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금을 모티브로 하고있지만 잘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상황극판의 기본 규칙과 매너를 따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오고 가는 이에게 인사를 하는 자세를 가집시다. ※상대를 지적할때에는 너무 날카롭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15세 이용가이며 그 이상의 높은 수위나 드립은 일체 금지합니다. ※특별한 공지가 없다면 스토리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7시 30분~8시쯤부터 진행합니다. 이벤트나 스토리가 없거나 미뤄지는 경우는 그 전에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이벤트 도중 반응레스가 필요한 경우 >>0 을 달고 레스를 달아주세요. ※계수를 깎을 수 있는 훈련레스는 1일 1회로, 개인이 정산해서 뱅크에 반영하도록 합니다. 훈련레스는 >>0을 달고 적어주세요! 소수점은 버립니다. ※7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 경우 동결, 14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경우 해당시트 하차됩니다. 설사 연플이나 우플 등이 있어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존 모카고 시리즈와는 다른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기존 시리즈에서 이런 설정이 있고 이런 학교가 있었다고 해서 여기서도 똑같이 그 설정이 적용되거나 하진 않습니다. R1과도 다른 스토리로 흘러갑니다. ※개인 이벤트는 일상 5회를 했다는 가정하에 챕터2부터 개방됩니다. 개인 이벤트를 열고자 하는 이는 사전에 웹박수를 이용해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벤트를 진행하는 이는 계수 10%, 참여하는 이에겐 5%를 제공합니다.
부원 명부: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6965135 설정: https://url.kr/n8byhr 뱅크: https://url.kr/7a3qwf 웹박수: https://url.kr/unjery 위키: http://threadiki.80port.net/wiki/wiki.php/%EC%B4%88%EB%8A%A5%EB%A0%A5%20%ED%8A%B9%EB%AA%A9%EA%B3%A0%20%EB%AA%A8%EC%B9%B4%EA%B3%A0%20R2 저지먼트 게시판:https://url.kr/5wubjg 임시 스레: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6244057 에피소드 다이제스트: https://url.kr/tx61ls
낙조는 (보기완 다르게)인내심이 썩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서 이레가 하는 양을 단지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드디어 상대의 주먹이 올라오자 그제서야 툭, 하고 가볍게 쳤다. 큰 녀석과 작은 녀석이 대뜸 주먹을 맞댄 모습은 제법 귀여운 꼴이었다.
흐름이 그러했으니, 낙조는 이레의 비장함이 향후 기약한 결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흘러나온 말은 순전히 질문에 대한 답이었지만. 고작 이름 하나 알려주는데 저리 결연할 일인가? 지당한 의문이 떠올랐으나 곧 해소했다. 이 녀석⋯ 엄청 소심한 타입이구나! 라는 방향으로. 낙조의 기상천외한 사고 방식은 설명이 필요할 테니 나열하자면 이렇다: 소심하니 이름을 알려주는 것조차 힘겹고, 그렇기에 통성명한 인물이 소수일 것. 즉, 이 녀석은 친구가 적다. 내가 친구 1호일지도. 낙조의 눈빛이 별안간 묘하게 온도가 올라간 건 이 탓이다. 기분 나쁘게 따스한 시선을 던지며 낙조는 드물게도 말투를 가다듬어-그닥 친하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미세한 변화였어도-대꾸했다.
“알았어, 좋은애.”
따스하기만 하면 뭐 하나. 엄장하게 발언한 이레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 명랑하게 이름을 안 불러버리는데.
“내 이름은 낙조. 아까 말했지? 가끔 낙지라고 웃기지도 않은 장난을 치는 녀석들이 있는데 너는 그럼 안된다?”
나름 자기가 아는 예의의 선을 지키려 똑같이 다시 한 번 이름을 내어준다. 웃기지도 않은 첨언은 덤이었다.
“음⋯⋯.”
팔짱을 끼곤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하며 골몰의 자세를 취하는 연유는 대번에 돌아온 긍정 때문이다. 이 녀석, 소심한 성격 아니었나? 의외로 전투적인 기질이 있을지도. 제법 나랑 결이 맞을 것 같다. 긍정 봇 이레의 버릇인지도 모른 채 황당한 가설을 내세운다.
‘근데 아까 누가 뭘 떨어트렸나? 아까부터 부주의한 녀석들이 많네. 공예부라 바늘같은 걸 많이 사용할텐데 위험하게⋯. 손 많이 가는 녀석들이 많구만, 여긴.’
공예부 정복 대안을 골똘히 구상하면서도, 생각의 틈새에서 저런 헛생각을 꾸준히 집어넣는 낙조. 누가 누굴 돌봐, 이 녀석.
“줄? 좋은 생각이야. 똑똑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정복을 할지 생각도 안 했으면서 긍정 봇 기질이 옮았는지 일단 긍정부터 했다. 전부 약하고 호전성 만무해 보이는 유형들뿐이나 혹시 모른다. 숨겨진 호전성이라든지, 숨겨진 강력한 능력이라든지. 줄 세워놓고 한 명씩 일대일로 붙으면⋯. 이 생각은 처음으로 여즉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계속해서 어긋나는 타 부원들과의 생각과 일치했다. 그들도 ‘줄’이라는 키워드에 작품을 줄지어놓는다는 아이디어보다 자기네들을 세워놓고 싸운다에 초점을 맞췄다. 하기야, 저 투톤 헤어 양아치(오해다)의 막무가내 낯을 보면 아무래도.
“아니, 그래도 일단 난 인형 완성을 조건으로 여기 온 거니까. 음, 그런 걸로 해야겠지? 아무리 그래도 싸울 의지가 없는 녀석에게 달려드는 짓은 안 하니까.”
혼자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아! 하고 머리 위로 전구가 켜진 낯으로 고개를 든다.
“강한 인형을 만들까? 대충 인형 같은 거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자가 인첨공에 한 명쯤은 있겠지.”
연구원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청윤은 도대체 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단 대답을 해야 오늘치 커리큘럼이 끝날 것 같아 본인이 생각하던 답을 내놓았다.
"일단은.. 백병전이랄까요?"
백병전, 이 능력은 스나이핑이란 이름이 붙은 것처럼 저격용 능력에 가깝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지먼트로써 활동하기엔 백병전이 훨씬 편할 것은 사실이었다.
"백병전으로 싸우는 건 능력 없이도 괜찮잖아? 왜 그때 그 백색..."
"끝났으면 가도 되는거죠?"
연구원의 말을 청윤이 끊자 연구원은 알겠다는 듯 가라는 손짓을 했다. 다음날, 훈련장으로 온 청윤의 앞에는 다양한 드럼통과 장애물이 놓여져 있었다.
"오늘의 훈련은 네가 원하던 백병전 훈련이야. 이 장애물 뒤에서 하나씩 하나씩 표적이 올라올거야. 여기서 시작해서 저쪽으로 향하면서 바로바로 맞추면 된다는거지. 쉽지?"
청윤은 조금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커리큘럼은 어느 정도 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치고 잘 하는데?"
청윤은 자신 앞으로 표적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맞춘 뒤 엄폐물에 바로 숨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좀 어색한 모습이 없진 않았지만 그동안 했던 훈련과 실전 경험 덕분일까? 그래도 제법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아직 여러 손가락 사격은 어색한지 양손의 검지만을 사용했지만 올라오는 표적 양이 그렇게 많진 않았기에 바로바로 표적을 맞출 수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전히 레벨1이라 말 그대로 맞추기만 할 뿐 딱히 위력이 강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전문 지식이 요구되는 논문을 들여다봤자 한개도 이해를 못하겠다. 머리에서 연기라도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서 혜성은 카페 테이블에 엎어져버렸다.
"죽진 않겠는데 죽을 것 같다.."
머리아파. 이런 게 바로 0레벨의 고뇌인가. 어지러운 단어들과 19년 살면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전문 용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건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계수 변화가 있다는 연구원의 긍정적인 발언 때문이었다. 거기에 이 종이까지 연구원이 준 거고. 테이블에 엎어진 채 얼마나 끙끙거렸으면 크로플을 잘라서 입안에 넣는 혜성의 머리가 잔뜩 부시시했다. 입을 오물거리며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성은 맥이 풀린 것처럼 탁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그나마 간단한 가이드를 주자면... 레벨1은 이제 막 능력이 싹트기 시작해서 사실상 미약하게나마 쓸 수 있구나.. 정도가 사실 제일 적당한 느낌이고 레벨2부터 기본적인 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느낌.. 레벨3부터 살상력이 조금씩 붙기 시작하는 느낌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능력이 많아서 제가 정확히 이 레벨에는 이 정도, 저 레벨에는 저 정도. 이렇게 정할 순 없어요! 일단 이 가이드를 기반으로 자율적으로 정해주세요!
레벨 업, 이 얼마나 달콤한 단어인가. 쓰디쓴 현실에 비해서 말이다. 느아아아아악. 훈련실의 매끄러운 대리석 벽을 타고 울리는 짜증스러운 괴성. 기괴한 소리를 연신 내쉬는 낙조는 현재 부푼 포부를 안고 능력 개시를 시도 중이었다. 얄밉게 나올까? 말까? 하는 카본 섬유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0 자이로키네시스 대분류에 속한 학생이 간단한 지진계를 빌리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봐야 겨우 알거 같은 진동을 좀더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웬만한 땅바닥은 돌이니까 그냥 그대로 놓고 돌의 떨림에 집중하다보면... 지진계에서 뽑혀지는 종이 위의 선이 약간 움직이는 것이 확인된다!
"바로 그거죠! ..어?"
그 모습에 감탄을 하며 한 쪽 발을 땅으로 찍자 그 충격으로 나가는 진동 표시가 훨씬 크다는걸 보고 낙담하고 말았다.. //잠깐 들러 갱싱해봐요 계신분들 안녕하세요!
흑발 단발머리의 소녀가 그리 물어오면 얇은 샤프심 갑작스러운 변덕에 못 이겨 톡. 종이 위로 부러지는 감각이 선 끝에서 미약하게 느껴진다. 풀리다가 버려진 공식은 경진이 눈을 그 소녀 쪽으로 돌림으로서 완전히 잊혀지고 만다.
"아니요." "나도 안 믿어."
그럼 왜 물어본 거지, 그런 생각을 하던 경진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그녀는 눈 곱게 접어 웃는다.
"그렇지만 문학에서 은유적으로 쓰이는 건 좋아해. 뭉근~하게 존재하는 찝찝한 죄책감. 그리고 그런 감정과 떼어놓을수 없는 상대방." "그런가요." "관심 없는 티 너무 낸다!" "그건 아닌데, 뭐라 답 해야 될..." "아~ 장경진 못됐어 진짜~ 어쨌든! 넌 왜 유령 안 믿어?"
그녀는 능청스레 화제를 돌리더니, 경진의 공책을 팩 덮어버린다. 그녀가 걸쳐 앉은 책상의 중심 흔들리지 않도록 다른 쪽 다리를 잡은 경진의 손은 그녀의 시야 밖에 나 있을 테다.
이곳은 4학구에 있는 스트레인지 중 하나. 당연하지만 4학구에도 수많은 스킬아웃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레벨0인 자신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단체도 있었으나 자신들의 이득, 구체적으로는 돈을 위해서 범죄에 손을 물들인 단체도 있었습니다. 스트레인지라는 구역에는 이런 스킬아웃 단체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잡으려고 하는 이들 또한 있었습니다.
보통은 잡는 이도 있었지만, 오히려 사냥당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말이죠.
"크...억...크아아악..어억!'
레벨4. 파이로키네시스 능력자인 남학생은 피를 토하며 오른쪽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는 손에 낀 너클을 닦고 있는 사내가 씨익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마찬가지로 키득거리는 남성, 여성.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까마귀' 마크가 그려진 완장을 차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돼. 어떻게, 어떻게 스킬아웃 따위가..."
"그러게. 왜일까? 레벨4인 엘리트 씨. 혼자서 충분히 우릴 잡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치? 네 생각에는 그랬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 스킬아웃들도 바보는 아니거든."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얼마든지 구축하고 있어. 그렇게 조롱하는 목소리가 굉장히 차가웠습니다. 이어 사내는 무릎을 꿇은 남학생의 멱살을 잡은 후 명치에 그 주먹을 그대로 꽂아넣었습니다. 이내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왔고, 붉은 향기가 그곳을 가득 채웠습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마냥 축 늘어져버린 그 남학생을 사내는 피식 웃으면서 땅에 내팽겨쳤습니다.
"그 녀석은 새벽에 번화가 신호등에 걸어놔. 그 아래에 우리의 마크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보스!"
옆에서 키득거리면서 구경하고 있던 남성 2명이 그 지시에 따라 남학생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이어 사내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뒤로 살며시 돌았다.
"조금 방해가 들어오긴 했다만 우리의 목적은 바뀌지 않는다. 내일 우리는 3학구로 간다. 거기서 의뢰에 따라 새로운 비지니스. 그리고 의뢰인이 지시한 임무를 시행한다. 방해하는 놈들은 누구라도 상관없어. 죽여라."
"네! 알겠습니다! 보스!"
어두컴컴한 어둠 속. 검은색 까마귀들은 일제히 어둠 속으로, 아니. 어둠으로 가려진 건물 안으로 하나 둘 들어갔습니다. 그 아래에 비치는 그림자가 유난히 짙고 어두웠습니다.
단순한 동작으로 제어를 하는 것이 실패한다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동작이 트리거가 될수도 있다. 능력이라는 게 그냥 대충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원인 하에 발동이 되는게 아닐까?
그러면 우선 내게 위협이 될만한 걸 찾긴 찾아야 하는데... 마침 순찰 중, 딱 좋은게 나타났다.
보통의 경우엔 내 악명 때문인지, 외형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체 검사에 불응하는 케이스는 거의 없었다. '거의' 없었다는 말에서 추측할 수 있겠지만, 가끔 눈이 돌아가서 불응하다 못해 저항을 하고 되려 싸우려 드는 학생들도 있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샹그릴라를 빨고 증폭된 능력으로 난동을 피우기도 해서 위험하지만... 거기에 한번이라도 당했다면, 난 이 학교 저지먼트로 남아있을 수도 없었겠지.
상대는 이미 샹그릴라를 복용한 상태였는지, 팔을 뻗고 고열의 불길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상대를 해야하나, 싶겠지만 다행히 목화고는 불이 날 위험이 높다는걸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말씀.
번져오는 불길을 피해 복도 벽에 붙어서는 소화전을 열고 호스를 꺼낸다. 당연히 이걸로 불은 완전히 꺼버리기엔 힘들겠지만...
"한 방 먹어라!"
밸브를 열고서 노즐 앞을 돌려 소화전의 호스 끝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센 물줄기로 놈의 면전을 때린다. 그대로 잠시간 물을 쏟아낸 뒤에, 가스가 오링이라도 난 건지 아니면 능력을 쓰기가 힘든건지 잠시 멈칫한 놈에게 달려든다.
살짝 뒤로 젖혔던 팔을 앞으로 거세게 뻗으며 놈의 턱을 강타한다. 물대포에 이어 주먹에 턱을 정통으로 맞고 비틀대는 놈을 확실히 제압해야 한다. 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원초적인 흥분감은 분명 능력의 트리거가 될 수 있을 거다.
오른손 펀치로 인해 뒤로 빠진 좌반신을 앞으로 한다. 왼발로 바닥을 강하게 딛고서 체중을 실어 왼팔로 옆구리를 때린다. 제대로 들어간 펀치에 능력이 더해졌는지, 정통으로 맞고 저만치 뒤로 나가 떨어진 놈의 교복 주머니에서 남은 샹그릴라 약 봉투가 마치 노리기라도 한듯 떨어진다.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작은 약 봉투를 줍고서, 놈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운다. 이미 기절한 상태인 듯 하지만 그래도 인계는 해야 하니까.
주위가 꽤 소란스럽다. 하긴, 그 난리가 났으니까.
"뭘 봐! 어디 구경났냐?"
일부러 신경질적으로 큰 소리를 관중들에게 치고서, 축 늘어진 불량 학생을 부축하여 자를 옮긴다.
>>0 오늘의 커리큘럼도 딱히 정해진 게 없다. 적성을 찾으려면 이것저것 많이 해봐야 한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감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법.
매번 검사를 하고 있지만 좀체 일정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 일이 늘어버린 연구원의 짜증을 듣고 사탕을 까먹을 무렵, 또 다시 빈 방 안에 들여보내졌다. 그냥 아무거나 해봐라, 그런 의미가 분명한 방 안에서의 방치. 바닥이나 벽이 꽤 푹신푹신하고, 텅 빈 줄 알았더니 읽을거리가 꽤 있는 걸로 봐서 그냥 바닥에 누워버려도 괜찮은 것 같다.
어차피 할 것도 없겠다, 화성학개론이라고 적힌 책을 집어든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는 유리잔을 깨보라든가, 그런 걸 시켰었지. 깰 수 있을 리 없었지만.
그 다음엔 사각에서 오는 야구공을 쳐내게 시켰었다. 당연히 전부 못 쳐서 잔뜩 얻어맞았고.
실컷 굴려놓고 쉬게끔 생색내는 것도 아니고 어제는 캄캄한 방에서 사색하라고 했었다. 그냥 푹 잤지만.
그리고 오늘은 책이나 읽으란다.(그렇게 지시한 적 없다) 책을 좀 읽다 보니 하품이 나온다, 정해진 커리큘럼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방에서 나가지도 못한다. 귀찮게. 푹신푹신한 바닥에 구멍이나 낼까 하는 심산인 듯 손톱으로 바닥재를 후빈다, 묘하게 탄력이 있어서 뚫리지도 않는다.
"......"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니 더 지옥 같구만. 들어보니 내일부터는 더 빡세게 굴린다고 한다, 이런 케이스가 흔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일이 늘어난 연구원의 분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뭔가 깨어나 주지 않으려나.
"뭘 그리 놀라심까? 마치 귀신 사진보고 너무 놀라서 정권지르기 하다가 모니터 부숴먹은 사람처럼?"
물론 평범한 사람이 듣기엔 다소... 가 아닌 상당히 어이없는 말일 것이다. 그도 그럴게 보통은 게시판을 맛본다느니, 갑자기 휴대폰을 물어뜯는다느니, 탄산보다 짜릿하다면서 건전지를 핥는다느니 하지 않을테니까, 아무튼 그때서야 자신이 내밀어보였던 과자봉지에 손을 넣어 몇개 꺼내곤 먹기 시작하는 동월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 구멍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소 충격이었지만... 뭔가에 홀린듯 부부장의 번호 마지막자리를 입력한뒤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스파이스!"
격렬하게 스톱이라 외치며 벽을 치는 동월을 보고 깜짝 놀란 탓에 손에서 놓친 휴대폰이 붕 뜨는 순간, 반사적인 가슴 트래핑으로 진로를 역전시켜 다시 캐치해내고선 한숨을 돌리는 그녀였다. 겸사겸사 정신도 좀 차린듯 싶고...
"왜 다들 일단 소리부터 지르는지 모르겠슴다."
물론 대개 상상도 못한 엉뚱한짓을 해왔기에 그런 자신의 행동을 보고 놀란 사람을 보고 놀라는 거겠지만...
"엥, 그랬슴까? 대다내~"
시공의 틈이었지만 그것을 없앴고, 포스트잇으로 흔적을 지운거란 동월의 말에 영혼없는 박수가 전해졌다. 물론 한손엔 휴대폰, 다른 손엔 과자봉지가 들렸으니 부스럭거리는 소리밖에 안나지만...
"...머, 어쩌겠슴까. 게시판 하나쯤은 작살날 수도 있지여. 코뿔소인데."
아무렴, 괜히 목화고의 저지먼트를 상징하는게 코뿔소겠나. 학교의 역사를 거듭하며 수많은 코뿔소를 양성했다는 소문은 그녀가 중학생이었을 무렵에도 심심찮게 들려오던 이야기였다.
"근데 누가 보면 얼탱이 없을거 같네여. 특히 쀼장은 이거 보고 화는 커녕 우시진 않을까 걱정임다."
그 사람, 대치상황에선 언행이 과격해지는거 보면 꽤 감정적인거 같으니까. 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아마 저지먼트 부실에 가장 오래 있는 이를 꼽자면 당연히 은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수업이나 친구들과 노는 시간, 비번때는 자리에 없었지만, 그 이외에는 어지간하면 그는 저지먼트 부실에 있었다. 부장이기에 순찰을 자주 나가는 것도 아니고 ㅡ물론 이것도 최근엔 샹그릴라 때문에 매일 나가고 있다.ㅡ 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으니까.
허나 그런 그도 완전히 무적인 것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다른 이들은 근무표대로 하는 순찰을 그는 매일매일 하고 있었다. 물론 정확히는 혼자가 아니라 월광고등학교 부장인 '웨이버'와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매일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박살낸 샹그릴라는 총 129알.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이 뿌려져있을 가능성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보고서에서는 계속 샹그릴라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대체 얼마나 뿌린 것인지. 얼마나 더 실험이라는 것을 계속할 생각인지.
"...흐아암."
어제도 밤 늦게까지 순찰을 돈 것 때문일까. 피로가 조금 쌓였는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고개가 위로 갔다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갔다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순차적인 규칙적 운동을 하면서 왔다갔다 했으나 그럼에도 책상에 엎어지지 않고 그는 꾸욱 버텼다. 아직 잘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졸고 있는 와중, 철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후에 두 손으로 제 뺨을 톡톡 쳤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크게 하품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졸아버렸다는 것이 조금 당황스러운지, 그는 냉장고로 간 후에 물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머그컵에 따른 후, 다시 물을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이어 벌컥벌컥 마시면서 그는 잠을 깨려고 했다. 커피라도 사는 것이 좋을까. 한번만 더 졸면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쭈욱 기지개를 켜며 자리로 돌아왔다.
"알고는 있지만... 쉴 수도 없어서 말이지."
피식 웃어보이면서 그는 일단 안심시키려는 듯, 다시 쭈욱 기지개를 켰다. 아마 옆에서 보면 보고서를 한창 작성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부원들이 정리해서 올린 보고서를 취합하고 검토하는 일을 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건 그에게 보지는 말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쨌건 이건 부장인 자신이 작업하는 것이었으니까.
"부작용? 모르지. 아직 성분도 검토되지 않았는데. 하지만 능력을 단기간에 올리는 약? 그것도 불법 유통되는 약? 안봐도 뻔하지."
얼마전, 세은의 담당 연구원이 분석을 해보겠다고 게시판에 포스트잇을 붙이긴 했지만 따로 들려온 소식은 없었다. 그래도 바이오키네시스 계열의 연구원이니까 아마 어지간한 것은 대부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은우는 다시 한번 쭈욱 기지개를 켰다.
인핸스드 컨디션 능력으로 벽을 부수곤 피곤해 바로 잠든 아지 옆에 여로가 다가와 최면을 걸기 위해 말을 걸려다 이경이 목덜미를 잡아끌어 막곤 웃는다.
태진과 청윤이 각각 능력을 쓰고 무서운 표정을 짓지만 청윤은 공리주의 책을 태진은 리라가 춤추는 영상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경진은 태진을 보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화면 속 리라에게로 넘어가 아이돌 시절 춤추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진으로 바뀌곤 검정색 색연필로 지워버린 뒤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이 검정색을 배경으로 수경과 혜우가 등장, 혜우는 손바닥에서 피를 흘리다 이를 닦으니 치료되고 수경은 동전을 던지다 이를 텔레포트 시킨다.
텔레포트된 동전은 부실에 있던 혜승이 얼떨결에 받고 녹여버리고 당황하지만 류화가 그걸 보고 화내며 손으로 불을 조금씩 내뿜다가 뒤에서 능력 조절에 실패한 세나가 날아가자 놀란다.
바깥에서 낙조와 동월이 진검승부를 할 것처럼 포즈를 잡고 낙조는 전력질주, 동월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날카롭게 바꾸며 달려들지만 바로 등장한 한양의 염동력에 둘 다 막히나 세나가 뒤에서 날아가자 한양이 능력을 쓴 바람에 둘 다 밀려 넘어진다.
교실에서 소예, 이레, 위유가 등장해 소예는 식물을 성장시키고 이레는 손에 깍지를 끼고 이를 구경하고 위유는 다 무시하고 자고 있지만 뒤에 세나가 지나가자 소예는 화분을 뒤집어쓰고 이레는 머리를 감싸고 주저 앉으며 위유는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 능력을 사용하자 식물 성장이 멈춘다.
세나는 수강, 아영, 애린이 있는 곳까지 날아간다. 수강은 지진 능력을 선보여보고 아영은 와이어를 붙잡고 버티고 한손에는 토끼를 다른 손으로는 와이어를 이용해 아영의 균형을 잡아주던 애린이 세나가 날아오자 비웃지만 놀란 아영의 빔을 맞고 새까매지자 바닥에 처박혀 흙투성이인 세나가 이를 보고 비웃는다.
나랑이 스킬아웃을 쓰러트리지만 바로 앞에서 우경이 스킬아웃을 대여섯명 쓰러트리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자 째려보나 연홍이 사이에 끼어들어 둘에게 약과를 건네주자 바로 받는다. 이때 스킬아웃을 훨씬 더 많이 쓰러트리는 정하가 등장한다. 장면이 바뀌고 집중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사실 혜성과 철현의 옷에 묻은 더러운 부분을 지워준 것이었고 둘이 시끌시끌하게 좋아하자 손가락을 튕겨서 뒤에 있는 요리를 데운다. 이때 뒤에서 어느샌가 다가온 희야가 웃다가 오묘한 눈을 뜨니 셋이 뭉쳐 무서워한다. 이에 희야는 얼음을 맨손으로 그대로 가져다주며 의아해한다.
은우가 거대한 컴프레스 볼을 날리고 세은은 그 장면을 보며 강력한 여파에 변신이 풀리는 장면을 끝으로 인물 소개가 끝난다.
/이전에 모카고 애니 오프닝이 나오면 캐릭터들이 어떻게 나올지 질문을 했는데 이후 청윤주가 망상으로 아예 인물들 장면이 어떨지 썼답니다. 30명이나 되다보니 비슷비슷하거나 친분 있는 캐릭터들끼리 묶었어요! 솔직히 캐붕이 있을수도..?
나중에 캔커피라도 사서 먹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며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번엔 뒤쪽으로 간 후에 창문을 열었다. 환기를 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체력 보충을 위해서라도 주말에는 조금 잠을 깊게 잘 필요가 있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 더더욱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깍지를 낀 후에 가볍게 스트래칭을 했다. 얼마나 유연성이 좋은지 허리가 쭈욱 아래로 내려갔고 땅을 가볍게 짚은 후에 그는 그 상태에서 몸을 약하게 흔들다가 숨을 후우 내뱉었다.
"좋아. 조금은 깨는 것 같네. 그 와중에 왜 내 왼손을 걸어? 걸거면 네 왼손을 걸어."
애초에 이 손을 가져가봐야 무슨 쓸모가 있냐고 하면서 그는 피식 웃었다. 이어 그는 자리에 앉았고 가만히 철현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피식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어떻게 생각해? 이번에 들어온 애들."
3학년 동기. 여러 의미에서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렇기에 그는 괜히 싱긋 웃어보이면서 조금은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후배들, 그리고 올해 새롭게 들어온 이들은 한번도 보지 못했을 표정이었다.
"일단 난 내년에 누구를 부장으로 세우고 가야 좋을지 고민이 되는데 말이야. 현 18살 라인 중에서는.. 그나마 청윤이가 나을 것 같지만... 그 애는 그 애대로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지. 당장 정할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조금 볼 필요는 있겠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이어 철현의 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333 >>338 >>343 좋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34 이거 제대로 본 적은 없었는데 진짜 비슷하네요? >>337 확실히 어울리네요! >>339 그것도 진짜 어울릴 것 같아요! >>340 방영은 (울먹) 글.. 글쎄요.. 하면 좋겠네요.. >>342 사실 능력 묘사가 좀 힘든 캐릭터는 그냥 캐릭터성이라도 좀 더 살리려고 했던거라..(소곤) 이경이랑 이레랑 연홍이랑 애린이 전부 미안..
3번 말렸다. 더 이상 걱정하는 말을 하면 잔소리가 되고, 듣기 싫어지는 말이 된다. 은우가 창문을 열자 철현은 반대편의 창문과 부실 문을 열어 바람길을 내었다. 바람이 불며 부실 안의 탁한 공기가 시원한 공기로 바뀌어 나갔다.
철현은 은우의 유연성에 감탄하며 뻣뻣한 줄 알았는 데 자신보다 더 유연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내 손은 이미 가져갈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야?"
하도 많이 걸고 다니다보니 채권자가 삼천만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은우가 피식 웃고 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자 자신의 유머가 먹혔는 가 싶어 뿌듯했다. 은우는 자신에게 신입생들을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다. 아마 우리도 졸업을 해야하니 새로운 부장이나 부부장에 걸맞는 친구가 있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을 사람에게 물었어야했다.
"아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아직 제대로 그들과 만나보지 못했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함께 일한 적도 없다. 신입생들과의 첫번째 임무에서 그는 훈련 때문에 불참했으니까. 이름과 얼굴, 능력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적으로는...음...모르겠네?"
철현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능력을 보고 지휘를 하거나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적합한 능력, 또는 성격이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것도 나름대로의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함부로 말을 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건 어떤 감각일까. 한 번도 말 섞어본 적 없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오늘도 어김없이 방과 후가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모두가 나갈 때까지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없이 생각하며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한 통의 편지가 거기 놓여있었다. 정성스러우며 유치한 수단인 그 편지에는 낯선 필체로 간결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오늘 방과 후에 본교 뒤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고백편지, 라는 것일까. 대체 왜 나한테, 라는 생각 외에는 나지 않았다. 보낼 만한 사람과 마주치거나 대화한 기억조차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잠시 더 편지를 보다가 집어서 가방에 넣었다. 가방은 그대로 어깨에 메고, 편지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무시할 수도 있지만 예의상이든 뭐든 확실한 대답을 해주어야 뒤탈이 나지 않을 것이었다. 가는 내내 뭐라고 거절할지 그것만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 확실하고 깔끔하게 포기하게 만들지.
최대한 아무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며 본교 뒤로 갔다. 거기엔 편지를 보낸 걸로 보이는 남학생이 이미 와있었다. 명찰을 보니 3학년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인사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남학생은 나를 보자마자 혼자 놀라고 혼자 부끄러워 하며 진짜 나왔네, 나와줄 줄 몰랐어, 같은 말을 했다. 편지를 보낸 건 그쪽이면서. 편지가 있길래 나왔을 뿐이라고, 서론을 끊고 본론을 물었다. 무슨 용건이신가요. 무슨 용건인지 다 알면서, 이미 할 말도 다 정해놓았으면서, 무표정을 일관했다. 내가 어떻건 들뜬 남학생이 한 말은 지극히 뻔했다. 입학식 때부터 지켜봤다면서 한 눈에 반했다던가, 그랬다. 조금 더 구구절절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건 선명했다. 일방적인 고백 끝에 나는 허리를 숙였고,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다. 뻔한 이유, 지금은 학업과 저지먼트를 병행하고 있어 여유가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남학생은 그래도 괜찮으니까, 연락처 교환이라도, 그런 말을 덧붙였지만, 나는 눈을 내리깔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를 길 없는 벽 앞에 남학생은 결국 그의 마음을 접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상황은 끝났다.
그래 알았어, 라는 말을 끝으로 남학생이 먼저 터벅터벅 자리를 떠났다. 그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됐을 쯤, 나도 가려고 돌아섰는데, 하얀 잔상이, 아니, 사람이 있었다. 같은 교복에 새하얀 머리, 그리고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354 한양이가 낙조 때문에 골치 아파한건 인상에 깊게 남아서 비슷하게 넣어봤죠! >>355 >>366 종이학.. 이런 좋은 연출이 있는데.. 이경주도 연출 정말 잘하시는데요? >>356 이것도 재밌겠네요.. >>369 리라 연출은 능력도 딱 아이디어가 생길 능력이라 그냥 머리에 팍하고 박혔답니다!
"아직 뭔가를 알긴 이르긴 하지. 나도 따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1학년은 그렇게 많이 없으니 말이야."
물론 공적인 이야기야 부장으로서 지시를 하는 등으로 하긴 하지만, 사적, 즉 따로 이야기를 나눈 이는 그다지 없었다. 그래봐야 두 명일까. 그와 동시에 그는 살짝 자괴감이 들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잡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면서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난 그래도 부장인데 이번에 새로 온 애들과 이야기도 제대로 안 나누고. 이래도 되는건가. 애들이 힘들어할 것 같아서 피했는데 조만간에 한명씩 불러서 면담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젓고 다시 고개를 올렸다.
"시간이야 많지. 일단은 가을까지는 생각해보려고. 그래야 나도 인수인계를 하고 무사히 넘길테니까. 작년에 나도 그때쯤 인수인계를 받기도 했고."
말을 마치며 그는 괜히 자신의 책상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과연 내년에 여기에 앉는 것은 누가 될런지. 졸업하고 나면 세은이 저지먼트에 계속 있는다는 가정하에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세은이 계속 저지먼트를 할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으아. 역시 주말에는 조금 쉬던가 해야겠어. 밤에 순찰은 나갈거지만."
내 휴식을 위해서 서류 조금만 나눠줄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마 실제로 맡길 생각은 아니고, 어떻게 나올지 보려는 모양이었다.
온갖 상황에서 눈치를 보는 주제에 썩 기민하진 않다. 낙조가 이레를 보는 동안 정작 그녀는 방금 맞닿았던 제 주먹을 보고 있었다. 아직도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별안간 들려온 호칭에 그제야 그녀도 낙조를 보았다. 좋은 애. 좋은 애?
"그, 그렇... 으. 네. 안 그럴게요. 선배."
그냥 그렇게 부를 거면 이름을 물어본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 이름에 집착하는 이레답게 절로 반박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눈앞에 있는 게 낙조였던지라 금세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다만 선배라고 부를 때 미묘하게 발음이 강하다. 악보였다면 분명 스타카토가 붙었을 것이다. 싫은 소리 대놓고 못하겠으니 제 나름대로 작은 반항이다. 상대가 이름 안 불러주니 자기도 부르지 않겠다는 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레는 낙지를 언급하는 게 금기사항이라는 점도 머릿속에 잘 새겨 넣었다. 이제 그녀는 낙조의 앞에선 별명을 넘어 '낙지'라는 생물 자체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며, 들어가는 음식조차 먹지 않을 것이다!
"싸울...? 아!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음. 분명 공예부에도 있었을 텐데..."
왜 싸울 의지가 필요하지? 이레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으나 곧 사라졌다. 완성품을 줄 세워두고 비교하는 게 싫은 사람도 있을 테니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을 터. 게다가 움직이는 인형이라니 무지 귀여울 것 같다. 강한 인형이라는 부분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필터링해버렸는지 또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납득해 버렸다. 참으로 편한 사고방식이었지만, 정작 이야기 속에서 언급된 이는 편하지 않은 듯했다. 목표물을 찾아 이레의 고개가 돌아가자 당사자는 점점 더 머리를 푹 숙인다. 정수리를 넘어 뒷머리가 보일 정도다. 원래 저렇게 집중력이 좋은 아이가 아니었는데 희한한 일이다. 그래도 할 마음이 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방해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레는 다시 원래 대화 상대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튼. 일단 인형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오늘 안에 하실 수... 아. 물론. 당연히 하실 수 있겠죠."
이레는 급히 말을 바꾸며 다시 바늘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자, 친구야, 우리 바늘을 이렇게 잡아볼까? 교육 방송이었다면 그런 음성이 흘러나왔을지도.
최이경의 일생에 있어 위기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인첨공에 온 것 부터가 인생의 커다란 위기였지. 중학교에서 능력의 정보가 풀린 것도 위기였고 얼마 전 샹그릴라 사태도 명백한 위기였다. 이 머리부터 눈을 지나 피부까지 하얀 소년은 그럭저럭 재난 체질인 것이다. 물론 이 미래적이고 지독하게도 어두운 도시에서 고난이 없는 삶은 한 손에 꼽겠지만. 그리고 오늘도 이경은 위기를 맞이했다. 교사 뒷편, 인적 드문 곳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던 때였다. 아직 이름을 알지 못하는 3학년 선배와, 샹그릴라 사태 때 같은 조원으로 활동했던 1학년 동기 천혜우가 왔다. 이경은 자신이 눈치 없는 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저 둘이 이 곳에 오는 이유도 직감했다. 동시에 자신의 상황도 알아차렸다. 음, 좀 크게 문제인데. 본성이 차분하고 감정표현이 적은 만큼 이경의 심정 역시 목에 사회적 중상의 칼이 들이밀어졌어도 적당히 무덤덤했다. 다소 일방적인 감정 전달은 오래 끌리지 않았다. 스위스의 산맥도 한 수 접을만한 높은 벽에 좌절한 남학생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경은 몸을 웅크렸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경의 하얀색은 일반적으로 눈에 띄는 색이라는 것이다. 최이경은 눈이 반쯤 감긴 무감한 무표정으로, 잠시 천혜우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 가라앉은 푸른색 머리카락 아래에 불쾌감 세 글자가 명확히 박혔을 때 하얀 소년이 입을 열었다.
"먼저, 변명을 하자면."
본래 색이 없던 소년의 표정에 색이 덧입혀졌다. 믿어 달라는 듯 시선이 이리저리 굴러가는, 당황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경은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항복 의사에 가까운 제스처를 취했다.
"제가 몰래 온 게 아니고 여러분이 온 겁니다. 여기 내가 먼저 있었어요."
이경은 자신이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순정만화나 로맨스코미디의 클리셰에 당했음을 피력했다. 물론 이 상황은 도내최고 미소녀와 플래그를 쌓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한 소년의 물리/정신적인 위기라는 점에서 좀 문제가 달랐다.
"그리고 내가 여기 숨어있던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하지만 이경은 다소 억울했다. 평소와 같이 부러 꾸며낸 표정임에도 진심이 가득 묻어나는 것은 그가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소한데,
"이꼬라지라서요."
최이경의 오늘 하루가 다른 때보다도 비교적 다사다난했다는 것이다. 평소 관리가 되어있지 않아 여기저기 손을 뻗던 숱많은 하얀 머리는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고 피부는 평소보다 묘하게 빛이 나고 홍조가 돌았다. 무엇보다,
왜 치마에요.
//여러분의 바람대로 4번으로 했습니다. 사실 그냥 도망치기만 하고 당하지는 않은 걸로 했는데 여러분의 니-즈 충족을 위하여(이경 : 야.)
"전부 다 나가버리는 비상사태만 일어나지 않는다면야 어떻게든 되겠지. 오. 그보다 밥을? 글쎄. 내가 있는 것보다는... 내 카드를 더 좋아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말을 마치면서 은우는 살며시 자신의 주머니를 손으로 톡톡 쳤다. 그 안에 들어있는 카드와 연결된 계좌에는 얼마나 들어있을까. 그건 오직 은우만 알 뿐이었다. 한편, 장난스럽게 말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내용 역시 장난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1학년이라면, 혹은 올해 새롭게 들어온 이라면 부장과 따로 밥을 먹는 것은 역시 어색하고 힘들지 않을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언제 한 번 1학년들이나 2학년 동기들끼리 모인다고 한다면 카드만 주고 알아서 즐기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은우는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아까부터 계속 일을 안하려고 하고, 묘하게 자신에게 미루는 것 같은 철현을 은우는 정말로 빤히 바라봤다. 물론 특별히 무슨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미안하지만 너도 포함이야 .어딜 빠져나가려고."
3학년이면 3학년답게 모범을 보여야지. 그 말을 하는 순간은, 조금 진지했다. 저지먼트 업무에 대해서 그는 따로 타협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은 당연히 해야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3학년이기에 자신의 일을 맡길 수도 있었다. 물론 제 1순위는 부부장인 한양이지만, 한양이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다른 3학년이 도맡아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복구해서 다시 완료할 수 있다면 태워도 좋아."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는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초코바를 하나 꺼낸 후에 그에게 가볍게 던졌다. 이어 자신도 먹으면서 그는 모니터의 서류를 저장한 후에, 일단 창을 닫았다. 조금 쉴 생각인지 그는 편하게 자리를 잡고, 살며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참고로 문자로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경진이는 놀릴 거 같고 정하도 이하동문이고 한양이한테는 전에 한 게 있어서 차마 연락을 못함. 랑이한테 연락하기엔 별로 친하다는 느낌이 없고 아지는 같은 반이라 잘못하면 당할 거 같아서 도움 요청이 좀 그렇고(아니면 이경이보다 먼저 당했을 가능성이 있음)(아지주가 없으니 말을 아낀다)
여로는 논외.
아 이레주 어서오세요!
>>411 여로주 안과가지 않을래... 근데 나도 가끔 눈이 충혈되긴 해() 그럴 때는 눈 감고 누워있지....
>>410 진짜로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411 눈이 너무 심하면 병원에 바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413 그 카드를 어쩌다 빌리게 된 수강. 부원들 앞에서 번쩍 들어올리며 "자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영광은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은 자에게 올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치지 않으셨습니다! 부장님에 대한 모두의 감사를 외치겠습니다! 녹색! 섬광! 녹색! 섬광!"
>>0 잘그락거리는 무언가 접혔다 펼쳐지는 소리 그리고 그에 맞춰 한 템포 늦게 도르륵거리는 무언가가 거칠게 돌아가는 소리 침착하면서도 방정맞은 목소리가 좁은 길가를 메웠다.
"거참 성질도 급하심다~ 아직 얘기할게 산더미인데 어디 가심까?"
무언가를 억지로 질질 끌고가는 소리 옷깃이 쓸리며 밑창은 아랑곳않고 옆축이 갈려나가는 거친 신발소리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좁은 길가를 메웠다.
"...아, 물론 알고 있슴다. 당신네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부조리한 사회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꾸려진 일종의 팀플레이라는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보호받질 못하기에 스스로 보호하고 보신하려고 뒤가 구린 일이나 대놓고 나쁜 일에도 손댄다는 거 말임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천천히 느려지며 도르륵거리는 조인트의 마찰음이 가까워진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선을 넘어버리고 누군가는 돌이킬수 없는 과정을 밟거나 변질되어버림다. 누구든 처음엔 좋은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럼 어째서 뒤가 구린 일에는 쉬쉬하는 걸까여?"
잘그락거리는 발리송, 이것은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다. 도르륵거리는 조인트가 일품인 큐브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건... 글쎄... 걸을 힘도 없어 다리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나려는 사람 탓에 흐트러진 옷가지와 그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완장뿐일까?
"게다가 말임다. 누군가의 명백한 상해가 있는 부분에서 이미 정당성은 벗어난거 아님까? 봐여, 그 푸닥질을 하고도 즈만 여기 이렇게 상처났지 말임다."
날 끝으로 자신에게 난 상처 하나하나를 톡톡 건드려보다 부러 긁는 척을 하며 씨익 웃어보였을까?
"뭘 아냐고여? 저지먼트 중에서도 싸울 능력은 전혀 없는 떨거지인 주제에? 아... 뭐, 인정함다. 아무래도 즈는 몸 쓰는 체질이 아니니까여. 근데 그건..."
손에 쥐고 있던 날카로운 것이 그녀의 손을 떠나자 무언가를 꺼내려던 상대의 외투 주머니에 정확히 꽂혔다.
"...아, 까비아깝숑... 이걸 손이 아니라 폰을 맞추넹. 아무튼 아까 말 이어서 말임다..."
주저앉은 이는 그대로 얼어붙은듯 숨소리만 들려올뿐 멈춰있었고, 그녀는 천천히 앞까지 다가가다 몸을 웅크려 눈을 마주쳤다.
"그건... 저지먼트일 때의 이야기니까여. 뭐, 이해함다... 가끔 인수인계 개판인 스킬아웃도 있다고, 그래서 아무데나 덤볐다가 저-기 높으신 분들 건드리거나, 겁나짱센 저지먼트를 건드리거나, 쳐들어가고보니 안티스킬인 경우도 있다고..."
여전히 한 손에 쥐고 있는 큐브는 그 짝을 맞출 때까지 돌아가고 있었고 한줄, 두줄... 그리고 세줄째 저들의 색을 찾아가려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잘 아냐구여? 아이 참, 아까부터 말을 해도 못알아들으시넹..."
갈곳을 잃고 바둥거리는 눈동자를 통해 간신히 맻혀진 상은 여느때처럼 생기없는 보라색 한쌍을 비추고 있었다. 히죽이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내가 거기 있었으니까 잘 알지¿"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맞춰진 큐브
"뭐, 이젠 작년얘기지만 말임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상대에게 장난스럽게 이마를 맞부딪히며 여느때처럼 웃어보이는 그녀였다.
"또 큰일나고 싶지 않으면 그냥 그 자리에 있는게 좋으실 검다~ 얌전히 연행되시거나, 다른 저지먼트한테 붙잡혀서 호된 꼴 당하시기 전에 말임다~"
마치 정말 움직이면 큰일날거라는듯 그의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큐브를 올려놓고 자리를 떠나는 못된 장난은 덤이었다.
"...아, 그리고 말임다. 저지먼트 중에 즈처럼 코뿔소가 그려진 완장은 조심하십셔. 스킬아웃 가지고 인천 앞바다에 퐁듀찍듯 담가버린단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 말임다~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여버렸다. 그 순간 내 불쾌함은 근래 최고점을 찍었다. 과거, 중학교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 때는 상대가 2학년이었다.
느닷없이 방과 후에 찾아와 시간 좀 내달라더니, 느닷없이 고백을 해왔다. 거기까진 상관 없었다. 똑같이 거절했다. 그 때는 학업 만을 변명으로 삼았다는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상대가 제법 인망이 좋았던지, 주변에서 나를 향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무시했지만, 끝까지 무시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안 들려오게 될 때까지 약한 환청 증세가 있었다.
그 때가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며 그 시기의 짜증이 지금에 덧씌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려던 찰나에, 이경의 표정이 눈에 비췄다. 명백히 당황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혹시 고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자 불쾌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일단 변명을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어보니, 그럴 만 했다, 라는 결론이었다. 분명 왔을 때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본 건 아니니까 먼저 있을 수도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 있을 만한 이유도...
나는 조용히 눈을 굴려 이경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리고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여학생이 아닌 거죠?"
혹시, 만약에, 설마 라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확인차 물어보고 비로소 표정을 풀었다. 나도 이경도 이런 상황이라면 서로 말을 맞추는게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됐어요. 오늘 본 걸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겠다고만 하면 나도 본 걸 입 다물어 줄게요."
숨어 있었다는 걸로 보아 원해서 저런 차림을 하고 있는게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로 입 다무는 걸로 합의하자, 그렇게 말하고 나는 내 길을 가려 했다.
순찰을 이처럼 기다린 1학년은 없을 것이다. 매일매일 근무표를 보며 방긋 웃고 지나간 나날도 며칠째였다. 오늘 같이 순찰할 상대는 월광고의 저지먼트 둘과 목화고 저지먼트의 부부장 한양이었다.
"안녕하세요오~ 목화고 저지먼트의 1학년 한아지입니다아~ 부부장님 빼고는 초면이네요~ 모두 잘 부탁해요오~"
방긋방긋 웃으며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것이다. 첫인상이 순해 보였던 탓인지 월광고의 저지먼트 부원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떠올라 있다. 순찰하는 분위기는 꽤나 좋고 매끄러운 스몰토크가 오고갔다.
그 와중에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지는 부부장의 얼굴을 흘끗흘끗 본다. 지난번 혜우와 함께 순찰했다가 무서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학교 저지먼트와 있을 때 그런 얘기를 하면 명예롭지 못한 것 같아서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묻지 못하겠다.
"저어 부부장님~"
그래서 일단 불러보고서 자신이 걱정되는 부분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느릿느릿 고민을 해보는 것이다. 지난 번에는 랑 선배의 도움으로 괜찮았지만 자신도 큰일날 뻔한 적도 있었다. 저지먼트의 일은 사실 꽤 위험하고 자신은 전투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닌가!! 이런 고민을 아지는 남몰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구할 사람이 필요했다. 침묵이 흐른 뒤 입가에 대었던 손을 떼고서 묻는다.
"부부장님은 위급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이렇게~??"
삼단봉을 양손으로 들어올려 내리치는 시늉을 어설프게 내 본다. 월광고의 저지먼트 부원들이 그걸 보고 웃지만 그 웃음은 비웃는 것이라기보단 뉴비를 바라보는 고인물의 웃음과 같았다. 즉, 핥고 싶어하는 느낌이 다분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네요~!! 물고기는 반가울 때 꼬리를 흔들거나 세우거나 하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죠~" "수족관에서 벽을 두드려서 물고기를 놀래킨 적은 있지만요~"
물고기의 심리를 아는 것은 강아지나 고양이보다 꽤나 어려울 것 같다!! 놀라움이라는 감정 비슷한 게 존재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외의 감정은 있으려나? 물고기의 멍한 눈동자를 상상하니 아지 자신도 멍해지는 것 같다. 산책법을 수련해서(이런 말은 안 했다) 나중에 도전해보라는 말에 네에~ 하고 밝게 대답하는 아지다.
"와아... 그럼... 돈이 많이 들지 않나요~!"
의외로 아지의 관심사는 쩐이다!! 그야 부모님의 빚으로 인첨공에 오기를 자원한 소년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쩔쩔매는 듯이 묻는 것이다.
"불편한 점이요~"
이 긍정적인 소년은 시간을 들여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만 불편한 점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허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 알아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룸메이트가 방 안에서는 속옷만 입고 돌아다녀요~"
...정말 불편한 점이다.
"아~ 그리고 여로네서 밤새 게임하기도 힘들어요~" "성여로라고 같은 반 옆자리 친구인데요~ 월 선배님처럼 자취방에서 지내거든요~"
기다리고 기다리...진 않았던 것 같은 실습날이 돌아왔다. 이론이 나은지 실습이 나은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어차피 둘 다 공부라는 범주에 속하므로 즐거운 일이 아님은 분명한다.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가 있을 성싶다.
"내가 소리를 듣지 못하면 성공이야. 소리가 들리면 돌아보도록 할게."
그렇게 말한 연구원이 등을 보인 채 뒤를 돌았다. 요컨대 청각을 차단시키라는 뜻이었다. 연구원의 말을 들은 이레는 곧바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앗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다. 라디오의 전원을 꺼서 더 이상 소리가 흘러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복잡한 연산을 거쳐 이쯤이면 통했으리라 생각한 이레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들리나요...?"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목소리에도 연구원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성공? 아니면 또 저를 놀리기 위해 안 들리는 척을 하는 것뿐일지도. 의심을 지우지 못한 이레는 몇 마디 더 이어보기로 했다.
"음... 지난번에 만드셨던 쿠키. 그거, 되게 맛...없었어요. 사실 다른 것도... 좀......"
기왕 이렇게 된 거 속에 담아뒀던 말 해보기로 했다. 말끝을 흐리며 힐끔 연구원을 보니 여전히 묵묵부답. 진짜 들리지 않는 걸지도. 다시 청각을 돌려주자 그와 동시에 연구원이 돌아본다. 방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역시 다 듣고 있었을까? 초조해진 이레가 손을 꼼지락거리자 연구원이 시계를 가리키며 활짝 웃는다.
"초침 소리가 들려서. 그전엔 조용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안 들렸거든. 색다른 경험이었어."
보통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당황할 것 같은데. 하여튼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레는 남몰래 안도했다.
이경은 오늘 있었던 가벼운 지옥도를 떠올렸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란 원래부터 사시사철 학업 스트레스가 주는 광기가 스며드는 존재들인데, 이 평등따위는 커리큘럼에 사용할 약재로도 쓸모가 없어서 산업폐기물과 함께 던져버린 인첨공은 여기다 레벨이라는 스트레스 발생요소를 추가했다. 그 결과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풀만한 즐거움을 찾게 되었는데 이경은 오늘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비단 이경만의 일은 아니었다. 느긋한 태도에 몽실몽실한 포메라니안 같은 웃음으로 귀여움을 받는 한아지라는 동급생 겸 이경의 친구가 그 시작이었다. 아지 너 피부 좋다~ 라는 말로 시작된 학급 내 여학생들의 광기는 잿빛이 도는 회색 머리에 리본을 매달고 얼굴에 분칠까지 하게 만들었다. 피부가 좋고 원판이 훌륭해서 크게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당시 이경은 강 건너 불구경으로 보았더랬다. 다행스럽게도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었는데, 대신 새로운 희생양을 물색했다.
여기서 이경이 찍혔다.
평소의 태도는 친근하고 무난한데다가, 하얀 머리와 눈이 신비롭다는 평을 아주 가끔 듣던 최이경은 특유의 무색이 눈에 띄어버린 것이다. 슬그머니 도망치려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결국 이경은 치마까지 입게 되고 말았다. 성여로는 그새 도망갔는지 없고 나는 치마에 화장에, 한숨을 내쉬면서 만족했으면 갈아입겠다고 했으나,
오, 안녕하세요 양궁부.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아 입부 권유요? 이 시기에요? 죄송한데 제가 지금 이 모양인데 좀 나가주실래요. 안 그러면 너희들 기억에내가뭔짓을할지를모르겠는데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경은 교실을 박차고 나가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만 골라 뛰고나서 숨어든 곳이 인적드문 교사 뒷편이었고, 애매한 존재감은 그대로 잊혀서 혜우와 남학생의 고백장면까지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최이경,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남자야."
이경은 최소한의 가능성도 무시하지 않는 철저한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찌되었든 서로 어디에서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어디가서 소문이 날 것 같지는 않았다. 방금 그 선배도 그렇게 확실하게 차였으니 어디가서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니. 교사 뒷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될 것이다.
"저기 잠시만."
하지만 이경은 혜우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앞서 말했듯 현재 이경은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발이 좁은 건 아니었으나 믿을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반, 자기 업보가 있는 것이 반의 반, 이미 자신보다 앞서 희생된 사람이 나머지라서.
오늘은 월광고 저지먼트와 함께 순찰을 도는 날. 오늘의 파트너는 희야와 함께 한양의 저지먼트 귀염둥이 투탑인 한아지였다. 다들 집결지로 모이고, 한양은 월광고 저지먼트들과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야 한양이는 신입생 때부터 활동했기에 월광고의 저지먼트와 교류한 경험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오랜만이야~ 3학년이라 공부하기 바쁠 텐데, 이렇게 협조해줘서 고맙다. 나중에 시간 나면 식사나 한 번 하자. 아, 이 사람은 우리 신입생 한아지군이야. 인사해요, 아지군~ 제 동기들이에요."
평소 후배들에게 존대를 하다가 동갑인 동기들에게는 반말을 하는 한양이었다. 어쨋거나 밝은 후배도 있고, 한양도 다 구면이기에 순찰을 한다기 보다는 넷이서 가벼운 스몰토크를 하며 걷는 거에 가까웠다.
그렇게 순찰을 돌다가 아지는 한양에게 질문을 했다.
"응? 왜요, 아지군?"
아지의 질문은 한양이 위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후배 입장에서 더 오래 활동한 선배의 노하우가 궁금할 만도 했다. 삼단봉을 내리치는 아지를 보고 웃으면서 답했다.
"아니요, 그렇게 안 해요. 그냥 능력 쓰죠."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사람마다 대처하는 방법은 다 다르답니다. 기회가 되면 아지군의 신체에 맞는 스킬을 알려주고 싶네요."
아지의 경우 레벨 1이지만 오버리미트라는 능력은 순간적으로 막강한 화력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순간적일 뿐이고 , 능력을 한 번 사용하는데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레벨이 높아지면 지속시간이 늘지만..전쟁과 전투는 다르다.
'우리의 상황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야. 전쟁에서 전투가 한 번 뿐일 수가 없잖아. 아지의 경우 능력을 정말 신중하게 사용해야 해. 하루에 몇 번의 전투를 치를지 모르니깐.. 설령 능력을 바로 사용해서 첫 전투를 가져간다고 해도 체력을 소진해서 나머지 전투에서 지면 전쟁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래서 능력 외의 전투능력이 가장 필요한 부원이야.'
"나중에 우리 도장 놀러오면 알려줄게요."
한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순찰을 하다가.. 스킬아웃으로 보이는 무리들을 발견한다. 한양은 샹그릴라가 있는지 신체검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덤비려고 하는 스킬아웃 뿐이었다.
"나중에 알려줄려고 했는데..지금은 예습한다고 생각하세요."
한양은 동기에게 목검을 건네며 말한다.
"능력도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스킬아웃을 제압하는 상황이에요. 제가 아지군이 됐다고 생각하며 싸워보죠. 참고로 자세한 기술을 알려주는 건 아니예요. 기술은 본인이 나중에 숙달하고, 저는 방향을 알려드릴 뿐입니다."
불쾌함이 가신 자리엔 의문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여학생이 아닌 것을 물은 뒤에 조금 더 관찰하는 시선을 보냈다. 내 눈에는 저 이질적인 치마가 제일 먼저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얼굴도 묘한 빛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머리도 저번과는 다른데, 저건 그냥 오늘 손질을 잘 했을 뿐일지도 몰랐다. 종합적으로 판단하자면 옷만 입혀진게 아니라 화장에 머리 손질까지 당했거나, 라는 추측이 들었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경의 모습에 큰 흥미를 가지고 캐묻거나 개인적인 가십거리로 삼으려 들었겠지만, 나는 그런 쪽으론 관심이 없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운 스트레스로 발전하지 않게 될 것이란 확신을 가진 것으로 끝이었다. 이 상황을 서로 떠들지 말자, 그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더는 이경에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었다.
이제 이 자리를 떠나 나는 나의 일정을 보내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이경의 부름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것 만으로 쯧, 혀를 찼다.
왜요, 라는 대답은 고개를 비뚜름히 꺾어 뒤를 보는 시선으로 대신했다. 그 뒤 이경의 용건을 듣고 뭐 그런 걸 시키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너도 내 약점 쥐었으니 이용해먹겠다 이거냐. 나는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앞을 보고, 들을 수는 있을 정도로 말했다.
"기다려요."
그리고 천천히 걸어갔다. 원래 나가려던 학교 밖이 아닌, 아직 열려있을 교내 매점을 향해서 였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15분 정도였다. 한 손에 체육복이 담긴 종이백을 들고 돌아와 곧장 이경에게 내밀었다. 사이즈는 아마 맞는 치수일 것이었다. 예전부터 눈대중으로 크기나 양을 재는 건 곧잘 하곤 했었다.
"돈은 됐어요."
이경에게 체육복을 주고, 돈은 필요 없다는 말까지 하고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가려고 했다.
여담이긴 하지만, 나중에 개인 이벤트를 연다면 나폴리탄 괴담 형식으로 열어보고 싶어요. 다른 분들이 보셨을진 모르겠지만, 나폴리탄 괴담에 등장하는 괴생명체들과 괴현상(통칭 괴이)들을 조사하고 탈출 방법을 메뉴얼로 남겨 괴이의 입구에 붙여놓는다던가 하는 집단(군대, 자경대 등)이 있다. 라는 작품들이 여럿 보였는데요, 이 작품들의 형식을 이용하여 저지먼트 대원들과 함께 괴이 조사(라고 쓰고 소탕이라 읽음)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이런 형식도 가능한가요 캐프틴!?!?!?!!!!!!!!!!!!!!!! (열정 재장착)
지금부터 모든 스토리에는 다 챕터1 결말이나 마지막 전개에 대한 분기점이나 힌트들이 알게 모르게 숨어 있어요!
그렇다고 어떻게 해야 좋은 엔딩이지! 이렇게 의식하기보단..그냥 캐릭터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즐기길 바랄게요! 개인적으로 막 배드엔딩 피해야한다면서..다른 캐릭터들 행동 막고 자기가 다 지시하고 따르게 하고, 막 간섭하고 그런 것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주 가끔 그런 케이스들이 상판에 있는만큼.. 그런 것은 살짝 지양해주길 바랄게요!
아주 솔직히 이경인 혜우가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지금 이 곳에서 얼른 떠나고 싶어하였으니. 이경에게는 애시당초 약점을 잡는다거나 이용한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매정하게 떠난다 할지라도 이경은 아쉬울지언정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깊은 곳에서 흐르는 해류같은 색채의 소녀의 화를 돋구는 취미는 순백의 소년에게는 없었으므로. 단지 당장에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혜우밖에 없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경은 혜우에게 첫인상보다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게다하는, 다소 긍정적인 사견을 갖게 되었다.
눈을 부드럽게 휘며 부러움이 가득한 감탄을 토한다. 인첨공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지만 아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하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돌아온다고 믿는 편이었다. 실제로 최근 레벨이 1로 올라 그런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다.
"도장도 있나요~?" "주소 알려주시면 꼭 놀러갈게요~"
헤실헤실 웃는 것이 정말 < 놀러 > 갈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나름대로 진지하게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배워볼 생각이라는 건 의외일까.
"주머니 살짝만 살펴볼게요오~"
언제나처럼 방긋방긋 웃으면서 신체검사를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어떡하냐는 듯이 선배들을 향해 곤란한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양이 목검을 건네고 제압할 작정인 기미를 보이자 아지는 우왕좌왕한다. 도와야 하나?? 뭘 어떻게 돕지??
"우와아..."
삼단봉을 양손으로 쥐고서 눈을 꾸욱 감는다. 부부장님이니 믿음직하다고는 생각하지만 혜우의 손목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위험한 상황에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도움이 됐으면 한다. 능력이 제 때 발동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마음대로 되어줄지 모르겠다. 그래서 눈을 뜨고서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리라는 스스로 지극히 보통의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통 그런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게 발길 돌릴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후회되고 막막하더라도... 그냥... 어떻게...... 잘......
"흐악!"
발을 휘적이다가 나뭇잎과 얇은 잔가지 하나를 부러뜨린 리라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주변은 온통 녹색이다. 녹색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어디에서 주워 들은 적이 있는데— 역시 카더라는 믿을 게 못 되지. 심신의 안정은 무슨. 아니, 사실 어떤 색이었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침착할 수는 없었겠다. 리라는 담요로 돌돌 감싼 털뭉치를 내려다보다가 애매하게 아찔한 높이의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리라는 후문 쪽에 사는 고양이가 사라져서 한참을 헤매던 참이었다. 다른 고양이면 모를까, 그 고양이는 대체로 자기 구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이 치솟았던 탓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딘가에서 구슬픈 야옹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어딘가가 어디지...— 아? 머리 위?
"찡찡이?"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꽤 높은 나뭇가지에 몸을 얹히고 있는 치즈색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걱정했잖아. 왜 거기 있어. 어서 내려와~ 라고 외치려던 입은 순간 시야 끝에 밟힌 상처에 도로 꽉 닫히고 만다. 다리에 저거, 피... 맞지? 그제서야 리라는 왜 저 날렵한 고양이가 혼자서 충분히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는 나무에 꼼짝없이 갇혔는지 알 수 있었다. 고민은 길지 않다. 그는 어깨에 둘러맨 담요를 동여맸다.
"진짜 일났네. 어떻게 내려가지."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나무타기를 그럭저럭 해내 고양이가 있는 위치까지 올라와 구출을 성공한 건 좋았다. 하지만 두 팔로 고양이를 안은 순간 리라는 뒤늦게 깨닫고 만 것이다. 첫째. 높은 곳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무섭다. 둘째. 올라올 땐 양팔이 자유로웠지만 내려갈 땐 아니란다. 셋째. 전화라도 하려고 했는데 폰이 떨어졌다. 이게 제일 큰 문제다.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뭐라도 해결할 방법이 생길텐데 이래서야 올라오지 않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가지가 튼튼한 걸 봐선 부러지진 않겠지만, 아직 차가운 봄바람이 스칠 때면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안 되겠다."
여기서 버티다가 꽃샘추위를 먹어 예정된 감기를 앓는 것도 싫고, 무턱대고 뛰어내려서 다리를 분질러 먹는 것 또한 사절이다. 그럼 이 방법밖에 없지. 비록 지금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여서 좀 희망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리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일단 최대한 막아보긴 할 텐데, 아지군도 자세 잡으세요. 아..옆에 두 친구 있으니깐 괜찮으려나."
한양의 동기들은 아지에게 지켜줄 테니깐 잘 관찰하라며 여유롭게 말했다. 한양은 이를 보고 안심하고 자세를 잡았다. 턱을 당기고 가드를 적당히 올린 뒤에 가볍게 스텝을 뛰기 시작한다.
"일단 아지군의 스타일을 설명해드리기 전에 불가피하게 타격으로 제압해야 되는 법부터 설명하죠."
"아지군은 체급이 낮기에 단련된 스킬아웃의 주먹 한방 한방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다가와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스텝을 밟으며 위치를 바꾸세요. 움직이지 않는 상대와 움직이는 상대를 맞추는 것의 난이도 차이는 큽니다. 단, 상대와 거리가 꽤 멀 때는 스텝을 뛰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서 움직임을 관찰하세요. 스텝도 체력소모가 되니깐요."
한양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스텝을 밟으며 스킬아웃의 주위를 돌며 위치를 바꾼다. 자세를 잡은 스킬아웃이지만 계속 움직이는 한양에게 쉽사리 주먹을 뻗지 못한다. 하지만 이내 곧 한양에게 오른쪽 주먹을 뻗는 스킬아웃. 한양은 빠르게 거리를 좁힘과 동시에 양손으로 가드를 올린 채로 오른발을 비틀며 상체를 왼쪽으로 숙여서 주먹을 피한다. 비튼 오른발을 다시 복구시키고, 왼발을 비틀어서 힘을 실어서 빈틈이 생긴 스킬아웃의 오른쪽 옆구리에 왼쪽 주먹으로 훅을 꽂는다. 그 다음에 숙인 상체를 올리며 오른쪽 주먹으로 스킬아웃의 안면을 직선으로 강타한다.
"아지군은 리치, 즉 공격의 범위가 짧아요. 그래서 거리를 좁혀서 싸워야 됩니다.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빠른 발놀림이 필수입니다. 거리를 좁혀서 방금처럼 상대의 눈에 안 보이는 사각지대를 공략하는 것이지요. 이걸 인파이팅이라고 불러요. 근접전에서 한방으로 눕히는 슬거랑은 달라요. 인파이터는 최대한 많은 펀치를 쪼개가며 때려박는 겁니다."
그런데 스킬아웃은 방금은 스트레이트를 턱을 돌리면서 빗겨 맞은지라 데미지가 크지 않았다. 맞고나서 왼주먹과 오른주먹을 한 차례씩 휘두르지만 한양은 하체와 허리의 힘을 이용해서 상체를 마치 U자를 그리듯이 움직여서 두 번의 주먹을 회피한다. 주먹을 피하고나서 스킬아웃의 안면에 라이트 스트레이트-레프트 훅-라이트 훅, 이 세 펀치를 마치 한 동작인 마냥 부드럽게 연계하며 맞춘다. 연속된 타격으로 그로기에 몰린 스킬아웃. 한양은 끝내지 않고 그대로 거리를 벌린다.
"한방에 끝낼 생각은 하지 마세요. 박자를 쪼개서 최대한 많이 때리려고 하세요. 이 스타일을 소화하려면 상대의 움직임, 특히 어깨와 체중을 싣는 발의 움직임을 볼 줄 알아야 해요. 답은 많은 경험 뿐이죠. 상대의 공격에 전진하면서 피하는 담력도 있어야 하고요. 주먹도 못해도 빗겨맞기는 한다는 마인드도 있어야 하고요. 근데 주먹 무섭잖아요. 그래서 또 다른 방법이 있어요."
스킬아웃은 그로기에서 어느정도 회복해서 자세를 다시 잡았다. 한양은 다시 거리를 좁히고, 스킬아웃은 아까보다 더 강하게 주먹을 뻗었다. 한양은 무슨 생각인지 주먹을 향해 무리하게 거리를 좁히더니...이마로 주먹을 받았다.
"이마로 박으세요. 생각보다 안 아파요. 주먹은 목표지점까지 완전히 뻗어야 위력이 나오는데, 주먹이 다 뻗기도 전에 제가 가서 미리 맞아주는 것이죠. 그리고 이마가 생각보다 단단해요. 운이 좋다면.."
"크흐흑.."
"이렇게 주먹에 금이 갈 수도 있죠. 주의점은 양주먹으로 턱을 보호하세요. 이 방법이 어퍼컷에는 취약하거든요."
한양은 주먹에 금이 가서 고통스러워하는 스킬아웃의 턱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치며 기절시킨다. 다음 상대는 "너 복서구나? 내가 잡은 복서가 몇인데.."라고 하며 한양에게 다가간다.
"근데 이 방법은 정말 불가피 할 때 쓰는 최후의 방법입니다. 아지군에게 맞는 스타일..지금 보여주죠.
게시판에 포스트잇을 붙인 J. 정확히는 세은의 담당 연구원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은우는 목화고등학교로 복귀 중이었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도 당연히 밤에 순찰을 돌아야하니 그때까지는 부실에서 이것저것 하면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한숨 자는 것이 좋을까. 안 쉬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제 동기의 말을 떠올리면서 ㅡ고마움은 시키지만 일은 시킬거라고 생각하며ㅡ 그는 일단 부실에 들어간 후에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결정해봐야 또 일거리가 생기면 일을 해야만 하니까. 부장 괜히 한다고 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였다.
".....?"
도와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물론 크게 들린 것은 아니었고, 바람에 조용히 들려오는 정도의 크기. 하지만 분명히 도와달라고 하는 그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은우는 일단 빠르게 목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현장에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이유는 모르겠으나 고양이를 안고 나무 위에 올라가있는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저지먼트 부원의 모습이었다. 이름이... 아니.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나무 위에서 못 내려오는 것 같아보였기에 그는 가만히 상황을 눈으로 빠르게 살폈다. 가지가 당장 부러질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발을 헛딛으면 떨어져서 다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작게 혀를 차면서 그는 고개를 올린 후에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일단 그대로 가만히 있어!"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에 발을 헛딛으면 그게 더 위험했다. 이어 은우는 빠르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면서 작게 공기를 압축했다. 그것을 손에 쥐면서 그는 그녀를 향해 외쳤다.
"괜찮으니까 날 믿고 눈 감고 뛰어내려! 착지시켜줄테니까!"
무서운 건 알겠지만 일단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용기를 내서 뛰어내릴 수 있을지. 아니, 애초에 믿고 자신이 하라는대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무서워할 가능성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잠시만 버티라고 하고 사다리를 가지러 갔다올 수도 있겠지만, 다리가 안 부러지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며 리라가 뛰어내리자 은우는 그와 동시에 손에 뭉쳐놓은 녹색 압축구를 발밑에서 터트리며 그 풍압으로 높게 뛰어올랐다. 이어 그녀의 몸을 감싸듯이 잡으려고 하면서 반대편 손으로 재빠르게 압축구를 생성해 아래로 떨어뜨렸고 타이밍을 맞춰 터트렸다. 자연히 생성된 풍압은 위에서 떨어지는 매개체의 낙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풍압으로 인해 발생하는 저항에 따라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땅과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이내 은우의 발은 땅에 무사히 닿을 수 있었다. 아마 그건 리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후우."
이내 그는 손가락으로 신호를 주며, 바람을 없애버리면서 제 손을 가볍게 탁탁 털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안전을 확인했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고. 아. 그리고 잡은 것은 사과할게. 일단 내 능력으로 풍압을 만들면 혼자 뛰어내려도 위험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이야. 무엇보다 고양이가 돌발행동을 벌일지도 몰랐으니 말이야. 그래. 그래. 착하지. 안심해. 이제 괜찮으니까."
말을 마치며 은우는 살며시 시선을 고양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고양이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살살 달래는 목소리를 냈다. 잠시 그렇게 고양이를 달래던 그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리라 쪽으로 돌렸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후배. 다음부터는 나무 위에는 함부로 올라가지 마. 어떤 이유가 되었건 위험한 일은 그다지 하지 않는 게 좋아. 자신이 못하는 일은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남이 못하는 것을 자신이 열심히 하면 되잖아? 혼자서 위험하게 올라가는 것보단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사다리를 준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거든."
잔소리는 아니야.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그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무리해서 내려오지 않고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는 자세는 적어도 내 기준에선 좋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765 오호라... 그럼 추가 질문! 80퍼센트가 학생인데 그럼 성인 초능력자는 인첨공에서 잘 안보이는거야? 아니면 초능력 기술 개발 이후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아서 아직도 학생이 많은걸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가 별건아니고... :3 다들 성인되면 뭐할거냐고 물어보려다가 초능력자는 커서 뭐하지?!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막혀버렸어
떨어지는 느낌은 언제 받아도 기분이 나빴다. 생애 첫 놀이기구를 탔을 때 느꼈던 뼈와 내장은 공중에 남고 피부만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 그 기괴한 느낌이 지금도 느껴졌다. 긴장으로 눈물샘이 자극되어 리라는 이를 악문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기 일보 직전, 지지대 없이 추락하는 몸을 무언가가 감싸는 느낌과 함께 발 밑에서 기묘한 풍압이 느껴졌다. 요정가루를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이윽고 낙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리라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와, 세상에."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답한 리라는 다소 멍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눈을 빛내며 은우를 바라본다.
"세상에!! 이게 뭐예요? 날았어?! 우와, 신기해."
감탄을 한바탕 쏟아내고 난 뒤에야 리라는 당신이 했던 말을 곱씹을 여유를 장착할 수 있었다. 아직 들뜬 게 덜 가신 얼굴로 은우를 쳐다보던 리라는 한번 숨을 크게 고른 뒤 말을 이어간다.
"덕분에 멀쩡해요, 선배님. 그리고 괜찮아요. 잡아주셔서 오히려 덜 무서웠는걸요?"
고양이를 보고 미소 지으며 성심껏 달래는 은우의 목소리를 리라는 그저 가만히 들었다. 담요 안의 고양이는 눈이 둥글고 다소 어벙한 인상의 치즈색 고양이였다. 노란색 눈동자에는 아직 혼란스러웠던 몇 초 전의 상황이 남긴 충격이 서려 있었지만, 원래 성격이 순하다는 걸 방증하듯 고양이는 몸부림이나 펀치 한 번 날리지 않은 채 그저 은우에게 대답하듯 조그맣게 애옹, 하고 울었다.
"아, 아하하... 그렇죠. 저도 너무 무모했다고 생각하곤 있었어요. 얘가 다리가 다쳐서 순간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됐나 봐요. 누구 부르러 가다가 떨어질까봐....."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덧붙이며 눈치보듯 눈동자를 굴려서 은우를 마주본 리라는 이어진 웃음에 의아해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는 게 파악되는 순간 리라의 얼굴에도 은우와 같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해도 혼자 내려올 순 없겠더라고요. 별 수 있나요~ 내려오다가 어디 다칠 게 뻔한데. 참, 인사가 늦었네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사람이 안 지나다니더라고요... 선배님 못 만났으면 내일까지 저기에 앉아있을 뻔 했어요. 원래 전화로 누굴 부를까 했는데 떨어뜨려 버려서— 아 참, 핸드폰."
나무 주위를 잽싸게 스캔한 리라는 멀지 않은 곳에서 핸드폰을 발견했다. 운이 여기까지 닿았는지,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이거 사실 강철로 만든 거 아니야? 아니면 인첨공 기술의 산물? 어쨌든 다행이다. 깨졌으면 골치 아팠을 거야. 리라는 떨어진 곳으로 다가가 핸드폰을 주워 겉옷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아. 이거? 내 능력이야.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공기를 압축할 수 있고, 그것을 터트릴 수도 있어. 압축을 크게 하면 할수록 자연히 내부 에너지가 증폭하게 되고, 그것을 터트릴 때 폭발력도 강해지는데, 나 같은 경우는 공기를 압축하는 거니까 풍압을 일으키게 되거든. 그것을 응용한거야."
물음에 대답을 하며 은우는 제 손바닥 위에 공기를 압축해서 만든 작은 녹색 구체를 그녀에게 보였다. 이내 그는 그것을 해제했고 손바닥 위에서 아주 약한 바람이 솔솔 불다 대기 중으로 사라졌다. 이어 괜찮았다는 말이 나오자 은우는 크게 안도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보기에도 다친 곳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알게 모르게 무리하는 이는 반드시 나오는 법이고, 그런 무리 속에서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적어도 현 시점에서 은우는 리라 역시 그런 부류라고 생각했다. 물론 굳이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고양이가 자신의 말에 대답하듯 애옹, 소리를 내자 은우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귀엽네. 이 녀석.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곧 리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고개를 올려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확실히. 하지만 구하러 갔다가 다치면 오히려 마이너스잖아. 다음부터 조심하면 돼. 하지만 자상하구나. 고양이를 위해서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올라가고 말이야."
쉬운 선택은 절대 아닐터. 보통 고양이를 보면서 불쌍하거나 안쓰럽게 생각하는 이는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나무 위로 올라가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구조대라면 또 모를까. 어쨌든 이번 것은 상당히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그는 딱 그 정도로 말을 마치기로 했다. 이 이상 말하면 그건 정말로 잔소리가 될테니까.
"그래도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내리고 보는 이들이 많거든.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인데 말이야. 천만에.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것은 저지먼트로서 당연한 일이니까. 물론 저지먼트가 아니더라도 도울 사람은 돕겠지만 말이야. 아하하. 어쨌든 진짜 다행이야! 안 다쳐서!"
고맙다는 말에 그는 두 손을 휘저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다 그녀가 핸드폰을 찾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 발걸음을 멈췄다. 과연 인첨공. 저 정도로는 핸드폰이 깨지지 않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괜히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난 안 다쳤어. 애초에 다칠 이유가 없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자신의 능력이었다. 수도 없이 사용했고 컨트롤을 한 만큼 다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그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고양이. 다리를 다쳤다고 했지? 괜찮은거야? 동물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시간이 시간이고..졸려오는만큼... 슬슬 저는 자러 가볼게요! 계속 이어가고 싶다면 이어주시면 저도 자고 일어난 다음에 잇고, 그냥 끝내고 싶다면 막레를 남기셔도 괜찮아요! 아무튼 다들 안녕히 주무세요!
>>795 하지만 여자 기숙사의 기행녀! 정하와 함께라면 어떨까!(가끔씩 크게 터트림. ex, 야 이거 기숙사 4층에서 줄내리면 배달음식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인드로 개척한 통금이후 배달받기 개구멍, 여자기숙사 공용주방에서 능력으로 압력밥솥처럼 갈비찜 해먹겠다고 하다가 양으냄비 뚜껑이 날아감. 아직도 천장에 박혀있다.)...혜우 피곤해하려나
녹색 구체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이었다. 리라의 눈은 한참을 손 위의 구체에 머물다가, 이윽고 구가 해제되자 흔들리는 바람결을 음미하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인첨공에 소속된 사람이지만 리라는 여전히 이 안보다 바깥에서 생활한 시간이 더 오래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제대로 형태를 띄는 초능력을 볼때마다 신기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찡찡이예요. 이 애 이름. 후문 쪽에 사는데 거기서 싸웠는지, 아니면 누가 괴롭혔는지 여기로 도망을 왔더라고요. 아 참, 전 리라예요. 이리라."
리라는 고양이 소개에 아무렇지 않게 자기 이름을 덤으로 얹어 소개했고 찡찡이는 은우가 자신을 예뻐한다는 감각을 확실히 느꼈는지 그제서야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한다.
"그런가? 누구든 그러지 않았을까요? 자기보다 약한 존재가 곤란해하고 있으면 사람인 이상 지나치긴 힘드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문장을 만들어놓고 보니 '누구든' 이란 말은 어폐가 있어 보였다. 평범한 사람이 가진 평범한 감수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고 리라는 그런 수많은 인간군상을 질리게 봐 왔으니까. 그런 것치고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나. 언제나 신경 곤두세워야 할 환경에서 벗어났다고 해이해졌나. 근데 그게 잘못인가?
"다행이에요."
다치지 않았다는 말에 리라는 안도한다. 누가 도와주다가 다쳤으면 그것대로 마음의 짐이 되었을 테니까. 그러는 중에도 애초에 다칠 이유가 없다는 확언은 좀 신기하게 여겨졌다. 레벨 5라고 했지, 부장 선배는. 그 정도 되면 저렇게 강한 힘을 다루면서도 컨트롤이 능숙해지는 걸까. 압축된 자연의 힘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본인의 몸은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다니.
"아, 네. 맞아요. 일단 양호실에 가서 붕대 같은 거 받아온 다음에 간단히 응급처치 하고 바로 가려고요. 다행히 부러지거나 하진 않은 거 같은데 살이 좀 깊게 패였더라고요."
아, 속상해. 못 키우는 것도 속상한데 다치기까지 하고 그래. 혼잣말인지 대화를 거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로 웅얼거린 리라는 곧 은우의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럼 이만 이 애 치료해주러 가볼게요, 선배. 내일 부실에서 뵈어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다음에 제가 음료수라도 쏠게요~"
그리고 조금 급히 발을 옮기며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럼 막레를! 캡틴 일상 두개나 돌리느라 피곤했을텐데 받아줘서 고맙고ㅠㅠ 남매 다 만나서 나는 소원성취했다 잘 자! 아침에 봐~
"아무렴... 이런 도시에서만 돌아다녀야 하고 인첨공 외부, 즉 바깥에 자유롭게 나가는건 꿈도 못꿀 정도로 제한되어있는데 지원금이라도 많이 받아야 하지 않겠슴까?"
그게 일련의 보상이라면 보상일 것이고, 나름의 자유라면 자유일 것이다. 물론 그녀의 경우라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이리저리 떠돌 바에야 차라리 이런 곳에서 적당히 자리 틀고 별로 움직이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안분지족 음풍농월 독야청청],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나 밖이나 사람 사는건 그렇게 차이나진 않을 검다. 물론 즈는 꽤 어릴때 이쪽으로 왔으니 바깥에 대한 기억이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여."
다만 굳이 묻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수 있었다. 사람 사는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온갖 곳에서 온갖 이유로 자신처럼 인첨공에 발을 디딘 이들이 결국엔 늘 그래왔다는듯 그저 장소만 바뀐 채로 습관대로 행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실언이랄것 까지야~ 진짜 실언이라면 그런 전후사정들을 알면서도 투정부리는 거겠지여."
무엇보다 이미 정하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노라고, 그말은 달리 해석해보면 나쁜 의도는 아니었단 뜻일 거다. 비록 정하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는듯한 표정이었지만...
"...근데 머, 딱히 그럴거 같아 보이진 않는 관상이네여. 게다가 어차피 다들 같은 처지인데 누굴 원망하겠슴까, 오히려 원망하는 쪽이 바보인 검다. 그럴 시간에 이렇게 맛난거 먹고 잼난거 보는게 앞으로도 더 이득임다."
어깨를 으쓱이는걸 보면 말이다.
"오... 오..."
그 사이에 나온 음식들, 확실히 오래간만에 봐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누군가와 함께 온게 처음이어서 그런지 색다른 비주얼로 와닿았다.
"개쩔어, 보기만 해도 배불러짐다."
물론 라멘이야 살면서도 여러번 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맛집답다는걸 증명하는지 속된말로 때깔부터 남다르다고 할까? 딱 보면 살찔것 같은 비주얼이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건 그녀는 그쪽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단 것이다. 애초에 건강한 음식을 찾는다면 라멘집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오우, 그럼녀. 잘머금다~"
밥 먹을땐 누구 건드리면 큰일을 마주할 거라는 농담이 있듯, 그녀 역시 생각할거리는 잠시 던져두고 당장 눈 앞에 있는 음식을 음미하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그런 모토 좋네여. 젊을 때 맛있는거 많이 먹고 다니라니, 보통 부모님들이라면 막 먹고 다니지 말라면서 기겁부터 하실텐데 말임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무얼 하든지 그녀의 자유였으며,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으까.
내가 여기에서 이경을 도와줄 의무는 없었다. 그렇게 해줄 만한 의리도 없었다. 비밀을 저당잡혔다 한들, 일방적인 비밀이 아니니까 무시하고 가버려도 됐다.
그렇지만, 그거 하나 도와준다고 나한테 큰 리스크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쯤, 그 한 번쯤, 도와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굳이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처음에 사정을 알지도 못 하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은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교내 매점에 다녀오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체육복을 사다주니 이경은 불필요한 미사여구 없이 고맙다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 까지였으면 더 나았을 것이었다. 그 외의 깔끔한 태도는 응대하기 편했지만, 타인을 대한다는 점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늘 하던 대로 이경에게 대꾸했다.
"됐어요."
이경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저런 얼굴을 잘 알았다. 그러나 묘하게 불쾌하지 않은 점이 의뭉스러웠다. 내가 아는, 내가 본 저런 얼굴들은 모두 똑같은 불쾌함을 가지고 있었다. 새하얀 백지를 억지로 구겨 만든 듯한 웃음을 조금 더 응시하다 눈을 돌렸다. 내 걸음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대로 떠나나 싶었는데, 다시 멈췄다. 잘 아는 이름이 들려서였다.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멈춘 김에 다시 돌아서 물었다.
"아지라면, 한아지 말하는 건가요? 잿빛 머리에 잿빛 눈을 한."
머릿속에 다음에 또 같이 카페 가자, 하고 웃던 순박한 얼굴이 떠올랐다.
"걔한테 무슨 일 있어요?"
또 뭐에 휘말려서, 혹은 무슨 사고를 쳤길래, 그래서 궁금했을 뿐이었다. 나 같은 걸 신경 써주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니까.
봄날이 서서히 무르익어가며 해도 차츰 길어져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과 후에 나오면 하늘이 온통 붉었는데, 이젠 푸른빛이 가장자리에나마 남아있었다. 날씨가 풀려가니 인첨공 곳곳에는 꽃이 피고 있다고 들었다. 학교가 끝나면 어디로 놀러갈까 들뜬 소리도 제법 들렸다. 모두 나와는 다른 세상의 얘기였다.
서서히 노을지는 거리를 지나, 예정된 커리큘럼을 받으러 갔다. 도착해서 제일 먼저 계수를 측정했다. 어째서인지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레벨 2도 머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 후엔 이전의 식물을 상대로 한 커리큘럼이 성공적인 결과를 냈기에 앞으로 주기적으로 하게 될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커리큘럼에 새로운 과정이 끼어들었다고 한들 그저 그럴 뿐인 사실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오늘의 커리큘럼이었다.
서포트하는 연구원을 따라간 실습실에서 다시 작고 검은 눈들을 마주했다. 여전히 떠는 동물이 있고, 아닌 동물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작고 어려보이는 강아지가 눈에 띄었다. 저 강아지는 저번 실험 때도 울지 않았던 강아지였다. 마치 체념한 듯, 연구원의 손에 의해 힘없이 늘어져 메스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겹쳐졌다. 오늘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 커리큘럼에 쓰일 것이니까.
오늘도, 오늘도... 아니, 오늘만.
연구원에게 부탁이란 걸 처음 해봤다. 저 강아지만 오늘 빼달라고 하니, 잠시 말이 없어 안 되나 싶었지만, 의외로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작은 강아지는 실험용 케이지에서 다른 케이지로 옮겨졌다. 연구원의 배려로 깔린 담요 위에 작은 강아지가 놓이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
어쩌면 혜우는, 본질적으로 좋은 사람일 지도 몰랐다. 다만 상처가 너무 커서.. 상냥한 마음에 까칠한 흉터가 자리잡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보아라. 친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갔을 뿐인데도 곧장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이경은 그것을 다소 늦게 눈치 챘지만.
"응. 맞아. 나보다 머리가 좀 더 진한 걔!"
이름값을 하려는 것인지 순박하고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같은 인상이 매우 진한 그 소년. 아마 사람에게도 꼬리가 있었다면, 한아지의 꼬리는 수시로 골절상을 입었을 것이다. 자는 시간 빼고는 흔들리고 있었을 테니까. 무해하고, 푹신푹신한 모습은 하얀 소년의 긴장을 드문드문 풀게 만들기도 하였다. 눈 앞의 감색 고양이의 앞에서와는 달리. 덕분에 이경은 혜우 앞에서 표정을 유지하기 참 쉬웠다. 다만 저 사나운 감색 고양이도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절반 정도는 웃고 다니는 잿빛 강아지에게는 못 이기나 보다. 얼른 갈아입고 가서, 상태를 좀 볼까하는 마음에 중얼거렸던 것을 듣고 바로 반응할 정도인 것을 보니.
"어.... 내가 아지랑 같은 반이거든?" 소년이 하얀 눈을 깜빡거리다가 슬쩍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그, 가는 줄 알고 바지를 꿰어입는 중이어서, 이경은 몸의 절반을 얼른 숨겼다. 일단 물어보는 건 좋은데 고개는 돌려주면 안될까... 이경은 꾸물꾸물 옷을 입으며 생각했다.
"나보다 먼저 당했어."
날아오는 야구공을 받아내고 새물새물 잠들었다가 여학생들의 광기에 당했다. 아니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왜 그리 잘들 맞는지. 가지고 있는 화장품을 총 동원해서 헤실헤실 웃는 낯으로 잠든 아지를 있는 힘껏 꾸몄었다. 솔직히 보기는 좋았다. 앞머리를 올려 묶은 핑크색 리본이 없더라면 좀 더 나았을 거 같은데...
한국인의 교양서, 만화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라이딩을 기다릴 때나 촬영장에서 대기할 때 틈틈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재밌어서 밤에 몰래 읽으려다가 잠 안 잔다고 혼이 난 적도 있지. 그 중에서도 가장 매력있는 신은 헤르메스였다. 날개 달린 모자와 샌들을 걸치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유쾌한 전령의 신.
"그 신발을 탈라리아라고 하는구나~"
참고자료를 찾기 위해 검색하다보니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된다. 언젠가 더 발전하게 된다면 이런 것도 만들 수 있을까?
"재밌겠다."
리라는 모니터에 띄워진 탈라리아의 윤곽을 따라 잡는다. 사각사각. 정적 속 연필 소리만이 울린다.
2학구 연구원의 제안을 수락하거나,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특정 연구소에서 받는 방법도 있으나, 대다수의 레벨 스캔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정규 커리큘럼 과정에 포함이 됐기 때문에 돈이 궁한 것이 아니라면 학교에서 연결해준 연구원에게 받는 것이 더 이득이다. 학교에서도 인재를 앗아간단 이유로, 혹은 학생의 안전을 빌미로 연구소의 커리큘럼을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희야는 달랐다. 학교 내부의 정기적인 커리큘럼을 수료하지 않고, 2학구의 하이드로키네시스 연구소 중 하나인 데 마레에서 커리큘럼을 진행했다. 처음엔 학교에서도 제지하려 했으나 연구소에서 제출한 합당한 이유는, 완강한 뜻을 가졌던 목화 고등학교도 한 수 접어들게 만들었다.
"레벨이 올랐구나."
그리고 데 마레. 연구소장이자 희야의 법적 보호자인 안승환은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쓰며 완벽한 과학기술로 이루어진 스캔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듯 노려봤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속도다! 희야는 인첨공이 생길 때부터 자신이 맡아온 아이다. 지난 15년간 레벨 0을 꾸준히 고수하던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 갑작스레 레벨이 올랐다. 여기까지는 괜찮은 일이다. 학생들 중 개화가 늦는 아이는 많으니까. 하지만 희야의 레벨은 놀라운 속도로 오르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레벨 3까지 충분히 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단히 빠른 속도야." "그런가요?" "희야 레벨이 올랐다고요?"
데 마레에서 오래 근무한 연구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옹기종기 스캔 결과를 향해 몰려들었다. 정말 레벨 2다. 어제까지만 해도 빙수를 만들어 먹겠다 선언했다 장렬히 실패했던 희야가 지금은 충분히 가능한 레벨이 됐다니, 믿을 수가 없다! 연구원들은 서로 쑥덕이다, 소리를 낮췄다.
"……역시─" "조용히!"
스캔 결과를 바라보던 연구소장의 호통에 연구원들은 입을 합 다물고 눈을 굴려 희야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희야는 손을 휘저으며 허공에서 눈송이를 만드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연구소장은 그런 희야를 바라보다 침음했다.
"음."
연구원들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았기에. 그렇다면 지금껏 자신이 지켜온 맹세는…….
"삼촌." "응?" "미간에 주름." "아, 응. 그래."
아니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연구소장은 희야에게 걸어가며 시선을 마주했다.
"삼촌이랑 이따 점심 먹고 음반 사러 갈까? 이번에 앨범 나온 거 일반반도 사고 싶다며." "응! 근데 오늘 점심 뭐야?" "희야가 먹고싶은 거." "진짜? 희야 마라탕! 마라탕!" "요즘 애들은 왜 그렇게 마라탕에 환장하는지 모르겠다." "삼촌도 회식 중국집 가서 하잖아요. 양꼬치에다 고량주." "음, 그건 맞긴 하지만-" "그러니까 마라탕 먹을래-" "그래, 그래. 가자."
아지라는 이름이, 특히 성씨가 한 씨인 아지가 이 학교에 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그 애가 맞냐며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는데, 굳이 풀네임을 언급하며 맞는지 물은 건, 나도 왜인지 모르겠다. 그냥 궁금해서 였을 것이었다. 혹시나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음에 아지에게 넌지시 해줄 말이 생기니까.
그 애가 맞다는 대답에 그럴 가능성은 모래 흩어지듯 사라졌다.
나보다 머리가 진하다는 이경의 표현에 힐끗 이경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색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순백과 잿빛은 다른 계열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달라서 그런 생각이 든 것도 같았다.
머리에서 시선을 돌리는 김에 몸도 비스듬히 비틀었다. 이경의 움직임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개 돌릴 적에 그게 뭐 대수냐는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다 벗는 것도 아닌데, 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서서히 노을이 내려지는 본교사 쪽을 보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긴 말은 아니었다. 이경이 아지와 같은 반이며 이경보다 먼저 당했다는 설명이 전부였다.
같은 반이라서.
아마도 같은 반 여학생들에게 좋은 대상이었을 것이었다. 아지는 누구나와 잘 노는 아이였다. 나 같은 거와 어울리는 것만 봐도 반에서 어떨지 눈에 선했다. 지나가며 봐도 늘 누군가와 함께며 늘 누군가가 함께 있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태연히 해내는 이들에게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사진, 있어요?"
뒤에서 옷 갈아입는 기척이 거의 없어질 쯤 물었다. 그런 일이 반에서 있었다면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을 법도 하니, 이경에게 있진 않나 궁금했다.
몸을 틀어 시선을 비켜준 배려에 감사하며 이경은 손을 재촉했다. 쏙, 하고 뻗은 다리가 바지 너머로 살짝 튀어나온다.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은 이경이 드디어 바짝 서고, 고개는 살짝 기울였다. 잿빛보다 흰, 애초부터 아무 색도 담기지 않은 듯한 하얀 색채의 소년은 웃는 채였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있을 지 모르지만, 나는 없어."
당시 그 모습을 턱을 괸 채 구경하긴 했다. 썩 신기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다만 그 뿐으로 당시에 이경은 휴대폰을 들어올리지 않았다.
아 성여로한테는 있을 텐데. 나도 찍었을 거 같은데.
"..찍을 시간이 없었거든.."
남의 흑역사를 제손으로 남길 마지막 기회를 이경은 그렇게 놓치고 말았다. 상상도 못한 탓이다. 커리큘럼의 고통을 벗어나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한 집념이 자신을 향할 것이라고는.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은 무채색이었으므로,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즐거운 장난의 대상이 된 적이 없으므로. 기억에 닿는 자를 누구나 기피하였으므로. 그렇기에 아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음에도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던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아니 근데 그 모습으로 입부 권유를 받고 싶지는 않은데. 그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달려오는 중에 딱히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하나 더 첨언하자면, 이경은 찍을 시간이 충분했더라도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았을 거다. 허가없이 타인의 사진을 찍는 것은 당하는 사람에게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보고 싶다면 보여 줄 수는 있는데.."
만리장성이 자신은 부족한 몸이라며 큰절을 올릴만치 넓은 벽을 지닌 감색 소녀가 이리도 신경쓰는 사람이라면, 흔적으로 남지 않는 기억으로 전달해주는 정도는 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이경은 생각했다.
>>0 저의 노력과 상관없이 물에 담궈둔 로즈마리의 줄기 밑 쪽이 조금 불룩해졌습니다. 아마 뿌리를 내릴 생각인 모양이에요. 물론 제 능력이 되움이 되었다고 믿고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담당자님과 확인한 계수가 아직 레벨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근 들어 유의미한 향상이 있는 것을 위안으로 해야할까요. 초등학생 때 들어와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주 조금씩 계수가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입니다. 고등학교의 커리큘럼은 조금 다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제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재능이 피어나는 편인 걸까요?
그래도 아직 무능력자입니다.
사실 능력을 개화시키지 못하고 무능력자로 사는 것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아무래도 무능력자들은 많으니까요. 조금 서러울 때도 있지만요.
한양 혼자 나서는 것을 본 아지는 안절부절못하지만 한양의 동기들이 괜찮다고 해 주자 점차 설득되어가는 것 같다. 그런가~ 괜찮은가~ 그래도 저 눈망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양을 보고있지 않은가.
"네에~! 가까울 때는 스텝을~!"
원래는 미리 허가를 받았어야 하는데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선은 찍고 나중에 허가를 받기로 했다. 아지의 머릿속에 든 칩이 한양의 모습을 녹화한다.
"네엣~"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힘차게 대답하는 아지지만 공격의 범위가 짧다는 말에 눈이 저 하늘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온다. 팔과 다리가 짧다는 말 같은데 틀린 건 아니고 그렇지만 기분이 뭔가 미묘했던 탓이다.
"경험이요~ 차차 쌓아가는 수밖엔 없겠네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아직 경험 제로인 아지지만 어떻게든 쌓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한양이 뜻밖에 이마로 주먹을 받자 놀라는 리액션이 볼만하다.
"조심하세요오..."
다음번 스킬아웃은 한양의 스타일을 파악한 것도 같아 애꿎은 삼단봉을 매만지며 걱정해본다. 한양의 동기들을 이리 힐끗 저리 힐끗 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혹시나 예상치 못한 사태가 생기면 도와주겠지?? 정 안되면 삼단봉이라도 던질 생각에 아지는 삼단봉을 꾹 쥐고 누가 봐도 던지려는 생각 만만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0레벨 개화안함 1레벨 개화는 했는데 조절이 잘안됨 2레벨 조절은 되나 효용성이 떨어짐 3레벨 조절도 잘되고 제법 쓸모있게 사용 4레벨 부위별로 나눠 사용하나 온전하지 않음 5레벨 부위별로 나눠 사용하며 제한시간 전에 off를 걸었다가 한쪽을 잠깐 썼다가 쉬게 하고 다른 한쪽을 사용, off 걸고 쉬었던 부분 다시 사용가능
>>0 얼마만의 이론공부인가? 책을 펴고 옆의 빈 종이에 진동시킬 수 있는 물질이 무엇이 있는지 차근차근 적어내려간다. 계속되는 바깥에서의 훈련이 식상해지던 참이었다. 책이야 학교에 있는 도서관에서 빌리면 그만이다. 더 큰 도서관이 3학구 내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쇠는 되고.. 플라스틱은 안되고.. 석회는 되고.. 얼음은 안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릴 내용들이었지만 눈에 보이는대로 적다보니 어느덧 만족할만한 분량이 종이에 채워져 있었다. 그 자신도 자랑스러워 종이를 들어올리며 자신만만해한다. //저녁식사 전에 갱신해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