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후후, 알겠답니다. 히다이 트레이너 님. 부탁을 들어주셨는데 이 정도를 못 따를 리가 있나요. "
호칭의 구분을 확실히 하는 것은 미즈호 쪽 역시 마찬가지. 평소에도 ~님이라 꼬박꼬박 붙여 부르는 미즈호가 이름을 부른 것은 명백한 도발이 맞았다. 하지만 이쯤에서 굽혀야 할 것은 굽혀야 하기에, 미즈호는 흔쾌히 알겠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간절함이 있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니시카타 미즈호가 아니다.
"하지만 말이에요, 히다이 트레이너 님. 그때 그 기둥서방? 고백은 조금 많이 과하지 않았는지 싶답니다? " "다음에 정말 좋아하는 분께 고백을 하시게 된다면 그런 멘트는 절대로 쓰지 않으시는 걸 추천드리어요? "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할말은 한다. 니시카타 미즈호는 참지 않는다. 확실하게 해두자는 듯 이렇게 되물어보이기까지 하였다.
"아무튼간에 두 가지, [ 니시카타 미즈호는 5kg도 들지 못할만큼 약해졌다 ] , [ 니시카타 미즈호가 밥을 먹지 않는다 ] 는 소문은 확실히 퍼트려 주시는 것이지요, 히다이 트레이너 님? "
오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미즈호는 이 날조만은 확실히 정정하고 싶었다. 193kg이 뭐냐 193kg가!!!!!!
지붕 달리기에서부터 많이 먹기, 물건 찾기 경주까지. 다사하고 떠들썩한 운동회도 마지막 행사를 기점으로 폐막에 가까워 간다. 경기가 끝난 뒤 달팽이를 원래 있던 장소에 풀어주는 데에(벌들은 어떻게든…… 피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꽤 많은 시간이 들었던 모양이다. 돌아와서 보니 이곳저곳 분주히 정리하는 인원들로 붐비고, 학원은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직 트랙은 쓸 수 없는 상태고 오늘은 더 해야 할 일도 없겠다, 정리에 방해 되지 않도록 비켜 있어야겠다. 그렇게 학생과 관계자들이 다니는 동선을 피해 가다가…….
"……흐잇."
갑작스레 들려온 확성기 소리에 쭈뼛 놀라고 만다. 부끄러운 소리를 내 버려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듯해 슬금슬금 그리로 향했다. 앗, 빵이 많이 남았구나. 사실 메이사 도넛 외에 다른 맛도 꽤 궁금했던지라 반가운 이야기다. 쭉 쌓인 도넛 무더기 중에서 제 도넛의 비율은 적어 보였다. 하긴 수상할 정도로 내 빵이 많았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사미다레 도넛'에 관해 생각하자니 괜히 또 부끄러운 기분이 되어서, 마사바와 언그레이 도넛을 들고 자리를 떴다. 얼마나 가져갈지에 제한을 두지는 않았다지만 너무 많이 챙겨가기엔 조금 미안해서다.
도넛은 음식만 아니었다면 소장하고 싶어지는 비주얼이었다. 이런 모양 굿즈가 나와서 꽤 수요가 있을 것 같은데. 사미다레는 이내 도넛의 사진을 찍어서 마사바와 언그레이에게 각각 따로 메시지를 보냈을 테다.
츠나센의 게시판은 언제나 이런저런 소문과 소동과 이벤트의 중심지가 되곤 한다. 학생들은 때로는 이 이벤트를 구경하는 입장이기도 하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써 붙임으로써 당당한 행사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사미다레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일전에 이 게시판을 이용했던 적이 있었더란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인지, 커다란 안내문을 들고 게시물을 붙이는데……. 어쩐지 표정이 심상찮다……?
왠지 모를 살기가 느껴지는 듯도 하다. 사미다레는 그렇게 답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게시판에 머물다 사라졌으리라. 육상선수가 아닌 MMA 파이터의 기백을 표출하며 떠나고 난 자리에는…….
「■사람(인간, 우마무스메 모두 포함)을 찾습니다 며칠 전 블레이징에서 키우는 고양이 '제노사이드 커터'의 얼굴에 눈썹을 그린 사람을 찾습니다. 고양이의 얼굴에 눈썹을 그린 사람에 관해 잘 아시는 분, 혹은 범인을 목격한 분의 제보 및 연락을 기다립니다.
직접적인 위해는 아닐지언정 고양이는 그루밍을 하는 동물로 펜의 화학성분을 섭취할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타인의 반려동물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찾으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각오하십시오.
이 녀석, 휘두르고 싶은 대로 휘두르라던가 약점을 잡힌 거나 다름없다던가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위에 있으려고 한다. 기분 탓이 아니고, 대화의 힘이 귀결되는 방향을 보면 그렇다. 참 거만한 아가씨가 아닐 수 없다. 좋게 좋게 말하는 체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험한 속내를 감추려는 교토인 답기도 하고.
거기에 한 성깔 하기까지 한다. 곤란한 사람이야. 여러모로 내 거울과도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이 보던 전성기의 나. 와카야마 좁은 우물 안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를 세우던 나. 나르시스트.
"...그래, 딜이야 딜. 밥은 왜 퍼뜨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분부대로 합지요, 네."
푸후, 크게 한숨을 내쉰 나는 감정의 뚜껑을 덮었다. 꽉 들어차서 조금 힘들었지만, 이제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모르는 체 해야 할 때.
"그보다, 그 고백은 거절당하기 위해 했던 거니까 구린 게 당연하잖아. 난 0.1초만에 거절할 줄 알았다고... 애초에 이렇게 된 것들 다 네가 먼 길을 돌아왔기 때문이잖아 이 아가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