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쳐다보는 당신의 눈빛이 바뀐다. 당신은 감정을 숨기려고 하나, 결국 숨기지 못하고 터트리고야 만다. 그 모습에 나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이제야 알겠어. 왜 그렇게도 당신의 앞에 서게 되면, 나의 내면을 자꾸 보여주게 되는지.
너는 나를 닮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닮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달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나고 자라서 얼마 되지 않았을때부터. 어쩌면 나의 첫 기억의 시작부터. 나는 항상 달려왔다. 처음엔 달리는게 그저 즐거웠다. 부둣가를 따라, 바닷가에 늘어진 해안가 모래사장과, 아빠의 배, 어부 아저씨들의 배를 쏘다니며 장난스럽게 달렸다. 햇빛이 스며든 나뭇잎의 그림자 아래로 늘어진 골목 사이사이를 뛰었고, 광활하게 펼쳐진 산과 언덕을 따라 달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집의 TV에서 방송하는 경기를 보며-
나는 우마무스메로써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찬란하게 빛났다. 누구보다 빠르고, 누구보다 강하며, 누구보다 예쁘고, 누구보다 멋진... 모두의 동경을 받는 존재였다.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었다. 치열한 레이스의 끝에서, 땀과 흙투성이가 되어서도, 체력을 모두 소진해서 형편없는 자세로 드러누우면서도. 다시 일어나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고, 천사와도 같은 모습으로 춤을 추었다. 분해서 울던 사람들도 같이 합을 맞추며.
내게 레이스는 동경이었고, 우마돌은 꿈이었다. 나 또한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꿈과 마주했을때. 거울처럼 내 자신의 재능과 한계가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을때,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다. 더 많은 트레이닝, 더 많은 공부. 잠을 줄여가며, 그렇게 예뻤던 나의 발이 오래된 흉터와 새로 생긴 상처들로 피투성이가 될때까지 달렸다. 예쁜 손은 더이상 없다. 굳은살과 물집이 곳곳에 박힌 나의 손. 부드럽고 예쁜 몸이 아닌, 달리기 위한 트레이닝으로 만들어진 딱딱한 몸. 봄이 가면 무성한 여름이 오고, 수확의 결실을 맺는 가을이 찾아온다. 하지만 내겐 꿈을 꾸던 봄, 그리고 노력하던 여름, 황폐한 겨울 뿐.
잠을 자는 시간이 줄어들고, 트레이닝하는 시간이 늘어나며 몸에 쌓이는 부담이 커져갈수록 나의 꿈도, 즐겁게 달리는 톱 우마무스메에서 어느새 일본제일로 커졌고 그렇게 쌓이는 부담감과, 늘어만 가는 트레이닝,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악순환을 반복하며 어느새 나는
달리는게 즐겁지가 않았다.
"멍청한 소리좀 하지 마."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누가 나의 꿈을,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고민을 두고 '멍청한 소리좀 하지 마' 라며 내뱉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날리겠지. 하지만 너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은 어린애같은 행동이라는 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불안함으로 휘두르는. 다가오지 말라며 사납게 짖다가 결국 맹수를 물어뜯으려 덤비는 작은 강아지와 닮은 감정이라는걸.
나는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았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게 아니라면, 당신의 잘못 역시 아닐테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주하는것으로부터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내가 레이스의 공포를 이겨내고 달리듯. 당신 역시도, 스스로의 공포를 이겨내야만 했다. 그런 일이었다. 헌데 당신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파도가 철썩이며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마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유언이야."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당신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어."
"그리고 나는, 내 삶과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기로 했어."
"우리를 소중하게 여겨줘서 고마워, 트레이너. 하지만, 적어도 나는..."
"잊혀져서 사라질 바엔, 이름을 남기고 죽겠어. 눈을 감아봐. 들리지 않아? 환성소리가."
"유키무라 모모카, 유키무라 모모카. 지금 1착으로 골인! 1착은 3관 우마무스메인 유키무라 모모카. 그녀의 꿈이 아리마 기념에서도 닿았다! 명실상부한 일본 제일의 우마무스메, 유키무라 모모카!"
"모두가 내 이름을 부르겠지. 그 누구에게서도 잊혀지지 않을거야. 지금 이곳에, 내가 살아있었노라고. 내 생명을 불태우며 일본 제일의 우마무스메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고 얘기해줄거야."
"그리고, 그때의 트레이너는... 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나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는 당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려 했다.
"소용없지 않아. 또다시 나를 잃는게 두려워도 괜찮아. 내가 너를 믿는 만큼, 네가 나를 믿는 만큼... 서로를 믿으면 되는거야."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다치거나, 먼저 떠나게 된다면"
"같이 있었던 시간이, 무엇과도 바꿀수 없었노라고"
"행복했었다고, 잘 가라고"
"웃으면서 말해주면 된다고 생각해."
"두렵다면 내가 네 공포심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어줄게. 너는 내 꿈으로 향하는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줘."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좋은 친구, 좋은 트레이너와 우마무스메로... 함께 걷다 보면, 그 두려움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트레이너."
떨리는 눈길, 떨리는 목소리, 숨을 고르는 당신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나는 속삭였다. 괜찮아. 여기에 너처럼 두려워하는 우마무스메가 있어. 하지만 포기해선 안돼. 두렵기 때문에, 걱정스럽기 때문에, 소중하기 때문에... 도망친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저 나아가는거야. 그렇게 앞을 바라보며 꿋꿋하게 걸어가는거야. 변하는 미래는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는거잖아.
>>155 그래.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고, 언젠가 스러진다. 무적의 우마무스메 라는 건 없다. 그 제왕도 부상이 있었고, 그 부상을 딛고 일어섰다. 부상이 없을 우마무스메라는 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들을 더는 잃고 싶지 않답니다. 더이상 나는, 상처받고 싶지가 않아요. 그런데.
“……바보같네요, 당신도, 나도……”
어째서 이 아이는, 내가 상처받아도 된다고 하고 있는 걸까? 삶과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하고 있는걸까?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 이렇게 덤덤하게 말하는 걸까? 이해할수가 없었다. 두려워도 괜찮다고 하는 이 아이를. 웃으면서 말해주면 된다고 하는 이 아이를. 괜찮다며 손을 잡아오는 이 아이를. 니시카타 미즈호는 떨리는 손길로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려 하였다.
“……후회할 거에요. 정말 당신이 원하는 대로 [ 한계 ] 까지 밀어붙이려 한다면. 나의 트레이닝 방식은 아주 혹독한 방식이거든요. 그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었던 걸요. 당신들이 최대한 무리하지 않도록. ” “유키무라 씨, 당신은 정말로 내가 그렇게 하길 바라나요? 당신이 이름을 남기고 스러지는 그날까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나요? “
또 다시 그 날을 반복하는 것은 사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괜찮다고 말한다. 그 날이 반복된다 해도 행복했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본 제일의 우마무스메가 될 수 있다면 우마무스메로서의 생명이 끝나도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꿈을 이루고 스러진 아이를 담당한 사람 앞에서.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 미즈호는 간신히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진정하려 하고 있다. 유키무라 이 아이의 속삭임을 듣고서도 간신히 진정하려 하고 있다.
“……좋아요. 유키무라 씨. 그렇게 바라신다면. “ “당신의 꿈에, 옆에서 끝까지 응원하는 트레이너가 되어드리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꿈을 쟁취할 수 있도록, 전력으로 도와드리도록 하겠어요. “ “나는 당신의 꿈을 이뤄줄 수 있고, 마땅히 그럴 능력이 있는 트레이너이니까요. “
그래. 도망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꿋꿋이 서서 버티고 있으리라. 그리고 절대로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 이번에만큼은 절대로 잃지 않고 모든 걸 이루리라. 그런 다짐을 하며 미즈호는 간신히 진정하고 유키무라를 바라보며 애써 웃으려 하였다.
“울지 않아요. 유키무라 씨. 저는 울지 않는답니다. “ “어른은 아이들 앞에서 함부로 울지 않아요. 지금도 그렇구요. 저는…괜찮답니다. 괜찮아요. 네. “
되려 걱정 말라는 듯 유키무라의 어깨를 토닥이려 하며, 미즈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였다.
"꿈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는건 바보같은 일이야. 그리고, 그걸 응원하고 지켜봐주고, 이끌어주는 트레이너도 바보같은 일이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발전해왔어. 아주 오래전, 우리가 단순한 동물이던 시절엔 살아있는데에 급급했지. 싸워야 했고, 밥을 구해야 했고, 살아 남아야 했지. 그것에 목숨을 걸었어.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일들이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아. 평화로운 시대지, 적어도 이 나라, 이 순간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고민해왔어.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태어난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수 많은 것들 사이에서."
"난 말이야, 트레이너."
"달리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해. 우마무스메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한 일 처럼 여겼지만... 내가 인간이었더라도 달렸을거라고 생각해. 달리는게 즐거웠고, 처음으로 본 TV속의 우마무스메들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지금도 손을 뻗는다면 닿을것만 같으니까."
당신의 떨리는 손이 내 손에 맞닿는다. 나는 그런 당신에게 괜찮다고 말하듯, 두 손으로 당신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퍼져나가, 당신을 안심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마무스메의 체온은 인간보다 높으니까.
"괜찮아. 어떤 험난한 길이 내 앞에 펼쳐져 있더라도-"
"나는, 나의 꿈을 위해서라면 죽을 준비가 되어있어."
"누구도 내 이름을 모르는 채로, 덧없는 꽃 한송이가 바닥에 떨어지듯 사라지고 싶지 않아. 상처가 늘어나고 흙과 땀으로 아무리 엉망이 된다고 하더라도 괜찮아. 이게 나의 각오야. 트레이너가 내 곁에 있어준다면..."
"난 분명, 마지막 순간에 행복했었다고 네게 말 할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울음이 터져나오려는것을 간신히 진정하려 하는 당신의 앞에서, 괜찮다고 말하듯 몇번이고 당신의 손을 꾸욱 하고 잡아주며.
"고마워, 내 곁에 있어줘서."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반드시 네게 일착을 선물할게. 일본 제일의 우마무스메로써,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자. 늙어서 사라질때까지. 언젠가 흔들거리는 할머니 의자에 앉아서, 참으로 즐거운 인생이었노라고 말하며 아늑한 노후를 보낼때까지 살아남아 줄테니까."
당신은 애써 웃으려 하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정말, 강한척 하는것도 닮았다니까.
"좋아, 오늘은 실컷 먹어주겠어. 물론 트레이너의 지갑으로 말야."
아무리 혹독한 트레이닝이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피가 터지고, 더 이상은 무리라며 기절하길 반복하더라도. 아름답고 싶었던 몸이 얼마나 망가지더라도. 설령 내가,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앞에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 한 점 후회 없으리라.
네가 날 믿어주기 때문이다. 나의 각오를 믿어주고, 나의 꿈을 믿어주고 나와 함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으며 반드시 저 아늑한 낙원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고 말해주는 네가 나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고마워, 나의 소중한 첫번째 친구. 고마워, 나의 트레이너.
저 앞에 어떤 절망과 고난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일어서서 넘어보이겠어. 너의 각오가 헛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