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053101> [1인/백합/마법소녀] 케이크에는 홍차를, 오토마타에게는 삶을 #1 :: 26

◆viyCmhCTeI

2024-10-01 19:05:33 - 2024-10-09 00:05:26

0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19:05:33

1. 시간도 없고 기력도 없는 스레주(환자)의 실험적인 1인 연재 어장입니다.
2. 언제든지 부담 없이 자유롭게 반응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단순 코멘트부터 설정 망상, 오리캐 추가, 로그 작성 모두 OK)
3. 반응은 스토리와 무관하나, 일부 관전자 반응은 진행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4. 연재는 불규칙하며 매우 느릴 예정입니다. 느긋~한 관전을 추천드립니다.
5. 관전자 난입은 환영하지만 백합 난입은 처형 대상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1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19:10:39



 2001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


2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19:34:55

 화려하게 도금된 창틀 장식 뒤에서, 햇살을 타고 떠돌던 먼지가 생기 없는 오토마톤의 눈에 내려앉았다.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분주하게 개점을 준비하는 여종의 손에 들린 하얀 행주에 닦여 물 먹은 빛으로 화했다. 붉은 제복을 입은 소녀들이 저마다 한 번씩 쇼윈도에 눈길을 던지고서는 새하얀 보도석을 밟으며 재빠르게 걸어 멀어져 갔다.

 눈밭을 딛는 듯이 다소곳한 구두 소리가 울린다.

 런던의 아침은 언제나 분주하고, 연미복을 갖춘 신사부터 귀에 궐련을 꽂은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은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트램에 올라타서 일터로 향한다.

 하지만 노스포드 스쿨의 지체 높은 여학생들은 외출할 때에 단정한 자세로 오직 걸어다닐 것만을 주문받는다. 표면적 이유는 「트램의 외부 구동 기어에 치마가 끼어 불미스러운 안전사고가 일어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런 이유는 믿지 않았다.

 한때 말이 귀족만의 것이었던 시절 지저분한 땅바닥을 딛고 걷는 것은 품위를 버리고 빈민의 반열에 스스로를 밀어넣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만민이 행복을 얻고 모두가 기술의 은혜에 기뻐하는 이런 시대에는, 시간에 쫓기지 않음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사치를 보이는 방법이었다.

3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20:02:24

 노스포드 스쿨의 교사들은(특히 깐깐하기로 소문난 클레어 사감은), 학생들이 꽃다운 자태로 런던 곳곳을 들쑤시며 남들의 시선만으로도 경외를 얻길 바랐다. 그건 다름아닌 학생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와인을 마신 장미처럼 원숙한 붉은빛의 치마는 노스포드의 자랑. 그리고 그 치마가 어떡해야 더 우아하게 나풀거릴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소녀들의 걸음마다 놓인 숙제였다. 왜냐하면 그녀들 대부분에게 자신은 잉글랜드의 꽃이자 브리튼의 보물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들이 지나가자 길가에서 파란 연기를 피워내던 신사들은 파이프를 황급히 뒤집어 털었고, 신문을 한 아름 을러맨 채로 뛰어가던 소년이 시선이 팔린 나머지 그대로 발이 꼬여 새하얀 종이를 쏟아내며 길바닥에 성대하게 엎어졌다. 런던의 거리에는 “딱하군!” 하고 끌끌대는 소리조차도 점잔빼는 젠체함이 있었다.

 랭커셔의 블리스데일, 한없이 궁벽한 촌동네에서 상경한 데이지 프리벨은 이런 풍속을 3년째 몸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구름보다 커다란 플로지스톤 비공정이 황금 장식을 치렁치렁 매달고 날아다니는 풍경이나, 하루에 수백만 명을 실어 나른다고 일컬어지는 트램의 행렬, 혹은 고향에서 보던 물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교하고 사람 같은 오토마톤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4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20:23:36

 “프레벨 아가씨,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외출인데 너무 축 처져 계십니다!”

 한 학년 아래(그러니까 노스포드 2학년──노스포드는 만 13세에 입학하며 5학년제다)의 헤이스팅스 양이 옆에서 목소리로 데이지의 고개를 잡아 젖혔다.

 좋으나 싫으나 뱃속에 음식보다 허례허식을 가득 채우고 다녀야 하는 노스포드의 아가씨들 중에서, 헤이스팅스 양의 명랑함만은 친숙함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게다가 그 명랑함은 교풍과 어긋나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전교생을 통틀어 채플 시간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건 바로 이 키 작은 아가씨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클레어 사감님에게서 외출증을 얻어내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고생했지 않나요?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 기운차게 돌아다녀야 하는 겁니다.”

 “그래, 그렇지.”

 차마 ‘다리에 힘 주고 다니기 민망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데이지는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보다도 아까 지나친 오토마타 가게의 진열장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학생끼리 신청해 나가는 외출은 사전에 제출한 대로 계획된 루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사감이나 풍기지도부가 이를 감시할 리는 없겠지만, 또 감시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5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20:38:16

 기숙학원의 아가씨가 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충분히 눈에 띄는데, 그들이 뒷골목이나 유해업소 따위로 일탈하는 모습이 누구의 눈에라도 들어간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게 학교 측에 전해지리라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던 셈이다.

 왕년에 어떤 선배들은 교문을 나서자마자 맨홀에 숨어서 노동계급의 사복으로 갈아입고 지하 격투장을 구경하러 갔다는 전설적인 모험담이 들려 오기는 하지만,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또, 어찌어찌 시선을 피해 자동기계를 산다고 한들 어찌하겠는가. 학습에 불필요한 장난감은 백이면 백 교문에서 압수당해 버린다.

 그렇게 되뇌면서 데이지는 단념하고 앞장서 가는 소녀들을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았다.

 새장이나 다름없는 노스포드의 기숙사에서 간신히 외출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외출 계획에서 「면학」을 엄청나게 내세운 덕분이 컸다. 그 면학이란 무엇인고 하니, 런던의 어느 정원으로 가서 투어 보트를 타고 연못을 관광하며 「영시의 아름다움을 탐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세 음절로 ‘피크닉’이 아니냐는 로제타 양의 지적에, 계획서 작성자인 세인우드 양은 반박하지 못하고 방긋 웃었다.

6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20:48:52

 ‘장난하는 거야? 런더너라는 게 이런 거였어? 「아름다움을 탐미」는 동어 반복이잖아!’

 궁상맞게 중얼거려 봤자, 오늘 같은 휴일에 기숙사에 갇혀서, 얇은 벽으로 소리가 새나갈까 봐 책장도 조심스레 넘기며 공부하는 시늉하고 있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는 훨씬 나은 팔자였다. 그것은 데이지 스스로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낭만과 현실의 격차는 자기위안으로 감추기에는 너무 커다랬다.

 런던은 빅토리아 여왕 치세 이래로 단 한 순간도 최전성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는, 영국의 심장이자 인류의 자랑인 도시. 스콘에 잼을 바르고 손톱을 깎는 것까지 기계가 대신해 주는 플로지스톤 공학의 성지!

 위대한 과학자 슈탈이 예측하고 공학자 라부아지에가 증명해 낸 「플로지스톤」은 지금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신이 내린 열원으로서, 앞서 본 비공정과 트램과 옥외 부유식 계단과 ‘언더그라운드’로 향하는 초대형 승강기와 오토마타를 모두 가능하게 만드는 만능의 연료였다.

 처음 런던에 올라올 때까지 기대한 것은 그런 신문물에 둘러싸인 삶이다. 외출도 함부로 나가지 못하고 채플과 좌학만을 무한정 반복하는 삶이 아니라.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것쯤이야 랭커셔에서도 할 수 있었는데.

 ‘한 달이나 기다린 외출이 쇼핑이나 도시 구경이 아니라, 정원에서 시 쓰면서 노닥거리기라니. 기숙사로 돌아가면 교재의 바이런 얼굴에 콧수염을 그려 주겠어.’

7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21:40:00

 프랑스의 회화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수련이 가득 핀 수면에는 비늘 같은 빛이 너울거리고 덩굴이 웃자란 작은 다리가 곳곳의 섬들을 이어 놓았다. 궁상과 불평으로 두 뺨을 가득 채워 부풀리고 있던 데이지도 화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색채를 보고 “어머!” 하는 감탄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참 아름답네요, 프레벨 아가씨!”

 아닌 게 아니라, 이 정원과 보트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주인은 모네의 팬이라는 모양이었다. 단지 모네의 회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관광객이 즐비하고 검은 빛 선체에 금빛 테두리를 칠한 보트가 연못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 있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톱니바퀴 기어의 각진 외관이 정원의 다붓한 풍경하고 충돌하는 듯도 했지만, 빛은 언제나 곧은 직선으로 뻗어 나왔기에 아르데코풍의 보트와 용케도 불화를 빚지 않았다. 뱃사공이 레버를 당기자 플로지스톤 엔진이 《부앙!》 하고 굉음을 내며 짙은 증기를 뿜어냈다. 그러고 나서 거대한 톱니바퀴 외장 기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운 아가씨들, 얼른 타시죠.」 뱃사공은 말했다.

 남들의 시선에 그렇게 신경쓰며 걸어 오던 로제타 양과 세인우드 양이었지만, 이번에는 데이지 양이 갑작스레 체면치레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멋쩍게 고개를 꾸벅 하고 배에 올라타는 것을 보며, 눈썹을 실룩이며 참던 웃음을 터뜨렸다. 어리둥절해 있는 와중에 배가 가볍게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출발합니다!」

 “프레벨 양.” 모터보트의 선수에 서서 저쪽을 바라보고 있는 뱃사공에게, 로제타 양이 다가가 대뜸 어깨를 걸쳤다. 뱃사공은 단단한 철로 이루어진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분은 오토마톤이랍니다.”

8 ◆viyCmhCTeI (QNDEkBlNgw)

2024-10-01 (FIRE!) 21:41:33

《TC//LO》

9 ◆viyCmhCTeI (srug7d73j6)

2024-10-02 (水) 19:48:37

《TC//LO》

10 ◆viyCmhCTeI (nXRPqBOiuE)

2024-10-06 (내일 월요일) 00:54:15

 거대한 비공정이 수면의 윤슬을 잠재웠다. 모터보트의 뱃전에 수련이 조용히 부딪치며 물러났다. 보트는 연못 중간에서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멈춰섰다. 조금 남은 관성이 위아래로 둥둥 흔들리며 몇 피트를 더 미끄러질 뿐이었다.

 푸른 하늘이 대부분 가리어 있기는 하였으나, 차라리 비공정의 그늘 덕분에 피부가 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아가씨가 과반수였다. 데이지, 로제타 양, 그리고 세인우드 양. 유일한 막내인 헤이스팅스 양만이 보트 밖으로 고개를 쭉 빼기를 반복했다. 구름을 보고 싶은 거겠지.

 “자, 그럼──.” 면학가인 세인우드 양이 가방을 주섬주섬 뒤진다.

 학원에서는 보기 드문 쾌락주의자이자 화려한 금발 미녀 로제타 양이 외쳤다. 가장 격조 있고 우아한 행동거지와 말투는 그녀의 말괄량이 본성을 한 파인트만큼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피크닉이나 시작할까요?”

 데이지를 비롯한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로제타 양에게로 향했다가, 가방에서 세인우드 양이 꺼내든 물건으로 옮겨 갔다. 고운 양손에 연갈색 가죽으로 양장되어 있는 노트가 들려 있었다.

 “진심인가요, 세인우드 양? 여기까지 와서 진짜로 시를 읽을 생각이세요!”

11 ◆viyCmhCTeI (nXRPqBOiuE)

2024-10-06 (내일 월요일) 01:03:02

 “그치만, 학업외출 보고서를 써야 하는걸요. 어쩔 수 없어요.”

 “그깟 보고서 따위 지어내면 그만이죠. 세인우드 양의 글솜씨와 저의 상상력이라면 클레어 사감 정도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데──. 아, 그만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노스포드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격식 있는 존댓말을 쓰는 것이 원칙. 연상에게는 「아가씨」, 연하에게는 「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동갑에게는, 글쎄, 거리감에 따라 둘을 오간다. 각별하게 대하는 단 한 명의 후배, 그러니까 ‘여동생’에게는 말을 놓고 호자호매하는 것이 용인되니, 그것이 유일한 예외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고작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아하하! 미안해요. 프레벨 양, 헤이스팅스 양. 사실 릴리는 저랑 3년째 룸메이트거든요. 말은 진작에 놓았는데, 여러분 앞에서 아가씨 연기를 하자고 해서──.”

 “로제타 양의 아이디어예요. 절 탓하지 말아 주세요.” 세인우드 양이 멋쩍게 웃었다.

 데이지는 나란히 앉아 있던 헤이스팅스 양과 시선을 교환했다. 분명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호호’가 아니라 ‘아하하’라니──.”

12 ◆viyCmhCTeI (nXRPqBOiuE)

2024-10-06 (내일 월요일) 01:44:11

 『We sat down and wept by the waters
   Of Babel, and thought of the day──』

 비공정은 하늘에 가만히 떠 있는 것 같았고, 또 실제로 공중에 정박하는 기능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먼 하늘에서 비행하고 있으면서도 멈춘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어색하게 시를 꺼내 읽으며 보고서의 소재를 만드는 목소리보다, 바구니에서 꺼내 피크닉 분위기를 내는 빵의 냄새보다 데이지의 시선은 비공정에 이끌렸다.

 그때, 저 위에서 노란 빛이 반짝하더니, 커다란 멜론 같기도 하고 오리엔털의 흰 도자기 같기도 한 물건들의 깨알 같은 그림자가 비공정의 선창 밖으로 피어오르듯 쏟아져내렸다.

 “──어?”

 “왜 그러시나요, 프레벨 아가씨!”

 빛이 사그라들자 작은 그림자는 다시 비공정의 그늘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서 놀란 눈의 착각이었겠지 하고 데이지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기다려도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야, 잠깐 이상한 게 보여서──.” 첨벙첨벙첨벙──────!!

13 ◆viyCmhCTeI (nXRPqBOiuE)

2024-10-06 (내일 월요일) 01:49:00

 “꺄악──!”

 연못 주위로 높은 물기둥이 여럿 일고, 배가 충격에 가볍게 흔들렸다. 데이지는 서둘러 가방을 들어올려 헤이스팅스 양의 머리를 감쌌다. 보아하니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도 저마다 서둘러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지붕이 없는 보트에 탄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지만 다행히 보트 위를 직격하는 낙하물은 없었다.

 다만 낙하물 몇 개가 보트 옆면에 긁힌 자국을 내며 부딪쳐 물 속으로 떨어졌다. 움푹 패일 정도도 아니라면 상당히 가벼운 물체라는 소리였지만, 그래도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 것에 정통으로 맞았다간 학교가 아니라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일제히 울려퍼진 물보라 소리가 곧 멎어들었다.

 “뭐, 무슨 일이죠? 이건!”

 “하아, 하아, 하아──.” 데이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급하게 발끝으로 빠져나갔다. 헤이스팅스 양을 지키느라 자기가 무방비하게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을 정도였다.

14 ◆viyCmhCTeI (nXRPqBOiuE)

2024-10-06 (내일 월요일) 01:56:21

 휘청거리는 걸음을 난간으로 붙잡으며, 데이지는 현측으로 향했다. 검푸르게 빛나는 물을 들여다본다. 파문이 어지럽게 이는 수면 위, 수련 꽃송이와 넓적한 잎사귀 몇 개가 다쳐 있었다. 비공정이 물러나면서 노란 햇살이 시야를 비집고 들어왔다.

 물에 반쯤 잠긴 낙하물의 정체가 서서히 시야의 중심으로 가까워졌다.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토마톤──.”

 오토마톤. 다시 말해 자동기계. 「여러 오토마톤」은 오토마타라고 부른다. 부잣집에 있는 가사 오토마톤이나 트램의 승차권을 검사하는 오토마톤, 심지어는 지하 격투장의 중계 오토마톤, 그리고 여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여유롭게 뱃전을 건너다보고 있는 뱃사공 오토마톤에 이르기까지 종류는 다양하고, 구조도 천차만별이지만 원리는 단 하나.

 회로에 기억된 동작대로 행동한다──그리고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살아간다.

 촤아, 하고 현측에 부딪친 물살이 일었다. 데이지는 손을 뻗어 물에 잠겨 있는 둥그렇고 흰 형체를 끄집어올린다. 유선형의 몸체에 난 장식과 틈을 타고 민물이 흘러 떨어졌다.

15 ◆viyCmhCTeI (nXRPqBOiuE)

2024-10-06 (내일 월요일) 02:05:14

 오토마타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종류를 고르라면 단연코 장난감이다. 사실 대부분의 오토마톤이 사람이 할 일을 굳이 쓸데없이 복잡한 자원을 들여 대신하는 장난감에 해당하긴 한다만, 여기서의 장난감이란 정말로 사람이, 특히 어린애들이 가지고 노는 용도의 완구를 뜻한다.

 물론 랭커셔에도 오토마타를 취급하는 장난감 상점이 있었지만 데이지가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는 나무 블럭이나 이미 온몸이 동일한 잿빛으로 수렴한 누더기 같은 토끼 인형, 그리고 병정놀이 하기에는 턱없이 수가 부족한(1명) 호두까기 인형이 끝이었다. 이것들은 무엇 하나 오토마타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토마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플로지스톤 엔진으로 동작할 것」.

 라부아지에의 실험 이후로 인류의 보물이 된 「플로지스톤」은, 공기 중으로부터 얻을 수 있으며 사실상 무제한 존재하고, 수증기를 다소 발생시키는 것 외에는 뛰어난 연소 공정을 자랑하는 연료다.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 전부에 걸쳐 플로지스톤 엔진은 끊임없는 개량을 거듭한 결과, 완벽에 가까운 열효율을 얻었으며 극적인 경량화와 저가화, 안전성 증가를 이루어냈다. 장난감 따위에 기관을 탑재할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 「완벽한 에너지원」이라서다.

16 ◆viyCmhCTeI (nXRPqBOiuE)

2024-10-06 (내일 월요일) 02:14:32

 그리고 장난감 오토마타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둥글둥글하고 품에 들어올 만큼 커다란, 오목눈이를 닮은 오토마톤이다. 깃털은 알록달록한 도색으로 꾸며지기도 했으나 바탕색은 예나 지금이나 흰색이 유행했다.

 이들은 마치 애완동물처럼 방에서 늘 주인을 기다리며, 「플로지스톤 펠렛」이라는 소형 연료 카트리지를 먹이 삼아 먹거나 짹짹거리는 새 소리로 교감하기도 한다. 영락없는 애들 장난감이지만 어른들은 「컬렉션」이랍시고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이러한 새[鳥] 오토마타를 왕창 모으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물에 푹 젖은 채로 데이지의 손에 안겨 있는 오토마톤이 바로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데이지 주변에 세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상하네요.”

 쾌락주의자이면서도 무엇이든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뜯어 생각해 보기를 좋아하며, 또 그러한 깐깐한 논쟁으로부터 쾌락을 얻는 로제타 양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파는 물건이었다면 오토마톤을 하나하나 상자에 포장해 두었을 텐데요.”

17 ◆viyCmhCTeI (nXRPqBOiuE)

2024-10-06 (내일 월요일) 02:26:01

 “포장──이요?”

 “방금 머리 위를 지나던 비공정은 여객선이 아니라 물류 운송선이죠. 힌덴부르크 이후로 저렇게 무식하게 커다란 여객 비공정은, 적어도 런던 상공에는 다니지 않으니까요.”

 로제타 양은, 담배 파이프라도 있었다면 그것을 둥글게 매만지며 연기를 내뿜었을 듯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학생이니 그럴 수는 없지만.

 “그리고 오토마타는, 신품인 경우에 종류를 불문하고 진열되기 전에 서로 긁히기라도 하면 골치아파지니 박스 하나하나 개별 포장을 해요. 그런데 별안간 알맹이만 떨어지다니 생각해 보니 이상해서요.”

 데이지는 괜스레 반박을 하고 싶어져서 머리를 굴렸다. “아까 노란 빛이 반짝하는 걸 봤는데, 폭발 사고 같은 거라면 떨어지면서 훼손된 박스가 날아가 버린 게 아닐까요?”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되었다. 어느새 잔잔해진 보트 주위의 수면으로 수십 마리의 오목눈이가 연잎을 헤치고 두둥실 떠올랐다. 주위에서 떨어진 상자 껍데기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데이지가 목격한 낙하의 순간에 박스 같은 형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18 이름 없음 (.l/ef6Q1VI)

2024-10-06 (내일 월요일) 05:10:17

고식을 좋아하던 사람이라 흥미롭게 읽었어. 기대된다.

19 ◆viyCmhCTeI (3J4THPYwB2)

2024-10-07 (모두 수고..) 00:36:00

>>18 호호 기대해 주니 고마워!!

20 ◆viyCmhCTeI (d99SXCZ3.o)

2024-10-08 (FIRE!) 20:11:38

《TC//LO》

21 ◆viyCmhCTeI (d99SXCZ3.o)

2024-10-08 (FIRE!) 21:05:17

 데이지는 이 자리에 클레어 사감이 있었다면 어떻게 말했을지를 떠올려 보았다. 머릿속의 성대모사로.

 「주인 없는 물건은 반드시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아니, 애초에 떨어진 물건에 손을 대어서도 안 되지요! 지체 높은 노스포드의 아가씨라면 땅바닥에 있는 물건 따위 탐내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뭔가 부족해.

 「학습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장난감 오토마톤 따위를 들고 있다니! 당장 그것 저리 치우세요─!」

 이래야 하지. 하지만 여기 있는 학생들은 그런 데 찬동하지 않을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말릴 방도 없는 자유인이자 학습외출을 할 꾀를 낸 로제타 양이나, 얌전하고 성실해 보이지만 사실은 로제타 양과 동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세인우드 양도. 그나마 데이지가 걱정하는 인물이 있다면 헤이스팅스 양이 되겠지만──.

 “어머! 귀여워라! 저희 집에 있는 메이슨 씨랑 꼭 닮았네요!”

 반응이 이러하니까. 데이지는 건져낸 오토마톤을 갑판 위에 얹어 두었다. 비행선이 지나가고 비쳐 드는 햇살이, 표면에 맺힌 물방울 하나하나에 담겨 초승달처럼 발밑을 밝혔다.

22 ◆viyCmhCTeI (d99SXCZ3.o)

2024-10-08 (FIRE!) 22:20:38

 2파운드 10실링으로 보트 투어를 즐길 수 있는 한도인 2시간이 지나고, 뱃사공이 「돌아가겠습니다, 전속 전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보트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바다와는 연이 없는 농부 집안의 딸이었지만, 「전속 전진」은 「좌현 변침하여 유턴」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배는 수련 꽃다발을 가르며 선착장에 조용히 가 닿았다.

 그렇게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장난감 오토마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진전되지 않은 채로 복귀 시간이 다가왔다. 교내에서 장난감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들키면, 큰일이야 나지 않겠지만 공연히 꾸중을 듣는 일만큼은 면할 수 없다. 유실물이라는 것을 트집잡히면 더욱 골치아픈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미 들고 와 버렸는데.’

 “뭘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교문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데이지를 보며, 로제타 양이 안색도 바꾸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벽 너머로 던져 넣은 다음에, 수풀에서 회수하면 그만이잖아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단순한 해법이다. “네? 그치만──.”

23 ◆viyCmhCTeI (d99SXCZ3.o)

2024-10-08 (FIRE!) 22:30:28

 책가방에 십자가를 제외한 장신구를 두 개 이상 달고 다녔다간 곧바로 반성문을 써야 하는 게 노스포드인데? 하나까지는 「부모님이 보내 주신 소중한 징표」라고 변명이 가능하지만 두 개째부터는 장식이라는 논리로.

 “그건 프레벨 양이 다른 학생의 기숙사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다들 금서나 화장품을 한둘쯤은 숨겨 두고 있죠.”

 그러면서, 로제타 양이 품에서 꾸러미를 꺼냈다. ‘세상에, 저건 루주잖아. 교내에서는 쓸 일도 없는 걸 뭣하러 모셔 오는 거지?’ 이성적인 반박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로제타 양은 참나무가 자라 있는 벽의 뒤편으로 꾸러미를 힘껏 던져 넣었다.

 “저기에 던져 넣으면 셰퍼드 파이라도 으깨지지 않을 걸요. 나무를 옮겨 심을 때 푹신한 흙을 채워 넣은 지 얼마 안 됐거든요. 관목이 있어서 눈에도 띄지 않아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저녁 채플 전까지 물건을 챙기겠다고 나와서 뒤적거리면 안 된답니다. 저희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클레어 사감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까.”

 어느새 오토마톤을 높은 노스포드의 펜스 안으로 던져 넣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버려서, 데이지 양은 우물쭈물대면서도 결국 로제타 양이 정해 준 자리 앞에 섰다. 힘껏 두 손으로 던져 올리자, 희고 둥그런 오토마톤이 호를 그리며 담장을 넘어갔다.

24 ◆viyCmhCTeI (d99SXCZ3.o)

2024-10-08 (FIRE!) 22:54:18

 “자, 그럼──.” 빙긋 웃고 있는 세인우드 양을 뒤로하고, 로제타 양이 말했다. “우리는 밀수의 공범이며, 프레벨 양은 내게서 귀중한 정보를 사 간 거래 관계의 파트너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정보료는, ‘친구가 되어 말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괜찮지?”

 순간 어안이 벙벙했던 데이지도, 이미 걸려든 마당이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말이 통하니 좋네. 다음에도 잘 해 보자고, 데이지.”

 데이지라. 적어도 노스포드에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들을 일 없었던 그 이름의 울림에, 데이지는 가볍게 몸을 움츠렸다.

25 ◆viyCmhCTeI (d99SXCZ3.o)

2024-10-08 (FIRE!) 22:56:54

 몸 검사를 마치고, 면학 보고서를 제출하고, 곧바로 여왕 폐하 상과 성모상 앞에서 감사 기도를 올리고, 기숙사 생활동 한가운데의 급수원에서 목욕재계하고, 방으로 돌아와서 해가 떨어져 저녁 기도를 다녀 오고, 취침 준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야 데이지는 오토마톤을 회수해 올 수 있었다. 루주가 담긴 꾸러미는 일찌감치 가져간 모양인지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데이지는 잽싸게 보자기로 덮어 숨기고 기숙사로 뛰어 돌아왔다. 아가씨는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상황이 아니라면 뛰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지만 장난감 밀반입을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샤를로테 폰 빌레펠트, 그러니까 데이지의 룸메이트는 차분하게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개어 둔 수건을 하나씩 포갰다. 폰 빌레펠트 양은 혀가 배배 꼬이는 이름부터 외모와 고결한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노스포드에 입학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소녀였다.

 3년 동안 교분이 쌓인 덕에 노스포드에서는 데이지를 유일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데이지로서는 오히려 이렇게 완벽한 아가씨가 자기를 이름으로 부르는 상대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마저 겸손으로 느껴질 만한 가인. 그런데 단 하나 좀 동떨어진 특징이 있다면, 당황했을 때 생쥐처럼 목소리가 갈라진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감상할 일이 없는 소리였으나 데이지가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오랜만에 그 기성이 터져나왔다.

 “끼약! 데이지, 그게 뭔가요!”

26 ◆viyCmhCTeI (CavFJPClv6)

2024-10-09 (水) 00:05:26

 “오──.” (토마톤.)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어쩌다 그런 귀여운 걸 들여 오셨나요!” 당황해서 독일 제국 억양이 한가득 묻은 목소리였다. “제가 방금 귀엽다고 했나요?”

 “응, 그렇긴 해. 오늘 뱃놀이를 나갔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걸 주웠어. 주인에게 돌려 줄 방도도 없고 해서 챙겨 두다 보니 어느새, 으, 밀반입까지!”

 “저런, 뭐가 됐든 들키면 큰일일 텐데!” ‘하늘에서 떨어졌다’라는 말을 의아하게 주워섬기더니 샤를로트는 망설임 없이 책장으로 사용하던 공용 서랍장의 맨 아래칸을 비웠다. “위급할 땐 여기 숨겨 두세요. 제 책은 책상 위나 침대 아래 수납장에 둘 테니까요.”

 물론 숙녀의 서랍장을 뒤지는 건 클레어 사감이라도 하지 않는 짓이었지만, 그랬다가는 샤를로트의 책상이 좁아질 텐데. 하지만 3년이나 얼굴을 맞대고 살아왔으니 그 성격쯤이야 이제는 알 법했다. 모든 것에 우선하여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뻗는 사람이었고, 또 이를 가장 편안하게 여기는 체질.

 아, 이 어찌 천사 같은 룸메이트인가!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랍장에 오토마톤을 집어넣었다.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당장 가지고 놀 방도는 없었으니까. 물에서 건져지고 나서부터 미동도 않던 오토마톤이 서랍의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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