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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목소리에 한순간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이 상황이 두려웠고 버거웠으며 더 이상 서 있기 어려울 만큼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두고 혼자만 도망칠 수는 없다. 절대로.
리라는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 옆구리에 낀 스케치북을 천천히 넘겼다. 그림들이 떠나간 백지들을 뒤로 하면 마지막 장에 가까운 위치에 각종 동물들이 가득 그려진 페이지가 보인다. 철현 선배님이 안테나 쪽에 계신다고 했지. 내가 당장 똑바로 움직일 수 없다면 지원군이라도 보내야 한다. 리라는 종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변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커다란 비둘기의 날개, 상아가 길게 늘어진 코끼리의 얼굴, 그러나 코 대신 독사가 늘어져 있는 거대하고 기괴한 생명체가 스케치북 안에서부터 기어나왔다. 리라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각자 다른 종류의 다리가 여러 개 달린 괴생명체를 바라본다. 이게 뭐지? 내가 실체화 시키려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한번도 이런 식으로 능력이 전개된 적은 없었는데!
그러나 적어도 그 자신이 만든 생명체란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다. 축축한 눈동자로 명령을 바라듯 리라를 마주보고 있었으니까.
"......안테나로 가. 철현 선배님 도와줘."
목소리를 들은 즉시 괴생명체는 안테나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오른다. 정확히는 기관총이 있는 곳으로, 철현이 달려나가는 것을 탄환이 막지 못하게끔 몸으로 막고자 한다.
제 어깨를 감싼 손등을 두드리다가 이내 전체를 쓰다듬으며 혜성은 가늘게 눈 뜨고 즐거워하는 유니온이라 불린 목소리를 들었다. 줄곧 지끈거리던 신경성 두통이 가라앉았으나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하게 흐르는 중이다. 연산 방해를 하려는 건지, 목소리는 아까부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그러게.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
근데 그게 전부 헛소리네. 녹색 사이버 공간에 소리가 만든 색채들이 가득하다. 토할 것만 같은 색채들의 향연이 어지러웠지만 혜성은 눈썹 한쪽을 슬그머니 치켜올리며 탄식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여전히 금의 손등을 쓰다듬고 있다가 손 엮어 잡으려하며 다른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철현아. 피해."
짧고 간결하게 혜성의 목소리가 이어셋으로 흘러들어갔다. 어지럽게 흩어져 세계를 물들이고 있는 색채들이 크게 흔들리고 또다른 색채들이 뒤덮힌다. 음파의 진동을 초음파로 바꾸는 연산을 중간에 바꿨다. 초음파가 진동하며 거대한 칼날이 되어 눈으로 식별 가능한 위치에 있는 안테나를 향해 쏘아졌을 것이다.
현재 4학구에 위치한 서한양. 그의 눈에도 보였다. 당연히 안전가옥은 4학구에 있었기에, 보였겠지. 크리에이터의 안전가옥에서 한 안테나에 전류가 계속해서 모이고 있다는 걸. 서한양은 아직 안전가옥에서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아저씨는 참.. 힘도 좋아. "
한양은 안전가옥에서의 상황을 모르기에, 크리에이터가 아직 날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렇다고 한양이 움직이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서한양은 4학구의 건축자재공급업체에 갑작스럽게 침입하고서는, 사장에게 5만원권들이 묶인 현찰을 주고서는 말했다. 가득 묶인 정도는 아니고.
" 좀 사갑니다. "
혹시나 민간에서 물건을 급하게 살 때가 있을까봐, 이렇게 현찰을 준비해두고 다녔다. 한양이 업체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물건은.. 바로 알루미늄으로 구성된 합판이었다. 알루미늄은 접촉한 전류를 흡수하고 분산시키기에, 저 안테나의 전류에 닿으면 상당히 많은 전류를 분산시키겠지. 서한양은 상당히 많은 알루미늄 합판들과 함께 공중에 둥둥 뜨며, 안전가옥의 안테나에 조준했다.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짜내서, 안테나를 전부 덮고도 남을 합판들을 총기마냥 안테나를 향해 쏘는 것처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합판 자체의 중량과 한양의 염동력이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속도. 공중에서 제법 묵직한 발사음이 들렸고, 합판들은 안테나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아예 안테나를 부러뜨리면 좋고, 부러뜨리지는 못해도 알루미늄이 닿은 전류를 흡수해서 안테나의 전류를 분산시켜버려도 좋고.
붉고 푸른 안광이 번뜩였으니, 금세 꺼지지 않을 듯했다. 아무리 본분을 지키고 조심해도 상대는 우리를 죽일 생각뿐이다. 원치는 않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오직 힘뿐이니.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금은 다스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에 상대를 막고, 짓밟을 생각이었다. 안테나를 노려보며 발화 에너지를 모을 때, 자신의 근처로 다가온 안드로이드가 발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에 머리를 밟아 내고서, 금은 혜성의 귀에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조금 뜨거울지 모르지만. 참아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원활하게 안테나를 공격할 수 있게, 쏟아져 나오는 안드로이드를 바라보며 발화 에너지를 모아 터트리려 했다.
안드로이드가 있으니 정신이 자꾸 그쪽으로 팔린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태오는 애써 안드로이드에서 눈을 떼고자 했다. 저 안드로이드 중에서 한 체만 제대로 가져가서 이리저리 뜯어보고 싶단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려 든다. 저거, 얼굴이 실리콘인가? 아니면 신소재? 어떻게 되었든 사람을 닮은 걸 보니 모델 자체는 꽤 잘 만들어진 것 같은데, 그러면… 아, 젠장. 태오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런 잡념도 읽힐 것을 잘 알았다. 본디 텔레파시나 독심술사 특유의 망상 있지 아니한가. 내가 들여다 보니, 남도 들여다 본다. 다만 지금은 실제로 들여다 보리라 믿었다. 그렇다면.
"그 목숨을 버리게 만들 이유도 없지요……. 도망치게 만들어 놓고, 도망치게 돕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발언이에요."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오늘 찢어지러 온 사람이다.
"이 상황, 재미가 없다 하였지요. 그러지 말고 참을성을 조금 가져보는 건 어때요……? 내 제안할 것 있는데."
잠금장치는 창문에 되어있는 것이었고, 새하얀 창문 틀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산발이 된 치렁치렁 하얀 터럭으로 온 몸이 뒤덮인 조그마한 동물 같은 게, 손을 뻗어 창틀을 짚고 있었다. 그것의 손은 이내 창틀로 뻗었고, 이내 드르륵, 하고 창문이 열린다. 그리고 난간을 넘어오는, 운동화 신은 발.
운동화?
저것은 사람이다. 퍽 키가 작아, 초라하고 비루한 아이.
그것은 남루한 옷을 입은 채로 품속에서 차갑게 빛나는 무언가를 빼어들며 소리없이 난간을 타넘었다. 그리고 그것은 좀더 주도면밀하게 이 난간을 넘어가려고 했으나- 그 모든 것에 우선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신없이 두 발을 털어 운동화를 한구석에 내팽개쳐버리고는, 한손에 방금 품에서 빼어든 단단한 것을 거머쥔 채로 양말바람으로 급하게 난간에서 뛰어내려 거실에 안착한 뒤에 발뒤꿈치를 들고 급히 달려갔다.
거실 한복판에 나동그라진, 마치 심해 깊은 곳에서 건져올려다 그대로 마룻바닥 위에 내동댕이쳐놓은 심해 생물이라도 되는 듯이 처절하고 비참하게 좌초해 있는 무언가가 그것이 내달리는 방향에 누워있었다. 그것은 급히 그 바닥에 널부러진 무언가에게로 달려가, 맥박이 정상인지 짚어보고 어깨를 쥐고 몸을 뒤집어도 보고 팔이나 다리에 상처가 없는지도 분주하게 살펴보았다. 그것이 그렇게 소리없이 분주한 동안, 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먼지 한 톨도 빠짐없이 천천히 허공으로 한 뼘 정도 둥실 떠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없다. 이것과, 이것이 찾아온 이 집의 주인 말고, 다른 이는 없다.
그 사실을 확인한 그것- 아니, 그 사람은, 그제서야 자기 한 손에 들려있는 연장인지 기계인지 모를 것을 거머쥐어 딸깍 소리를 낸 뒤에 그것을 품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후우────” 하고 길게 내뱉는 호흡. 안도의 한숨. 그러나 그것은 다른 안도의 한숨들이 그러하듯이 자연스럽게 끊어지며 사그라지는 결말을 맺지 못했다. 그 대신에 그것은 조금씩 일그러지며, 덜덜 떨리는 호흡소리가 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우··· 우윽, 우으으.”
사람이 낼 만한 소리는 아니다. 짐승이 낼 만한 소리도 아니다. 어느 곳에도 쓸모없는 무가치한 것에게 딱 어울리는 소리다. 볼썽사납고, 볼품없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소리.
울음소리였다.
바닥에 까무라쳐 있는 이가 혹시나 잠에서 깨버릴까 봐, 소리 하나도 마음대로 내지 못하고, 속 시원하게 울부짖지도 못하고, 우는 것마저 마음대로 할 자유 없이 소리죽여서 우는 이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신음소리가 나직이 공기를 울렸다.
빠져나올 길이 없는 거야? 빠져나올 길이 없는 거지? 이제는, 빠져나올 길이 없는 거지···?
안드로이드는 계속해서 모여왔고 저지먼트 아이들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은우는 풍압으로 안드로이드를 날려보냈고, 아라는 물을 모아서 그대로 고장냈습니다. 어디 그 뿐일까요. 금은 발화 에너지를 터트려서 파편이 여기저기로 튀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이어 수경은 그 파편이나 다른 안드로이드를 모아 워프시켰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계속 생성되어도 안드로이드에게 다른 이들이 붙잡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어 태오의 말이 끝나자 유니온이라고 불리는 이는 슬며시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물론 다른 이들 모두에게도 들렸습니다.
"제안? 뭔데? 덧붙여서 널 찢을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뭐라고 하는지는 들어볼까? 한번?"
유니온의 관심을 조금은 끌어낸 모양입니다. 그 사이에 다른 이들은 하나하나 안테나를 노려서 공격했습니다. 수경이 워프한 안드로이드와 파편은 안테나 윗부분에 명중했고 스파크가 튀는 곳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어 한양이 도착했고, 합판을 날렸습니다. 합판이 명중, 또 명중. 그대로 안테나가 천천히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기관총이 일제히 안드로이드가 튀어나온 위, 그리고 합판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서 총알을 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철현이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입니다. 철판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으니 일단 닿지 않도록 합시다.
이어 혜성이 초음파를 진동시켰고 그것을 칼날처럼 안테나에게 발사했습니다. 이어 안테나가 싹둑 잘려나가고, 리라가 만든 생명체는 괴성을 지르며 기관총을 완전히 뽑아냈습니다. 안테나는 그대로 털썩 아래로 떨어졌고 안테나가 있던 곳에서 붉은색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붉게 달아오르고, 스파크가 그곳에서 튀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게 에너지 코어인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직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것을 저지하면 이제 정말로 모두 다 끝이라고... 딱히 위험해보이진 않지만 스파크가 강하게 튀고 있습니다. 이어 은우는 그 모습을 확인하며 모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 에너지 코어. 얼핏 봐도 막강한 에너지가 담겨있어. 잘못 공격하면 이 일대가 모두 날아갈거야. 자칫 잘못하면 모두의 목숨이 날아갈지도 몰라. 그 정도의 막강한 에너지 기운이 느껴지거든."
ㅡ응답해라. 크리에이터.
그 순간, 연구소 안 쪽, 정확히는 혜우가 있는 곳의 벽에 달려있는 소형 무전장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노인의 목소리였습니다. 아마 혜우가 이곳에 없었다면, 저 무전장치를 발견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ㅡ에너지 코어가 노출된 것 같은데 어떻게 된거냐. 크리에이터. 응답해라. 응답해라. 어떻게든 장치를 사수해!
그 목소리는 상당히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입니다. 아무래도 이곳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ㅡ발사를 잘 해놓고서 왜 막히고 있는거야! 응답해라! 크리에이터! ㅡ왜 아무런 말도 없는거냐! 크리에이터!
아니. 어쩌면 발사를 민호가 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단 방송처럼 울리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도 모두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어 은우는 그 목소리에 살짝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차피 이대로 두면 터질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 죽게 되겠지. 그래도 날 믿고 저 코어를 공격해! 우리 모두..살아서 돌아가고, 4학구를 위험 속에서 해방하고 돌아가자!"
은우는 전원에게 공격을 지시했습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입니다. 에너지코어를 날려버립시다.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나도록. 물론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쳐도 괜찮습니다.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할 수 있겠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데?" "나라면 추천 못해. 도망치는 것이 나아." "에어버스터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 살고 싶잖아. 싸울 이유가 없잖아. 어차피 퍼스트클래스가 알아서 다해주는데 너희가 왜 그런 위험을 부담해?" "그냥 다른 이들처럼 맡기면 돼. 안 그래?" "난 다 알아. 그럴 거잖아. 아니야? 너희들이 우리들에게 거는 기대를 난 알아." "에어버스터가 뭘 꾸미는지 몰라도 잘 안되면... 너희들 전원 빵하고 날아가는거야. 영원히. 파편도 남지 않고."
그 와중에 들려오는 것은 키득키득, 마치 아무 것도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유니온의 목소리였습니다. 상당히 얄밉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까 기적이라는거야."
/9시까지! 이럴때 여러분들의 울분이라도 토해보는 것 아닐까요? 이럴때 필살기도 막 날려보고 진짜 끝낼 각오로 막 어떻게 어떻게 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