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일간. 혼자만 앓던 내심을 털어놓은 감상은 미약한 두려움이었다. 라라시아조차도 이해하지 못 한 고민을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그저 시간이 답이라 생각했었다. 조금만. 하루만 더. 기다리면 답을 내릴 수 있겠지. 누군가와 마주하는 건 그 후여도 괜찮을 거야. 그래서 줄곧 라라시아와 붙어 다녔다. 치유가 주는 일시적인 안식에 기대어 나중만을 기약했다. 언제 올 지도 모르는 나중을.
"어어...?"
그녀는 말을 끝내고 시선이 느껴져도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미약한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렸을 때는 역시... 라고 생각했지만. 대뜸 아스텔이 자리를 옮기며 하는 말에 눈이 자연스레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거침없이 움직인 그가 그녀의 뒤로 갈 때는 나가려보다 했으나 뒤에 앉아 그녀를 끌어안는 것은 정말로 어느 예상에도 없던 행동이라. 밀어낸다던가 거부한다던가 그런 건 생각도 못 했다. 시선 내려보니 단단한 팔이 그녀를 안고 있고 등 뒤에 닿는 건 같은 체온이 느껴지는 품이었다. 싫지 않은 놀람과 더불어 다시금 울컥 올라오려는 무언가 있었으나. 바로 뒤에서 가깝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붙들었다. 마치 지금 그녀를 안은 팔처럼.
그대로 쭉. 아스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 동안 스스로도 내리지 못 한 정의를 단번에 내려버리는 말을 들으며 그녀는 쓴 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너는 그렇게 단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걸까. 어째서 너는. 그렇게 똑바로 마주해주는 걸까. 생각만 하며 얘기가 끝나갈 즈음 그녀는 살며시 아스텔의 팔에 손을 얹었다.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닿기 위해서. 고맙다며 말이 끝난 후에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너는 너대로 살기 위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거잖아. 네 말대로라면. 그러니 너도 너를 그렇게 비하하지 말아."
가라앉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팔을 살짝 쓸어준다. 조금씩 손을 움직여 팔을 도닥이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작게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며칠을 고민했는데. 네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니까 그 며칠이 거품 같다. 왜 그렇게 고민했나 싶어. 이제는. 완전히 내려놓은 건 아니지만. 네 말대로 조금은 뻔뻔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자신감은 들지 않지만 너한테 책임을 떠넘기진 않을 거야. 뻔뻔해지기로 한 건 내 선택이고 그 책임은 고민을 끝낸 내 몫이니까."
뻔뻔해지자. 전과 같길 바라는 자신을 긍정하자. 당장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지만 아스텔의 팔이 그녀를 잡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몸도 마음도 어긋난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두 이 안에 붙잡혀 있었다. 어쩜 이렇게 치사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 하다가 그에게 기대어 어설프게나마 고민을 끝냈다. 치사한 인간이다. 자신은. 그가 말한 것처럼 착하지도 자상하지도 않은. 치사하고 뻔뻔한 인간이야. 나는.
"고마워. 아스텔. 나를 그렇게 봐줘서. 내 가장 큰 두려움이 네게 내가 어떻게 비칠지였는데. 그게 사라졌으니 맘이 꽤 편해지네. 정말 고마워. 지금 여기에 나를 붙잡아줘서."
조심스럽지만 진심을 담아 고맙다고 말한 그녀는 몸을 느릿하게 뒤로 기울여 아스텔에게 기대려 했다. 그냥 닿는게 아니라 편안히 몸을 맡기는 느낌으로. 푹 기대졌으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몸의 긴장을 푸는 것이 느껴졌겠지. 비로소 내려놓고 안심한 것처럼.
"괜찮아. 뻔뻔해져도. ...지금껏 많은 것이 억압되고 많은 것에 눈을 돌리고 살았으니 조금 뻔뻔해진다고 해도. ...물론 그게 많은 이를 불행으로 이끄는 거라면 그건 조금 자제를 해야겠지만 지금 그 정도로는 뻔뻔해져도 괜찮아."
조금은 마음 속의 뭔가가 풀린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레레시아의 목소리에 아스텔은 그제야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허나 자신이 언령의 마법사도 아니고 방금 한 말들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논리없이 주절거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말이 어떻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아마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일 거라고 생각하며 당분간은 그녀의 케어에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에게 몸을 기대는 것을 그대로 뒤에서 받쳐주며 아스텔은 살며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제 얼굴을 내렸다. 물론 무게가 너무 실리지 않도록 살며시 띄운 후, 그 상태에서 아스텔은 레레시아를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라봤다.
"...말한 적 있잖아. 너에게는 욕심 낼 거라고 말이야. ...몇 번이고 붙잡을거야. 나중에 귀찮아지거나 싫어지면 얼마든지 뿌리쳐. 그 전까진 붙잡을 거니까."
온전히 제 품으로 끌어당겨 자신에게 기대게 한 후, 아스텔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술을 먹긴 힘들지도 모르겠으나 어차피 술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둘이 붙어있는 시간이었다. 그래. 지금은 이렇게 있자. 크리스마스니까 이 정도는 괜찮잖아. 임무 때문에 자주 보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를 하는 속도만큼은 그 순간 무엇보다도 빨랐다.
이내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스텔은 그 상태에서 살짝 고개를 그녀 쪽으로 좀 더 붙였다. 이어 팔 한 쪽을 살며시 풀어내며 그녀의 고개를 감쌌고 제 얼굴을 마주보도록 했다.
"...눈 감아. 시아."
일방적인 요구를 하며 아스텔은 작은 숨소리를 약하게 뱉어냈다. 따를지 말지는 이제 그녀의 자유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