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내 가방에는 린게츠가 손수 채워준 준비물로 가득하다. 그러니까 소 권의 참고서, 필기도구, 그리고 도시락 따위 말이다. 난 그저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었다. 거의 말 그대로... 청동 젓가락 따위 말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준비물로만 가득해서 제법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나는 카에루족 캇파를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마지막으로 본 것이 헤이안이었나 에도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관심 있는 일에나 신경을 두는 데 익숙하지 같지도 않은 건 금방 잊어버리고 신경을 끄는 쪽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카에루족이건 무슨 족이건 캇파는 솔직히 말해 안중에도 없었고...
"그럼 아저씨, 이제부터 아오이 아저씨라 불러도 되어요? "
...설마 그런 하찮던 캇파와 이렇게 신경전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울먹)
천손강림을 실시간 관람했을 정도의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마음만큼은 아직 소년에서 청년이다. 신의 관념과 요괴와 인간의 관념을 동일시하지 마라. (정보: 할아버지다) 아니, 그야 그럴 법도 한 게!!!! 나 소싯적에는 여자로도 흔히 착각 당했다니까?! 그 정도로 범접할 수 없는 정도의 어리고 고운 미모였다고!!!!! 아니 따지고 보면 그때부터 크게 달라진 것도 없어서 지금도 사실상 그렇다고!!!!! .........아, 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혼자 비참해지지.......
"네가 그렇게 부를 거면 나도 아야나 할머니라고 불러주지..."
눈을 부릅뜨고 낮게 내리깐 진지한 목소리로 기선제압을 시전했다... 너도 사실상 할머니일 거 아니냐 하는 진심으로 싸우려고 하는 눈빛이었다...
신의 자식을 자칭하는 일이 잦다고, 예시를 들어주고, 안심시켜주었을 뿐이다. 너구리는 알고 있다. 이미 비일상에 발을 걸친 자의 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럴 리가 없다'며 웃어 넘긴 일들이 후에 어떻게 찾아오는 지. 그대여 평범하라, 그렇게 읊지만 그것이 명약이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너구리의 생애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눈 앞, 신의 피를 이은 삼백안의 소년. 이 땅, 인외가 걸음 옮긴 기묘한 대지. 학생이라면 바로 근처에 있는 그 학교에 다닐 테지. 그리고 그 곳에는 너구리를 포함해 많은 인외.
"아는 이상 기억해두는 걸 추천해요. 언제 어떻게 도움이 될 지 모르잖아요? '우리 가문이 신의 피를 이었다더라'며 농담 주제로 써먹을 수도 있고."
방-긋. 장난스럽게 웃은 너구리가 음료를 들고 물러섰다.
"몰라서 무서운가 무서워서 모르는가. 고민할 필요는 없지만 고민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147 어린 이누는 아직 잠이 덜 깨어서 눈앞의 신이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고만 있었다. 몇 년 동안 편안히 잠을 자던 휴식처이신데.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어리둥절할 뿐이시지. 그래도 불길하고 무서운 기운이 어깨를 간지럽혀서, 이누는 마룻바닥에 옆으로 누운 채 복실한 꼬리와 귀를 쫑긋 세우면서 고개를 조아리는 시늉을 할 뿐이다. 사쿠야 신님의 발치에 오른 검은 장미를, 손을 뻗어 검지로 건드려보려 하면서도 그가 무서워 오줌을 흘르지는 않았을 건데.
"아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누군가 신적인 존재가 대뜸 찾아와서는 친우니 뭐니 이야기를 하는데, 이누는 늘어지라 하품을 하면서 위기감 없이 바닥에 팔을 늘어뜨릴 뿐이다.
불구대천지원수를 노려보는 것처럼 끈질기게 아야나 할 머 니를 노려보던 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무언가 머릿속을 번뜩 스쳐지나갔고... 그 덕에 나는 고조할아버지 같은 분기탱천할 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여유를 되찾으며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샐쭉.
"...........그런 식으로 버릇없게 굴면 내가 린게츠 아저씨한테 이르러 갈 건데도?"
길고 넓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자못 얄밉게 웃었다. 쿡쿡쿡. 그래, 이 매水각희는 아무래도 린게츠와 아는 사이 같아 보였지. 그 때는 물어볼 시기를 놓쳐서 이도 저도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나온 정보로 미루면 틀림없이 안면을 튼 것보다는 더 깊은 관계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아오이님이~~ 린게츠 아저씨와는 아주 잘 아는 사이거든~~"
"그런데 이렇게 은혜도 모르고 오만방자하게 굴면― 그 사실을 린게츠 아저씨가 알면― 린게츠 아저씨가 얼~마나 실망할까아― 응?"
신이 요괴의 후광을, 형님이 동생의 후광을 빌리려 드는... 말하자면 진심으로 가슴이 옹졸해지는 시츄에이션인 것은 일부러 무시한 채 나는 기세등등하게 마지막타를 꽂았다.
일 났다. 이 아 저 씨 는 아무래도 린게츠 아저씨와 아는 신님인 것 같다! 린게츠 아저씨한테 아저씨라 부르는 거를 이르겠단다! 근데.... 알바임? 그렇다. 이 MZ한 요괴는 아저씨를 아 저 씨 라 부르는 걸 당연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오이 아저씨가 아니면 아오이 오빠라 불러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말해서 몇천년은 되신 것 같은 신님을 오빠라 부르는 것은 요괴적으로 양심에 찔린다. 아니 저는 이제 막 백살 남짓 먹은 올챙이 탈출한 요괴고 신님은 우리 파파보다도 나이많으신 아 저 씨 인데 어떻게 아저씨를 선배님 아니면 오라버니라 불러요 절대로 언 부르지. 메 롱 이다.
잠이 덜깨서 상황파악이 전혀 안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인정사정 봐줄 이유도 없다. 애초에 나는 자비롭지도 않다. 역신이니 재앙신이라면서 멸시받기 그지 없었기에, 아까의 경고정도라면 충분히 주의를 준 것이다.
陷之死地然後生 花無十日紅
복수를 결심하며, 지독히도 거칠게 적었던 부채의 글귀가 펼쳐짐으로서 보여졌다. 그리고 이내 부채를 든 손을 사당 마루로 향하게 하자. 땅이 울리기 시작한다. 땅이 쩍쩍갈라지면서 그 틈새로 날카로운 가시의 장미덩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파도처럼 밀어닥쳐 마루바닥을 기어올라가 얽어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