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발자국소리,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귀를 간질여온다. 눈이 소복히 쌓이고, 발을 시리게 얼리던 시절이 언제였냐는 듯 봄은 시나브로 찾아와 나뭇가지와 단단한 땅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늦봄의 계절, 마치 여름을 연상시키는 듯한 한 차례의 소나기가 지나간 오후의 햇빛은 이전보다 더욱 따사롭게 얼굴을 내리쬔다. 비소식에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빗발을 헤치며 외출한 보람이 없지 않은가- 그녀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소음을 듣는 것이 그리 불쾌하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초코 바나나 파르페 나왔습니다-"
...그녀 또한 이 찬란한 햇살 속 산책을 퍽 즐기고 있었으니까. 백 운은 잠시 기다릴 겸 앉아있었던 야외 테이블에서 일어나 큼지막한 종이컵에 담긴 파르페를 받았다. 때 아닌 군것질에 약간의 사치지만, 이 정도 쯤이야-이런 좋은 날에는 약간의 칼로리와 설탕, 충동이 함께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내킨다면, 인증샷도 함께-
그녀의 시선이 잠시 흐드러지게 핀 철쭉꽃에 머물렀다가, 다시 먹음직스런 파르페로 향했다가, 옆을 지나치고 있는 다양한 행인들에게 옮겨갔다. 멋지게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 제 삼자이자 부탁하기 만만한, 혼자 있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생판 모르는 남이 사진을 부탁했을때 거절하지 않고 받아줄 정도로 할 일이 없어보이는(바빠보이지 않는) 사람.
당신에게 부탁한 그녀는-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마치 방금이라도 회사의 컨퍼런스 룸에서 내려온 듯한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물론 계절감이 있으니 두꺼운 자켓은 없었고 셔츠는 좀 더 산뜻한 블라우스 차림이었지만 길가를 지나다니는 산뜻한 차림새의 사람들이나 당신과는 다른 사무적인 느낌이 도드라졌다. 누가 보았다면 마치 주말 근무라도 하다가 뛰쳐나온 회사원으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어쩌면 당신을 포함해서).
"네, 사진. 여기 이 꽃을 배경으로 해서- 제 상반신이 다 나오게요. 아, 이게 찍는 버튼이니까 이걸 눌러주면 돼요."
조심스레 받는 당신의 모습에, 그녀는 이때다!싶은 반짝으로 눈으로 순식간에 상세한 사진 요구사항과 버튼 설명까지 좌르륵 늘어놓았다. 역시, 예상한 대로-그리고 점찍은 대로 딱 적당히 사진 찍어줄만한 사람이다! 그녀가 성큼 다가섬과 동시에 옅은, 오묘한 장미향이 풍겼다가 이내 멀어졌다. 어느샌가 그녀는 철쭉꽃 덤불 앞에 서서 파르페를 멋지게 들고 있었다.
오케이 사인과 함께, 다시 한번 미소지어보인다. 아까의 그 인위적인 웃음에도 사진 찍을 타이밍을 못 찾은 거냐던가, 좀 더 앉았으면 좋겠다던가, 핸드폰 각도를 위쪽으로 살짝 기울이면 좋겠다는 등의 자잘한 소리를 꺼낼 생각은 고이 접어 머리 뒤편에 넣어두었다. 그 정도로 완벽한 사진사가 필요했더라면, 차라리 자신에게 약점이 잡힌 멍청이들이나 자신과 계약을 맺은 좀 더 만만한 센티넬을 데리고 나와 부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불필요한 소음을 빚지 않아도 충분히 완벽한 하루이지 않은가. 백 운은 해사한 웃음과 함께 파르페를 든다. 찰칵, 무던히 사진 한 장이 찍혔다면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요구한다. 이번에는 파르페를 베어무는 장면이다.
그렇게 당신이 그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사진 두 장을 무사히 잘 찍어주었다면, 백 운은 으레 그렇듯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핸드폰을 다시 가져갔을 것이다. 아, 핸드폰을 넘겨받던 그녀의 손이 잠시 미끌, 했다가 위태롭게 다시 핸드폰을 잡으려 허우적거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녀는 무사히 핸드폰을 가져가고 당신과 즐겁게 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한 입 베어물었던 파르페가 흘러내려 당신의 옷을 더럽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핸드폰을 넘겨받는 새에 한번 떨어뜨릴 뻔 해서 한번 허우적 했다가 민호의 옷에 파르페를 흘려버렸다는 설정! 민호가 센티넬 능력을 발휘해서 중간에 핸드폰을 잡아주거나 파르페가 옷에 묻는 걸 피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당해도 좋아! 선택은 민호주가~
준비됐다는 말에 제대로 초점을 맞추고는 찍는다. 한번 찍고나서 원래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려고 했는데 한장만 더 찍어달라는 요청에 속으로 귀찮아하면 방긋 미소를 짓고는 한번더 찍어주겠다고 한다.
"그럼 다시 한번 찍겠습니다."
이번엔 살짝 몸을 낮추어 찍어준다. 그러고는 상대방을 따라 특유의 대형견같은 미소를 짓고는 넘겨준다. 하지만 상대방의 손이 미끌러웠는지 휴대폰을 떨어뜨리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폰을 잡게되었다. 하지만 폰을 신경쓰느라 파르페까지는 신경쓰지못해 옷에 파르페가 묻게 되었다. 민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상대방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준다.
말로는 그럴 듯하게 호들갑을 피우지만, 표정에까지 미안함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사소한 실수-라고, 그녀는 뻔뻔하게 생각했다. 완벽한 모양으로 내용물을 담아내고 있었던 파르페를 한 입 베어문 게 원인이 되어 흘러내렸을 뿐인걸. 거기에 그렇게 신체능력이 좋다면-이것도 그냥 피해버렸으면 그만이었던 거잖아? 굳이 남의 핸드폰을 잡아가며 옷을 더럽힌 것도 어떻게 보면 자기 잘못이지-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죄송해요. 내가 여러모로 서툴러서."
그럼에도 서둘러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더럽혀진 옷 위를 문지른 데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아까 그 반사신경, 혹시- 하는, 작은 의심의 실마디 하나가 그녀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혹시나- 혹시라도? 아, 혹시라도. 혹시라도 센티넬이라면- 그러면 어때서?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센티넬인데. 모든 센티넬들은 국가의 엄중한 관리 하에 놓이거나 히어로로 설치고 다닐 뿐인데. 하지만- 하지만 그 중에 하나라도, 내 손아귀 안에만 있다면.
성격은 무난하고, 순하고...그러면 역시 민간인일까? 작은 호기심은 연기처럼 스러져간다. 그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뭐든지 가능성으로 남겨두는 편이 좋다는 것 정도는 쓰디쓴 담배가 입에 맞기 시작했을 즈음에- 진작에 깨달은 교훈이었다. 특히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지금 같이 작은 불씨가 온 세상 천지에 나돌아다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녀의 눈빛이 잔잔히 가라앉는다.
"아니, 그래도 사진까지 찍어줬는데 미안해서 그래요."
그러지 말고 일단 받아두라며, 운은 짐짓 호들갑을 떨며 연락처를 당신의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부주의한 건 나였는데, 뭘. 학생은 너무 빼지만 말고 받을 땐 제대로 받는 법도 익혀둬요. 요즘 세탁소 가는 비용이 만만찮은데."
세상에 물가가 너무 올라서 말이지, 한 푼도 아쉬워 말고 받아요! 라며 오히려 이쪽이 윽박지르듯이 엄포를 놓고는 기스 하나 없이 멀쩡한 핸드폰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당신이 구해준 핸드폰이고, 이번에 새로 나온 반짝이는 신형 핸드폰이다.
"이거 구해준 보답이기도 하니까. 나중에 꼭 편하게 연락하기에요?"
운은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의 당신에게 가볍게 윙크를 보내곤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 좋은 날에- 적당히 기분 좋은 사건. 그리고 또 어쩌면 꽤 괜찮은 발견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
//뭔가 이쯤에서 끊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리고 이제 슬슬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못 올 거 같아~ 여기까지 하고 끊을게! 민호주 고생했어!
세상은 늘 똑같이 흘러갈 뿐이다. 기분 좋게 햇살을 쬐는 순간도, 저녁 노을을 보는 순간도, 점차 빛이 꺼지다 암전되는 하늘 아래 맞는 바람결마저도. 잿빛으로 물들인 머리를 한 단발의 여성은 기나긴 한숨을 흘려보냈다. 발코니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언제나 그랬듯 수많은 가로등과 빌딩의 창문에서 비쳐지는 형광등, 도로를 달리는 라이트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가슴에 사무치는 무료함, 그리고 이어지는 공허함. 얇은 셔츠 사이로 스며드는 밤바람의 한기가 몸을 떨리게 했다.
"하아-..."
여인은 몸을 웅크리며 제 팔을 감싸 안았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하루하루가 쌓여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채 흘러갈 뿐이다. 일상을 새롭게 바꾸고 싶다면, 직접 바꾸는 수밖엔 없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좀 전에 한 친절한 청년이 옷을 버려가면서까지 구해준 핸드폰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잠시 자신의 친절을 극구 사양하며 당황하던 청년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아직, 연락은 오지 않는걸까? 아니면 영영 오지 않는걸까. 과연 어떻게 되려나. 짧은 상상은 어설픈 추측이 되었다가 스러진다. 여인은 곧 잠금화면을 풀고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문자를 꾹꾹 눌러 보냈다.
[시작해]
...이내, 풍경 속의 불빛이 흔들린다. 아주 작고 미세한 흔들림에 이어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과 비명소리, 시끄러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징징 울리고 울려 여인의 귓가에까지 흘러들어가 요동친다. -부르르, 한기어린 바람에 인 오한인지, 저편 멀리 벌어지는 소란의 간질임에 인 흥분인지 모를 것이 여인의 어깨를 떨리게 했다. 아, 그렇지. 역시 직접 바꾸는 수밖엔 없다. 일상을 새롭게, 비일상으로 옮기며 흔들어놓기 위해서라면 이쪽에서 어떻게든- 일상에 거친 망치질을 해가며 깨부수고 금을 가게 만들어 변모시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오른 팔뚝의 자국에 통증이 느껴져도, 가슴이 철렁하는 위기가 느껴져도, 점차 흐려지는 존재의 말미에조차 그녀는 웃음지었다. 무사히 살아돌아올 정도로 능력 있는 자라면, 마땅히 돌아와 자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