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다면 더 괴로워하라지. 어차피 곧 거두어질 목숨, 저것들 편히 가든 괴로이 죽어 원령이 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올곧게 바라보는 눈빛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공포로써 모든 경외 취해 온 세월과 위명을 무색하게 만드는 시선이다. 무엇인지 모를 저 눈빛 궤란쩍어 잡아 쥔 손 비틀지 못한 사이, 신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직감하고 말았다. 당장 이 요괴의 목을 꺾어 죽인단들 그 눈 안에 끝내 저를 향한 공포가 깃들 일은 없으리라고. 이놈은 죽여도 의미가 없겠다, 되레 심기만 상하고 말겠지. 그것이 못내 마뜩잖았다.
"네 원 들어줄 성싶으냐."
가혹하게도 압박하던 손길 거두어진다. 손아귀 놓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넋 잃을 만치 힘주어 조인 행태는 돼먹지 못한 신사神思의 발로라 해도 좋다. 이번에야말로 숨통이 막혔는지 아까운 피 제법 흘린 탓인지, 마침내 요괴 넋을 잃자 불쾌하던 감정도 이제야 일말쯤은 즐거워진다. 신이 긴 한숨 내쉬었다. 뇌중 온통 불태울 듯 치솟던 열도 조금은 풀려나는 듯했다.
그러나 한층 가라앉았단들 탐貪과 진瞋 지독히 들끓긴 매한가지니, 간탐한 눈알 뒤룩 구르며 같잖게 얼쩡거리는 호위를 향했다. 제깟 것이 칼 들어봤자 무얼 할 수 있다고? 근래 방정히 굴어 주었더니 그 탓에 무신의 명 우스워진 모양이다. 방자한 짓거리 용인해주는 것은 치유稚幼한 요괴 녀석만으로 족하므로―
무신의 걸음 소년에게로 향했다. 피로 벌창이 된 입 길게 찢어 웃었다.
쓰러진 요괴의 옷 어딘가를 아무렇게나 쥔 채 끌고 간다. 옷자락 움켜쥔 손에는 질척한 핏물이 범벅이다. 어느 것이 어린 녀석의 피고 어느 것이 큰 놈 것인지 구분짓기는 무의미할 듯싶다. 걸어온 길 따라 흥건하게 넘친 피 마구 얼룩졌으나 괘념치 않고 갈 길만 걸었다. 이깟 것들 신경쓰기도 다 귀찮다. 조금 전 면 뭉개버린 그 자식이 정신 차린다면 어련히 해결하리라. 보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것조차 짜증이 나 문짝을 걷어차 열었다. 이미 늦은 방과후, 문까지 잠긴 상황이니 당연하게도 보건실 안은 한적했으리라. 침대 위로 가져온 요괴 녀석 던지듯 두고는, 무신 자신은 바로 곁의 다른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기절한 요괴를 쳐다보는 시선 흉흉하게 날이 서있다. 귀찮기 짝이 없는 녀석. 번거로운 것. 저 자식 곧 깨어나면 시끄럽게 굴며 신경만 잔뜩 긁을 것이 자명했다. 하니 당장 자리를 떠야 성가신 일 없겠지만, 이미 골이 난 지금 상태로는 어디를 가든 거슬리는 일 천지일 테다. 눈 감고 사捨의 마음 찾아 보려 했다. 당연하게도 마뜩지 않아 의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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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달리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주인님, 아야나를 다정하게 꼬옥 껴안아주시는 주인님, 살짝 목을 깨물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빨로 깨물어주시는 주인님. 그 주인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아야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나는 꿈속의 주인님의 품에 안긴 채로 주인님께 마구마구 입맞춤을 해드리려 하였다. 이마에도, 눈가에도, 뺨에도, 입술에도.
사실, 평소처럼 입술에 상처를 내시는 주인님이어도, 머리를 꿍 하고 내리치는 주인님이어도, 아야나를 와앙 하려 하시는 주인님이어도, 여기저기를 마구 깨물어 피가 날 정도로 아프게 하는 주인님이어도 괜찮아, 단지 우리는 서로 표현 방법이 다를 뿐이니까. 서로를 아끼는 방식이 다를 뿐이니까.
아야나는, 그런 주인님을 정말정말 좋아하니까.
“…….좋아하여요, 주인님……. ”
무언가를 잡으려듯 허공에 대고 손짓하려 하며, 카와자토 아야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입술을 입맞추듯 삐죽이려 하고는, 잠결에 이렇게 후히히 하고 중얼거렸을 테다. 대관절 뭐가 좋다고? 하기에는 꿈속을 들여다 볼수도 없고 하니 난감한 상황. 무엇이 그리도 좋을까, 무엇이?
자, 슬슬 이 어린 요괴를 깨워볼 시간이다. 머리를 꿍 해도 좋고 뭘 해도 괜찮을 것이다. 아무튼간에 이 요괴를 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부실 문을 의식하는 시선, 그러나 유우키의 걱정은 실재될 일 없다. 그야, 문을 단단히 잠가두었으니까. 교내에서의 불순 이성 교제는 용납할 수 없다며 떠들어대던 것이 이런 꼴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선도부실이란 공간, 모순적인 행적, 목구멍 간질이는 달콤한 배덕감. 네코바야시는 이 모든 요소와 상황이 너무나 즐거웠다. 숨결이 탐난다는 부끄러운 문장, 욕심내지 않고 살며시 놓아주는 손길. 다리에 어정쩡히 기대어 앉았던 자세를 바로하고,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의자에 앉아있는 소년의 측면에서, 허리를 끌어안으려 했다. 가슴팍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어 따듯한 온기를,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탐하려 했다.
"선배는, 욕심쟁이네요. 제가 당연하게 내어줄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요?"
새치름한 목소리, 머리에 얹어지는 손길은 마다하지 않았다. 품 안에서 머리를 비비적거리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아래서부터 위를 올려보았다.
"카와자토 가에 대해선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까, 사귀는 동안에 걱정일랑 말아요. 그것이 당신의 업이니까. 좋아해 보도록 허락해 준 것으로, 마음을 내어준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들보다 나를 더 위해달라는 욕심은 부리지 않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는 목소리. 이만 끌어안은 허리를 놓아주며, 아쉬운 품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숙여 무릎을 탁탁 털면서, 괜히 흐트러진 머리칼이 제 연인의 얼굴에 스치게 했다. 귀이개 따위로 어질러진 테이블을 정리하고,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힘껏 걷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비쳐드는 여름의 햇살, 선명히 생겨난 비스듬한 그늘. 새파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또각또각 로퍼 소리 찰칵, 쇠 부딪히는 소리 삐걱, 돌아가는 문손잡이 새어드는 눈부신 햇빛 뒤돌아 내밀어진 작은 손
레이스 2차전. 이번에도 제비를 얻는 데까지는 누구보다도 빨랐던 무신이었으나, 종잇장에 쓰인 내용을 보고서는 황당을 금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가방……? 이딴 허황스러운 내용은 뭐지? 당혹한 것도 잠시 승부욕 가득한 머리는 즉시 해답을 내어 주었다. 조금 전 음료수 뜯어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나 붙잡고 가방을 빼앗으면 된다고. 그러나 무신의 발 쉬이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 있었으니, 바로 '좋아하는 사람'이란 대목이다. 눈길만 들어 일대를 죽 훑어보았다. 어딜 봐도 맥아리 없고 흐느적거려서 성에 안 차는 녀석들 천지다. 한데 이런 녀석들 중 아무를 골라 좋아하는 사람이라 치라고? 무신 화문제천, 양심은 없어도 존심은 있었으니.
어느샌가 이 바득바득 맞물린다. 승부욕 가득한 신격으로서의 본능과, 하잘것없는 녀석을 좋아하는 놈으로 치란 상황 불만족스럽단 심정이 상충했다. 그치고는 제법 오랜 지체가 있었던 끝에, 무신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바쁜 달음질 어디론가 향했다. 육중한 군마 달음박질하듯 서둘러 향한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1학년 교실이다. 교실에 들어서서는 빠르게 가방 하나 낚아채어 돌아왔다.
그 가방 누구의 것이냐 하면…… 바로 무신 자신의 것이었다. 이 몸은 이 몸을 사랑하느니라. (미안 아야나…….)
결정한 직후로부터는 이 모든 과정에 단 한 치의 지체도 없었으나, 결정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이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냅다 바닥에 누워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지기 싫어! 지는 거 싫어! 먹는 걸로 지는 건 더 싫어! 따위의 말을 하고 있는 듯 싶다... 이렇게 되면 위로하러 온 백팀 학생들의 입장도 곤란해진다.
한바탕 바닥을 뒹굴며 깔끔하게 복도를 쓸어준 우라라. 어째 아까보다 어둡게 색 바란 셔츠를 입고 일어난다. 눈물콧물을 스윽 닦고는 한다는 말이.
"우울해졌어~ 됐어, 됐어. 체육제니 뭐니 다 그만두고 스위츠 먹으러 갈래."
...아무래도 라멘으로는 성이 안 차는 모양이다. 탁탁 고상하게 ㅡ그냥 그런 척을 하며ㅡ 먼지를 털고는 홱 고개를 돌려 테츠오를 흘겨본다.
"이번에는 제가 졌지만 너무 자신만만하지는 마시죠?! 전 사실 라멘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 것치고는 엄청 맛있게 먹던데... 이것을 흔히 '패자의 정신승리'라고 한다. 말도 안되는 정신승리에 테츠오가 무어라 대답 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책상 위에 있는 라멘 그릇 두 개와 수저를 겹쳐 품에 든다. 뒷정리를 할 정신머리는 있는 모양이다.
"책상이랑 의자는 선배가 챙기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무래도 삐져버린 게 분명하다. 처음 말 걸던 활달한 목소리는 어디가고 찬바람 쌩쌩이다. 게다가 입도 미세하게 삐죽 튀어나와 있으니, 이번 패배가 마음에 콕 남아버린 것이 틀림 없다! 지가 시비 걸어놓고 왜 난리람... 어쩔 수 없다. 우라라에게는 스포츠맨십도 없고 뭐, 선의의 경쟁 이런 건 더더욱 없으니 승부 후 배려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마음 넓은 테츠오가 이해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