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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양이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었더라면, 링링은 이 낯선 인간이 아연실색하여 차갑게 굳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알아채기 어려울 것도 없다. 세상에 등을 돌린 이들은 다 그러니. 싸늘한 등짝만이 보이는데 어찌 못 알아채겠나. 그런 티마저도 내기 싫게 된 이들은 아예 세상과 연을 끊고 잠적해버리는 거고.
그러나 이 소년은 아직 거기까지 초탈하지는 않아, 이런 뜻밖의 접촉을 겪었을 때- 밀쳐내거나, 멀어지거나 해서 익숙한 거리를 유지할 틈도 주지 않고 무언가 이렇게 달겨들어 무릎 위에 덥석 앉아버렸을 때, 이따금 그 차가운 외면을 그만두고 이 뜻밖의 접촉에 시선을 둘 때도 있는 것이었다. 미카즈키는, 아니 미카는 손을 뻗어 이 이름모를 고양이의 턱을 복복 긁어보았다.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고양이를 교두보삼아 사람이 그 거리로 훅 다가와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멀리서 지나가는 링링아- 하고, 사람 이름이라기엔 좀 지나치게 애칭인 뭔가를 애달프게 찾는 목소리에, 혹시 얘를 찾나? 하고 촉이 동한 것까지는 좋았다. 자기 무릎 위에 올라앉은 이 고양이는 지나치게 사람 손에 익숙해보이는데다가, 이 고양이가 랙돌 품종이라는 것까지는 미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집사 있는 고양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카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행동하는 편을 선호했고, 그래서 손을 뻗어 링링의 목에 채워진 목줄이라던가 리본이라던가에 이름표가 붙어있지나 않은가 확인해보려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스즈네가 "링링이 찾았다아~!" 하고 기운차게 소리치는 게 더 빨랐다.
스즈네의 눈에 보였다. 오후의 태양 아래 하얗게 백열하는 토키와라의 풍경 아래, 창백하고 차단하게 드리워진 그늘 속에 앉아있는 무언가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링링을 무릎 위에 앉혀둔 이가, 고개를 들어 스즈네를 마주바라보아 온다. 하늘색. 그러나 토키와라의 하늘과는 조금 다른 색채를 하고 있는, 그런 냉랭한 하늘색이 스즈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무릎 위에 앉은 고양이로 한번 시선을 떨구고는, 다시 스즈네에게로 시선을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스즈네가 땍땍거리고 링링이 고양이소리로 대꾸하는 것을 번갈아가며 지켜본다.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로에게 친근해보이는 모습이다. -잘됐네. 미카는, 미카즈키는 얼굴표정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괜찮습니다."
스즈네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한 미카즈키는, 어설픈 손길로 링링의 가슴팍과 뒷다리를 받치려 했다. 고양이 데리고 가세요, 라는 무언의 제스쳐를 취하기 위해서. 그러나 미카즈키가 자신의 무릎에서 이 붙임성좋은 고양이를 떼어놓기는커녕 채 들어올리려고 하기도 전에, 스즈네가 먼저 옆자리에 덥석 앉아버렸다.
앉아서 고개를 들어보면, 바야흐로 백열하는 여름. 하얗게 빛나는 놀이터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동네 풍경, 문득 어디선가 풍겨와 코끝에 걸리는 모기향 냄새, 방학이 찾아온 토키와라를 오가는 이들, 오가는 새들, 오가는 바람들... 언덕 너머로 아지랑이 끓어오르고, 찌르르 찌르르 하고 우는 풀벌레 소리가 차분히,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채우는, 여름이다. 문득 한 줄기 산들바람이 서늘하다.
미카즈키는 잠깐 스즈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침 아까 전 편의점에서 사온 음료수로 시선을 돌린다. 원 플러스 원이라, 하나로 충분할 것을 공연히 두 개나 받아서 처치곤란하던 참이다. 미카즈키는 반쯤 따이다 만 캔 말고, 아직 멀쩡한 새 캔을 거머쥐었다. 표면에 물기가 송골송골 맺혀, 아까 냉장고에서 바로 꺼낼 때만큼 차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 시원하다 할 만한 온도. 여름의 한낮에 마시기 좋은 온도. 미카즈키는 그것을 스즈네에게 내밀었다.
오늘따라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어쩌면 하늘색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운 것 아닐까 싶을 만큼 맑은 하늘은 도회지와 달리 탁 트여 있어서 마치 바다가 하늘로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저 멀리 수평선의 구분이 흐릿한, 맑고 맑은 그런 시간이었다. 이 만남의 시간은.
"우우웅~"
링링이는 모르는 사람이자 소년의 손길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소년의 손끝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목울림이 부드럽게 전해진다. 복실복실한 털은 엉킴이 없어 평상시 손질이 잘 되었음을 여실없이 보여주고, 낯선 이의 손길도 잘 받아들이는 링링의 모습은 언제 돌아와도 있는 그대로 반겨주는 토키와라 같다. 어쩌면 이 마을 하늘에 떠 있어야 할 구름의 일부가 고양이의 형상을 띄고 소년의 무릎에 내려온 건 아닐까 싶을 때, 일제히 울리는 방울 소리 같은 목소리가 있었다.
링링이 구름의 조각이라면 스즈네는 구름으로 빚은 듯한 사람이었다. 오늘처럼 맑은 날 기분 좋게 하늘을 유영하는 새하얀 구름 뭉치. 걸음 하나 몸짓 하나가 지극히 가벼우며 그 하나하나에도 구불진 머리카락이 둥실거리고 옷자락은 살랑였다.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게다가 휙 날아갈 것 같은 스즈네를 지상에 붙들어 놓은 듯 하다.
뭐든 받아내거나, 혹은 흘려보낼 것 같은 구름이 그늘 아래 서늘한 하늘을 마주했다. 맑지만 금방이라도 차가운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빛 눈을 마주하며 크고 둥근 잿빛 눈매가 부드러이 휘어 미소를 그려냈다.
파닥파닥. 밀짚모자의 넓은 챙으로 부채질을 해보지만 더위가 그리 쉽게 식을 리가 없다. 급하게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더울 리는 없었을 텐데. 링링이가 혼자 나갔다는 걸 알면 스즈네는 평소보다 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으...냐?"
녹은 듯이 감겨 있던 눈이 반짝 뜨였다. 옆에서 소년이 뭔가를 권하는 말이 들려서다. 볕 아래에서 말간 잿빛을 띄는 스즈네의 눈동자는 그늘 아래에서 부드러운 갈색빛을 띄었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데다 소년의 키가 월등히 컸으니 자연히 스즈네의 시선이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그랬듯 가까이에서도 소년의 눈을 올곧게 마주한 스즈네는 깜빡 시선을 내려 소년이 내민 음료를 보았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뭔가를 확인하듯 하더니, 이내 방긋 웃으며 음료를 받아들었다.
"고마워어~ 잘 마실게~!"
음료를 받아간 스즈네는 파닥이던 밀짚모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캔을 열었다. 틱. 치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캔이 열리고 캔 속 음료가 스즈네의 입술을 넘어 흘러들어갔다. 단숨에 절반 정도를 마시고서 시원함에 크~ 하는 소리를 내자 여즉 소년의 무릎에 있던 링링이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므우우우웅." "뭐어~ 이건 내가 받은 거야~ 링링이는 안 줄 거야~" "우우우아우우웅." "흥! 말 안 듣는 못된 링링이는 오늘 간식도 안 줄 거다 모~" "우아우우웅!" "에베베~ 안 들리지롱~"
스즈네의 못된 말들에 불만을 품은 링링이의 귀가 아래로 착 내리접혔다. 기분 탓일까, 눈도 세모낳게 뜬 듯한 링링이가 소년의 무릎에 꾹꾹이를 하려 했다. 그대로 둔다면 말랑한 앞발이 허벅지를 꾹꾹 누르며 소소하게 불만을 표출할 것이다. 그런 링링이에게 메롱, 하고 혀까지 내민 스즈네가 말했다.
"오늘 잇치 할부지가 찻잎 가지러 오시는 날이란 말야~ 마마가 집에서 기다리랬는데에 링링이 너 때문에 나와서 나 혼날 거라구~ 그으럼 링링이 너두 간식은 못 먹어야 공평하지이~" "우웅." "흥이다~ 흥~ 응~ 할부지 언제 지나가시려나아~"
소년이 들어도 상관없는건지, 혹은 들으란 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대화 -라고 할까 혼잣말에 가까운- 를 한 스즈네가 놀이터 바깥을 보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허나 스즈네는 알지 못 했다. 그렇게 흘린 말들이 소년에게 어떻게 들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