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조금 더 일찍 태어나지 그랬냐는 둥 해도 쓰다듬어 흐트러진 머리 정돈해 주는 유현을 제가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다만 항상 그런 아쉬움은 조금씩 있었다.
나도 성인이고 유우 오빠도 성인인데. 아무리 친하고 친해도 남매도 아닌 남남이고 심지어 이성인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넘어오는 거지!?
아. 다시금 생각하니 아쉬움 넘은 무형의 오기 스물스물 생긴다. 이래뵈도 눈도장 찍은 사람 못 넘어뜨린 전적 단 한 번도 없는 저였다. 그러니 기필코 한 번은 이 오빠에게서 반응이든 뭐든 봐야겠다. 오기가 결심으로 바뀌는 건 오래 걸릴 것 없었다. 유현 모르는 온화 내심에서 짖궂은 새싹 하나 톡 하니 피어오른다. 그렇게 조용히 무시무시한(?) 계획 남몰래 품고서 겉으로는 시침 뚝 떼고 조잘거렸다.
유현 짖궂게 웃을 땐 저도 고개 갸웃 기울여가며 같이 웃고. 괜히 삐진 척 했을 때도 유현 받아주는 말 있었으니 순순히 고개 돌리고 표정 방실방실하게 바꿨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뭘로 각을 잡아볼까- 고민에 고민 거듭하다 떠오른게 문득 얼마 전 일이었다. 그걸 이렇게 써먹어도 될까 싶지만.
뭐 어때. 내가 당한 일 내가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하여 일단 시작은 간단하게 별 일 아닌 듯 한 마디 툭 내놓았다. 별 거 아니란 듯이 최대한 담담하게. 엄청 아픈 일 있었다고. 다른 사람이라면 이 한 마디부터 호들갑이니 역정 내느니 하겠지만 유현은 아니나다를까 장난스럽게 반응해왔다. 그 반응에도 아무 말 않고 그가 내어준 팔 만지작거리는 제게 머리 콩 부딪히자 장난스런 반응 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고집스레 입 꾹 다물고 시선도 슬쩍 아래로 내리깐다. 그리고 잠시 침묵.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꺄륵대며 장난 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팔 조물대던 것도 차츰 느려지다가 손 슬그머니 멈추고 그 팔 당겨 제게 둘러지게 한다. 마치 유현이 저 안아주게 하듯. 자연히 제 몸도 중심 기울여 유현 쪽으로 기대며 잠시 닫고 있던 입술 열어 말한다. 은근히 물기 어린 듯한 목소리로.
"그게 있지- 얼마 전에 나 혼자 순찰을 나갔는데- 내 구역에서 금지된 저주를 쓴 범죄자를 만났단 말야? 나 혼자였지만 상대도 혼자라서 어떻게든 될 것 같았는데.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크루시아투스를 맞은 거야. 그것도 연달아 두 번이나 맞으니까 아파서 눈 앞이 핑 돌더라. 너무 너무 아프구 고통스러운데 상대는 멀쩡하고- 그대로 있다간 정말로 나 거기서 어떻게 되버릴 것 같아서-"
흐윽-
겨우 겨우 말 꺼내듯 얘기하다 돌연 가녀린 숨소리 내며 유현의 품으로 파고든다. 그 순간까지 눈커풀 파르르 떨며 눈 감고 입술 가볍게 깨물고 파고들 땐 떨리는 손으로 유현의 옷 살짝 움켜쥐기까지 하여 보통 일 아닌 듯한 분위기 팍팍 흘린다. 제 기억으론 이런 모습 한 번도 보인 적 없으니 효과 제법 있지 않을까? 일단은 그 정도 떡밥 던져놓고 유현에게 매달리듯 하며 반응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떻게 될까나-
대답은 돌아가지 않는다. 쓸데없는 논박에 힘쓸 시간은 없다. 당장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는 데만 해도 흥분으로 인해 과할 정도의 심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자 만나게 된 즐거움이며, 저와 똑같은 얼굴 손수 뭉개 버리는 생경한 경험이란! 하하! 웃음소리 맑게 터진다. 그대로 틈 주지 않고 곧장 몰아치려 했지만 상대의 수가 더 빨랐다. 달려들던 기세에 제동이 걸리자 그가 이를 바득 갈았다.
멈춰? 무엇을? 그래선 안 된다. 그것도 고작해야 이런 마법으로? 멈추게 하려면 차라리 사지를 자르고 숨통을 끊어 놓으란 말이다! 밧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아도 꿈쩍 않는다. 마법사라면 이러한 때 마법부터 떠올려야 함이 응당한데도 줄 묶인 개처럼 달려드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맹렬한 기세만은 여전했지만 몇 번을 그런대도 변하는 것 없으니, 잠깐의 지체가 있고서야 조금이나마 이성적인 판단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 디핀도."
……싸우는 와중에 굳이 입까지 이성적일 필요는 없지. 되는대로 지껄이며 손목을 꺾어 제 묶인 밧줄을 조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