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금을 모티브로 하고있지만 잘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상황극판의 기본 규칙과 매너를 따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오고 가는 이에게 인사를 하는 자세를 가집시다. ※상대를 지적할때에는 너무 날카롭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15세 이용가이며 그 이상의 높은 수위나 드립은 일체 금지합니다. ※특별한 공지가 없다면 스토리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7시 30분~8시쯤부터 진행합니다. 이벤트나 스토리가 없거나 미뤄지는 경우는 그 전에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이벤트 도중 반응레스가 필요한 경우 >>0 을 달고 레스를 달아주세요. ※계수를 깎을 수 있는 훈련레스는 1일 1회로, 개인이 정산해서 뱅크에 반영하도록 합니다. 훈련레스는 >>0을 달고 적어주세요! 소수점은 버립니다. ※7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 경우 동결, 14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경우 해당시트 하차됩니다. 설사 연플이나 우플 등이 있어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존 모카고 시리즈와는 다른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기존 시리즈에서 이런 설정이 있고 이런 학교가 있었다고 해서 여기서도 똑같이 그 설정이 적용되거나 하진 않습니다. R1과도 다른 스토리로 흘러갑니다. ※개인 이벤트는 일상 5회를 했다는 가정하에 챕터2부터 개방됩니다. 개인 이벤트를 열고자 하는 이는 사전에 웹박수를 이용해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벤트를 진행하는 이는 계수 10%, 참여하는 이에겐 5%를 제공합니다.
독점과 쟁취! 그는 크게 전율했다. 온몸의 털이 솟는 것 같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쾌감이 발끝부터 시작해 등골까지 순식간에 차올랐다. 세상 온 곳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 귀가 먹먹해진 뒤, 시간이 지나자 삽시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전율과 감탄, 외경과 공포가 한꺼번에 느껴졌다. 레이브는 사람에게 거래를 제안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인첨공의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작품을 미술관에 온전히 인계해 독점할 것인지, 아니면 경매를 통해 쟁취할 것인지! 그는 주먹을 꽉 말아 쥐며 어떻게든 이 쾌감을 억누르고자 애썼다.
"저는……."
그리고 대답을 잠시 멈추고 목이 타는 듯 연신 음료를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쨍 울렸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있었지만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차를 끌고 오지 않았더라면 와인이라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 치솟았다. 만약 그가 안드로이드였다면 내부 환풍 팬이 팽글팽글 돌아가는 소리가 레스토랑을 채우다가, 결국 고장이 났을지도 모른다. 여러 마음이 한꺼번에 치고 올라왔다. 정당한 계약을 체결해 그 작품을 독점하고 싶다. 무려 레이브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작품 아닌가? 그 기회를, 미술관 역사에 길이 남을 영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길 소망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알았으면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식은땀이 한줄기 흐르고, 그의 고운 화장이 흐트러졌다. 그는 긴장한 듯 허리를 쭉 폈다. 심장의 고동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시선을 흘끔 올렸을 적, 레이브는 여전히 오싹할 정도로 희열을 선사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탈지면처럼 바싹 마른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쟁취하고, 싶습니다."
레이브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인첨공의 15년 역사, 그 역사의 약 반절을 함께 한 세기의 천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작품을 감히 내가 독점한다고? 말이 안 된다. 무슨 권리로 한 사람이 그 가치를 정하지? 그의 호승심에 불이 붙고 활활 타올랐다. 인첨공에서 손에 꼽는다는 레벨 5의, 심지어 목화고 저지먼트의 작품. 이미 레벨 5라는 점에서 가치는 드높다. 목화고 저지먼트라면 지금껏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 온 주인공이니 배로 뛸 것이다. 그 정체가 레이브라는 점에서 가치가 밑도 끝도 없이 치솟을 싸움이고, 세상은 뒤집힐 것이다. 그만큼 레이브라는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발굴한 작가가 어디까지 치솟는지 볼 수 있으리라! 모든 사람들이 앞다투어 정하는 가치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자신이 지는 싸움이라 한들 미술관에도 당연히 이득이 될 것이다. 자신이 발굴했고, 자신이 이끌고, 끝내 그 모든 것을 뒷받침했다는 점으로도 이미 큰 호감을 얻을 수 있으니. 그의 사업적인 머리는 계산을 마쳤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싸움판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이다. 그는 심사숙고를 한 사람처럼 애써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브는 깍지 낀 채 턱에 괸 손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얹었다.
"낙장은…… 불입이라 하지요……." "예, 압니다." "섯다, 하실 줄 아십니까?" "아, 그, 네. 할 줄은 압니다." "그렇다면 판이 벌어졌습니다. 패가 돌아갔군요……." "제 수중의 패를 알려드려야 하나요?" "네에, 보시기에 어떤 패인 것 같으신지?" "……제가 감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물론이지요." "…팔광, 입니다." "팔광이라. 관장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러니…… 한 가지, 드리고자 하는 조언이 있습니다만." "말씀하시지요." "이미 보셨겠지만, 도올 선생과… 저는…… 네에, 밀접한 관계랍니다."
레이브가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을 까딱이며 손등을 두드리자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길쭉한 손가락에 닿았다. 레이브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 두 개가 있었다. 붉은 보석을 문 뱀의 형상을 한 반지 하나, 그리고 검은 흑요석을 옭아매듯 끌어안은 거미 형상의 반지 하나. 그는 반지의 존재를 눈치채고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패션용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다. 정교한 보석이 세공된 반지는 연인끼리 끼우는 용도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그 도올 선생과 연인이라는 것부터 반지가 두 개라는 점까지, 여러 생각과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도저히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레이브는 그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시선을 곧게 마주했다.
"그이 또한…… 소문난 미술품 수집가요, 제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 "누구보다 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며, 제가 무얼 준비하는지는 눈치를 챘을 테지요." "그렇다는 말씀은……." "팔광을 가진들 확실하게 삼광을 쥐어야 한다는 말이랍니다…. 일광을 쥐면…… 멍텅구리 구사를 보여줄 만큼 그이는 만만하지 않으니까요……."
이미 한 번, 제 복귀작을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기회는 오로지 그 순간, 한 번뿐이었는데……. 레이브는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이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셰프가 마지막 메인 요리를 직접 가지고 오며 설명하려 들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귀한 송아지 고기와 셰프의 노고는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경매 날짜만 떠올랐고, 그는 셰프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물릴 적엔 작품에 대한 생각만 머리에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대로면 남은 디저트가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판이다. 그는 이대로면 큰일이 나겠다 싶어 애써 주제를 돌리고자 했고, 레이브는 나이프질을 하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곤란하신가요?" "아, 아닙니다!" "저는 곤란하답니다…… 그러니, 대화의 주제를 돌려보도록 하지요." "네에." "관장님은…… 연인이 있나요?" "아, 그, 네. 약혼자가 있어요.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아, 이브라. 축하드립니다. 어떤 분인지 여쭙는 것은 실례일지……." "오! 아니요, 안티스킬이에요. 강력 범죄팀에 있지요." "안티스킬이라. 듬직하겠군요." "말도 마요! 덩치는 곰처럼 크면서 겁이 어찌나 많은지. 집에서 벌레가 나오면 제가 다 잡는답니다. 그 모습에 한 번 더 반했다나 봐요." "그런 면이 귀여우신 건 아닌지……?" "네, 맞아요. 아주 귀엽지요! 아, 부담스럽지 않다면 청첩장을 보내드리고 싶긴 하다마는……." "……신데렐라를 통해 보내주시면 됩니다." "정말요?" "물론이지요. 경사를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아니면 제 연락처를 드릴 테니 거기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프로필 사진도 뭣도 없지만요……." "세상에, 기뻐라! 아 참, 그것보다……." "네?" "혹시, 도올 선생님과는…… 어떻게……?"
그가 기억하기로 도올은 레이브와 자주 sns로 소통했고, 팬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작품 중 《아름다운 유작》은 레이브에게 조언을 얻고 축사에 그 이름을 언급한 것이 화제였을 정도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교제했을까? 레이브는 분명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 레이브는 연한 송아지 고기를 포크로 쿡 찍다가도 시선을 슥 올려 그를 마주했다.
"아, 그."
레이브는 무언가 말하려다 한참을 뻐끔거리더니, 헛칼질을 했다. 그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매너가 흔들리자 웃음을 꾹 삼켰다. 누군가와 사랑을 해본 경험이 다수인 그는 저런 행동을 아주 잘 안다. 귀엽기도 하지! 레이브는 어떻게든 칼질을 이어나가며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부터, 서로를 알고 만난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요?" "15주년 행사 때…… 순찰을 하다가, 스킬아웃에게 습격을 받아…… 크게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습격이요?" "네……. 그 당시에, 저지먼트는 샹그릴라를 뺏는다는 존재로 인식이 된 나머지." "아, 그랬었지요." "그때…… 정신을 잃은 저를 병원으로 직접 데려다주신 것이 인연이 되어서요……." "네." "바로 떠나셨지만, 범인을 잡아 안티스킬에 인계할 상황이 생기면, 증언을 위해 연락처는 남겨두신지라…… 덕분에, 감사의 뜻을… 네.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계기였나요?" "네. 서로 만남을 자주 가지게 되었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큰 호감을 품게 된 것도 있고… 그래서……." "그래서-?" "……이 사람은, 생각과 말하는 것이 모두 같은 올곧은 사람이라, 믿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요. 그래서… 교제…를. 네. 레이브라는 걸 밝힌 건, 얼마 안 됐지만……."
레이브는 결국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두고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발그레한 뺨을 보자 그는 호들갑을 참기 위해 큼직하게 썬 고기를 입안에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레이브와 도올임을 알고 만난 것도 아니고, 위험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 첫 만남이라니! 매체에서 본 듯한 사랑 이야기에 그는 귀를 쫑긋 세우며 음식을 꿀꺽 삼켰다.
"……저기, 몇 가지 질문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오랜 시간 함께 하셨다는 건……?" "아. 인천이… 좁긴 좁더군요." "같은 학구 사람이었나요?" "아뇨, 그게, 음…… 저는 차일드 에러라서, 과거…… 재단에서 후원을 받았거든요." "상관없는 질문이다마는 재단, 이라면……." "생각하는 그 재단이 맞습니다만, 저는 개인 후원인이 지정되어 큰 연관은 없어 다행이지만……." "정말 다행이군요……! 잠깐만요, 잠깐, 혹시 개인 후원인이 설마……?" "네. 그이가, 후원자였답니다……. 편지로밖에 만나지 못했었는데, 이런 우연이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에나!"
그는 결국 탄성을 내질렀고, 레이브는 뺨을 붉히더니 손가락 끝을 맞붙여 첨탑 모양을 만들며 배시시 웃었다. 사랑에 푹 빠진 듯한 반응에 그는 절로 같이 가슴속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맙소사! 이보다 더 로맨틱한 만남이 어디 있을까! 물론 장벽 하나가 있지만 몇 달이면 해소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아는 도올은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거니와, 레이브 또한 독심술사라 했으니 위험할 일도 적겠지! 그는 고기를 다시금 한입 썰어 넣고, 꾹꾹 잇새로 짓눌러 씹어 삼키며 비죽비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숨겼다. 동시에 다른 반지에 시선이 간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나 사랑을 하는데 어째서 반지는 두 개일까? 레이브는 그 반응을 안다는 듯 머뭇거리다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며 부스스 웃었다.
"……형제의 이상형이, 같더군요." "형제, 요." "네. 서로 잘 합의를 보아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는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애써 손아귀에 힘을 줬다. 천재의 발상을 범인은 이해하지 못한다지만, 이건 과연 이해해도 괜찮은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요즘 세상에서는 이렇게 다인의 연애도 포용되고 있거니와, 레이브 자신이 행복해 보이니 다행이다마는. 그는 남은 식사를 같이 즐기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듣자 하니 도올은 사적인 자리에서 짓궂은 면이 있는 사람이었고, 두 번째 연인이자 베일에 싸인 도올의 형제는 대외적인 도올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모양이다. 그 또한 자신의 덩치만 크고 겁 많고 귀여운 예비 신랑 이야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이어갔다. 경매 이야기는 잠시 치울 정도로 두 사람 모두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주는 대화였다. 비워진 접시와 디저트, 식후 차까지 만족스럽게 해치우고 3학구까지 바래다줄 적, 레이브는 마지막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텀 세레니티에서 뵙겠습니다." "저야말로요. 아까 말씀드리진 못했지만 삼광 또한 제 손에 있을 겁니다, 반드시!"
레이브는 얌전히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는 어느 정도 차가 도로변으로 나갈 적, 백미러로 레이브가 뒤로 돌아 자리를 떠나는 걸 흘긋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오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신랑에게는 누구였는지 비밀로 해야지! 행복한 시간과 결의를 다지기를 하루, 꿈결처럼 달콤했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가을은 완전히 무르익어 쌀쌀한 겨울을 맞이하고자 준비하고, 신데렐라와 순수, 비탄과 오만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도 큰 문제 없이 미술관을 지켰다. 짧은 시간 동안 변화가 있었다면 레이브가 작품을 하나 더 등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는 점이다. 예술계에서는 큰 기대와 호기심을 품었고, 평소 문화와 예술에 대해 집필하던 기자들은 레이브의 이례적인 행동에 관심을 표했다.
그는 악셀을 밟아 매끈한 도로를 가로질렀다. 어텀 세레니티 인천은 늘 비공개로 이루어졌지만, 오늘은 공개 경매로 바뀌어 인첨공의 부자들은 어떤 생활을 하는지, 그 특종을 노리고 싶은 기자들과 경매에 참여하는 셀럽을 찍고자 하는 팬, 그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크리에이터가 주변에 가득했다. 그가 경매 참여자들을 위해 지정된 곳에 주차를 하고, 붉은 카펫 위로 발을 들일 적엔 플래시가 터졌다. 그는 거센 빛에 표정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무진 노력하며 신랑의 에스코트와 함께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밖이 소란스럽지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오래 살다 보니 관장님께서 늦는 걸 다 보는군요." "말도 말아요! 차가 어찌나 밀리는지." "신랑분은 어찌, 무탈하셨나요?" "예." "여전히 과묵하시군요. 아스트라페 씨는 잘 지내나요?" "선배님은…… 요즘 바쁘십니다." "안타깝군요!" "아 참, 그러고 보니 작가님." "네?" "이번 경매에 나오는 작품을 혹시, 알고 계시는지……?" "레이브의 작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평소에도 공개를 하시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유출된 것도 없네요."
건물 내부에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던 도올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음, 제가 누구인지 이제 아실 테니 말씀하는 겁니다만, 비밀로 숨긴 나머지 저도 뭔지 알지는 못합니다." "아주 꽁꽁 숨겼나 보군요!" "하하, 호기심을 못 참았다가 혼도 났고요." "혼이요?" "예, 앙칼진 고양이가 따로 없거든요." "앙칼지다뇨? 아주 귀엽던데!" "휴, 죄다 허상입니다. 어찌나 앙칼진지, 자주 달래주지 않으면 금세 또 토라져서 진땀을 빼야 합니다." "그렇다기엔 표정이 너무 좋으신데요?"
그의 신랑은 무슨 대화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기만 했고,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은밀한 비밀을 교환한 사춘기 학생들처럼 키득거리며 웃었다. 신랑은 알려달라는 듯 궁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경매 시작 10분 전을 알리는 알림에 몸을 돌리더니, 신랑을 향해 윙크했다.
"오늘 저녁의 비밀!"
공개 경매로 진행된 어텀 세레니티 인천은 스트리밍 사이트로도 생중계됐다. 기자들은 연신 지정된 공간에서 사진을 찍었고, 경매에 올라온 작품들은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했다. 인첨공 15주년을 기념하는 외부 작가의 작품부터 시작해 인첨공 내부에 꽁꽁 갇혀 해외로 나가는 건 엄두도 못 내는 고전 작가의 작품, 그리고 신인 작가들의 향연까지. 전광판에는 누적 경매 금액이 오르내렸고, 뒤이어 나올 작품의 추정가 또한 치솟았다. 남은 작가 리스트를 보며 흥미를 가지지 않은 다른 참여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자리를 빠져나가거나, 사전 지식이 부족한 몇 기자들은 이번에 경매에 나온 작품들에 대해 검색하느라 바빴다. 도올과 그는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준비한 예산 내에서 서로 적당한 선에서 경쟁했고, 누군가 냉큼 낚아채면 아쉬움을 표했다. 오후 7시에 진행됐던 경매는 어느덧 2시간을 훌쩍 넘겼고, 마지막 작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경매에 들어갈 작품은 레이브의 《유작 - 자화상》입니다."
유작! 좌중이 잠시 술렁였다. 레이브, 유작, 자화상……. 공존하면 안 될 단어 3개가 한꺼번에 들어간 작품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끌기 충분했다. 경매사는 캔버스가 담긴 케이스를 끌고 오는 직원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은 이번 작품이 안드로이드가 아니라며 깊은 흥미를 가지듯 서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의견을 나눴다. 이번에도 유화인 걸까? 레이브는 전체적인 덩어리와 묘사는 투박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섬세하게 화장을 쌓아 올리는 듯 색을 덧칠하면서도 투명한 색감을 유지하는 화풍이 특징이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그렸을까?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이 작품이 가려진 천에 닿자, 경매사는 천을 붙잡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보시다시피 이번 작품은 안드로이드가 아닌 유화입니다. 감정 결과 시중의 물감이 아닌 작가가 직접 과거의 방식을 재현해 염료를 섞은 것으로 판단됐으며, 죽음과 삶의 순환을 표현했습니다. 작가의 요청에 따라 경매의 시작은 참여자들의 자율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지며, 대리 경매인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자율로 이루어진 이후에는 10분의 시간 동안 경매가의 조정이 이루어집니다. 팻말을 들면 기존의 방식처럼 금액을 올리는 형식이며, 버튼을 누르면 직접 가격을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작품의 공개와 함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대리 경매인을 사용하지 않는다. 본인을 마음껏 드러내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는 레이브의 특이한 경매 방식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결이 조금 달랐다. 레이브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이 직접 정할 수 있게 만들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길래 그럴까? 고작 인첨공의, 흔하디흔한 작가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이번 작품을 이렇게 과시하는 걸까? 그렇지만 천이 들춰지고 작품이 드러났을 적, 그는 매너도 깜빡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혼자만 일어선 것이 아니었다. 레이브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몇 참여자와 도올 또한 작품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일어서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거대한 이무기가 캔버스를 가로지르며 큰 폭을 수놓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바다가, 천지가 있었다. 세 갈래의 순환 같기도 했고, 삶과 죽음, 탄생을 그린 것 같았다. 언뜻 보기엔 민화 같았지만 명백한 유화였다. 대담한 붓 터치와 전통적인 색감이 절의 단청을 그린 듯이 화려했고, 동시에 유화의 투명함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림의 형태가 아닌, 이무기의 눈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저 눈을 알고 있었다. 새하얀 비늘로 된 눈꺼풀 너머로 드러난 무엇보다 선명한 비색의 수륜은 아무리 봐도 레이브의 것이었다. 그는 다시금 전율했다. 사람들은 레이브만 기억한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이것이었나? 저건 인간 아무개의 유작이다. 레이브와 이시미만 남고 인간으로서의 삶은 죽을 것이다! 도올이 홀린 듯 팻말을 들 적, 그는 질 수 없다는 듯 쏜살같이 팻말을 들었다.
"5천5백 나왔습니다…… 5천7백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시작 가격은 고작 10만 원이었다. 적당한 옷 몇 벌을 사면 끝날 가격은 어느새 큼직한 단위로 오르기 시작했고, 천만 원을 훌쩍 넘겨 일억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큰 가격이 오르내리는 것이 미술 경매고, 레이브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5천을 넘겼으니 이 정도는 쉬운 일이지만 팻말은 도저히 멈출 기미가 없었다. 4학구의 셀럽 하나가 열심히 팻말을 들었지만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오르는 가격에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아버렸다. 도올과 그, 그리고 1학구의 거물 하나가 서로 경쟁에 불을 붙인 탓이었다. 사람들은 홀로그램 스크린에 뜬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돈의 단위와 남은 시간에 시선을 고정했다. 1학구의 거물이 버튼을 누르고 2억을 부른 시점에서 레이브의 작품은 이미 최고가를 경신한지 오래였다. 거물은 본인의 승리를 예상하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지만, 도올이 버튼을 누르며 가격을 직접 지정하자 금세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5억." "예?"
그가 놀란 눈으로 도올을 쳐다봤을 적, 구부정한 자세로 버튼을 누른 도올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림을 홉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렸고, 작게 벌어진 입은 다물리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도올이 눈을 흘겨 그와 시선을 정확하게 마주했을 적, 그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래서 레이브가 삼광을 확실히 쥐어야 한다고 했구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돈의 단위에 기자들은 연신 노트북을 두들겼고, 스크린에 적힌 돈은 오르지 않았다. 도올이 서서히 승리의 미소를 지으려 할 때, 삑 소리와 함께 스크린의 숫자가 올랐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말입니다." "제, 제가 약속을 좀 했거든요……." "관장님, 이번 작품은 제가 가지면 안 됩니까?" "죄송합니다. 저도 눈이 돌았어요." "비탄까지 드렸는데 말입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읊조리던 도올은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스크린의 시계는 어느덧 3분을 남겨두고 있었고, 1학구의 거물 하나가 팻말을 들자 그와 도올은 팻말을 다시금 들며 서로를 견제했다. 도올은 굳센 결의를 다진 듯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야속하게 흐르는 타이머를 바라보며 날선 미소를 지었다.
"예, 어디 한 번 달려보자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불이 붙었다. 내려가기가 무섭게 팻말은 다시 올랐고, 1학구의 거물 또한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빠지지 않으려 들었다. 5억이라는 가격에도 그는 버튼을 눌러 8억을 제시했고, 도올은 지지 않는다는 듯 팻말을 들었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싸움 속에서 1학구의 거물은 여유를 점차 잃더니, 이내 두 사람의 눈을 부산스럽게 흘겨보다 지레 놀라며 포기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저 사이에 더 꼈다간 살인이라도 날 기세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쥘 수 없는 액수의 금액이 오르기 시작하고, 마지막 1분을 남겼을 적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훔치며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12억. 12억이면 할만하다. 그가 누구인가! 인첨공 4학구의 미술관 관장 아니던가? 그는 희열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버튼을 꽉 짓눌렀다.
"제시 가격이 나왔습니다, 말씀하십시오!" "27억."
좌중에서 놀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도올 또한 버튼에 올렸던 손의 주먹을 꽉 쥘 정도였다. 그는 스크린을 장식한 숫자의 단위를 정확하게 셈하며 가쁜 숨을 갈무리했다. 레이브의 작품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그는 예술을 사랑했다. 사람들의 열정을 사랑했고, 누군가의 삶을 존중했다. 비좁은 인첨공에 발을 들였을 때도, 이곳에도 예술과 창작, 영혼이 있으리라 믿었다. 어딜 가도 누군가의 열정으로 불태운 영혼의 안식이 있기를,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4학구에 미술관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 그는 레이브의 작품이 아니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곳에서 가장 거세게 타오른 영혼의 흔적을 수집하지 않고서야 배길 수가 없다! 그가 말도 안 되는 단위의 돈을 읊조리고, 경매장은 조용해졌다. 그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도올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이내 잽싸게 미소를 거뒀다.
"……."
반쯤 풀린 동공이 그를 빤히 마주하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번진 피처럼 번들거리고, 붉은 눈동자가 발목을 붙드는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눈동자가 목을 물기 위해 가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더 마주하면 죽을 것이다. 생존을 갈구하는 본능이 등골을 스쳤다. 그의 신랑 또한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뻗어 제지했다.
"작가님." "……예." "저는 절대 포기 못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누군가의 유작이니까요." "제 사람의 유작이기도 하죠." "혼자 품을 건가요?" "……." "레이브의 가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본질의 죽음을 애도할 겁니다."
식은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카운트는 어느새 30초를 남겼고, 그는 결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7초가량 그를 쳐다보던 도올은 기세를 거두며 눈을 감더니, 못 말리겠다는 듯 끌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27억, 더 없습니까? 카운트다운 시작합니다. 10, 9, 8……." "……그렇게 말씀하시니 도저히 못 이기겠군요." "……23억! 인첨공 내부 작가 중 최고가를 경신하며 낙찰되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15분 뒤 공개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카운트가 끝나고 경매 최고가 기록란에 당당히 작품이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았다. 기자들은 화면을 보며 특종이라며 강화유리 너머에서 시끄럽게 쑥덕거렸고, 천장을 멍하니 보던 그는 신랑이 그에게 넓은 어깨를 빌려주며 괜찮다는 듯 등을 다독이자 푹 기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감자야, 내가 해냈어……." "그래, 잘 했어." "잘 했어?" "응, 영화 속 장면 같았어." "감자야……. 우리 내일 영화 보러 갈까?" "응. 팝콘 큰 거 사자." "영화 말고 팝콘에 집중하는 저 돼지감자를 어쩜 좋아…. 작가님도… 괜찮으신 거 맞죠?" "……토라졌다 하면… 제게 주실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것보다 아까 그건 뭐였어요? 정말 놀랐다고요!"
그가 도올을 향해 멋쩍은 시선을 보냈을 적, 도올 또한 진이 다 빠졌는지 의자에 축 늘어진 채 손등을 이마에 대고 있었다. 안경을 벗을까 고민하듯 몇 번이고 안경의 다리를 만지작거리던 도올은 이내 옆 테이블에 비치된 음료를 향해 손을 뻗었다.
"관장님이야말로 그 금액은 대체 뭡니까……? 미술관 운영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응? 아, 그거요. 별로 신경은 안 써요. 그냥 30억 부를 걸 그랬나?" "……코인이라도 하셨습니까?" "뭐, 그것도 있지만 용돈 모아둔 거 쓰면 되니까요."
그는 신랑의 어깨에 기댄 채 애교스럽게 웃었다. 할만한 싸움이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4학구 미술관 관장이니까. 그는 미술관을 사비로 세웠고, 지금은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있지만, 인첨공이 설립된 지 얼마 안 돼 작가가 별로 없을 적, 그는 어쩔 수 없이 인첨공 외부에 존재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개인 경매로 모 한국인의 소유가 됐다는 소식만 남기고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도 있었다. 도올은 그 사실을 어렵잖게 떠올리곤 끙, 하고 앓으며 잔을 내려두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꼴이었군요." "뭐, 저도 조금 빠듯하긴 했지만요. 결혼식 준비하느라." "……대체 뭘 기획하신 겁니까?" "청첩장 드릴게요. 그렇지 감자야?" "……응." "꿀이 뚝뚝 떨어지는군요. 곁에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돌아가면 작가님도 고양이에게 그만큼 해주실 거잖아요?" "제 고양이에게요?"
도올은 핸드폰을 꺼내 연락이 온 게 있나 확인하다 눈을 들었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시선이 의아했다. 살기 가득하던 눈은 어디로 갔는지, 붉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덮여 사라졌다 나타났다. 어떤 연락도 없는 핸드폰을 음료가 든 잔 옆에 둔 도올은 잠시 고민하는 듯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요, 그랬다간 앙칼지게 굴 걸요." "그렇다기엔 제가 뭘 봤게요? 가까이 와 봐요, 가까이." "음?"
그는 누가 들을세라 신랑과 함께 허리를 숙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작가님 얘기를 하니까 귀까지 빨개져선 웃던데요?" "……사실입니까?" "제가 거짓말을 왜 하겠어요! 귀엽던데." "제겐 퍽이나 새로운 모습이라서요." "어, 작가님께는 안 그랬나요?" "……음, 제가 좀 과보호를 하는 편인지라." "그게 상관이 있나요?" "그만 좀 하라면서 앙칼지게 구는 모습을 더 많이 봤거든요." "어머, 귀엽기도 하지! 그렇지만 작가님, 지금 제대로 어필 안 하시면 동생분께 뺏길걸요?" "제 동생까지 말했습니까?" "어쩌다 보니? 고양이도 저에 대해 아주 잘 알걸요? 제 생활의 70%는 얘기한 것 같아요." "못 말리겠군요."
도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웃었다. 그는 신랑과 함께 여러 질문을 하며 대화를 나눴고, 어느덧 15분의 휴식 시간은 끝이 났는지 경매사가 다시금 단상 위로 올랐다. 이번엔 캔버스도, 작품도 없는걸 보니 안드로이드인가? 그는 자리에 착석하며 작품이 놓일 빈 전시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편안한 휴식 되셨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작품을 공개하겠습니다. 작품 명은 《레이브》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작품 전시대를 향해 걸어오는 존재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새하얀 머리카락의 일부를 비녀로 틀어올리고, 홀로그램과 신소재로 지어 입은 고운 옷자락이 화려하게 하늘거렸다. 단아한 걸음마다 머리카락의 끝자락이 채여 흔들렸고, 옷자락이 매끈하게 바닥을 스칠 때마다 거대한 뱀이 기어 오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으나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한 색감 탓에 자개로 이루어진 비늘을 가진 이무기를 연상케 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건 안드로이드가 아니다. 안드로이드를 사람으로 창조하여 숨결을 불어넣는 레이브의 작품이니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남성의 육체를 가진 저 존재에게서는 삶의 맥동과 온기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3학구에 거주하던 누군가가 그 정체를 알아채곤 중얼거렸다.
"……이시미잖아."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없는 침묵을 이어갔다. 작품 전시대에 홀로 선 청년을 훑는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이 자리에 자신을 팔겠다는 듯 화려하게 치장한 얼굴이 몹시도 앳되다. 얼굴 없는 세기의 천재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그 존재를 부정하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일렁이는 공기 속에서 그는 홀린 듯이 천천히 일어서며 박수를 쳤다. 느린 박수 소리가 조용한 경매장을 울렸고, 공기를 타고 전염이라도 되는 듯 다른 사람도 일어나 동참하더니 이내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 몸집을 불려갔다. 경매장이 떠나갈 듯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레이브는 유작에서 그려진 이무기와 똑 닮은 눈동자를 가늘게 휘더니 잔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카메라의 셔터음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강화유리 너머의 노트북 타자 소리가 쉼 없이 울리며 레이브의 존재를 일파만파 퍼뜨렸다.
"……결국 죽었구나."
그는 깊은 감동 탓에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레이브를 쳐다보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올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결국 너 또한 죽어버렸어. 결국엔 너마저. 붉은 눈동자에는 사랑과 경외, 그리고 물가에 아이를 내어놓았다는 깊은 한탄이 묻어 나왔다. 주먹을 꽉 말아 쥐는 모습과 함께 애써 축하한다는 미소를 짓는 표정을 마주했을 적, 그는 멍하니 도올을 바라보다 북받치는 여러 감정에 결국 왈칵 눈물을 쏟으며 신랑의 품에 기댔다.
오늘은 장례식이 있는 날이다.
현태오가 죽었다. 이시미이자 레이브가 그 삶을 이을 것이다. 사람들은 태오의 죽음을 누구보다 환영했고, 축하했다. 비좁은 세상은 이시미와 레이브를 널리 퍼뜨리며 그 시체를 유작이라는 이름 하에 가렸다. 태오는 쏟아지는 빛 속에서 눈을 감았다.
존재여, 자아란 무엇인가? 나 스스로自我를 뜻하는 것인가? 혹은 묻고 의심하는諮訝하는 것인가?
존재여, 죽는 법을 배우라. 그리하면 그대는 사는 법을 배우게 되리라.
죽음으로 하여금 인간의 껍질을 벗고 스스로를 마주 하라. 그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고 고귀하게 태어났음을 자각하라. 근원의 빛을 보라. 깨달으라.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그곳에 있으니, 직시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보아라. 그리하여 단천한 탐심을 품은 채 비천한 삶을 살던 금수가 깨달음을 얻고 승천하였으니, 등용문에 올랐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