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감정이 격해진 트레이너는 처음 본다. 이 트레이너가 이렇게 감정적인 모습을 내 앞에서 보인 적이 있던가? 멸치푸딩을 꺼냈을 땐 살짝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때랑은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내가 뭘 생각했냐고 물어도 말이지....
섣부르게 동정이라도 할까? 안타까운 일이라는 감상은 있긴 해. 그래서 안타까운 일이라고 아까 말한거고. 우릴 이용해서 속죄하려는 셈이냐고 따지기라도 할까? 사실 속죄를 위해서든 뭐든 그건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라고 하기엔 나는 좀 애매하긴 하지만-도 중앙에 가기 위해, 아니면 각각 다른 이유로 트레이너와 함께 하고 있는 거니까. 서로 어떤 이유로 같이 움직이든 깊게 관여할 필요는 없다. 그래. 역시 내가 화가 나는 것은, 실망한 것은, 어째서 이걸 이때까지 우리에겐 철저히 숨겼느냐는 점이다. 아주 철저하게. 문을 잠그고 입을 닫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마냥].
"—실망했어." "그건 당신이 중앙의 별을 무너트린 트레이너라서도 아니고, 혹독한 성과주의자여서도 아니야. 애초에 그딴건 난 아무래도 좋다고. 그자식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내가 실망한 건 당신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일을 우리에게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야." "다이애나 포그린이라는 우마무스메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었다는 것마냥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들었다는게, 당신의 지시를 철썩같이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말해줘도 되겠다는 요만큼의 신뢰조차 없었다는게 실망스럽다는거야."
트레이너를 향해있던 귀는 뒤로 젖혀져, 불편한 감정을 있는대로 드러낸다. 어느샌가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감정의 격함도 전염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트레이너랑 우마무스메는 이인삼각 같은 관계라고 누가 그러더라. 그래, 그 말이 맞지. 일심동체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신뢰와 이해는 있어야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관계니까."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신뢰해봤자, 제자리 걸음이나 하면 다행이지. 하."
>>267 "ー바로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당신을 부른 거에요. 메이사 양. "
미즈호는 그제서야 환하게 웃으며 메이사를 응대하였습니다. 마치 메이사가 이 이야기를 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이상합니다. 니시카타 미즈호는 왜 [ 신뢰가 없었다 ] 는 말에 이토록 밝게 웃는 것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 앞에 꺼내지 않은 것은, 여러분들이 아직 이 이야기를 들을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랍니다. 클래식 시즌이 시작되기 이전, 그 이전에 모든 것을 미리 털어놓을 생각이었으니. 시기가 이제 딱 맞군요. " "트레이너와 우마무스메는 이인삼각 같은 관계라 하셨지요! 바로 그거랍니다. 이제 저희들은. 여러분들과 저희들은 그러기 위한 단계에 도달해야 한답니다. 모든 것을 알고도 서로 신뢰할 수 있는가? " "저는 이미 메이사 양을 만나기 전에 유키무라 씨에게 모든 것을 밝혔답니다. 그렇기에 메이사 양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어요. 자. 이제 메이사 양이 답해줄 차례에요. "
니시카타 미즈호는 그렇게 말하며 메이사에게 일어서서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흠 많은 트레이너라 할지라도, 신뢰하고 따라줄 수 있나요? " "내가 많이 못난 트레이너라 할지라도, 믿어줄 수 있냐는 거에요. 메이사 양. "
언그레이의 생각을 사미다레가 알지 못해 정말 다행이었다. 알았더라면 쑥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차마 버텨내지 못해 전력으로 도망쳐버리는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니.
"네, 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래,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할 수는 없으니 다음을 기약해도 될 테다. 팀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고 츠나지에서 지내는 한 함께할 상황은 언제든 마련되어 있으니까.
"저어, 트레이너님과는… 자주 만나 보셨나요? 저는 아직이에요."
평소엔 어떤 분이실까, 해서요……. 그런 말이 천천히 따라붙었다. 어쩐지 냉철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그가 해 주었던 말들은 퍽 상냥했었다. 차가운 분은 아니셨던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비둘기 같다기엔…… 좀? 영문 모를 대답에 사미다레의 기억 속 코우의 얼굴이 왜인지 맹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쓰다듬 받는 데에도 조금 쭈뼛거리는 듯했으나 시간이 길어지자 긴장도 서서히 누그러졌다.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편히 풀어지고, 사미다레는 조금은 평온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러면, 내일… 내일 이 시간에 만나는 건 어떤가요?"
상당히 알기 쉬운 우마무스메다. 긴장할 때도 부끄러워할 때도, 지금도 어김없이 그렇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며 반짝거리는 눈동자에서 기대감 쉬이 읽혔을 테다. 잘 못 달린다는 부분에서는 조금 의아한 감정 짧게 스쳤지만. 으음, 츠나센처럼 거친 코스에 익숙지 않으신 걸까, 아니면 다리를 다치시기라도 한 걸까? 처음 만났을 적 언그레이가 이곳까지 뛰어오던 모습을 떠올린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에서도 능숙하게 달리고 있었으니 충분히 관리하고 있으리라 생각은 하지만. 사실은 같은 팀원과 달린단 이야기에 조금 들떠서 깊이 생각 할 여력이 안 되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한마디가 나오려는걸 간신히 참았다. 뭘 그렇게 환하게 웃는거야 당신 방금 내가 비꼬는 거 못 들었냐고. 이 인간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인가? 그럼 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하는거지? 하또? 우마레인저 그린? 여러 사람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아무튼 그, 어, 꽤 당황했다. 귀도 꼬리도 당황스러움을 한껏 나타내고 있었다.
"하아...?"
그래서 뭐야 이 흐름은. 그니까... 그냥... 뭐 시험해봤는데 합격~이라는거야 뭐야. 너무 어이가 없다못해 머리가 아파온다.
"—이야기를 들을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면, 언제가 되면 말해주겠다는 언질이라도 하던가." "지금껏 그렇게 숨겨놓고 이제와서는 시험삼아서 일부러 그랬다는 것처럼 얘기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모면하려고 끼워맞추는 걸로 밖에 안 들리는데? 이제 그 트로피들도 다 들켰으니, 더는 하늘도 못 가리는 처지가 되니 급하게 수습하려는 거 아니야?"
평소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아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장난 그 이상의 가시를 담은 말이 나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지막 경계선 앞에서 머물던 발이 성큼 넘어가버렸으니.
"내가 먼저 물어볼게. 당신 진짜 우릴 신뢰하긴해?" "1년 가까이 '없었던 일'처럼 입다물고 있었으면서?"
>>285 "네. 정말로 신뢰하고 있답니다. 소중히 여기고 있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답니다. 그러니 이것만은 확실히 말해두겠어요. [ 수습 ] 이란 단어는 이 상황에 맞지 않아요. "
미즈호는 이것만은 정정하자는 듯 딱 잘라 말하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과거에 대해 물어보았다면, 내가 이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물어보았다면 저는 언제든지 답할 준비가 되어있었답니다. 그 정도로 여러분들을 저는 신뢰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메이사 양. 돌이켜 보세요. 여러분들은 정말로 저의 대답을 듣고 신뢰해줄 생각이 되어 있었나요? " "아니면 내가 [ 없었던 일 ] 로 할 줄 알고 아예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고 있었나요. 저는 그것이 궁금해서 여쭤본 것이에요. "
잠겨져 있는 트로피룸은. 여러분들이 요청했더라면 얼마든지 열릴 문이었습니다. 메이사 프로키온. 당신은 정말로 트레이너를 제대로 신뢰하고 있습니까?
"한쪽에서의 일방적인 신뢰는 이제 보니 제 쪽인 것 같은데요. 메이사 양. " "메이사 양, 저는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어요.......이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만큼이요. "
미즈호는 그렇게 말하며 당황해 하고 있는 메이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고는, 끌어안으려 하였습니다.
"길게 이야기 하지 않을게요. 나를 믿어주세요. " "나를 믿어준다면 그에 맞는 [ 성과 ] 와 영예를 안겨줄 것이니. 찬란한 별빛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줄 것이니. 저는 마땅히 그럴 각오가 되어있어요. " "메이사 양은 어떤가요? 나를 믿어줄 준비가 되어 있나요? "
호쾌한 미소를 보여주면서 어깨를 도닥여주는 언그레이 데이즈. 그리고 야나기하라 트레이너가 어떤지에 대해 묻는 말에는 미소가 살짝 가시고 머리를 긁적인다.
"뭐어, 한 일주일 정도 되었응게 그마이 자주는 안 만나봤제... 평소에 어떤 사람인가, 하므는... 보제이."
"벌써부터 참한 여성을 낚아채가뿐 난봉꾼에, 디게 표정이 딱딱히 굳어가꼬 유머감각이라곤 없어 보이믄서 말도 제대로 안해가꼬 마이 어색해비는 사람?"
장난기를 섞어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뭐, 왜, 뭐.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그래도 누구보다 우리를 믿어주고, 서포트할라캐주고, 그라믄서도 열정이 있으야. 그래사서 비둘기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있어야. 일순 보므는 진짜 뭔 생각이 들어가 있나 싶이 목석같은 느낌이 처음에 들지마는... 그래도 힘들때는 분명 옆에 있어 줄 아가 그 트레이너데이."
비둘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건가 하면서 살짝 웃는 그녀. 그렇지만 그녀가 본 트레이너가 조금 맹해보이는 것은 사실인걸.
"그래보제이. 뭐어, 내는 거의 매일 여서 트레이닝 허이께. 무울론 요즘 들어가꼬 해안가가 쪼매 북적거리기는 허는디... 뭐어 뭐어, 우야겠는교."
어깨를 으쓱인다. 사실 자신으로써는 트랙에 달리기에는 아직 다리가 준비되지 않았기에... 아마 데뷔전때 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겠지.
뭐 그건.. 정곡이라 딱히 할 말이 없...지는 않은데. 잔뜩 성을 내고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충 감이 온다. 서로 방향이 엇나가고 있었던 거다. 괜히 겁이 나서 먼저 얘기하기만 기다리고 있던 나나, 물어봐주길 기다리던 저쪽이나. 뭐야, 진짜 바보같아. 한심해. 그 중에서 내가 제일 한심하잖아.
"하아아.. 뭐냐고 진짜아....으무."
길게 늘어진 말꼬리 끝에 이상한 소리가 따라 붙는다. 끌어안긴 덕분에 난 소리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귀를 파닥이며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나는 정말로 이 트레이너를 신뢰하고 있었나? 오해를 풀었으니 신뢰할 수 있는가?
"—의심이란건 말이야, 잡초같아. 앗하는 사이에 자리잡고, 길고 복잡하게 얽힌 뿌리를 내려서, 그런 주제에 겉으로 난 부분은 작아보이니 금방 없앨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뿌리를 전부 뽑지 않으면 언제든 몇번이든 다시 되살아나니까. 그리고 뿌리를 전부 없애는건 정말로 어렵고." "지금도 그래. 당장은 없애겠지만, 분명 무언가 작은 계기가 있으면 나는 또 의심해버릴거야. 아주 사소한 일로도 이건 금방 다시 살아나서 또 나를 괴롭히고... 트레이너도 괴롭게 할지도 몰라."
경계선을 넘었던 발은 다시 물러섰지만, 그다지 멀리 물러나지는 못했다. 한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언제 넘어갈지 계속 서성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안." "당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러는거야." "이런 나한테는 성과도 영예도, 찬란한 별빛도 줄 필요없어. 그건... 내가 아니라 진짜로 갈망하고 있는 아이들한테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