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블랑은 봄맞이 기념으로 여러가지 기간한정 음료를 출시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시키지마
벚나무를 형상화한 라떼아트도, 라즈베리를 열심히 갈아서 크림과 어쩌고 섞어서 내는 음료도 석류젤리를 적당한 크기로 다져서 넣는 음료도 전부 시키지마라
무급으로 일하는 나에게 이런 중노동은 보통 힘든게 아니다. 그냥 커피만 마시고 딱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 후우 "
하지만 인간들이란, 신상품이 있으면 시키고픈 호기심이 발동한다. 누군가 SNS에 찍어올린 우리가게 상품이 입소문을 타기도 한다. 그럼 누가 죽어나는가. 내가 죽어난다. 차마 무카이씨에게 '뒹굴거리지 마시고 커피 좀 말아요' 라고 말할 수 없는 내가 죽어나간다.
아무튼 피크타임을 겨우겨우 넘긴 나는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숨을 고르며 어깨에 가득 차오른 듯한 피로를 좇아내고 있었다. 이렇게 늘어지면서 손님이 오면 '장사 안해 나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카페 블랑은 아버지의 가게다. 내가 멋대로 굴 순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성실한 점원 코스프레를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주었다.
별 대단한 책은 아니다. 오래전에 쓰이다가 현대에 와선 안쓰이는 한자를 기록해둔 책이다. 내가 이것을 빌린 이유는...
"야마,후..시즈..메..."
저번에 창고에 찾은 낡은 서책을 해석해볼까 싶어 빌려온 것 이다. 물론 밤을 꼬박새도 해석에 성공한건 이제 한 줄 정도지만..
"야마후시즈메, 우린 센소쿠사마의 자식이기에___"
...센소쿠사마는 무엇이지? 야마후시즈메 라는 무언가가 우리 가문과 연관이 있던거 아니었나?
벌써부터 턱 하고 막혀버렸지만. 이런 상념도 오래가지 않았다. 도어벨이 울리면서 특이한 손님이 성큼 들어와 카운터로 다가왔을까? 아니면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었을까? 아무튼 카페 블랑에 손님이 오셨다
봄이란 계절은 좋아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선선한 계절감도, 이 나라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낙화의 꽃도. 그리고, 이 시기를 노리고 등장하는 계절 한정 상품도. 이야, 옛날에도 이런 게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이 계절이 아니면 먹을 수 없다'는 부류의 물건들이었다. 옆나라 냉면은 원래 겨울에만 먹을 수 있었다지? 그런 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며 계절에 따른 상품이란 것들도 특별함을 띄게 되었다. SNS에서 본 카페 블랑의 한정 상품도 그런 쪽의 물건이었다. 벚나무 라떼아트, 라즈베리 크림, 석류 젤리까지. 후기를 보니까 맛도 괜찮은 거 같고 보기도 좋으니까. 만드는 입장에서는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나는 일 하는 쪽이 아니므로 괜찮다.
"실례합니다-"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종소리를 울리는 문을 밀었다. 주문할 것은 정해져 있으니 거침없이 카운터로 다가가 검지손가락을 세웠다. 카운터에는 바리스타라기에는 젊은 삼백안 소년이 서있었고, 낡은 서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이 뭐지-?
"..아! 카페 블랑의, 봄맞이 스페셜 메뉴 주세요!"
일단 주문을 해두고서 낡은 책을 잠시 바라보았다. 진짜 오래되어보이는데, 이제 안 쓰는 문자도 많아보이고, 저런 것에 관심 있는 아이는 드문데- 나중에 역사학자가 되려나.
아. 싫다는 게 눈에 보인다. 크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내가 연륜이 몇 년인데, 인간의 속내 정도야 대강 알 수 있었다. 한때 카페에서 일도 해본 적 있는 몸이라서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제대로 주문을 받고, 지체 없이 만드는 걸 보면 꽤 숙련된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과거에는 쉽게 볼 수 있던 가업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 소년과 비슷한 냄새가 진한걸.
"감사합니다-"
나온 음료는 썩 훌륭했다! 아마 베이스는 딸기쪽인 듯, 새콤달콤한 냄새가 후각을 건든다. 방싯방싯 웃으면서 인사를 한 나는 적당한 자리로 음료를 가지고 가려고 하였는데- 아이가 말을 걸었다. 오래된 한자에 아느냐,라-
"네 뭐- 그렇긴 한데..."
오히려 그 쪽이 좀 더 익숙하려나. 이래뵈도 오래 살았고. 시대에 발 맞춰 살아가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이는 사라지지 않는 터라, 고어가 익숙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키 161cm의 미소년이다. 아직 중학생의 앳됨을 다 벗지 못한 아이가 고어에 대해 잘 안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일단 나는 '얘 중2병 쎄게 겪었구나'하고 인자한 웃음을 지어줄 것이다. 흑역사는 누구에게나 있지.. 나도 그렇고. 우리 좀 오랫동안 흑역사를 쌓아나가는 중인 것 같고.
어른...현대 기준으로 아직 아이가 맞지? 어른도 되지 못한 아이의 배려가 반갑긴 하다만, 그렇게 빈 값은 아마 아이의 지갑에서 나갈 것이다. 코 묻은 돈을 가져갈 생각은 없던 나는 손사레를 치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대신 몸을 좀 앞으로 기울여서 관심이 있다는 표시를 냈다.
이제는 신경 쓰는 사람을 괴짜라고 말할 낡은 서책에 관심을 두는 게 개인적으로 보기 좋기도 했다. 인간의 도움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예전부터 그랬다. 그리고 나는, 점원이 한 말에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
"..오, 야마후시즈메?"
센소쿠사마, 산노사마, 오오무카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지네의 모습을 가진 무신. 과거에 인연이 있는 이름을 21세기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턱을 괸 채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