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저 무식하게 쎈 깡통이 자신의 기량이 부족한 건 생각하지 않는건지 속으로'만' 불평을 투덜거리느라 토리의 안색이 누가 보기에도 '나 절망하고 있어요'가 된 것이 린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실패는 배움의 어머니라지만 두 자릿수가 넘게 싸웠다가 금방 털렸으면 기진맥진할 만도 하지 않을까. 저 인정사정도 없는 (이하생략)
"찬성이어요. 소녀와 오토나시씨에겐 휴식이 필요하여요."
린은 숨을 몇 번 몰아쉬다가 '더 이상하면 나는 훈련이고 뭐고 반항아가 될거다' 식의 비스무리한 메세지를 담아 강렬하게 쏘아보았다. 아무튼 두 사람의 간절한 소원이 통했는지 로봇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다가 기계음을 내었다.
[적절한 휴식도 배움에 중요한 법이죠. 타당한 요구입니다. 대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쉬는 시간을 줄 수는 없으니.]
두 사람앞에 어느새 내밀어진 종이가 팔락거렸다. [이걸 채우도록 하죠.]
자기소개서. 제법 귀여운 글씨체로 쓰여진 초등학생들이 신학기에 적을 법한 질문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강산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자기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얼른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몇 초 후 조금 진정됐다 싶을 때 입에서 손을 떼고 목소리를 조금 낮춰 다시 묻는다.
"게이트에서 아이를 구조한 거냐...?"
침착한 척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은 여러 의문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시윤이 구조자라지만, 아이를 열다섯 살짜리한테 그냥 맡겼다고? 애가 애를 키우는 거 아냐 이거? 아니 환생자니까 괜찮은건가? 분명 엄청난 소식인데 이렇게 쉽게 말해줘도 되는 건가? 그래도 강산과 시윤은 장차 같은 길드 소속이 될 동료로써 이미 꽤 많은 비밀을 공유한 사이이긴 했다. 그래서 방금 강산도 자신의 비장의 패가 될 수 있는 의념기까지 알려주지 않았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쯤, 강산은 "꽤 너다운데."라는 말을 듣고 다시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긍정한다.
"아무튼 그렇다. 내가 생각해도 그래. 내가 좋아하는 악기 연주를 하면서, 내가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며 그들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뒤이어지는 미들네임 '재클린'에 관한 설명을 듣고는 다시 입을 떡 벌린다.
"신이 이름까지 내릴 정도면 정말로 엄청난 활약을 하고 나왔구나...시윤 씨, 정말 대단해졌는데?!
여선은 로봇 스승이 하는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망념이 많다는 이야기에, 뼛조각이 박힌 채로 치료된다는 이야기에, 끔찍한 이야기들이 만항서 빈센트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어쨌든 수술대에 오른 이상 환자는 의사가 뭘 하건 저항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저항했다가 잘못하면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라는 대로 건강을 강화한다.
"...건강을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강화한다고 치유될 부상이었다면, 내가 당신의 뼈를 두 개 정도는 더 부러뜨렸을 겁니다.]
"네. 네. 안 그래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완벽하게 치료하면 바로 훈련을 들어갈 것 같다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24시간 후에 다시 시작입니다. 그 전까지 '개인 정비' 못 끝내면 몸 상태가 어떻건 바로 들어간다더군요."
이런 미친 곳에 괜히 왔다고 툴툴대던 빈센트는 여선에게 말한다.
"좀 빨리 좀 고쳐주시죠. 인간의 몸이 무슨 시계마냥 빨리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알지만..." //5
"애. 그래 애. 17살의 아기. 구조 했냐고 물어보면, 맞기도 하고....부탁 받았다고 할까..."
사정이 복잡해서 짧게 말하기가 힘들다. 결국 고민하다가, 고신 게이트에서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줬다.
긴 겨울을 사람들은 겨울의 왕이 다스린다고 믿었다. 그 왕이 죽음으로써 겨울이 끝나고 봄은 찾아온다고. 그리고 그 믿음은 이윽고, 겨울의 왕이라는 신을 만들어냈다.
그게 아주 오랫동안 반복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다가 봄을 알리는 신, 도라는 이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겨울의 왕이 되어야 할 아이를 데리고 도피했다. 그 상황에서 나와 만났다. 나와 얘기를 나눈 그는, 스스로의 신성을 희생하는 것으로 아이의 신성을 부정하여. 필연적인 죽음을 맡이해야되는 신을, 필연적인 죽음을 맡이해야 하는 인간. 즉 평범한 아이로 바꾸고자 했다.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건 성공했다.
"...그러니까. 신이 되어야 할 아기였던 에브나는 이제 평범한 17살 어린 아이가 되었어. 상식이 부족하고 순진무구한.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아빠 도라 어르신은 봄결이 되어 잠시간 떠났지."
먼 곳을 한번 본다. 거기에는 봄바람이 불었다.
"그 부녀가 다시 재회할 때 까지, 나는 그 아이를 맡겠다고 약속한거고.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
빈센트는 여선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젓는다. 빈센트는 로봇 스승에게 그렇게 두들겨놓고 24시간은 너무 심하게 적은 시간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로봇 스승은 빈센트에게 "전투가 직장인처럼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면 그 다음날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퇴근 이후에 당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러 가던가요?"라는 참 할 말 없는 이야기를 했다. 좀 길고 돌려 말하는 비유였지만, "실제 전투 상황은 당신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였고, 그에 대해서 빈센트는 뭐라 할 말이 없었기에 수긍했다. 뭐, 계속 맞으면서 논리가 어찌되건 난 수긍 못 한다고 우기는 게 나았다고 후회했지만 말이다.
"여선 씨. 그것만큼은 감사드리죠. 여선 씨가 제 전담 교관이 아니라는 게..."
어쨌든, 쉬는 건 좋았다. 여선이 부상을 좀 잠재워 주었기에 훨씬 나았고, 통증이 사라지니 이 상태로도 일단 누워있을 만했다. 빈센트는 시켜먹어도 될 시간이라는 말을 농담으로 받아친다.
"치킨을 시킨다면 저는 후라이드 치킨, 피자를 시킨다면 페퍼로니, 그 외는... 일단 식당 이름 들어보고 결정하죠. 여기는 어디 배달 된답니까?" //7
"저 24시간 쉬기는커녕 12시간 교대근무처럼 굴렀거든요!" 3교대도 아니고 2교대로 구르는 것 같은 그런 걸 겪었는데 비번인 날에도 끌려나올 슈 있다는 거 들으니까 아득해지는데 그게 현실이라서...(이하생략) 같은 말이 들리는데 대체 어떻게 그리 말을 줄줄 내뱉을 수가 있는지..
"으흠흠.. 이게 아닌뎅... 일단 최선을 다해 치료합니다!" 전담 교관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점은 슬쩍 딴곳을 보며 얼버무리듯 넘기려 합니다.
"그럼 양념 반마리에 후라이드 1.5마리거나. 페퍼로니 피자.." 식당이름을 몇 개 말하지만. 요리 스킬을 수강하는 이들의 체험식당 같은 것도 꽤 있으므로. 의외로 배달 자체는 무리가 없을지도
시윤이 조금 망설이다가 강산에게 아이슬란드의 재현형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자, 강산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거나 심각한 표정을 지어 가며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뭔가 이 휴식 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탓에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슬픈 이야기네...큰 결정을 했구나. 그래도 17살이면 엄청 어린 건 아니네."
성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15세의 환생자와, 신의 아이였으나 인간이 된 17세 소녀라니, 강산이 듣기에 묘한 조합 같았다. 강산과 시윤의 딱 중간 나이라서 더 묘했다. 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여기엔 안 데려온 거로군.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비밀로 하고자 한다면 지켜주도록 하지."
그래. 2교대보다야 24시간 텀을 두고 지옥 훈련을 받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여기서도 좀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빈센트는 괜히 따졌다가 치료가 더욱 "고통스럽지만 효율적인" 방향으로 바뀔까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선이 음식 이야기를 하자, 로봇 교관이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들 중에는 요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요리 스승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먹어보다면 맛은 좋을 겁니다.]
빈센트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무거나 먹을 거라는 여선의 말과 조합해 이야기한다.
"수련이고 뭐고 잊고, 일단 치킨이나 먹죠. 여기 스승들이 튀겨주는 치킨은 얼마나 맛있을지."
"지금 제 몸 상태가 심각하긴 해도 거즈를 쑤셔넣을 정도로 찢어지거나 벌어진 상태는 없습니다."
빈센트는 웃으면서 끔찍한 소리를 하는 여선을 바라보며, 자신의 목숨을 끝장내진 못하더라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자에게는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격언을 다시금 떠올린다. 만약 따졌다가 여선이 빈센트의 몸에 이런저런 '실전적이고' '투박한' 처치를 했더라면 빈센트는 아마 로봇 스승이 생각지도 않은 정신력이 붕괴되는 경험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배달을 기다린다.
"아무튼, 아오, 더럽게 아프네. 로봇 스승님. 진통제 잘 쓰는 법은 없습니까?"
[마취의 발견은 어떤 바보라도 외과의사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 윌리엄 스튜어트 할스테드]
"잠깐, 그건 바보들이나 마취를 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외과 수술의 난이도가 낮아져 좀 더 적극적으로 외과 수술을... 젠장. 아닙니다."
빈센트는 다시 살아나려는 고통에 진통 효과를 달라고 하려다가, 더 끔찍해질 것 같아서 관둔다.
"괜찮아요~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요" 메스면 덜 아프게 쨀 수 있을거에요~ 라는 말을 하면서 의료도구를 들어보이는 여선입니다. 없으면 만들면 되지! 물론 진짜 전투에서는 메스만큼 깔끔하게 베어주지 않을 테니 더 아프겠지만 이건 덜하니까 오히려 좋아가 될 수 있을지도. 같은 말을 하는 표정이 평소처럼 웃고 있잖아?
"진통제... 정량보다 조금 더 넣으면 되지 않나요?" 정말 못 견디겠으면.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건 모르죠?" 고개를 갸웃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상처를 만들고 지혈하기에는 시킨 것들이 오고 있을 거니까 다시 인벤토리 안에 메스를 집어넣습니다.
"치킨치킨~" 치킨이 기대되나 봅니다. 5성급 호텔요리치킨! 같은 걸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만..
"저기, 로봇 교관님. 교보재는 그만두고 그냥 알아서 치료받으면 안 됩니까? 지금 여선 씨랑 같이 있다가는 없던 상처 두 개는 생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하지만, 누구나 조건 없이 가르치는 AI 로봇들에게는, 여선이 그런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가 가르침을 주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기에 간단하게 각하되었다. 오히려 기껏 얻은 생생한 교보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롭소 교관을 자극한 것인지, 로봇 교관은 빈센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간곡히 부탁합니다. 내 수련이 끝날 때까지 이곳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당신의 고통은 허용 범위 내에서 통제될 것이고, 추가적인 부작용으로 인한 위험 역시 감수 가능한 수준입니다.]
"예. 예. 그러시겠죠."
...라고 말하는 사이, 왠 로봇이 빠르게 달려와 배달 음식을 꺼내고 갔다. 그리고 빈센트의 호주머니에 손을 콱 박아넣더니, 딱 배달음식 시킨 값만큼을 빼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