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모조 보검을 해방하자 아스텔도 보검을 해방해 무장을 갖추었다. 저번과 같은 모습. 그 때 분명 독으로 부식시켜 떨어뜨렸던 부분도 다시 달려있는 걸 보고 보검 무장의 손실이 영구한 손실은 아님을 확인한다. 아니면 세븐스마다 다르던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아스텔의 말에 대꾸했다.
"지금은 없어도- 있으면 언젠가 쓰겠지이. 지금 전력을 다할 구실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무장의 보조를 받으며 빠르게 이동했으나 아스텔은 그보다 더 빠르게 레레시아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찌르기는 자세가 크진 않지만 그래도 반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빗나간 검을 회수하며 돌아서는 사이 뒤에선 아스텔이 에너지 덩어리를 모아 폭발시키고 있었고 한박자 늦게 그걸 본 그녀의 얼굴은 당황하는 듯 했으나-
"너무 정직해도 탈일텐데?"
그 표정이 거짓말처럼 입꼬리가 올라가며 호기를 잡은 표정으로 바뀐다. 동시에 레레시아의 무장 중 일부, 치마자락처럼 보이던 부분이 길게 녹아내렸다가 솟구치며 독액으로 된 막을 형성한다. 독액의 막은 에너지 덩어리가 터지면서 생기는 풍압과 돌풍을 감싸 위로 흘려보내려 한다. 마치 방어에만 치중된 듯한 상황이었으나 막의 가장자리에서 무장의 시너지를 받은 그녀가 불쑥 튀어나온다.
"짜잔."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농담 같은 소릴 내뱉을 여유가 있는건지. 그저 그녀의 성격일 뿐인지. 전투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은 말을 내뱉은 레레시아가 곧 에잇, 하고 왼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아직 검의 간격에 미치지 못 하는 거리였으나 휘두른 검이 순간 일렁거리더니 액체화하며 아스텔을 향해 길게 뻗어진다. 큰 뱀처럼 곡선으로 뻗친 무기는 닿으면 끈적한 독액이 또다시 무장에, 그리고 신체에도 손상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그녀가 노린 부분은 아스텔의 부스터와 날개 무장 쪽이었다.
의외로 일찍이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홀로 익히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나 글은 평범한 성인일지라도 자국어 외의 것을 완벽히 구사하기엔 힘이 든다. 그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까. "점점 하지 않게 된다."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또 하나의 고기를 입에 넣고는 당신의 필담에 대답하기 위해 패드를 뚫어져라 직시한다. 고기 하나 당 문답 하나. 그렇게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은 아스텔의 생선 회가 특별히 맛있었다. 엔은 날 것이 잘 듣기 때문이다."
좋아한다는 것을 묘한 표현을 써서 말하고 있다. 이미 지금 그녀의 그릇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가장 먼저 회를 비웠을 것이다. 그건 당신이 그녀를 찾기 한참 전의 일일테다.
"하지만 엔에게는 맛보다도 엔의 배를 채우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배가 고프면 엔의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쥐었다 펴보였다. 마치 몸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점검하려는 것처럼.
글을 가르치는 것 정도라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법이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공부라는 것은 요령이다. 요령만 알면 언제 시작한다고 해도 배우는 것에는 지장이 가지 않는 법이다. 점점 안하게 되는 것도 요령의 부족이겠지. 그리 생각하며 자신있어하는 표정을 지어준다.
'아스텔의 생선 회라, 다음에 먹어볼까요'(필담)
날 것은 동양에서 온 음식이렜던가. 뭐, 기억도 안 나지만. 그래서 밖에서 돌아다닐 때 회 좋아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 내 이름을 들은 애들은. 나참, 피부에서부터 이미 동양쪽과는 관계없건만.
자신의 세븐스를 섞은 공격을 독액을 이용한 막으로 방어해서 날려버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역시 센스가 좋다고 아스텔은 생각했다. 적이라면 조금 까다로웠을 존재. 하지만 치명적으로 위협적이냐고 하면 글쎄? 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가 전력을 보여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지만 자신 역시 굳이 말하자면 15%의 출력으로 조절하고 있어서 전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보검 전에도 그렇고 보검을 해방한 후에도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독액을 이용해서 방어를 하는 일이 많아.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전투방식을 취한다면 그만큼 조심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었다. 저 독의 성분이 정확히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근접거리를 유지하면 자신이 상당히 불리하다는 것. 지금만 해도 무기를 독액으로 바꿔면서 자신에게 묻히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날개와 부스터를 노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스텔은 단번에 자신의 세븐스로 바람을 일으켜서 상승기류를 이용해 공중에 떠올랐다. 그 상태에서 부스터에 불이 들어왔고 활공한 상태에서 아스텔은 레레시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동의하는 바야. 실전에선 정직함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정정당당한 싸움? 비겁한 싸움? 그런 수식어는 그 어떤 의미도 없어. 싸움에서 남는 것은 이기냐, 지냐. 단지 그 둘 뿐이니까."
그것이 자신이 배운 것. 그리고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 마음속으로 세기며 아스텔은 그 상태에서 빠르게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면서 땅을 향해 녹색 에너지 덩어리를 연쇄적으로 낙하시켰다. 그 에너지덩어지를 중심으로 공기의 움직임이 바뀌고 이내 점점 커지는 회오리를 일으키며 레레시아를 압박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틈은 점점 좁혀지려고 했고, 아스텔은 그 밖에서 가만히 회오리 부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빨려들어가기라도 하면 그 즉시 아스텔이 마치 독수리처럼 검날을 앞으로 세우고 돌진해서 공격을 가했으리라.
"그리고 슬슬 이 대련도 끝을 볼 때가 되었어. ...이 다음 일격으로 마무리를 짓지. 버티거나 막아낸다면 너의 승리. 그러지 못한다면 나의 승리. 심플하지?"
/너무 길어지면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 다음번 아스텔의 공격은 파해만 가능하다면 레레시아가 승리하는 것으로 전개할게요!
당신이 적은 다음 필담을 확인하자, 그녀는 눈을 연신 깜빡거리면서 자신있는 얼굴의 당신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패드 한 번, 당신 한 번 정도의 간격이다.
"아리아가 엔을 도와준다면, 엔은 기쁘게 받아들인다."
기쁘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왠지 꼬리같은게 있다면,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고보면 저번 훈련 때 그녀에게 꼬리같은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항상 있는 건 아니다. 회는 아스텔이 생선을 낚아왔을 때에만 하고있다. 만약 아리아가 먹고 싶다면 서둘러야 한다."
그녀는 회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 전부로, 특별히 회의 호불호에 대해 꺼내지 않는 것을 보아 이름에 따라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는 정도의 상식도 없는 듯하다. 그런 모습으로 보자면 그녀는, 그저 문화를 떠나서 그저 날 것이 좋은 걸지도. 그리고 이어서 당신의 글을 해석한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보이며 말한다.
"잘 모르겠다. 엔의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것 아닌가?"
맛도 삶의 즐거움 중 하나, 라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즐거움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건지. 그러고보면 기묘한 식사 속도를 보이는 그녀다. 당신이 그렇게 늦게 온 것은 아닐텐데도, 그녀의 그 많던 식단은 양이 꽤 줄어 이제는 1인분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었다.
이름난 기계공학자이자 프로그래머인 수잔나 엥엘이 유명 생방송 토크쇼에 출연하던 도중 무장 세븐스 단체의 저격으로 인해 사망했다. 저명한 인물의 죽음은 도시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언론은 세븐스의 문제점을 피력하며 가디언즈의 위상을 돋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고, 방송국 주변에는 추모를 위한 꽃과 양초가 가득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추모와 보도는 2주 뒤 사그라들었다. 세븐스의 문제점을 위해 수잔나가 죽는 장면만 편집해 여러 번 반복 재생하던 언론도, 인터뷰에서 울며 말을 잇지 못하던 시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청소 로봇이 추모를 위해 올려둔 꽃 한 송이를 쓰레기로 판단했는지 빨아들인다. 한 사람이 평생 쌓아올린 삶의 값어치를 매기는 건 2주면 충분했다.
아이는 신소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스크린 TV(편의상 스크린이라 명명한다.)를 켜고 낡은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2주 전 이 시간에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죽는 장면을 그대로 봤기 때문에 정서적인 흥분과 패닉에 휩싸였지만, 지금은 충분한 위로와 정성스러운 보살핌으로 마음 한편에 누군가의 죽음을 잘 정리해두고 살고 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적 사람이 죽었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때, 아버지의 표정이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 같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조그마한 손이 동결 건조 전투식량의 포장을 뜯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줄곧 전투식량은 약간의 물을 부어 먹는 거라고 핀잔을 줬지만 아이는 물을 붓는 걸 싫어했다. 동결 건조된 음식은 신기하고 먹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블록 형태로 굳혀진 아인토프를 한입 베어물었다.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지만 전투식량이 든 상자를 받침대 삼았기 때문인지 소파 위로 떨어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음, 이것보다 굴라쉬가 들어있으면 좋았을 텐데. 바삭바삭한 아인토프를 씹다 보니 건더기도 입안에서 느껴진다. 아무래도 콩인 것 같다. 뱉을까? 콩의 껍질로 추정되는 것을 질겅질겅 씹을 때 넷-스크린이 지직 거린다. 아 이번엔 뭘 할까? 채널의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지 않았다. 이 장소는 전파가 닿지 않는 곳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전파를 납치해서 쓰기 때문이다. 신호를 잡는다면 그 채널을 얌전히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조국의 용감한 병사들이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딱딱하고 거친 호밀빵을 입에 한참 물고 녹여먹자니 단조로운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드디어 TV 화면이 나온다. AI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뉴스 내용은 가디언즈가 요늘, 수잔나 엥엘을 살해한 레지스탕스 단체의 수장을 사살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수잔나 엥엘의 유족은 감사와 함께 수잔나의 유산을 모두 U.P.G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음 소식은 모두 U.P.G의 엄격한 승인 절차를 밟은 내용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그 사실에 연연하지 않았다. 뉴스는 뉴스였고, 스크린은 스크린이다. 아이의 세상은 창문 밖을 보면 구동이 정지된 안드로이드 한 대만 우두커니 서있는 황무지 한가운데다. 아이는 뉴스의 내용이 재미가 없었는지 상자의 내용물을 부스럭거리며 뒤지다 눈을 빛냈다. 쇼카콜라다! 아빠가 이건 어른이 먹는 초콜릿이니 먹지 말라고 했는데, 빼놓는 걸 깜빡했나 보다. 7살이면 성인까지 13년이 남았지만, 성인의 3분의 1이나 산 셈이니 하나 정도는 먹어도 되겠지? 눈치를 보던 아이는 캔을 열기 위해 뚜껑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밖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노크 소리 여섯 번이 났다.
"이크!"
아버지가 왔다! 아이는 황급히 소파 구석에 잘 포개져 있는 담요 사이에 쇼카콜라를 쑥 집어넣어 숨겼다. 지금 당장 저 어른의 초콜릿을 맛보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아버지에게 그 순간을 들키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그리고 초콜릿 보다, 아버지가 더 중요하기도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현관을 넘어 들어왔다. 아이가 팔을 벌리며 후다닥 달려오자, 남성은 지친 기색에도 아이를 번쩍 한 팔로 안아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충-성!" "그래, 그래. 충성. 오늘도 잘 있었나?" "저녁밥도 먼저 먹고- 스크린을 보고 있었습니다!" "정보 전달을 위함인가?" "네! 유용한 정보를 송신 받았습니다!" "그렇군."
군인 놀이에 어울려주던 남성은 주변을 둘러보다 가루가 묻은 아이의 입가와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아이의 조그만 코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아이는 코를 싸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야!" "요 녀석. 동결 건조식품은 물에 불려먹는 거라고 했지." "그렇지만 안 남기고 다 먹었는데!" "나 참. 이번만이야, 알겠지?" "네!"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아이의 볼을 가볍게 꼬집듯 잡고 쭉 늘려준 뒤 아이를 소파 위로 내려놓았다. "얌전히 있어야 한다." 벌써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봐주는 거지만, 아이는 활짝 웃었다. 아버지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지금이 쇼카콜라 한 조각을 먹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남성은 제복에서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말린 뒤 소파에 잘 포개진 담요를 베개 삼아 머리를 뉘고 누웠다. 쇼카콜라를 남몰래 한 조각 먹은 아이가 그의 위로 엎어지듯 같이 눕자 그는 좁은 소파의 공간을 만들듯 모로 몸을 틀었다. 그의 너른 가슴팍에 조그마한 머리가 닿았다. 알싸한 비누 냄새가 났다. 여전히 스크린은 뉴스를 송출하고 있었다. 아이가 포근한지 품에 바짝 붙었다.
"오늘 박사님을 해친 일당을 무찔렀다면서요." "그게 벌써 뉴스에 나왔구나." "응." "이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뭐가요?" "박사님에 대해서랑, 세븐스나 가디언즈에 대해서도."
아이는 고개를 올렸다. 쭉 고개를 올려도 아버지의 턱밖에 보이지 않는다. 화면을 보자니 대화의 주제인 가디언즈가 용감하게 레지스탕스를 무찔렀다는 말만 가득하다. 아버지와 아이는 거짓 없이 솔직하게 대화했기 때문인지, 아이는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박사님은 불쌍해요. 말도 다 못 하고 죽은 거잖아요." "그렇구나." "그리고.. 음.. 가디언즈도 세븐스인데 왜 가디언즈만 멋지다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세븐스는 범죄를 저질러서 그런 거예요?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다. 네 말대로 범죄를 저질러서 그렇다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세븐스에게 진짜 죄가 있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곤 하지." "진짜요?" "그래, 나도 가끔은 그렇게 생각한단다." "그럼 봐줄 때도 있어요?" "아니." "왜요?" "망설이면 더 많은 사람이 다친단다." "어려워요." "이셔, 사람은 원래 그런 거야."
남성은 아이를 품에 가두듯 안았다. 뉴스의 영양가 없는 소리가 작아진다. 아이는 따뜻한 품 속에서 눈만 깜빡였다. "네가 그런 상황을 겪지 않고 자라면 좋겠구나." 라는 말을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다. 아이는 가만히 화면만 쳐다봤다.
"그러니 이셔 일병." "넷슴다?" "쇼카콜라는 맛있었나?" "아!"
아이는 품에서 최대한 어색한 미소를 숨기려 애썼다. 아이는 거짓말엔 영 재능이 없어 모두 드러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성은 담요에 느껴지던 딱딱한 쇼카콜라 케이스를 꺼내 잘각잘각 흔들어 보이더니, 손을 훅 뻗어 아이를 사정없이 간지럽혔다.
"악! 살려주세요!" "안 돼. 이셔, 오늘 잠은 다 잤구나!" "간지러워!"
아이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방을 채웠다. 뉴스 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이내 전파를 잡지 못했는지 지직 거리다 꺼졌다. 단란한 하루였다.
식욕이라면 언제나 앞서고 있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라면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을 이유로 삼킨 물건들의 수만 해도 당신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다. 지식을 삼켜 호기심을 충족시킬 기회가 있으니 놓칠 리가 없다. 허면, 당신이 말하는 평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대장인 로벨리아도 곧잘 평화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는 했다. 그때마다 엔은 진정 평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평화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리 그녀라도 알고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배가 부르고 잘 곳이 있는 지금이, 인간들이 정해둔 '평화'와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델바이스는 세상이 평화롭지 않아 싸운다고 했다. 가디언즈도 평화를 위해서 세븐스를 구속하고 있다고 했다. 평화에는 싸움이 없어야 하지만 평화를 위해서는 싸움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구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무엇을 먹어도 평화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당신을 통해 글을 익힌다면, 그들이 말하는 평화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알게 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팀을 위해서라도 글을 익혀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먼저 남아있는 고기 한 조각을 뱃속에 넣어두기로 했다.
뻗은 독액은 아스텔에게 닿을 뻔 했으나 순간 아스텔이 일으킨 기류에 의해 흩어졌다. 산산히 부서진 독액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아스텔은 공중에 떠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스텔을 그녀는 올려다보며 어느새 검으로 돌아온 무기를 휘적거렸다.
"그렇긴 하지마안. 치사해- 올라가면 안 닿는다구-?"
검을 들어 흔들거리지만 지금 검의 리치로는 어림도 없는 거리였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랬을까? 치사하다고 종알대는거 치고 그녀의 얼굴은 이 상황을 만끽하는게 여실히 드러났다. 때문에 아스텔이 빠르게 날아다니며 에너지 덩어리를 떨어뜨리고, 그것들이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도 우와- 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 벌써 끝이라니이. 아쉬운데에."
점점 좁혀들어오는 회오리들 사이에서 레레시아는 여유로웠다. 아쉽지만 마지막 일격이라니 조금 재밌을지도-? 여유 속에서 그녀는 검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정확히 그녀의 발치였는데, 거긴 조금 전 막으로 썼던 독액들이 그새 모여 있었다. 검은 그 독액 사이로 스르륵 녹아들어갔고 레레시아는 돌풍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독액에 짚었다.
"어찌됐든 마지막까지 서 있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어지럽게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금빛 눈이 가늘어진다. 이제 곧 회오리에 빨려들어가지 않을까 싶은 순간, 바닥의 독액으로부터 일사분란하게 수십개의 사슬이 솟구친다. 그녀를 지키듯 그녀의 둘레를 둥글게 돌며 형성된 사슬들은 그저 방어용은 아닌지 하나의 거대한 사슬로 엮인다. 주변 회오리들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끊임없이 생성되는 독액으로 끝을 날카롭게 모은 검은 사슬의 짐승은 회오리 사이를 뚫고 아스텔에게 돌진한다. 아스텔의 일격을 막거나 버티는게 아닌 정면으로 받아내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