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비가 내리던 그 밤 이후로.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울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이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는게 맞을 것이다. 억누른 끝에 새어나오는 것이 아닌. 그저 감정을 흘려보내듯 우는 건. 실은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다.
당혹스럽게 울고 있던 레레시아의 옆에 아스텔이 왔을 때. 그녀는 흠칫 떨긴 했지만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울음이 남아 훌쩍이면서도 그의 손길이 눈물을 닦도록 해주었고 티슈를 받아가 직접 남은 흔적을 닦았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그리 오래도 아니었는데 볼과 눈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가리듯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리고 그만큼 더 잘 들리는 아스텔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해주는 긴 긴 얘기를. 중간부터는 또 머리카락을 쥐고 만지작거리면서. 줄곧 바닥 어딘가를 보며 듣다가 네가 나를 멀리한다고 해도- 그 부근이 들렸을 때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물었다. 입술은 보이지 않았어도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으니 반응했다는 것을 들켰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아스텔의 말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잠시 조용히 있다가 마시다 만 맥주잔을 가져와 천천히 잔을 비웠다. 깔깔하게 가라앉은 목을 맥주로 따끔히 씻어내고 더듬더듬 입을 움직였다.
"...이전에 외출에서. 나. 아니 우리는 어머니를 만났어. 우리를 만들고 망가뜨린 그 사람을."
그렇게 운을 떼고 잠깐 입을 닫는다. 여전히 떨리는 손 때문인지 아니면 그럴 것이 필요해서였는지. 그녀는 팔로 스스로를 감싸고 손에 닿는 옷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호흡 한 번 느릿하게 하고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린 버림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자라지도 못 했어. 어머니란 사람이 하는 말만 들어야 했고. 그 사람이 우리에게 하는 걸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어. 그 때는 어머니와 그곳이 우리의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한테 우리는 처음부터 잘 만들어진 인형이었어. 탄생부터 전부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얘기를 하는 내내 그녀의 손은 힘을 너무 주어서 새하얗게 질려갔다.
"당시에는 몰랐지. 어머니가 말해주고 보여주는 것 말고는 몰랐으니까. 하지만 어떤 사고를 계기로 우리는 세상에 나왔고. 에델바이스에 와서 바깥을 접하면서 그 사람이 우리에게 무얼 했는지 하나하나 알아버렸어. 그 때에도 괴리감이 엄청났지. 줄곧 살아온 세상이 뒤집히는 감각이었어. 실제로 그랬지만.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잖아.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린 그 사람에게 증오인지 분노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기분을 느껴도. 이미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며 나름 적응해가고 있었는데."
하. 일순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튀어나왔다. 미간을 찡그린 채로 얘기는 이어졌다.
"그런데 살아있었어. 그 사람. 죽어가면서도 끈질기게 살아있었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이. 주변을 돌아볼 틈 같은 건 없었어. 그 때가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을 거 같았어. 만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그렇게 찾아간 그 사람은 죽어가는 몰골로 모든 걸 얘기해줬지. 우리를 만든 것부터 어째서 그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신의 손으로 빚은 우리를 그 사람은 단지 부수면 어떨까 하는 기분으로 내던졌어. 그 때가 2년 전이야. 에델바이스로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된 그 사건이 실은 그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건이었대. 그래. 뭐 그것까지는 예상했으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었는데."
그 날. 그렇게 급하게 가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작게 중얼거리는 말은 후회로 물들어있었다.
"그 사람은 단지 우리에게 그 잔인한 사실을 얘기해주려고 살아있던게 아니었어. 우리를 다시 보기 위해 살아있던 거였지. 자신이 내던진 인형이 어떤 꼴로 살아는 있을지 보려고. 그리고 어쩌면 나나 라라의 몸에 그 사람의 일부를 심어서 삶을 연장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특수부대가 와준 덕에 그런 일은 없었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죽었거든. 그 사람."
그걸로 끝일 줄 알았지.
"그리고... 그 전까지 나와 라라를 옥죄던 그 사람을 향한 무언가도 그렇게 사라졌어. 그런데 그게 작지 않았나 봐. 그저 누르고 감추며 살아온 것이 사라지니까 그 자리에 너무 큰 빈 자리만이 남은 거야.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사라지고 나니까 그 동안 내가 해온 것들마저 진심으로 한 노력이 맞았나 하는 의심이 들더라. 단지 그 감정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주변을 이용한 건 아닐지. 에델바이스의 목적에 동참하는 것부터 그동안의 관계. 감정. 시간 전부가... 그저 이용한 거 아니냐고. 이제 와서 똑같이 굴어도 되느냐고. 내 자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런데 더 역겨운 건 말야. 그럼에도 전과 같길 내 자신이 바란다는 거야. 진심이 아니었으면 어떠냐고. 그런게 뭐가 중요하느냐고... 돌아온 이후로 줄곧. 나를 부정하지도 못 하고 긍정하지도 못 했어. 혼자면 괜찮았지만 누군가와 마주하면 이 괴리감이 더욱 커져서. 실은 널 마주하는 것도 이걸 정리한 후였으면 했는데. 멍청하게 그네가 같이 있고 싶다던 그 말이 기뻐서..."
미안해. 쓸데없이 이런 시간 보내게 해서. 씁쓸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녀의 말은 끝났다. 팔로 몸을 감싼 채 그녀는 더 웅크릴 것도 없는 몸을 웅크렸다.
이어지는 말은 자신이 없던 시간. 정확히는 글라키에스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던 순간, 에스티아가 죽을 뻔 했을 때 어떻게든 구출하고 추격을 막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던 일전이 있었던 그 순간의 일이었다. 레레시아의 과거, 그리고 지금 그녀가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그런 말들을 가만히 들으며 아스텔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점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새하얗게 질려가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스텔은 눈을 잠시 감고 후우. 소리를 냈다. 이어 그는 입을 열어 레레시아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실례할게. 나중에 멋대로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화를 내도 상관없고 허락없이 함부로 이러지 마라는 말을 해도 상관없어. 지금은 내 멋대로 할게."
이내 아스텔은 레레시아의 뒤로 이동했고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레레시아의 몸을 아스텔은 백허그로 안으려고 하며, 그녀가 만약 품에 들어왔으면 그대로 꽈악 끌어안으려고 했을 것이다. 빠져나가기 힘들도록.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린 시절부터 싸우는 것과 죽이는 것을 집중적으로 한 이였다. 팔 근육이나 근력은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았을 것이다. 괴력을 사용하는 세븐스가 아닌한.
"그 말이 기뻤고 정리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랑 있다는 것이야말로 네가 주변을 이용한 사실이 아닌거야. ...정말로 주변을 이용한 이라면, 그게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어쨌든 이용한 이라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해.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수많은 피를 손과 검에 묻힌 내가 대표적이야. ...나는 머리로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이상 특별히 뭔가를 느끼지 않아. 에스티아는 지금도 그때의 일로 괴로워하기도 하고 힘들어하지만... 나는 가끔 그때의 일을 꿈으로 꾸고 화들짝 놀라서 깨기도 하지만 그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야. ...그 지옥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깜짝 놀라서 깨는거지. ...이용한다는 것은 그런거야.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스스로가 역겹지도 않아. 물론 많은 이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야. ...적어도 난 그래."
다시 한 번 그의 마음 속에 이런 자신이 정말로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아마 자신이 죽여버린 그때의 그 아이들은 필시 지금도 저승에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테고 자신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겠지. 가디언즈와 함께. 그런 생각을 하나 굳이 그런 발상은 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며 아스텔은 레레시아에게 말을 이었다.
"...아주 당연한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닐까. 그만큼 너에게는 그게 정말로 컸다는 것이니까. 뻔뻔해져도 괜찮아.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누가 너를 부정하고 손가락질 해도 나는 네 편이야. 그러니까 나를 믿고 뻔뻔해져도 괜찮아. 네가 전과 같길 바란다면 그래도 괜찮아.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다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뻔뻔해져. ...널 가질 대가라고 친다면 그것도 그렇게 무겁지 않아."
이렇게 이렇게 해야만 한다. 그런 말은 스스로가 할 자격이 없었다. 자신이 올바르게 살았냐고 누군가가 물으면 아스텔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답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은 죽으면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지리라. 그렇게 아스텔은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에 시달려서 살 생각도 없었다.
"너는 스스로를 나쁘게 생각할지도 모르나 내 눈에는 너는 너무나도 착하고 자상해. ...그렇기에 그런 고민도 괴로움도 자괴감도 느끼는거야. ...누군가를 이용하는 이는 그런 생각조차도 할 수 없어. 너는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버틸 수 있었던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차라리 그 어머니라는 존재보다 나를 더 생각해봐.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앞을 바라볼 수 있을거야.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길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난. ...그리고 고마워. 그런 말들을 해줘서."
급하게 갈 것 없이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 될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말을 마쳤다. 어떻게 받아들일진 이제 그녀의 자유였다. 적어도 아스텔은 강요할 생각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