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서 단 한번도 모든 것이 잘 될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적은 있어도 모든 것이 잘 된적은 없었으니까.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엄마의 손을 놓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낯선, 천장이다."
소녀는 얇고 길다란 숨을 내쉬었다. 납보다도 무거운 한숨이 이윽고 바닥에 자욱하게 깔렸다.
병실이었다. 병원 특유의 죽음의 냄새가 약품의 향과 섞여서는 코를 찌르는 탓에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 보니 손목에 박힌 서슬퍼런 바늘이 무슨일이 일어났던건지를 증명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온 몸을 짓누르는 짙은 피로감에 짜증을 내며 이불을 밀어내리자 그새 식은땀이 났던건지 가을의 찬공기와 섞여 기분좋은 소름이 온몸을 스치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살아버렸네.
내가 듣기에도 짜증나는 중얼거림은 웃음으로 화하지도 못하고 입안에서 사라지고 원래의 형체를 잃은 헐떡이는 소리만이 입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히 손에서 피가 났던건 기억하는데. 아니 손이 맞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병실에서 눈을 떴으니 누군가가 보고 구급차를 불러주었던 거겠지.
시간이 남아버렸네.
아직 기타를 칠 수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할까. 아니면 아직 길한가운데 서 있는 것을 두려워해야할까. 일으켜세웠던 상반신을 그대로 침대에 파묻었다. 자신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분해하고 있겠지. 눈시울이 뜨겁지만, 웃음도 났다. 죽음의 경계에서 돌아온 것에 대한 희열과 죽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슬픔과 분명 죽어가며 보았던 '무언가'가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해서.
똑 똑 하고 떨어지는 개나리색의 액체에 맞추어 호흡하며 멀쩡한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라이브가 있었지. 창문에 쳐진 커튼 틈새로 옅은 빛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아직 시간은 늦지 않았지만 이 모양 이 꼬라지라면 오늘 공연은 펑크겠구나. 모처럼이니 신곡을 오늘 발표하기로 했었는데. 아쉽네. 히데미한테는... 음... 연락하지 말자. 괜히 걱정시키기보다는 오해를 받는게 나아.
핸드폰을 들고 사장님에게 사죄 연락을 돌리려 하는 사이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금발. 뭐야 날 옮긴건 마키였나.
"일어났어?"
"...응."
"정말이지, 많이 놀랐거든? 좀 더 언니한테 상냥하게 해줘."
"미안."
마키는 어느새 침대의 옆에 있던 소파에 앉아 내 작곡노트를 펼쳐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건지 팔락팔락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는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었다.
"최근에 밥은 제대로 먹고 있어?"
"입맛이 없어서 하루 한 끼 정도만..."
"예전처럼 구토는 안하고?"
"응."
"남자친구랑은 잘되가?"
"응...아니 그건 어떻게 아는거야?"
"장녀니까!"
노트를 덮은 마키는 야요이와 눈을 맞추었다. 언제나처럼 루비처럼 예쁜 눈동자였지만 언제나처럼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끈적한 어둠이 깃들어있었다. 남자친구라는 애는 분명 야요이보다 어렸었지? 음... 고생좀 하겠네. 예전보다 더해. 완전히 죽어버린 눈이다.
이제는 아니었지만 마키는 이전에도 이런 눈을 본적이 있었다. 얘네 친언니인 치에에게서였지만. 어째 후지타 가에는 이런 사람밖에 없는지. 아저씨도 그렇고 야요이도 치에도 멀쩡한 부분이 더 적단 말이지.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예전이랑 비교했을때 야요이에게는 아직 집착이랄지 집념이라고 할지 그런것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다행이라고 할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것처럼 바뀌어버린 것은 이상하지만 요즘의 일을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부터 그 남자애와 만났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들 하니까. 근본이 바뀌지는 않기도 했고.
"...의사는 뭐래?"
"알콜중독에 더해서 피로가 쌓였다던데. 이번엔 몇시간이야?"
"앞에건 헛소리겠고... 우리 정기 회의가 닷새전이지?"
"응 그랬지?"
"그러고 나서부터 바로."
"뭐?"
"그래도 한두시간정도는 잤어."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는 야요이의 머리를 들고있던 작곡노트로 가볍게 쳤다.
"너 당분간 휴가야. 리더가 그 꼴이면 우리 밴드가 뭘로 보이겠어."
야요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마키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화가 나있는 것은 마음을 꿰뚫어보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하루를 안하면..."
"본인이 알고 이틀을 쉬면 동료가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 그래도 너는 좀 쉬어야해. 인터뷰랑 녹음도 좀 미뤄둘테니까 제대로 회복하고와."
"...알았어"
힘빠지는 소리로 대답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마키는 안심한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으름장을 놓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링거를 뽑아버리고 연습하러 가겠다고 달려가서 뽑아서 나버린 피를 대신하듯 술을 수혈하고 기타를 쳐대면서 연습실을 피바다로 만들어둘테지. 중학생때는 헛바람이 들어서 자주 그랬었는데. 많이 어른이 된걸까. 아직 하는걸 보면 그대로인 것같은데.
혼자서 주절대는 마키를 바라보던 야요이는 이내 마키가 열어둔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당장 데리고 나가라고 하면 그렇게 해주긴 할텐데. 어째서인지 그럴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소년은 생각했다. 참으로 오래간만의 긴 여정이었다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별을 동경했던 어머니의 흔적은 드넓은 사구로 한뼘 한뼘 흩뿌려졌다. 줄곧 함께 했던 장소였기에 추억이 깃든 이곳을 찾는 것은 그리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그토록 가슴 아렸던 시간에 비해 이별은 꽤나 덤덤했다. 언젠가는 겪여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그저 빠르게 겪는 것뿐이라고. 무더운 여름날에 찾아온 지독한 성장통은 정말 한숨처럼 지나가버렸다.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 아야카미로 돌아온 소년은 전보다 조금 성숙해졌다. 개구쟁이 같던 얼굴에는 차분함이 내려앉아서 방정맞던 걸음에 추를 단듯이 닿는 발자국마다 무게감이 느껴진다.
고작 한 바구니나 될법한 유품을 손에 들고, 어머니가 계셨던 공간을 조심스럽게 돌아본다. 기계 소음으로 가득했던 병실은 깔끔하게 비워져 다음 환자를 맞을 준비가 되었다. 소년은 침상 위에 곱게 깔린 매트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윽고 발걸음을 옮긴다.
오랜만에 찾은 집안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거의 한달 여 시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당연한 거겠지. 유품을 정돈할 새도 없이 창문을 열고 밀린 일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길게 자란 머리를 질끈 묶고, 손가락을 훑기만 해도 한웅큼 잡히는 먼지떼를 하나하나 벗겨내며. 바쁜 일정에 그간 내려놓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어머니와 이곳을 처음 방문해 소지로씨와 인사했던 기억부터 지난 봄과 여름의 이야기들. 잊고 있었네. 모두들 잘 지내고 있을까.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을에 접어든 아야카미는 왠지 모르게 한산해서 모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듯한 기분이야.
한바탕 미룬 일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히데미는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어머니가 남긴 물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입원하기 전 입었던 옷가지와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소설, '잊히지 않는 사람들' 한 권. 병상에 누운 직후엔 의식이 돌아오는 날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정말 소박한 몇가지 물건밖에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같은 밤에 홀로 심야 등불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 생의 고립을 느껴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복받치네. 그때 내 자아의 뿔이 딱 부러져 버려 왠지 사람이 그리워지지.
「 “여러 옛일이나 친구를 생각해 보네. 그때 유유히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사람들일세.
그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봤을 때 주위의 광경 속에 서 있는 이 사람들이지.
나와 남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모두 이생을 하늘 한편 한구석에 부여받아 유유한 행로를 더듬어 서로 힘을 합쳐 무궁한 하늘에 돌아가는 자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마음속에서 일어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에 흐를 때가 있네.
그때는 실로 나도 없고 남도 없는, 단지 누구나가 다 그리워 떠오른다네.” 」
히데미는 책장을 넘기며 씁쓸하게 그 구절을 바라보았다. 아주 어렸을때. 어머니를 따라 문장을 좇았을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구였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작은 한숨과 함께 책이 덮이고, 어머니의 옷가지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 이 적막이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이제는 정말로 오롯이 나 혼자만이 남았으니. 단칸방 작은 공간도 왠지 모르게 거대하게 느껴져서 다리를 웅크린채 상자 안에 물건들을 쓸어담았다.
오후에는 포목점에 들러 이제는 작아 맞지 않는 여름 와이셔츠를 뒤로한채 늦은 교복을 맞췄다. 거울 앞에서 가쿠란 단추를 채우며 다른 학생들은 진작 찾았는데 왜 이리 늦었냐는 주인 아저씨의 목소리에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가격을 치르고 나서는 길. 넓게 트인 길을 바라보며 그 사이 지나가는 차 몇대를 향해 무심코 시선이 따른다.
장례를 마친 직후 먼 친척에게 연락이 닿았다. 생판 남이나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정이 딱하게 느껴지기라도 한 모양일까. 이런 저런 말이 오갔지만 결국 이곳에 남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연고 없는 시골에 혼자 남아 무엇을 할 것이냐는 가벼운 물음이 심중을 후벼파는듯한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이곳에는 소중한 친구들과 인연이 남아 있기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
히데미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오랜만에 접속한 SNS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궁금한건 그게 아니야. 여러 이름을 바쁘게 건너뛰던 손가락은 마침내 한 사람에 이르러 멈춰서지만. 이상하게도 채팅방은 지난 여름방학에 멈춰 있었다.
바빴던걸까? 나도 그랬지만.. 그래도 연락 한통 없다는건 조금 의아한 일이라서.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DOG DAY의 라이브하우스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