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저나 남부라. 참 먼길을 함께하시게 됐구려.... 내가 아는 데인이라면 누군가를 옆에 붙이고 다니는 건 딱 질색할 놈인데, 뭐..., 그거야 각자 사정이 있으시겠지만." "네. 있다마다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바쁘니까, 얼른 길이나 터 주시죠."
동행은 질색이라. 하기사 한 지역에 오래 발붙이지도 않는 편력기사라 하였으니,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것이 더 불편하기도 하겠다만... 어쨌거나 본인이 먼저 제안한 일이 아닌가. 애시당초 소란을 피우지 않아 잠든 드래곤을 깨우지만 않았더라면 그마저도 없었을 일이고. 전부 스스로의 업보라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원 싱거운 녀석하곤.... 알았네. 이번에도 '크루스' 네에 들르러 온 겐가?" "...그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런 깡촌까지 찾아올 이유가." "그래, 그렇겠지.... 얼른 가 보게나."
'크루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긴 여정의 첫 목적지를 이 후미진 마을로 삼을 정도면 꽤 중요한 인물이겠거니 싶었다. '이번에도' 라 말하는 것을 보니 한두 번 오간 수준이 아닌가 본데. 그렇다면 촌장이 데인을 그리 반가워하던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것을 마지막 대화로, 말은 착실히 앞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아까 보이던 것이 너른 밭뿐이었다면 마을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많아졌다. 이를테면 더욱 가까이에서 보이는 건물들, 포장은커녕 쌓인 눈만 겨우 치워낸 것이 전부인 흙길, 쟁기며 수레 따위 농사에 쓰이는 듯한 기구 같은 것들. 짚을 엮어 올린 지붕 위로 나무 타는 향과 음식 내음 섞인 연기가 피어오르고,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생활 소음에 더해 말발굽 소리가 전부인 고즈넉한 풍경. 낯선 인간의 문명을 관찰하는 것도 잠시, 그새를 못 참고 또 다시 말을 걸어오는 탓에 정적은 금세 깨어졌다.
"늙으니 괜히 말이 많아지는군.... 원랜 참 과묵하던 분이셨는데 말요.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저리 되려나 모르겠소." "뉘 앞에서 나이를 운운하느냐? 우습지도 않군. "
아까 그 촌장에 대한 이야기인 듯한데. 늙었다 한들 한 세기의 절반이나 살았을까 싶은 인간들이 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 앞에서 늙었느니 어쩌느니 하다니.
"네놈은 이미 충분히 수다스러우니, 나이가 든다면 과묵해지는 편이 차라리 낫겠구나. ...그보다도, 지금 찾아가는 것이 누구인지나 말해 보거라."
이왕 대화가 시작된 김에 궁금했던 점이나 해결하자 싶어 답지 않게 말이 길어진다. 그 '크루스' 라는 인간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굳이 찾아오는 것인지.
그녀가 드래곤답게 인간을,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다른 종족 전체를 깔보는 것은 맞았으나 그것은 호기심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어느 날 개미나 쥐 같은 것들이 문명을 이룬 것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감상이랄까. 분명 자신이 알을 깨고 나왔을 적에는 얼마 눈에 띄지도 않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저들끼리 전쟁을 벌이니 나라를 세우니 하며 자신이 사는 북부 끝까지 밀려오지 않던가. 한없이 긴 시간을 살아가는 종족이 보기에는 눈 깜짝할 새 변하는 것이 인간들이니, 신기하다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잠시 입을 다물었던 데인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저 먼 보리밭 건너가 훤히 내다보인다. 허나 그곳에는 인간이 살 만한 집 한 채 보이지 않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 즈음 말이 이어진다.
"저기 저 보리밭 끝에, 하얀 끈이 박힌 말뚝 보이시오?"
있었다. 얼어붙은 땅에 느닷없이 박힌 말뚝 하나와, 바람에 따라 펄럭이는 흰 끈이.
"그 아래 묻혀 있는 놈 이름이오. 내가 직접 묻었지."
그러니까, 일종의 무덤인가.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직접 묻고 난 뒤에도 몇 번이고 찾아올 정도라면 꽤나 가까웠던 사람의 것이겠지.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킴으로써 숙연한 분위기를 이어가거나, 애도의 말 한 마디라도 건네겠으나... 안타깝게도 지금 그 말을 들은 것은 보통도 아니고 인간은 더더욱 아니었던지라.
자신도, 데인도 입을 다문 탓에 한동안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간간히 휘몰아치는 바람소리와 말이 걸어가며 내는 작은 소음뿐인 와중에, 갑작스레 정적을 깨는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데인? 데인! 데인 맞죠?"
잠시 내리감았던 눈을 뜨고 시선을 아래로 옮기면 밝은 금발의 자그마한 것이 또랑또랑하기 그지없는 벽안으로 이리를 바라보고 있다. 제 키보다도 작은 체구와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볼 따위를 보아하니 정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물론 인간 기준으로는 십 년 안팎은 살았을 것이나 어디까지나 드래곤의 관점에서—인간이 분명해 보인다.
데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던 어린아이는 이내 재빨리 길을 따라 달음박쳐 사라진다. 길은 한 갈래뿐이었으므로 굳이 붙잡지 않고 가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니 곧 길 끝에 나타난 집 한 채와 그 어린아이,
"엄마 저기! 저기 와요!"
그리고 그 곁에 선 여인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그 태양을 닮은 빛의 머리칼하며 맑은 호수 같은 눈이 빼다 박은 듯 닮은 두 사람. 누가 봐도 부모자식 관계임이 분명해 보였다. 자식 쪽이 더 자랐을 때의 얼굴이 예상될 수준인 것이 반박도 못 할 외탁인데. 아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미 혼자 낳았대도 믿겠구나, 생각하며 잠자코 데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긴 크루스 보러 온 거야?" "아니." "아니면, 나 보러?" "...아니." "그럼 왜 왔어?" "...."
제 앞에서도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양 뻔뻔하게 굴던 놈이 이리 딱딱하게 구는 꼴이란. 저쪽은 꽤나 반가워하는 듯한데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지. 인간들 사정에 그리 관심 둘 생각은 없었기에 구태여 끼어들 생각은 없었으나, 이어지는 대화에는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일단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 이유는 천천히 들으면 되니까.... 뒤에 모시고 계신 예쁜 아가씨도 같이요." "아가씨가 아니라 내 집사람인데." "네놈이..., 기어코 명을 재촉하는구나."
아까 그렇게 경고를 했음에도 또다시 헛소리라니. 다시 서늘하게 얼어붙는 표정. 일전처럼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으니 그나마 나은 듯싶으나, 여전히 냉랭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조금 풀어진 건 여인이 웃음을 터뜨린 순간. 한참 웃어대던 여인이 조금 진정한 후, 관심은 다시 자신에게로 옮겨온다. 어쩐지 아까 마을 초입에서 만난 촌장과의 대화가 그대로 되풀이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같은 마을에서 오래간 함께 살아가다 보면 같은 핏줄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닮게 되는 것인지.
"음, 크흠.... 아니시죠?" "쯧. 그럴 리가. 잠시간 동행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꼽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으며 혀를 찬다. 이런 대화를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것인지... 인간들이란 서로에게 관심들이 너무 많아 귀찮다고 생각하며, 아까 촌장 앞에서 대었던 변명을 그대로 반복했다.
말에서 내려 여인을 따라 들어간 집은 꽤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좋게 말해 고풍스럽니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니 하지만, 결국은 낡아빠져 금방이라도 쓰러진대도 이상치 않을 꼴이라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에 불과한. 들어올 때부터 요란하게 끼익거리던 문짝과,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은 상태일 것이 분명한 창문들. 벽과 바닥에는 깨진 흔적이 가득해 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새어들어오는 집은 인간의 문명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에 가까운 하멜에게도 그닥 좋은 환경처럼 보이지 않았다.
야생의 짐승들조차도 제 새끼는 최선의 환경에서 기르는 법인데. 이 집은 어린 것이 자라기에는, 애시당초 마을의 다른 집과 비교했을 때 외관부터도 눈에 띄게 허름한 것이, 지나치게 열악하지 않은가? 하여 조금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자니 집주인이 곧장 변명하듯 입을 열어온다.
"괘, 괜찮아.... 크루스는 없어도 그 동안 조금 저축해 둔 게 있으니까." "그놈 뒤진 지가 거의 십년인데, 저축은 개뿔.... 그래서 그 아끼던 머리도 잘라서 팔아먹었어?" "그건...."
그러니까, 이 집의 가장이 그 크루스란 인간이었던 모양이지. 이미 죽었고, 저 말뚝 밑에 묻혔으니, 남은 어미가 홀로 자식을 키우려다 이리 된 모양이다. 제 머리카락까지 잘라다 팔아야 할 만큼 궁했나 보지. 다른 인간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구한 결과가 이 수준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기구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정심은 들지 않는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인간의 관점에서였는지. 데인의 허리춤에서 주머니 하나가 딸려나온다. 아니면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제법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는 쩔렁, 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얹어졌다. 적은 돈은 아닌 듯한데. 문득 고개를 들어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니, 화가 난 것인지 당황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 그려져 있다.
"볼일은 끝났수. 가지."
답도 듣지 않은 채 데인은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저것이 얼마나 되는 돈인지, 진짜 과거에 빌린 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딱히 그녀의 알 바도 아니었으나 이 집안에 꽤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언젠가 이 설산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찾아볼 것이 생겼으니 이만하면 지루한 인생에 나쁘지 않은 수확이라고 생각하며, 그녀 역시 뒤돌아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래서. 이젠 어디로 향할 셈이지?"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던 흑마의 등에 올라타며 묻는다. 사실 다음 행선지인 마을의 이름을 댄대도 그녀가 알리라는 가능성은 낮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만 다니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뭐, 그런 생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