앞에 자리잡은 거대한 발전기.

그 주변으로 사무국의 친위대원들과 용역부원들, 도서부원들을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모여 커다란 발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그.. 말랭이 학원에서 보낸 발전기라는 거야?"

"말랭이가 아니라 밀레니엄 학원이거든. 너 발전기가 뭔지도 모르지?"

"그거나 그거나! 그리고 발전기가 뭔지는 나도 알아!"

"그런데 발전기면... 연료가 있어야 되는거잖아요. 혹시.. 도서관의 귀중한 도서들을 땔감으로 쓴다던가.."

"그래서 우리가 이 추운 날씨에도 감시를 하러 나온거긴 한데... 으으, 춥다.."

"언제 해결책을 내놓을건가! 이러다가 오늘 배급받은 푸딩까지 얼어붙겠다!"

"이러다가 다죽는다! 어떻게든 해결해라!"

"해결해라! 해결해라!"

"어이, 거기! 확성기 내려놓지 못해!"

...잠시 수염공항의 상황을 확인하고 공항의 관제부원들을 학원으로 복귀시키는 동안, 날씨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고작해야 몇 시간만에, 조금씩 내리던 자그만한 함박눈에서 지금은 건너편에 있는 건물마저 윤곽선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눈폭풍으로 나빠졌으니 말이죠.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잠깐의 폭풍으로 인식했던 학생들도, 지금은 뭔가 심상치않다는 것을 느낀건지 각자 개인총기까지 챙겨온 채로 혁명광장에 모여들었습니다.

"저 용역부원은 끌어내! 확성기도 뺏어서 가져오고!"

"비서실장님. 분위기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눈폭풍에, 방금 일어난 소란때문에 용역부 뿐만 아니라 지식해방전선, 급양부. 일반 학생들까지 모여들고 있습니다."

"네. 네... 인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용역부원들을 최우선으로 견제하여주시고, 분위기가 혼란스러워질 경우 시위나 소요사태로 번지지 않도록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그리고, 저는 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이 발전기를 가동시킬 방법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아까부터 이 두꺼운 메뉴얼을 빠르게 흩어보며 가동 방법을 알아보고 있었지만..

'도대체... 발전기 메뉴얼에 어째서 전기의 발견과 기계공학의 발전과정을 이렇게 상세하게 적어놓은건가요....!'

왠지 모르게 오늘 아침에 홀로그램으로 보았던 노란 머리색의 안경을 쓴 학생. 코토리 양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장황하면서도 정작 알맹이는 별로 없는 설명을 읽고있자니, 누가 이 내용을 작성하였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넘기고, 이것도 아니고... 아. 발전기 가동 방법...!"

전기와 공학에 대한 137페이지의 기나긴 구간을 지나고 나서야 발전기를 가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보자..

우선 발전기 정면에서 제어 패널을 찾은 뒤,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빨간색 버튼을 누른다.

.....이게 끝인가요? 이렇게 간단한 걸 보기 위해서, 저는 대체...?

혹시나 누락한 내용이 있을수도 있으니 가동 방법에 대한 페이지를 다시금 정독한 결과, 구석에 자그맣게 그려진 코토리 양의 얼굴과

'진정한 엔지니어는 사용법이 간단한 기계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라고 인쇄된 내용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설명은 간단하지 않은 건가요. 코토리 양.."

약간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서둘리 움직여야할 때입니다. 언제 용역부원들이 돌변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니, 몇 명은 이미 돌변한 것 같지만..

친위대원들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학생들을 흘끔 바라보면서 발전기의 정면으로 다가간 저는, 메뉴얼에 그려져 있던 그림과 그대로 생긴 제어 패널을 찾아냈습니다.

"정말로 한가운데에 빨간 버튼이 있네요. 정말 직관적인 디자인이라는 점은 높이 사겠습니다. 코토리 양."

들고있던 메뉴얼을 잠시 근처에 내려놓은 뒤, 발전기를 가동시키기 위해 커다란 붉은 버튼을 꾸욱 눌렀습니다.

위이이이잉-

그러자, 웅장하면서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가동음과 함께 발전기가 서서히 가동 상태에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인 에어컨처럼 생겼던 발전기는, 가동음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조그마한 틈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그 사이로 찬란한 주황색 빛과 따뜻함을 주변으로 서서히 내뿜기 시작합니다.

"우와아아...."

"오오..."

저도. 친위대원들도. 주변의 학생들도 모두 어느새 찬란하게 빛나는 발전기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뒤덮었던 하얀 색의 눈폭풍도, 발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를 만나더니 자그마한 눈덩이로 작아지기 시작했고요.

발전기 주변으로 느껴지던 온기와 빛은 어느새 혁명광장 전체를 감싸더니 점점 더 넓은 구역으로 그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방금 전까지 윤곽만 보였던 저 쪽의 건물도, 지금은 창틀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요.

"와.. 따뜻하다.."

"여름에도 이렇게 따뜻하지는 않았는데..."

"우리 도서관 난방보다 포근한 것 같지 않아요, 선배?"

"그러네. 게다가 책을 태우는 방식도 아닌 것 같고."

"크흠. 흠. 용역부원들! 이만 돌아가자! 오늘 배급된 푸딩이 식기 전에 먹어야 하니깐!"

휴우. 정말 다행입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상황이 훨씬 흉흉해질 수 있었는데 말이죠. 밀레니엄 학원이 전달해준 이 발전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붉은겨울 학원은 분열과 혹한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을겁니다.

"학생들이 해산하고 있습니다. 비서실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친위대 여러분."

저는 상황 통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준 친위대원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한 뒤, 바닥에 놓아두었던 메뉴얼을 다시 주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지만.. 아직 이 기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마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현재 여유가 되는 친위대원들은 사무국과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 기계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을 선별하여 오늘 저녁 배급 전까지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지금 당장의 위기는 넘겼지만, 아직 회장님이 떠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자만심을 가질 수는 없지요.

친위대가 발전기 분석을 도와줄 학생 분들을 모아올 동안, 발전기의 메뉴얼을 더 상세히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아. 처음의 137페이지의 분량은 뜯어내도 좋을 것 같네요.

****

일단, 발전기의 동력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처음 발전기가 도착했을 때, 코토리 양에게 들은 설명 내용으로 추측하자면 분명 여러가지 부가적인 기능이 있을 것이 분명하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발전기가 돌아가는 환경에서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능이라도 그걸 활용할 수 없다면 소용이 없겠지요.

마치 체리노 회장님이 몇 주 전에 시도했던 체룐카 초콜릿을 푸딩에 섞어서 만든 특제 초코 푸딩처럼 말이죠.

분명 맛은 체룐카 초콜릿의 엄청난 단 맛과 푸딩의 부드러운 감촉이 예술적으로 섞인, 붉은겨울 학원의 특산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습니다만...

정작 만들수 있는 급양부원의 수가 적어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양이 한정된데다가 어떻게든 만들었던 체룐카 초코 푸딩을 보관한 보관 창고의 열쇠를 분실해 버려 푸딩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흠, 흠. 사담이 길어졌지만 결론은 발전기의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어디에서 오는지,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발전기의 동력을 다룬 부분을 찾기 위해 수백 페이지를 열심히 넘겨보던 저는, 마침내 에너지를 얻는 방법에 관한 내용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발전기가 동력을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주로 동력을 얻는 메인 동력원은 발전기 외부에 얇게 코팅된 태양발전 패널을 이용한 태양광 발전이다..."

꽤나 좋은 소식입니다. 만약 발전기가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화력발전의 방식이었다면.. 분명 엄청난 양의 연료가 필요했겠지요.

비록 급격하게 나빠진 날씨 때문에 햇빛이 눈보라에 가로막혀 처음 상정했던 만큼의 발전양은 얻지 못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동력을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이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두 번째로 발전기에 동력을 공급하는 방법은, 발전기 우측 하단에 위치한 투입구로 어느정도의 열량을 가진, 사람이 섭취할 수 있는 무기물. 즉, 음식을 투입하는 것이다.....

.....?"

잠깐, 음식이요...? 뭔가 비유적이거나 다른걸 뜻하는 공학적 단어가 아니라, 정말로 먹는 음식...?

계속해서 메뉴얼을 읽어보니 이유는 생각보다 합리적이었습니다.

적혀있는 내용에 따르면, 만일 일어날 수 있는 극저온의 극한환경과 발전기의 내부 고장으로 최소 가동에 필요한 일정 온도를 내부에서 도달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하네요.

따라서 연소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화력 연료 보다는 존재 자체가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열량을 지닌 음식과 이를 처리할 수 있는 특수 바이오 모듈을 통해...

즉, 쉽게 요약하자면 발전기가 고장나거나 날씨가 훨씬 더 최악으로 나빠졌을 때에도 가동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서 음식을 연료로 쓰게 했다는 것이군요.

제가 공학자는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붉은겨울 학원은 눈사태로 인한 물류 단절 사태를 대비하여 언제나 일정 수량의 예비 물자를 대비해두고 있고, 일주일 동안이라면 예비 물자를 이용하여 이 한파를 이겨낼 수 있을것입니다.

다만, 발전기의 투입구에 넣을 수 있는 음식에 조건이 달려있네요.

"높은 에너지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음식의 부피 대비 높은 열량을 지녀야 하고, 내부 투입구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딱딱하거나 단단하지 않아야 하며..."

이런 저런 조건들을 포함시켰더니, 발전기 내부로 투입시킬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극히 드물어졌습니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에요.

부피와 대피해서 열량이 높고, 부드러워야 하며, 그렇다고 완전히 액체는 아니어야 한다니.

이런 조건에 맞는 음식이... 설마...

"푸딩...?"

4 이름 없음 (vTBLHZQeNg)

2024-02-11 (내일 월요일) 00:03:05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입니다.

발전기의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할 경우, 푸딩을 연료로 삼아야한다니.. 하다못해 체룐카 초콜릿이라던가, 교칙에 위배되지만... 약간의 알코올이라던가.

어찌 많고 많은 음식들 사이에서... 푸딩이라니요. 지금같은 상황에 제대로 된 배급도 어려워진 푸딩을...

만약, 푸딩을 연료로 삼았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그 때가 제가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중 하나일겁니다.

도서부, 용역부, 출판부, 민트초코해방전선... 그리고 사무국과 친위대까지. 붉은겨울 학원의 모든 학생들이 들고 일어날거에요.

그렇게 된다면, 쿠데타가 아닌 순수한 파괴만을 위한 소요사태가 온 붉은겨울 학원을 뒤덮을 것이고...

폭풍이 지나가고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기도 전에 자랑스러운 붉은겨울 학원은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를 불태울 것입니다.

안돼요. 안됩니다. 저, 사시로 토모에는 붉은겨울 연방학원의 학생회장이자 미화부장, 서기장, 체육부장, 청소부장, 선도부장 겸 급식부장인 체리노 회장님과 약속을 한 몸입니다.

회장님이 외부로 떠나계시는 일주일 동안, 붉은겨울 학원을 무사히 이끌어 내겠다고 말이죠. 비록 그 약속이 험난한 고난과 역경을 넘는 것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붉은겨울 연방학원의 사무국 소속이자 학생회장님의 비서실장을 맡고있는 제가, 회장님과 맺은 약속을 어기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분명 선생님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조언을 해주셨겠죠.

자. 움직여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슬슬 저녁시간이 가까워지고 있고, 지금 쯤이면 사무국의 친위대원들이 제 명령대로 기계에 대해 전문지식을 지닌 학생들을 소집했을거에요.

전문지식을 지닌 학생들과 의견을 나누다 보면, 어쩌면 새로운 해결방안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속담중에 이런 말도 있었지요. 약은 약사에게, 진찰은 의사에게. 그리고 붉은겨울 학원은, 체리노 회장님에게.

저는 두터운 발전기 메뉴얼을 조심스레 안아들은 뒤, 붉은겨울 사무국 본관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녁 배급 전에 불러놓고,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

"이 방입니다. 비서실장님. 최대한 많은 전문인력들을 모아보고자 했지만.."

"아닙니다. 친위대 여러분. 백방으로 수소문을 진행하면서 인력을 모집해 주신 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붉은겨울 사무국 본관.

지금은 쓰이지 않는 임시 회의실로 안내받은 저는 친위대원과의 짧은 대화를 나눈 뒤 회의실의 문을 열자, 방 안에는 여러 명의 학생들이 모여있었습니다.

한 명도 모이지 않은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으니 다행이군요. 수가 좀 더 많았다면 좋았겠지만, 인원이 많을 수록 발전기의 '연료'에 대한 내용을 숨기기 힘들어질 가능성이 커집니다.

오히려 이런 적당한 인원 수가 알맞아 보이는군요.

"반갑습니다. 여러분. 갑작스럽게 악화된 날씨와 예상하지 못한 긴급 호출이었음에도 이렇게 신속하게 모여주신 점에 대해 감사인사를 전하겠습니다."

"안녕. 토모에 비서실장. 급히 찾는다고 들어서 일단 와보긴 했는데, 무슨 일이야?"

"감사고 뭐고, 왜 부른거야? 항상 붙어다니던 그 꼬맹이 회장의 명령도 아닌데 친위대가 하도 들들 볶아서 억지로 온거거든? 저녁 시간 되기 전에 얼른 가보고 싶은데."

"저기.. 그래도 비서실장님인데, 일단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응? 잘 안들려. 뭐라고 했어?"

"으으... 이래서 별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얼른 책들이 기다리는 도서관으로 돌아가고 싶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처음부터 순탄하게 굴러가지는 않는군요. 이래선 시작조차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저는 탁상을 적당하게 두드려 학생분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물론, 학생 여러분들의 시간은 소중하므로 짧게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여러분을 모은 이유는... 혁명광장에 배치된 발전기에 대한 분석을 요청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분석? 저거를? 저렇게 큰 거는 바깥에서 조금 본다고 알아낼 수 있는건 별로 없는데 말이지. 메뉴얼이라던가, 설계도 같은 자료가 있을까. 비서실장?"

"아니면 완전히 분해한 다음 정밀 분석을 시도해볼 수도 있지만요..."

"이래서 지식해방전선 애들은.. 그렇게 하면 당장 오늘 밤. 아니, 저녁 배급 받기도 전에 전부 얼어 죽을걸?"

"가능한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한 것 뿐인데...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라면 대출한 도서나 연체되기 전에 반납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뭐?"

"자, 자. 모두 일리있는 의견입니다. 제가 기계공학을 정밀하게 다루는 공학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열을 내며 가동하고 있는 거대한 발전기를

가동 중에 분해하자는 명령을 내릴 만큼의 부족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면... 벌써 뭔가 고장난거야? 아직까지는 문제 없어 보이는데."

"그것보다, 아까 말씀해주신 메뉴얼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데 말이지요..."

"네.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입니다. 학생 여러분들의 목적은 메뉴얼을 분석, 발전기의 내부 구조와 작동 원리를 상세하게 조사하여

추후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나 사건에 대한 대응책을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즉,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점검한다는 것이죠."

"좋네. 메뉴얼이면 비상 사태에 대비한 내용도 어느정도 구비가 되어있을거고, 그 정도라면 저녁 먹기 전에 짧게 정리는 할 수 있겠어."

"그러면, 메뉴얼을... 이 분들과 다 같이 돌려봐야 하는 건가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마침 제가 메뉴얼을 전부 읽어본 경험이 있으니, 빠르게 핵심 내용만 간추려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내용은 내일 진행하는거지?"

"맞습니다. 자, 먼저 발전기의 가동 방법부터 시작해보죠."

시간을 아낀다는 명분으로 메뉴얼의 공개를 막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대체 연료'에 대한 내용은...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알아선 안되는 지식이니까요.

오늘은 중요한 주제들만 다루고, 내일까지 민감한 부분만 약간 들어내어 출판부에게 복사를 맡긴다면 문제는 없을겁니다.

그 전에.. 우선 설명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겠죠. 먼저 화이트보드에 커다란 붉은 버튼을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자. 이것이 발전기를 가동 시키는 버튼입니다. 기계 정면의 제어 패널에 위치해 있으며-"

****

"....이상입니다. 질문 있으실까요?"

"난 딱히 없어. 이 정도면 어느정도 윤곽은 잡힌 것 같고.. 내일 도구 들고 정밀하게 살펴보면 비서실장이 원하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조금은 더 파악이 가능할거야."

"그러니까... 비서실장님은 발전기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의 양이 메뉴얼에 써있는 평균값보다 많은지 살펴봐달라는 거죠?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저 분의 말씀대로 내일이면 가능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해가 떠있어야 태양열 충전 정도라던지 비교에 필요한 정보가 나오니깐. 그렇게 된다면 비서실장이 말한 '추가 연료'가 얼마나 필요한지도 가늠할 수 있어."

"그런데 말이죠.. 추가 연료가 음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음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해당 주제와 관련해서는 추후 급양부장과의 확인과정을 거친 이후 진행할 예정입니다. 공학적인 문제가 아닌 시시콜콜한 문제는 제가 처리할테니, 안심하시길."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럼 이제 끝난거야? 으으. 찌뿌둥해... 금방 끝난다고 했으면서, 저녁 배급시간을 겨우 안 넘겼잖아.."

"지금 당장 뛰어가야 푸딩 하나 받을까 말까 한 시간대에요... 으으, 추운 날에는 당분 보충을 해줘야 하는데..."

"자, 일단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도록 하죠. 내일 본격적으로 분석이 이루어진 다음 자세한 내용을 다뤄보도록 합시다. 메뉴얼 사본도, 내일 학생 여러분께 나누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해산을 알리자마자, 피곤함에 흐물흐물해진 학생분들은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공용 급식소를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렇게 성실하면서도 똑똑한 학생분들이 있기에, 우리 붉은겨울 학원의 위상이 유지되고 있겠지요. 물론, 체리노 회장님의 혁명적인 지도가 함께 한다는 것이 더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참. 저도 저녁을.... 지금 가도 시간이 늦을 것 같네요. 볼 일도 있고, 체룐카 초콜릿으로 간단하게 해결해야만..."

마침 두 가지 목표가 같은 장소에 있으니 수고를 덜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째로는, 급식소에 남아있는 체룐카 초콜릿을 얻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급양부장과의 '면담'을 진행하는 것이지요.

분명,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체리노 회장님의 하늘을 찌르는 카리스마가 함께 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아니죠. 지금 회장님은 부재중인 상태. 언제까지나 회장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회상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회장님의 발자취와 비교했을 때보다 아쉬운 부분이 있더라도, 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

"아. 비서실장님! 저녁식사 배급은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뭔가 필요하신게 있으신가요?"

저녁 배급이 끝난 이후에 공용 급식소를 찾아가자, 홀로 뒷정리를 하고 있던 급양부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딱히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논의해야할 사항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만.. 다른 급양부원들은 어디로 간건가요?"

"그게... 아시다싶이, 오늘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오늘 저녁 배급에 평소보다 많은 학생들이 몰려든 탓에 다들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부원들을 먼저 집으로 보내고, 제가 정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붉은겨울 학원의 식사를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에 걸맞는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나중에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신다면, 특별 훈장을 건의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비서실장님!"

"자. 그럼 이제 논의할 사항으로 넘어가죠. 너무 시간을 끌어도 실례가 될테니까요.

현재 급양부가 만들어낼 수 있는 푸딩의 배급량은, 어느정도인가요?"

5 이름 없음 (vTBLHZQeNg)

2024-02-11 (내일 월요일) 00:06:46


"푸딩... 말씀이십니까?"

"네. 현재 갑작스런 날씨의 변화와 기타 사정으로 인하여 일주일간 안정적인 식재료 공급이 불가능한 상황이니 말이죠. 혹여나 식재료가 부족한 상황인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마침 며칠 전에 새로운 식재료를 공급받은 터라, 못해도 2주 동안은 평소와 같은 배급량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만...?"

"일반적인 식사의 경우에 한정된 경우입니다. 푸딩은, 상황이 약간... 복잡합니다."

"얼마나 복잡한건가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날씨가 갑작스럽게 나빠지기 전에.. 저는 급양부원들과 함께 식자재 검수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혹여나 상하거나 이상한 식재료를 썼다간 회장님께 금방 숙청당할테니깐요.

그렇게 대부분의 식재료에 대한 검수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푸딩만 검수를 마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그 때 날씨가 급변하였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급식실 안의 공간이 협소하여, 식자재를 바깥으로 잠깐 옮겨두었다가 정리가 끝나면 안쪽으로 들여오는 방식으로 검수를 진행한터라..

푸딩의 원료가 되는 대부분의 재료는 현재 완전하게 얼어붙은 상황입니다. 상자째로 꽁꽁 얼어붙어서... 토치로 녹여보려고 했습니다만, 결과가 좋지는 않습니다."

"잠깐, 그렇다면 오늘 저녁식사에 배급된 푸딩은 어떻게 마련한건가요?"

"그게, 급식실 내부에 남아있는 조리가 완료된 푸딩이 어느정도 남아있었고... 어찌저찌 해동시킨 재료를 이용하여 일일 배급량에 맞추었습니다."

"발전기를 가동시키고, 저녁 배급 시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수 천개의 푸딩을 조리할만한 재료를 확보했다라... 그렇다면, 푸딩의 제조는 딱히 문제가 없는것이 아닌가요. 급양부장?"

"그, 그게... 후우.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평소보다 훨신 더 많이 찾아오는 학생의 수에 비해 확보한 재료가 많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푸딩에 물을 탔다고 해서 바로 숙청하지는 않을테니깐요."

"....평소보다 2배로 탔습니다."

".......학생들이 이상함을 지적하지는 않던가요?"

"날씨 때문에 재료가 얼어서 설탕이 굳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어떻게든 넘어가지더군요."

...다행인 일이네요. 혹여나, 분노한 학생들이 급식소를 불태우거나 했다면... 푸딩은 커녕, 발전기의 예비 연료 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겁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한파로 인해 재료가 얼어붙었고, 보관해둔 완제품 푸딩은 턱없이 부족하며...

앞으로 모든 급양부원들을 투입하여 푸딩 재료의 해동, 제작을 진행한다고 쳐도 평소의 배급량의 70% 수준일겁니다. 그것도 조리 설비가 고장난다는 가정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그렇군요. 인지했습니다. 급양부장.

......그럼에도, 내려야할 지시가 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비서실장님?"

"아직 자세한 수치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급식소에서 만들어지는 푸딩을 발전기의 예비 연료로써 사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잠깐, 잠깐만요. 비서실장님. 푸딩을... 푸딩을 연료로 삼는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실장님. 토모에 비서실장님. 그게... 그게 어떤 걸 뜻하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학생들이 알게 된다면, 연료로 쓰이는 것은 푸딩이 아니라 저와 급양부장이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저를 포함시키시는겁니까! 아뇨. 이건 무립니다. 비서실장님. 하루에 한 개의 푸딩을 배급하는 것도 힘들어진 마당에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래서, 급양부장을 독대하러 온 것이지요. 다른 급양부원들이 필요한 것이 아닌, 급양부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 온겁니다.

급양부장. 지금 붉은겨울 학원이 처한 위기가 어떤 위기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 그야..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 한파 아닙니까. 발전기의 가동이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쯤..."

"그겁니다. 급양부장. 우리 붉은겨울 학원의 적은, 분노한 학생도 아니고, 묽은 푸딩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한 한파가 저와 급양부장. 그리고 온 학원생이 마주한 적입니다."

평소 연설에서 했던 것처럼, 조금은 과장된 자세로 양팔을 벌리며 급양부장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봅니다.

"떠올려보세요. 적과 용맹히 싸워서 승리한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에게... 어떤 것들이 제공되었나요? 주어진 상황에 그저 열심히 하려던 노력에 가차없이 내려진 숙청?

아니면, 불합리한 이유로 내려지는 길고 고통스런 2주간의 화장실 청소형?

아닙니다. 아니에요. 급양부장. 용맹스런 승리에 내려지는 것은, 숙청과 벌이 아니라...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급양부장 앞으로 걸어간 저는, 양쪽 어깨에 하나씩 손을 얹었습니다.

"샬레의 선생님을 도와 종종 체리노 회장님과 함께 헤세드 총력전에 동원되었던 사무국의 친위대원들은, 그 노력에 상응하는 영광과... 푸딩을 받아갔습니다.

급양부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겠죠? 친위대원들과 체리노 회장님에게 주어지는 푸딩을 만들었던 건, 급양부장. 당신의 손으로 이루어 낸 결과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학생들이 알게 된다면..."

"급양부장."

조금은 여유로우면서도, 너무 과하지 않도록 싱긋. 웃음을 지었습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은 비밀들이 있답니다. 예전에, 온천을 운영했던 학생분들 중 한 분은 하루에 푸딩을 두 개씩이나 드시는 호화로운 생활을 만끽하셨죠. 알고 계셨나요?"

"아뇨. 몰랐습니다..."

"그렇지요? 급양부장. 이미 훌륭한 선례가 존재하는데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 일은 붉은겨울 학원에게도 필수불가결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만약, 연료가 부족하여 발전기가 가동을 멈춘다면... 푸딩에 대한 불평불만은 커녕 붉은겨울 학원 전체가 차디찬 눈폭풍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학원을 구하려 열심히 노력한. 칭찬받고 치하받아야 마땅한 자랑스러운 학생에게 총구가 겨누어질 것 같나요?"

급양부장의 눈이 떨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무언가를 고민하는 걸지도요.

"흔히들 걱정이 걱정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하고는 하죠. '일을 망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또 다른 걱정의 원인이 되어, 잘 할수 있는 일도 결국은 그르치고 만다는... 어찌보면 뻔한 이야기 말입니다.

급양부장.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붉은겨울 학원을을 이 절체절명의 위기가 끝날 때까지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자신이요.

당신은, 자신이 있습니까?"

"......네. 자신 있습니다."

"훌륭합니다."

저는 부드러우면서도 천천히 급양부장의 어깨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풀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왠지 어두우면서도... 단단한 각오를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군요.

"서로가 맡은 일을 열심히 수행한다면, 훌륭한 학원이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지요. 급양부장. 해야할 일은 단순합니다.

내일, 발전기의 분석이 끝난 뒤 예비 연료로 얼마나 쓰여야 하는지의 계산이 끝나면... 그 만큼의 푸딩을 만들어서 붉은겨울 사무국의 인장이 찍힌 상자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운반을 어떻게 할 건지, 다른 학생분들께 설명은 어떻게 할 건지... 신경쓰지 마세요. 급양부장의 일은 설명이 아니라 요리에 있으니깐. 사무국의 비서실장으로서, 그 부분은 맡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게... 잘 풀릴겁니다."

비록 체리노 회장님이 보여주셨던 날카로우면서도 간결했던 카리스마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급양부장을 '설득'하는 것을 성공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푸딩을 연료로 삼아야 하던, 이 작전은 급양부장의 협력이 없다면 실패로 돌아갈 작전이였으니 말이죠.

그러고 보니, 설득해야할 분이 더 남아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 기억났습니다. 급양부장을 설득하고 난 다음, 또 다른 '설득'이 필요하신 분이 있었죠. 발전기에 공급할 예비 연료의 운송과, 주입 과정에 큰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

바로, 마리나 보안위원장입니다.

****

"부르셨습니까, 비서실장님."

"마리나 위원장님. 이렇게 갑작스럽게 호출하게 된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아닙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부재중인 상황에선, 토모에 비서실장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회장님의 전언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요."

급양부장의 설득을 마친 후, 모모톡으로 갑작스럽게 체리노 회장님의 집무실로 호출하였음에도 당황했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역시, 붉은겨울의 보안위원장이라는 직책은 아무나 맡는게 아니군요.

마리나 위원장은 그동안 수 많은 쿠데타를 진압하거나 일으킨 전적이 있는 만큼, 저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분명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만약 '설득'에 실패한다면...

발전기의 연료로 푸딩을 넣어야 한다는 잔혹한 진실이 알려지기도 전에 붉은겨울 학원의 회장.... 대행직은 또 다시 바뀌고 말겠죠.

아직 발전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붉은겨울 학원에게는 끔찍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하지만, 마리나 위원장은 강한 전력 만큼이나 설득하기 어려운 존재. 체리노 회장님처럼 낮잠이나 푸딩으로 회유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조금 직접적인 방법을 시도해 봐야겠죠.

"자. 마리나 위원장님. 일단 앉으시죠. 해야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6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10:20


"회장님이 앉던 의자에... 말입니까?"

"딱히 문제가 될만한 요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리나 위원장. 게다가, 처음 앉아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후후. 과거에 있었던 일을 들춰내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편하게 앉으셔도 되니, 그렇게 정자세로 있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럼."

그렇게 쭈뼛쭈뼛 다가온 마리나 위원장은 회장님이 앉으시는 의자에 살포시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이 가라앉는게 눈에 보이네요.

"어때요. 마리나 위원장? 편안한가요?"

"그렇습니다. 이 푹신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 저번에도 느꼈지만, 역시 계속해서 앉고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여기까지 말하던 마리나 위원장은 뭔가 실수를 했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딘가 말실수를 했다는 느낌인데... 아하. 그런거였군요.

"후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마리나 위원장.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체리노 회장님을 지극정성히 모시고 있다는 증거.

게다가 마리나 보안위원장은 붉은겨울 학원의 안전과 질서를 책임지시는 직책을 맡고 계시죠. 고작 의자 하나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키실 거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 그렇습니다. 비서실장님. 어디까지나 의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 아직 중요한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죠. 위원장."

그렇게 말하며 마리나 위원장이 앉은 의자 뒤로 살며시 다가간 저는, 의자의 옆면에 두 손을 살포시 얹었습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저기 옆에 걸려있는 체리노 회장님의 초상화를 봐주시겠어요?"

마리나 위원장은 약간 긴장을 한듯, 조심스럽게 초상화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어떤게 보이시나요, 마리나 위원장?"

"어떤게 보이냐니... 그야, 체리노 회장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니요. 저는 더 깊은 의미에 대한 것을 여쭈어 보고 싶은겁니다. 위원장."

"어떤... 의미 말입니까?"

"그 전에, 다시 한 번 질문하겠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의 초상화에서... 어떤 것이 보이시나요?"

"그, 그게... 일단 체리노 회장님의 용맹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저 늠름하신 수염은, 붉은겨울의 학생 회장이라는 중엄한 직책을 만민에게 드러내는 모습을-"

"그쯤이면 충분합니다. 마리나 위원장님."

그리고, 의도적으로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나 위원장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저 역시도, 앞으로 꺼낼 말을 준비하기 위한 잠깐의 시간이었지요.

"마리나 위원장. 물론 저도 체리노 회장님의 초상화에서 그런 것들을 보고는 한답니다. 하지만, 오늘과도 같은 외부의 위협이 붉은겨울 학원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조금, 멀리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합니다."

"멀리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 그건 그냥 보이지 않는게 아닌게..."

"아니죠. 보안위원장.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것. 체리노 그것이 회장님이 한 달에 평균 세 번의 쿠데타를 겪으면서도 항상 학생회장의 자리를 되찾으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짐작이 가시나요?"

"에... 자,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단결입니다. 마리나 위원장님. 체리노 회장님이 항상 쿠데타에 실각당하시고 사무국을 꽁지빠지게 도망가더라도,

항상 체리노 회장님은 어디선가에서 수 많은 아군들을 이끄시고 사무국으로 돌아오셨지요."

"확실히, 저번 쿠팔라 축제 이전에 벌어졌던 쿠데타에서도 그러셨지요. 그리고, 저저저번에 벌어졌던 지식해방전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쿠데타에서도..."

"그렇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보여주신 강렬한 카리스마와 어제의 적을 오늘의 아군으로 품으시는 넓은 아량... 그런 자비심을 토대로 회장님은 항상 실각하심에도 자리를 되찾으셨지요.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세요. 보안위원장. 이제 회장님은.... 붉은겨울 학원에 머무르고 계신가요?"

"회장님은 오늘 아침에 외부 학원과의 교류를 이유로 사무국의 친위대원들과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비서실장."

"그렇지요. 회장님은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이 곳, 집무실만 해도 회장님이 자리를 비우시지 않았더라면 마리나 위원장이 그 의자에 앉을 수 있는 방법은 또 다른 쿠데타를 일으키는 방법밖에 없었겠죠."

마리나 위원장이 어깨를 움찔거렸습니다.

"지금 붉은겨울 학원의 상황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보안위원장. 폭풍의 심각성이 모두의 눈을 가려버려서 그렇지, 며칠만 있으면 금방 기존의 문제들과...

새롭게 생긴 문제들의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총구들이 이 곳을 향할것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그, 그런 반동분자들은 금방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용맹한 보안위원들과 함께라면 그런 잔챙이들은 금방-"

"저는 더 넓은 범위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겁니다. 보안위원장. 혹여나, 지금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발전기가 꺼지거나, 출력이 약해진다면...

난방과 얼어붙은 푸딩을 책임지라며 붉은겨울 학원의 온 학원생이 달려든다고 해도 해결이 가능한가요?"

"학원의... 모든 학생들이 오는 수준이라면...."

"사무국의 친위대원들은 용맹하고, 뛰어난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리 강한 존재라고 해도, 순전히 물량의 차이로 인해 밀려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간단해요. 마리나 위원장."

마리나 위원장의 굳어버린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펄쩍 뛰었습니다.

"히익?!"

"단결입니다. 더 굳고 강력한 단결이 있다면, 체리노 회장님이 복귀하실 때까지 저 난폭한 폭풍으로부터 붉은겨울 학원을 공고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마리나 보안위원장."

"어떤 단결을... 말씀하시는 건지..."

"저는 비서실장을 맡고 있고, 마리나 위원장은 사무국의 보안위원장을 맡고 있지요. 각자 학원의 중대한 직책을 맡고있는 바. 서로가 중요하면서도 비밀이 요구되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푸딩을, 발전기의 연료로 넣는 일이라던가. 말이지요."

철컥.

제 말을 듣자마자, 마리나 보안위원장은 회장님의 의자에서 일어나 잠시 옆에 기대두었던 개인 총기를 쥐었습니다. 다만, 겨누지는 않은 상태로요.

"어디까지나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푸딩과 학생이 섭취하기에는 상태가 불량한 푸딩에 한정하여 사용하는겁니다. 보안위원장."

"그, 그렇습니까...? 멀쩡한 푸딩들을 연료로 쓰신다는 말인줄 알고 그만.."

"확실히 설명이 부족하긴 했지요. 하지만, 그게 마리나 위원장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기세로 총기를 내려놓은 마리나 위원장에게, 지금부터 해야할 일을 설명해야겠습니다.

"마리나 보안위원장은 이해하셨지만, 붉은겨울의 모든 학생들이 이해하지는 못할겁니다. 특히 구교사에 있는 학생들은...

푸딩이 난방을 떼기 위한 연료로 쓰인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거에요. 어쩌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죠. 게다가, 마주치는 학생들마다 일일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잔챙이들은 보안위원들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특히 구교사의 특별반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문제의 새싹부터 원천제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마리나 위원장도 동상의 수염을 부수었던 때, 체리노 회장님이 그 일을 용서해줄 것을 알았다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겠지요?"

"그게... 그렇습니다. 비서실장님."

"따라서, 발전기까지 푸딩의 배송과 연료 주입의 과정은... 다른 학생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나 마리나 위원장이나 항상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노릇이죠."

저는 마리나 위원장에게 악수를 권하듯이, 한 손을 내밀면서 작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마리나 보안위원장이, 다른 보안위원들을 잘 설득하고 이끌어주실거라 믿고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비서실장님."

"이제 한 배를 탄 운명이니, 좀 더 편하게 불러도 괜찮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죠. 저는, 마리나 위원장이고. 마리나 위원장은... 저와 같습니다."

악수를 한 손에 조금 힘을 주자, 마리나 위원장도 저를 바라보며 약간 경직된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보안위원장. 이렇게 우리가 하나되어 뭉쳤으니, 단결된 붉은겨울 학원에 상대가 될 적수는 없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마리나 보안위원장을 집무실 바깥으로 배웅하고 난 뒤, 저는 회장님이 앉으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듯이 앉았습니다. 역시, 사무국의 보안위원장... 중간에 총을 집어들었을 때는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붉은겨울 학원의 무력과 질서를 담당하는 친위대를 이끄는 마리나 위원장과의 연대는 필수불가결했습니다.

"...체리노 회장님. 얼른 돌아오셨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달의 화장실 청소라는 어마어마한 숙청을 내리시는 결단력.

몇 번이고 쫓겨나셔도 금방 다른 학생들과 동아리와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반동분자들을 숙청하는 카리스마.

저는 체리노 회장님을 보좌하는 역할이지, 체리노 회장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었다면, 보안위원장과의 설득도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겠죠.

"일단, 발전기 주변에 설치할 가림막과 비계를 알아봐야겠죠. 용역부에게 의뢰를 해야하는데..."

왠지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겨옵니다. 평소엔 체리노 회장님의 낮잠을 위한 이부자리는 셀 수도 없이 준비했지만, 오늘은... 잠깐 책상에 엎어져서 자도 괜찮겠죠.

그렇게 잠깐만 눈을 붙이고자 했었지만, 눈을 감았다 떠보니 저를 반긴것은 밝아진 햇살과, 약간의 허리통증과 발전기의 분석을 맡긴 학생들에게 온 모모톡이었습니다.

7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12:18


"여. 비서실장. 왔어? 어제 말한대로, 발전기에 대한 분석이랑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어."

발전기에 대한 분석을 맡긴 학생들의 모모톡을 보고 발전기가 있는 광장으로 나오자,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체적으로 발전기를 감싸고 있는 비계.

그리고 비계 위에서 발전기를 이리 저리 만져보고 있는 여러 학생들이 보입니다.

"이 비계는... 어떻게 설치한건가요? 분명, 이런 구조물은 어제까지만 해도 설치되지 않았었는데.."

"아. 그래서 우리도 가방이랑 물건 같은걸 쌓아서 올라가보려고 했는데, 어떤 용역부원이 슥 오더니 위험하다면서

다른 용역부원들을 이끌고 와가지고는 이 비계들이랑, 안전장비를 잔뜩 설치하고 순식간에 사라졌어."

"엄청 재빠르셨지요, 용역부원분들... 그 많은 분들이 그렇게 빠르게 설치하고 빠져나가는 건 처음봤어요.."

"그래도 그 덕분에 안전하게 조사를 할 수 있게 된거지만. 생각보다 발전기 겉면에 달려있는게 많아. 비서실장.

이 정도 높이라면 분명 사람이 손으로 닿을 수 없는 높이인데... 밀레니엄 학생들은 하늘을 나는 기계라도 만든걸까?"

"어쩌면, 이런 저런 기능을 넣다보니 넣을 공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곳에 넣은 걸수도 있어요...

책에서도, 필요 기능은 많지만 정작 공간이 없어 기상천외한 곳에 버튼을 달아둔 이상한 기계들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코너가 있을 정도고..."

"그런 코너가 있는 책이 있었어? 나도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 그런 책이라면."

"저번 주에... 당신이 빌려가셨어요... 게다가, 오늘로 대출 기간이 끝나버리니 연체가 되기 전에 반납. 부탁드려요..."

"엥. 내가? 그걸 빌렸어? 나는 수업 중에 졸릴 때 베개 용도로 쓰려고 빌린거였는데, 그런 책이었구나..."

"책을 베개로 쓰지 말아주세요....! 도서는 그런 천박한 목적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고요!"

"뭐? 천박? 하루에 적당한 수면을 취하는게 얼마나 중요한데....!"

"흠, 흠. 여러분? 일단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움 직전까지 갔던 학생분들은, 제가 질문을 건네자 조심스럽게 비계에서 내려오더니 저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크흠. 그래. 일단 지금까지 발전기에 대한 분석내용을 보고할게. 비서실장. 먼저, 아까 말했던 발전기에 달려있는 여러 부가적인 요소에 대한건데.."

쿡쿡.

비스듬히 안전모를 쓴 학생이 옆에 있던 안경을 쓴 소심해 보이는 학생의 옆구리를 찌르자, 움찔. 하며 옆에 있던 학생을 째려보더니 설명을 이어나갑니다.

"...네. 조사를 진행하면서 최소 10가지 이상의 부가적인 기능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입자들과 습도를 분석하여 날씨를 예보해주는 기상분석 모듈이라던가,

버튼을 누르면 랜덤한 사자성어와 사자성어의 뜻과 유래를 12분동안 설명해주는 모듈이라던가..."

"그거 눌렀다가 다른 것들 확인도 못하고 설명만 듣고 있었어야 했지..."

"한 모듈이 작동하는 동안은 다른 모듈을 작동시킬수가 없었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어요.."

안전모를 고쳐쓴 학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합니다. 확실히, 코토리 양의 설명은 다른 학생분들이 듣는다면 금방 나가떨어질 만큼의 양을 자랑하니까요.

저야 체리노 회장님의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다른 학생분들보단 더 길게 버틸 수 있었지만요.

"대부분은 보잘것 없거나 쓸모없는 기능들이었지만, 몇 가지는 유용한 기능들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기상분석 모듈같은 경우는 폭풍이 언제 끝날 것인지도 예측하였으니까요."

"언제... 끝날 건지도 예측이 가능했다고요?"

"아. 그건 중요한 내용 같아서 맨 마지막에 말할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그 기상분석 어쩌고를 돌려보니까, 이것저것 주변을 스캔하고 웅웅 거리더니 계산 결과를 보여줬어. 자. 여기."

안전모를 쓴 학생이 저에게 클립보드에 고정되어 있는 종이를 건네줍니다. 여러 그래프들과 차트. 그리고 데이터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보고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퀄리티입니다.

"놀랐지? 이거 출력도 저 모듈이 한거야. 아무튼,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 폭풍은 6일 후. 즉... 체리노 회장이 돌아오는 날에 지나간다는 결과가 나왔어."

"정확히는 회장님이 돌아오시는 날의 정각... 새벽 12시 정도부터 날씨가 평소 수준을 되찾을거에요..."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는 날에 폭풍이 끝난다니... 이건, 역시 하늘도 체리노 회장님을 보살펴주고 계신다는 뜻이겠지요.

이 혹독하고 강력한 폭풍 마저도 회장님의 복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 붉은겨울 학원은 회장님 덕분에 강대한 학원이라는 사실을 더욱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기는 한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어. 그 문제점이 좋은 소식도 가려버린다는게 문제지만..."

"발전기 동력과 관련된 모듈을 통해 사용 전력을 계산해봤는데 말이죠... 이 폭풍의 강도가 예상보다 강력해서... 발전기의 가동이 처음 예정되었던 적정 수준보다 강하게 가동될 수 밖에 없었어요.."

"따라서, 비서실장이 저번에 말했던... 대체 연료? 식량? 그게 필요해졌어. 대체 연료를 넣지 않는다면, 발전기는 폭풍이 끝나기 전에 멈춰버릴거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고를 들어보니... 눈 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눈을 질끈 감아서 이런 느낌을 지워버린 저는, 다시금 두 학생들을 바라봤습니다.

"발전기 겉면에 깔려있는 태양광 발전패널로 어느정도 수급이 가능하지만... 눈폭풍 때문에 도달하는 햇빛의 세기가 상당히 약화된 상황이에요.

따라서, 충전량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 추세라면... 3일하고도 반나절이 지나고 나면 발전기는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말거에요."

"그리고 꺼지겠지. 그럼, 다시 그 눈폭풍이.... 으으, 어제를 생각하기만 해도 다시 오싹해 지는 것 같아..."

"그렇다면, 필요한 대체 연료의 양은 얼마나 필요한건가요? 혹시, 더 시간이 필요하신거라면-"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친절하게도 그걸 계산해주는 모듈도 있었거든. 3일 반나절 어치의 필요한 대체 연료의.... 어.... 이걸 뭐라고 하더라?"

"열량이요..."

"그래. 열량. 정확히 어떤 음식이 얼만큼 필요하다 까지는 계산을 못헸지만 이건 계산해주더라. 자. 여기."

종이를 받아들자, 조금 전에 받았던 출력물과 같이 여러 그래프들과 정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중요한건 총 필요한 열량이겠죠.

저는 계산기를 꺼내 발전기에 요구되는 대체 연료의 총 열량과 물을 타지 않은 정량의 푸딩 1개의 열량을 대조하여, 하루마다 요구되는 양을 계산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정도면, 평소 하루에 배급되는 총 푸딩의 양의 35%... 현재 상황으로는 만들어낼 수 있는 푸딩의 절반 정도군요."

"응? 푸딩?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제 먹었던 푸딩이 차가워서 약간 이가 시렸다는 혼잣말을 했던 것 뿐이에요."

"그치? 어제 받은 푸딩은 너무 차가웠어. 평소보다 단 맛도 별로 안 느껴졌고... 역시 추워서 설탕이 제대로 안 섞인게 분명해."

"제 생각에는 제대로 섞이지 않은게 아니라, 물을 섞은 것 같지만요..."

학생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저는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계산대로라면, 현재 만들어질 수 있는 푸딩의 절반은 발전기의 연료로 소모되어야 합니다. 즉, 배급할 수 있는 푸딩의 수가 더 줄어들수밖에 없다는 의미죠.

그렇게 줄어든 푸딩의 수를 맞추기 위해서는 푸딩에 물을 더 타던가... 아니면 배급하는 푸딩의 양을 줄여야하지만, 그런 방법은 너무나도 큰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야 갑작스런 폭풍에 다들 급양부장의 변명에 수긍하고 물이 더 섞인 푸딩을 받아갔다지만, 그걸 일주일 가까운 시간동안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분명,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붉은겨울 학원은 불타버릴 것입니다.

평소에 배급하는 푸딩의 양도 적다면서 심심치 않게 용역부에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걸 3분의 1 수준으로 줄여버린다면 용역부가 아니라 붉은겨울 학원의 절반이 쿠데타에 동참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체리노 회장님의 특별 지시로 제작한 체룐카 초코 푸딩이 있었지요. 붉은겨울 사무국 근처의 창고에 보관해두고 있던데다가, 잃어버린 열쇠를 찾기만 한다면 투입이 가능합니다.

"혹시, 당도가 높은 음식도 대체 연료로 투입이 가능할까요? 체룐카 초콜릿같은 재고가 많은 음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거? 너무 달달해서 오히려 먹기도 힘들고, 날씨 때문에 꽝꽝 얼어버려서 제대로 맛도 못보는 그 초콜릿이라면 괜찮을지도..."

"거기에 대해서 말씀 드려야할 것이 있어요. 비서실장님."

"어떤 내용인가요?"

"발전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대체 연료를 투입하는 투입구와 이에 연결되는 연결 배관을 어느정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말이죠..

대체적으로 큰 문제는 없지만, 체룐카 초콜릿과 같은 당도가 높은... 아니, 너무 높은 경우라면 최악의 경우, 배관을 타고 가다가 얼어버려 배관을 막을수도 있어요."

"진짜로? 그냥 어떻게든 뚫어보면 안돼?"

"아니요. 하나밖에 없는 발전기로 도박을 감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체룐카 초콜릿을 활용할 수는 없겠군요."

이렇게 된다면, 체룐카 초콜릿을 원료로 만든 체룐카 초코 푸딩도 사용이 어렵겠군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배급되는 푸딩의 양을 줄이면서도 그 사실을 학생들이 납득하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붉은겨울 학원은 끝장입니다. 뭔가 좋은 방안을.... 떠올려야 하는데...

"비서실장? 괜찮아? 그, 농도가 너무 높은게 문제면은 물을 탄다던가 해서 부드럽게 하면 되지 않을까?"

"아까 같이 보셨다시피, 대체 연료를 전달하는 배관의 크기가 생각보다 작아요. 농도를 해결한다고 해도 부피가 늘어나면

좁은 배관 때문에 연료가 전달되는 시간이 더욱 늘어날거에요. 그렇게 된다면, 같은 열량이라도 시간이 지체되어 작동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어렵다, 어려워... 뭔 말을 못하겠네."

"아닙니다. 여러분. 짧은 시간내에 발전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분석하여 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비상 상황이기도 하니깐... 비서실장은 뭐 괜찮은 생각이라도 난거야? 왠지 표정이 밝아보이는데."

"네. 두 분 덕분에 괜찮은 해결책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일단 아침식사는 하셨나요? 먼저 급식소로 떠나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학생분들을 급식소로 떠나보낸 뒤, 저는 핸드폰을 들어 마리나 위원장에게 모모톡을 보내놓았습니다. 보안위원 여러명과, 트럭 몇 대를 준비해달라고 말이죠.

금방 준비하겠다는 답장을 받고 난 뒤, 저는 공동 급식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시 급양부장을 '설득'할 시간이네요.

9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14:50


"차례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새치기 하다가 걸리면 3일간 화장실 청소형에 처해지실 수 있으니 뛰지 마시고 차례를 지켜주세요!"

"이건... 이건 가짜 식권이잖아? 또 출판부에서 위조 식권을 만들었어! 이거 걸리면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셨을 때 또 숙청당한다고!"

"그, 그래도 나는 정당하게 값을 주고 샀단 말이야! 어쩐지 싸게 팔아서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식권은 공용 급식소에서만 판매한다는 소식을 모르진 않았을텐데? 이건 붉은겨울 학원의 교칙에도 적혀있는 내용이야. 식권을 다시 사던가, 아니면 나중에 푸딩 하나로 참아."

"이, 이건 불공평해!"

공용 급식소에 도착하자, 아침식사를 하고있는 수 많은 학생들과 이를 관리하고 열심히 식사를 조리하시는 급양부원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평소에도 급식소를 방문하시는 학생들이 많은 편이지만, 최근에는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따뜻한 식사를 찾으시는 학생분들이 워낙 많아진 것 같네요.

"아. 비서실장님!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혹시 급양부장님을 찾으시는 건가요?"

"네. 급양부장과 시급히 상의해야할 문제가 있어서 말이죠. 부탁드립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친절한 급양부원이 급양부장을 찾으러 가신 동안, 저는 잠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급식소 안쪽을 둘러보았습니다.

열심히 식사에 열중하시는 학생들과, 그 너머의 주방에서 토치와 가스불로 열심히 얼어붙은 재료를 녹이고 계시는 급양부원들의 모습이 보이네요.

"부, 부르셨습니까. 비서실장님."

"아. 급양부장. 잘 오셨어요. 마침 말씀드릴 내용이 있었거든요."

"어떤 걸... 말입니까?"

"큰 소식이 하나. 작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걸 먼저 들어보고 싶으신지요?"

"큰 소식을 먼저 들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는 자세군요. 모범적인 자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현재 만들어질 수 있는 푸딩 중 절반 가량이 발전기의 연료를 목적으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움찔, 하며 몸을 떤 급양부장은 아까보다 훨씬 사색이 드리워진 표정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예상보다 많은 양에 놀란 것일까요?

"예상보다 많은가요?"

"네. 제 예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하루에 푸딩 한 개의 배급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거라 믿습니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급양부장."

"....그럼, 작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비서실장?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겠는데.."

"안심하세요. 아까보다는 좋은 소식이니까요. 지금 만들어진 푸딩은 얼마나 되나요, 급양부장?"

"현재 만들 수 있는 푸딩의 60% 정도는 만들었습니다만... 어째서 물어보시는지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급양부장. 조금 있다가 트럭 몇 대가 급식소에 도착할 예정이에요. 트럭티 도착하면, 각 트럭마다 푸딩 몇 박스를 실어주실 수 있나요?"

"그 정도야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쓰시려는 건지...?"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유... 말씀이십니까? 어떤 이유를 말씀하시는건지..."

"급양부장도 아시다시피 현재 줄어든 푸딩의 생산량에서 발전기 연료로 필요한 양을 제외하고 나면 만들어 지는 양은 평소의 3분의 1 수준이죠. 하루 1개의 푸딩 배급은 커녕 3분의 1 토막이 난 푸딩을 배급한다면..."

"당장 급식소가 불타도 이상하지 않을겁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급양부장. 게다가 급식소가 불타는 정도로 끝나지 않겠지요. 이 곳을 불태우고 나면 사무국까지 불태우고, 온 학원이 불길속으로 빠져드는 대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푸딩을 실어 달라는겁니까? 저 정도 양이 적은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든 학생에게 배급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계획이 있습니다. 제 계획대로라면, 불만은 있을 수 있어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더 좋은 생각이 있으실지요?"

제 말에 약간의 의구심을 품는 급양부장이었지만, 다른 뾰족한 수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듯이 체념을 하고 몇 명의 급양부원들과 함께 급식소에 도착한 트럭들에 푸딩 박스들을 실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급양부장님. 이후 사무국의 마리나 위원장이 연료가 든 상자를 수거하러 올테니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착잡한 표정의 급양부장과의 인사를 마치고 난 뒤, 저는 트럭을 운전하는 보안위원에게 구교사 쪽으로 향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구교사가 있는 학원의 부지 외곽의 환경이 아니라면, 제 계획은 제대로 실천될 수 없으니까요.

****

"여기까지 왔으면 충분합니다. 보안위원. 트럭을 세워주세요."

붉은겨울 학원의 건물들이 점차 드문드문 보이다 마침내 차가운 설원과 눈이 가득 쌓인 나무들이 보이는 풍경이 익숙해질 즈음.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다 생각한 저는 트럭을 세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맨 앞의 트럭이 멈추자, 뒤에서 따라오던 트럭들도 천천히 멈춰서며 새하얀 산길 위에 트럭의 행렬이 형성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분실된 화물은 없는 것 같군요. 좋습니다. 자, 보안위원들. 차량에서 내려 잠시 집중해주세요. 이제부터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해둔 구교사 근처의 지형을 담은 지도를 펼친 저는, 그 중에서도 외지고 지형이 험하여 접근이 매우 힘든 곳들에 붉은 마커펜으로 동그라미를 표시합니다.

"자. 이 구역들이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내용이니, 잘 들어주세요.

먼저, 마커펜으로 표시한 구역들로 각자 이동해 주신 다음 트럭 짐칸에 실린 푸딩 박스들을 주변 눈밭에 숨겨놓아 주세요. 눈에 잘 띄지 않을만큼 숨기되, 너무 인위적으로 은폐한 흔적이 있으면 안됩니다."

제 설명을 듣던 보안위원들의 눈빛이 아리송하다는 듯이 반짝입니다. 이 설산 한가운데까지 트럭에 푸딩을 싣고와서 한다는 짓이

푸딩을 눈밭에 숨겨놓는다는, 어찌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설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푸딩 박스들을 숨겨놓으셨다면... 트럭을 사고가 난 것처럼 위장하여 차량의 파괴를 부탁드립니다."

말이 끝나자 마자, 보안위원들의 표정에는 마치 ?! 라는 문장기호가 붙은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잠깐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네요.

"안심하시길. 이 모든 일은 체리노 회장님과 붉은겨울 학원을 위한 일입니다. 지금 당장은 엉뚱하고 이해하기 힘든 일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붉은겨울 학원의 눈과 같이 밝은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보안위원님들은, 붉은겨울 학원을 위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비서실장님!""

"네. 그럼 이 영광스런 작전의 실행은 자랑스런 보안위원들에게 맡겨두겠습니다. 지도는 제가 여러 장을 가지고 있으니 다들 한 장씩 받아가시고, 작업 이후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그리고 품 속에서 가져온 지도들을 꺼낸 저는, 붉은 마커펜으로 지역을 표시하려던 찰나...

부스럭-

"어라,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무언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들은 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앞에 있는 보안위원들을 제외한 인기척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 바람에 떨어진 눈덩이로 인한 소리라던가, 그런 소리였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 특이한 냄새를 맡았거든요. 이 설산에서 쉽게 맡을 수 없는...

시큼하면서도 과일향이 품긴 냄새였습니다.

****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비서실장님!"

시간이 좀 지나자, 트럭을 이끌고 설산 속으로 사라졌던 보안위원들이 속속 복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부탁한대로 푸딩 박스들을 눈밭에 숨기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듯 장갑과 장화에 아직도 눈이 묻어있는 것이 보이네요. 그리고, 약간의 그을린 흔적도 보입니다.

"역시 사무국의 자랑 답군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지형이라 약간 걱정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제가 맡긴 명령을 훌륭히 수행하여 주셨군요."

"아닙니다, 비서실장님!"

"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붉은겨울 학원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하죠. 트럭 한 대는 복귀를 위해 준비해두었으니 금방 복귀할 수 있을겁니다."

차례차례 보안위원들을 트럭에 탑승하는 걸 지켜보고 난 뒤, 마지막으로 트럭에 탑승한 저는 천천히 트럭이 출발하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습니다.

구교사가 위치한, 학원 부지 외곽이면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 그러면서도 지형이 험하고 학원 본관에서도 거리가 멀어 수색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곳.

제가 생각한 계획을 실천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역시, 임무를 하달할 때 맡았던 시큼한 과일 냄새였어요.

잠시 눈을 감았더니, 어쩐지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게헨나 학원에서 체리노 회장님을 찾아뵙기 위해 오셨던 일.

페로로를 붉은겨울 학생으로 편입하기 위한 작전을 실시하였다가 마리나 위원장이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던 일.

그리고, 쿠팔라 축제 전에 벌어진 쿠데타를 이유로 구교사까지 체리노 회장님과 선생님이 함께 대피를 갔던 일이 떠오릅니다. 구교사에서 227호 특별반 학생분들을 만났지요.

그 때도 분명.... 그래요. 체리노 회장님이 노도카 양과 승부를 벌였을 때. 시큼하면서도 과일향이 풍기는 냄새. 시구레 양이 만든 캄포트 냄새였습니다.

어째서 캄포트 냄새가... 구교사에서 멀리 떨어진 설산 한가운데서 풍겼던 걸까요? 구교사의 학생분들이 설산 한가운데서 눈사람이나 만들러 멀리까지 나갔을 리는 없고, 분명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큰 위협이 되지 않으니 이 사건은 나중으로 미뤄두죠. 붉은겨울 학원에 복귀하고 나면, 온 학원생 앞에서 펼칠 연설의 내용이 확인되지도 않은 인기척보다는 중요하니까요.

덜컹거리는 트럭의 진동과 함께, 저는 연설에서 어떤 문장을 써야 잘 전달될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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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2 (모두 수고..) 22:16:52


"수고하셨습니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긴 했지만,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니 서둘러 복귀하시죠."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학원 부지의 외곽 중에서도 외곽, 구교사가 있는 설산에서 '임무'를 완수한 보안위원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졌습니다. 점심 배급이 끝나기 전에 학원에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현재 시간은 12시 40분. 연설을 하기로 예정된 시각은 오후 3시이므로 아직 여유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이번 식사도 체룐카 초콜릿으로 떼우고, 연설 준비에 집중해야겠어요. 분명 연설문 작성에 자주 쓰였던 타자기는 사무국 안에...

"저기. 오늘 푸딩 배급 받았어?"

"아니, 너는?"

"그치? 너도 못 받았지? 급양부원들에게 물어봐도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뭐 알려주는게 없다니깐... 가뜩이나 점심만 먹으면 배가 별로 안차는데.."

"푸딩을 만드는 데 쓰일 재료가 폭풍이 오는 날에 얼어버려서 그렇다는 말이 돌고 있긴 해. 얼어버린 걸 다시 녹이는게 얼마나 힘든지는 너도 잘 알지 않아?"

"그렇긴 해도! 푸딩은 중요사항이야! 어제도 갑자기 엄청 추운 폭풍이 휘몰아쳐서 할 일도 제대로 못했다구! 하루의 고된 노동을 버틸 유일한 낙이었는데... 어제 받은 푸딩은 평소 받는 푸딩보다도 훨씬 맛이 밍밍했어."

"추워서 설탕이 잘 섞이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그건 분명 물을 더 타서 그런 밍밍한 맛이 나는거야! 내가 깜빡하고 냉동고에 넣어놨다가 2개월 만에 발견한 푸딩을 먹어봐서 알거든. 아무리 차갑다고 해도 그렇게 밍밍해지지는 않아!"

"그래, 자랑이다."

사무국으로 향하던 도중, 지나가던 학생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확실히, 많은 학생들이 이상함을 느낀 듯 하군요. 평소에도 푸딩을 만들 때, 물을 타는 일은 그리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고 해도...

평상시의 2배나 물을 첨가했다는 것은 어지간히 둔감한 학생이 아니라면 그 차이를 인지하였겠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 들이닥쳤던 갑작스런 폭풍은 붉은겨울 학원의 대다수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 폭풍을 원인으로 삼자 많은 학생들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수긍하는 듯 하였지만, 역시 얇은 거짓말은 빠르게 깨어지는 법이지요.

하지만, 프로파간다의 기본 원칙을 이용한다면 금방 다시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바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로 덧씌운다는 것이지요.

오늘 오후에 있을 연설의 중요성이 더욱 올라갔음을 직감한 저는, 더 이상 연설 준비가 지체되지 않도록 서둘러 사무국 본관으로 향했습니다.

거짓말을 덮어씌울 만큼의 거짓말은, 정성스럽고 상세하게 준비해야 하니까요.

****

오후 2시 55분.

아직 연설까지 5분이 남은 시각이었지만, 연설이 진행될 장소인 혁명광장에는 벌써 수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는 상태였습니다.

일반 학생들부터, 지식해방전선. 그리고 용역부의 학생들까지 광장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습니다. 가능한 많은 학생분들이 모이길 바라긴 했지만..

이렇게 뜨거운 관심이 모일 것이라고는 약간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평소에 체리노 회장님이 벌이는 연설이 받는 관심과 비교한 것이 원인일지도요.

"하아. 역시 발전기 옆에 있으니까 더 따뜻하다... 학원 구역의 대부분을 커버한다고 해도, 역시 멀어질 수록 추워진단 말이지."

"그러게. 공용 기숙사도 요즘 온수가 나오지 않는 때가 더 많아졌어. 평소에도 잘 나오지는 않았지만, 폭풍 때문에 온도가 더 내려가서 그런가... 오늘 아침에는 온수는 커녕 물이 나오다가 그대로 얼어버렸고."

"사무국보다도 발전기랑 멀어져 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겠지. 아아. 그나마 급식소는 광장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다.

밥 먹을때 마저 추위에 떨면서 먹어야 했다면... 급식소 안에 당장 장작더미를 가득 쌓고 불을 올렸을거야."

"그러면 스프링쿨러가 가동되지 않을까? 그 전에, 연기로 가득차서 금방 기절할 것 같은데."

"얼어 죽는 것보다 차라리 온기와 함께 죽는걸 고를래."

폭풍으로 인하여 평소보다 더 심해진 추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학생분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도 푸딩이 나오지 않았지? 이상하네."

"아침도, 점심도 없었으니 저녁때 나오지 않을까? 그래도 하루에 하나는 대체로 주는 편이고 말이야."

"응. 그러길 바래야지. 어제 받은 푸딩도 평소보다 단 맛이 덜하기도 했고... 오늘도 저질스러운 맛이라면 약간 화날지도 모르겠어."

"아. 마침 용역부도 그 소리를 하더라. 오늘 거리에서도 용역부원들이 모여가지고는 뭐라 뭐라 외치고 있던데?"

"또 쿠데타 준비를 하는걸까나? 근데, 용역부가 사무국을 차지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푸딩을 만들 수 있기는 할지 모르겠네. 급양부원들,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면..."

늦어지는 푸딩의 배급과 푸딩의 상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학생분들.

안타깝게도, 체리노 회장님이 없으신 붉은겨울 학원은 여러가지 문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존재가 부재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붉은겨울 학원이 문제라는 이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학생들의 시선과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물이 반 정도 차있는 물컵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물잔에 물이 절반 '밖에' 없을 수도 있고, 물이 절반 '이나'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연하고 널리 알려진 말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 쉬워지지요. 앞으로 제가 학생분들에게 들려드릴 연설은, 그저 간단한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것 뿐입니다.

시계의 분침이 정확히 정각을 가리키자, 저는 단상 아래에서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단상 앞으로 걸어나갔습니다.

단상 앞에 서서 혁명광장에 모인 수 많은 학생들을 바라보자, 방금 전까지도 이런 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소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자, 이제 연설을 시작할 시간이네요.

"반갑습니다.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 여러분. 저는, 체리노 회장님의 비서실장을 맡고있는 사시로 토모에입니다."

마이크를 들고, 자기소개를 하자 광장의 수 많은 눈들이 저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귀중한 시간을 내어 광장에 모여주신 학생분들께 감사를 표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이 곳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을 전하기 전에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하는것이 효과적입니다.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거든요.

"....죄송합니다."

저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집중해서 듣고있던 청중들은 순식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사과를 베어물었더니 초콜릿의 맛이 느껴지는 상황과 비슷하겠지요. 제가 노렸던 반응이기도 합니다.

"-비서실장! 어떤 점이 미안하다는거냐! 이렇게 학생들을 모아놓고, 뭐 때문에 하는 사과인지는 알려줘야지!"

어디선가 확성기를 가지고 온 용역부 차림의 학생이 특유의 확성기음이 섞인 목소리로 외칩니다.

물론,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는 시점에서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부터 실수가 허용되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이 자리에 모여주신 학생 여러분도 어렴풋이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붉은겨울 학원의 역사상 유래없는 혹독한 폭풍이 들이닥치고 나서, 수 많은 문제점이 터져나왔습니다.

평소보다 더 추운 날씨. 평소보다 밍밍한 푸딩. 하지만,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제가 연설을 진행하는 동안, 미리 부탁해둔 대로 제 옆에 친위대원 몇 명이 신속하게 구교사 근방의 지형을 표시한 지도를 설치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친위대원에게 나무로 된 봉을 건네받은 이후,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들을 위한 푸딩을 배송 중이던 운송트럭이, 학원 부지의 외곽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아까부터 이어졌던 술렁거림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까진 예상 범위지만, 이 무질서함이 통제를 잃고 더욱 커지기 전에 자세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 낫겠죠.

나무봉으로 구교사의 지형을 담은 지도를 짚으며,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폭풍 이후,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하여 푸딩의 생산량에 차질이 생기자, 우리 붉은겨울 사무국은 모든 학생들에게 평등하게 푸딩을 배급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구교사 근방에 방치되었던 한 물자창고에서.... 비상시를 대비해 푸딩을 비축해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죠."

구교사 근방은 험한 지형과 어려운 접근성 때문에 물자창고와 같은 건물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지어지지 않은 창고에 귀중한 푸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을 듣고있는 학생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잊혀져 있는 창고에 가득히 쌓여있는 금빛을 내뿜는 푸딩으로 이루어진 산이, 희망이 자리잡고 있을거에요.

"이 정보를 입수하자 마자 우리 붉은겨울 사무국은 푸딩을 회수, 운송하기 위한 운송대를 구교사 근방의 물자창고로 급하게 파견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지형의 험난함과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으로 인해, 푸딩 운송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붉은겨울 사무국을 대표하여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단상 옆으로 조심스럽게 나온 후, 다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자 웅성거림이 조금은 잦아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다시 허리를 피고, 군중을 바라보자... 방금 전, 확성기를 들고 있던 용역부원이 다시금 무언가를 말하려는 모습이 보이는군요.

연설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11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18:43


삐이익-

확성기 특유의 까칠한 소리가 광장을 지나간 뒤, 다시 성난 목소리가 단상을 향해 울려댑니다.

"결국 가져온 푸딩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아닌가! 우리 손에 쥐어줄 푸딩도 하나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사과로 우릴 속이려는 사무국을 규탄한다!!"

"규탄한다! 규탄한다!"

확성기를 든 용역부원의 주변으로 다른 용역부원들이 합세하여 하나의 외침을 만들고 있습니다. 용역부원들을 본 시점부터 예상하고 있었지만, 역시 이런 일이 일어나는군요.

하지만, 자고로 프로파간다는 누가 흐름을 타느냐에 대한 싸움입니다.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으로 덮어 씌우고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사실'의 방향을 약간 바꾸는 것이야 말로 프로파간다의 기본.

따라서, 프로파간다의 결과는 두 가지 뿐입니다. 흐름의 방향을 바꾸거나, 아니면 빠져 죽을 뿐입니다. 물론, 제게 있어서는 하나의 결과만 남겠지만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나서, 용역부원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다시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여러분의 손 위에 전해드릴 수 있는 푸딩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번 연설을 진행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의 연장선이지요.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다시 푸딩을 찾아서, 가져오는 것이지요. 설마 붉은겨울의 용맹한 보안위원들을 그 정도 단순한 일도 하지 못할 것이라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요?"

싱긋 웃으며 용역부원들을 쳐다보자, 마치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빈틈이에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 들어야 합니다.

"여기 모여계신 붉은겨울 학원의 청중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학원의 강력하고 용맹한 보안위원들이 잃어버린 푸딩을 되찾아 오는 과업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까?"

""예!""

군중 속에 섞여있던 여러 보안위원들과 함께 몇몇 학생들이 제 질문에 대답해주셨습니다.

비록 사무국의 보안부대가 종종 회장님의 쿠데타를 일으키긴 하지만, 보안부대의 강력한 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예상보다는 동조하는 학생의 수가 조금 부족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신대로, 붉은겨울 학원의 강하고 신속한 보안위원들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염원대로, 설산 속에 쓸쓸히 묻혀있는 푸딩을 되찾기 위한 수색대를 편성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용맹하면서도 훈련을 받은 보안위원들이 빠르게 설산을 수색할 것이며, 우리들이 잃어버린 푸딩을 눈 깜짝할 사이에 되찾을 수 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청중들을 둘러보며 힘 있게 마지막 문장을 말하자, 어느 정도의 학생들은 제 말을 신뢰하는 눈치였습니다. 물론, 용역부원들은 그렇지 않았지만요.

"결국 사무국의 부대가 푸딩을 찾아내서 자기들끼리 독식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일반 학생들에게 힘겹게 찾아낸 푸딩을 배분할거란 보장이 어디있나!"

"어디있나! 어디있나!"

확성기를 타고 울려대는 외침을 들은 저는 잠깐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쩜 저렇게...

가려운 곳만 긁어줄 수 있는걸까요.

"마침 좋은 질문이 들어왔으니,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제가, 다른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소리를 했던가요?"

"그, 그야 보안부대를 중심으로 결성한다면-"

"중심으로 라는 말은, 주축으로 삼는다는 뜻이지 다른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붉은겨울 사무국을 대표하여.

우리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들이 눈 앞에 펼쳐진 역경과 어려움을 우리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당당한 눈빛으로 단상 주변에 모여들은 청중들을 바라봅니다. 청중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자신감을 청중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도록.

"학생 여러분. 방금 들으셨겠지요? 모두의 마음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부정할 것 없습니다. 부정할 것 없지요.

각자의 생각과 마음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붉은겨울 연방학원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의견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들이 겁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확성기를 들었던 용역부원도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이 속도를 유지해야 해요.

"언제부터! 설산의 차갑고 혹독한 바람이 우리 붉은겨울 학원의 정신을 꺾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신건가요? 여기 계신 학생분들이, 여러분들이! 그 설산에 묻혀있는 푸딩의 당연한 주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광장에 모인 수 많은 눈과 귀가, 단상을 향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학생 동지들이여! 푸딩의 위대한 해방을 위한 사명은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몫입니다. 우리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그들에게,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해쳐나갈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네!!"""

"학생 동지들이여! 강력하고 혁명적인 수색작전을 펼칠 준비가 되어있는 영웅적인 학생들의 얼굴을 환영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웅들에게는, 푸딩을 지키기 위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푸딩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허물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우리 뒤에 있는 대다수의 학생이!

우리 뒤에 있는 굶주리는 학생들과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이!

우리 뒤에 정의실현이!

우리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성과 열정이 광장에서 바깥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미소를 지으며 군중을 향해 화답하였습니다.

정말 성공적인 연설이었습니다.

****

"오셨습니까. 비서실장님."

"네. 마리나 위원장. 연설 보좌에 필요했던 친위대원들을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간에 박수가 필요한 부분이 있었는데... 덕분에, 흐름을 가져올 수 있었어요."

"훗. 용맹한 보안위원들에게 고작 박수갈채를 치는 일쯤은 별 것 아닙니다."

마리나 위원장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이는 동안, 저는 회장님의 집무실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습니다. 혹여나 회장님이 돌아오시고 나서 의자의 푹신함이 덜해졌다고 의심하면 안되니깐요.

"그런데, 비서실장님... 오늘 구교사 구역에서 발생한 사고는 구교사 방면에서 나오려다가 일어난 사고가 아닌 구교사 방면으로 들어가려다 일어난 사고라고 들었습니다. 어째서 연설에서는 내용이 달라진건가요?"

작전을 수행한 보안위원들에게는 마리나 위원장에게 올리는 보고에 자세한 내용은 함구한 채로 전달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지만, 역시 여기까지는 숨길 수 없었나보군요.

하지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저는 잠깐 생각을 거친 후 마리나 위원장에게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아뇨. 연설에서 말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구교사 근방의 물자창고에서 푸딩 박스를 회수한 운송대는 붉은겨울 학원 본관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폭풍으로 인한 폭설 때문에

기존에 기록되었던 길이 막혀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지요. 즉, 구교사가 있는 지역에서 나오기 위해 다시 들어가는 방향으로 향하다 사고가 난 것입니다. 따라서, 구교사를 나오려다 일어난 사고는 맞지요."

"과연, 그렇게 된 것입니까."

물론, 운송 트럭에 회수한 푸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수색대가 수색 활동을 벌일 때 찾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숨겨놓은 푸딩은 구교사 근방의 지역에 널리 묻혀있지만요.

보안위원들과는 이미 말을 맞춰놓은 상태니, 이 정도 설명으로도 마리나 보안위원장은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수색대의 활동은... 정말 친위대원에 다른 일반 학생들을 받아들여도 괜찮습니까? 오히려 전체적인 속도에 맞추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들은 친위대 만큼이나 용맹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구교사 근방은 험한 지형 덕분에 속도가 느려질 테니 크게 티가 나지 않을겁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친위대와 달리, 일반 학생들을 수색대에 함께 합류시키는 것은 당연히 수색 속도를 늦추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제가 노리는 목적이기도 하지요.

스스로가 직접 참여하여, 푸딩이 별로 나오지 않더라도 그건 붉은겨울 학원 사무국의 잘못이 아닌 스스로가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하여

실질적인 배급량이 증가하지 않더라도 그 불만이,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을 향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한 달 정도의 긴 시간이라면 먹히지 않겠지만, 우리가 버텨야 하는 기간은 이제 일주일도 조금 안되는 시간. 그 정도의 기간 동안은 충분히 가능할거라 생각합니다.

"아, 슬슬 저녁 배급 시간이군요. 비서실장님도 함께 공용 급식소에 가시겠습니까?"

"아뇨. 제가 가면 급양부원들은 회장님의 대리직인 저를 챙겨주려 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학생들의 공분만 사게될겁니다. 저는 알아서 저녁을 먹을테니, 마리나 위원장이야 말로 든든히 식사를 하고 돌아오세요."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마리나 위원장이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나가자, 집무실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어떻게든, 오늘 하루도 넘겼군요.

오후의 연설에서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쓴 탓인지, 저도 단 음식이 땡기기 시작했습니다. 체룐카 초콜릿이라던가. 아니면....

"....캄포트."

불현듯, 설산에서의 작전을 지휘할 때 맡았던 시큼하면서도 과일향이 풍겼던 냄새가 떠오릅니다.

...어째서일까요. 이 불길한 느낌은.

12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19:59



"어서와, 비서실장. 227호 특별반에 온 걸 환영해. 먼 길 오느라 목 마를텐데, 이거라도 마실래?"

"시구레 양. 아무리 구교사라고 하더라도 학생이 술을 마시는 건 붉은겨울 학원의 교칙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들켜 버렸네. 그럼 이건? 붉은겨울 학원에서도 보급하는 캄포트야. 물론, 구교사의 시설이 미비해서 약간 발효되기는 했지만..."

"하아..."

구교사에 머무르고 있는 학생들 중 일부 학생들이 모여 구성한 227호 특별반.

본래라면 자주 방문해야할 일이 생기는 곳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이번으로 세 번째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음료는 다음으로 미루고, 자. 비서실장. 이번이 몇 번째 방문이더라?"

"세 번째 방문입니다. 시구레 양. 첫 번째는 쿠팔라 축제 전에 일어난 쿠데타로 인해 피난을 왔을 때 방문하였죠."

"그래. 두 번째는 온천이 지어지고 나서 체리노 회장이랑 마리나 위원장과 찾아왔었지."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네요. 시구레 양."

"그러네. 친위대도 아니고, 붉은겨울 학원의 본교사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비서실장을 자주 보게 된다는 것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어둠 속에서 별을 보는-"

"슬슬 본론을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구레 양."

"잠깐 잡담을 나눌 시간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비서실장. 그렇게 단호한 눈빛으로 쳐다볼 것 까지는 없잖아?"

"아니요. 이제 잡담은 충분히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으로 저를 부른건, 시구레 양이니까요."

****

혁명광장에서 성공적인 연설을 마치고 난 다음 날. 또 다시 집무실에서 밤을 보냈다는 것을 집무실의 책상 위에 놓여진 제 이마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앉으시는 의자가 푹신해서 망정이지, 일반적인 나무로 된 의자였다면 분명 점심 까지는 앉아있을 수 없었겠죠.

내일은 기필코 체리노 회장님의 집무실이 아닌 제 숙소에서 수면을 취해야 겠다고 다짐을 한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책상 위에 올려진 달력을 발견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달력을 주워들어 바라보자 이틀 전의 칸에 표시된 붉은 색의 별 모양 표시가 보입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보시는 달력이니까요.

회장님이 외부 학원으로 향하는 중요한 일정을 까먹지 않도록, 특별히 붉은 색의 마커펜으로 표시를 했었는데...

"...그립네요. 그 날이."

분명 그 때 회장님은 '그 정도는 당연히 기억할 수 있다, 토모에! 그렇게까지 표시할 필요는 없어.' 라고 하셨지만...

"그 날도 늦잠을 자셨지요. 후후. 그래서 짐을 챙기는 일도 저에게 일임하시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실 준비를 하셨던 모습이 매우 귀여웠는데.."

고작해야 이틀 전의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매우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없으셔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요.

아니면,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이 회장님의 위엄과도 같이 거대한 사건들만 일어나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너무 상념에 잠겨있었군요. 잠시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이제부터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달력을 보며 날짜를 세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기까지 4일이나 남았군요. 체감 상으로는 벌써 일주일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만..."

하지만, 달력을 지그시 쳐다본다고 해서 날짜가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기 까지 남은 시간도 그대로고,

회장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붉은겨울 학원을 유지하는 것이 제 일이라는 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슬슬 오늘 일과를 살펴봐야겠네요. 현재 시각은 오전 7시 24분, 아침 배급까지는 아직 36분의 시간이 남았으니 여유롭게 출발해도 될 것 같고..

오전 10시에는 구교사 방면으로 출발하는 수색대의 출발식이 예정되어있고, 오후 2시에는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붉은겨울 출판부 시찰이-"

모톡!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수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아. 모모톡이 왔다는 알림소리군요. 수첩을 잠시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낸 저는 새롭게 빨간 알림이 붙어있는 모모톡 앱을 눌렀습니다.

[시구레] [1]

....시구레 양? 시구레 양이라면.... 분명, 구교사로 정학 처분을 받은 학생분들 중 한 명이자 '227호 특별반'이라는 구교사의 임시 시설에 머무르고 있는 분이었지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건지 궁금증이 들었지만, 일단 도착한 메세지의 내용을 먼저 확인하고자 안 읽은 메세지를 터치했습니다.

[비서실장.]
[....]

제가 메세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뜨자마자, 바로 다음 메세지가 작성되고 있네요. 제가 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요?

[이제야 이 쪽을 봐주는구나?]

....이 대사는 분명, 몇 주 전에 지식해방전선의 메루 양에게서 압수한 만화책에서 본 적이 있었던 대사입니다.

[별 건 아니고, 혹시 오전 중에 구교사에 방문해줄 수 있을까?]

[구교사 말인가요? 죄송하지만, 오전 중에는 일정이 있어서 방문이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

구교사로의 방문이라니, 오전 중에는 수색대의 출발을 배웅해야 하는 일정이 있을 뿐더러 학원 본관에서 구교사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걸립니다.

혹여나 간다고 해도, 아침을 또 다시 체룐카 초콜릿으로 때우고 출발한다고 했을 때. 볼 일을 마치고 본관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점심 배급이 끝나기 직전 쯤에야 도착할 수 있을거에요.

[설산]
[트럭]
[푸딩]

거절의 뜻을 다시금 밝히기 위해 손가락을 옮기려던 찰나, 세 개의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를 보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알고있는거죠?

[어제 꽤나 떠들석한 연설을 벌였더라고?]

[구교사에 있는 학생들은 알지 못할거라고 생각한걸지도 모르지만.]

[할 말도 있고, 간만에 얼굴도 좀 볼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시간 있으면 특별반에 좀 들러줘~]

시구레 양의 메세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지만, 제 생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설산에서 푸딩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시구레 양이 목격한 모양이에요.

게다가, 어제의 연설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분명, 보안위원들과 함께 작전을 지시했던 내용까지 들었을 확률이 대단히 큽니다.

그 때 맡았던, 시큼하면서도 과일향이 풍겼던 캄포트 냄새. 시구레 양이 그 곳에 있었군요.

설산 한 가운데에서 인위적인 원인이 아니라면 풍길 수 없었던 향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더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면...

....하지만 지금 후회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당시의 설산의 환경을 생각해봐도, 빽빽한 나무와 잔뜩 쌓여있는 눈의 특성 상 주의를 기울였어도 시구레 양을 발견하기는 힘들었을거에요.

그렇다면 남은 방안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시구레 양의 부탁대로, 구교사를 방문하는 것이죠. 참. 출발하기 전에 마리나 위원장에게 잠시 메세지를 남겨놓아야 겠습니다.

[마리나 위원장. 수색대가 도착할 예정인 구교사 근방 지역을 미리 시찰해보고 오겠습니다. 저번처럼 트럭 한 대를 몰고 갈 예정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

다시 현재로 돌아온 지금, 시구레 양은 아까보다 가늘어진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후후. 그렇지. 여기까지 비서실장을 부른건 나였으니까. 일단, 구교사까지 먼 길이었을텐데 수고 많았어."

"그럼 이제, 어떤 일로 불렀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시구레 양? 이미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 비서실장을 여기에 부른 이유 말인데...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안에 들어가서 할까? 적어도 바깥보단 따뜻할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시구레 양은 구교사의 문의 손잡이에 손을 얹고, 문을 열기위해 힘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요.

"잠시 실례할게. 가끔 너무 추워지면 문이 그대로 얼어버려서 열기 힘들어질 때가 있거든. 조금 힘을 더 주다보면 금방 열릴거야."

그렇게 문에 매달려 두 손으로 낑낑거리며 문을 열려고 했던 시구레 양은, 뭔가 될 것 같다면서 더욱 힘을 주더니-

콰앙!!

큰 소리와 함께, 얼어있던 문이 순식간에 열렸습니다. 시구레 양도 큰 소리에 잠깐 놀란 것처럼 보이네요.

"..놀랐지? 가끔 이래. 그래도 한 번 열어두면 몇 시간 동안은 잘 열리니까, 비서실장이 갈 때 까지는-"

끼이이익- 쾅!

힘차게 열렸던 문은, 조금 앞쪽으로 기울어지는 듯 보이더니 이내 깔끔하게 넘어가면서 바닥으로 엎어졌습니다. 문 앞쪽이라 눈을 치워놓아서 그런지 넘어진 문에 달려있던 창문도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노도카에게 혼날지도 모르겠네. 자. 일단 안으로 들어와. 비서실장. 이렇게 된 김에 빠르게 이야기를 끝내는 편이 낫겠어."

일단 시구레 양을 따라 구교사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보다도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습니다. 보통은 건물 안이 바깥보다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이 곳은 건물 안이 더 싸늘하군요.

"후우- 그래도 이 시간대라면 입김까지 나올 정도는 아닌데... 오늘은 햇빛이 좀 덜한 날이라서 그런가 봐. 비서실장."

"괜찮습니다. 추운 건 익숙하니까요. 시구레 양."

시구레 양을 따라 한 교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나무판자로 창문과 나머지 문을 막아놓은 모습. 그리고, 그런 나무판자 사이사이에도 고드름과 얼음이 서려있는 광경이 보이네요

쿠팔라 축제 전, 이곳으로 왔을 때는 이 정도로 춥지는 않았었는데...

"자. 비서실장. 멀쩡한 의자를 찾느라 힘들었어. 저기에 앉아."

교실 안에는 책상 두 개와 의자 두 개가 서로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놓여있었습니다. 마치 1:1 면담을 하는 모양과 비슷하군요.

왠지 모르게 매캐한 연기를 손으로 쫓은 시구레 양이 안쪽의 의자에 앉고, 저는 바깥쪽의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시구레 양?"

13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21:59


"그럴까? 아, 일단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모모톡으로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진짜 와줄지는 반신반의였거든."

"아무리 구교사에 정학처분을 받은 학생이라도,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콜록."

"아. 그러고보니 교실 안의 공기가 좀 매캐하지? 환기도 어려워서 일단 문이라도 열어서 환기시키려고 했는데 역시 부족했나보네. 그래도, 막 숨을 쉬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나도 견딜만 하니까 아마 괜찮을거야."

아까부터 느껴진 매캐한 공기의 원인을 찾으려 교실 곳곳을 둘러보자, 처음 교실에 들어왔을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다 타버린 장작더미와 건물 곳곳에 생긴 그을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건..."

"응. 우리가 이곳에서 '생존'하느라 고생한 흔적이야. 특히나 이틀 전에, 대폭풍이 몰아치고 나서부터."

저는 이틀 전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갑작스럽게 낮아지는 온도,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눈폭풍. 그리고....

"평소 같으면 땔감이라도 더 주워서 버텼을거야. 그런데, 땔감을 주우려고 바깥 쪽으로 가려고 하니..."

"하얀 벽을 마주하셨군요. 시구레 양."

"비서실장은 그걸 그렇게 부르는구나? 하긴, 하얀 벽이란 이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붉은겨울 수염공항에서 마주한, 눈보라로 이루어진 하얀 벽을 떠올립니다. 이런 저런 분석기록을 보면서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이번 폭풍은 붉은겨울 학원을 전체적으로 감싸듯이 몰아치고 있는군요.

특히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강한 눈보라와 칼과 같은 바람으로 이루어진 하얀 벽은 붉은겨울 학원에서 그 어떤것도 나가기 힘들도록 모든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학생의 출입도, 전파의 통신도...

"그렇게 첫날은 완전히 얼어붙을 뻔했어. 중간에는 왠지 모르게 눈보라가 잠깐 잦아들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는 몇 배나 오는 정도였거든. 저 흔적들도 주로 첫 날에 만들어진거야."

첫 날에 발전기를 가동하면서 눈보라가 조금 잦아들었던 것 같군요. 하지만, 발전기의 효과는 점점 멀어질 수록 그 효과가 덜해집니다.

즉, 발전기와 매우 먼 거리가 떨어져 있는 구교사는... 발전기의 가동이 별 효과를 주지 못했을거에요.

"그래서... 어떻게든 불을 피우면서 버텨보려고 했던거군요."

"정답이야. 비서실장. 라이터로 켜보려고 했는데, 라이터도 몇 개는 얼어버리는 통에... 잠깐 '특별한 음료'를 이용해서 불을 피웠어. 그러다가 건물에 불이 붙을뻔한 적도 여러번 있었지."

건물이 그을린 흔적도, 그래서 생긴 것이군요. 엄청난 혹한에 불을 피우고,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노력한겁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도 불을 유지하기 위해 끼얹던 것이겠죠.

"자. 불편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그럼 이제 비서실장이 원하는 본론에 들어갈까?"

"부디 의견을."

"비서실장도 느껴서 알겠지만, 이 곳 구교사는 환경이 열악해. 특히 폭풍이 오고 난 다음날부터는 더욱 더. 이제 목욕을 한지도 3일째고..."

"배관까지 얼어붙은건가요?"

"배관은 진작에 얼어붙어버렸어. 비서실장. 평소에는 근처 강에서 목욕을 하는 구교사 학생들이 대다수야.

그런데, 폭풍이 몰아치면서 강까지 완전히 얼어붙어버리면서... 겨우겨우 얼음을 깨도, 그 안에는 더 많은 얼음이 있을 뿐이었고..."

"저번에 남은 온천탕은... 설마, 거기까지....?"

"거기까지 얼어붙었어. 온천개발부가 전부 터트리고 겨우 하나 남은 좁은 온천탕 마저도 꽁꽁 얼어버렸어. 그래서.."

"평소보다 힘들어진 환경에, 더 추워진 날씨에... 이젠 목욕까지도 힘들어졌다는 것이군요. 그런 이유로 저를 부른건가요, 시구레 양?"

"그게 내가 비서실장을 부른 이유야. 평소에도 우리를 쳐다보기는 커녕 신경도 쓰지 않다가, 쿠데타가 터지거나 온천이 터지는 큰 사건이 있을때만 한 번씩 오는 정도잖아?

그런데, 어제 땔감을 줍다가 우연히 비서실장이 뭔가 하는 모습을 봤어. 얼핏 들어보니 뭔가 비밀스런 일을 하는 것 같았지. 그래서, 그걸 이용하면... 그래야 곤경에 처한 우릴 좀 봐줄 수 있을 것 같아서..."

"......"

시구레 양이 평소답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쳐다보는 듯 합니다. 마치, 써서는 안될 방법을 썼다는 듯이..

"...이 방법 밖에 없었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비서실장은-"

"네. 저의 잘못이 맞습니다. 시구레 양."

".....뭐?"

"시구레 양이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구교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알지 못했을겁니다.

아무리 정학생이라고는 해도, 결국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죠. 현재 부재중이신 체리노 회장님을 대신하여, 부족했던 지원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왠지 모르게 당황하는 시구레 양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게 까지 사과 받으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야! 게다가, 평소에 보여줬던 그 뻔뻔한 모습은 어디갔어? 체리노 회장 옆에서 항상 이건 기록하고 저건 보관하고 그랬었잖아."

"체리노 회장님에 대한 기록은 중요한 일입니다. 시구레 양.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구교사에 대해서 소홀히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아무리 과중한 업무가 밀려든다고 하더라도, 학생을 최우선으로 판단했어야 했습니다. 체리노 회장님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저보다 먼저 구교사를 확인하시었겠죠."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후후. 비서실장도 이런 유능한 면이 있었을줄이야."

"회장님을 바로 곁에서 모시는 입장에서, 유능함은 덕목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화해의 기념으로 한 모금. 어때?"

"그건 안 됩니다. 시구레 양.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술을 섭취하는 행위는 붉은겨울 학원의 교칙에 위배되는-"

"으으. 농담이야. 농담이라니까..."

****

각종 생필품과 여러가지 자원들의 목록이 빼곡히 적힌 한 장의 리스트를 바라보던 저는, 뒤에서 구교사를 정리하던 시구레 양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목록에 있는 물건들로 충분한가요, 시구레 양? 원하신다면, 폭풍이 끝날때까지 임시로 본교사에 머무르실수도 있습니다만."

"응. 그 정도로 충분해. 비서실장. 그 목록에 적은 것도 노도카랑 여러 구교사 애들과 적은 것들이거든. 즉, 모두의 염원이 이미 빼곡히 담긴 리스트라는거야."

"확실히, 시구레 양 혼자서 작성한 것 같지는 않네요. 글씨체도 여러 가지로 적혀있고 요구하는 기호품들도 제각각이었으니까요. 얼어버린 망원경 렌즈를 대신할 새로운 렌즈, 달콤한 체룐카 초콜릿 4박스. 그리고, 보드...."

잠시 수상한 물품 목록을 확인한 저는 종이에서 시구레 양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갑자기 벽에 생긴 얼룩을 열심히 쳐다보고 계시는군요.

"그건... 혹시나 다시 올지 모르는 혹독한 폭풍을 대비해서 갑자기 불을 피울 수도 있으니까. 비상시를 대비한 물건이야. 비서실장."

"불을 피울 때 사용할 수 있는 촉진제 용도의 기름을 보내드리죠. 시구레 양. 괜찮겠지요?"

"...응. 괜찮을 것 같아."

왠지 풀이 죽은 시구레 양이었지만, 역시 보드카를 보내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비상시를 대비한 물건이라고 해도 혹여나 섭취에 사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 혹여나 다칠 수도 있으니까 소독약 대신으로 보드카를 보내주는건 어떨까. 비서실장? 애초에 의약품도 근처에 핀 약초로 해결하고 있었으니, 그 정도는-"

"소독약은 원래 목록에 적혀있는 품목이었습니다. 시구레 양. 그런 얇은 속임수는 통하지 않아요."

"들켜버렸네~"

시구레 양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물품 목록을 다시 한 번 처음부터 확인한 저는, 보드카와 같은 문제 품목 몇 개를 제외하고 품 속에 넣었습니다.

"붉은겨울 학원 본관으로 돌아가는 대로, 친위대원에게 목록을 전하여 필요한 물품이 구교사로 이송되도록 하겠습니다. 오후 3시 전까지는 도착할거에요. 시구레 양."

"좋은 소식이네. 폭풍이 끝나는게 4일 뒤라고 했지? 목록에 적은 정도만 받아도, 그 정도는 버틸 수 있겠어."

"그래도 일주일 치를 넉넉하게 채워드리겠습니다. 폭풍이 끝난 뒤에도 요긴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거에요."

"그럼, 체리노 회장이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물자를 지원해줄 수 있을까? 우리가 본교사로 되돌아 가는 일은 아무래도 요원한 일인 것 같고..

학원에서 조금이라도 물자를 보태준다면, 훨씬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거든."

"후후.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랍니다. 시구레 양. 체리노 회장님께서 결정하시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회장님이 돌아오시고 나면, 정식으로 건의를 해보겠습니다."

"역시 그려려나... 잘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마워. 비서실장. 가는 길에 캄포트 한 병이라도 챙겨줄까?"

"네. 부탁드립니다."

"응? 진짜로?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비서실장."

"시구레 양이 담근 캄포트는 술이 아니라, 발효된 음료라고 하셨지요? 교칙으로 본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뿐더러 이렇게 설탕을 많이 넣은 캄포트는 시구레 양이 만든 캄포트가 유일하답니다."

"하긴, 다른 곳에서는 구교사의 혹한을 이겨내기 위한 충분한 설탕을 추가할 필요는 없으니까."

시구레 양이 건물 어딘가에서 꺼내든 캄포트 한 병을 조심스레 받아든 저는, 구교사 바깥으로 나가 주차된 트럭의 조수석에 살포시 보관하였습니다.

비록 수색대의 출발식에 참석하는 일정을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정을 완료했으니까요. 분명, 체리노 회장님도 훌륭하다는 말씀을 하셨을겁니다.

"그럼, 잘 가. 비서실장~"

안전벨트를 매고 트럭에 시동을 걸자, 구교사의 열린 문 사이로 시구레 양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왠지 모를 미소가 지어진 저는 똑같이 손을 흔들어 준 뒤, 캄포트에도 안전벨트를 매고는 조심스레 붉은겨울 학원의 본관으로 복귀를 시작했습니다.

14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23:27


점심 배급 시간을 조금 넘긴 시간. 구교사에서 캄포트 한 병과 함께 무사히 붉은겨울 사무국 본관으로 복귀를 완료했습니다.

본관 앞으로 트럭을 주차하자, 몇 명의 친위대원들이 저를 마중나오는 모습이 보이네요. 저는 창문을 열어 인사를 건네고 난 뒤, 구교사에서 받아온 물품 목록을 친위대원에게 건넸습니다.

"오셨습니까, 비서실장님! 그런데 이 목록은...?"

"구교사 근방 지형을 미리 시찰하고 오는 길에 구교사에 머무르던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폭풍 때문에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환경에 놓여있더군요.

그 물품 목록은 구교사 학생들을 위한 구호 물품입니다. 같은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들을 위한 물품이니, 빠르게 준비를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목록을 챙겨든 친위대원이 주변의 친위대원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목록에 적혀있는 물품들은 전부 학원의 연방 물자창고에 준비되어 있는 것들이니, 금방 준비가 가능할거에요.

트럭에서 내려 조수석에 고이 모셔둔 캄포트 병을 조심스레 옮기려던 찰나, 핸드폰에서 '모톡!'하는 알림음이 울려옵니다.

잠시 병을 옮기려는 손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모모톡을 확인하자 마리나 위원장에게서 도착한 모모톡이 있다는 것이 보이네요. 무슨 일로 모모톡을 보낸걸까요?

[비서실장님. 구교사 지역 시찰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

그새 친위대원들이 마리나 위원장에게 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한 모양이네요. 역시 붉은겨울 학원의 친위대 답습니다.

그런데, 마리나 위원장이 어째서 저를 찾는 걸까요? 어지간한 일은 보안위원장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텐데..

[오늘 아침에 출발한 수색대의 배웅식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소식을 전해드리려 연락드렸습니다.]
[그리고, 토모에 비서실장님을 위해 점심 배급을 대신 받아두어 집무실 책상에 놓아두었습니다.]
[오늘 점심은 초콜릿 대신 든든한 식사로 대신하시지요.]

"마리나 위원장..."

제가 식사를 체룐카 초콜릿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군요. 확실히, 폭풍이 오고난 이후부터 붉은겨울 학원을 위해 열심히 업무를 보느라 식사를 할 시간이 적어진건 사실입니다.

이번 점심은 초콜릿과 함께 시구레 양의 캄포트를 곁들여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마리나 위원장 덕분에 든든한 식사를 할 수 있겠군요.

게다가 제가 갑작스레 구교사 지역으로 떠나서 생긴 일정의 공백까지 대신해서 훌륭히 처리해주었습니다.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신다면, 특별 훈장 하나 건의드려야 겠네요. 후후."

구교사에서 가져온 캄포트는 체리노 회장님을 위해서 아껴두기로 결심한 저는, 조심스레 캄포트 병을 들어올려 사무국 본관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

"이 곳이... 출판부가 있는 건물이군요."

든든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 캄포트 병을 보관해 둔 뒤 '출판부 정기 시찰' 일정을 위해 출판부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비록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율에 맡겨두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심을 유지해서는 안됩니다.

저번에 일어났던 227호 온천장 사태가 대표적인 예시죠. 온천장이 입소문을 타고 트리니티, 게헨나 학원과 같은 거대 학원의 학생들까지 찾아올 시점이 되어서야 붉은겨울 사무국이 해당 온천장의 존재를 알아챘으니까요.

그 이후, 정기적인 시찰과 점검의 중요성을 느낀 체리노 회장님과 일부 사무국 임원들이 붉은겨울 학원의 소속 단체에 대한 정기적인 시찰활동을 계획하였습니다.

'정기'라고는 하지만 이번 출판부의 시찰이 첫 시찰활동이 되겠지만요. 따라서 체리노 회장님과 마리나 보안위원장과 함께 영광스러운 첫 활동을 시작하고자 하였지만...

"체리노 회장님은 외부 활동으로 자리를 비우셨고, 마리나 보안위원장은 학원 유지를 위해 힘써주고 계시니... 남은 건 저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시금 출판부가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출판부는 체리노 회장님이 내고 계시는 잡지인 '붉은 곰'의 편집과 인쇄, 출판을 비롯하여 책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곳이지요.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는 단체인 만큼, 꽤나 큰 문제가 아닌 나중에 다루어도 될 만큼 사소한 문제들은 체리노 회장님의 자비로운 마음가짐을 대신하여 넘어갈 예정입니다.

설마, 출판부에서 사무국의 개입이 필요할 정도의 문제점이 발견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이! 출판부 문 앞에서 그렇게 멀뚱멀뚱하지 말라고! 지나갈 수가 없잖아!"

아차. 잠시 생각에 잠겨서 출판부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막고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만... 어라?"

"그래. 사과가 빨라서 좋.... 응?"

출판부 안으로 들어가려던 학생이 제 얼굴을 보시더니 사색에 잠겨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못볼 것을 봤다는 듯, 경악에 잠긴 표정을...

잠깐, 이 학생분은... 그래요. 체리노 회장님이 종종 베고 주무시는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명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지식해방전선의 일원인 히메키 메루 양이에요.

"아. 반갑습니다. 당신은 분명 지식해방전선의 히메키 메루-"

"시, 실례했습니다아!"

제가 이름까지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머리가 더욱 사색이 된 메루 양은 출판부 안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마침 저도 출판부에 볼일이 있는 몸. 메루 양이 급하게 열어젖힌 문을 조심스레 닫은 저는 출판부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니까, 붉은겨울 사무국이 오고 있다니깐?! 게다가 그 비서실장이 직접!"

"메루씨. 사무국의 비서실장이 갑자기 통보도 없이 출판부로 올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안녕하신가요, 출판부 여러분."

"잠시만요. 메루씨. 아. 출판부에 오신걸 환영합....니...."

메루 양과 이야기를 하던 모자를 쓰신 학생분이 저를 향해 돌아보자 마자 하던 말이 멈추었습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하하... 붉은겨울 사무국이 출판부에는 어떤.... 일로 오셨나요오....?"

정기 시찰이라고는 해도,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는군요. 학생분들이 사무국과 너무 적게 마주쳐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더 자주 정기적인 시찰을 나오도록 계획을 해야 할려나요?

'봐, 내 말 맞지...?'

'조용히 하세요...! 사무국이 갑자기 왔으면 더 빨리 알려줬어야죠....!'

'그러니까 아까 알려줬잖아! 못 믿은건 자기가 못 믿은거면서...!'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여러분?"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온갖 인쇄 기계들로 넘쳐나는 출판부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저는, 왠지 모르게 경직되어 있는 학생분에게 다가갔습니다. 아. 이 학생은 출판부의 부장을 맡고 계신 아라마키 야쿠모 양이네요.

"그럼,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야쿠모 양. 저는 붉은겨울 사무국의 비서실장을 맡고있는 사시로 토모에라고 합니다."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비서실장님. 그보다, 제 이름. 알고 계시는... 군요?"

"네.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들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저의 업무 중 하나니까요.

저기 보이는 메루 양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답니다?"

야쿠모 양을 보며 싱긋 웃자, 왠지 모르게 두 분 모두 움찔거리면서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메루 양은 딸꾹질까지 시작하고 있네요. 역시 사무국의 정성스러운 학생에 대한 노력에 감탄한 모양입니다.

"그럼, 출판부를 잠시 둘러보아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처음 방문하는 입장이다 보니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야쿠모 양."

"아, 알겠습니다! 우선 이.. 이쪽으로 오시죠!"

인쇄 기계에서 수 많은 종이들이 빠르게 거쳐가며 무언가를 인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야쿠모 양이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곳이 바로 붉은겨울 학원의 모든 책과 인쇄물을 담당하고 있는 출판부입니다! 보시다시피, 학생들에게 필요한 여러 책들과...

특히, 체리노 회장님의 '붉은 곰' 잡지까지 포함하여 밤낮없이 인쇄, 제본, 관리, 영업, 출판을 담당하고 있지요!"

"과연, 출판부라는 이름에 걸맞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계시는군요. 뭔가 문제라던가, 출판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요소는 없을까요?"

"당치도 않습니다! 영광스러운 붉은겨울 학원의 출판물을 인쇄하면서 문제는 커녕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습니다. 당연하고 말고요!

특히 체리노 님의 '붉은 곰' 잡지를 인쇄하면서도 그 흔한 기계 고장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암. 당연하고 말고요. 체리노 님의 출판물은 기계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친환경 소재로 출력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 그럼 인쇄현장은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저 쪽의 출판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를 살펴보시러..."

야쿠모 양이 서둘러 지나가다가 주변에 쌓여있던 종이더미를 툭 치자 그 사이에서 전단지 하나가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게 야쿠모 양이 말하던 출판물이겠죠?

"앗. 잠깐, 비서실장. 그건 인쇄 불량품을 모아놓은-"

"요구르트 뚜껑을 핥지 않고 버리는 수염폭군을.... 규탄한다....?"

"아. 부장! 붉은 곰 잡지에 실을 체리노 회장의 풍자 만화도 다 그렸어! 이번 폭풍이 오기 전에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모양새로.... 아..."

전단지를 잡은 제 손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는 체리노 회장님을 위하는 척을 하면서, 뒤에서는 이런 저질스럽고, 사실무근의 엉터리 선동물을 인쇄하고 있었다니...!

"수....."

"수, 수수한 장난에 불과합니다. 비서실장님! 저 부원은 제가 책임지고-"

"숙청이에요-!!"

15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24:45


출판부 건물 앞에 장작 대신 쌓여있는 수 많은 책과 출판물의 더미가 보입니다. 보안위원들을 호출하여 출판부에 있는 모든 의심서적과 불온출판물을 전부 끌어낸 결과물이지요.

이번 정기 시찰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 체리노 회장님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요.

만약 회장님이 정기적인 시찰을 준비하시지 않았더라면, 출판부의 저 불온하고도 거짓이 가득한 출판물이라는 가면을 쓴 가식덩어리가 온 붉은겨울 학원으로 퍼져나갈 뻔 했습니다.

이 자리에 마리나 보안위원장도 같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런 사소한 숙청에도 위원장을 부를 필요는 없겠지요.

"비서실장님. 모든 의심불온서적과 출판물 불출을 완료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출판부의 부원들은요?"

"한 명도 빠짐없이 잡아두었습니다."

"훌륭합니다. 역시 붉은겨울 학원의 사무국답군요."

출판부의 건물을 통제하고 있는 보안위원들을 뒤로 하고, 저는 책과 출판물로 이루어진 장작더미 주변에 붙잡혀 있는 야쿠모 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포, 폭정이다! 저게 다 얼마짜리인데...! 차라리 나를 일주일 동안 감옥에 가두더라도, 저 책들만큼은....!"

"야쿠모 양?"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네자, 야쿠모 양이 잠깐 당황하는 듯 싶었지만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비서실장! 이건 너무한 처사라는 건 비서실장이 잘 아실거라고 믿습니다! 아무리 다른 서적들까지 의심된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냥 출판부 안에 있던 모든 책들을 끌고 나온 것 아닙니까!"

"출판부의 부원들이 성실한 협조를 해주지 않았으니, 우리 붉은겨울 사무국으로서는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부원은 원고를 숨기려다 보안위원들에게 잡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그.... 사생활에 관련된 내용이니까요! 게다가 이미 불온서적... 체리노 회장에 대해 한 글자라도 비방하는 내용이 담긴 출판물은 싹 다 얘기했잖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라니... 야쿠모 양. 아니. 출판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지요. 출판부장은 하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걸... 말인가요?"

"장작더미를 태우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던가요? 특히나 폭풍이 들이닥친 이 붉은겨울 학원에서 말이죠."

"장작더미가 아니라, 출판물입니다! 전부 재료값을 들여서 정성스레 만든, 출판물...!"

"아니요. 출판부장. 저건 장작더미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학생들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거짓된 내용이 점철된 글자가 하나라도 들어간 시점에서

저 책들은 학생들의 몸을 잠시나마 따뜻하게 해주는 장작.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따지면 비서실장도 똑같잖아! 어제 연설도 전부 프로파간다에, 거짓말로 점철된-"

"거짓말이 아닙니다. 야쿠모 양. 제가 어제 학생들에게 건넨 말은, 한 치의 거짓도 담지 않은 사실이에요. 게다가...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들이 스스로 대답한 내용이지 않던가요?"

"으, 응....?"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제가 어제 붉은겨울의 학생들에게 꺼냈던 말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학생분들이 진실된 대답을 들려주셨고요.

지금 야쿠모 양은 그 많은 학생분들이 거짓말로 대답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건가요?"

"그, 그건.... 분위기가 어쩔 수 없었고..."

"분위기와 사실은 다른 겁니다. 출판부장. 붉은겨울 학원의 학생들은 스스로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어요. 저는 단순히 질문을 하였고, 대답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야쿠모 양이 제작한 이 불온서적과 선동물은.... 거짓된 내용과 학생들이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내용의 방향을 바꾼 적절치 못한 글자들로 가득하지요.

질문과 대답. 그리고 거짓된 내용으로 점철된 프로파간다... 어떤게 더 불온한지는 출판부장이 더 잘 아실거라 믿습니다."

고개를 푹 순인 야쿠모 양을 뒤로 한 채, 저는 붙잡힌 다른 출판부원들을 감시하고 있는 보안위원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보안위원?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기름과 성냥을 가져와주세요."

****

촤악, 촤악-

기름 몇 통을 들고온 보안위원들이 책과 출판물로 이루어진 장작더미에 구석구석 기름을 뿌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종이로 이루어져서 그런지, 기름이 잘 스며드네요.

"안돼....! 저 회지 인쇄하느라 든 비용이 얼마인데....! 차라리 한 장이라도 ,한 장이라도 복사할 수 있게 남겨줘....!"

"시끄럽다, 반동분자! 조용히 하고 있어라!"

붙잡힌 야쿠모 양과 나머지 출판부원들은 장작더미에서 조금 먼 구석에 옮기도록 지시했습니다. 미리 유치장으로 이송해도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체리노 회장님이 없는 지금, 강력한 메세지를 보여주어야 추후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비서실장님. 준비한 기름을 전부 소진했습니다."

"좋습니다. 다들 뒤로 물러나세요. 이제 장작더미를 태울 시간입니다."

보안위원에게 건네받은 성냥갑에서 성냥 하나를 꺼내 치익- 하고 불을 붙인 뒤, 조그마한 불씨가 된 불타는 성냥을 장작더미로 던져 넣었습니다.

조그마한 불씨는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자그마한 불길이 되어 있었으며, 두 번 깜빡이자 거대한 화염이 되어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을 깜빡이자, 장작더미 전체를 뒤덮는 화마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 아아. 얼마나 느껴보는 따뜻함인지 모르겠네요.

"아아. 내 책이, 내 책이....!"

"이번에 심혈을 기울여서 인쇄한 내 동인지가...! 샘플로 뽑은거라 여분이 없단 말이야!"

붙잡힌 학생들의 조그마한 외침은, 커다란 화마가 내는 소리에 금방 묻혀버렸습니다. 자, 이쯤 되면 충분한 것 같군요. 장작더미가 전부 탈 때까지 이 곳에 붙잡아 둘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안위원? 현재 붙잡아둔 학생 전원을 사무국 지하에 있는 특별 유치장에 가둬놓으세요. 식사는... 체룐카 초콜릿으로 배식을 부탁드립니다."

"에엑, 체룐카 초콜릿...? 너무 달아서 오히려 못먹는 그거...?"

"얼어붙은 빵보다 더 딱딱한 걸 주면 굶는거랑 다른게 없잖아! 차라리 얼은 빵을 줘!"

"조용히 하세요. 출판부원 여러분. 더 소동을 일으키면 배식은 아예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보안위원 여러분? 부디."

"알겠습니다! 자, 저 트럭에 차례대로 탑승해!"

보안위원들이 출판부원들을 트럭에 탑승시키는 동안, 저는 붉고, 밝게 빛나는 장작더미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따뜻한 느낌이 계속되면 좋겠는데 말이죠.

"비서실장님. 모든 출판부원들의 탑승이 완료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자, 사무국 본관으로 출발하죠."

마치 태울 것은 모두 태웠다는 듯이 서서히 사그러드는 화마와 까맣게 변해버린 장작더미를 뒤로 한 채, 출판부원들을 실은 트럭은 서서히 사무국 본관으로 출발했습니다.

****

"도착했다. 자, 얼른 내려!"

"으으, 사무국의 지하 감옥에 갇히는 날이 올줄이야..."

"부장님. 걸려봤자 일주일 화장실 청소 정도만 받고 끝난다면서요..."

"제 불찰이에요... 비서실장이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기껏 만들어둔 출판물들이..."

"두고보자! 우리 출판부는 이런 탄압에도 꺾이지 않는다!"

"계속 소란을 일으키면, 오늘 저녁 배급은 없다!"

보안위원들이 트럭에서 출판부원들을 사무국의 지하 감옥으로 이송하는 사이, 친위대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마리나 보안위원장이 이 쪽으로 다가옵니다.

"오셨습니까. 비서실장님."

"네. 마리나 위원장. 빠르게 보안위원들의 파견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속한 대처가 아니었다면, 몇몇 출판부원들을 놓칠 뻔했어요."

"체리노 회장님의 명을 따르는 척 하면서 기만된 행적을 보인 녀석들은 빠르게 붙잡아야 하는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후후. 그 말이 맞습니다. 보안위원장. 참, 그러고보니 발전기에 공급할 '연료'의 수급은 잘 되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입이 무거운 친위대원들을 중심으로 푸딩의 운반과 투입을 지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동요하는 분위기였지만, 유통기한이 지난 푸딩이라고 설명하니 금세 수긍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위원장. 바깥에서는 '연료'라는 단어를 사용해 주세요. 다른 학생들이 들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비서실장님. 그와 관련해서, 이번 수색대의 활동 내용을 말씀 드리자면..."

"-노동과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더니만,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군."

"잠깐, 누구-"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 곳에 있던 분은.... 미노리 양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명의 용역부원들과 함께.

"....반갑습니다. 미노리 양. 노동과 혁명에 관해서 어떤 주제를-"

"시치미 떼지마라, 비서실장! 이미 아까부터 전부 얘기하는 내용을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면전에서 대놓고 기만을 하려는 것인가!"

"어디서부터 들으셨나요, 미노리 양?"

"물론, 우리에게 배분되어야 할 소중한 푸딩을 저 거대한 기계의 연료로 주고있다는 부분부터 빠짐없이 들었다."

...거의 처음부터 들은거군요.

"아무튼, 실망이다. 비서실장. 우리와 같은 노동자와 학생들의 앞에서는 굽신거리며 사과하더니. 뒤에서는 이런 흉계를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이래서야 체리노 회장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하던 미노리 양은 재빠르게 허리춤에 매고 있던 확성기로 손을 옮겼습니다. 안돼요, 저 확성기를 들지 못하게 막아야만-

"학생의 귀중한 푸딩을 발전기의 연료로 바치는 기만스런 붉은겨울 사무국을 규탄한다-!!"

아.

늦었습니다.

16 이름 없음 (btCY/.oKPk)

2024-02-12 (모두 수고..) 22:26:59


"붉은겨울 사무국을 규탄한다! 규탄한다!"

어느새 사무국 앞으로 개미때처럼 몰려들은 용역부원들과 학생들이 확성기를 든 미노리 양을 중심으로 구호를 외쳐대고 있습니다.

분명 언젠가 들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들켜선 안됐어요. 최소한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고 난 다음에 밝힐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고, 수습이 필요로해졌습니다. 미노리 양의 선동을 막지 못한다면, 분노한 학생들이 발전기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을거에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하던 저는, 문득 사무국이 보관하고 있던 체룐카 초코 푸딩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마리나 보안위원장. 저번에 보관해두었던 체룐카 초코 푸딩은 어디에 있죠?"

"체룐카 초코 푸딩 말씀이십니까? 사무국 뒷문 근처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다만, 분실한 열쇠를 아직도 찾지 못해서-"

"부수세요. 그리고, 창고 안에 있는 모든 초코 푸딩을 회수해주세요. 마리나 위원장."

"부수란... 말입니까?"

"네. 지금은 빠른 해결책이 필요로 한 상황. 열쇠를 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사무국 창고에 있는 절단기나 총을 이용해서 자물쇠를 열고, 창고 안에 있는 체룐카 초코 푸딩을 회수하여 가져와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마리나 보안위원장이 집무실 바깥으로 나가자, 저는 체리노 회장님의 책상을 뒤져내어 저번에 찍어두었던 언론보도용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분명, 사진 중에 미노리 양과 사진을 찍었던 게 있었을텐데... 아, 여기 있네요. 다행입니다.

"친위대원? 이 사진을 가지고, 지금 지하에 구금중인 출판부원에게 사진의 편집을 부탁드리세요."

"알겠습니다. 어떻게 편집하도록 요구할까요?"

"일단, 사진의 날짜를 이틀 전으로 변경해주시고... 미노리 양의 뒷편에 푸딩 박스가 보이도록 수정을 부탁드리세요. 결과가 약간 조잡해도 상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사진을 받아든 친위대원도 빠르게 집무실을 나가고, 집무실 안에는 몇 명의 친위대원들만이 남아있었습니다.

"후우... 빨리 마무리 되어야 할텐데요.. 미노리 양의 선동에 휩쓸리는 학생들의 수가 많아질 수록, 더 안 좋게 흘러갈텐데.."

벌컥-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친위대원이 한 손에는 절단기를 든 채로 집무실 안으로 뛰어옵니다. 설마 절단기로도 창고의 문을 열 수 없던걸까요?

"무슨 일인가요, 친위대원?"

"창고를 개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절단기가 잘 먹히지 않아서, 마리나 위원장님의 기관단총으로 자물쇠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창고 내 보관중이던 초코 푸딩을 사무국 1층으로 이송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성과입니다. 한 시름 놓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비서실장님!"

다른 쪽의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사진을 한 손에 든 친위대원이 집무실로 들어옵니다.

"출판부원과의 일이 벌써 끝난건가요?"

"그렇습니다. 도통 일을 맡을 출판부원이 나오지 않았는데, 출판부장이 자원하였습니다."

"야쿠모 양이... 뭔가 요구하는 것은 없었나요?"

"부탁한 대로 사진을 편집해주는 대신, 출판부원들의 빠른 석방과 두 달간 인쇄에 필요한 자재를 무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일단 알겠다고 했습니다만..."

"잘 하셨습니다. 그렇게라도 말 하지 않았다면 작업을 진행시킬 수 없었을거에요. 그 문제는 제가 나중에 해결하겠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준비가 끝난 점은 정말 다행이에요. 지금도 미노리 양의 확성기 소리와 그에 합세하는 학생들의 규모가 점점 불어나고 있으니 말이죠.

"자, 밖으로 나갑시다. 언제까지고 학생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

"저기있다! 보이는가, 동지들이여! 푸딩의 가치도 모르는 사무국이 드디어 그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모양이구나!"

우우-!

몰려들은 학생들의 야유가 울립니다. 이 정도면, 벌써 수 백명의 학생들이 모여있는 것 같아요. 더 늦었다간 수 천명의 군중으로 불어났을겁니다.

"반갑습니다. 용역부의 부장을 맡고 계신 미노리 양. 그리고, 이 곳에 모여주신 학생 여러분께도 인사드립니다."

"인사는 필요 없다! 그 동안 우리를 기만하고 속인 만큼의 푸딩을 지급하라!"

"지급하라! 지급하라!"

"네. 마침 그 부분을 논의하기 위해 미노리 양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 그렇다면 비서실장은 여기 모인 학생들과 그 동안 사무국의 거짓된 혀에 속은 동지들에게 나눠줄 푸딩을 준비했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 곳에 모여주신 학생 여러분들의 염원을 고려하여... 특별한 푸딩으로 준비했습니다. 자, 안쪽으로 들어오시죠."

어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미노리 양이었지만, 저와 보안위원장을 따라 사무국 안쪽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체룐카 초코 푸딩의 상자로 이루어진 탑을 보자

확성기를 바닥으로 낮춘 채 놀란 눈빛으로 푸딩의 탑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많은 푸딩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가, 비서실장?"

"그 반대입니다. 미노리 양. 폭풍으로 인해 부족한 푸딩을 어디서 수급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붉은겨울 학원의 여러 문서들과 지도를 분석한 결과,

회장님이 특별보관하신 체룐카 초코 푸딩이 보관된 창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본래라면 회장님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반출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지금같은 상황이야 말로, 고생하신 노동자와 학생 여러분들을 위하여 꺼낼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흠. 말만 번지르르 하군."

"그럼, 미노리 양이 먼저 이 푸딩을 맛보실 영광을 누려보시겠어요? 심지어 저 조차 한 입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용역부장이라는 고된 직책을 수행하시는 미노리 양이라면 첫 입이라는 영광을 흔쾌히 양보하도록 하죠."

체룐카 초코 푸딩이 들은 상자에서 푸딩 하나를 꺼내, 정성스럽게 껍질을 제거하고 미노리 양에게 내밀었습니다.

"계속해서 권유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교양에 어긋나는 일이겠지. 그럼, 어디..."

냠.

체룐카 초코 푸딩을 한 입 베어물자, 미노리 양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합니다.

"이, 이 맛은....! 체룐카 초콜릿의 단 맛과 푸딩의 부드러운 감촉이 예술적으로 섞여 적당히 달달하면서도 포근한.....!"

"훌륭한 맛이지요? 자. 뒤쪽에 서있는 용역부원분들과 다른 학생분들도 얼른 하나씩 받아가세요. 푸딩은 많답니다."

친위대원들과 제가 상자를 열고 체룐카 초코 푸딩을 하나씩 나누어 주자, 학생들의 분위기가 점점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오오.... 엄청 맛있다. 이 푸딩!"

"평소에 먹던 푸딩이랑 농도가 달라..."

"게다가, 이렇게 부드럽고 단 푸딩은 처음이야. 이게 체룐카 초콜릿을 넣은 거라고?"

후후. 모두가 초코 푸딩에 관심이 팔린 이 시점이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그럼, 이제 미노리 양이 말씀하셨던 문제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발전기의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서-"

발전기에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하여 불량한 재료나 유통기한이 지난 푸딩을 연료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진행하였지만,

체룐카 초코 푸딩이라는 미식을 눈 앞에 둔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습니다. 제가 원하던 방향이기도 하고요.

"음, 음. 어쩔 수 없지. 그런 불량한 재료로 억지로 푸딩을 만들었다간 배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붉은겨울 학원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비서실장의 말도 일리가 있어."

어느새 체룐카 초코 푸딩을 전부 해치운 미노리 양이 제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입니다. 지금이야 만족하신 것 같지만, 미노리 양은 잠재적인 위협 요소...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사무국의 통제 하에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침 주변에 모인 학생들도 푸딩을 거의 먹어가는 분위기이군요. 이제 슬슬 학생들의 집중을 이끌어내야 겠습니다.

"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약간은 실망했습니다. 미노리 양."

"응? 어떤 점이 말인가?"

"그야, 우리 붉은겨울 사무국은 이러한 내용을 용역부의 부장을 맡고 계시는 미노리 양에게 이미 통지를 진행했습니다. 용역부원들의 배급에 필요하다고도 하여 추가적인 푸딩도 제공하였습니다만..."

"뭐? 그 말이 사실이야, 비서실장?"

"그래. 증거 있어?"

"증거라면 있습니다. 자, 여기."

아까 친위대원에게 받아든 사진을 용역부원에게 건네자, 어느새 수 십명의 용역부원들이 모여들어 사진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게 뭐야. 미노리 부장이랑.... 비서실장이 악수를 하고 있잖아? 게다가, 뒷편에 푸딩 박스도 잔뜩 쌓여있고..."

"거, 거짓이다! 분명 예전에 사무국의 선전 용도로 쓰인 사진을 왜곡한 것이 분명-"

"하지만, 여기 사진에 적혀있는 날짜는 며칠 전인걸? 폭풍이 처음 온 날이야. 부장. 그 날에 뭔가 바쁜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비우지 않았어?"

"그, 그건 갑작스러운 폭풍때문에 공사현장을 점검하러...."

"부장이... 우리 푸딩을 가로챘다! 그러고선 뻔뻔하게 사무국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렸어!"

"빼돌렸다! 빼돌렸다!"

"저 세치 혀에 속지 마라, 동지들이여...! 분명 조작된 사진이다!"

미노리 양이 확성기까지 들면서도 소리쳤지만, 이미 웅성거리는 용역부원들의 소리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계획대로에요. 야쿠모 양. 칭찬해줄만한 편집 실력입니다.

"어머나. 미노리 양... 배급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미노리 양에게 필요했던 것이었나요? 사무국은 개인적인 재물 축적을 위해 푸딩을 제공한게 아닙니다만..."

"비서실장-! 저 짜집기 된 사진으로 동지들을 기만하고...!"

"우리를 기만한 부장을 붙잡아라! 붙잡아서, 사무국의 독방에 가두자!"

"붙잡아라! 붙잡아라!"

순식간에 미노리 양은 용역부원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확성기도 다른 용역부원이 빼앗아 미노리 양을 체포하자며 부르짖고 있군요.

"그럼, 미노리 양. 상황이 잠시 진정될때까지... 사무국에 임시 구금하겠습니다. 빼돌린 푸딩에 대한 조사도 면밀히 진행될 예정이에요."

"아, 아냐! 나는 그런 더러운 부르주아가 할 법한 짓은 하지 않았어...!"

"체포하라! 체포하라!"

"그러면... 보안위원장? 사무국 지하의 특별 독방에 수감을 부탁드립니다. 증거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수사를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자, 얼른 움직여!"

"두고보자, 비서실장-!!"

마리나 보안위원장이 미노리 양을 지하로 이끌고 내려가자, 주변에 서있던 용역부원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용역부원분들. 부정한 행동을 벌인 학생을 바로 제보해주시고 검거에 도움을 주신 점, 기억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푸딩 하나를 더 배급해드릴까 하는데..."

용역부원들이 눈빛을 반짝입니다. 역시, 제가 인정한 체룐카 초코 푸딩 다워요. 나중에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면 추가 생산을 건의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해서 상자를 까고, 체룐카 초코 푸딩을 용역부원들과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보안위원들의 등 뒤로, 햇살이 점점 저물고 있었습니다.

****

미노리 양을 잠시 '구금'시키고 나서, 저는 다시 사무국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폭풍이 도착하고 나서 처음 며칠동안 기반을 다져놓은 탓인지, 이후 생각보다 큰 사건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가끔 구교사 근방에 묻혀버린 푸딩이 정말로 있는건지, 찾아도 너무 적게 나온다던지 하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사소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언제쯤 미노리 양을 풀어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용역부원들도 온갖 이유를 대면서 돌려보냈고. 언제쯤 약속을 지켜줄 수 있는지 여쭈어보는 출판부원들도 나중에 이야기해주겠다며 미루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일정들을 관리하다보니, 어느새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조차 이렇게 순탄하게 일이 진행될 것이라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좋은게 좋은 것이겠죠. 아, 벌써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실 시간이..."

12시 정각.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실 시간입니다. 마침 새벽을 기점으로 날씨가 점차 풀리기 시작했고, 학원을 감싸던 하얀 벽도 점차 사그러들다 마침내 평소와도 같은 날씨로 되돌아왔습니다.

즉, 체리노 회장님이 돌아오시는 길을 막는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두근거리며 회장님을 기다리던 찰나, 마침 혁명광장으로 들어서는 체리노 회장님의 전용 차량이 눈에 들어옵니다.

"체리노 회장님! 돌아오셨군요!"

친위대원과 함께 기다리던 저를 향해 차량이 천천히 속도를 낮추며 멈춘 후, 마침내 차량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체리노 회장님이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 내가 돌아왔다. 비서실장! 붉은겨울 학원은 잘 관리하고 있었-"

핫.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체리노 회장님을 두 손으로 안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오신 회장님에게, 이 무슨 추태를...!

"으읏. 뭐 하는 짓인가, 비서실장! 아무리 일주일만이라고 해도, 이 몸을 어린애 취급하지 말게!"

"죄, 죄송합니다. 체리노 회장님.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몸이 먼저 나가고 말았습니다."

"일주일 동안 붉은겨울 연방학원을 관리한 노고를 봐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외부 활동은 잘 진행하셨는지요?"

"말도 마라! 출발하자 마자 갑자기 찾아온 한파 때문에 온 키보토스가 난리였느니라! 샬레의 선생님이 온갖 학원들 사이를 중재하지 않았으면, 붉은겨울 연방학원의 용무는 커녕 일주일 동안 추위에 떨다 올 뻔했지."

"과연. 극한의 환경에서도 붉은겨울 연방학원의 임무를 용맹히 완수하시다니... 역시 체리노 회장님이십니다."

"하하. 그 정도야. 그러면 비서실장, 그 동안 붉은겨울 연방학원에 별 일은 없었지?"

"네. 별 일 없었습니다. 약간의 사소한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콰아앙-!

붉은겨울 사무국 본관에서 크나큰 폭발음이 들려옵니다. 갑작스런 폭발음에 체리노 회장님이 펄쩍 뛰며 귀엽게 놀라셨습니다.

"뭐, 무슨 일이 일어난건가, 비서실장?"

"....이게 그 사소한 문제입니다. 회장님."

"저기있다! 게다가 그 꼬마 회장도 같이 있다!!"

"부하의 실책은 상사가 책임지는 법! 그 동안 증거도 없이 억지로 구금해둔 미노리 부장에게 사과해라! 사과해라!"

"출판부여, 단결하라! 우리가 피땀흘려 제작한 노동의 결실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태운 사무국에게 본 때를 보여주자!"

"어머나. 쿠데타인가요?"

"토, 토모에...! 오자 마자 이게 무슨 일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체리노 회장님."

아무리 많은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체리노 회장님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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