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 이누는 평소 제가 배를 깔고 잠자던 자리 옆쪽에 품에 안고 있는 현판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고서 다소 다소곳한 것과는 거리가 멀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팔을 내밀어 그가 낸 상처에 약초를 발라주는 신 되는 존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귀를 쫑긋 세우고 복실한 꼬리를 좌우로 느리게 흔들 뿐이다. 겉보기에야 마냥 어리고 여리게 보이지만 강자 앞에 꼬리를 내리고 사소한 고통에 비명을 지를 나이는 한참이나 지나서 무척이나 담담할 수 있었을까. 이누는 애초에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안정감 있게 손등을 묶은 후리소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손으로 옆에 내려놓은 현판 조각을 살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엉망이었지. 슬프고 아픈 냄새가 나서,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 잠시 위로를 해주고 있었을 뿐인데. 몇 밤을 자다 보니까 이따금 찾아와 집을 정리해 주고 비질을 해주던 인간이 생겼었어. 얼마 전까지는 살아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모를 잡요(雜妖)가 주인 사라진 자리에 눌러앉게 되었다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말처럼 당을 둘러보면 낡고 먼지가 조금 쌓였다 뿐이지 한구석에 이누가 종종 받았던 공물을 잡동사니 모아두듯 해놓은 것 말고는 그다지 어지러진 모양새는 아니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꼬리를 흔들던 것을 멈추고 비릿한 흙내에 코를 킁킁거리던 이누는 몸을 앞으로 숙여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마룻바닥을 짚고서는 네 발로 엉금엉금 기듯 무심하고 느긋하게 비가 들이칠까 말까 한 처마 쪽으로 다가가서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본다.
"응. 이만큼 자리를 지켰으면 된 거겠지. 친구도 찾아와주었으니 나는 이만 쫓겨나는 걸까."
애초에 신 되는 존재도 아니고 스스로도 모르게 이렇게 태어났을 뿐인데. 이렇다 할 능력도 목적도 없는 이누가미의 아종을 누가 좋아해 줄까. 그나마 친해졌다 싶으면 금세 땅에 묻히고 마는 인간들도 이제 없고. 담담해서 더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흰 뒷모습에 역병과 저주가 물들었나 마냥 희었던 머리털 끄트머리가 거뭇해진 것이 신 님의 눈에도 뵈었을까. 이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낙비가 쏟아지는 마당으로 한걸음 내려서려 했다.
>>708 마당으로 내려서며 발을 헛디뎌 몸을 한번 휘청이고는 허리를 숙여 낮은 나막신을 고쳐 신은 이누가 미련 없이 자리를 돌려주기 위해 떠나려 했을 때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여태 몇십 년은 배를 깔고 누웠던 자리에 희고 고운 꽃들이 한가득 피어나있다. 굵은 빗방울이 소녀의 머리를 톡톡 때리지만 옷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일은 없었지. 시원하단 듯 비를 맞으며 신 되는 존재가 서있을 신당 안쪽을 바라보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서 고개를 우로 기울이는 이누.
이누는 점점 거세지는 빗물을 그대로 맞아가며 맹랑한 목소리로 되묻고는 두 손으로 제 목 아래와 덜미를 더듬는 시늉을 할 뿐이다. 얌전히 물러나주려 했는데 이리 붙잡는다면. 어린 이누도 입꼬리가 슬 올라가는 것이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우릉- 하는 소리를 내고서 조금 있으면 세상이 원래 이토록 하얬던 걸까 싶게 번개가 내리쳐, 순간 강아지의 귀와 꼬리를 달고 섰는 소녀의 뒤로 거대한 늑대개의 형상이 깜박 비쳐 지나간다. 아마도 영안이 트인 인간이나 같은 요괴, 혹은 신 되는 존재가 아니고서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모습이었지만. 불길함보다는 영물에 가까운 순하고 선한 모습이었지. 이누는 마루 위에 섰는 신을 똑바로 올려보며 고개를 다시 좌로 기울인다.
손가락을 두개 펼친다음 너한테 선택지는 두가지 밖에 없다고 간단한 이야기 처럼 이야기했다. 오히려 이후 펼쳐지는 영물에 가까운 기운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러게 말이야 '아무나' 신 노릇을 하니까 그 '아무나' 때문에 수라조차 되는 법이거든."
번개가 내리치는 광경에 놀라기는 커녕 나는 내 벗이 떠올라 무척이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따라하는 것도 아닌데, 이 또한 기연이란 말인가. 세상은 빌어먹게도 즐거운 일을 선사하고는 한다. 그렇기에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증스럽기 그지없기에 그것을 조소하는 듯.
"아하하하하!!! 원래 세상의 이치라는건 가지고 싶은건 얻기가 힘든 법이거든. 맹랑한게 아주 보기좋아. 거기에 시건방진 것도 내 벗처럼 조금은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
마루 아래로 터벅거리며 내려와 국화의 꽃밭에서 한 보 춤을 추듯 부채를 펄럭였고,
"그 기개에 합당한 절망을 보여주도록 할게. 죽지는 말아줘. 굴욕적인 모습을 보는건 내 악취미거든."
조소에 똑같이 조소로 답하며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검게 변질된 장미 위를 저벅 밟고 올라가 붉어진 눈을 아래서 위로 치켜뜨는 소녀의 주위엔 희연 기운이 스멀 올라오는데. 여지 온안하고 평안하게만 지내와서 그렇지 인간을 해하지 아니하고 되레 나쁜 기운을 정화하던 요기는 한 세월 쌓이고 쌓여 이 한순간만큼은 신력에 버금갈 정도로 진해져있었을까.
"나는 원래 귀여웠어. 너도 조금은 '귀엽네'?"
마냥 어리고 여리고 순하기만 하던 작은 승냥이가 희게 반짝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난생처음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