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보는 소중히 하라 충고(를 빙자한 비아냥) 했을 텐데, 패악이나 부려대는 기질에 걸맞게 지지리 말도 안 듣는다. 굳이 상흔에 책임을 운운하자면, 주제 모르고 바락거렸을 성정 잘못이 반절. 남은 절반은 제게 있다. 요전에 무례를 허용해서 종래 저 인어에게 화를 씌운 노릇. 옳게 잡자니 스스로 머리통에 물 뿌려대며 별 발광을 저지른 탓에 물릴 수도 없다. 그런고로 마냥 성질대로 굴어주리라 결단한다. 애당초 제가 미친 게 어디 별안간 일인가. 물론, 개새끼라며 인상 이지러뜨릴 때는 언제고, 겨를 없이 웃어버리는 마주 본 낯짝 역시 정상은 아니다. 광인이 할 법한 짓거리엔 도가 텄음으로 일시 손과 시선을 거두고 바닥을 살폈다. 아롱거렸던 온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유채꽃 한 송이를 찾아낸다. 오가는 승려들에게 짓밟혀 몸뚱이는 먼지투성이고, 잎은 대개 해어진 채다. 그것이 바닥에 살점 몇 남기지 않았다면 종을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입가로 올려 숨결 불어 넣으니 삽시에 환하게 핀다. 서서히 맞은편 눈가로 가져가 샛노란 잎으로 흉을 쓰다듬었다. 혹여 눈이라도 베일까 봐서 매만짐이 저답잖게 조심스럽기도 하다. 살갗에 일었던 균열이 멎으면 붉게 늘어졌던 잔영도 차츰 원형을 되찾는다. 검지 들어 갈라졌던 자리를 가로로 그었다. 이제야 제가 알던 귀보 그대로 온전하다. 이후 꽃잎은 머리칼 땋아 넘긴 귓가에 달아줬다.
"꽃 꽂으니 진짜 미친놈 같아. 앞으로 그러고 다녀. 남이 비웃을 때마다 내 생각도 해주고."
머저리와 미친놈, 여기선 또 죽이 잘 맞다. 시선 잠시 멀리 두면 후덥지근한 바람이 덮친다. 재차 머리를 뒤로 넘겼다. 군데군데 마르긴 했으나 대체로 축축한 것이 불쾌함에도 기분은 썩 평온했다. 널브러진 상의 집어 이끼 낀 머리칼에 턱 하니 걸친다. 물기 얼추 털어주고는 여상 푸른 기 감돌던 뺨 전부를 두 손으로 감쌌다.
"신명이든 요명이든, 인명도 상관없고. 여하튼 알려줘. 내가 그랬잖아. 너 대신 복수해줄게."
읊조린 직후 허락 없이 이마 맞대고 물러났다. 전보다 간격이 트였지만, 두어 보 옮기면 금세 맞닿을지 모른다. 어차피 새벽 내내 얼굴 보고 있을 처지임에 지금은 조금이나마 여유를 내줘도 괜찮겠지 싶었다.
"상전이 따로 없다. 개새끼한테 무슨 힘이 있겠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전에 잠깐 손 줘봐."
선배의 스몰토크에 마치 오래토록 기다린 입질을 느끼듯 '철옹성을 꿰뚫어주꾸마─!!' 같은 이글거리는 표정이 되지만 디저트에 금방 시선이 빼앗겨 실눈이 풀린 동그란 눈으로 푸딩을 빤히 쳐다본다. 선배의 손길에 옅게 탱글이는 푸딩이 '예에─ 힛짱 치와스─'라고 헤실거리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는것만 같다.
"이거 혹시 써비스임까─? 참말로 받아도 되는거지예.......?"
눈빛은 이미 '군침 싹~'을 외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예의를 찾는답시고 몇번이나 되묻는 히데미. 마치 식사 앞에서 꼬리 프로펠러를 돌리며 '먹어'라는 주인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숨을 죽인다. 결국 맛있게 먹게 되지만.
"오오오오─ 편의점 푸딩이랑은 차원이 다름다─!"
첫 한입은 맛을 음미하듯 '호오~', 두번째부터는 손놀림에 여유가 없어진다. '이거 정말 직접 다아 만드신검까??'라며 갑자기 취재모드가 된 꼬맹이는 주전자를 높게 치켜들고 드립퍼에 뜨거운 물줄기를 붓거나 옷소매를 걷어부치고 휘핑기를 능숙하게 휘젓는 선배의 모습을 상상하며 감탄어린 눈빛을 반짝인다.
>>665 경계 안 할 이유 전무했다. 교내에서의 소문이며, 첫만남 때에 기세며, 스멀스멀 드러나는 적나라한 말본새. 때마침 보는 눈도 부재했으니 성질 죽일 필요도 없었으므로 내내 날을 세워뒀는데, 타들어가는 위장과 피를 타고 도는 신경증에 혼곤해진 정신이 줄을 느슨하게 했다. 본래 아프거나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면 시시비비를 분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법이다. 헛웃음에 가까운 미미한 미소가 차츰 거둬진다. 삼라만상 죄 태워 죽일 것 같은 놈이 생을 피워내기에 잠자코 보기만 했다. 문질러지는 꽃잎의 부드러운 휘장이 자못 섬세하여. 신의 손길 하나하나에 모든 것이 제자리 되찾아감을 느낀다. 다만 함묵한 채 응시하는 낯은 그저 고요하다. 고요히 한 문구를 되뇐다. 빛은 곧 희망⋯⋯. 눈앞엔 빛이란 빛은 전부 빨아들인 흑발 밑으로 물기 뚝뚝 흘리는 낯이 있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비식 웃고 만다. 정말이지, 너무 안 어울려서. 해서 귓가에 꽂힌 꽃자루를 꼬나쥐곤 안정적으로 가다듬는다. "놈 아니고 년. 그리고 유채가 살 날은 오늘 자정까지야." 치료해 준 값으로 자정까진 이리 다녀주겠다, 란 의미였다. 단언컨대, 유채꽃은 해가 기운 뒤 달빛에 교살당할 운명이었다. 퍽이나 큰 자비를 베푸는 낯이다. 아무렴, 여까지 와 난데없는 물따귀에 잠자리까지 뒤바뀌었는데 부탁의 반지반까지 들어주는 게 얼마나 자비로우니. 초장부터 첨예하게 군 것은 가뿐히 무시했다. 늦봄에도 날이 저물면 지상에 부는 바람도 해륙풍처럼 기온을 확 내린다. 인어에겐 미적지근한 온도였으나 여하간 찝찝함 날려줌엔 충분하다. 심지어 저쪽에서 친히 물기마저 털어주시니. 안갯속 거닐 듯 속 모를 말을 읊조리는 신을 양 뺨 붙들린 채 가만 응시한다. 변덕 한 번 귀찮게 부린다 느낀다. 복수라 한 대도 다시금 심정 변모해 으레 그렇듯 모른 체 능청 떨지도 모르지. 상대는 엄연히 무신이다. 허나 혹 복수를 행하게 될 시 어찌할지 궁금해져 느지막이 입을 연다. "무카이 카가리. 신명은 오오무카데⋯⋯ 아니, 야마후시즈메." 이마가 맞닿고 떨어지는 순간까지 한 치의 틈도 없이 직시하는 청보랏빛 안광. 무풍대처럼 하염없이 잔잔하기만 하다가,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린다. "지금이라도 무를래? 걔, 무신이야." 격이 암만 태양이래도 맞붙으면 전투 면에서는 무신이 한 수 위일 것이란 생각에 의거한 발언이었다. 여기서 정말 무르면 한껏 비웃어줄 심산도 없다곤 말 못한다. 하지만 무신이고, 태양신이고, 당한 만큼 엉망인 꼴이 되어오면 볼만하겠다 싶어서. 어느 쪽이든 손해볼 건 없다. 돌연 변심해 무른다해도 뭐, 자기라도 죽기 살기로 무신 살점 하나는 물어뜯고 죽음 되겠지. "무얼 하려고." 찬 어투와 어울리지 않게 낭랑한 목소리가 그리 물으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어준다. 제 교실에서 마주했을 때만 해도 상상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면 해를 끼칠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된 탓이다.
>>703 나나가 바라는 것, 욕망은 삶을 유지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재미나고 흥미로군 것들을 계속 추고하고 탐미하는 것입니다. 문제라고 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요괴, 신, 인간 어느쪽에도 곤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겠죠. 오랜 세월이 지나 흩어지는 신격의 재상승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지만 없어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불량 복장의 남학생이 쉼 없이 쏟아내는 말들을 머릿속에서 골라내며 머리 위에 물음표가 띄어 오르락 말락한 네코바야시.
"그러니까. 어..."
네코바야시 저조차도 당황한다. 뒤에서 보아 몰랐지만 푸른 넥타이까지 꼭 맨 것이 저를 닮아. 흰 후드 티셔츠는 단지 날이 추워 껴입은 건가, 갑자기 불 일던 자신감이 확 내려가면서도 마지막 한 가지 트집은 잡아서 기어코 잔소리를 마무리한다.
"그러니까... 머리를 녹색으로 염색한 것은 엄연히 벌점 대상입니다! 당장 이리 와서 명찰을 보여주세요."
단호한 목소리로 품 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어 드는 네코바야시. 학원 교칙에 그런 것은 전혀 없었지만. 자신만의 기준으로 벌점을 매긴다 협박 아닌 협박을 들먹여 보는데.
"벌점은 마이너스 삼 점입니다. 똑똑히 기록해둘 테니 어서... 어...?"
상대는 한심하게 눈물을 떨구고 있다. 그렇게까지 강압적으로 설교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소녀는 다 큰 남자애가 이런 일로 꼴사납게 우는 것이 영 달갑지 않다. 몇 학년인지는 몰라도. 뭔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비굴한 표정이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지기만 할 뿐이다.
"저기... 아까 말한 빵이라면."
손에 든 봉지를 살짝 내밀어 보이는 네코바야시. 그 안에는 여러 잡다한 쓰레기와 함께 방금 주운 듯 위에 올라왔는, 누가 한입 베어 물고 버린 듯한 빵 덩어리가 덩그러니 담겨있다.
"이거 아닌가요? ... 이건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고, 찾으러 내려오기까지 했으니 선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