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는 무엇 때문에 그 생각을 했을까. 온 몸의 세포들, 조직들, 장기들이 서로 안 죽으려고 피를 끌어쓰는 통에, 아주 천재적이지는 않아도 중간을 상회하는 수준은 간다고 자부하던 빈센트의 뇌도, 이 간단한 걸 떠올리지 못했다. 아무런 색도 드러내지 않아야 할 폐포에 핏물이 잔뜩 들어차며 벽에 걸린 것처럼 턱 막힌 호흡 때문일까. 책장 사이를 속속들이 비추는 이면의 태양도 밝히지 못해 점점 어두워지며 생명과 함께 막을 내리는 시야 때문일까. 한계치를 넘어선 고통에 고통이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저 온 몸의 주요 장기들에서 피가 낡은 수도관처럼 새나오고, 뼈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제멋대로 분절된 것 때문일까. 빈센트는 그 질문에 유일하게 답해줄 수 있는 사람, 아니, 답할 수는 없더라도, 빈센트가 당장 물어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답을 깨닫는다.
'이제 알겠어.'
여선이 진지했다.
항상 자기 목숨은 안 걸린 것마냥, 언제나 뭘 해도 진지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안 보이던 인간이,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남의 시체를 주울 때가 아니라, 빈센트 자신의 몸을 고치면서. 그 얼굴을 보고, 빈센트는 제 몸이 진실로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끝인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았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잊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 죽음은, 빈센트에게 찾아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저...
정신 드세요?
그 한 마디에 정신을 차린 빈센트는, 최소한 죽지는 않게 된 자신의 몸을 보고 여선에게 말한다.
각성자는 여러 의미로 비각성자를 초월한 존재들이다. 담력 또한 그렇다. 준혁이 알던 대로, 강산은 지금보다 레벨이 낮을 적에도 빌런들이 점령한 지역에 처들어가서 싸운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상부의 명령을 받아서 움직인 것이었긴 했지만.) 단순히 게이트의 분위기 조금 음침한 정도로는 두려워하지 않아야 했을 터. 그런데...
"이 게이트, 가끔씩 방심할라 치면 괴현상이 발생화곤 해서...'백두'라도 쥐고 있으면 덜 불안할텐데 도서관이라 그러지도 못하고 원. 사실 꼭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긴 해. 심지어 아이템도 아니라서...그런 것도 감지가 되려나...? 그냥 예전에 여행다닐 때 샀던 쥘부채 하나야."
어이없어하면서도 찾는 것을 도와주려는 준혁에게만 찾는 것을 맡기기는 역시 미안하니, 강산도 마도로 빛의 구체를 만들어서 잃어버린 물건을 같이 찾는다.
"...."
그리고 준혁의 말대로, 쥘부채는 역시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흘렸나? 도망치다가 흘린 거라면 그럴수도...못 찾아도 괜찮으니까 무리하진 마. 또 사면 되지."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려고 하면서 약간의 웃음으로 긴장을 풀어보려 한다. 책꽂이에 꽃힌 책들 중 [잊혀진 과거의 명소 : 의념시대 이전 한국 편] 같은 책 한두 권이 조금 튀어나와 있는 것에 애써 관심을 주지 않으려는 척 하면서 그것들을 도로 책꽂이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토고는 여전히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서들의 의뢰를 수행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반복되는 행위에 질려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는 이유는... 정보가 값지기 때문이다.
읽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책장을 기웃거리며 책의 표지를 살펴보던 토고는 책 제목을 보곤 무언가 떠올렸다.
'제목만 읽어도 되는 거 아닌가?'
책의 제목이 없는 건 패스. 애매모호한 건...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고, 확실하게 이런 정보가 담겨져있다! 하는 책은 제목과 토고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을 조합해 이런 저런 추측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봐야 추측이기에 신빙성은 바닥을 기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재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면의 숭배자를 퇴거시킨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그려진 마도진을 흩어냈다. 맥락한 본다면 이 책들을 읽고 미쳐버려 게이트의 존재가 된 개체들로 보였지만 그것을 증명 할 방법은 요원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면 높은 확률로 자신 또한 저 대열에 끼게 될테지.
" ...하아. "
이곳은 그저 걸어다니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정신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도사의 흥미를 마구잡이로 자극하는 책들을 시작으로... 자신의 비밀을 깊게 찌르는 것 까지. 그것들을 외면하고 참아내는 것 만으로도 실시간으로 정신력을 깎아내는 게이트의 모습에 헛웃음마저 나오고 있었다.
[■■■의 기원] [인외종의 ■■에 대한 보고서] [핫초코를 완벽하게 제조할 수 있는 레시피]
[황무지 요리법], [스위트롤의 무궁무진한 변화], [세계의 치즈들] 같은 제목이 보인다. 요리책인가..? 사람의 이름이 적인 책이나 요리책들이 보인다. 궁금하긴 하지만... 막 정보를 원해!! 하는 호기심이 아닌, 어떤 내용이 있을지 궁금하다는 느낌의 호기심이다. 으음.. 아무래도 괜히 했나.. 제목을 통해 책 내용을 유추하고자 했지만 하면 할 수록 궁금증이 배가 됐다. 그래도 토고는 자신이 흥미있는 것이 아니면 그리고 손해보기 싫어서 책을 읽고자 하는 욕구를 다스릴 수 있었다.
아무튼 쓰잘대기 없는 시간을 보내다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 방향을 바라본다. 거대한 몸집. 늘 보던 그 사람. 하기야 특별반이라면 여기 있을만하지.
"음...그럴만 했지. 특별반에 돌아오지 못 할 뻔했던 상황에서 겨우겨우 돌아와서 그만큼 해줬잖아. 그만하면 잘 해줬어."
강산은 준혁의 말에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돌아와준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지.
"그러면...대타로 생각해둔 사람은 있어?"
과연 누가 될까. 괜찮아보이는 후보들을 몇 명 생각해보던 차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게 있어서 멈칫한다. 책꽂이와 책꽂이 사이 틈새에, 강산이 찾고 있던 쥘부채가 고이 접힌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꽃혀 있었다. 혹시나 해서 끄집어내서 일부를 살짝 펴보니, 하얀 바탕에 녹색과 흰색의 화초무늬. 정말 강산이 잃어버린 쥘부채가 맞았다.
"찾았다! 어우, 누가 남의 물건을 저런 데다 꽂아놓은 거야?"
...그리고 강산 본인에겐 확실히 쥘부채를 여기에 꽂아둔 기억은 없었다. 전혀 무섭지 않은 척 쥘부채를 치켜들어 보여주며 호들갑을 떤다. 단, 목소리 크기에 유의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