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관 안 강당은 있는 사람들에 비해 매우 넓다. 주민이 고작 스무명 남짓인것에 비하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넓다. 아마 많은 수들의 빈집을 생각해보면 그 만큼 많은 인원들이 이 곳을 떠났다는 뜻일 것이다.
가디언즈의 탄압과 세븐스 차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고 떠나갔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드리고자했다.
유즈가 그에게 다가와서 감사인사를 보내자 그는 웃으며 자신이야말로 이런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다치는 꼴은 보기 어려우니까.
유즈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각 무리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일단 사람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 불안해하고 있을 테니 그들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대화를 하면서 그들과 친해지고 불안감을 없애고자했다. 그는 가장 처음에 만난 잿빛머리 남성에게 다가가 그와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선우는 남서에게 이 일은 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라라시아 자매는 왜 여기에 온것인지 물었다.
한눈에 봐도 세심하게 고심하였을, 누군가의 역작. 이스마엘은 흰 줄기로 얽혀있다 한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주변을 이루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지만 소름 끼치는 정적만 얽히는 존재. 이스마엘은 그쪽에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 무진 노력했다. 계속 지켜봤다간 자신도 저 악취미 중 하나가 될 것만 같아서.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들릴 리가 없는 발소리를 뒤로 흰 형상이 로비를 가로지른다. 안쪽으로. 마치 미디어에서 보던 극장으로 입장하듯. 이스마엘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언니들은 전부 무사할 거야. 그러지 않을 리가 없지.
"제발."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쩌지? 극단-나나히카리. 마치 극에 놀아나는 느낌이 등골을 거세게 훑는다. 아니야, 어차피 놀아나는 거, 끝까지 놀아나주마. 누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눈길을 주며 불안함을 가라앉힌다. 거대한 문이 나타나고, 앞에 선 일렁이는 두 형상을 바라보며 이스마엘은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선우가 다가간 잿빛머리 남성은 그보다 더 나이 많아 보이는 어르신들의 부축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바닥의 매트를 접어 등받이를 만들어주거나 하던 남성은 선우의 기척에 얼른 돌아봅니다.
"아. 왔군요. 저희 주민을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먼저 감사의 인사를 한 남성은 이어진 선우의 질문에 잠깐이지만 곤란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계속 감추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예. 일단은 잠시,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지요."
그리고 선우를 데리고 강당의 조용한 구석자리로 자리를 옮깁니다. 조금은 서늘한 공기가 흐르는 구석자리에서 남성이 말을 꺼냅니다.
"먼저 제 소개를 하도록 하지요. 저는 블레이크 칼렌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제는 쇠한 극단의 마지막 단장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단의 원인인 이의 아비이기도 하지요. 어떻게, 어째서인지는 모릅니다만. 제 자식인 셀리시아의 세븐스가 저 벽을 세우고 아이들에게 생겼던 병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만은 압니다."
"앞서 찾아왔던, 레레시아와 라라시아는 셀리시아의 자식으로 제게는 손녀인 아이들입니다. 그 애들은 혹시 모를 자신들의 친인척을 찾아 제게 연락을 취해왔고, 저의 존재를 알고 만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제 사정과 마을의 현 사정을 듣곤 그 애들이 소속한 레지스탕스의 거점에 아이들만이라도 보낼 수 있게 해주고자 했지요."
스스로를 블레이크라 소개한 남성은 거기까지 얘기하고 잠시 고개를 돌려 회관의 흐릿한 창 너머를 바라봅니다. 잿빛 바깥에 펼쳐진 잿빛 벽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쉽니다.
[이스마엘]
복도 끝에 마주한 문은 마치 공간이 왜곡된 것처럼 거대합니다. 로비와 마찬가지로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안개처럼 일렁이는 형상이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안내해준 거냐는 말에도 형상들은 꼼짝도 않습니다. 문 역시 꼼짝도 않고.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환청이 뒤흔듭니다.
- 이제라도, 돌아갈까? - 지금이라면, 돌아갈 수 있지. - 대신 평생 악몽에 시달리겠지만. - 대신 일생 절망 속에 살아가겠지만.
똑같은 목소리가 번갈아 말하고 하얀 형체가 돌아섭니다. 겨우 돌아선 두 형체는 보일 리 없는 이스마엘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뜹니다. 크게 뜬 눈으로 서로를 보고 쓴 웃음을 짓습니다.
- 역시, 그건 싫으네. - 그래. 싫으니까.
하얀 형체는 잡을 새도 없이 뒤로 휙 돌아섭니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잡아 열자 정말로 덜컹이며 문이 확 열립니다. 문이 열린 순간 안쪽으로부터 희고 창백한 팔이 뻗어나와 하얀 형체를 낚아채어 들어갑니다. 소리없이 사라진 순간 뒤로, 열린 문 안은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처럼 안개가 자욱합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가득한 공간이 그저 이스마엘의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926 첫번째로는 아무래도 연말이고 두번째로는 아직 왼쪽 상단의 갱신된 레스 수를 보면 알 수 있듯 사람 자체가 적으며 홍보로 인한 외부 유입이 아직 적으니까요. 마지막으로는 진행자- 레시주 참가자-선우, 이스마엘, 관전자- 캡틴이니 사실상 참가자는 3명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거에요
개인적으로는 시트 닫기 전까지 외부 유입이 많이 들어오는 효과를 본다면 해결 될 문제 같아요! ㅎㅎ
거대한 문과 숨막히는 정적. 이스마엘은 말아쥔 주먹에서 도저히 힘을 뺄 수가 없었다. 꼼짝하지 않던 형상을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이스마엘은 노이즈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악몽과 절망. 그렇다고 이 장소에서 평생을 썩고 싶은 건 아닐 텐데도. 이스마엘은 이를 악문다. 아니다, 삿된 것이 나를 시험하려 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던 일을 생각하면, 자신을 흔들려 드는 것일 테다. 많이 겪지 않았는가.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눈을 홉뜬 형체였다. 마치 자신을 보고 놀란 듯, 그리고 쓴 웃음을 지어내며 뱉는 말을 들으니 꼭 자신이 악몽과 절망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문이 열리며 형체를 낚아채도 잠시 우뚝 멈추고, 이스마엘은 안개로 가득한 공간 너머를 노려보듯 눈을 좁혔다. 그리고 눈을 잠시 감더니 성호를 그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성호를 긋지 않던 사람이면서.
심호흡, 그리고 발을 내딛는다. 네 바라는 대로 놀아나주마. 그렇지만 끝은 원하는 대로가 아닐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가야만 한다.
자신을 칼렌이라 소개한 남자는 선우를 데리고 강당의 조용한 구석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남들 다 있는 자리에서 하기엔 꺼림직한 이야기 같았다. 조금은 서늘한 공기가 흐르는 구석자리, 비밀 이야기를 하기엔 제격인 장소였다.
칼렌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자매의 어머니인 셀리시아가 자신의 세븐스로 저 벽을 세우고 아이들에게 이 망할 병을 생기게 한 원흉이라는 것이다. 남자의 말을 전적으로는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라라시아가 어떻게 이 벽과 병에 대항할 백신을 만들수 있었는 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셀리시아는 어디에 있죠?"
만약 그의 말이 맞다면 이번의 적이 될 이는 셀리시아였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걸까? 이스마엘의 아버지, 자신의 형도 모자라 이제는 자매의 어머니까지 적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악당이라도 자식 교육은 잘 시켰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할까? 레레시아가 칼렌의 사정과 마을 사정을 듣고 레지스탕스의 거정에 아이들만이라도 보낼 수 있게 해주고자 했다는 말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는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그 또한 잿빛 벽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저 벽이 한시간 후에 사라진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가능한걸까요?
백신이 모자라서 벽이나 줄기를 대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벽에다가 사용할 백신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한것일까?
문 앞 형체들이 고민 끝에 문을 열었듯이, 이스마엘도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깥의 것과 같이 가볍고도 선득한 안개가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기어올라와 이스마엘을 뒤덮습니다. 눈 깜빡이자 어느새 안개 한복판입니다. 앞뒤 구분되지 않는 와중 다만 발 딛은 바닥만이 선명한 공간에 안개가 천천히 흐릅니다. 바깥에서 길을 낼 때처럼 이스마엘의 정면을 향해 긴 길을 내며 양쪽으로 갈라집니다.
갈라진 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내부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좌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을 장소입니다. 이제는 너덜한 장막과 낡은 무대만이 남아있지만. 과거의 모습을 충분히 연상케 하는 그 공간에서-
두터운 장막 대신 짙게 낀 안개가 살며시 물러나면 단 두 개의 희디 흰 조명만이 그 위를 비춘다. 이제는 무너진 극단, 최후의 극을 연기할 배우 이미 올라가 있으니.
자! 시작된다! 극단 나나히카리의 마지막 프리마 돈나 셀레나의 인생- 개막-!
드넓은 무대는 딱 두 개의 백색 조명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좌우로 정확히 나뉜 조명 아래, 양쪽 모두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는데. 그 여성이 드레스자락을 잡으며 인사를 올리자 조명이 팍 꺼진다. 이후, 좌우가 번갈아가며 서로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양 사이드로 흘러가는 장면들은 얼핏 보기에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국 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걸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좌측 조명이 켜진다. 시작은 아직 열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가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꾸벅 인사를 올린다. 아이는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는 은빛 백발을 찰랑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 즐거운 듯 웃고 있다. 웃으며 아이를 스쳐지나가는 그림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춤을 춘다. 푸른 눈동자가 눈웃음을 따라 반달이 되었다가, 다시 만월처럼 둥그래진다. 어린 아이의 한창 즐거운 한 때를 보여주고, 조명은 꺼진다.
다시 들어온 조명 아래 아이는 미성숙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소녀는 비슷한 키와 체구를 가진 또다른 소녀 그림자들과 무언가를 연습한다. 열심히. 열성적으로. 조금 후에는 직접 대본을 들고 읽기도 한다. 그리고 짤막하게 무대에 오른 모습이 나오고, 미리 연습한 대본의 대사를, 연기를 마치자 그것이 끝이라는 듯 조명이 꺼진다.
다시 들어온 조명 아래 소녀는 조금 더 자란 모습이다. 꽃봉오리에서 막 개화한 꽃처럼 화사하고 활기가 넘친다. 동시에 무엇이든 능숙하게 행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무대 밖에서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마을의 처녀. 무대 위에서는 아름다운 주연이자 여가수. 화려한 주연의 복장을 입고 훌륭히 연기를 마친 소녀에게 무수한 꽃세례가 떨어진다. 꽃에 둘러싸여 황홀한 소녀의 얼굴 위로 조명이 꺼진다.
다시 들어온 조명 아래 이제 소녀는 완연한 성인이다. 성숙한 모습의 여성이 한 남성과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검은 곱슬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남성은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여성의 뺨을 쓸어주며 애정 섞인 말을 속삭인다. 여성은 얼굴을 붉히며 남성에게 안겨들고.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 조명이 꺼진다.
다시 들어온 조명 아래 여성은 어디 하나 변한 것 없는 표정으로 서 있다. 혼자가 아니었으나, 이전의 남성은 곁에 있지 않다. 대신 허리춤까지 자란 아이 둘과 함께다. 하얀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푸른 눈과 금빛 눈의 아이들. 여성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가녀린 두 팔로 아이들을 감싸안는다. 아이들은 여성의 손길을 받으며 웃고 여성의 주변을 맴돌며 성장한다. 어느덧 크게 자란 아이들을 여성이 사랑스럽게 끌어안으며 조명은 꺼진다.
우측 조명이 켜진다. 시작은 아직 열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가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조명 아래 동그마니 서 있다. 한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작은 모종삽을 들고. 발치에는 작은 동물들의 시체가 뒹굴고. 아이는 몸을 수그리더니 미동 없는 동물의 시체에 자그맣고 하얀 손을 올린다. 그 순간 시체가 '꽃'으로 피어나며 동시에 조명이 꺼진다.
다시 들어온 조명 아래 아이는 아직 미성숙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비슷한 키의 남자아이로 보이는 그림자와 함께다. 소녀가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쉿, 하는 행동을 하고 그림자의 손을 잡아 어디론가 걸어간다. 나무들 사이. 어두운 숲 속. 깊이 더 깊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소년소녀의 그림자만이 보인다. 두 그림자 중 소녀의 그림자가 소년의 그림자에게 손을 얹자 또다시 '꽃'이 피어난다. 어느새 새빨갛게 물든 소녀가 싱긋 웃으며 뽀얀 꽃잎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뒤로 조명이 꺼진다.
다시 들어온 조명 아래 소녀는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나이의 모습이다. 그 모습으로, 혈기 넘치는 젊은 남자의 그림자를 홀려 숲 속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다. 소녀를 동경하는 또래 소녀의 그림자를 데리고 비밀스러운 골방에 숨어든다. 소녀가 가는 곳마다 '꽃'이 핀다. 크기도 모습도 제각각인. 그러나 뽀얗고 부드러운 꽃잎이 너무나도 인상적인. 피어나는 '꽃'의 수만큼 마을의 사람이 줄어가고 그 가운데에서 아름답게 미소 짓는 소녀의 모습 뒤로 조명이 꺼진다.
다시 들어온 조명 아래 소녀는 이제 완연히 성숙한 여성이다. 여성은 두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스쳐가는 순간, 한쪽 아이의 머리색이 검은색에서 하얀색으로 바뀐다. 한쪽 아이의 머리칼이 짧은 길이에서 길게 자란다. 그렇게 바뀐 아이들을 안은 여성에게 한 남성이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친다. 남성은 더할 나위 없이 분노한 얼굴로, 여성을 한참 힐난하더니 돌아서 사라진다. 여성은 그런 남성을 붙잡지 않고 반대로 돌아서 사라진다. 그리고 조명이 꺼진다.
다시 들어온 조명 아래 여성은 아이들과 생활한다. 생활하는 장소는 그 방이다. 낡고 좁고 허름한 단칸방. 그 방에서 여성은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정성껏 돌보았지만 예닐곱살 쯤 된 시점부터는 아이들만 놓아두고 외출한다. 남겨진 아이들이 어찌하고 있었을 지, 이스마엘은 알 것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차츰 아이들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다. 한 아이에게는 먹어선 안 될 것을 먹게 하고. 한 아이에게는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준다. 아이들이 자라며 그것은 반복된다. 더이상 아이가 토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을 때까지. 더이상 아이가 피 흘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을 때까지. 그 과정의 단편을 쥬데카는 보았을 것이다. 여성의 '교육' 아래 아이들은 생기 없는 눈빛으로 자란다. 여성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고 노래하는 인형으로. 비록 옷은 허름하나 몸뚱이만은 지고한 아름다움을 품은 조각처럼. 완벽하게 '자란' 아이들을 여성은 사랑스럽게 안아준다. 아이들은 여성에게 안겨들고. 단란한 듯 서로를 안은 모녀들의 모습 위로 조명이-
꺼지는 줄 알았으나. 파지직 하며 점멸한다. 예고 없는 이변은 상황을 속행시킨다. 타다다당! 점멸하는 조명 아래 무대는 요란한 총격 소리 울리고 다급한 외침 여럿이 뒤섞인다. 파직 돌아온 조명이 비추는 것은 총에 맞은 한 아이와 그 아이에게 지켜진 다른 아이. 총에 맞은 아이는 옆구리로부터 붉은 물이 번지고 지켜진 아이는 그 피를 뒤집어써 새하얀 머리칼이 붉게 물든다. 그리고 다시 점멸하는 조명. 급박하게 깜빡이는 조명은 이어진 장면을 토막토막 보여준다. 똑같이 총에 맞아 비틀거리는 여성이, 비틀거리는 아이와 주저앉은 아이를 붙잡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게 하고, 그대로 등을 떠밀어 낡은 방으로부터 내보낸다.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여성은 방 안에 연결된 가스 배관을 뜯어, 다시 울리는 총격 소리 향해 내민다. 그러자 펑! 가스 터지며 폭발하고, 여성 역시 불이 옮겨붙어 화르륵 타오른다. 아아악! 스스로 불씨가 되어 주변을 불사르며 여성은 괴로워하는 듯 했으나, 괴로운 비명소리는 곧 환희의 웃음소리로 바뀐다. 아아악... 하하... 아하하, 흐하하하하하! 불에 타며 여성은 미친 듯이 웃는다. 웃으며 비틀비틀 무대의 정면을 향해 돌아서 말한다.
"어때. 내 인생. 재밌었어?"
거칠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선명한 푸른 눈동자 곱게 호선을 긋고. 불 타는 소리 멀어지며 무대는 어두워진다. 곧 모든 빛 사라져 일순간 어둠에 휩싸인다.
짝 짝 짝-
어두워졌던 사방이 단숨에 밝아지며 정면에서 박수 소리 들려온다.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려보면 무대의 마지막에 불타고 있던 여성이 멀쩡한 모습으로 무대에 걸터앉아 박수를 치고 있다.
양 옆에 눈 감은 자매를 앉혀놓고서.
여성은 키득키득 웃으며 박수 치던 손을 겹쳐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보며 말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주변은 낡은 극장의 내부로 돌아와있고 바깥과 마찬가지로 하얀 줄기가 사방에 빼곡했다. 다만 바깥과 다른 점은, 모든 줄기의 중심점이 저 여성에게 향해있다는 점이었다. 혹은 여성의 곁에 있는 자매일 지도 모르고. 그 한가운데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여성은 생긋 웃는 얼굴로 제법 사랑스럽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알고 있지만 일단 물어는 볼까?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을지."
분명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어딘가 사람 같지 않은 분위기와 꺼림칙함이 여성의 주위에 흐르고 있었다.
성호를 긋고 들어간다. 안개가 기어오르고 자신을 휘감을 적, 이스마엘은 안개 한복판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놀아나는 대로 이끌리다 보면, 무대 위에 배우가 올라서있다. 이스마엘은 그 상황을 숨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과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상을 드러내듯 양면적인 모습. 이스마엘은 그 상황에서 꽉 말아쥔 주먹에 힘을 더 세게 줄 수밖에 없었다. ……닮았다. 닮으되 닮지 않았다. 필히 그러할 것이다. 이스마엘은 끔찍한 광경을 눈에 담았다. 점멸되는 조명 속에서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하면 아마 레레시아와 라라시아가 에델바이스에 오게 된 연유가 아닐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던져본다.
"……."
익숙한 얼굴,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여성. 상냥하되 사랑스러운 모습이지만 이스마엘은 달리 사랑스럽다 느낄 수 없었다. 줄기의 중심점을 보았기 때문이요, 무엇보다 아까까지의 인생사를 종합하자면 어찌 사랑스럽다 느끼겠는가. 아무리 기구한 인생을 타고났다 한들. 이스마엘은 눈 감은 자매에게 한참이고 시선을 던지다, 입을 벌렸다.
"레레시아와 라라시아를 데리러 왔습니다."
침착해야 한다.
"연유를 알고 계신다 하였으니 그쪽의 대답도 정해졌겠군요.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진 않지만, 저도 묻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애의 세븐스는 생물에 한해서 어떤 조작도 일으킬 수 있는 세븐스입니다. 상처를 낫게 하거나 병을 만들어내거나, 그 괴물과 같은 것도... 만들어내지요."
이른바 생물체의 세포와 조직을 마음대로 다루어 없던 병도 만들어내고 살아있는 생물로 괴물을 만드는 것도 만들 수 있다는 듯 하다. 그렇다면 저 밖의 벽도, 묘하게 시선과 기척이 느껴지며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던 저 벽도 셀리시아가 누군가를 써서 만들어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은 본인의 일부일까. 약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며 블레이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 어느 부모가 그렇듯, 자식이 약점일 지도 모르지요."
블레이크가 선우에게 해준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 뒤 유즈에게 백신 여분을 요청하자 유즈는 의무대원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각자 남은 백신의 수를 확인하고, 선우에게 백신 한 개를 건네었다.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야 하니 드릴 수 있는 건 이것 뿐이네요. 그런데 선우 씨도 가시려구요? 기다리면 길이 열릴 텐데요."
반응은 평이했다. 어쩌면 당연한,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반응에 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어느 정도는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생김새가 아니다, 오랜 시간 함께했기 때문에 느껴지는 분위기와 사소한 부분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있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그들의 과거를 들여다보게 된만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어디부터 생각을 다듬어야 할지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다르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보다 신경쓰이는 건..
"왜 살아있는 거지?"
어떻게?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왜? 그런 원초적인 감정에 기인한 질문을 던진 너는, 너무 생각대로 내뱉었다고 생각한 건지 눈을 감았다. 실언했습니다. 라며, 질문에 대답해줄지는 둘째 치고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도 했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어째서인지 연민보다는 다른... 감정이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불쾌한 감각, 분명 둘 다 네가 아는 모습이건만...
"대화를 좀 더 해보고 싶은데, 일단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좋겠군요. 둘 다."
어머님의 말씀은 잘 듣는 것 같으니,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그건 불가능하다, 같은.
"뻔한 말이나 하실 셈입니까? 최소한 자리는 비켜주셔야지요."
지금은 조금... 침착하자, 분명 이 뿌리, 그리고 이상현상이 저 여자로부터 기인된 것 같긴 하지만 저 둘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조금... 신중해야만 한다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새긴다.
눈앞의 존재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조차 아닌가, 양극적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애초에 어긋난 존재인가? 인간이 인간을 그만두게 되었다면, 인간의 개념을 가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달았으니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무언가인가? 가증스러운 몸짓과 말투에도 이스마엘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속내를 한참이고 눌러내며 뇌 깊은 곳에서 성호를 그었다.
"그게 무슨."
자매가 눈을 떴으나 자신을 바라보던 평소의 눈빛이 아니었다. 이스마엘은 일순 저 자매를 자신이 알던 자매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저것은 인간인가? 아니면 잘 짜인 극의 인형인가? 주먹을 쥐던 손은 장갑을 끼고 있다 한들 깊게 패여 장갑 속에서 살갗이 까져 손톱 자국대로 피를 송골송골 맺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상냥한 물음, 그리고 대답하는 모습이…… 가장 바라지 않던 순간이라서. 웃음을 참는 얼굴을 향해 이스마엘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니오. 마음을 굳힐 수 있어 기쁩니다."
이스마엘의 재머가 지직 대더니 웃는 표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허리춤에 매달렸던 장신구를 손에 쥐었다. 당신이 날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것이 거짓이 아닐 텐데 어째서 여반장처럼 쉬이 뒤집어지는가. 비참하고도 비참하다. 이스마엘은 호소할 수 없다. 호소해도 바뀌지 않음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상향은 결국 이상향. 한쪽 뺨에 제 손 올리며 달뜬 숨 한번 뱉는다.
"정말 어머니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단검으로 목을 찌르던 기개는 어디로 갔지? 어디로 갔냔 말이야.."
점차 목소리가 낮아진다. 언니를 되돌려 받을 수 없다면.
"레레시아 나나리, 라라시아 나나리. 최후 통첩입니다. 지금부터 본인의 의사 표명이 없을 경우,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의 소속이 아닌 탈주자로 판단. 본대에서 탈주한 자에 대한 매뉴얼 대로 척살하겠습니다."
내가 잔뜩 사랑해줘야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기밀을 알고 있고, 이는 본대에 해가 되는 존재..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결국 탈주자는 탈주자니까요."
왜 살아있는 거지? 라는 그 말에 여성은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부분을 생각할 거라곤 예상치 못 한 것처럼. 하얀 얼굴은 곧 웃음지었다.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은 채.
대화할 자리는 내줘야하지 않겠냐는 쥬데카의 말에 여성은 어머어머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매우 작위적으로.
"멋대로 처들어온 건 너희면서, 나한테 자리를 비켜달라니, 뻔뻔하기도 해라. 하지만 난 상냥하니까. 기회는 줄게. 자. 얘들아."
다녀오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매가 무대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내려섰다. 이제 특수부대와 정면으로 마주하고서. 빛 없는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더이상 할 얘기는 없어요. 당신들과." "무슨 얘기를 해야 하죠. 우리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는 당신들이.""
기계음이라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사람이 목소리라기엔 너무나 딱딱 떨어지는 목소리가 서로 입을 맞춰 그렇게 말했다. 자매, 레레시아와 라라시아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다가온다. 레레시아와 라라시아가 옆으로 손을 들자 바닥의 하얀 줄기가 검의 형상을 만들어 각자의 손에 쥐어준다. 그저 지켜보는 쥬데카와 선전포고를 내놓은 이스마엘을 향해 검을 겨누며 두 목소리가 말했다.
""당신들에게 더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에게도 바라지 말아요.""
차게 식은 목소리 역시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 말을 내뱉기 무섭게 레레시아와 라라시아가 달려든다. 날랜 몸짓으로 거리를 좁혀온 레레시아가 이스마엘을 향해 검을 휘둘러 어깨를 베어내려 하고. 가볍게 위로 점프한 라라시아가 검을 아래로 겨누고 쥬데카를 찍어버리려고 한다.
쥬데카의 말이 옳다. 어째서 살아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스마엘은 여인이 이야기 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을 것임을 익히 안다. 무대로 뛰어내려 바닥에 내려서는 모습에 이스마엘은 보검을 전개한다. 무장 따위 없다. 오로지 세븐스 하나만을 강화하기 위해 손에 나이프 한 자루만 쥐여져 있을 뿐이었다.
"……."
그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고, 들어주지 않았지. 결국 끝까지 얘기해주지 못할 테다. 쓰디쓴 웃음이 얼굴에 어린다. 상처 입힌 주제에 잘도 데려가려 들었지, 아무렴. 그렇지만, 검을 겨누는 모습에 마찬가지로 허리와 무릎을 느릿하게 굽히더니, 최후통첩을 뒤로 나이프를 쥐지 않은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다만 악에서..
"욕망이 언제 일방통행이었지?"
내어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이스마엘은 가만히 어깨를 대주고는, 그대로 염력을 통해 레레시아의 몸을 그대로 굳혀버리려 시도했다. 그 이후의 공격은 없었다. 그저 속박을 택했을 뿐이지.
"나는 할 말 되게 많은데. 언니는 아닌가봐? 고작 그정도였다니까 조금 섭섭한데. 아니, 많이 섭섭한데."
어쨌든 두 사람은 내려왔다. 저 여자 곁에 앉은 게 아니라 지금 너와 이셔 앞에 서 있다. 대화를 할 수 있을지는 다음의 문제였으니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야 했다. 최종 목표는 데리고 돌아가는 것, 사살해도 좋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끝을 보는 것은 최후의 최후여야만 한다. 최대한 전력을 온존해야 하고, 균열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그 균열로 말미암아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저는 당신들을 데리고 돌아가야만 합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그 말에는...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지만서도. 저건 진심인가? 이미 생기를 잃고 제 의지라곤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의 기저에 담긴 퇴적의 증거인가? 이는 우려했던 일이었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참이었으나 너무 늦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몰랐습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내보이려고 하지도 않았죠."
왜 그랬을까요, 동료였음에도 언제든 떠나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러나 너는 너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알아채지 못했으니 언제 내보였단 말이냐 하면 당장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미 당신들은 우리가 떠나는 걸 바라잖습니까. 안타깝습니다만..."
검을 들고 네게 뛰어들어 내려찍으려는 라라시아를 보자마자 바로 두어 발자국 뒤로 가볍게 뛰듯 물러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