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나가기 직전 적당히 틀어놓은 TV채널에서 저녁 뉴스가 송출되고 있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큐슈의 어딘가에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던가. 어느 동물원의 불곰이 인기를 끌고 있다던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런 이야기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쪽으로 늘어진 손에 들린 맥주 캔을 빙빙 돌리며 뉴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소란스럽게 울리는 누군가의 당황한 목소리. 낄낄거리며 웃는다. 그쪽으로는 돌아보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말로 전할 수 있다 해서 답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웃으면서 어느새 비워버린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전에는 일탈하고 싶다며?”
그럼 이런 것도 해 봐야지. 실수라는 건 다 알고 하는 거니까. 네가 나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너에게 알려줄 수 밖에. 네 마음이 무너질 수 있도록. 선배로서 가르침을 줄 수 밖에.
“한 캔 마신다고 안 죽어. 누가 보지도 않고.”
말에 가시를 박아 넣었다. 아이가 돌아가서 도망칠 수 있도록. 잊어버릴 것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망각의 저편에 숨겨둔 터부를 거듭했다. 오르페우스가 그러했듯이.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 잊어버릴 것을 잊고 앞으로 가야한다. 아이의 눈에 미련이 보였다. 하루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사람의 눈처럼. 투명하던 눈이 흐리멍덩하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 느낌이다. 더럽고 찝찝한, 그런 느낌.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래.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저런 눈을 하고서. 침묵이 길어졌다. 체감상으로는 대략 5분정도일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래서 감상은 어때.”
그리 말하는 손에는 어느새 새로운 캔이 들려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지독한 향의 농도를 보았을 때, 아마 지금의 몸이 맛이 가버린 거겠지. 조금 피곤해졌다. 지금 내 잔에서 넘쳐나는 거품들이 적갈색 바닥 위로 흘러 넘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나중이 되면 힘들어지는 것 따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금새 눈 앞에 있던 녀석을 지나서 근처에 세워져 있던 낡은 어쿠스틱 기타를 쥐어 들었다.
“이 스튜디오, 우리가 받은 이후엔 외부인은 아무도 안 들여보냈거든.”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이질적이고, 뿌연 안개가 들어찬 듯한 느낌. 누런 황갈색의 액체가 목을 넘어간다. 안쪽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 같은 거친 느낌에 조금 어지러워진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겠어. 스크랩북이 있었다. 오래된 잡지에 실려있던 어느 페이지. 고작해야 몇 페이지 정도 실린 사진이며 인터뷰며 모아둔 것들이 어느새 100페이지나 되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큰 가치가 없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보물이다. 그 해를 빛낸 밴드를 다루는 잡지. 일본 레코드에 이름을 남긴 녀석들만 쓸 수 있는 짤막한 문장. 청춘을 모조리 음악에 바친 세월을 압축한 단 한마디의 문장. 언젠가 그곳에 자신이 실리는 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 중 하나였다. 그럴 수 있다면 이미 먼저 누군가가 지나간 길을 밟으며, 누군가의 뒤를 따르는 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스크랩북을 넘기면서 나는 기분 좋은 잠에 빠진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레코드 대상을 수상한 우리가 보인다.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전화로 듣고, 그리고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펜을 잡고 기쁨을 곱씹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원고를 써내려 간다. 팬에 대한 사랑을 담아, 동료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언제나 생각해온 마지막 한 문장을 쓰고, 제목을 생각했다. 그리고 웃으며 ‘내가 써야하는 글은 이것 뿐이지.’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꿈은 여기에서 끝난다. 아픈 몸을 일으켜 머리 맡에 놓인 스크랩북을 펼쳤다. 분명 그 기사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학교생활은 어때?”
조금 진부한 말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내가 녀석에게 할만한 말 따위 이런 것 밖에 없다. 이 녀석은 나의 제자가 아니고, 신도도 아니다. 그냥 아는… 아니 정확히는 귀찮은 손님 정도의 위치다. 그런 사이에 나눌 말이라고는, 얼마입니다. 봉투 필요하십니까. 정도가 전부니까. 이 정도의 말이라면 많은 발전이다.
검은 고양이는, 어깨에 살며시 얹어지는 손길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들려주신 것은 비밀로 하겠지만, 그렇게 다 말해버리면, 저도 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잖아요. 누군가 그랬어요. 아야카미에는 신과 요괴가 산다고. 저는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직접 눈으로 봐버렸으니까. 그러니, 그런 옛이야기는 상관없어요. 그보다 중요한 건, 저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다뤄진 적이 없어서 저만 중하게 생각해 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상처 같은 건 받을 대로 받아와서 선배가 어떻게 하든 아프지도 않겠고요. 이 정도면 충분한 변명이 되었나요?"
잠시 말을 멎고서, 아직 온기가 남은 찻잔을 집어 들고 입 닿은 자리를 혀로 할짝였다. 커튼마저 쳐진 어둠 속에서도 새까만 눈동자만큼은 빛을 끌어모았다.
"이쯤에서 되물을게요. 저는 좋지 못한 곳에서 일해요. 확실히 말하지만, 풍속점 같은 곳은 아니에요. 그래도 건전하고 안전한 곳이라고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들어주세요. 저는, 매일매일 모르는 남자들의 귀를 만져요. 어설프게 사랑 연기를 하면서 억지 미소 지어요. 다리에는 낯선 손길이 많이 닿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이런 저라도 괜찮은가요? 받아줄 수 있어요?"
빈 찻잔과 함께 느리게 내려가는 손, 함께 떨어지는 고개. 창밖에 나리는 여름비처럼 축축한 목소리.
"무례하게 군 거 알아요. 일부러 그랬어요. 근데, 연기 말고 진짜 연애라는 거 해보고 싶었어요.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다는 거, 해보고 싶었어요. 한번 기뻐보고 싶었어요. 마음이 부서져서, 움직이지 않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도서실, 지식의 보고인 책들이 쌓여있는 곳이자. 인류 지혜들이 모인 결정체. 인류는 다른 세계에 가서 세계를 구한다거나 하는 모양이다. 인간 대단해! 그리 생각을 하며 도서실로 들어서자 그 존재의 코로 책 특유의 냄새들이 풍긴다. 좋은 냄새야- 그리 생각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자 못보던 얼굴이 하나 보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존재- 흔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시야가 떨어지지 않는 것은 왜였을까.
"...안녕하세요"
가볍게 꾸벅- 목례하고는 읽으려고 하던 책 '유모차에 치여 이세계에서 전생한 나는 보육원의 직원으로 고용된 것 같습니다' 3권을 찾으려고 가볍게 두리번 거린다. 다른 이가 있는 것에는 그럴수 있지라는 느낌인지 당신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