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친절하게 쓰여진 편지봉투의 문구, 늘상 있는 일이라는듯 가볍게 쥔 편지칼이 망설임 없이 앝은 종이를 가르며 곧은 선을 내어주었다. 언제나 들어도 기분좋은 사각거리는 소리, 아마 이것 때문에도 굳이 편지칼이라는 물건을 고집하는 거겠지.
다만 이번에 같이 온 것은... 제법 크기가 되어보이는 선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어리와 필기구, 만년필에 비하면 무드등은 그 성격이나 쓰임새 역시 다르니까.
아니, 어찌보면 비슷한 걸까? 자신 역시 편지를 쓸 때에는 너무 밝은 곳이 아닌 은은한 불빛이 있는 장소를 더 선호하기에 얼추 들어맞을지도 몰랐다. 무드등의 특성상 너무 밝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얘 흐릿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이것 역시 보통 물건은 아닌지 예전엔 본적 없던 디자인의 것이었다 더욱이 적당히 골라서 주었대도 감지덕지이거늘 점원과 오랜 상의까지 해가며 고른 것이라니, 아무래도 이 마니또는 선물 하나하나가 적재적소에 제대로 쓰이는 것을 넘어 그 의미들까지 고려하는 철두철미한 성격인가보다. 아마 그랬기에 첫 선물부터가 큰 의미를 가졌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무드등을 장식하는데에 쓰인 꽃들 역시 가장 싱그러울 때 보존된 상태로 잘 꾸며져 있었다.
[통칭 '오렌지 테러'님께,
그렇네요. 이번으로 세번째랍니다. 이번 선물 역시 본격적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항상 예상 외의 무언가를 보여주시니 매번 새롭게 느껴지네요. 더욱이 선물을 고를때에 쏟은 마음까지 함께 포장이 되어있는지 여느 꽃들에게서 맡을 수 없던 '정성'이라는 이름의 향까지 느껴지는듯 하답니다. 채우지 못하겼던 그 아쉬움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죠.
제 이야기라면 그저 여느 여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고 생각한답니다. 생각보다 재미없을지도 모르는 걸요. 근처 디저트 가게가 신경 쓰이고, 여느때와 같이 나른했던 하루에, 봄을 알리는 청명한 하늘이 가볍게 코를 간질이는 바람을 이끌어주었던 하루 같네요. 당신의 하루 역시 그러했을까요? 그렇다면 그 날은 행복했나요? 기분이 좋았나요? 어딘가 들뜬것 같았나요? 아니면 무언가에 안긴듯 편안했나요?
오늘도 좋은 매듭을 지었던 하루였길, 만약 미처 매듭지어지지 못한게 있었다면 그 다음날 뿌듯한 마음으로 마무리지을수 있길 바랄게요.
교무실을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황급히 선배님의 옷에서 손을 떼요. 교복은 다림질을 자주 하는 옷인데 괜히 주름이 잡히면 안 됩니다. 이 짧은 쉬는 시간 사이에 잘도 무례와 실례를 많이 저질렀으니까요, 더 이상은 안 될 일이에요. 이제 선배님에게도 인사를 하고 교실로 사라져야겠습니다. 뛰어가는 것보다 빠르게, 정말 사라지고 싶어요...
“...유치원생 아니라니까요.”
반과 이름은 어떻게 알아낸 건가 싶은데, 공책 탓일 것 같아요. 학반과 번호, 이름을 적어두었으니까 떨어트리고 쏟아지던 그 사이에 이름을 보았다고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명찰도 있고, 선생님이 절 부르기도 하셨으니까 들켜버린 거에요. 이미 알아버렸으니 뭐라고 하지도 못합니다. 저도 선배님이 하시모토 씨라는 걸 알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축하받을 일도 아닙니다.”
친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장난기도 많으신 것 같습니다. 일부러 콕 집어서 축하한다고 하시는데, 전 이미 심부름을 많이 망쳤습니다. 무사히 배달을 완료했지만 그 사이에 선배님도 넘어뜨리고 도움까지 받았으니까요. 상냥하지만 짓궂은 분이실지도 몰라요.
“...안녕히 계세요.”
더 어물쩍거리다가는 또 무슨 장난을 치실지도 몰라요. 쉬는 시간도 끝나버릴테고, 인사를 합니다. 도망이 아니라 교실로 돌아가는 거에요!
하얀 바탕의 몸에 이마와 등을 타고 노란 털이 보송보송 돋아난 날씬한 토종 고양이였다. 고양이에 홀려 여기로 온 것은 아니었어서, 뒤늦게 고양이가 나타나자 그도 잠시 동그란 눈을 해 보인다. 제 쪽은 동물 있어도 상관 없는데 저 이름도 모를 동행인은 어떨지 모르겠다, 하고 고개 돌려 뒤를 확인한 그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슬쩍이 스쳤다. 표정은 딱딱한 듯해도 어쩐지 시선이 고양이에 꽂혀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좋은 의미로 말이다. 몇 세기 묵은 노인네 눈치 어디 가는 것 아니다. "그래, 그래."하면서 씩 웃어 보이는 표정 참 능글맞아서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앞에서 버티고 있던 고양이는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타다닥 달려갔다. 일단은 피한 다음 멀리서 지켜보려는 듯한 눈치다. 사람을 반기기는 하지만, 알아가는 시간도 없이 남의 무릎에 덥썩 안길 정도로 경계심 없는 개냥이는 아닌 모양이지. 동물은 예뻐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편이라 대충 일별하고서는 메뉴판부터 확인한다.
"뭐 시킬래? 나랑 놀아주는 중이니까 내가 사도 좋고."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주문 시작한다. 그러니까, 아메리카노 2잔에 디저트 품목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5이란다. 이 정도면 여기서 밥 시켜먹는 격에다 혼자서 다 먹기나 가능한지 의심이 들지만, 아무튼 황당무계한 주문 끝마치고서는 미카를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타카나시 하네입니다. 사장님에게 전화를 드리러 조용한 곳으로 나왔어요. 아르바이트는 비밀이니까, 누구에게도 비밀이니까 아직 하교하지 않은 학생들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합니다. 사장님에게 이렇게 조심조심 어렵게 전화드린 이유는 방과 후인데도 제가 아직 학교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고없이 찾아온 보충 수업이 제 하교를 막았습니다. 쪽지 시험을 망친 탓이긴 하지만 너무 어려웠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들어주실 리가 없으니, 결국 저는 오늘의 아르바이트를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이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이제 재미없는 보충 수업을 들으러 가야하는데...
‘...와타누키 씨?’
이제는 기억합니다. 붉은 머리의 같은 반 학생, 와타누키 씨. 같이 주번을 할 때 열심히 도와준 상냥한 동급생이에요. 제가 불쾌할 수 있는 오해를 했는데도요. 그런 와타누키 씨가 보여요. 붉은 머리가 눈에 띕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와타누키 씨도 오늘 보충 수업을 들어야 해요. 분명 선생님이 남으라고 호명한 이름 중에 와타누키 씨가 있었어요. 듣지 못했던 걸까요? 호의를 돌려줄 차례인 것 같습니다. 와타누키 씨에게 다가갔어요.
“와타누키 씨.”
조심조심 이름을 부릅니다. 제가 와타누키 씨를 기억하는 건 확실한데, 와타누키 씨는 저를 기억하지 못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불쾌했던 일 때문에 잊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놀라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그 다음은 본론입니다.
고작해야 카페에서 한 명이 먹는 돈으로 쓰기엔 많은 금액일 테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눈치다. 요즘에야 들어오는 믿음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어엿한 부富의 신이고 재물신이라. 쪼들리기엔 아직 한창때다. 주문을 마치고 나서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창가에서는 적당히 떨어진 햇살 드는 자리다. 의자는 안락하고, 주변에 놓인 장식품과 인테리어의 질이 제법 괜찮다. 옆에는 작은 책장이 있어 책을 읽기에도 좋은 장소다. 조용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날에는 이곳에 오는 것도 제격이겠다. …남궁 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고양이는 도망가 버렸지만 숨는 데 도가 튼 건 아닌 듯했다. 제 딴에는 안 보이는 곳에 숨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훤히 보이는 의자 밑에서 얼굴 빼놓고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노란 눈이 호기심을 담고 반짝거리고 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낯선 손님들이 안전한 존재라 판단한다면 곧 슬금슬금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고양이는 됐고, 그는 의자에 앉아서는 곧바로 테이블 위에 팔꿈치 대고 턱 괴어 건들건들한 자세가 되었다. 와타누키, 라면 성이겠지. 이름을 몰라도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니 그건 되었다. 보다 문제는 이것이다.
"아- 선배님, 이럴 때는 내 이름도 뭔지 물어봐 줘야지. 안 물어볼 거야?"
그래. 솔직히 얼굴 보니까 하나도 안 궁금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고작 이 정도 철벽에 푸념 멈춘다면 린이 아니다. 눈썹 휙 들어올리며 치근덕거리기 멈추지 않는다.
안 듣는다는 말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와타누키 씨가 그대로 교실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하길래 무심코 손을 뻗어버렸습니다. 정말 실수에요! 같이 주번을 했다고, 그 때 와타누키 씨가 상냥하고 친절했다고 조금 긴장이 풀린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붙잡을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어요. 잡았더라도, 잡지 못 했더라도 바로 손을 거둡니다. 와타누키 씨에게 실례입니다.
“잔소리 좋아해요?”
아마 이대로 와타누키 씨가 보충 수업을 듣지 않으면 크게 혼날 지도 몰라요. 자신이 가르친 과목에 대한 쪽지시험 성적이 나빠서 보충 수업까지 하는데, 그 보충 수업마저 듣지 않는다니요. 밉보이고 잔소리 듣고, 혼나는 건 분명합니다. 와타누키 씨가 보충 수업을 듣지 않는 이유가 있는 지도 몰라요.
“선생님한테 말하세요.”
아프다던지, 해야하는 일이 있다던지요. 저도 오늘 원래 해야할 일이었던 아르바이트를 뒤로 미루었으니까요, 와타누키 씨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고보니 이따금, 와타누키 씨가 반창고를 붙이고 오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얼굴에 상처가 날 정도라면 엄청 힘들고 피곤한, 몸을 써야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제가 말합니다.”
어떤 사정으로 보충 수업에 출석을 할 수 없었는지 대신 말해주는 정도야 할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