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악! 인싸의 엄청난 친화력! 아무래도 오늘은 여러모로 사치 베르단디의 한계를 시험하는 날이 된 것만 같다. 무어라 할 틈도 없이 훅 가까워진 거리에 딱딱하게 굳어서는 앗, 아, 하고 가오나시 목각인형처럼 서 있는 것이다. 뒤늦게 이성이 되돌아왔을 때에는 또 다시 얼굴도 함께 홧홧해져서, 목도리에 얼굴을 푹 눌러 가릴 수밖에 없었다. 훅 몰아쉰 숨이 안경을 덮는다. 오히려 표정을 가리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 오, 오오, 오늘 뿐이니까요..."
저, 애초에 그렇게 부자같이 생긴 것도... 아니고, 이, 이런 일도 사실은 이번이 처음이고, ...평소에는 이럴 사람도 없고, 걱정을 덜고 싶은 마음에 이러쿵저러쿵 중얼거려 봐도, 음성 일부가 목도리에 묻혀 소년에게 잘 전해졌을지는 의문이다. 진짜로 두세 개 정도는 먹어도 상관 없는데. 쾌활한 말투로 재잘거리는 소년의 발뒷꿈치를 바라보며 슬며시 손에 쥔 지갑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어지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네.
"...얼마든지요."
금방 튀겨놓은 게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편의점 문 앞에 섰다. 띵동. 역시 한 개로는 마음에 차지 않으니 억지로라도 쥐어 주고 집에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면서. 조금 웃은 것 같기도 하다.
한없이 장난스럽고 쾌활한 얼굴의 소년과는 다르게, 사치의 안색은 점점 더 파리해져만 가고. 오히려 저런 태도로 나오니 1.5배 정도는 더 무서운 것 같기도 하다. 왜, 있지 않은가. 영화나 드라마같은 곳에서 웃는 얼굴로 일관하다 수틀리면 푹찍, 하고 상대를 끝내 버리는 캐릭터같은 것이! 아, 어쩐지 요즘 하루에 5넘어짐 정도로만 무난하게 넘어가더라니! 다시 한 번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며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으아아아ㅡ!!!!
"저, 저, 모, 모른 척 할 테니까..."
깜빡이는 전등,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며 꿰뚫는 것 같은 시린 색의 눈동자, 이, 이, 이, 이거, 혹시 사망플래그같은 거라도 되나요? 마음같아서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지만 등을 보일 용기는 없고, 저 남학생보다 더 빠르게 달아날 자신도 없고. 그저 슬슬슬 뒷걸음질만 칠 수밖에.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아서 커다란 선반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툭, 등에 전해지는 딱딱한 감촉이 이리도 절망스러울 줄은.
"핫, 하하, 하,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이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미 목소리의 떨림은 주체할 수 없어진 지 오래고. 무슨 말을 더 해야 여기서 살아서(??)나갈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생각하던 그 때! 선반에 가볍게 부딪힌 충격 탓이었는지. 선반 위에 허술하게 놓여 있던 책 한권이 툭, 하고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치가 떨어진 책을 멋있는 동작으로 회피! ....하는 일 따위는 없이, 그대로 책등이 정수리를 강타하고. 앏,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책등에 맞은 정수리를 감싸쥐며 몸을 웅크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책 모서리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다! 눈물이 찔끔 난 것 같기도 하다.
대놓고 뻔뻔하게 나가기 위해서 대충 던진 헛소리라는 건 본인도 인지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엥?"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맹한 소리를 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예전만큼 신비를 신봉하지 않으니 이 정도 장난질이면 잘못 본 거겠거니 생각할 거라 여겼는데.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재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 꽤 그리운 심상을 자극한다. 아예 정말로 무서운 짓 해볼까 하는 생각이 짧게 스쳤으나, 상대가 입은 복장을 보고 생각 고쳐 먹는다. 그래, 우리 아가씨 때문에 학교에 온 건데 또래 애들을 겁박해선 안 되지.
"응? 알면 다친다고 했잖아. 그럼 모르고 있으면 괜찮다는 뜻이지. 모르고 있어 줄 거지?"
제법 정답고 친근하게 그려낸 웃음 사이로 예의 싸늘한 빛 눈이 번뜩이는 듯하다. 무서운 짓 안 한다 하지 않았느냐고? 에이, 이만하면 농지거리 아니냐. 그는 대답을 종용하듯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불안감 고조시키기라도 하듯 괜히 평소보다 느릿하게 걸어서 막 어깨에 손 올려 붙잡으려던 때, 갑작스레 떨어진 물건이 여학생의 정수리에 직격했다. ……장난질하던 것도 멈추고 시선이 상대방의 이곳저곳을 빤히 살폈다. 신이라도 어안이 벙벙해질만큼 황당한 상황이라는 뜻인가? 아니, 정확히는 그 쪽이 아닌 다른 의미로 놀란 거다. 린은 자신도 덩달아 몸 낮추어, 맞아서 웅크린 여학생의 양 팔을 붙잡고 얼굴을 마주보려 들었다. 눈이 마주친다면 어쩐지 조금 전보다 더 환하게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보일 것이다. 유열이나 희락 따위의 형용이 몹시도 어울릴 만한 그런 얼굴.
"너 운 나쁘구나!"
비량은 길흉화복의 당신堂神이기도 하다. 운수를 총괄하기로 명망 높은 신보다는 못하더라도, 비교적 작은 범위의 운명과 운에는 종종 관여하는 신. 자세히 보지 않아 몰랐는데, 뒤늦게서야 이 여자아이의 운수를 알아본 것이다. 이제 보니 아주 기가 막힌 운수가 아닌가! 집요하게 불운하지만 살기에 팍팍할 만큼은 못 미치는, 하지만 사는 질 떨어뜨릴 정도는 되면서도 근본적인 위협은 못 될 괴상하고 애매한 악운. 음, 이 기막히게 찝찝하고 절묘한 흉화란! 특이해서 마음에 들었다. 지켜보기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은 모습이라, 그는 제멋대로 생각 끝마치고 멋대로 결론 내렸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우리 친구 할까?"
바로 갑작스러운 친구 신청 공격으로! 말하고 나서는 또 그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다. 서둘러 대답하지 않으면 승낙으로 치고 바로 어깨동무 해 뛰어나갈 기색이다.
선물을 받아 보니, 오마모리. 신사에서 팔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으나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직접 만드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라면 제 착각이겠죠.
바깥에 두면 톡톡 터져 청량한 기운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탄산일진데, 다 풀지 못할 일은 무엇인가요? 나는 시간이 많고, 또 인내심도 많은지라 뚜껑 열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답니다. 고대하는 마음을 함께하는 셈이지요.
편지가 늦어 죄송합니다. 날 사모한 겨울 바람의 질투일까요? 말씀대로 학생의 처지인건만, 이리저리 오가는 일이 많아 매번 한박자 느리게 답변을 드리는 군요. 그게 편지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한 편으로는 답답하시겠습니다. 그래도 받은 편지에 전부 답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고집을 부려봅니다.
들려오는 소문을 기다리신다는데 나는 그저 홀로 기뻐하고 있으니, 나도 참 세심하지 못한가봅니다. 어디가 나의 비밀 친구가 나를 이리 기쁘게 한다 말하자니 자랑하는 것만 같아 괜스레 입을 다물게 됩니다. 이런 겸손은 미덕인지 무례인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대신 이리 편지를 보내고 있으니 내 감정은 벗과 나의 비밀로 합시다.
때가 된다면, 사쿠라 모찌와 라무네는 내가 준비할테니 친우께서는 그저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근래 홀로 지내는 시간이 잦아져서 그런지, 받은 게 있으면 갚을 생각만 하는 버릇이 생겨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