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금을 모티브로 하고있지만 잘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상황극판의 기본 규칙과 매너를 따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오고 가는 이에게 인사를 하는 자세를 가집시다. ※상대를 지적할때에는 너무 날카롭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15세 이용가이며 그 이상의 높은 수위나 드립은 일체 금지합니다. ※특별한 공지가 없다면 스토리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7시 30분~8시쯤부터 진행합니다. 이벤트나 스토리가 없거나 미뤄지는 경우는 그 전에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이벤트 도중 반응레스가 필요한 경우 >>0 을 달고 레스를 달아주세요. ※계수를 깎을 수 있는 훈련레스는 1일 1회로, 개인이 정산해서 뱅크에 반영하도록 합니다. 훈련레스는 >>0을 달고 적어주세요! 소수점은 버립니다. ※7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 경우 동결, 14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경우 해당시트 하차됩니다. 설사 연플이나 우플 등이 있어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존 모카고 시리즈와는 다른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기존 시리즈에서 이런 설정이 있고 이런 학교가 있었다고 해서 여기서도 똑같이 그 설정이 적용되거나 하진 않습니다. R1과도 다른 스토리로 흘러갑니다. ※개인 이벤트는 일상 5회를 했다는 가정하에 챕터2부터 개방됩니다. 개인 이벤트를 열고자 하는 이는 사전에 웹박수를 이용해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벤트를 진행하는 이는 계수 10%, 참여하는 이에겐 5%를 제공합니다.
느와르 AU 기억나네요.. 세은이랑은 약간 경쟁 관계인 청윤이가 정하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하는데 정하는 세은이랑도 친구라 셋 다 불편해지는.. 뭐 결국 결말은 정하가 중국집 가서 밥이라도 먹어보지 않겠냐는 말에 볶음밥이면 간다며 세은이랑 같이 먹는다는 소리도 제대로 안 듣고 랄랄라 하면서 중국집으로 청윤이가 향하며 끝났었죠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마감 시간. 평소라면 칼같이 하교 말고 퇴근해서 숙소에서 잠만 잤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왜냐면 오늘은 마감 정리 당번은 나니까 말이지! 뭐, 다행인 건 나만 하는 게 아니라 리라 선배와 함께 마감 정리 당번이라는 거다. 폐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해야지! 삼삼오오 퇴근하는 부원들에게 인사하고, 곧장 캐비닛에서 청소도구를 챙겨서는 리라 선배에게로 가서는 말을 걸었다.
"마감도 잘 부탁드려요, 선배! 주방은 부실보단 할 거 적으니까, 부실 먼저 치울까요?"
주방은 내가 많이 들락날락했고, 선배는 주방 근처에도 못 가셨던 거 같으니까, 부실부터 같이 치워서 얼른 선배부터 해방해 드려야지! 나야 퇴근하면 잠만 잘 테지만 선배는 무대에 서시기도 하고, 다른 일도 많을 테니까. 실제로, 주방에서 할 건 설거지 남은 거, 재고 파악, 간단한 청소 정도인데, 부실은 아무래도 사이즈도 크고 치울 것도 많으니 말이지. 아이고, 이럴 때는 내가 청소 능력자였으면 좋겠다니까~.
빅보스 st인가 호오... 좋지 그것도, 역시 남이 해주는게 맛나요 🤔... 빅 보스도 좋고 영 보스라고 불려도 어울릴 거 같긴 하다 보스의 응접실 뒤에 있는 비밀 방에서 외투랑 조끼 벗고, 와이셔츠 위로 걸친 멜빵에 접힌 소매 굳은살이 박힌 주먹의 너클 부분, 풀려서 목에 걸려 있는 넥타이
situplay>1597044257>664 situplay>1597044257>897 / 현재 점수 92점
─자리가 거의 다 찼다. 성운은 입구에서의 안내를 잠깐 그만두고 카페의 안을 바라보았다. 유명인사들도 있었고, 방문객들도 있었고, 인첨공의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다. 저마다 메뉴를 시켜두고, 한껏 메이드와 집사 차림을 차려입은 저지먼트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문득 자신이 그리도 원했던 평범한 일상이 이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성운은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바빠보이고··· 혜우도 그런 것 같다. 왠지, 손끝이 근질근질했다.
성운은 리라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리라야. 혹시 피아노 하나만 그려줄 수 있어? 그렇게 복잡한 형태는 필요없고─ 아니, 피아노가 아니라도.”
성운은 창틀을 눈짓했다.
“그냥 이 창틀 위에 건반만 그려줘도 괜찮을 것 같아─”
리라가 성운에게 어떤 모양의 피아노를 그려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성운은 스툴을 하나 가져와서는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카페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두를 위해, 그 건반들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오신 분들은 다들 안녕하세요! 제가 마지막으로 돌렸던 분이 여로주였긴 한데...어차피 지금 돌리려고 찾는 분은 여로주밖에 없는 것 같으니 저야 상관은 없어요.
누굴 만나고 싶으신가요?
아. 추가적으로 캡틴은 금요일부터 2박 3일 휴가이기 때문에..혹시라도 금방 가신다고 한다면 조금 힘들 것 같다는 말씀은 전할게요. 8ㅁ8 여로주...항상 저와 돌릴때 2번 돌리고 졸리다고 가신 적이 있다보니..어지간하면 킵해도 상관없는데 이번에는 내일까지는 일상 끝내야하기 때문에...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주륵)
"으헤~ 다행이네여~ '애초에 처음부터 그런 행동을 안했으면 되는거 아니냐.' 라고 하시겠지만서두... 그때 일은 하나하나두 꽤 신경쓰고 있으니까 말임다.
...그래두 모처럼의 시간을 방해한건 즈한테두 NG였슴다!"
설마하니 애교가 먹힐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저 동월이 마음씨가 좋아서일지, 머리 위에 손까지 얹어주며 특별히 용서해주겠단 말에 활짝 웃는 그녀였다. ...물론 그 일이 있고난 뒤에 쓴소리를 들었던 소녀가 잔뜩 울상인 표정이 되어서 한동안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졌었단건 역시 비밀로 해야겠지만...
"머... 람보플레이두 싫어하진 않지만여. 그치만 아무래두 패달이 있는 게임은 번거롭더라구여~"
두개의 컨트롤러를 잡고 하는 플레이, 실제 총이라면 어림도 없겠지만(그래도 어찌저찌 가능하긴 하겠지만)... 컨트롤러같은 경량화된 모델건이면 꽤 할만한 기행이었다. 최소한 좀비들이 넘쳐나는 집 시리즈의 산탄총 버전처럼 직접 슬라이드를 당겨 장전해야 하는 기믹은 없었으니까,
"헤에~ 오랜만에 한다는건 경험이 있단 거네여~ 칼잡이 무사라도 가끔은 납탄의 맛을 즐길 필요는 있지여~ 고럼고럼~"
잔뜩 들뜬 분위기, 제 성격다운 플레이인지 이리저리 흩날리면서도 알아서 잘 피하고 잘 맞추는 행동, 하지만 그녀답게 마구잡이로 달리면 넘어지듯 그 어떤 조작도 들어가지 않은 대결판의 표시는 정직했다.
"허접은... 즈였슴다..."
누가 그랬던가, 대충 무언가를 조지고 온다 말해버리면 기막힌 플래그로 인해 본인이 조져진다는 이야기... 그녀는 컨트롤러를 내려놓자마자 털썩 하고 주저앉더니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째섬까... 분명 동료 구출도 잘 했는데..."
물론 행동 하나하나가 시늉을 할 뿐인 그녀답게 정말 풀이 죽었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런 모습을 보는 상대방의 입장에선 그보다도 우중충한 아우라는 없을 수준이었다.
이름을 부르자 화영이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쳤다. 한때 꽤나 비슷한 색깔을 띄었던 눈동자는 이제 터무니 없이 다른 빛깔이 되어 서로의 색다른 눈동자를 마주 반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란 것처럼 점점 커지는 상대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불안은 혹시, 하는 기대로, 기대는 곧 확신으로 변한다.
아. 당신도 나를 잊지 않았구나.
잔뜩 놀란 고양이 같은 얼굴에는 그간 흐른 세월의 흔적이 조금씩 새겨져 있었지만 그 반듯하고 정갈한 이목구비, 그리고 다정한 톤의 목소리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것들이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거의 비슷한 속도로 확신을 넘어선 반가움이 차오를 무렵 먼저 움직인 것은 화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성의 눈높이는 한때 그보다 한참 위쪽에 있었겠지만, 지금은 거의 비슷하다.
"......기억, 해 주실 줄."
몰랐다. 물론 알아봐주길 기대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시의 그 촬영장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배우인 화영에겐 거쳐온 많은 촬영장들 중 하나일 뿐이었을 것이고, 어렸을 적의 이리라 또한 수없이 지나쳐 온 많은 아역배우들 중 하나였을 뿐일 테니까. 그렇게 지레짐작해 애써 기대를 죽이고 아직 예정되지도 않은 실망을 두려워하며 소심하게 몸을 사리고 있으면, 당신은 그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한발짝 먼저 성큼 다가와 그를 안아주려 한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따스한 위로 어린 한 마디도 기꺼이 건네주면서. 이에 리라는 뻗어온 화영의 팔을 거부하지 않고 곧장 다가섰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랜만이에요... 화영이 이모."
일방적으로 훌쩍 자라버린 리라의 몸 탓에 어린 시절처럼 폭 파고들진 못했어도 화영의 품 안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그 사실이 앞만 보고 헤엄치며 살아오느라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마음 한 구석의 그리움 덩어리를 조금 녹여주는 것 같아서, 리라의 눈시울 또한 덩달아서 촉촉해진다. 그리운 호칭 입에 담으니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
"엄청 옛날이라서 기억 못 하실 줄 알았어요.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고요. 한 번 연락 드리고 싶었는데 초등학교 졸업 즈음에는 바로 소속사 입사해서 연습생 생활 하며 지내느라... 아, 정말 반가워요. ...보고 싶었어요."
부모 손에 이끌려 카메라 앞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나날, 입에 들어가는 것 하나하나 간섭받고 그게 불편한 줄도 몰랐던 시절. 화영이 몰래몰래 챙겨주던 사탕이나 과자 같은 간식들과 따스한 차의 맛을 리라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어린 마음에 어마마마가 엄마였다면, 그런 철없는 생각도 했었는데. 정작 지금 오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물론 화영은 그의 어머니가 아니고, 될 수도 없지만. 이쯤에서 리라는 궁금해진다. 화영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가장 처음 들었던 궁금증. 당신은 어쩌다가 여기, '인천첨단공업단지 3학구 목화고등학교의 저지먼트 부실' 에 오게 되었는지.
"근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목화고에 아는 분이 계세요? 재학생? 아니면 선생님?"
리라가 알기로 화영의 아이는 본인보다 어렸다. 이리라가 6살일 적 화영은 출산으로 인한 휴식기를 끝내고 복귀했었다고 언뜻 들었으므로. 그럼 그 아이는 아마 아직 고등학생이 아닐 텐데, 친척 쪽 방문인가. 이런저런 생각 도중, 리라의 시선이 화영의 어깨를 넘어서 그 뒤의 중섭에게 닿았다. 화영의 팔짱을 끼고 걸어오던 중년 남성. 아마도 그의 남편. 그리고 그 시선이 닿고 있는 사람은—
"학생이면 저도 같이 찾아드릴게요. 나름 발이 넓거든요, 저. 이것저것 많이 주워듣고 지내요."
으악...상황은 그냥 카페 상황으로 해도 충분한데!! 8ㅁ8 그래도...일단 여로주가 다음을 기약하겠다고 한다면 알겠어요! 8ㅁ8 그..그..혹시나 해서 말하는거지만 왜 자꾸 돌려요! 그게 아니라 정말로 제가 금요일에 아침 일찍 가서 일요일 밤에 오거든요. 그래서.. 목요일 밤까지 일상을 못 끝내면...너무 긴 킵이 되버려서..제가 너무 죄송해지기 때문에..가능하면 그때까진 끝내는 것이 저도 편하고 그래서..(굽신굽신)
situplay>1597044171>794 situplay>1597044231>858 성하제로 인첨공이 시끄럽다지만, 안경은 최근 새롭게 성장하고 있다는 QU'ART'Z의 활동을 확인하고 있었다. 원래였다면 QU'ART'Z를 무시했겠지만, 빨간 스카프가 좋아하다 못해 거기 가입하겠다는 얘길 꺼내지 않겠냐는 말이 간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돈은 엄청나게 벌어들이고 있네~."
확실히, 블루오션을 공략하는데 성공했는지 수익성은 매우 뛰어났다.
"흐음.. 조금 배가 아픈데.. 얘네들을 이용해 먹거나 수익을 가져올만한 방법이.. 아!"
소시민으로 살고싶은 우유부단한 녀석... 적조직에게도 시민에게도 아군에게도 무르디 무르게 대한다지만. 확실하게 선을 넘어버린다면 그걸 위해 화낼줄도 아는 녀석입니다.
오히려 본인이 '어...죽인것도 아닌데 이정도면 되지 않아?' 싶어도 주변사람들이 나서서 담구려고 드는 작지만 충성심 높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있죠. 아마... 이 근처만 자릿세가 유난히 괜찮은것도, 적 조직과 함께 파티를 즐기는 문화도. 왠만하면 총이 아닌 명함이 오가는 갱단 문화도 전부 이 친구가 새로 지역대장을 맡은 다음이네요. 오히려 본단에 가서 적응을 못하는 지역단원 출신도 있다는 소문이...
축제라는 건 즐겁지만 바쁘다. 마냥 즐기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맘 편히 놀겠지만, 리라처럼 여기저기 소속되어 있어서 계속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쉴 틈이 없다. 아니, 사실 여기저기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바쁠 것 같다. 당장 저지먼트 부실 하나만 봐도 장사가 잘 되다 못해 인원이 넘쳐 흐를 지경이니.
"휴!"
그래서 재밌는 거지만 몸의 피로는 또 별개다. 솔직히 메이드 집사 코스프레 카페라는 소재를 고른 이상 사람이 많이 몰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편견이었던 모양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이 몰리니, 이쯤되면 내일이나 모레부터는 대기줄이 부실 문 앞에 쭉 늘어설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운 상상이 날개를 펼치고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지금은 지금 할 일에 집중해야 할 때다. 리라는 약간 헐렁해진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집사복의 긴 팔을 걷어올렸다. 데일리 미션 최종의 최종. 마감 청소 준비. 복장은 완벽. 오늘의 파트너는!
"응!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주방도 이래저래 너저분하겠지만 아무래도 홀은 오며가며 버려지는 쓰레기들도 있고, 비치해 둔 쓰레기통도 거의 포화 상태니까... 흐음. 어디 보자. 일단 테이블부터 닦을까요?"
새봄 후배님이다. 리라의 눈이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인상을 한 후배에게 가 닿는다. 스트로베리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일부분 한쪽으로 올려 묶고, 눈동자는 산딸기처럼 반짝이고... 그리고.
"이름이 새봄 후배님이었죠? 이미지네이션 쿠킹 능력자! 저번에 같이 임무 나갔을 때 간식도 줬고. 그때 받았던 거 잘 먹었어요. 정신이 없어서 현장에서 먹진 못했는데, 종이에 잘 싸뒀다가 집에 가서 먹었답니다. 맛있었어요. 그거 능력으로 직접 만든 거였죠?"
같은 리얼리티 계열 능력자. 리라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얼른 끝내고 집에 가서 쉬어요, 우리. 많이 피곤하죠?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보자, 쓰레기는..."
저걸 쓰레기장까지 갖다가 버리고 또 올라오고 하기는 힘든데. 잠시 고민하던 리라는 갓 닦아낸 테이블 위에 스케치북을 올렸다.
" 뭐, 지나간 일을 굳이 들추는 것도 NG일테니. 특별히 큰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
동월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과거에 눈감아줄만한 실수 정도야 그냥 넘어가는 편이었다. 경계는 하더라도 악감정은 남아있지 않겠지.
" 아, 하긴. 양발로 컨트롤을 해야하니. "
죽음의 집이라는 모 좀비 게임은 회피 같은 기능이 달려있는건 아니라 양손에 SMG를 끼고서 좀비들을 쓸어버리는 플레이가 가능하지만, 페달로 회피를 해야하는 게임이라면 아무래도 힘들테지.
" 실탄 들어간 총밖에 안쏴봤다는건 안비밀이지만 뭐, 비슷하지 않겠어? "
언젠가, 실탄을 들고서 괴이를 상대해보려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성대하게 실패하고서 도망이라는 굴욕적인 선택을 해야했지만, 능력이 강화되어 대부분의 것들을 썰 수 있게 된 지금은 굳이 자신의 칼보다 약한 총을 선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린이 한 말처럼, 가끔은 납탄의 맛을 즐길 필요가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 하하하! 약한 소녀구나! "
어딘가의 말이 할법한 대사를 웃으며 외치고선, 그녀의 앞에 당당하게 서 총구를 위로 들어올린 승자의 포즈를 취한다.
" 동료만 구출하면 안되지. 머리 말고 손을 쏘면 점수가 더 좋다구. "
일단은 살상이 아닌 제압이 목적이니까... 라고 어딘가에서 들었던 기분이 든다.
" 뭐 너도 엄밀히 따지면 원거리 딜러는 아니지 않나? " " 나도 칼 던지면 되니까 엄밀히 따지면 근접딜러가 아닐지 몰라. "
진짜 불안하네 고맙단 인사도 잘해줬단 칭찬도 귀에 안들어오는 서연이었다 여태 5시간씩 자놓고 기운이 무한대나 다름없을 아이들을 떼거지로 상대했다고? 그것도 슈트안에 들어간채로?? 사람이 기계도 아니고 아니 기계도 과열되면 쿨링타임정도는 필요할텐데 이게 한숨만 잔다고 나아지는건가??? 평소의 서연이라면 이승탈출넘버원이냐고 빽 소리지르고 말았겠으나 이번엔 용케도 참아넘겼다 서연은 알아채지못했으나 서현이 감정조종능력을 발휘한 덕분이리라
그래도 기막히는건 어쩌질못해 기운이 없어선지 시선을 피하고싶은건지 고개숙인 철현을 깝깝한 눈으로 보던중 뒤따른 대답에 서연은 그대로 굳고말았다 하도 충격적이라 머리가 먹통이었다. 선후배사이에 묻기엔 주제넘은질문은 아닐지 조마조마했는데 너무나도 즉답이 나온것도 놀라웠고 감정조종이면 커리큘럼들 못지않게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동생이 반대하는데도 감정을 조종중이라는것도 놀라웠다 듣고도 실감이 안나는 서연이었다
그러나 철현이 어느부분이 농담인지 짚어말하는걸 보니 이건 현실이다 그걸 자각하자 앞뒤없이 눈물이 앞설거같았다. 몇년간 능력개발에 올인하고도 성과가 전혀없었을때 얼마나 좌절하고 허탈했을지 인첨공에서 자립할 방도가 있을까 얼마나 막막하고 고민했을지 뒤늦게 학업이라는 대체진로를 찾고서 자신보다 앞서 그 진로를 준비한 사람들에게 뒤처질까 얼마나 불안했을지 그런저런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탓이었다 모르긴해도 벼랑끝에 몰린것같은 절박함이었을거다 편의점알바를 구하기전까지의 내가 그랬듯이
아무리그래도! 당사자앞에서 울어버리면 그게뭐야!!? 서연은 눈을 꾹꾹 누르고 안경을 고쳐썼다
" ...죄송해요! 저... 선배가 되게 그... 필사적이었겠다해서요... "
사과하고도 여전히 뒤죽박죽인 서연이었다. 뭐라고 해야하나? 그나마 다행인건 숨을 돌릴 정신머리는 남아있었다는것이다 (이 역시도 서현이 능력을 써준 덕분이리라)
" 근데요 선배 수면시간은 1시간만이라도 늘리시면 안될까요? 사람이 못자면 건강이 작살나잖아요... 대학은 물론 한번에 붙는게 제일 속편해도 그래도 재수같은 방법이라도 있지만 몸이 망가지면 돌이키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병원비로 거덜나요... 공부도 다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거잖아요 사람이 살고 봐야죠 "
말하면서도 점점 움츠러들었다 당사자가 아니니 그 힘겨움과 절박함에서 한발 떨어져있으니 지껄일수있는 태평한소리임을 알기에 이런 하나마나인 소리 말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수있다면 좋을텐데
"...슬슬 얘기하지?" "그럴까?" "그럴까가 아니고 말 해! 이 자식아." "어이쿠! 거칠긴." "빌어먹을 새X." "어련할까. 음, 다른 건 아니고, 의뢰 하나 맡기려고 해." "안 한다고 했다." "그건 아니야. 계획이 바뀌어서 네 도움은 필요 없게 되었어." "어, 엉? 그럼 뭔데?" "사람 하나 찾아 줘. 찾아서 생포까지." "뭐 하는 놈인데." "음- 책임감 없는 쓰레기?" "콜. 보수는?" "저번에 그걸로." "사진 있냐." "있지. 그거랑 영상도 보내줄게. 보면 해결 의욕 팍팍 솟을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역으로 불안하다." "언제는 안 그랬을까. 목 마르다. 뭐 마실래?" "레몬에이드." "하하. 여전하다니까."
성하제 3일차 저녁. 실종과 관련된 소문에 살이 붙는다.
알고보니 없어진 학생이 4명 더 있다. 그들 모두 마지막 행적이 각기 다른 공원이며 공원에 들어가는 흔적은 있으나 나간 흔적은 없다. 실종자들의 핸드폰과 ID카드가 공원 내지는 근처 시설에 유실물로 맡겨져 있다.
그리고 어쩐지 사람이 없어졌음에도 불온한 기운이 옅다. 작은 돌의 파문은 금방 퍼져 사라지는 것처럼.
>>104 나 오늘 배터져서 죽을 것 같아 금이가 관리하는 마작장이 태오랑 이혜성이 vip로자주 들락거리는 곳이면 좋겠다. 게임 한판 하면서 비즈니스 이야기 하는거지 찐단골인거지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한 계기로 이혜성이 금이를 거둬들이고 작게는 정장을 입는 법 같은 거나 크게는 비즈니스에 동행했을 때의 자세같은 걸 알려주는 거지 문신팔토시는 정말 하지말라고 뜯어말릴 듯 후레 취향 섞자면 여기서도 계연 비슷하게 관계가 이어지면 좋겠다 그러다가 자기가 거둬기른 깜냥이가 알고보니 흑표라는 걸 알게되고 (이하생략)
이런걸보면 업보란게 참 무서워... 그리고 평화는 유지하기 힘들고. 만약 정하가 죽는다면 이 현상을 이어줄사람은...아마 없겠지. 그나마 세은이? 아니면...청윤이가 생각하는 공리주의는 또 이거랑은 다른 모습일테니까. 그나마 소시민에 가까운건, 서연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
"아....무슨말인지 알것같아요. 서둘러서 하다보면 뭔가 하나씩 빠지니까요." 나도 그런 경험을 한적 있으니까. 다했다고 기뻐서 땠다가, 정작 밑색부분에 마스킹이 된 그대로 칠해버리는 바람에 전체를 디스해버리고 다 처음부터 한다던가... 서류도 인수인계서를 다 썼는데 인계자가 바뀐걸 몰라서 다시 작성했다던가....하아...
"6년...기네요." 꽤 담백한 감상이다, 그야 내가 여기 들어온게 9년정도 됐으니까. 내가 6년전엔...
"초등학교 4학년인가..." 그땐 좋았지, 아무 걱정이고 뭐고 없이말야. 하아. 어쩌다가 이렇게 커버린거니 정하야. 그런 혼잣말을 되뇌이고 있을때쯤, 한양선배의 별거 아닌 이야기가 들려온다.
"잘났으니까요, 어찌되던"
그래, 어찌되던 잘났으니까. 당장 1학년중에서도 멋있는 선배! 하면 순위권 안에는 드는 유명인이라면 유명인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저지먼트 사람들은 없어도 될 사람들은 아니라는거잖아요?"
"농담이에요 농담. 뭐 애늙은이... 좋게말하면 성숙한거라 생각하면 되죠 뭐. 난 그런소리 태어나서 한번도 못들었는데"
차라리 가까운건... 그래, 신발이 그렇게 작은건 안나와요... 아동용도 디자인 괜찮은거 많아요....하아... 그것보단 애늙은이가 낫지 않나?
별거아닌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세 호텔에 도착했다.
"피자...전문...호텔이요? 21세기 너무 빠르다...따라잡기 힘들정도에요..."
야경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호텔 건물 뷰 사이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가득 시야를 채운다.
"여기...괜찮아요? 비싼거 사달라는거 농담이였는데...?" 내생각보다 훨씬 비싸고 뭔가 학생들이 오긴 좀 그렇고 그런 가게같기도하고...
"이왕 먹는거, 시그니처를 먹는게 좋지 않겠어요? 남으면 뭐...남는대로 괜찮잖아요? 포장을...쓰읍 아무리그래도 먹던거 포장은 좀 그런가...?"
그치만. 10만원. 피자한판에 10만원. 생수 한병에 5천원. 미련없이 버리기엔 너무나 비싼 가격이다...
>>111 일단은 아이리스란 사명으로 인첨공에 들어오기 전에도 점례 부모님이랑 같은 재단소속, 그보다 이전엔 대학 선후배 사이였으니깐...
비인륜적인 부분이 있다는건 본인도 자각하고 있기에 최대한 학생들을 학생들 답게 지도해주니까(코드명이 아닌 이름이나 별명으로 불러준다거나, 매사에 친근하게 대하려 한다거나 상황에 따라서 훈련 편의성을 많이 봐준다거나 등) 그나마 여타 연구원들보단 착한 사람인건 맞는데...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자기 딸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약간의 어긋남도 있으니깐...
테이블부터 닦자는 말씀에, 가져온 청소 용구 중, 미리 주방에서 깨끗한 물에 적시고 짜서 온 행주 중 하나를 건네드리는데, 리라 선배가 어쩐지 유심히 나를 보신다. 뭔가 더 말씀하실 게 있으신가? 괜히 긴장이 된다. 부정적인 긴장은 아니고, 그냥 미인에게 빤히 바라봐지면 생기는 그런 긴장이지만. 가만히 시선을 마주치는데, 선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를 하신다. 헐, 나 기억해주셨구나!
"앗, 네! 1학년 신새봄이라고 합니다! 선배님은 이리라 선배님이시죠? 저도 실은 전투 때 뵙고 이름 외우고 있었어요~! 네, 맞아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그 날 선배님께서 만들어주신 물건들 덕에 엄청 든든했어요! 특히 방독면요. 그거 없었으면 많이 아팠을 거예요~."
아, 다시 생각하니 치가 떨리네, 그 배드파더. 애기랑 애기 어머니는 괜찮으시려나. 아니다, 지금은 청소에 집중하자! 빨리 끝내고 쉬자며 고생 많았다는 인사에 "네! 선배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하고 대답하며 가까이에 있던 테이블부터 행주로 닦으려니, 선배가 능력을 발동할 때 쓰시던 스케치북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오! 뭔가 만드시려나? 기대에 가득 차서 리라 선배를 바라보는데 뜻밖의 질문을 들었다. 좋아하는 동물이라...
"좋아하는 동물... 저는 여우 좋아해요! 그것도 북극여우요~"
새하얗고 예쁘고 눈도 착해보이고... 근데 역시 지금은 뭘 만드실 지가 제일 궁금한데! 북극 여우 모양의 소각기라거나... 아, 그럼 차라리 용이 더 어울렸으려나? 뭐, 모르니까 잠자코 지켜봐야지~. 기대감에 절로 선배의 스케치북에 시선이 갔다.
별 건 아니고 잠깐으로 해결되지 않을 거 같달까..() 그렇게 막 걱정할 정도로 큰 일은 아님! 진짜 아님!!! 잠깐 이 안 될 거 같아서 그럼...() 진짜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구.. 내 여행 일정이 곧인 걸 잊고 있었는데 못 오게 되었다 정도라구.....() 진짜여 걱정하지 마러...
해맑게 웃으며 물에 적셔진 행주를 건네는 새봄을 바라보며 리라는 마주 웃었다. 잘 웃고 활발한 게 저지먼트에도 금세 적응할 것만 같다. 귀여운 후배님은 언제나 환영이지. 특히 1학년들은 서로서로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 크게 걱정도 없다. 아담한 체구는 친구인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니 그런 면에서 괜히 친숙하기도 하고. 물론 성운은 이런 걸로 공통점을 찾는 걸 안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둘 다 조그마한 말랑말랑 귀염둥이잖아. 그건 사실 아닌가? 입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무죄라고 아주 제멋대로 생각의 나래를 펼쳐버린다.
"물건 잘 썼다니 다행이에요. 그 때 이래저래 일이 격하게 돌아가서 많이 걱정했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새봄 후배님이 씩씩하게 잘 따라오고 도와줘서 굉장히 든든했답니다."
실제로 그랬다. 누군들 아니겠느냐만은, 새봄의 능력은 달콤한 향기를 동반하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데 있어서 상당히 유니크하고 눈에 띄었으니까. 이미지네이션 쿠킹. 사물을 음식으로 만드는 능력. 리라는 새삼 같은 리얼리티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발동 방향이 다르다는 걸 체감한다. 크리에이터는 세상을 코드로 해석해 조작하고, 그는 그림을 그려 실체화 시키고, 새봄은 생물 아닌 것을 전부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일정 거주 범위 내에 이런 능력자가 하나만 있어도 그 구역은 기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새삼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초능력이라는 게.
"북극여우 좋아하는구나! 으음~ 어디 보자. 핸드폰... 이..."
어라. 왜 없지. 자료 사진을 찾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들려고 했는데 어쩐지 주머니가 허전하다. 리라는 집사복 바지와 외투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원래 여기 있어야... 하는데.
"아, 이런... 아침에 안 챙기고 놓고 왔나 보다. 끄응... 뭐, 없어도 그릴 수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요!"
그래도 오늘은 연락 올 일이 없으니 아마도 괜찮다. 중요 일정은 다 성하제 뒤로 밀려났으니까. 그런데 뭘 잊어버린 듯한 이 찜찜함은 뭘까. 모르겠다. 리라는 연필을 들어올린다. 선을 그어나가다 보면 잡념도 찜찜함도 눈 녹듯 사그라든다. 이내 종이에는 4마리의 북극여우—그러나 좀 이목구비가 덜 뚜렷하고, 다소 캐릭터화 된, 미묘하게 농X곰 같은...—가 그려진다.
"......좀 많이 못 그렸는데, 어쨌든. 이 애들이 쓰레기를 쓰레기장에 버려주고 올 거예요. 우리는 청소만 열심히 하면 돼요!"
종이 위에 손을 뻗으면 4마리의 북극여우 말랑떡 캐릭터가 실체화 된다. 생각보다 꽤 키가 큰 그것들은 이내 쓰레기통으로 다가가더니 꽉 찬 쓰레기통에서 쓰레기 봉투를 분리해 어깨에 짊어지고 위풍당당하게 교실을 나섰다.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닦고 쓸고 해 봐요. 참! 저지먼트로서, 그리고 고등학생으로서 맞은 첫 성하제는 어땠어요? 사실 저도 저지먼트에 소속되고 나서는 처음 맞는 성하제거든요. 작년에는 축제 느낌만 내기도 했고."
성하제는 모카고의 커다란 축제다. 모카고 학생뿐만 아니라 외부인도...(이하생략)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예상치 못한 방문객도 오는 법이다.
"아 여긴가? 화사하구만~"
쨍한 노란색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하다. 게다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눈썹에 매서운 눈매까지. 복장도 대놓고 나 성깔있는 사람이오~ 자랑하는 듯한... 찢어진 데님 바지에 마찬가지로 데님 자켓, 보통은 쉽게 소화하지 못하고 잘 입지 않는 느낌의 데님 세트다. 그 자켓 안에는 자줏빛의 민소매 터틀넥 셔츠를 입은 여성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여성의 뒤에 따라붙어서 일이 터지지 않게끔 신경을 쓰는 듯한, 동그란 안경을 쓴 동그란 남성. 즉 성환은 비단을 잘 구슬러 비어 있는 테이블에 어떻게든 앉았다.
"킥, 좋을 때다. 나이 먹어서 이런 옷차림을 누가 해 보냐." "아무것도 안 드실 거에요? 일단 주문을 해야... 아 저기!"
"뭐냐."
" "?" "
랑은 직원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고, 랑과 비단, 성환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셋 간의 침묵은, 비단의 웃음소리로 깨졌다.
"크하하! 꼴이 그게 뭐냐? 아주 순딩이 다 되셨어?" "어... 랑아, 아니지, 아니. 랑 학생, 여기서 일하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 시킬 거면 나가. 방해된다."
말하는 도중에도 킥킥대는 소리에 랑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비단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려고 했으나. 비단은 웃음을 딱 멈추곤 입꼬리를 올린 채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이쿠, 이래 보여도 지금은 손님이거든? 어디 보자... 이걸로 할까? 오므라이스 어때? 케첩 뿌리지 말고, 통은 가져와." "아 나는..." "2인분, 무슨 말인지 알지?" "아니 나는..." "언능 가져와라!"
그리 말하며 메뉴판을 탁 하고 덮어버린 탓에, 성환은 반쯤 울상이 되어 랑을 쳐다보았다. 랑은 측은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성환을 마주 보다가 주문표를 작성하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얼만큼 시간이 지났을까, 오므라이스가 테이블에 놓이자 비단은 킥킥대면서 오므라이스 옆에 놓인 케첩 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림 좀 그려주시죠, 메이드 양?" "...쯧."
"지금 혀 찬 거냐? 혀 찬 거지? 캬아~ 아주 살기 좋은 세상이다 그치?" "해 줄 테니까 얼른 먹고 꺼져." "말이 심하네, 일단 그려나 줘봐. 내가 듣기로 손님들이 서비스 평가도 한다더만. 잘 받으려면 잘 하셔야죠?"
랑은 하는 수 없이 인상을 팍팍 쓰며 케첩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성환도,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던 거 같긴 하지만...
"아하하, 전 한 게 없는데... 리라 선배랑 다른 선배들 친구들이 고생 많았죠! 그래도 폐는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히히."
좀... 많이 찔렸다. 나름 노력은 했지만 상황 돌아가는 걸 반은 이해를 못한 탓에 사실 철형이랑 진형이랑(다음에 만나면 이렇게 부를거다!) 만담하고 노닥거린 적이 더 많았으니까. 물론 끝에 가서는 그 배드파더한테 화가 나서 적극적으로 덤비기는 했었는데, 그 아저씨가 나랑 생각하는 게 비슷했더라면 무척 폐가 되었을 테니까. 나라면, 기어이 딸과 배우자가 위험한데 고딩들하고 찌그랙째그락 거릴 생각을 했다면, 그 고딩 중에 제일 약한 애를 인질 잡아서 원하는 걸 얻어냈을 테니까. 근데 그 아저씨가 원하는 게 뭐였는지 난 아직도 모른다. 보고서를 다시 뒤져봐야 하나? 그래도 저렇게 말씀해주시는 건 최소한 발목은 안 잡았다는 거겠지! 히히, 다행이야.
찔려하는 와중에, 선배는 핸드폰을 찾으시려고 뒤적거리셨다. 아이고, 좀 단순한 동물을 고를 걸 그랬나? 그나저나 핸드폰을 아침에 두고 오셨다니. 그리고 그걸 지금 아셨다니. ...이거 역시 시급 계산해서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핸드폰이 없어도 눈치채지 못하실 만큼 정신없으셨던 거 아냐. 게다가 우리 리라 언니 무대도 서시는데! 무심코 생각이 많아진 나머지 프롤레타리아로서 붉은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질 찰나, 금새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다. 리라언니가 엄청나게 미쳐버리도록 귀여운 북극여우 캐릭터를 그려버리신 거다!! 입이 절로 딱 벌어졌다.
"헐... 언니 못하는 게 뭐예요? 춤도 추시고, 용모도 천재적이시고... 아니아니, 엄청 귀엽게 잘 그리셨잖아요!! 저 이거 인첨톡 이모티콘으로 나오면 살 것 같아요!!"
무심코 언니라고 불러버린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점점 더 흥분으로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찰나, 말랑떡 북극여우들이 리라언니의 손길에 그림에서 튀어나왔다. 그걸 본 순간, 자제할 새도 없이 난 코노에서 아무리 불러도 도달하지 못했던 득음의 경지에 도달하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 말았다.
"꺄아아아!!!! 살아있는 마시멜로같애!! 귀여워!!!!"
그 말랑떡 북극여우 친구들이 위풍당당하게도 쓰레기봉투를 짊어지고 교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중, 리라 선배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진정하고 행주를 집어들고 테이블을 하나씩 닦아나가며 대답했다.
"네, 선배~! 실은 저도 성하제를 본격적으로 즐기는 건 올해가 처음이에요! 음, 뭐랄까... 작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인첨공이 그 전까지는 평소에 조용힌 편이었구나, 했어요. 요즘은 외부 손님들도 많이 오시고 복작거리잖아요~ 히히. 리라 선배는요? 카페도 하시고 무대도 준비하시고 하느라 엄청 바쁘실 것 같은데, 혹시 비번일 때 다른 부 부스도 한번 돌아도 보셨어요?"
화영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눈가는 촉촉하고, 촘촘하게 쌓아올린 화장으로도 붉은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 코 끝이 찡하다. 품에 안은 아이가 낯설지만 익숙하다.
"그래…… 오랜만이야, 리라야. 이모라고 불러줘서 고마워."
평생 이모가 되어주고 싶었으니까. 리라를 한 번 품에 가득 안은 화영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며 조심조심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려 했다. "우리 리라, 예쁜 얼굴에 눈물자국 생길라." 하는 것이 가식 일절 없었다. 화영은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다시금 어쩜 이리 예쁠까! 하고 속으로 감탄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 눈에도 고인 눈물을 손수건으로 콕콕 찍듯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라야, 이모는 누군가 네가 거기 있었다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우리 리라 안 잊고 살았지. 데뷔한 것도 다 보고, 시상식 때 공연하던 것도 보고. 이모도 정말 보고 싶었어."
처음 봤을 때는 엄마 손 잡고 오던 조그마한 꼬마였는데. 인첨공에 두고 온 제 아들과 배아파 낳은 작은 아이 생각이 나 유달리 더 아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아이들 생각이 나서가 아니라, 아이이기 때문에 아낀 것 같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혼자 어른들도 가득하고 스크린이라는 평생 남을 기록물에 남고자 하는 의사나 책임감을 가졌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더 아껴주고, 촬영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자의든 타의든 하는 일이 앞으로 쭉 이어진다면,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곁을 지켜준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 아이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화려하게 데뷔까지 하며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기억을 하지 못할까!
"여기 일단 좀 앉으렴. 오래 서서 근무할 텐데 힘들 거 아니니. 잠깐 이모가 시간을 산 거야. 알겠지? 먹고 싶은 것도 주문하고. 여기 케이크 정말 맛있더라."
화영은 다소곳이 손을 모으더니 예전처럼 장난스럽게 눈을 휘어 보였다. 몰래 간식을 챙겨주던 그 순간처럼 작게 키득거린 화영은 당신의 질문에 잠시 제 남편을 쳐다보았다. 호쾌하고 시원한 인상의 중섭은 여전히 태오에게 시선을 꽂고 있었지만, 화영의 눈길이 닿자 시선을 돌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예계에서도 잉꼬부부라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과장이 아닌 실제였던 모양이다.
"그게……."
다만 화영은 말 끝을 흐렸다. 학생이면 찾아주겠다는 얘기에 이미 대화 한 번 나눴지만 또 나눠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욕심이 들어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도 계속 태오를 보고 있었고,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 다짐한 화영은 손을 들어 태오를 살짝 가리켰다.
"……저, 리라야. 저기 저 학생 말이야. 그러니까…… 잘 지내고 그러니? 학교에서라든지… 친구라든지."
그렇게 시선이 계속 태오를 향하는 화영의 눈길이 어딘가 이상하다. 친척이라기엔 너무 깊은 후회가 있었다. 한때 연예계에 무성했던 소문이 있다. 사랑의 도피를 했던 화영에게 아이가 분명 있었다고, 그 두 사람이 도피를 하고 다닐 당시, 조그마한 아이가 곁에 있었음을 목격했다고. 그렇지만 결국 거짓으로 판명난 것이.
"허?"
그리고 대답을 듣던 중 중섭의 포크가 툭 떨어졌을 적, 화영은 머뭇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허리를 껴안는 장면을 보자 눈에서 당황이 차오르더니 분노가 이글거리고, 태오가 자연스럽게 곁에 붙을 적에는 충격에 차오르고 있었다.
"……리라야, 혹시 저 사람 누군지 아니?"
……꼭 고등학생 딸이 엄마도 진짜! 나 공부하느라 바빠서 남자친구 없다니까! 스카 다녀올게! 하고 성질이란 성질은 다 내더니, 막상 스카는 개뿔 화장할 거 다 하고 어디서 뺀질뺀질 놀기만 하는 못 미더운 남자친구랑 끌어안고 다니는 걸 목격한 어머니의 눈처럼.
>>0 너무 순조로워서 불안할 정도였던, 그렇지만 돌이켜보니 나름 험난도 했던 연구소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고, 드디어 내가 찾던 분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사람 머리 크기 이내의 무생물에 한정하여 상태를 과거로 돌릴 수 있는 분이고, 능력으로 인한 피해도 복구하신 적이 있는 분이라고 했다. 나만 잘하면, 단풍이에게 준 상처를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에, 잠을 이루는 것도 퍽 어려웠지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을 못 자서 부탁드릴 때 잘못하면 안 되니까.
약속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학교가 끝나자마자 기숙사에서 유품을 챙겨, 약속 장소이자 내 직장인 카페 블랑 에트 느와르(Blanc et Noir)로 달려갔다. 자리를 잡고, 냉수를 마시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자니, 한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엄청난 거구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머리는 짧았고, 인상은 퍽 날카로우면서도 묘하게 앳되어 보였다. 일어서고도 머리를 젖혀야 할 만큼 크지만, 왠지 나랑 나이가 비슷할 것 같은 느낌. 어쨌거나 그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확신했다. 이분이 그분이구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삼 연구소 소속, 목화 고등학교 1학년 신새봄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화행중 3학년 한성규라고 합니다. 단 연구소 소속이고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엄청난 동굴 저음이다. 그 생각이 한성규 씨가 마주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순간 들었다. 아니, 그런데 말을 놓으라니, 내가 아쉬운 처진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긴 하지만서도. 아니다, 이런 걸로 실랑이 할 때가 아니지.
"제가 부탁드리는 입장인데…. 그럼 놓...을게요, 아니 놓을게?" "네네, 그래 주시는 게 제가 편해서요. 그나저나 부탁하실 게 있으시다고 들었는데…."난 성규에게 쿠키 반죽으로 변한 유품을 보여주며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틀 전 새벽에서 아침 사이, 내 능력이 폭주해서 주변의 기물을 쿠키 반죽으로 만들었고, 내가 쿠키 반죽으로 만든 물건 중 작은 것 하나를 원상으로 복구해 주길 부탁하고 싶다고.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 초면에 실례지만 꼭 좀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성규는 유품을 유심히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목걸이죠? 안에 종이… 사진이 든. 빨리 가져오셔서 내용물도 복원이 될 것 같네요. 아마… 일주일 정도면 될 거예요."
"...! 정말? 고마워! 진짜 고마워!"
됐다. 유품을 돌릴 수 있다는 게 확인되자마자, 안도한 나머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런 모습까지 보이는 건 역시 아니라서 꾹 참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는데, 성가 헛기침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도 누나 능력에 대해서 전해 들어서, 누나한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니까요." "그랬구나, 뭐든 말해줘. 내가 레벨 2긴 하지만, 능력이 안 되면 손으로라도 만들어볼게." "네, 그럼… 디저트를 하나,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인첨공에 들어오기 전에 먹었던 디저트인데요."
하나? 평생 전속 파티시에라 쓰고 노예라 읽는 모양새로 부려 먹어도 기꺼이 할 참이었는데. 그걸로 되겠냐는 물음이 입안에 감돌 때,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남성은 눈을 휘었을 뿐이다. 귀애하는 아이일 뿐이다. 좋은 상품 가치를 가진 녀석이고, 소중한 인재이기도 하다. 사적인 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연인으로 발전하고 싶은 욕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성은, 그리고 태오는 각기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런 추잡한 것을 가질 리가 없지. 태오는 자리를 떠나며 어깨를 으쓱였고, 곧 닥칠 재앙을 모르고 있었다.
"나?"
파르페와 푸딩을 기다릴 적, 남성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에 깍지를 끼더니 느긋하게 반문했다. 누구냐고 묻는다면 뭐라 답해야 할까. 여기에서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자발적 차일드 에러 후견인."
그렇게 얘기하고는, 혜우의 소개에 눈을 정확히 마주했다. 새빨간 눈동자 사이에 박힌 뱀을 닮은 동공이 태오를 꼭 빼닮아 있었다.
"아! 그래, 네가 혜우구나. 태오에게 얘기 많이 들었단다. 어쩜, 이런 동생이 있으면 당연히 아낄 법도 하지."
남성은 제 몫의 말차 푸딩을 뜨더니, 한 스푼 입에 넣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신세를 진 건 이쪽이지, 싶은 눈길이었다.
"뭐, 그래, 당사자가 얘기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침묵으로 일관했겠지. 기껏해야 몰티저스 몇 개 쥐여주면서 상황을 빠져나가려 들었을 테고."
대체 왜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2학구 연구소에서…… 정서적인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아이를 내가 거뒀단다. 그리고 7년 동안…… 그래, 안온하고, 평온하게 지냈지. 잠재된 게 있길래 펼칠 수 있게 도와주고, 받았던 상처를 좀 치료해줬더니 7년이란 세월이 지나버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세월 참 빠르지!"
뱀의 아가리 속 자리하는 혀는 두 갈래다. 한 쪽은 진실을, 다른 쪽은 거짓을 시사하기에, 뱀은 거짓말만 할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도 다 안 나아서 걱정이 되는데, 고등학교는 가야겠다고 난리를 쳐서 말이다. 그래서 보내준 이후로는- 글쎄, 난 모른단다. 우리 태오가 17살 된 이후로는 따로 살았거든. 걔도 사생활이 있잖니. 나는 적당히 송금해주고, 가끔 얼굴 보는 정도란다."
혜우야, 까마귀가 많이 아파. 몸도, 마음도. 그런데 혜우야.
"충분한 답이 되었니?"
희야는 태오가 가끔 무서워. 그 와중에 태오는 굽이 또 끼더니, 기어이 넘어지는 참사를 겪고 말았다…….
>>0 "...또 올검까?" "[응.]" "에반데..." [아직도 메이드복 입고 있는 너가 더 에바거든.] "이래뵈두 틈틈히 바꿔입고 있슴다. 뿌우~" "그것보다 요즘 하나가 풀이 좀 죽어있던데... 무슨 일 있었니?" [아... 그거...] "...자업자득임다." "?" [어... 점례 도촬하다가 걸렸거든...] "...... 하아... 인생이란 뭘까..."
제2의 삶을 살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10년차를 향해가고 있는 극히 평범한 연구원인 여성에겐 이런 잡다한 해프닝들은 늘 있으면서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일들이었다. 아무리 연구소가 미쳐돌아간다고 해서 본인까지 그 대열에 합류할 생각은 없다지만... 미치광이들의 틈바구니에선 정상인도 얼마 못간다는 이야기가 실로 들어맞는 말이었으려나.
[사실 뭐 컴플레인이라던가 소문이라던가 날 것도 없었고, 점례 선에서 해결되었지만... 선생님도 알거거든. 걔는 점례 말이먼 껌뻑 죽는거,] "오히려 출입 금지 당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안간거라는게 더 머리가 아파오는데..." "머, 그래두 딱히 잘못한건 아니고... 늘 있던 일이니까 내일은 차 한 잔 마시면서 얘기나 잠깐 하자고 하려 했거든..." "정말인가요!!" ""[......]"" "...... 아하핫♥︎" [깜박이 좀 켜줬으면 좋겠거든...] "빛 속에 숨는 애가 깜박이를 켜봤자 의미가 있니?" "그릉가... 머, 아무튼 그런검다. 따지고 보믄 좀 심했던거 같으니까여." "~♥︎" "뎃..." [저기... 곧 훈련 들어갈 시간이거든...] "즐기시게 냅둬~" "않이!!! 세리쌤이 구해주셔야져!!! 당신 딸랑구잖슴까!!!" "나보다 점례 네 말을 더 잘 따르는데 어쩌겠니~" [...하. 하. 하. 개판이거든...] "도움!!! 썸바디 헬 미!!!" [...헲 아니었어...?] "차라리 지옥에 가는게 좋다는 거구나... 녀석..."
작은 사람모양 구속구에 갇힌 그녀, 토끼의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과 몸부림은 격리실의 케이지가 열리며 훈련의 시작을 알리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폐라니! 그 상황에 같이 있어준 것만으로도 할일 잘 한 거예요. 위험하다고 느끼면 빠져나가도 괜찮았는데 계속 있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사람 하나하나, 동료 서로서로가 의지가 되고요."
진심이다. 사전에 빠져나갈 수 있는 팔찌를 전원에게 배부하고 나갔던 임무였다. 그만큼 위험했고. 사실 중간에 빠져나갔다 한들 그 누구도, 그게 누구라도 감히 나무라지 않았을 거다. 애초에 부장님은 위급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계속해서 도망치라고 언급하시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도망친다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켜준 건 고마운 일이지.
"멋졌어요, 새봄 후배님도."
무엇보다 심각한 상황에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 건 의외로 분위기 환기에 큰 도움이 된다. 당시에는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 있어서 관심을 못 뒀지만, 그때 언뜻 들렸던 토론 주제는 꽤 흥미롭기도 했고. 이쪽도 일단은 그림으로 음식을 만들 수도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림을 실체화 시킨 음식은 소화기관으로 들어가면 도로 종이가 되는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으니.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다. 북극여우라기에는 너무 동그랗기만 해서 맘에 안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귀엽다고 해 줘서 고마워요! 흐음~ 이모티콘이라."
그나저나 그거 나쁘지 않은걸. 모처럼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으니 부수입 벌어들일 용도로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세상엔 쟁쟁한 작가들이 많으니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응? 그러고보니 디지털로 그린 그림 또한 실체화가 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쓰레기를 처리하러 가는 말랑떡(?)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옆에서 격렬한 반응이 들려왔다. 리라는 살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는 새봄을 바라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
"그렇게 귀여웠어요? 뿌듯하네! 여기 다 치우면 집에 갈 때 작게 하나 그려줄게요. 약소하지만 좋은 반응 보여준 보답이에요."
정작 여기서 제일 귀여운 건 눈 앞의 후배님 같지만. 가볍게 웃으며 테이블을 마저 닦아낸 리라는 이내 빗자루를 들었다. 부스에서 음식을 판매하니 위생을 위해 중간중간 쓸어주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역시 사람 많은 데 장사 없구나. 바닥에도 이런저런 잡다한 쓰레기들이 잔뜩이다.
"맞아요, 저도 확실히 작년에는 여기가 이렇게 복작거리는 곳인 줄 체감하지 못했거든요."
그건 저지먼트가 아니어서이기도 했고, 마음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교외에서 보낸 시간이 상당히 적기 때문이기도 했다. 휴일에는 보통 기숙사와 댄스부실을 오갔고. 1학년 때 만난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세상물정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훌쩍 커버렸으니, 시간이 참 빠른 거 같다니까. 벌써 가을이다.
"전 아직 다른 동아리 부스는 못 돌아봤어요. 새봄 후배님 말대로 공연 준비랑 카페 일이 바쁘니까~ 그래도 비번 때는 시간이 좀 빌 것 같기도 해서 그때 쭉 돌려고요. 데이트도 할 수 있으면 하고... 새봄 후배님은 좀 구경했어요?"
그런데 잠깐. 선배... 라고.
"그리고 있지. 음... 언니, 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그게 더 친근하게 들려서."
새봄 후배님만 괜찮으면 그렇게 불러줄래요? 그렇게 덧붙인 리라는 다시 슥슥 비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 아무래도 새봄이 지나가듯 외쳤던 언니 소리를 들어버린 모양이다. 마음에 든 것 같다!(?)
" 저 선배 근데 어느대학에 가려고 하세요? 생각하시는 진로가 특정학교 특정과를 가야만 가능한 진로인가요?? "
의대처럼 커트라인이 끔찍하게 높은 대학이면 노답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약간은 여유를 찾을수도 있지않을까 사정을 모르면서도 그런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서연이었다
하지만 구르던 머리는 뾰족한 수를 내기도전에 철현의 질문에 정지되고 말았다 목이 타고 속도 탄다 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본인은 몇년간 올인하고도 레벨이 안 올랐는데 주변사람은 쑥쑥 올라버리면 그런데 그게 노력의 차이때문도 아니라면(양심이 수박이라도 철현보다 서연이 더 노력했다고는 못할거다) 얼마나 참담하고 억울할지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하지만 그랬기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똑바로 대답하지않으면 안된다는 감이 왔다 여기서 주저하는게 오히려 철현 선배에게 모욕이라고 이젠 어떻게 처신해도 선배에게 웃어넘기기 힘든 타격을 안겨버리고 만거 같다만 당장은 다른수가 없다 그래서 서연은 철현의 눈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하제로 인해 안 그래도 시끌벅적한 인첨공이 한층 더 왁자지껄하다. 태오는 그 소란 속에서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학교를 빠져나와 인근 골목으로 들어섰다. 라이터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태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태오야."
아담한 체구에, 앙칼진 듯하지만 사랑스러운 인상의 중년 여성이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태오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태오의 어머니인 화영이다. 태오는 손에 딸려온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으며 온전히 뒤로 돌았다.
"저녁에 얘기할 텐데,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그랬단다. 그때 얘기하지 못한 것도 있고."
태오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제 어머니와 똑같은 자세였고, 두 사람의 인상이 비슷했던 탓에 누군가 지나치다 보면 모자관계구나 쉬이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
화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장장 13년 만이다. 남편과 사랑의 도피를 했으나 결국 궁지에 몰렸을 때, 아버님께서는 태오를 인첨공에 보내는 조건으로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약속했다. 처음에는 남편과 화영이 기를 써서라도 반대했다. 그렇지만 예정된 거래의 파기 및 주가의 폭락, 기업의 이미지 훼손이 심하게 벌어졌던 책임을 묻고 더는 오갈 수 없을 만큼 몰려 어떤 것도 할 수 없던 상황에서, 부부는 눈물을 삼키며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매년 찾아오기로 했으나 회장, 그러니까 시아버님은 인첨공에서 태오의 존재가 드러나면 안 된다며 그마저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15년 중 2년만 제 아들을 볼 수 있었고, 13년을 끔찍한 죄책감과 걱정에 매달려 살았다.
"……."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네 할아버지 때문에 만나지 못했단다? 보고 싶었단다? 다시 만나고 싶었단다? 미안하다? 어떤 말을 해도 홀로 남겨진 아이에게 닿기나 할까? 화영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태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더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태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화영을 보며 선을 그었다.
"돌아오지 못하실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태오야." "인첨공에서는 초능력을 개발 받는다고들 하지요. 저도 커리큘럼 때문에 이렇게 머리랑 눈이 변한 거고요." "……." "저는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 대다수는 능력이 없다고들 하지만, 저는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 운 좋게도…… 상위에 드는 존재가 됐으니까요."
화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미 여섯 살 때, 저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할아버지 때문에 지킬 수 없겠구나 깨달았습니다. 제가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태영이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로 인정받는다는 것도요." "태, 태오야."
태오는 화영을 마주하며 쓰게 웃었다. "역하지요. 타인의 생각이나 읽으면서, 어머니께 진작 말씀드리지 못했다는 게." 이미 잔뜩 울상이 된 화영의 눈을 잠시 마주하던 태오는 느릿하게 걸어와 화영을 품에 안았다. 아담한 체구가 품에 온전히 들어온다. 한때 어머니의 품에 안길 적에는 마주 안고 싶어도 팔이 닿지 않아 한참을 바둥거렸는데, 지금의 자신은 장성하여 팔이 닿고 어머니를 이리도 쉽게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세월은 너무나도 빠르고 덧없다. 한철 지나가는 삶의 흐름이 야속하다.
"그렇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인첨공에 오게 된 것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엄마가 약속도 못 지키고……." "……괜찮습니다."
화영은 화장이 번지든 말든 소리 내어 울었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에서 화영은 하염없이 울면서도, 불안하던 예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품을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야 만났는데, 보내주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13년 동안의 세월 속에서 홀로 서 떠날 준비를 마쳐버렸구나. 아이의 결심이다. 자신의 죄다. 그러니 고집 피우지 말고 보내주자고.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제 아이를 이대로 보내버리는 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태오는 등을 한 번 더 다독였다.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며 화영은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손수건으로 눈물자국을 쿡쿡 닦던 화영은 돌아가 남편에게도 말해 고이 보내주자고 생각했다. 동시에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머뭇거리다 입을 벌렸다.
"……학교생활은, 어떠니?" "나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원수죠." "다행이구나... 그리고……." "네." "아까, 그 사람은……."
태오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니, 감히 나 같은 것이 이름 석 자 입에 올리는 것이 천인공노할 행위일 나의 어머니. 저는 떠납니다. 먼 곳으로 떠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이라는 둥지에서 떠나고, 세상이라는 바다를 떠납니다. 나는 혼과 백으로 이루어진 보따리를 들고 작은 쪽배 타며 명의 길인 해로海路와 운의 길인 너울을 타고 종착지인 섬에 도달할 겁니다.
"……." "네게 봄이 찾아왔구나. 그렇지?"
그곳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의 수많은 별과 같던 벗과 꿈, 동생은 없습니다. 오로지 그와 나만이 있습니다. 종착지라기엔 휑하지만 나의 마음은 편할 테니, 이것을 나는 낙원이라 칭하였습니다.
"예. 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아, 어머니! 봄은 덧없습니다. 앙상한 겨울 가지가 봄날의 꽃을 만개해 봤자 하루 만에 질 것을 나는 압디다.
지금까지 내가 태오를 묘사하고 심리나 생각, 사상을 적을 때마다 강조하던 것은 '인간의 삶은 무상하니 봄날과도 같다.' 였어. 인간이 다 그렇지 뭐, 인간의 삶은 무상하죠, 한철 지나가는 계절일 뿐이지요, 봄은 덧없죠, 한 번 피고 지는 삶이지요 등등.
남에게는 설레고 생명이 움트는 계절인 봄이, 정작 태오에게는 정 반대로 삶의 끝이나 다름이 없는 거야. 생명이 움트지만, 결국 꽃이 무엇보다 화려하게 만개하다 지고 마니까. 지금 현재 벚꽃이 피어나서 일주일 채 못 가고 지는 것처럼.
《운명》
이것도 꽤 강조하던 건데, 태오는 순응해야죠. 같은 말을 자주 했었어. 실제로도 몇 묘사를 보면 저지먼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 사실 위크니스도 인첨공에서 필요하니 주어지는 것인데, 우습지. 둘이면 하나가 가여웁고 하나면 너만 죽으면 남들이 고통받지 않을 거 아니냔 핍박 받다 사라지면 하루 슬퍼하다 잊을 것이 인간 아니느냐는 꼬인 시선을 가지기도 했고.
태오는 운명을 쪽배와 바다라고 생각해. 나의 넋은 쪽배이며, 운명 중에서도 '흐르는 성질', 즉 해로이자 이끄는 길인 운運, 그 흐름을 따라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성질이자 거대한 너울인 명命. 거대한 바다에서 쪽배 하나에 의지한 넋은 노를 저어 반항해봤자, 휩쓸려 다시 운과 명으로 움직일 뿐인 거야.
어차피 내가 도전하지 않아도, 나의 넋은 결국 종착지에 다다르지.
그 종착지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대화》
공매도 아닌 건 맞아. 한결이가 슬슬 개입할 타이밍이지🤤 그렇지만 내가 방금 서술한 두 개를 보면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그 해석의 키포인트는 지문에 있어.
저는 떠납니다. 먼 곳으로 떠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이라는 둥지에서 떠나고, 세상이라는 바다를 떠납니다. 그곳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의 수많은 별과 같던 벗과 꿈, 동생은 없습니다. 오로지 그와 나만이 있습니다. 종착지라기엔 휑하지만 나의 마음은 편할 테니, 이것을 나는 낙원이라 칭하였습니다.
어머니. 아, 어머니! 봄은 덧없습니다. 앙상한 겨울 가지가 봄날의 꽃을 만개해 봤자 하루 만에 질 것을 나는 압디다.
하루종일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대체 이게 뭘까. 내가 뭘 잊어버린 거지? 그 기분 나쁜 감각의 정체는 청소 시간 핸드폰을 집에 놓고 온 걸 알게 된 후에야 대략적으로나마 감 잡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온전한 형태의 정답이 아닌 게 몸으로 느껴졌지만 별 수 있나.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답은 집으로 돌아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핸드폰이 있으니까. 새삼 찡찡이를 너무 오래 내버려둔 것 같아 죄책감이 치솟았다. 집을 비울 때에는 손—정말 다섯 손가락으로 걸어다니는 새하얀 손. 과거 노트의 내용을 수기로 옮겨적을 때 그렸는데 현재까지 요긴하게 쓰고 있다—이 찡찡이의 밥을 챙겨주고 놀아주기도 하지만 손은 손이고 집사는 나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나. 찡찡이가 기다리겠다. 미안해서 어쩌지. 어서 집에 돌아가야...
타박. 타박. 아무도 없는 부실에 나 외의 사람이 내는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섬뜩함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길쭉한 형태의 허옇고 검은 무언가가 서 있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은 나를 바라보는 건.
"......이리라 학생."
담당 연구원, 윤정인이었다.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게 목소리의 떨림에서부터 느껴진다. 그제서야 리라는 자신이 잊어버린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늦어도 한참을 늦었다는 사실 또한 떠올리고 말았다.
"연구원님." "부재중 전화 20통에 문자 30개를 보냈는데 한 번 들여다 보지도 않더군요?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일단은 내버려 뒀는데... 허." "죄송해요. 아침에 핸드폰을 놓고 와서... 아니 그게..." "그게?" "......깜빡했어요."
정적. 백 마디 말보다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내리누른다.
"죄송합니다." "나는 이리라 학생이 뭘 잊어버리는 꼴을 본 적이 없는데요. 같은 반 친구들 생일 같은 쓸데없는 것도 잘만 기억하고 사는 사람 아닙니까?"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 새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저도 제가 왜 잊어버렸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정말로—" "그래서요. 잊은 게 자랑입니까? 어이가 없네요."
할 말이 없다. 리라의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처진다. 시선이 정인의 단정한 검은 단화 코끝에 닿고도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정인은 입을 열었다.
"오후에 커리큘럼실 사용시간 연장 신청서 내고 왔으니 따라와요. 이리라 학생이 먼저 약속을 깼으니 나도 굳이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겠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저 그럼 잠깐만 집에 다녀올게요. 고양이가," "따라오라고요."
푹 숙인 고개는 올라올 줄 모른다. 대꾸 없이 푹 처박은 고개를 바라보던 정인은 움직이지 않는 담당 학생을 이끌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잡히는 건 없었다. 리라가 몸을 뒤로 뺐기 때문이다.
"따라오라는 말만 지금 세 번째입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무슨 소립니까, 그게. 누가 들으면 제가 이리라 학생을 괴롭히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요." "당장 올해 초만 해도 주에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커리큘럼을 제외하고는 뭘 하던 말던, 커리큘럼실에서 농땡이를 피우건 말건 아무 신경도 안 쓰셨잖아요. 말도 안 걸고 없는 사람 취급 했잖아요. 아니, 사람 취급도 안 했잖아요! 근데 왜 이제 와서 이러시냐고요. 네?" "그땐 레벨 0이었으니까요." "네?"
리라가 뒤로 물러난 만큼 한발짝 더 다가간 정인은 리라의 손목을 움켜쥔다.
"첫 측정 결과 레벨 0. 그 뒤로 수 개월 간 뭘 해도 레벨 0. 보통 인첨공에서 쓸만한 능력자는 첫 측정부터 싹이 보이고 늦어도 반년 안에는 이게 키울 만한 싹인지 아닌지 결판이 납니다. 그런데 이리라 학생은 그 기간 동안 아무 성장이 없었죠. 그게 뭘 뜻하는 걸까요?" "......" "분명하게 얘기해두죠. 통계적으로 봤을 때 당신은 성장 가능성이 없는 열등생이었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특이 케이스. 반년만에 갑자기 레벨이 급상승해 대능력자 명단에 올라간 리얼리티 매니퓰레이션 능력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몰랐겠지만 인첨공 초창기 때 당신과 같은 대분류를 가진 사람들은 전부 다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지금이 편해진 거죠." "......"
명백한 비웃음이 면전에 침을 뱉듯 날아들었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지는 것 같아, 리라는 잔뜩 힘을 주었던 손을 스르르 푼다.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되바라진 싹이라고 신경을 끄면 끈다고 불만, 좀 가능성이 보여서 밀어주려고 하면 피곤하고 힘들다고 불만.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애초에 이리라 학생이 나한테 화를 낼 자격이나 됩니까? 그 간단한 약속 하나 못 지킨 게 누군데?" "잘못했어요." "알면 따라와요. 네번째 말했습니다. 앞으론 잊어버릴 것 같으면 메모를 하세요. 그리고."
물론 어지간히 큰 일이 아닌 이상 지나간 일에 대해 재차 추궁하는 것도 너무한 처사겠지만... 그렇다고 사소한 일인 것도 아니었던지라 내심 걱정스러웠던 그녀였다. 물론 상대방의 입으로 직접 그렇다 들었으니 그렇다 이해해야겠지만...
"참 신기해여... 반응속도라던가 어지간히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못할거 같은데 말임다."
무엇보다 총 하나로만 할때보다 효율이 좋지 않을테다. 그렇기에 기행이라고 불리는 걸수도 있지만...
"오... 슨배임도 그쪽이셨슴까... 머, 인첨공이니 이상할 것두 없져."
실탄이 들어간 총밖에 쏴본적이 없단 말에 조금은 놀라면서도 이내 수긍하는 그녀였을까? 사실 슈팅게임이란 것이 사실성을 떠나서 어느정도는 총의 본질을 따르고 있으니, 실제 사격이나 게임의 사격이나 매커니즘의 차이만 존재할뿐 목적 자체는 크게 다른건 없을 것이다. ...물론 동월의 평소 행적이나 능력의 사용면에서 봐도 총은 딱히 큰 의미가 없을테지만...
"으에... 그건 알고 있지만 말임다... 어째선진 몰라두 그부분에만 집착하게 된단 말임다..."
물론 동료를 구하면 추가체력이 생기는건 좋은 부분이지만 애초에 맞는 일이 극히 드문 그녀에겐 라이프포인트는 큰 의미가 없었을텐데도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곤 했다. 마치 나약한 사내를 꾸짖는 어떤 검은 말처럼 당당하게 승자의 기쁨을 누리는 동월을 보며 울망거리는 표정을 짓던(물론 진짜로 울진 않겠지만) 그녀는 뒤이어 들려온 말에 납득이 되었는지 금새 놀란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 당신이 에어버스터군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목화고 연구소 소속 리얼리티 매니풀레이션 개발팀 윤정인입니다. 연구원: 학생이 부주의해서 훈계하고 있었던 건데, 하다보니 좀 날카로워졌네요. 방해가 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연구원: 그럼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 감동받아서 반응썼는데 안쓰는게 나았을 거 같은 이 싸가지 어휴(딱밤치기) 부쟝감동이야... 리라가 다음날 곰돌이 초콜릿 줄거래...
>>45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이프붕붕ㅋㅋㅋㅋㅋㅋ (정인: (움찔)) 후 혜우우 든든하다 이렇게 서로서로 이벤트 레스 소재를 주워가는군 머리아픈건 좀 괜찮아? 잘 수 있겠어?
>>475 그건 이제 경우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될 것 같네요. 보통은 그냥 단순 사고처리 될 확률이 크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 사고의 정도가 커지면 안티스킬이나 다른 연구원들이 조사를 나오고 거기서 문제가 발생되면 연구원이 책임을 물 수도 있고 그래요. 커리큘럼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연구원이 만든 프로그램이니까요.
식자재와 기타 소모품들을 놓아둔 창고. 무언가 바닥난 것이 있었으니, 가져와 줄 수 있는 부탁에 창고를 찾은 당신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보인다. 그리고 바닥에 놓여있는 박스들 위에 금이 몸을 뉘고 팔을 배 위로 모은 채 누워있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당신은 그녀를 지켜본다. 미동도 하지 않고, 고른 숨소리만 들려온다. 지금 여기서 자고 있는 것일까? 흘러내린 올리브색 머리칼이 얼굴을 덮고 있고, 긴 속눈썹은 가지런히 닫혀있다. 당신이 그런 금을 바라볼 적에 시선을 혹은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꼈던 것인지. 금은 눈을 뜨며 당신을 보고서 웃는다. 검지를 들어 올려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니,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며 제스처를 해오는 것인데. 땡땡이치는 것을 보고 할지, 혹은 못 볼 척 지나갈지. 어떻게 할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1. 매니저에게 이른다. 이런! 금은 들이닥친 매니저를 피해 도망치려 했으나 입구는 하나. 매니저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밖으로 끌려갔다!
2. 비밀로 해준다. 필요한 물건을 챙겨 못 본 척 나가려고 하면, 금은 당신을 향해 손짓해 보이는 것이었으니. 당신의 손에 사탕 몇 개를 쥐여줬다. .dice 1 6. = 2
색은 다르나 태오와 닯은 저 눈도 데 마레 시절이 아니면 모르는 간식에 관한 것도 다, 알면서, 적당히, 걸러 말하는, 저 혓바닥도.
나는 조용히 어금니 사이로 혀끝을 밀어넣었다. 잇새로 부드러운 살이 푸딩처럼 뭉개졌다. 달디단 디저트에 쇠맛이 섞였다.
한 모금, 꿀꺽 삼키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객기는 어리기에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파르페를 푹 더 입가심을 하고, 말했다.
"말해주실게 그것 뿐이라면, 충분하다는 대답 외에 제가 달리 할 수 있는 대답은 없겠지요."
이 빌어먹을 기분은 여기서 풀 것이 아니기에. 나는 태연히 파르페와 푸딩을 떠먹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아까는 서로 보는 눈빛이 참 애틋하던데, 연인은 아니라니 좀 놀랐네요. 두 사람을 본 모두가 똑같이 생각했을 걸요?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보였으니까요."
재잘재잘, 그나잇대 애들 가십거리 떠들듯이.
"전 태오가 '어울리는 사람'을 만난다면 누굴 만나든 상관 없어요- 그러니 마음이 있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잘 붙잡아두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태오,"
그러나 건방지게도 꼬리를 살랑거리며.
"달리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보였거든요. 음, 백한결 선생님이었나. 아까도 치한 당할 뻔 한 걸 도와주시던데, 그 때 바라보는 시선이 어찌나 진득하던지. 태오가 조금이라도 다쳤으면 업어들고 갈 기세였어요. 그러고보니... 어라?"
고양이는 웃었다.
"그, 닮으신 거 같기도 하고? 혹시 아세요? 백한결 선생님?"
아무 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 뻔뻔하게 질문했다. 그리고 그런 건 그다지 상관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맞다, 혹시 연락처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아시겠지만' 태오가 워낙 신출귀몰해서요. 저번에도 한참을 연락이 안 되서 엄청 걱정했는데, 아직 그 설명도 안 해줬거든요. 그러니 수소문 할 태오 주변인이 있었으면 했는데, 마침 이렇게 만나뵈었네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선생님?"
싱긋 웃는 얼굴에 흠은 없었다.
그렇게 다사다난 했던 하루가 끝나고 마무리를 할 시간이 왔다. 오늘은 평소보다 배로 힘든 느낌이었지만, 마감만 끝나면 집에 가서 성운이와 뒹굴 수 있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쓰레기 버리고 올게요-"
분리수거한 쓰레기를 한 번 비우고 온다고 자리를 비운 뒤 여차저차 다녀오는 길이었다.
"응?"
분명 청소 중일게 뻔한 부실 앞에 누가 있었다. 딱 봐도 연구원으로 보이는 모습에 누굴 찾아왔나 싶어 그냥 내 일이나 하려고 했는데 들려오는 말이, 그 목소리가 내 걸음을 그 자리에 멈춰세웠다.
"저기요. 저희 아직 활동 안 끝났는데요."
나는 리라와 그 연구원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연구원이 잡은 리라의 팔을 거칠지 않게 떼어내 내가 잡으려 하며 리라 앞을 지키듯 서서 연구원을 향해 말했다.
"저희 선배님의 담당 연구원으로 보이시는데,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인첨공 말단 연구원의 본분은 학생의 재능 개화와 발달시키는 것이지, 자신의 성미대로 끌고다니는 것이 아닐 텐데요? 뭐든 계획대로 진행하고 달성하고 싶으시다면, 학생을 담당하는 자리에서 내려가시는게 좋겠네요. 어디 랩실에 처박혀 컴퓨터 기호와 씨름하시는 것이 훨씬 더 본인의 성향과 맞아보이시는 걸요?"
그리고 잠시 빤히 노려보다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보였다.
"죄송합니다만, 본 점의 당일 영업 시간은 종료되었습니다. 점내의 관리를 위해 기타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오니, 시급히 꺼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세만큼 정중한 어투로 단호한 축객령을 내린 후 연구원을 밀어내고 문을 닫으려 했다. 부실의 문, 그 선을 당신이 넘을 자격 없다 고하듯이.
순조로이 흘러간다면 그제서야 리라를 돌아보고 파티션으로 나눠놓은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겠지.
"아가씨." 단호하게 손을 뻗어 찻잔을 이동시킵니다. 뭔가 주위에 일이 많은 것 같지만 인지할 뿐. 지금 하는 것을 해야 하겠지요..
그렇게 접대를 마무리했을 겁니다.
연구원을 바라봅니다. 까먹었다거나 하는 것은..
"강력해보이는 커리큘럼이나... 개화에 상응하는 부작용 중에서는 건망이나 의식의 명료함을 조절하지 못하다가 끝나고 나서 블랙아웃이나.. 그러한 의식과 신체의 불합으로 인한 몸살같은것은 흔한 편이고..." "그게 원인이 아니라고 확신하실 수 있을까요..." 오 그렇지. 기억의 파편이나 건망계열. 블랙아웃. 불합치로 인한 몸살. 전부 경험해 봤을 겁니다.. 무덤덤하지만 경험을 말하는 것 같은 말이로군요 그러한 기억적인 것과 있어서는 안될 균열로 인해 갈기갈기 찢겨져나간 이들도 마찬가지로요. 그런 기억들은 마치 섬과 같지만, 존재는 하고 있습니다.
"...." "제가 낄 건 아니었...네요.." 반쯤 도주에 가까운 듯이 눈을 피하며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영락의 내부는 꽤나 정신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특별한 설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원체 내부 구조가 복잡하다보니 복도 하나만 잘못 건너도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런 개미굴 같은 연구소다보니 어쩌다 헤멘 끝에 별별 시설이 툭 튀어나오곤 했다.
예를 들면, 온통 새하얀 독방이라던가.
"...후-"
나는 부드러운 쿠션이 깔린 하얀 바닥에 누워 똑같이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안은 얼마나 큰 소리를 내거나 난리를 쳐도 단 한 가닥의 소리도,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드러누운 내 주변은 산산히 부서진 조각들로 즐비했다. 그리고 더는 제 용도로 쓰기 힘들 것 같은 찌그러진 양철 배트도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저 배트로 이 방 안에 넣어준 물건들을 사정없이 깨부순 결과였다.
팔다리며 얼굴이며 크고 작은 생채기 투성이로 벌렁 누워있으니 무겁고 두꺼운 문이 열리며 유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 했냐?" "...네." "오냐."
유준은 내 대답을 듣고 들어와 옆에 앉았다. 발로 슥슥 잔해를 밀고 앉을 자리를 만든 그는 가운을 깔개 삼아 앉아서 나를 보았다.
"성이 좀 풀리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해요." "이렇게 엉망을 만들고서 부족하다고?" "부족, 보다는..."
잠시 할 말을 찾으려 눈을 굴렸다.
"이러는게, 내가 맞나, 하는 느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네가 아니면 뭔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열일곱이나 되서 자아 형성 하는 거냐? 너무 늦지 않냐, 그거." "이제라도 제대로 만들어지는 거면 다행 아닌가요?" "음, 그렇긴 하지."
낄낄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선생님." "어야." "나는 고장난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갈수록 감정 조절 못 하고, 툭하면 주변 엎고, 그걸로도 성에 안 차잖아요." "그것들만 두고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그냥 성격이라기엔 너무 과하니까." "그렇죠. 내가 생각해도 난 정상이 아닌게 확실해요." "정상이고 싶냐?"
다시 할 말을 찾으려 눈을 깜빡였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왜?" "그냥, 아마도... 정상이 되고 싶어하다가, 더 미치지 않을까 해서요." "더 미친다라." "집착이란 무서운 거 잖아요. 나는... 정도를 지키지 못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러냐." "네."
유준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한 번씩 그의 시선을 돌아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내 상처를 깨끗이 낫게 했다. 그리고 미적미적 일어나는데, 유준의 말이 들렸다.
"나는, 정상이고 비정상이고, 그런 거 없다고 생각해. 상대적인 가치관, 생각, 기준, 그런게 존재할 뿐이다. 절대적인 관념이나 개념, 사상은 있을 수 없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냐?" "...아마도, 요?" "그럼 네 기준을 먼저 찾아. 지향점과 지양점을 정해두고 그 사이를 보면, 보이겠지. 네가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 그런 것들이." "흐음."
일어나 앉은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선생님." "어어." "나 케이크 먹고 싶은대요." "소장님한테 뜯으러 가자. 아까 뭐 잔뜩 들고 오시더라." "네에-"
그리고 나와 유준은 영락의 소장실로 가, 소장님이 막 사오신 조각 케이크를 얻어먹었다. 맛있는 홍차도 함께였다.
기억하지 못할 리 없잖냐고. 이모라 불러주어서 고맙다 말하는 목소리에 그렁그렁 맺히던 눈물이 흘러내리기 일보 직전이다. 이어진 화영의 행동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어린애처럼, 다른 부원들이 다 있는 이곳에서 펑펑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드러운 손수건이 눈가를 훑고 지나치면 그리운 사람과의 재회로 인한 벅참과 원인 모를 설움까지도 함께 씻겨나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일은 없게 됐다. 다행이지. 리라는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매와,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봄 같은 말들을 듣는다. 누군가 내가 거기 있었다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고. 그래서 나의 지난 길들을 모두 봐두었다고. 잊지 않았다고. 또한 보고 싶었다고.
참 희한한 일이다. 지난 봄과 초여름만 해도 이런 것들이 모두 부담스럽게만 느껴졌으니까. 급격히 떠올랐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자신을 기억해주는 게 몹시 고맙다가도, 또 어떨 때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가 꽁꽁 숨고 싶어지기만 했는데 이제와서 다시 이런 말이 기껍다는 게.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걸까. 아니, 어쩌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그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세상을 살아가며 옷깃 스치는 단 한명에게라도 '나' 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은 욕망. 어쩐지 그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말과 유사하게도 들린다. 그걸 깨달은 순간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앉아도 되... 나? 다른 친구들 일ㅎ, 어? 응, 그럼 앉을게요. 감사합니다."
근무 시간에 일을 빼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거절하려던 시도는 지나가던 부원 하나의 손짓을 통한 제지와 이어진 화영의 말로 인해 꺾였다. 하지만 정작 앉은 다음에는 언제 거절하려고 했냐는 듯 얼굴에 웃음꽃이 비싯비싯 피어났으니 이래서야 숨기지도 못하겠다.
"케이크 맛있죠. 부원들이 다들 머리 맞대고 엄선해서 골랐어요. 직접 만든 것도 있고요. 이거랑 이건 아마 부장님이 만든 디저트였던 거 같고 이건 성운이가 만든 거 같은데... 아, 성운이는 제 친구예요. 지금 주방 쪽에서 일하고 있을 건데 좀 더 있으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참, 메뉴 골라야지! 흐음~ 그럼 전 바닐라 컵케이크 먹을래요. 히히... 감사합니다, 화영이 이모."
긴장 풀렸다고 조잘조잘 말이 많아지는 건 어릴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한결같이 수다쟁이인 이리라는 장난스레 눈을 휘어보이는 화영을 바라보다가 결국 같이 소리내 웃어버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들의 주문을 받아주었다면 그쪽에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중섭에게로. 그의 눈 닿는 곳에 태오가 있는 것을 확인했으나 아직까지는 그들 사이의 접점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리라는 이내 화영과 중섭이 교환하는 표정에 신경을 집중했다. 오가는 시선의 온도가 따스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좋다는 말들은 아무래도 정말이었나 보다. 보기 좋다. 잉꼬부부라는 건 뭘까.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화영이 다시 입을 연다. 명확하게 말꼬리를 흐리면서.
"저 학생이요? 아, 태오 선배님."
그리고 화영의 손가락 끝 방향이 태오에게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성냥을 켠 것처럼 한순간에 받아들이는 정보값이 넓어진다. 어딘가 닮은 듯한 얼굴. 현씨. 단순한 친척이라기에는 척 봐도 너무 깊어 보이는 화영의 후회. 언젠가의 소문. 사랑의 도피,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아이?
"태오 선배님은... 똑똑하세요. 저지먼트도 3년째니까 오래 하셨고 잘 하는 것도 많아요. 아, 근데 운동은 조금 싫어하시나... 그래도 활동은 막힘없이 하시고요. 먹는 걸 대단히 좋아하시진 않는 것 같고, 그리고— 어... 친절하세요. 후배들에게도 이것저것 잘 알려주시고 동기분들하고도 잘 어울리시는 거 같아요. 참! 이번에 저희 댄스부에서 공연 하는데 거기 태오 선배님이 스페셜 게스트로 참여하신다고 했거든요. 저희 부부장 언니가 일주일 간 끈질기게 붙어서 겨우 영입했다는데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요."
그의 머릿속을 스쳐간 가설의 진위여부를 판가름해주기에 적절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때문에 리라는 잠시 떠오른 생각을 묻어두고 현태오라는 선배에 대해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고해 바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뒤로 갈수록 다소 내용이 옆으로 빠지는 느낌이긴 했지만 무난히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 한 차례 지나갈 즈음이었다.
챙강. 떨어지는 포크 소리에 놀란 토끼 눈이 된 리라는 즉시 중섭과 화영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어, 어? 글쎄요? 저도 오늘 처음 봤어요. 태오 선배님께 여쭤봤을 때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러나 그런 관계가 아니고 맞고 간에 부모의 입장에선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고등학생인 소년과 누가 봐도 성인이 된 지 오래인 사람의 조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런... 태오 선배님. 이름모를 손님.
근데 오자마자 남이 풀어준 혜성금 썰 무엇이지? 잠 덜깨서 품에 인형 끌어안고 금이 흔들흔들하면서 깨우는데 금이가 더 자자고 이혜성 끌어당기고 이혜성은 으응 일어나야돼 안돼....하는 그런 아니면 반대도 좋다 휴일 아침 드물게 일찍 일어난 금이가 이혜성 흔들어깨우는데 이혜성 근처에 있는 인형 당겨서 품에 안고 5분만 하고 웅얼거리는 그런(모닝 헛소리)
부모님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잔과 레드벨벳 케이크 두조각을 같이 내려놓은 혜성은 매니저의 배려로 부모님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카페인을 마시지 못하는 제 입맛에 맞춘 메론소다를 앞에 두고 있었지만 한입 제대로 마시지 못한 건 제 오빠를 쏙 빼닮은 날카롭고 매서운 눈매를 가진 엄마의 시선 때문이었다. 체하겠다. 천천히 메론소다를 빨대로 휘젖고 있을 때, 혜성이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가 아주 비쩍 말라서는...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니? 죽도 못먹은 것처럼 맥이 없어보여?" "엄마. 나 자취한지 벌써 3년째야. 밥 잘 챙겨먹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 엄마니까 막내딸이 그렇게 보이는거지."
이야기할 것들은 3년의 세월만큼이나 한가득인데, 누구도 먼저 켜켜이 먼지 쌓인 이야기들을 꺼내지 않았다. 불안정한 평화를 먼저 깨지 못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자립한 자식은 어느새 입다물고 속 삭히는데 익숙해져,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렸고 부모는 품 떠나 자립한 자식에게 느껴지는 묘한 거리감과 변한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쁘고 귀하게 키운 딸이었고 그만큼 구김살 없이 예쁘게 컸다고 생각했더니 얼굴 보지 못한 세월동안 그 막내가, 저리 변했다. 부모는 착찹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시시콜콜 딸 없는 시간동안 있었던 소소한 가족 이야기를 조금씩 꺼낸다. 그 마음을 알아서 혜성또한 부모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메일 것 같은 목을 메론소다를 마시며 억지로 뚫었다. 딸과 꼭 닮은 유순하고 단정한 인상의 아버지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딸."
힘들지? 말없는 무언의 다독임에 혜성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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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배웅하고 화장실을 들렸다가 창고로 들어간 혜성은 땡땡이를 치고있는 후배의 모습을 발견하고 작게 웃었다.
지난 며칠간 일을 했다고 4일차에 와서는 좀 더 익숙해진 느낌이다. 간지러운 집사님 멘트도, 서빙도, 정리도 전부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아니 잠깐. 아예 몸에 배면 좀 곤란하지 않나? 어쨌든 이리라는 잘 해내고 있었다. 여유가 생기니 주변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오기도 하고. 그 증거로 어제는 반가운 옛 인연도 만나게 되었으니.
"어?"
만남의 여파로 밀어닥친 약한 향수에 젖어 테이블을 정리하던 도중 부실 한쪽에서 약한 소란이 이는 게 느껴졌다. 뭐지? 하고 고개를 돌리면 테이블 앞에 서서 케첩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랑과 익숙한 인상의 연구원, 쨍한 금발에 강한 인상을 가진 단발머리 여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랑이 언니? 무슨 일 있어요?"
랑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리라의 눈이 순차적으로 오므라이스, 성환, 비단에게 보다 정확하게 닿았다. 상황을 파악하듯 두어 번 깜빡이던 눈이 이윽고 부드럽게 휘어진다.
"어! 성환 연구원님! 그리고 비단 언니!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응? 언제 봤다고 언니지? 그러나 태클 걸 틈도 없이 말은 이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같이 오셨어요? 두 분 아는 사이세요?"
하긴 인첨공이니까 건너건너 모두 아는 사람인 게 이상하진 않다. 두 사람 사이에는 랑이라는 접점도 있었고. 물론 담당 연구원과 그냥 아는 사람이 어떻게 같이 카페에 올 정도로 친근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리라는 케첩 그림을 다 그린 듯한 랑의 팔을 가볍게 껴안았다.
"비단 언니는 이 모습으론 처음 뵙는 거네요! 저 그때 그 새예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지먼트 카페에 어서오세요, 두 분~ 집사 이리라입니다! 오므라이스 시키셨네요. 음료수 없이 드시면 목마르지 않으시겠어요? 마침 저희 카페에 직접 담근 자몽 청이 있거든요. 맛있어서 잘 나가다 보니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떠세요? 한정판 수제 자몽 에이드 두 잔 곁들이시는 건?"
자연스럽게 추가 주문을 유도한 리라는 랑을 바라보며 남몰래 윙크해 보인다. 빼돌려 주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이미 고난이 한 차례 지나간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마는. 만약 성환과 비단이 이 제안을 수락했다면, 리라는 주문표를 작성한 뒤 랑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의 테이블 앞에 다시 나타난 건 리라였다. 자몽에이드를 주문하기로 결정했다면 은빛 쟁반 위에 음료 두 잔을 올린 채 반듯한 자세로 등장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빈손이었을 테니, 갑자기 왜 왔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테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리라가 은근슬쩍 의자 하나를 끌어와 두 사람 곁에 착석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으니.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가벼운 스몰토크로 대화의 서막을 연 리라의 눈동자가 성환에게 먼저 닿았다.
"성환 연구원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연구원님은 인첨공에 얼마나 오래 계셨어요? 전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여기에 대해 모르는 게 좀 많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아는 선생님 도움을 받아서 인첨공 연구소들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알게 된 게 있었어요. 저희 담당 연구원님은 이런 질문 잘 안 받아주셔서 성환 연구원님께 여쭤보고 싶은데..."
사실 시현에게 물어봐도 되긴 하지만 그쪽도 대충 알려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환 연구원님은 친절하시기도 하고, 만약 알고 있다면 제대로 알려줄지도 모르지. 그런 기대를 품고 입을 연다.
"애시르라는 연구재단이 있더라고요. 거기에서 최근에 무슨 이론을 발표했다던데... 이름이 아마... '생존본능과 능력 계발간의 상관관계' 라던가? 그거 무슨 이론이에요? 저 도와주시는 선생님 메모에는 좀 위험하다고만 써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몰라서. 보통 그런 건 연구원들만 열람할 수 있으니까요."
아, 그리고. 리라의 고개가 비단을 향해 돌아갔다.
"참. 비단 언니, 있잖아요. 스트레인지에 어떤 연구 재단이 땅 산 거 아세요? 그게 이 연구재단이던데. 전 안 가봐서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뉴스 비슷한 게 있더라고요. 근데 진짜면 이상하지 않나요? 출퇴근 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굳이...?"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연결이었지만 말해놓고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이상하다는 뜻이다. 대놓고 수상하다는 점에 있어서.
다소 끔찍할 뻔했던 3일차의 마무리는 부원들의 도움 덕에 나쁜 기억으로 자리잡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말과 반응이 오갔지만, 결과적으로 정인은 끝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리라와 부원들을 번갈아 보다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쉰 뒤 마음대로 하라며 그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덕분에 찡찡이와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얻을 수 있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4일차 아침. 카페에 출근하고 보니 흉흉한 소문이 저지먼트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없어진 학생이 4명 더 있고, 그들 모두 마지막 행적이 각기 다른 공원이며 공원에 들어가는 흔적은 있으나 나간 흔적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실종자들의 핸드폰과 ID카드가 공원 내지는 근처 시설에 유실물로 맡겨져 있다는 부분까지 듣고 나니 기분이 미묘해진다. 유실물로 맡겨져 있다고. 하필 추적이 가능한 핸드폰과 인첨공에서 신분확인을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ID 카드만 쏙 빼놓고. 누가 봐도 고의성이 짙은 게 빤히 보이는데, 이 찜찜함에 박차를 가하는 건 장소의 종류에 있다. 각기 다른 공원이라니. 이게 무슨 의미지. 당장은 혼자 해결하고 알아볼 수 있는 게 없으니 그저 머릿속에 담아놓고 넘어가지만 작은 거미가 어깨를 타고 오르는 듯 오묘한 불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얕은 한숨을 푹 내쉬고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주문표를 든다. 오늘은 오늘의 할 일을 하자.
(원래 이 레스가 먼저 올라가야 했으며 여기에 >>583의 다이스를 굴렸어야 했다... 나는 바보멍충이다...) (시간상 이 레스를 >>583 이전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겟 습니 다.......)
부드러운 푸딩을 다시금 한 스푼 뜬다. 누군가 혀를 뭉갤 때 남성은 달고 끝맛이 깔끔한 푸딩을 입천장으로 뭉갰다. 지나치게 여유롭고, 느긋한 태도였다.
"안타깝게도요…… 내가 여기서 다 불어버리면 태오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걸 모두 얘기해버리는 거니까요. 여기까지 말하는 것도…… 그래. 학생이 태오의 동생이라 최대한 힘내본 거라서."
남성은 생긋 눈을 휘었다. "공백이 길었으니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은 이해한다마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듯했다. 태오의 갈라진 듯 속삭이는 것에 더 가까운 목소리와는 판이했다.
"숨길 생각이 없었나, 음, 사적인 감정은 있지만 그건 아니라서요……. 남들 보기엔 그랬나 보다. 아, 어쩜 좋아. 누구 하나는 확신을 하겠구나. 응. 그렇네요, 하하, 안타깝기도 하지."
슬쩍 어딘가로 시선을 옮겼던 남성은 스푼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고이 손을 얹었다. 깍지를 끼며 모으는 손길이 단아하다. 어울리는 사람을 만난다, 라. 당돌하지. 제 처지가 뭔지 알면서 이렇게 구시겠다. 여유에 미세한 금이 가던 것은 한결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였다.
"그런가요? 태오에게도 좋은 사람이 생기면 나야 좋죠. 태오가 바라는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알잖아요? 태오는 까다로운 거. 어울리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환영이에요."
그런데.
"치한이라. 으음, 그 선생님이 도와주셨구나. 이상하네, 2학구라면 치를 떠는 아이가 그 도움이나 시선이 달가웠을까."
살갗 가죽이 서로 꽉 짓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내려보면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물들었으리라. 우리 동생, 학생을 그렇게 좋아하니 데 마레로 끌려갔겠다마는 이렇게까지 좋아하면 쓰나. 남성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태오에게 들었답니다. 자기가 가장 괴로울 때…… 정작 자신은 외면하고 소장님이 총애하는 아이 하나만 챙긴 연구소에서 뻔뻔하게도 제 커리큘럼을 담당했다, 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데 마레 최근에 엎어줬지. 남성은 속으로 여유롭게 생각하다가도 연락처 소리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줄 수는 있는데 연락 잘 못 받아요. 일이 바쁘거든……. 일정이 있어서, 일주일 내로 연락할 일이 있다면 문자로 주면 고맙겠어요. 새벽에 답장 주는 건 미안해서 다음날 아침에나 줄 것 같지만."
그리고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고급스러운 명함이다. 코발트 블루의 배경과 선명한 옥색, 은은한 하늘색으로 그려진 간단한 라인아트 로고가 오로라를 연상시켰다. 한 귀퉁이에 오렌지 색으로 레이브의 서명이 그려진 것을 보니 직접 의뢰라도 받은 듯싶다.
"잘 부탁해요, 학생."
뒷면에는 휴대폰 번호와 이메일, 그리고 짧은 소개가 적혀있었으리라. p.n 알 수 없는 약자와 함께 남성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작 과정에서 깜빡해서 이름이 없지만…… 편하게 불러요. 아저씨, 선생님, 야, 거기, 저기요 등등." 태오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깃을 고쳐 입고는 손님의 요청을 받기 위해 부산히도 걸어다녔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아이홀에 끼우지 않아도 쓸 수 있는 단안경을 받아들곤 손님과 안경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쓰며 고개를 들었다.
>>586 잠깐 짬내서... 리라 힐끗 보고 나서 정인씨가 리라에게 한 커리큘럼 종류를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줄줄 읊더니, 이런이런 절차나 이런이런 과정을 너무 조급하게 진행하는 게 아니냐 지적하고는, 이런이런 경우에서 이런이런 증세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인첨공 몇월자 학술지에 자기가 기고한 논문 봤냐고 한 뒤에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 게 헛된 기우이기를 바랍니다만, 박사님. 혹여나 커리큘럼을 진행하심에 있어 학생을 학생이 아니라 성과로 보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커리큘럼은 근본적으로 연구자와 학생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대원칙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마무리할 거라 생각해요.
>>595 빨래 하는 중이라서 이거 널구 밥 먹고 올게 수건도 간당간당해서 빨아야함 ㅋㅋㅋㅋㅋㅋㅋㅋ이러니 내가 수면 부족이지 ㅋ 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부모님이랑 감성적인 분위기 내고 있던 이혜성 포커싱 당하다. 근데 크리에이터에게 받는 포커싱과 다른() 아니 근데 어째 안디야 내가 떡밥 놓친거 있긴할텐데
" 대한민국 남자의 반이 실탄총기를 다룰 줄 안다곤 하지만... " " 인첨공으로 좁히면, 비단 남자뿐만 아니라 인구의 70% 이상이 실탄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일테니까. "
나름의 윤리는 지키겠답시고 어린 아이들은 잘 건들지 않지만...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 학생이 총기를 다룰 줄 안다는 것은 과연 어떨까.
"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
너무 집착한게 아닌가, 하는 말은 목 너머로 삼켰다. 자신이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 처럼, 애린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겠지. 어쩌면 저 집착은 말하지 않은 것의 파편일지도 모른다. 당장 물어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 으음... 대충 칼에 실을 달아놓고 당기면 회수가 되지 않을까? "
깊게 박힌 칼을 고작 실에 의지해서 당기는건 꽤나 힘이 많이 들어가니, 급박한 전투의 상황이라면 아마 NG의 범위일테지만... 아무튼이다.
" 허어, 그걸 상품으로 걸겠다 이거야? "
당장 물어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아까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애린은 '비밀 밝히기' 를 상품으로 건다. 이제 와서, 는 아니려나. 동월과 애린이 처음 만나고 나서 시간이 꽤나 오래 지났다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함구하던게 있단 것은 확실했으니까.
" 뭐 '뭐든지 물어뜯어보세요'랑 별개로 치는건... 상관 없지 않나? 편한대로 해둬. " " 뭣하면 진짜 물어뜯으면 되는거 아닌가. "
물어뜯으면 안된다. 아무튼. 비밀 밝히기라는 거창한 이름이 걸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꼬치꼬치 캐묻거나 깊게 질문할 생각은 없었다. 질문할 거리가 몇 가지 있기도 했으나, 그것은 나중을 위해 아껴두도록 하고... 일단은, 가볍게 가볼까.
" '비밀 밝히기' 니까 내가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괜찮지? " " 네 자주성에 맡겨보마. "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가 말한 대로 '비밀 밝히기' 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은 것은 애린 본인이었고,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라고 말한 것도 애린이었으니. 그 질문의 저의를 서로가 잘 알고있기에, 애린이 '즈는 사실 매운걸 잘먹슴다' 같은 의미없는 비밀을 내뱉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화영은 근본부터 선한 사람이었다. 자칫하면 새침함을 넘어 앙칼질 수도 있는 이목구비와 다르게 누군가를 품어주는 것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연예계의 수많은 고생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설 수 있을 만큼 자아가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아를 남에게 악의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지탱해주고, 곁에 있어주는 것을 무엇보다 뿌듯하게 여기는 사람. 그리고 지금 무엇보다 벅찬 만남이 여기 있었다. 상실의 시기에서 만났던 딸과 같은 아이. 리라다. 중섭은 화영보다 먼저 의자를 빼주더니 앉으라는 듯 자리를 한 번 토닥였다. 화영의 미소가 한층 더 부드러워, 마치 푹신한 크림과도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친구들이랑 같이 고른 거야? 기특해라. 나중에 그 성운이라는 친구도 소개 시켜줬음 좋겠네. 음료도 먹고싶으면 먹고, 알겠지?" 세월의 흐름이 있어도 같은 건 여럿 존재한다. 당신의 조잘거리는 명랑한 목소리나, 눈이 마주치면 꺄르륵 웃는 두 사람이나, 자리에 앉았을 때 혹시 불편한 건 없는지 살피는 화영의 눈길이나. 여전히 따스하고, 여전히 부드럽다. 하지만 다른 것도 존재한다. 주문을 마친 화영은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고, 태오라는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얘기하려다 입술의 안쪽 살을 살포시 잇새로 짓누른다. 자그마한 주름이 지는 것은 차마 숨길 수 없었다. "응. 잘 지내니?" 전주에 거처를 얻어 살았다더라, 동물원에서 목격했다더라, 손을 잡고 걸어다니던 작은 아이가 있다더라, 그리고 태오라는 이름과, 대외적으로 화영과 중섭 사이의 아이라 알려진 어린 아들의 이름, 태영. 지나친 억측은 아닐까 싶지만 심증은 곧 물증이 되어가고 있었다. 리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태오를 향해 결국 시선을 옮기는 것이 멍하다.
"그렇구나, 운동은 싫어한다니."
작게 픽 웃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떠올리고 있노라 얼굴에 큼직하게 쓰는 것 같다. 먹는 것에는 저러니 아이가 야위었구나 생각하고, 친절하다는 말에는 잘 자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어머, 정말이니? 리라도 있으니까 꼭 보러 가야겠네. 그렇죠? 태영이 아빠." "응, 봐야지."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하고 빙그레 웃으며, 다시금 태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을 둥글게 뜨더니, '그런 사이'라는 말에 화영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이제 보니 미소 때문에 잘 모를 뿐이지 상당히 앙칼진 인상이다. 그러니까 악역 제의도 많이 왔겠지! 남성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던 화영은 남색 머리의 여학생, 혜우가 태오 주변으로 다가가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며 서서히 시선을 좁혔다. "아하, 그래?" 그리고 태오가 품을 떠나기가 무섭게, 화영은 눈을 휘며 리라의 손을 보드랍게 잡으려 했다. "……리라야, 이모가 이런 부탁을 해서 정말 미안한데, 저 선배님 좀 잡와줄 수 있니?"
현태오 인생 최대의 시련이 펼쳐지기 일보 직전. 유달리 바람이 차고 해는 따사로운 가을이었다...
대화 중 불쑥 끼어든 혜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인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이어지는 말들에는 의외로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순간적으로 비틀려 올라가는 건 포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말단의 본분이라."
재밌다는 듯 곱씹는 목소리에 운율이 섞인다. 정인의 눈이 혜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검푸른 머리에 푸른 눈. 심해 같은 인상의 소녀.
"담당 학생의 불성실함을 지적하는 게 본분까지 끌려나올 일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게다가 고작 첫인상으로 내 성향에 대해서 판단짓기까지 하다니, 이것 참. 학생은 본인의 통찰력에 꽤 자신이 있나 봅니다."
고저없는 음성이 이어진다.
"학생 말대로 그게 말단 연구원의 본분이라면, 담당 학생의 본분은 개화와 발달 과정을 착실히 따라주는 것 아닙니까? 서로간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요. 이미 말했지만 오늘 먼저 약속을 깬 건 이리라 학생입니다. 모든 연구에는 변수가 따르니 뭐든 계획대로 진행되고 달성할 수 있기만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나, 그건 최소한의 조건이 지켜졌을 때 주어지는 여유죠. 모든 일은 한 번 밀리면 처음의 궤도로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십몇 년을 살아오며 그런 걸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죠?"
situplay>1597044289>512 이혜성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인의 시선은 혜성에게로 돌아간다. 도깨비불이 연상되는 새파란 눈동자와 대비되는 두 가지 색상이 섞인 머리카락을 보니 누가 봐도 당신 또한 인첨공의 학생이구나. 그런 감상을 혀 위에서 굴리다가 삼킨 정인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학생의 히스토리에 대해 제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다가 타 연구원 산하의 담당 학생인 만큼 함부로 말을 얹을 순 없습니다만, 객관적으로 레벨 0인 기간이 오래되었고 그 레벨을 유지 중이라면 꼬리표를 떼기 어렵다는 건 인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분류가 뭐든, 제가 유난스럽든 아니든 레벨 0의 무능력자였다면 이 사회가 그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전 사실만을 이야기한 겁니다."
능력지상주의의 끝을 보는 이곳에서 살아가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순진한 소리를 할 생각은 아닐테죠. 곧 성인인 나이일 텐데.
"훈계는 훈계고 커리큘럼은 커리큘럼입니다. 사적인 감정으로 커리큘럼 방식에 변화를 줄 생각은 딱히 없으니 지나친 걱정은 마시죠. 소나키네시스 4레벨 대능력자 학생."
situplay>1597044289>533 진정하
이 카페의 주인님 호칭은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정인은 빗자루질을 하는 정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정말 새삼스러운 이야기군요."
말인즉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널리고 깔린 게 레벨 0이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여기 들어와서 자란 학생들 중에 상승욕구가 없는 학생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설마 발치에 채이는 흔한 자갈돌 같은 존재나 되려고 인첨공에 들어온 건 아닐 거잖습니까."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파인베이퍼. 그러니까— 진정하 학생. 당신은 꽤 전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꾸준히 갈고 닦아 4레벨 상위권에 오른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왜 레벨 0의 심정에 이입하는 겁니까?"
정인의 발언은 끝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의아한 어투로 마무리 지어졌지만, 마지막 혼잣말에는.
"......"
음. 좀 긁혔나.
situplay>1597044289>593 서성운
*화자가 학생이 아닌 대형 연구소의 소장이라 대하는 방식에 차이가 명확함.
"우선 최신 논문과 이론은 모두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확실히 하겠습니다. 제가 작성하는 커리큘럼 계획은 충분한 고민과 개선을 거쳐서 주마다 업데이트 하고 있는 스케줄이며, 부작용이 따를 수 있는 커리큘럼은 삼가고 발견되는 즉시 배제하는 등 적절한 대처가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교내 랩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안전성 테스트 또한 매 분기마다 매끄럽게 통과되고 있으니 알터의 소장님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단정하다 못해 딱딱하고, 예의를 지켰지만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서헌오 박사에게 향했다. 얼굴 표정에도 흔들림은 없다.
6년 동안 현장에서 구르면 힘으로 녀석들을 싸우는 것도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목적은 '보복'이나 '폭행'이 아닌 '검거'이기에 굳이 힘을 안 들이고 잡아내는 방법이 보이기 시작하고 말이야. 요즘 뭐 사이다니 뭐니 해도, 일단 상처 하나 없이 잡아야 잡음이 안 나오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똑같기도 하다. 경찰에서 "왜 이렇게 패서 데려왔어?"는 들려도 "왜 이렇게 깨끗하게 잡아왔어?"라며 꾸짖거나 벌을 내리는 소리는 안 들리지 않는가. 그게 안 될 경우에는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이 정도 했으면 보이거든. 얘네들이 굳이 힘까지 써가면서 잡아야 될 애들인지,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애들인지. 방금의 녀석들은 후자에 속했고.
" 그래. 너 많이 먹어라. "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영화 괴물에서 나오는 한강괴물의 위장을 가지고 있나. 카메라를 왜 먹어.
" 걔네들도 사람이니깐 쉬어야지. "
이렇게 능글맞게 대답을 하다가, 어디선가 도와달라는 외침이 들린다. 바로 근처에서 인첨공의 외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4명 가량의 불량배에게 붙잡혀서 금품을 갈취당하고 있었던 것. 한양은 이 광경을 인지하자마자, 한 번의 손짓으로 4명을 모두 염동력으로 벽에다가 박아버린다.
먼저 앉으라는 듯 의자를 빼주는 중섭의 모습과 변함없이 다정한 화영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은 닮게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공기를 데우자 리라는 실로 오랜만에 특정한 종류의 안정감을 느낀다. 폭신한 생크림 케이크에 파묻힌 것 같은 느낌. 과거가 절로 떠오르는 변함없는 모습들.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것도 존재한다. 특정인의 이름이 나오자 입술 안쪽 살을 짓누르는 화영의 모습에서 리라의 막연한 예상은 점점 형태를 잡아간다. 분명한 동요의 제스처. 끝내 어딘가로 자꾸만 돌아가는 시선. 상상의 형태는 점점 명료하고 견고해진다.
아. 이제 보니 옆얼굴이 닮은 것 같다. 그쯤에서 확신이 굳었다. 어쩌면이 아니라 정말, 거짓으로 밝혀졌던 것들은 사실 진짜였으며 현태오는 현중섭과 이화영의. 그런 이야기인가?
"꼭 오세요, 공연. 저희 댄스팀 실력이 꽤 좋아요. 태오 선배도 아마 잘 하실 거고요. 연습 오신 거 봤는데 멋졌어요."
그 춤은 사실 무슨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는지 모를 이 가족에게 보여주기에는 좀 자극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화영과 중섭이라면 어떤 모습이던지 눈에 담고 싶어할 거라 믿는다. 의외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미워하지도 않을 것 같고. 그리움 짙은 감정이 얼굴 피부 위를 시시각각 스쳐가는 게 제 3자인 자신의 눈에도 이렇게나 확실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그렇지 않을까.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던 리라의 입이 다시 열린 건 약간의 침묵이 지난 뒤다.
"내년에도 오세요. 4학구에는 누리랜드라는 놀이공원도 있는데 엄청 재밌어요. 리조트도 붙어 있어서 가족 여행 하기도 괜찮고요. ......반가워할 거예요."
누가? 이리라가? 아니면 현태오가? 부러 주어를 생략한 채 섣부른 말을 뱉어버린 리라는 그저 웃어보였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알 것 같지만 알아서는 안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때라도, 이제라도 중섭과 화영이, 그리고 태오가 함께 이야기 나누고 가까이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좋지 않을까. 가족은 아마도 그런 거니까. 가족이니까.
그리고 가족이니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당연하다. 화영의 온화한 미소가 사라지자 리라는 순간 움찔한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나도 저 사람이 순간 치한인 줄 알았으니까. 게다가 누가 봐도 태오 선배보다 한참 나이가 많고...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 풍경 자체가 뒷목 잡을 일이다. 그래서 리라는 화영의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드랍게 잡은 손은 따스해서 그 정도 부탁은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현 상황을 구성한 여러가지 요소의 결합으로 의욕이 대폭발해버린 리라는 화영의 손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놓은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태오가 간 방향으로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엾은 태오. 아무래도 이 겁대가리 없는 카나리아는 결국 뱀을 잡아다 바치기로 굳게 마음먹은 모양이다.
"태오 선배! 잠깐만 저랑 같이 가요!"
잡혔을까? 아닐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확실한 건 지금 당장 놓쳤더라도 잡혀줄 때까지 쫓아다닐 기세라는 것이다. 천고마비의 계절. 각자의 재회와 만남이 어우러져 저마다의 축제가 무르익고 있었다.
오므라이스에 케첩으로 그림을 그려달라는 리퀘스트가 들어온 게... 사실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케첩이야 그냥 뿌려 먹으면 그만이지 굳이 보기 좋게 뿌릴 필요가 있나 하고 살아왔으니 당연히 예쁘게 그림을 그리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랑은 삐뚤빼뚤하게 오므라이스 위에 그림을 그렸다. 옆에서 계숙 살살 쪼는 건 애써 무시한다.
그 뒤에는 성환의 오므라이스 차례, 그래도 방금 한 번 그려봤다고 아까보다는 낫다.
"뭐야, 사람 차별하냐?" "선배, 그건 너무 억지 같은데."
랑은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케첩통을 쥔 손과 케첩이 내려앉는 오므라이스에 신경을 쏟았다. 때문에 리라를 발견한 건 랑보다 비단과 성환이 빨랐다.
"어라, 응?" "아, 리라 학생도 여기 있었군요? 반가워요!"
그제서야 케첩을 뿌리는 걸 멈추고 리라의 말에 시선을 돌려 리라를 쳐다보던 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케첩을 뿌리는 걸 마쳤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기 전에 이어지는 리라의 질문에 일단은 멀뚱히 섰다.
"리라 학생이라 아는 사이였어요 선배?" "엉? 아니, 난 이런 애 처음 보는데-"
라고 말이 끝나기 전에 랑의 팔을 가볍게 껴안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말에 아! 하고 생각난 게 있는 듯 턱을 괸 채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톡톡 치는 비단이었다.
"그 때 겁도 없이 늑대 입에 들어갔던 새인가? 흐음..." "무슨 말 하는 거에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응하는 성환은 무시한 채, 비단은 리라의 능숙한 접대에 리라와 랑을 잠시 빤히 쳐다보다가 씨익 웃으며 양 팔을 머리 뒤로 넘겨 깍지를 꼈다.
"자신 있나본데, 그럼 두 잔." "아니 선배, 나는!" "그럼 안 마실 거냐? 그럼 말고, 내가 두 잔 마시지 뭐." "...두 잔 주세요."
그 주문과 함께 랑은 리라에게 이끌려 자연스레 그 장소를 벗어났다. 홀과 주방 사이, 휴게 공간에 도착해서 랑은 케첩 통을 내려놓은 뒤 리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랑은 리라가 자몽에이드를 가지고 서빙하러 나가는 걸 보고, 잠시 부스 바깥으로 나가 바람을 쐬기로 했다. 사실 바람만 쐬러 나온 건 아니고, 메이드가 자연스럽게 학교 내를 돌아다니면 홍보 효과도 있다면서 반쯤 억지로 떠밀려 나왔다.
몇 번이고 이야기하지만 성하제는 다양한 사람이 모인다. 그리고 밝고 신나는 분위기가 여기저기 잔뜩, 그렇다면 반대로 어두컴컴한 곳 역시 있기 마련이고. 평소보다 훨씬 더 짙은 그림자가 져 있을 것이다.
"빙고."
그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랑은 교사 뒤편에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불량학생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런 날에도 제대로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불량학생 사이에 끼어 있는 학생도. 랑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담배 꽁초 같은 것을 쓸어담기 딱 좋은 빗자루 하나를 발견해 집어들었다. 사악, 사악. 하는 모래가 쓸리는 소리와 함께 랑은 한 무리의 불량학생 쪽으로 걸어갔다.
"?뭐야, 왜 메이드가 여기 있냐?" "이쪽 말고 저리로 가, 지금 바쁘걸랑. 아니면 길이라도 잃었냐?"
랑은 말없이 그 무리 사이로 걸어들어가, 다소 주눅들어 보이는 학생을 내려다보았다.
"ㅋㅋㅋ축제라고 좀 이상한 애들 많네, 말 못 들었어? 여기 말고 딴 데로 가라니까... 아니 씨 덩치가 왜 이리 커." "어이, 무시하지 말라고!"
"서비스 필요하십니까, 도련님?" "...네?"
주눅 들어 보이던 학생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뭔지는 몰라도 지금 상황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지 고갤 끄덕였다. 그 순간, 랑의 옷차림과 괴리되는 신장, 분위기 때문에 다소 주춤거리던 불량학생 중 한 명이 랑의 어깨를 붙잡았고.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 학생은 얼굴에 길쭉한 붉은 자국을 남긴 채 자빠졌다.
"아니 이거 미친 거 아냐! 뭐하는 거야 이게!" "뭐... 에스코트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군."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얘들아, 후회하게 해 주자!" "해보던가."
랑은 반으로 쪼개진 빗자루를 보다가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끙끙대고 있는 불량학생(이었던)들을 내려다보았다.
"...죄송, 죄송함다.. 그치만 성하제 같은 거에 우리가 뭐 낄 자리도 없고..."
"저기, 저는 이제 괜찮거든요. 이제 그만 하셔도 괜찮아요." "쯧."
혀 차는 소리에 움찔하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다... 고 방금 전까지 주눅들어 있던 학생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반응을 대강 알아챘는지, 랑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돌아섰다.
"이번엔 이 정도로 끝낸다, 다음 번에 걸리면 바로 병원에 보내줄 테니까 알아서 잘 사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몇 발자국 멀어지려던 랑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몸을 돌려 주눅들어 있던 학생을 쳐다보았다.
듣기에 편한 목소리가 꼭 기분까지 좋게 만들어주는게 아님을 참으로 신박한 방법으로 깨닫노라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갈라질 듯 낮게 속삭이는 음색이 내겐 더 편했다.
붉은 눈동자가 어딘가를, 누군가를 보는 듯 했으나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 눈길을 따라가는 대신 저 얼굴을 더 빤히 응시했다.
화상 그대로 망막에 새기려고, 무엇으로 가려도 눈치챌 수 있게.
그렇다보니 그 꽉 쥔 손, 소리보다 먼저 알아챘지만.
"태오가 까다로움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시는 걸 보면, 그저 단순한 후견인으로서의 사심이신가보네요."
여유가 흐트러졌나? 아니다, 실금 정도라면 몰라도. 나는 백한결이라는 키워드를 기억에 한 번 더 새겨두었다.
"적어도 그 도움을 주는 순간의 태오는, 아시는 것과 같은 까다로움은 드러내지 않던 걸요. 음, 어째서 이렇게까지, 라는 반응이었어라. '아시겠지만' 태오의 까다로움은 맞춰줌보다는 어떻게든 틈새를 찾아 비집고 들어가는게 포인트니까요. 네, 그 순간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네요. 딱 그 순간에- 태오의 시선에, 백 선생님이 잡힌 거죠."
시야에 들면 그 다음은 관심 아니겠나요, 라며 짐짓 다 아는 듯이 웃어보였다.
"그럼에도 아직 백 선생님의 담당 아래라는 건, 글쎄요, 태오는 가끔 좋고 싫음을 섞어서 표하니까요. 그런 점이 정말 귀여운데."
나는 공손히 두 손을 내밀어 검푸른 명함을 받아들었다.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훑다가, 한 귀퉁이의 레이브 서명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서명 위를 손끝으로 문질러보곤 비스듬히 들어올려 입술을 가리듯 했다.
4일차, 이제는 손님응대에도 제법 익숙해져서 어지간한 진상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사람의 성장이라는 것은 의외로 조용하게 찾아오기에 깨닫고 보면 이렇게나 내가 열심히 했구나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역시 유승엽, 접객업계도 찢어삣다'하는 생각이 먼저들더라.
"저기요...?" "와예" "주문...해도되나요?" "해보소."
진상을 제압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바로 무력! 큰 힘은 큰 존중을 낳는다! 하지만 능력을 보여주기엔 살상력이 과하게 높고 무엇보다 어쩐지 수수한 느낌이라 임팩트가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임팩트는 야구빠따로 주면 되더라. 두가지 의미다. 야구빠따를 들고 있으니 손님들 역시 존중을 주었다. 압도적인 힘이여...
"집사님." "네, 아가씨?" "바닥에서 쓰레기 줍고 다니는 저 토... 끼? 메이? 드? 같은 애들은 누구인가요?" "아. 제가 그렸답니다~ 어제 청소할 때 보니까 바닥이 좀 지저분하더라고요. 중간중간 치우지 않으면 위생상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살아있는 거예요?" "......그거 참 철학적인 질문이네요."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아뇨. 쟤네도 나름 종업원이랍니다~ 막 데려가면 안 돼요." "저기 어떤 애기가 들고 나가는데." "뭣"
한 뼘쯤 되는 크기의 조그마한 복슬복슬 토끼 메이드들이 쓰레기를 집어다 버리는 풍경은 꽤 귀여웠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아이들의 수집욕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꼬마 아가씨, 토끼 친구는 여기 살아야 해요~ 막 데려가면 무서워한답니다~" "많잖아요! 하나마안!" "안돼요~" "이익! 이 집사 불친절해!"
자신에게 날카로운 시선이 꽂히자, 즐겁다는 듯 웃는 동월의 표정은 약간 상쾌해진 듯 했다.
" 아, 그럼. 효율 좋지. 체격, 성격, 특성 등등. 모든게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평균'으로 묶어서 '니들 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똑같이 진행할게~' 해버리면 끝인. 지극히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들의 평균이지. 나눠지는건 오직 능력의 다름 뿐. "
" 목화고 산하 연구소의 일반적인 허가 범위 어쩌구... " " 주인이 시키는대로 멍멍거린다는 얘기를 뭘 그리 어렵게 돌려말해? " " '제가 소화해내기에는 조금 빡센것 같아요...' " " '얘! 네 전에 있던 사람들은 이런건 평범하게 했었어!' " " 편하다 편해~ 꺄르륵. "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꺄르륵' 에는 어떠한 높낮이도 없었다.
" 그래 뭐, 난 상식을 바꾸는 능력이 없으니 더 말해도 못알아듣겠지. " " 이미 그건 당신 안에서 상식이 되어있을테니까. " " 그래서... '너한테 상식' 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상식' 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지? " " 발톱 세운다는 말을 되게 별거 아닌듯이 말하는데, 뭐 죽기 전에 폼이라도 잡아보려고? " " '겨우 이런것에 발톱을 세우다니. 당신은 역시 기대 이하군요.' " " 이따위 말이나 뱉으면서 영화처럼 '멋진 죽음' 을 얻어낸 뒤에, 트라우마를 얻은 사람을 하늘에서 지켜보는 호황을 누릴거야? " " 아니겠지. 당신이 알진 모르겠지만, 뒈지면 후회도 못하는게 죽는거거든. "
" 나도 다행이야. 그 사실 덕분에 내가 좀 더 행복해졌거든. " " 자기들 멋대로의 실험을, 커리큘럼이라는 명목으로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그 커리큘럼에 알아서 맞춰주길 바라는거. " " 그런 불행을 강요하는 너희들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네. "
비어버린 커피잔을 주방 싱크대에 두고서, 동월은 칼을 뽑아들고 정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 없이, 그저 그를 지나쳐 카페의 문을 열었다. ...어라, 카페 밖이 이렇게 밝았던가? 그저 새하얀 빛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 꼭,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 "
문틈 사이로 나가 문을 닫은 동월은, 다시 카페 문을 열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문 밖도 평범한 축제의 거리일테고. 아마 그 소년은, 지옥으로 걸어들어갔을테지.
말투가 굉장히 거슬리네. 잘못했다잖아. 그러면 좀 좋게좋게 달랠 수 없는 거야? 저 연구소 돌아가는 꼴은 안 봐도 알겠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데.. 방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했다고 저런 인간이 되는 건 아니야. 그냥 저 인간 자체가 싹퉁바가지 없는 거지.
" 이건 리라양이 실수했네~ 리라양 자취한다고 했나? 고양이는 잠시 여성부원에게 부탁해야겠어요. 내가 연락해둘까? "
응. 우리 입장에서 할 말이 없는 거 맞아. 우리 알 바가 아니라는 게 아니고, 명분이 없어. 연구소 내부의 레벨 0과 레벨 4의 차별. 굉장히 화가 나는 일이지만 우리가 뭘 어떻게 해? 리라양 입장에서는 안타깝지만, 우리가 저 연구원을 뭐라고 쏘아붙일 명분도 없을 뿐더러 뭐라고 해도 오지랖 떨지 말라고 할 걸? 뭐 레벨 0 때는 어땠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연구소의 규칙대로 잡힌 커리큘럼을 리라양이 실수해서 안 나간 거 맞잖아. 근데 데려가는 어투가 싸가지 없긴 하네. 연락을 저래 못 받은 거에 빡칠 수는 있어. 연락 좀 받으라고 뭐라 할 수도 있지. 조금 다그칠 수도 있다, 이 말이야. 근데 꼭 저렇게까지 해야 돼..?
" 근데 방금 뭐라 그러셨어요? 더 열받게 굴면 사람 취급 못 받는 게 뭔지 알게 된다고요? "
" 여기 인첨공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이에요. 대놓고 인권을 유린하겠다고 협박하는 건.. 지금 대놓고 대한민국 헌법을 어기겠다고 예고하시는 건가요? 응? 연구소에서 정한 합법적인 규칙이나, 공공기관에서 통과된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징계나 벌칙을 내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인권유린? "
이건 뭐라고 해야지.
저지먼트로서? 마틸다로서? 리라양의 선배로서?
아니.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니깐 나서는 거야.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데.. 그걸 대놓고 어기겠다고 엄포를 하는 거 아니야?
" 아니시죠? 그냥 감정적으로 툭 튀어나온 거죠? 혹여나 진짜로 그럴 생각이시면.. "
한양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한 번 해보셔요. "
이런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오는 패턴. ' 너가 뭘 할 수 있는데. ' 이거 국룰이거든. 한 번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아~ 절대 먼저 폭력으로 해결할 생각은 없습니다~
옆얼굴이 닮았다. 화영의 눈매도, 오뚝한 코도, 얌전한 인상으로 가릴 수 있는 표정도. 특히 태오는 눈매를 많이 닮았다. 첫째는 아버지를 많이 닮고 둘째가 엄마를 많이 닮는다던 세간의 이야기와 달리 태오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고, 오히려 동생인 태영이 아버지를 많이 닮은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영은 평소보다 더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자랄수록 자신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아이를 마주했으니까. 그래, 사실이다. 아이가 있었다느니, 어딘가에 숨겼다느니, 회장이 손을 써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느니 했던 그 소문. 죽지 않았다. 인첨공에 갇혔을 뿐이다. 하지만 화영은 감정을 꾹 갈무리했다.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갈게. 약속이야."
화영은 애써 소지를 들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어떤 춤인지 알게 된다면 잠깐 충격을 받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 아들이 벌써 다 커서 저렇게 멋진 춤도 추는구나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상 외로 크게 열린 마인드의 소유자였기에 당연한 일일지도.
"정말이니? ……응, 내년에도 꼭 와야겠구나. 실은 이모 아들이 그렇게 놀이공원을 좋아하거든. 그때 또 볼 수 있으면 소개시켜 줄게."
모이면 좋을 거야. 마찬가지로 주어를 생략한 화영은 기특하다는 듯, 그리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듯 눈을 휘었다. 리라 덕분에 착잡하던 마음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는 듯.
다시금 보니 태오는 어머니를 닮았다. 이젠 지금 앙칼지게 뜬 눈을 보니 확신할 수밖에 없다. 태오가 평상시 짓지 않던 표정에서 이따금 눈을 들거나 시선을 옮길 때와 똑 닮았다. 물론 그 과정을 확인하는 것도, 축제의 춤에서 충격을 완화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좋은 상황에서 나온 건 아니다마는.
"아……. 무슨 일일까요…."
어딜 가자고? 누가 또 부르나? 아니면 옷의 수선이 필요한 건가, 도움이 필요한가, 태오는 리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타오르는 듯한 열정에 시선을 굴렸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따금 리라가 이런 열정을 보이면, 태오의 기준에서 몹시도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면 졸졸 쫓아올 것 같고, 시선을 굴리며 계산을 마친 태오는 마지못해 끌려가고 말았다. 거대한 구렁이라고 해도 늑대가 지키는 카나리아는 삼킬 수 없을 테니까.
"……." "고마워, 리라야. 케이크 마저 먹을래? 의자가 마침 하나 더 있구나."
물론 화영의 앞에 대령했을 때는 태오가 몸을 돌리며 유턴하려 들었으나 화영이 더 빨랐다. "현태오, 앉아." 하는 것이 남자친구랑 데이트하던 광경을 마주치고 집에 끌고간 여고생 딸을 대하는 것 같다. 차분하고, 또 우아한 목소리에 태오는 눈을 슥 굴려 리라를 한 번, 그리고 화영을 한 번 쳐다보더니 드물게 창백한 안색으로 머뭇거렸다. 제 아버지를 쳐다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중섭은 13년 만에 만난 제 아들에게 '네 엄마는 이기지 마…… 나도 자주 맞아봤어.' 싶은 안타깝고 촉촉한 눈길만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태오는 결국 의자에 앉으며 시선을 피했다.
"우리 태오, 13년 동안 훌쩍 자라버렸네. 응?" "아, 그러니까, 이건- 악!"
충격, 현태오 대사에 느낌표를 붙이다. 팔을 찰싹 소리가 나게 맞자 태오는 파드득 떨며 드물게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두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리라를 향해 고개를 휙 뺐다. 너, 이러려고 나를……!
"아주 다 컸어, 이러다가 결혼하겠다 하겠어, 아주 혼자서, 응?" "아, 그런 사이 아ㄴ… 아파요, 아파, 잠깐만요, 진짜, 진짜! 엄마, 엄마 나 진짜 엄마 그게 아니라 아!" "이럴 때만 엄마지, 요 말썽꾸러기야. 태영이도 안 그러는데!" "허, 태영이는 아직 애니까 그렇죠, 아파요, 아야, 아야, ㅇ, 아빠……." "다 커서 아빠 하니까 징그럽긴 하구나……." "아!"
신명나는 맘스터치에 낙지는 장단을 맞춰 꿈틀거렸다. 마음 넓은 녀석이 팔을 어떻게든 모아 자진모리 장단을 피해도 남는 것은 찰진 소리였으리라…….
그렇다. 어투가 사나운 것과 별개로 이 상황은 리라의 부주의로 벌어진 일이 맞으니까. 일정을 잊었더라도 핸드폰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네, 부부장님. 부탁드릴게요. 밥 같은 건 때 되면 먹을 수 있게 해 놨는데 너무 오래 혼자 놔두는 게 좀 그래서..."
리라가 한양의 물음에 대답하는 동안 정인은 가만히 한양을 바라보았다. 레벨 5. 마틸다 서한양. 목화고등학교 저지먼트의 부부장. 레벨 5 학생은 희귀한 만큼 그의 능력계수 성장 히스토리는 정인도 최근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쌓아올린 것이긴 하지만 레벨 0에서 5까지 올라온 특이 케이스 중에 특이 케이스. 저 사람을 담당한 연구원은 실적을 인정받고 승진했거나, 혹은 연구소를 차릴 자격을 갖추게 됐겠지. 초능력 연구로 꽃피운 이곳에서 학생의 능력을 제대로 활성화시킨 공로는 크니까. 부러운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정인은 한양의 시선이 저에게로 향하는 걸 느꼈다.
"......"
옳은 소리다. 적어도 그건 홧김에 나온 말이 맞았으니. 물론 아주 진심이 섞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만은.
"그럴 리가요. 연구자로서 지켜야 할 건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목화고 산하 연구소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그래야겠지. 약한 한숨이 목구멍에서 맴돌다가 느슨히 흘러나왔다.
"주문하신 스페셜 맥시멈 아이스티랑 허니 마들렌 나왔슴다 GOSHUJINSUMMER!!! ...머야, 하나였슴까?" "와도 된다고 하셨으니까요~♥︎" "...세리쌤 얘기를 그렇게 잘 들어보십셔." "노력은 해볼게요~♥︎" "예이예이~ 그 말 들은지가 벌써 5년째임다~"
계절을 신경쓰지 않은 산뜻한 차림새, 자신을 따라하듯 양쪽으로 추려내 묶은 검은 단발, 맑게 개인 붉은 눈동자에 떠다니는 작은 별빛들... 소녀는 언제나 그러했듯 밝은 미소를 보여줄뿐이었고, 그런 행동이 영 탐탁치않으면서도 어쩔수없다는듯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도 테이블에 합석했다. 여전히 소녀다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자리 선정'일까.
"유라언니한테 들었어요. 최근 서버 접속기록중에 언니 ID가 있었다고," "...밀린 숙제를 끝내려 했던거 뿐임다." "그리고 그게 백서우양 흔적을 찾으려는 거구요." "...뭐야, 거기까지 들은 검까?" "언니랑 그 애, 꽤 사이 좋았으니까요. ...질투 날 정도로." "그래봤자 재희보다 친했겠슴까..." "글쎄요~ 원래 몇몇 사람에게만 상냥한 것보다 여러 사람에게 상냥한 사람이 더 색안경을 끼고 볼만하지 않을까요?" "거 참 배배꼬였네여 하나두..." "그부분은 언니가 잘못한 거니까요~" "예이예이... 어련하시겠슴까..." "...그치만, 아시죠? 그때 일은 아무도 모르는만큼 남아있는 정보도 소장님들만 가지고 있을 거란거," "그러니까, 자기 딸한테 뭐 그리 숨기는게 많은 검까. 악감정이 있는게 아니고서야..." "글쎄요... 그거야 언니가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언니를 마주했을때 그분들의 표정... 마치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듯한 눈이요." "에반데..." "그럼에도 여전히 한다리 건너서라도 언니를 보호해주시는건, 어찌보면 그게 그분들이 할수 있는 최선이겠지요." "그냥 마주치고 말 섞기가 싫은 거겠져. 옛날처럼... 요즘같은 시대에 강제격리실험 같은거 하면 욕먹기 십상일텐데 말임다~" "그래도 저나 선생님이 옆에서 지켜보고 지켜주고 계시잖아요~? 유라언니도 그렇고..." "...그거야말로 보호가 아니라 격리겠지여.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동네 한가운데에 놔두는 것보다 방폭쉘터 안에 놓아두는게 그나마 나은 처사인 것처럼," "후후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아무렴, 도시를 팝콘기계마냥 생각하고 있던 언니에 대해서 그저 애들 사이에 들리는 소문정도로만 가라앉힐수 있었던게 어떤 대안도 없이 우연히 짜여졌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잘나신 어른들이 알아서 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정도로 앞뒤 생각 안하는 분은 아니시잖아요? 아니면...
그런 간단한 상식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어긋남이라도 생겼던 건가요?" "......" "물론... 제가 생각하던 언니답게 끝끝내 선을 넘진 않으셨지만... 그렇다 해서 원망하는 사람이 없어지는건 또 아닐테니까요." "그거야 알고 있슴다... 그러니까 이 일을 하고 있는거고 말임다." "음... 그건 썩 좋은 행동이 아닌거 같은데요? 대체 언제부터 언니가 누군가의 말을 족쇄처럼 달고 사신 건지..." "자꾸 아픈데 찌르기 없기임다..." "그런고로...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진 마세요. 다 언니를 위한 일인걸요? 선생님께서 부탁하신 것도 있지만, 지금은 제 개인적으로도 원해서 이러고 있는 거니까요." "그럼 점수라두 잘 주던가여." "글쎄요~ 아무리 언니라 하더라도, NG행동은 하고 싶지 않은 걸요?" "누구씨 닮아서 개 넘하네 징쟈..." "...~♥︎"
🤔 정인이 처음엔 잘 몰랐는데 뭔가 과거에 연구 관련 문제가 있었고 (본인 기준) 나락으로 떨어져서 레벨 0 관리나 하고 그동안 어떻게 회생할 방법 없나 계속 찾아보다가 리라가 폭풍성장하니까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 혹은 더 높이 갈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는 게 강해진 것 같구만
인간은 대체로 눈을 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마주앉아 있는 리라에게는 화영의 감정이 보인다. 참고 누르고 있지만 눈동자 너머에서 일렁이는 후회와 슬픔의 파도가, 눈물이, 착잡함이.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지만 이쯤에서 리라는 태오가 인첨공에 들어온 이유가 부모님이나 본인의 온전한 자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더 있었겠구나. 거기까지 추리하는 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머리가 조금 더 크고 나서 찾아보게 된 여러 인터넷 기사들, 방송국을 오가며 어깨 너머로 들었던 어른들의 쑥덕거림. 모든 내용을 종합해보았을 때 아이가 있었다느니, 어딘가에 숨겼다느니, 회장이 손을 써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느니 했던 그 소문 중 적어도 아이가 있었다는 것 하나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 외에는 전부 틀렸다. 죽지 않고 인첨공에서 지내왔으니까.
"응, 약속이에요. 꼭 오세요. 저번에 저지먼트에서 단체로 놀러간 적 있는데 정말 좋았거든요. 분명 즐거울 거예요."
정작 지내는 내내 놀이공원에서 태오를 발견하진 못했지만—건너건너 들은 바로는 거의 계속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푹 잘 수 있었다는 건 최소한 그 숙소의 침대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겠지. 그럼 다시 거길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이 오천 보는 더 앞서나간 계획이 실현되려면 태오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내밀어진 소지에 손가락을 걸며 리라는 미소짓는다. 정말 꼭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고맙다는 듯 눈을 휘는 화영을 뒤로한 채 태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역시 닮았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던가. 이제 보니 왜 그동안은 전혀 몰랐을까 싶을 만큼 화영의 얼굴이 보인다. 닮아있었다. 모자지간이라는 데 일말의 의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건 비밀! 멀리는 안 가요~ 한 열 걸음에서 열다섯 걸음만 가면 도착! 앗, 그새 다 왔네. 화영이 이모~"
결론부터 말하자면 태오의 촉은 옳았다. 이 자식... 고양이의 얼굴을 한 호랑이 앞에 뱀을 갖다 바쳤다. 심지어 세상 친근한 호칭까지 덧붙이면서! 이런 배신이 있나!
"화영이 이모, 아, 그러니까 이화영 배우님이 불러달라고 하셔서요."
앗. 생각해보니 느닷없이 너무 친근한 호칭을 썼나.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리라가 다시 입을 열기 직전—
"힉."
청명한 찰싹 소리에 낮은 힉 소리는 손쉽게 묻힌다. 눈이 동그래진 리라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에 순간 할말을 잃고 멍해지고 말았다. 태오 선배님이... 목소리를 높였어? 아니 이게 아니라 그게 그 그렇게 때려도 되는거예요?! 태오의 아들 모먼트와 화영의 어머니 모먼트를 눈앞에서 직관해버린 리라는 결국 태오가 화영에게 충분히 찰싹찰싹 맞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있기만 했다.
3일차에 설거지 및 뒷정리에 정착하고 4일차~ 그대로 내내 때웠으면 무난했을텐데 일 시작하기도전이 저지먼트 전체공지부터 확인해버렸다 1학년만 9명이나 실종됐단다 헐? 저런일이 있었는데 카페나 하고있어도 되는거야? 부원들 다 비상모드 들어가야하는거 아니야? 근데 성하제기간에는 그런일도 안티스킬이 도맡는단다 영문을 모르겠다 그게 가능한일이면 평소에 저지먼트가 있을 이유가 없고 그게 불가능한일이면 지금 안티스킬들은 야근과 철야를 벗러나지못하고 초비상상태라는거 아닌가 그래도 괜찮은거야?
>>0 이 모든 게 우연일까. 9명이 되어가는 학생들의 실종과 그 시점에 맞춰 개인적인 일을 하느냐고 자리를 비우겠다고 하던 U의 연락. 이상하리만치 겹친단 말이야. 자경단원들이 각자 맡은 위치로 순찰 및 치안유지를 위해 자리를 비웠기에 혜성은 인지저해 프로그램을 키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일단 말한대로 학생들 실종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노력 중인데 이게 ** 꼬리가 보이질 않아서 *빡치네." "...한번 계속 알아봐주세요. 그리고 그 구인광고였던가요?" "어엉? 아 그거. 중립조직이라서 협력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역시 목적이 좀 꺼름직하지?" "그거에 대해서는 보류하도록 하고. 다른 조직이 조금 신경 쓰이더군요. 슬슬 움직임도 불순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고."
혜성은 틱, 라이터 부싯돌을 튕기며 흰 연기를 천천히 내뱉으며 혼잣말처럼 천천히 중얼거렸다. 피곤한 듯 라이터 부싯돌을 튕기고 있던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다가 등받이에 등 기대며 다리를 끌어올리는 독특한 자세를 취하는 걸 가만 바라보던 K는 제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
"같이 알아볼게. 어떻게 할까?" "깊은 곳까지 발디디고 있다면, 그 이상 알아보지 마세요. 스트레인지의 상위 조직에게 얼굴 익혀지는 게 나쁠 일은 아니지만 이럴수록 신중해집시다."
"하긴, 즈도 게임이 아닌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총을 잡아본적은 있으니 그 말두 맞겠네여."
과학이 발전한 도시에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걸까, 아니면 과학이 발전했기에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걸까... 늘 고민하는 난제지만 결국 그녀는 항상 후자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실제로 맞는 이치라는 전제 하에 그녀라면 망설임없이 성악설을 고를테니까,
"큭... 역시 람보플레이 좋아한다구 해서 람보마냥 굴면 안되겠져..."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만큼 자신의 오점을 깨달은 순간 빠르게 잡을줄 아는 그녀였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평소 텐션을 되찾았다.
"아니, 그건 진짜 에반데여... 매달아서 회수할 때 들어가는 힘부터 이미 비효율적인데다가 회수 과정에서 끊어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실을 찾는 것 자체부터가 무리 아님까."
방금 전까지 스스로가 그 '비효율적인 행동'을 해서 졌는데도 불구하고 있지도 않은 안경을 올리는 시늉을 하며 이래저래 잔소리를 하던 그녀는 동월이 말하는 '자주성에 맡기겠다.' 라는 말에 잠깐 넋이 나간듯한 표정을 짓다가 인상을 쓰고선 바로 앞까지 저벅저벅 다가갔다.
"진짜 물어버릴 검다? 와구와구 물어버릴 검다? 머리를 밀어야지만 보이는 흔적을 남겨버릴 검다? 이 나이 먹고 자아찾기 여행 하는 후배한테 자주성을 논한다니... 슨배임 은근히 악질이네여."
꾹 다물었으면서도 살짝 튀어나온 입술, 새초롬해진 시선과 그에 맞춰진 눈썹, 눈동자에 살짝 내려앉은 붉은색이 누가봐도 '나 화났어요.'를 어필하고 있었다. ...물론 그조차 하나의 연출에 불과했기에 금새 풀려서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돌아갔으려나?
"사실 즈는 매운걸 잘먹는 편임다. ...같은거 말하면 밤꿀 맞겠져...?
흐음... 글쎄여... 머가 좋을가여..."
입가에 손을 가져다대던 그녀는 얼마 안가 무언가 떠오른듯 담담한 톤으로 한마디를 꺼냈다.
"즈는 사실 R&E라는 연구단체에서 자랐구 지금은 아이리스라는 곳에서 코어샘플이자 데이터 제공용 실험대상으로서 커리큘럼을 받고 있슴다."
마치 거인이 나오는 어떤 만화에서 한 등장인물이 뜬금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수준의 무미건조한 발언이었다.
>>780 “당신 뭔데 리라한테 그렇게 대해? 리라가 당신 감정 쓰레기통이야?” “리라가 4레벨 되기 전엔 어디 보이지도 않다가 슬그머니 나타나서 리라한테 빨대 꽂고 있는 주제에, 적어도 자기 담당 학생에게 최소한의 존중 정도는 가지지 그래?” “아 그래? 이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커리큘럼 진행하고 계세요? 그러면 학생 대하는 태도가 왜 그따위야? 당신 지금 당신 성질대로 안돼서 리라한테 화풀이하고 있잖아!”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빡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데, 리라는 너한테 그런 대접 받아도 될 사람 아니야. 누구도 다른 사람을 그따위로 대할 자격 없어.” “리라야, 이런 수준미달 인간이 너한테 감놔라 배놔라 하도록 두고 있었어? 너 그냥 4레벨도 아니고 4레벨 상위권이잖아. 담당 연구원 교체 신청은 쉽게 가능할 텐데?”
생명엔 지장없다 그걸로 괜찮을까 크든작든 후유증은 후유증인데 불안했으나 오래지않아 제 불안감이 터무니없다는걸 깨달은 서연이었다 감정을 조종한 당사자가 선배의 동생이다 까딱하면 자기손에 오빠가 잘못될지도 모르는 일을 허투로 했을라고? 누구보다 심사숙고한끝에 결정했을거고 능력을 쓰면서도 극도로 조심했을거다 제삼자인 서연이 이러쿵저러쿵할 영역이 아니었다
번잡스러운 속을 어찌어찌 정리해가는 가운데 의문이 드는 서연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침착했던가? 생각해보니 감정조종능력이 있다는 서현을 만난뒤부터 감정동요가 훨씬 덜한거 같다 나한테도 능력을 썼었나보네 이렇게 될줄 알기라도했나? 제갈량이야?? 이정도면 더더욱 달라질게 없겠다는게 확실히 와닿았다 이미 벌어진일을 내게도 알려졌을뿐이고 난 뇌의 이상이나 질병을 치유할수있는 능력자가 아니니 만에하나 사달이 나도 할수있는건 전혀없다 억지로 억지로 할수있는걸 꼽자면......... 서연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안경을 벗었다 내 존엄과 안녕이니 눈가리고아웅이라도 해야겠다
" 저 보육원출신이고요! 술취하면 울고불고짜는게 주사래고요!! 잘때 잠꼬대오지고 누가 말걸면 대꾸도 한대요!!! 먹을게 땅에 떨어지면 주워먹기도해요!!!! 보육원출신인건 상관없는데~ 나머진 어디 알려졌다간 얼굴들고 못 다니니 다른사람한텐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
눈에 뵈는게 없어지니 숨도 안쉬고 대대거린 서연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맥락무뜬금이었으나 그건 서연나름의 제안이었다 내 흑역사를 인질삼으라고 그럼 나도 오늘 들은얘기 감히 못떠든다고 워낙 머리좋은 선배이니 그 의미를 모르진않을거다 아니 모른대도 상관없다 그다지 밝히고싶지 않았을 속사정을 기어이 캐묻고만이상 나도 흑역사쯤은 까야 공평할테니
그러긴했어도 저질러버린일이 떨떠름한건 여전하다 특히나 더 열심히하는 사람이 많다는말은 이제는 가볍게 들어넘길수가 없었다 처음 들었을땐 본인이 할수있는만큼 열심히하고 있으면서 더더더 열심히하는 사람이랑 굳이 비교할필요 있겠냐고 단순하게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철현이 그렇게 말해온 연유가 비로소 이해될것같은 서연이었다 본인이 꼼수를 쓰고있고 그게 비겁한수라는 자괴감을 매순간 의식하고있는거 아닐까하고 그래서 입다물고있으려니 철현이 최대한 높은학교 높은과를 갈거란다 무려 인첨대얘기를 꺼내는걸로 보아... 무리하지않을수 없는 목표잖아!!! 머리가 띵해지면서도 그 까닭도 영 모르겠진않다 똑같은말 똑같은행동을 해도 대학간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일이야 바깥세상에서도 흔했으니 대학간판 못따서 서러울일은 없게 하겠다는거구나 이것도 내가 입댈수있는 영역은 못된다
그랬다가 축하인사에 서연은 안경을 끼고 다시 철현을 올려다보았다 여느때와 비슷한거 같으면서도 기분탓인지 착잡해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었다 이젠 삭이기도지겨울 울분을 속으로 삼키고있을까 문득 샹그릴라라도 먹었냐며 따지던 동급생들이 떠올랐다 그땐 나한테 왜 시비냐고 짜증만 냈지만 이젠 알겠다 그들도 억울하고 좌절감들고 허무했던거다 그렇게 울화통터지는 상황에서 상대의 성취를 축하한다고 말하는건 쉽지않은 일이다 적어도 난 어느금수저가 편의점얻어다가 알바도 쓰고 놀면 망하라고 저주하면 저주했지 절대 좋은소리 못한다 그러니 선배는 나같은 옹졸이와는 견줄것없이 배포가 큰 사람이지만...
" 아~ 또 너무 떠들었다 선배 주무셔야되는데!! 가요 가요~~ 얼른 가셔야 조금이라도 더 주무시죠!! "
히죽 웃어버리고 걸음이나 서두르는 서연이었다 당장의 최선은 선배가 쉬는거!! 서현도 그러라고 서연에게까지 능력까지 써준거겠지 그래서가 아니라도 이 선배가 자려고 누웠을때 마음에 걸리는거 하나없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대학진학에 성공하면 그렇게될까? 내가 알바를 구하면서부터 이 세상에서도 살아낼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은것처럼 선배도 그렇게될까? 모르겠다 그저 괜찮다면...
situplay>1597044289>386 situplay>1597044289>534 situplay>1597044289>611 situplay>1597044289>675 현재 점수 137점
혜우가 손을 잡았을 때, 성운의 손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는데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 못보여줄 거라도 보고 있었나- 하고 보면, 실종자가 아홉 명에 달한다는 저지먼트 단톡방의 전파내용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던 것뿐이었다. 성운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푸스스 웃고는, 먼저 쉬러 가자고 말을 꺼내어왔다.
성하제 내내 이러고 지내기만 하란 법도 없잖아- 15주년처럼 우리도 놀러다니고 해야지. 하고, 아까의 심각함을 마치 잔뜩 어질러져 있던 집안의 잡동사니를 발로 툭 밀어서 안 보이는 데에 숨겨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15주년 이후로 데이트랄 만한 데이트를 못해봤다. 누리랜드도 망했다. 성하제까지 망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불행이 임박했음을 몸으로는 느끼면서 머리로는 부정하고 있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처사다.
그 와중에 혜우가 손을 등허리춤으로 슬금슬금 뻗어오자, 성운의 허리가 움찔 하고 튀는 게 혜우의 머리며 손으로 다 느껴졌다. 성운은 눈을 질끈 감더니, 토라진 눈으로 혜우를 내려다보면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톡 쏘았다.
“···변태.”
# 진짜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성하제레스 재밌는떡밥이란 재밌는떡밥은 다놓치네 다놓쳐... (꺼이꺼이.)
"히히, 고맙습니다! 그럼 좀 자부심을 가져볼게요. 그래도 리라 선배님이야말로 대단하셨어요! 전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는데, 선배는 저보다 더 경험이 많으셔서 일전의 그 아저씨같은 사람들의 무서움을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도 최선을 다해 응전하셨구요!"
위험하다, 라. 확실히 위험한 상황이긴했지. 하필이면 나랑 리라 선배랑 같은 계열인데 훨씬 상위능력자잖아. 그래도 멋졌다고 들으니 쑥스러워서, 거기서 좀 벗어날 겸 부러 말을 조금 돌렸다. 진심이긴 하다. 내가 만일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 매콤하게 얻어터지게 된다면 저지먼트 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테니까. 그런데 같이 있기만 해도 서로 의지가 된다니. 그런 생각은 내가 고렙 친구 선배들한테만 할줄 알았는데. ...뭐, 서로의 무력이 어떻든 곁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되는 게 어떤 건진 안다. 하지만 선배랑 이렇게 이야기해본 게 처음이기도 하니까 불가해한거지.
말랑떡 북극여우 때문에 새하얘졌던 머릿속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해질 즈음, 리라 선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음, 죽고 싶어졌다. 선하야, 나 지금까지 애썼는데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의한 수치사 정도는 봐주지 않을래?한 순간 바보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곧장 선하가 꾸짖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기도 하고, 리라 선배가 뿌듯해해주셔서 그만뒀다. 뭐, 뿌듯해해주시면 됐지. 오, 그나저나 그려주신다니!
"정말요? 우와, 고맙습니다! 맨날맨날 갖고 다닐래요~."
아싸, 득템! 화백 이리라 선생의 말랑떡 북극여우! 작으면 가망에도 넣어다녀야지~ 싱글벙글하며 나도 빗자루를 들었다. 이야, 아직도 쓰레기 많네. 말랑떡 친구들이 곧 돌아올테니 모아서 종량제에 넣어두면 되겠지? 먼지와 함께 쓰레기를 한 곳으로 미는데, 선배가 마저 축제 이야기를 하신다. 선배도 구경은 아직이시구나. 그나저나 데이트라니! 맞아, 선배도 커플이시지~ 내일 오시는 나를 만든 백합 커플 두분도 생각났다. 아아, 벌써부터 눈꼴 시려.
"저도 아직요~ 그래도 곧 비번날이니까 시간 내서 돌려구요! 전 데이트는 아니고 데이트 하는 커플 사이에 끼게 되지만요, 히히. 그런 의미에서 부러워요!"
너무 미화된 이미지만 접해서인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해보고 싶긴 하다, 마음 맞는 사람이랑 연애하는 거. 그래도 어디서 본 건데, 우정도, 가족애도, 멀리 있는 이를 마음에 그리는 것도 다 사랑이랬다. 그러니까 나도 "사랑"은 하고 있기는 하지. 잠시 딴생각에 잠겨 열심히 비질을 하는데, 그만 귀를 의심했다. 헐, 나 완전 정신없이 말했는데 그걸 들으셨어. ...뭐, 안될 이유 있나!
유추해봤을 때는 신새봄이었다. 왜, 그 있잖아. 이미지네이션 쿠킹? 우리 부원들 중에서 먹을 거 만드는 부원이.. 신새봄이 뿐이니깐.
" 자기네들도 안티스킬이나 특수부대가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저러려고 한다니깐. 다들 피곤할 시간에 노린 것 같은데.. "
지금 이렇게 한양이 제압했지만, 근처에도 안티스킬이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굳이 한양이 아니었어도 잡혔을 놈들이지. 왜냐하면 지금 이 시기가 외부인에게 인첨공의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얼마 안 되는 기회거든. 그런데 이 디스토피아를 그대로 외부인에게 보여준다? 음음- 안 되지. 높은 분들이 가만히 있겠어?
" 어어.. 고마워. 나중에 먹을게. "
한양은 음료를 받긴 받지만, 크로스백에 넣어둘 뿐이었다. 사과와 용과는 그렇다고 쳐도.. 오이가 영 거슬린단 말이지. 오이는 생으로 잘 먹어도, 오이맛이라고 써진 것은 뭔가 거부감이 든단 말이야.
" 그나저나 요새도 운동하냐? 나는 넘치는 게 시간이라.. 할 게 산책하고 운동 밖에 없단 말이지. "
인첨공에 들어가기 전 원장님과 부원장님은 사실상 나와 동생이 다른 곳으로 입양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당신들의 아이들로 입양을 했다. 20살이 되어서 보육원에서 나가야하는 이, 사정이 있어 입양 될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나의 부모님은 그들을 친생자 입양한다. 그래서 등본을 때면 몇 페이지가 가득 채워서 나온다.
"너 술마셨냐?"
우사미 눈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아, 아니다"
첧현은 순간 아차 싶었다. 자신이 이런 은우 같은 소리를 하다니...
"마실 수도 있지."
혼자 큭큭 거린다.
"잠꼬대는 얕은 잠을 잘 때 하는 거야. 잠꼬대를 자주 한다면 숙면을 제대로 못 취한다는 뜻이니 자기 전에 가벼운 운동을 하고 암막 커튼을 사 보는 것도 좋아."
"먹을게 땅에 떨어지면 그냥 버려. 나중에 병원비가 더 나온다."
서연이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돌려준다.
"난 딱히 남한테 말해도 상관 없는데...네가 내게 한 말은...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꺼야."
그것은 게임의 람보 플레이가 아닌, 실제 잔투 상황에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동월은 한번 빡돌면 앞뒤 안재고 들이받는 성향이 있었으니까. 아, 그건 람보 보다는 가미카제가 더 어울리려나?
" 야야야 뼈 발라진다. 3000원 비싸지기 전에 그만둬. "
허점을 알고있다곤 해도 이렇게 제3자에게 두다닥 맞아버리면 아픈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의 팩트폭행은 조금 아팠다. 아무튼 애린이 나열한 이유들로 인해, 동월이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일은 아마 없겠지. 와이어건으로 저격하는 거라면 몰라도.
" 맞아. 나 악질이야. 물어버려도 할 말은 없지. " " 그래도, '자아찾기' 에 열중중인 후배님을 조금 도와준거라는 변명으로는 빠져나가기 힘드려나? "
화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앞에 다가온 애린에게 푸스스 웃어보이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다만 표정이 금방 풀린 것을 보면 연기와도 같은 무엇인것 같으니...
" 밤꿀 한대로 끝날 것이라 생각마라 토끼여. "
위협적으로 주먹을 들어보이고는, 이내 다시 내린다. 놀리는걸 좋아하는 애린의 특성상, 저 말도 아마 놀리기 위한 것이겠지. 실제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웃어넘길 수 있다.
다만, 그 이후에 꺼내어진 말은 어딘가의 우주 저편에서 들린 말 처럼, 드리프트 후 풀악셀을 밟은 수준의 진실이었기에 하마터면 동월은 들고있던 총을 떨어트릴 뻔 했다.
" .....뭐? "
그런 얘기를 그렇게 편안하게 한다고? 길가다가 점심으로 수르스트뢰밍에 올리브 오일을 뿌려 세제에 비벼먹자고 하는 것과 같은 량의 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다만 그것은 거기서 그쳤다. 원래 류애린이 어떤 아이인가를 떠올린 동월은 그것이 한 점의 거짓 없이 진실이며, 더 이상 감정 표현 자체가 무색할 정도 닳고 닳아진 것이라는걸 인지했다. 아니, 어쩌면 감정 느낄 수 없는 상태이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머릿속에 정제되지 않은 정보가 과다증량되자 잠시 미간을 손으로 짚어 마사지하던 동월은, 이내 입을 열었다.
" 뭐... 방금 놀라자빠질 뻔 하긴 했지만, 지금껏 널 만나면서 생긴 면역력 덕에 자빠지진 않았네. " " 그 '실험' 이라는건, 생명에 위협적이냐? 아니면 매일 다칠 정도로 혹사해? 하다못해, 정신적으로 널 몰아붙이냐? " " 하아...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사는 녀석이 그렇게 밝다는걸 보면, 존경스러울 정도네. "
동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잠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을 잇는다.
" 아무리 승자의 보상이라곤 해도, 그만한 정보를 들었는데 입 싹 닫고 뒤돌 생각은 없고, 뭐.... 아까 하려했던 얘기나 해줄까. "
이미 몇 명은 알고있는 사실. 다만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에게 동월이 직접 알려주는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 어쩌겠냐. 우리 법께서 그래도 주먹은 자제하리고 하시니. 법보다 주먹이 가깝긴 해도, 결국 마지막에 맞이하는 건 법이니. 이게 형벌이 확실하지 않아서 그래. 형벌이 가볍다는 얘기가 아니야. '확실'하지 않다는 거지. 지들은 조금 특별할 줄 안단 말이야. 나는 안 잡히겠지, 이 X랄. "
범죄를 저지르면 무조건 잡히고 처벌을 받는다는 것은 범죄자들에게 확실히 인지시켜야 돼. 그러려면 일단 범죄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체포해야 하지. 체포되면 예외 없이 누구나 처벌된다는 신호를 분명하도록 해야 해. 범죄자가 '나는 안 잡히지 않을까ㅎㅎ' 이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고.
" 근데 쉬불.. 우리들은 알잖냐. 조오올라아아게~ 거대하고 나쁜 놈들이 높은 분들이랑 유착관계라는 거. 내가 말한 걸 기대하면 너무 큰 욕심이지. 그냥 인첨공이 썩었어. 근본부터 잘못됐어. 우리 복면 쓰고 테러해서 외부인한테 인첨공 인식 박살내볼까? 누명은 그림자한테 씌우는 거야. 높은 분들 아주 개빡치게. 아주 대한민국 정부가 인첨공에 초집중을 하게 만드는 거야. "
물론 마지막 말은 장난식이었겠다.
" 우리 학구에서 슬슬 놈들 다시 설치니깐 그러냐? 아니, X발..4학구 진정시키니깐 왜 또 발작이야..미친놈들.. 아, 근데 이거 봤냐. 3학구에서 최근 다섯 명이 실종됐다던데. "
이상하게 여겨질 법도 한데 쫓아내지는 않는구나. 다행이다. 일행끼리 있는 테이블에 직원이 냉큼 앉는 게 희한한 짓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었는지 그런 생각을 흘려보낸 리라는 연신 생글생글 웃으면서 두 사람의 맛 평가를 들었다.
"그렇죠? 저지먼트에 요리 잘 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몇몇 디저트 종류도 만들어 팔고 있어요. 전 아니지만... 헉. 그런데 간이 강한가요? 주문이 많아서 실수했나?"
아니면 사람마다 입맛이 다른 걸수도 있겠지만, 제법 진지하게 고민한 리라는 어쩌나 하고 비단을 바라보았다.
"......서비스 드릴까요? 세트는 어렵지만 디저트 같은 거 단품으로?"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뽑아낸 최선의 선택지였다. 애초에 예행연습을 하던 날 프라이팬 하나를 화끈하게 해 먹고 주방 출입 금지를 당한 후라서 직접 들어가 다시 요리해 올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자몽 에이드는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니 다행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면 이내 음식을 마저 넘긴 성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5년! 엄청 오래 계셨네요. 그렇네... 그렇게 인첨공 주민이 될 수도 있겠구나. 원래 살던 사람들이 있으니까."
입주 신청을 하고 들어와 이제 겨우 1년 반을 넘긴 리라로서는 상상도 못 해본 세월이고 사유다. 하긴 이정도 범위의 땅이 처음부터 온전히 비어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엇, 아뇨. 전 연구원 쪽은 관심 없어요. 그게... 이게 좀 복잡한데... 잠시만요."
이윽고 리라는 옆을 지나가는 토끼 메이드 인형? 하나를 집어들더니 "휴게공간에 있는 유니콘 키링 달린 검은색 백팩 안에서 노란색 표지 노트 꺼내다 줄래?" 하고 말을 걸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게 제정신인가 싶을 기행이었겠으나, 의외로 토끼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종종거리며 저만치로 사라졌다.
"금방 올 거예요. 아, 그리고... 그런가? 보통 그런 일이 많나요? 하긴. 확실히 돈이 없으면 땅값이 싼 곳을 찾아가는 게 보통이긴 하죠."
그리고 토끼가 돌아오기 전 비단의 답변이 돌아왔다. 막상 이렇게 들으면 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랑이 언니가 웬만하면 스트레인지는 들락거리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어쩌다 돌아다니게 됐을 때도 엄청 평화로운 분위기는 아니었고, 일반적인 인식도 그렇고요. 그런데도 연구 기관이 들어선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구소라면 이래저래 왕래하는 사람도 많고 건물 내에 중요한 것도 많이 둘 텐데, 자리잡은 곳의 치안이 나쁘다는 건 악조건이니까요."
뭐, 금전 문제는 많은 걸 포기하게 만들긴 하지. 다른 게 아니라 정말 그런 이유인가? 거기까지 생각할 때 쯤, 무언가가 리라의 다리를 두드렸다. 자기 몸보다 큰 노란색 노트를 들고 온 토끼 메이드가 거기 있었다.
"고마워~ 잘 가! 아, 성환 연구원님. 이게 그 선생님 자료를 옮긴 사본이에요. 여기를 보시면... 애시르 연구소라고 있죠."
해당 노트의 중간 페이지 쯤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다소 악필이지만 그런대로 읽을 만한 글씨는 세월의 흐름이 묻은 듯 잉크의 색상이 다소 옅어져 있었다.
[ㅇ] [애시르] 운영 시작 시기: 인첨공 발족 직후 비고: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 존재. 특이사항 없음. 연구 성과는 평범.
주소: 인천첨단공업단지 제 2학구 00로 000길 00 연락처: (12년 전 애시르의 공식 연락처)
그리고 그 아래, 유난히 더 날려 쓴 악필로 적힌 추가 메모가 있다. 다른 문장들보다 최근에 쓰인 것처럼 진한 검은색 글씨로 적힌 메모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 생존본능과 능력 계발간의 상관관계 ㄴ발표자는 애시르 연구재단? 신생인 듯 ㄴ이론의 기본 전제가 능력 계발의 대상이 되는 학생에게 다소 위험하지 않은가? ㄴ과거 애시르 연구소와 이름이 같다. (둘이 관련 있는지는 ?) .hr
"원래부터 이 연구소랑 연구재단 일을 궁금해 한 건 아니었어요. 로벨이라는 옛날 연구소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이걸 보게 된 건데, 발표한 이론이 위험하다는 메모를 보니까 좀 느낌이 안 좋아서요."
그 말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종이 끝을 손톱으로 누른다.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는 별다른 해결책도 실마리도 잡지 못했으니까.
"굳이 이런 걸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친구랑 친구 동생 같은 애가 연구소 관련으로 힘들어하는 걸 봐서 시작한 거거든요. 공식적으로 지금은 없어진 연구소라는데 말하는 걸 보면 아직 어딘가에 있는 것 같고,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협박 당하는 것처럼 구는 게 이상해서 신고를 넣을래도 어디 있는지 뭐 하는 데인지도 모르니까..."
그 와중에 알아본답시고 받아온 수첩 내용 중 눈에 밟힌 게 하필 이거였다.
"비슷한 찜찜함이 느껴져서요. 아닌 것 같다면 다행이지만요. 요즘 일이 많다보니 안 좋은 쪽으로 의심이 늘어서... 음, 쉬러 오셨는데 어쩌다보니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많이 해 버렸네요.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뭐 상관없나. 이 소란한 곳에서 잘 들리지도 않는 내 목소리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다만 이걸 다 들어준 사람들에게 미안한 건 어쩔 수 없다.
"저도...직급은 절대 달고싶지 않아요...평부원 만만세..." 진짜, 지금 그냥 부원인 상태에서도 이렇게 바쁜데, 만약 직급까지 단다고 한다면...뒷감당이 전혀 되지 않는다. 진짜 죽어도 감투는 안쓰고 죽어야지. QU'ART'Z운영하면서 알았어. 난 조직 관리자랑 안맞아.
"본인입으로 응애라니!"
큭큭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한양선배를 바라본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진짜 머나먼 세월이네. 이제 기억도 잘 안나. 6살. 지금 내가 6살 먹으면... 대학을 졸업하잖아?! 맙소사!
"뭐어...뭐어어어... 사실 그냥 대가리를 깨면 되지 않나? 같은 이야기 하실줄 알았거든요.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니까 논외야~ 라던가."
뭐 그런 냉혈한은 아니라는걸 알고는 있지만... 서한양의 스트레스 40퍼센트는 저지먼트 50퍼센트는 스킬아웃이나 기타사건에서 오는것처럼 보이니까. 적어도 바깥사람이 보기엔.
"애...죠. 애처럼 굴고싶은데. 가만 놔두질 않네요."
한숨을 푸욱 쉰다. 스킬아웃, 저지먼트, 암부, 그림자, 유니온, 크리에이터, 은우, 철준, 아라, 보라. 수많은 이름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젠 살짝 쉼터같은 느낌이였던 스트레인지도 너무나 큰 변화가 생겨서.
지금은 수경을 포함한 몇 명의 쉬는 시간입니다. 수경은 잠깐 휴게할 수 있는 공간에 앉아있었습니다. 집사복의 상의 단추가 좀 애매했는데.. 한두개가 끌러져 있습니다. 접대를 하다 보니까 조금 더웠던 모양입니다. 살짝 기댄 다음에 부채질을 한 뒤에는 바로 잠글 생각인가 봅니다. 누군가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본인이 피하면 가능한 일이니까요.
"....조금 힘드네요." 휴 하고 한숨을 쉰 뒤, 단추를 잠그고는 업무를 도울까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앉아있고 싶은가 봅니다...
잘 알지. 리라는 봄에 겪었던 퍼스트클래스 3위의 능력을 기억하고 있다. 지반이 뜯겨져 올라가고, 중력이 뒤틀리고, 밟고 있던 땅이 솟구치더니 운석이라도 된 것처럼 쏟아져내려 친구들을 덮쳤었다. 은우 선배님을 포함해서 레벨 3 이상인 사람이 4명이나 있었는데 그 모두를 합쳐도 상대조차 되지 않았지. 끽해야 발목이나 조금 잡았을까. 그래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은우 선배님은 레벨에 구애받지 말라고 말했지만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아무래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볼수밖에 없으니깐 말이다. 그렇다 해도 예전처럼 혹사시킬 생각은 사라졌지만. 왜냐면 나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고, 필요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믿어준다면 믿음을 줘야만 한다.
"데이트 하는 커플 사이에 낀다고요? 어쩌다가? 뭐, 새봄 후배님이 즐거우면 된 거지만요. 재밌게 놀았으면 좋겠네요. 시간 되면 공연들도 보고요. 이번 성하제 공연에는 저지먼트 사람들도 많이 올라가요. 성운이랑 혜우 후배님은 연주회를 한다고 했고, 태오 선배님도 댄스부 스페셜 게스트로 무대에 서 주세요. 물론 저도 있고요."
커플 사이에 끼는 건 세 사람이 떼어놓고는 못 살 정도로 친밀할 때나 가능한 건데. 물론 그렇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어쩌다 그렇게 돌아다니게 되었는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어째 이쪽은 그 커플이 보호자들이라는 생각은 하질 못하는 모양이다.
"응, 고마워요. 그럼 새봄이라고 불러도 될까? 잘됐다. 기본적으로 후배님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편하게 부를 기회 있으면 편하게도 부르고 싶었거든.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그런 게 있잖아. 그치?"
아, 여긴 대충 다 쓸었다. 마침 말랑떡 북극여우들도 쓰레기통을 비우고 돌아오고 있었고. 리라는 한쪽의 비질을 끝낸 후 돌아온 북극여우들을 깨끗해진 바닥에 가지런히 세워둔다.
"아까 주방 마감조가 설거지는 해두고 갔대. 흐음~ 이제 여기만 쓸고, 주방 쓰레기 북극여우들한테 버려달라고 하고, 정리하고 나가면 될 거 같다. 피곤하면 뒷일은 나한테 맡기고 먼저 가도 되는데 어떻게 할래? 괜찮겠어?"
" 그러니깐. 방금 꺼는 극단적이긴 했지만, 좀 더 순화시킨 방법으로 정부가 인첨공에 집중을 빡세게 하게 만들면.. 이거 와꾸 좀 짜면 완벽히는 아니어도, 뭔가 유효타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
사실 부원들에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서한양은 이번 성하제를 인첨공의 민낯을 바깥으로 제대로는 까발리는 것은 아니어도 말이야.. 적어도 의혹을 가지게 하고, 대한민국의 높은 분들이 인첨공의 높은 분들을 가지고 뒤흔들 계기가 생기게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근데 인첨공이나 대한민국이나 서로 같은 스탠스면 망한 거고.
하, 나도 참 거만했네. 4학구 시민들 좀 움직인 거 가지고 너무 자만했어. 어떻게 학구 단위에서 국가 단위로 스케일을 확 넓히냐. 말이 되는 생각을 해야지.
" 적어도 이번에는 그림자의 소행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단 말이지. 나도 이제 오랜만에 빡일 좀 해볼까? 할 것도 없는데. 한번 깊숙하게 캐보고 싶은데. "
이거 말고도 다른 일도 일어나던데.. 무슨 뭐.. 이상한 약을 파는 움직임도 있어. 꽤나 조직적이지. 저레벨자를 잡는 능력자 집단이 스트레인지에 있다고 하고.
눈가리고 아웅하려고 감았던 눈이 뜨였다 시력이 나쁘니 그래봤자 뭐가 보이진않는다만 그렇게 얼빵해진얼굴로 눈만 깜박이는 서연이었다 그치만 동생이 있... 멍한속에서 튀어나오려던 의문이 이어지는 얘기에 흩어졌다 그래서 동생도 있구나 엄마아빠라고 부르는 분들은 아마도 원장님들일거고 그런호칭이 입에 붙었을정도면 찐가족이겠다 우리보육원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네 어느쪽이 낫다 못하다할건 아니다만
그럼 퇴소걱정은 없었겠고 가족모두가 인첨공에 왔나? 아니 그보다 비밀얘기(???)를 더 들어버리면 흑역사를 까발린 보람이 없는데;; 이제까지의 불안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부드럽게 얘기해주는 철현이 훈훈하게느껴지면서도 이건 서로의 비밀을 아주 끝장나게 까발린뒤 무덤까지 갖고가자는 협약인가 헷갈리기시작한 서연이었다
" 어... 중3때요 애들 붙들고 울고불고 난리피우다 영상으로 박제된뒤론 안 마... "
...는 또 흑역사!!!!!!!!!!!! 쪽팔려... 무덤이 아니라 지금 서해바다로 가져가야겠는데? 슈트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것처럼 벌겋게 익어버린 서연이었다 그나마 선배가 묘하게 현타가 온듯했다가 웃고 넘어가줘서 한시름놨다
그러나 생각도못했던 진지한조언에 저항없이 눈물이 솟고말았다 보육원을 떠난뒤론 들을일없었던 들으리라 기대도 안했던 평범한걱정들이라. 서연은 눈을 힘껏 비비며 고개를 돌릴수밖에 없었다
" 피~ 병원비 따지실거면 선배부터 제대로 주무세요!! "
훌쩍이는가운데 짐짓 입을 삐죽이는데 어랍쇼? 저기요? 아이고 골이야 제 머리를 탁 치고마는 서연이었다
>>923 폭푸오도 같은 업무를 마치고 얻은 잠시간의 휴식시간! 축제가 어쩌니해도 이쪽 학구는 거의 오지도 않았던데다 학교에 이르러서는 아직 외부인이라는 느낌이 강한터라 어디 갈 곳도 없어 보통은 비어있는 공터를 찾아가 배팅연습을 히거나 친구 몇과 캐치볼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는 했지만 아뿔싸, 마침내 찾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메이드복 입고 배팅연습을 하던걸 누가 찍어 올린탓에 갈만한 곳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솔직히 부끄러워! 야구는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 게다가 친구들도 오늘은 다 일하고... 그러고보니 휴게실이 있던가? 뭔가 사람이 적어보이는 곳이 보여서 눈이나 좀 붙일까하며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942 잠깐의 침묵, 그리고 뭔가 어색한 인사. 우와 아니 이거 무조건 들킨거잖아. 표정이 무슨 못볼꼴 본것 같은 표정인데 이건 이거대로, 아니 뭔소리고. 일단 웃자, 스마일 스마일. 이럴때는 우짜면 좋노 생각이 안난다!!!!!! 분명 쌤이었으믄... '목격자가 없으믄 수치심도 없는기다.' 생각보다 훨씬더 도움이 안되는 쌤이었네. 연구원은 우얘 된기고. 내가 더 멀쩡하긋다. 그렇다면 역시 내안의 목소리를 따르믄 되것지... 그래!!!!!
남성은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속내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태오라면 남의 본성을 누구보다 능수능란히 끄집어낼 수 있겠지만, 혜우는 이 가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테지. 하지만 그 느긋함도 아주 잠깐 흔들리니, 대체 한결의 존재가 저 남성에게 무엇으로 다가온 건지.
"그렇죠."
분명 잘 부탁한다는 뜻이, 그런 감정을 품으라는 건 아니었을 텐데. 퍽 아끼고 인생의 절반이나 바친 동생이라 무얼 하든 그간 고생한 값이니 마음대로 해보거라 했건만, 이리도 영악할 줄 누가 알았나. 아니지, 내 동생은 영악한 녀석이 아니지. 남성은, 서휘는 제 동생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여리고, 감수성 많고,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내 동생. 고운 꽃만 보고 자라게 한 그런 아이가 태오처럼 사연 많고 위태로운 사람을 보면 동정심을, 나아가서 사적인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남성은 당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흥미로우니 더 얘기해보라는 듯. 그리고 태오의 이야기를 듣더니만, 깍지 낀 손의 중지 하나를 툭 들더니 내려놓았다. 태오가 으레 생각에 잠기면 검지를 두들기듯, 중지를 두들기는 간격이 느릿하다.
"……우리 혜우 학생은-"
어디선가 우당탕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힐을 신고도 요란하게 달려어는 소리와 함께 서빙을 하다 말고 달려온 것은 태오였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뒤에서 남성의 머리를 대뜸 끌어안더니 눈을 가리고, 파르르 숨을 내쉬었다. 헐떡이는 숨이 체력을 다 쏟은 듯싶다.
"제 동생이에요." "알아, 귀엽기만 하구만! 이런 당돌하고 귀여운 애를 왜 지금까지 숨기고 그래. 진작 소개 좀 시켜주지." "동생이에요……. 동생."
바르르 떨리는 손을 뒤로 태오가 혜우를 향해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다 괜찮아. 놀랐지. 뭐라고 했어?" 하는 걸 보니 뭔가 단단히 오해한 듯싶다. 괴롭힌 건 혜우인데, 핀잔 듣는 건 서휘다. 세상 억울하단 표정으로 태오를 슥 올려다 보는 눈길이 뚱하다.
산리오풍의 깜찍한 봉제인형같은 토끼들이 앙증맞게 움직이며 카페 안을 청소하는 걸 보면, 누구나 당연하게 나올 반응이었다. 성운도 예외는 아니었고. 일손까지 줄여주는 덕분에 성운은 주방 업무에 잔념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성운은 또다른 쉬는 시간을 혜우가 불러낸 토끼들의 머리를 복복 쓰다듬어주며 보내기로 했다. 이 토끼들도 제 할일이 끝나자 쉬러 오는 건지 성운의 주변으로 두서너 마리씩 몰려드는 게 폭신하고 좋았다.
다만, 한 마리 데려가도 되냐고 물었다가, 녹아없어지는데 괜찮냐는 리라의 설명에 성운은 그만 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그게. 불쌍해. 차라리 토끼별로 돌아간다고 하고 뾰로롱 하고 빛나면서 사라지게 하지···”
>>946 봤지 귀여웠어 아니 근데 급 동심파괴 뭐냐고ㅋㅋㅋㅋㅋ이혜성 동심 두번 파괴당해서 부스러기 됐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아봐도 된다고 하면 쓰담하다가 약간 애기들이 인형 안듯이 안아듬 오너는 묘사할때마다 죽을 것 같은 모먼트지만 이혜성 막내임.... 못가져가는 건 좀 심룩하고 그럼
정인의 눈동자가 아래로 훅 떨어져 자그마한 소년을 바라본다. 하얀 머리에 보랏빛 도는 눈동자가 누구랑 비슷한 것이 혹시 제 담당 학생의 친척 동생이라도 되나 싶었는데, 인첨공에서 눈과 머리 색으로 관계도를 따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익히 겪어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신변잡기는 그쯤에서 그친다. 대신, 정인은 성운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말을 가리시죠. 가망 없는 학생 붙들고 매일매일 커리큘럼실에 나와있었는데, 학생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빨대를 꽂는다느니 하며 깎아내립니까?"
"내가 왜 화가 났냐고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요. 대단한 것도 아니고 간단한 커리큘럼과 검진을 위한 약속이었는데 하루 종일, 연락도 받지 않고, 그렇다고 한번 와보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언질 주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새벽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놨으니까요."
직접 찾아나섰다면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그 시간을 지난 시점에서 짜증은 임계점을 돌파했다. 그래, 어떻게 보면 화풀이가 맞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겠죠. 연구원 입장에 서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신경쓸 부분이 많은 까다로운 담당 학생이 얼마나 심력을 깎아먹는지 당신은 아마 모를 겁니다. 내 인내심은 꽤 예전부터 깎이고 있었고, 그게 터진 게 오늘일 뿐입니다. 감정에 휩쓸려 장소를 가리지 못한 건 인정하겠지만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사정도 모르고 교체를 운운하는 건 기분이 더럽군요."
물론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비약이 심하겠지만... 최소한 저지먼트 생활을 하면서, 괴이부 생활을 하면서 그녀가 봐온 동월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면서도 정작 필사적인 상황이 될때는 본능적으로 달려가는 성격이긴 했다.
물론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있고 해결책이 있으니 그녀가 무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괜찮아여. 3천원 비싸진 순살슨배임이라두 사는 사람은 있을검다."
여전히 영문 모를 말이려나.
"흐응... 항상 그렇게 변명이라면서 받아치기 어려운 말을 하는게 짓궂은 검다. 그래서 악질이에여.
아, 그치만 역시 밤꿀은 한대 이상은 안됨다. 아이 돈 원 투 다이."
푸스스 웃어보이던 동월이 이내 위협하듯 손을 들어보이다 다시 내리자 그녀는 헐,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두 손으로 착실히 정수리를 가리려고 했다. 벌써 하루에 두번이나 찌그러졌으니까,
"? 놀라자빠질 뻔한건 방금 총 떨굴뻔한 슨배임을 본 즈임다. 그나저나... 그런 걸로도 면역력이 생김까? ...아, 처음 만났을때 슨배임이 쇄빙기로 게시판을 뚫어버리고서 숨겼던 일을 생각하믄 즈도 생겼을지두 모름다. 그 면역력이란거,"
물론 아무리 자주 보고지낸 사이라 해도 방금 자신이 꺼낸 말은 아무리 인첨공 사람이라고 해도 다분히 충격받을수 있는 발언이었던데다 동시에 경계할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동월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최소한 뒤이어 들려온 말을 생각하면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뭐... 따지고보면 전부다 맞기도 하구, 아니기도 함다. 과학이란게 다 그렇잖아여. 쉽게 해결되는게 있음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는거여. 음... 그래도 즈 역시 인간이니까 마냥 밝을 수만은 없겠지만서두... 슨배임 이야기대루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두 밝게 사는게 힘들단건 부정할수 없긴 함다. 그래두 이런 곳에서 힘든건 즈뿐만이 아닌데다, 지난 일을 계속 곱씹어봤자 득이 되는건 별루 없으니까여."
그런걸 보고 담담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깎이고 깎여 더이상 날이 들지 않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없던 감정인만큼 금방 휘발되어버린 걸까... 그녀는 아직 거기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헤에... 슨배임두 역시 꺼내는 검까~"
가늘게 뜨여 둥글어진 눈매가 잠깐 당신을 주시하다 자신만큼이나, 어쩌면 자신보다 더할만큼 어떤 감추는 말도 없이 간결하게 내뱉는 동월의 이야기에 그녀는 어느새 그녀가 지칭하길 '보통'의 표정이라 하는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와, 진짜 아무렇지두 않게 살인고백을 하시네여. 쇼크..."
물론 그녀는 동월이 어떤 이유였건간에 괴이는 고민없이 죽이면서도 '사람'만큼은 쉽게 죽이려들지 않는단걸 알고 있었다. 말버릇처럼 썰어버린다고 일갈해도 어디까지나 썰 뿐이지 죽인다고 대놓고 말하진 않듯... 그랬던 모습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고백이었기에 그녀는 검지를 뻗어 자신의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그치만 그거... 왠지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라고 들리는거 같은데 말이죠?"
어느새 푸른빛이 맴돌아 더이상 보라색이라 부를수 없게 된 시선이 동월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974 승엽주 와우!! 이거 의왼데요?? 냉동고 유지하는동안 승엽이가 다른일을 전혀못할거라 알바꼬이고해서 수당은 꼭 받을줄 알았거든요 좋은후배다 정말 톡톡히 쏴야겠어요 나중에 따로만나서 그때 정말고마웠다고 덕분에 살았다고 situplay>1597044289>412에서 언급한 지원금으로 비싼밥이라도 사야...!!!
그녀는 리라가 만든 메이드토끼 부대에 정신이 팔려 감자 껍질을 깎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굳이 만지지 않아도 알것 같은 복실복실함, 뚜방뚜방 발걸음을 옮기는 앙증맞은 움직임, 크기가 전부가 아닌 성실함까지... 물론 그녀에겐 함께 살고 있는 토끼가 가장 귀여웠지만, 그렇다고 저런 뽀쨕한 생명체들에게 귀엽지 않다 할 냉혈한도 아니었다.
>>959 "아 맞심다. 이야 동경하던 곳에 와가 쬐까 당황하기는 했는데 다들 좋은분인것 같아가 안심했다 아입니까!"
...아무렇지 않은걸 보니까 진짜 못들은기가?! 그라믄 된긴데. 음, 좋네. 그라믄 됐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호감을 좀 쌓아둘 필요가 있는기니까!
"뭐 이런 일은 익숙해가 할만하네예. 이래저래 손뻗은 일이 많아가 어렵지는 않심다."
진상응대는 쬐까 힘이 빠지지만예! 하고 웃으며 말하고는 선...배? 가 맞곘지. 대부분은. 아무튼 가르키는 쪽을 바라보니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제. 그렇지. 이럴때는 바로 준비해야지! 빠르게 뛰어가서 간식거리와 물을 트레이에 담아 선배에게 가져다드렸다. 이런거라면 어쩔 수 없지!
"선배님은 좀 어떠신데예? 다른 분들도 그렇고 다들 잘하시는 것 같아가 내는 맨날 감탄의 연속이기는 한데 쬐까 불편한거라도 있으시믄 그래도 굳은일은 해본 사람이 나을테니께 뭐든지 말해주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