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막을 내린다. 기나긴 싸움이 끝났으며,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구도를 다 한 고르돈, 화려하게 산화되어버린 뱀버 브레시, 턱 끝까지 쌓이다못해 온 몸을 짓누르는 망념. 모든 것이 갑갑하고 무력하고 놀라울 만큼 시원하다. 모든 것에서부터 해방된 듯한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해주는 단 한가지 깨달음. 이걸 깨달음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토고를 묶고 있던 주박이 풀려난 기분이다.
선택
그렇다. 나는 비록 타인에 의해 탄생되었고, 버려졌으며, 다시 주워졌지만,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잘못 발사된 오발탄 따위가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하여 탄환을 쏠 수 있는 자다.
전쟁 스피커의 선동에 생각을 포기하고 그저 휘둘러지는 대로 살 뿐인 존재가 아니다.
"하하... 참말로... 일찍 알았음 좋았을 것을..."
운명이란 것이 나에게, 또 우리에게 온갖 시련을 내리더라도 우린 그 안에서 선택을 내린다. 그 선택만이 온전히 나의 것이며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441 숨이 멎습니다. 온 몸이 물결을 따라 깊게 젖어드는 느낌. 천천히 물결치는 호수 위로 한 장의 종이가 띄워진 느낌입니다. 더이상 의념을 쓸 수 없다는 본능적인 불안감도 스치지만 토고는 그런 것을 무시하고 바람을 느껴봅니다. 상쾌한 바람에 무겁게 다가오는 어둠이 무섭지 않습니다. 휴식을 전해올 어둠으로 토고는 눈을 감습니다.
곧,
잠시의 잠에서 깨어납니다. 북적이는 소리들 없이, 조용한 목탁 치는 소리만이 울려옵니다. 몸은 뻐근하지만 그 이상의 상처는 없습니다. 망념만 없어진다면 충분히 부드럽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깨어난 후 천천히. 토고는 주위 풍경을 살펴봅니다. 낡은 사찰에서 울려오는 목탁 소리는 분명한 사실 하나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토고는 눈을 뜬다. 아직 망념이 가시질 않아 뻐근하고 개운치 않은 기상이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에 토고는 감사한다. 누가 상처를 치료해주었나 하는 의문은 오래가질 않았다. 낡은 사찰과 빈 공간을 채우는 목탁 소리가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쩝... 그래도 쪼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실 없는 농담을 흘리고선 토고는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로 향한다. 그 움직임은 둔하고 어딘가 어색하지만, 금방 나을 거라고 토고는 생각한다.
>>446 느적한 걸음걸이로 사찰을 걷습니다. 곧 무너질 것처럼, 제대로 수리가 되지 않았던 풍경들관 달리 여러가질 기운 듯 보이긴 하더라도 대충의 수리는 되어있는 것이 눈에 띄입니다. 그 풍경들을 지나, 토고는 소리를 따라 걷습니다. 곧 소리의 진원지에 도달하자 미함스님은 두드리던 목탁을 끊고 천천히 뒤를 돌아봅니다.
" 깨어나셨군요. "
촛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촛농을 흘려낸 것처럼 흐릿하게 남은 심지만이 남은 불꽃을 태우고 있습니다. 토고가 이 전투에서 무기를 잃고, 망념을 얻은 것처럼. 미함 역시도 이 전투를 위해 스스로의 깨달음과 삶을 불태웠을겁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모습과는 달리 미함의 눈은 연한 황금빛을 띄고, 희미한 바람에서 진한 연꽃 향기가 퍼집니다. 지독한 숭고함과 신성 앞에 토고는 무심코 고개를 숙입니다.
" 해후를 나누고, 많은 이야기를 맺어야 할 성 싶으나. 그보다는 무언가를 심고 계신 모양입니다. 이 노승이 다른 것은 썩 뛰어나지 않으나, 듣는 것은 자신이 있건데 어디. "
풀어보지 않겠냐고. 쌓인 이야기든, 하고싶던 말이든 뱉으라는 뜻으로. 미함은 천천히 입을 엽니다.
"확실히, 일단은 떠오르는대로 얘기했는데 요구 조건이 꽤 많았네요. 그거라면 비쌀만도...."
20만 GP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원거리에서 양방향으로 통신할 수 있는 유용한 장비를 사기엔 모자란 감은 있어보인다.
나는 로라씨가 꺼내든 물건 세개를 바라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선은 구시대의 이어폰쪽에 좀 더 향했다. 뭐랄까, 굉장히 익숙하게 보이는 물건이었으니까.
일단은 제시한 조건을 고민해본다. 돈을 찍어내는건, 특수 탄환을 사기 전에 여유가 있었다면 몰라도 현재로썬 사실상 배제해야 되는 선택지고. 일방통행으로 할지, 혹은 조금 성능이 떨어져도 무난한걸 고를지인데....도청 당하거나 거리 제한이 빡빡하더라도 역시 아군과 소통할 수 있는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어쩌면 전생의 내가 지휘관이었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마는.
우리들의 모습은 저 촛불과 닮았다. 대부분의 촛농을 흘려보내고 얼마 남지 않은 심지만을 위해 불타고 있는 촛불처럼 말이다. 바람을 후 하고 불면 꺼져버릴 것 같지만,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은 참으로 밝았다.
토고는 스님의 말을 듣는다. 듣는 것엔 자신있다는 그 말은, 내 안에 쌓인 혹은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뜻으로 들렸다.
토고는, 말하는 것엔 자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그 자신감이 없어 한 없이 작아졌다.
"..."
토고는 말하기 쑥쓰러운 것인지 어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뚜벅뚜벅 걸어가 스님의 앞에 앉는다. 그리고 짧은 심호흡 끝에 타인에게 함부러 벗지 않는 헬멧을 벗어 연한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본다.
"저는... 오발탄입니다."
태어나 버려진 존재. 부모에게 받은 거라곤 이름 하나 뿐.
토고는 다시 입을 열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살기 위해 쓰레기를 먹었고 쓰레기장에서 잠을 잤다. 어제 함께 했던 아이가 오늘 보이지 않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친구라는 존재는 당연 없었으며, 밝은 햇살속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자를 부러워했고 나보다 더 맛있는 것을 먹는 자를 부러워했다.
그 부러움은 질투가 되었으며, 질투가 원망이 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등쳐먹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을 속이면 속일 수록 손에 쥔 것이 많아져 뿌듯했다. 그것이 큰 화를 불렀지만, 오히려 기회가 되어 이채준 스승님에 의해 거두어 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가슴속에 계속 답답한 게 가시질 않더라고요. 노력하면 할 수록 나아지는 건 없고, 저 자신도 더 나아지긴 커녕... 천천히 빠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쏟아냈다. 타인에게.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이에게. 그것이 잘못된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리고 그 또한 운명에 의해 고뇌하고 방황하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토고는 죄인이 든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는 죄인이다. 그래서 참회하고자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다짐이다. 변하겠다는 다짐.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변하겠다는 다짐.
"저는 변하고 싶습니다. 변할겁니다. 부모가 저를 버려서 뒷골목 산 것처럼 타인에 의해 변하는것이 아닌..."
토고는 다시 떠올린다. 내가 왜 이채준 스승님과 함께 했는가, 그를 따라갔는가. 나는 나 스스로 선택을 한 것이다. 최선을 다 한 선택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