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얼굴을 짚곤 탄식하듯 얘기한다. 애초에 자기는 태연하게 만졌으면서....얼마전엔 쇄골에 자국까지 새기지 않았던가. 아까 옷갈아입을 때 확인하니 아직도 남아있던데. 입장을 바꿔 내가 유하에게 그랬다면 여러모로 범죄였겠지. 이건 남녀차별 아닌가? 시대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바닷가를 가더라도 절대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야겠어."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안에서 다시 유하가 사준 가벼운 복장으로 환복하고 나온 나는, 유하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또 이런 짗궃은 장난에 당해 놀라는 내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적이 드문 곳을 방문하기로 재차 결심하는 것이다.
"매우 신빙성 있는 근거로구나. 다음에 한준혁이 만나면 한번 물어보마. 너도 신지한이 만나면 물어보렴."
사실 마츠시타가 지금 그 정도의 부잣집 아가씨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 때 만나서 파악했을 땐 그러한 인상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렇게 여유롭다면 암살자란 직종을 굳이 골랐을까. 본인의 천성적인 성향이라서 그런걸 즐긴다면 몰라도, 그런 것도 아닌 느낌이었다.
"뭐, 사실은 사람은 대체로 그렇지."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인간은 많지 않다. '보편적인 기준' 에 완벽하게 맞추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거고. 인간이란 적게든 많게든 제멋대로인 것이다.
"........"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그녀가 왠지 얄미워서 오랫만에 꿀밤이라도 먹여주고 싶었다만. 그래도 정황상, 마냥 놀리려고 하는 얘기가 아닌 것은 알기 때문에. 슬쩍 보다가 이내 한숨을 한번 내쉬곤, 대신 활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툭, 툭, 솨아아… 철골만 남은 건물 위로, 눈치 없는 비가 떨어진다. 한때는 누군가의 미래를, 누군가의 가족을 품으려 했을 그 건물에 남은 뼈대를 가만히 바라본다. 움직일 수도 없는 녀석은 아마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봐야만 했겠지. 2031년의 서울.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
쥐고 있는 총의 무게를 익숙하다 느끼기에 적지 않을 시간이 지났다. 서울에 게이트가 열리고 떨어지는 몬스터들을 향해 열 발 쏘면 한 발 맞을까 말까 한 총을 갈겨대면서, 모두들 그렇게 발광한 지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셈이다. 서울은 붕괴되었고, 그런 서울을 노리는 몬스터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저 위에는 최초의 게이트인 일마장군의 일야성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저 아래에는 식물들이 세상을 집어삼켜버렸다더라. 총에 묻은 이물질을 닦지 않아도 됨에도 이 행동을 하는 이유는 하나다. 이젠 이 행동을 하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그 뿐이다.
“ 총기 닦고 계심까? "
빼꼼 하고 얼굴을 내미는 녀석의 코를 손가락을 튕겨 쳐냈다. 녀석은 아프다는 표정으로 코를 비비면서도 씨익 웃었다.
“ 에이. 왜 이리 예민하심까? 종로2가 수습 작전도 잘 끝나지 않았슴까. " " 이상해. “
총을 닦아내면서 중얼거리는 내게 녀석은 봉투에 싸여진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안에는 소금과 깨로 대충 간을 한 주먹밥 두 덩이가 들어있었다. 개중 조금 더 크기가 큰 덩어리를 녀석에게 건네주고는 작은 덩어리를 입에 털어 넣었다. 적당히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입 안에서 퍼졌다.
“ 폐건물을 뒤지다가 신병 녀석이 소금을 찾았담다. 그래서 오늘 짬은 간이라도 베여있슴다. ” “ 야. 코페비가 사람을 보고 달라드는 녀석이던가? " " 코페비 말임까? "
녀석은 왜 밥 먹는 중에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 사람을 보고 달라드는 놈은 아님다. 제 먹을 거 위협받지 않는 이상은 말임다. ” “ 그럼 그 놈들이 주로 처먹는 게 뭐지? " " 염분기 있는.. “ “ 알아서 처리해라. ”
녀석이 중얼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갓 입대당한 신병 놈이 소금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코페비 놈들이 갑작스럽게 아군을 급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 이래서 교육이 다 끝나지 않은 놈들은… ” “ 하긴. 우리 하사님도 처음에는 몬스터에게 권총이나 갈기셨지. ” “ 아니.. 그 놈들이 총도 안 통할 거라고 누가 알았겠슴까.. ”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불멘소리로 충성 하고 말을 내뱉곤 곧 자리를 떠나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멀리서 악 소리와 사람 패는 소리가 들리겠지만 이런 시대에 있어 무모함은 더더욱 단속해야만 하는 존재기 마련이다. 기름때를 다 닦아낸 후 품을 뒤져보지만 있어야 할 게 없다. 겨우 한 개비라지만 그 난장판 중에 잃어버린 건가 싶었다. 총을 대충 등에 걸친 채로 조금 터덜거렸다. 그 할배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몇 개비는 숨겨놨을 테니 말이다. 역시. 우리 부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후방조에선 흐릿한 담배연기가 피어나고 있다. 비전투원들을 호위하는 후방조에서 저런 담배를 피어대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 충성. ” “ 이게 누구야. 우리 머리 수집가 씨 아냐. ”
싸구려 담배를 피워대며 손을 뻗어대는 영감의 어깨에는 선명한 네 개의 꺾인 작대기가 자릴 지키고 있었다.
“ 이쪽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왜. 맘에 든 아가씨라도 있어서? ” “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고. 담배 남는 거 있습니까? " " 거 농담도 안 받아주고… “
그의 품에서 꺼내진 한 개비를 냉큼 받아들어 피우기 시작하고 나서야 예민하게 달아올랐던 생각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입 안에 찼던 연기가 빠져나가고 나자 흐릿했던 머릿속이 예민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왔다. 그래. 이 감각이다. 담배라곤 피지도 않던 남자가 만년골초가 되버린 데는, 이 감각이 팔 할은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골초로 만든 데에 못해도 반은 기여한 늙은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 아이고. 우리 중위님. 담배 참 맛있게도 피시네. ” “ 됐고. 몇 개비 더 있으면 줘 봐요. 안 그래도 없어서 그러는데. ” “ 그럼 내가 아주 좋은 게 있지. ”
그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완전히 새로운 한 갑을 꺼내어 내게 던졌다. 손때가 조금도 타지 않은 담배를 쥔 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특별한 흔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완전한 새삥이었다.
“ 그거 가져가시고 우리 애들 좀 잘 봐주십쇼. 중위님. ” “ 내 영역은 아니고. 걔네가 알아서 잘 살아야지. ” “ 그것도 그렇지만 말야! "
감탄을 뱉어내며 영감은 필터만 남은 담배의 흔적을 바닥에 내던졌다.
“ 그러니까. 이번 구역 이상은 가지 마. 종로1가 쪽은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 “ 이유 있습니까? " " 도망친 애들이 그러더라고. 그쪽에 진짜가 있다고 하더라고. 안 그래도 지금 서울에 국회의사당을 탈환하니 마니로 정신 사나울 시기에 지역 하나에 괜히 힘 안 쓰는 게 낫겠다고도 하고. “ “ 진짜 이유는요? " " 군대니까. 아마 우리가 딴 맘을 먹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왜 항상 세상이 개판이 되고 나라가 문제가 생기면 뒤지는 게 군대잖아. “
의심스런 얼굴을 연기하는 얼굴이 내게 다가온다. 무표정하고, 확장된 동공으로 상대를 담은 얼굴. 조금이라도 의심스런 부분을 찾으려 하는 얼굴이다.
“ 우리는 아직 종로2가를 수습하지 못했어. 여기서 훈련시킬 애들도 훈련을 시켜야 하고, 그 이상한 슈퍼 솔져들은 더 없는지 찾아보면서 수습을 해야 하지. ” “ 빌어먹을 정치 꼰대들은 아직도… " “ 하지만 그 정치 꼰대들 덕에 군대가 유지된 거기도 해. 창고를 푸신 것도 좋든 나쁘든 나랏님이고, 봉급 받아먹던 위치에서 우리가 손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야. ”
욕을 중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건물파편을 발로 차버렸다.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펑 하고 터져 사라진 파편이 가루만 남긴 채 바람에 날아들었다.
“ 봐봐. 그런 힘이 있는데 경계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겠어? 세상이 이런 꼴이 났고, 그나마 서울이 게이트로 개판이더라도 치안이 정상적인 건 하나 뿐이야. 그 잘난 정치 꼰대들이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군대의 희생이 있었으니까. 아마 지방으로 가보면 중위같은 사람들이 대장 먹고 지 세상이다~ 하며 살고 있을걸? ” “ 됐습니다. ” “ 에이. 아쉽네… 한 탕 할거면 나도 끼워달라 하려 했더니. ”
딱히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런 힘이 있으면 잘만 이용하면 이리 되먹은 세상에서 한 몫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접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빌어먹을 가족이 내게는 없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론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정이 들어버렸단 거겠고, 세 번째론 저 능글맞은 영감이 내게 있어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란 것 때문일거다.
“ 됐고. 담배나 한 개비 더 줘 봐요. ” “ 벼룩의 간을 뽑아먹어라. 새거 한 갑 줬잖아! ” “ 나중에 피워야 하니까. 일단 주슈. ”
화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목소리는 웃음기 가득하게 담배 한 개비가 날아들었다. 그걸 쥐여 입에 물었다. 그래. 지금을 지킬 정도면 된다. 지금의 미온한 평화를 지킬 정도면, 그 정도면 되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꿈이란 흔히들 무의식의 파편이라고들 한다. 스스로가 생각하지 못하지만, 내면에는 기록된 정보들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라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난 꿈이 싫었다.
심연과도 같은 깊은 무의식 속에서 비치는 나의 과거는, 대체로 좋지 않은 장면들뿐이었기 때문이다. 황폐해진 세상 속에서 괴물들과 죽기 살기로 싸우며 새겨진 영혼의 기억은, 일어나면 소량의 비명과 다량의 식은땀. 그리고 무의식에 배어있는 임전 태세를 취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에는 충분했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생명이나 신체를 위협할 정도의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질병 이랬던가. 15세 꼬마가 겪기에 어울리는 장애는 아니다. 물론 이런 세상이니만큼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는 그럴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직접 겪은 것조차 아닌 경험으로 생생한 PTSD에 시달리고 있는 나는 몹시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별로 그 사실을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군인이 약한 모습을 보여봤자 아무도 지켜주지 않으니까. 울어도 상황이 호전되는 것은 아니고, 절규한다고 어딘가에서 구원의 손길이 갑작스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키는 처지인 군인의 나약한 모습은 국민에게 절망과 공포를 부풀어 넣고,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퍼져나가 사태를 귀찮게 만들 뿐이다.
물론, 딱히 지금은 군인도 뭣도 아니지만. 나의 사고 방식은,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날은 조금 특이했다.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꾸고도, 벼락 맞은 고양이마냥 펄쩍 뛰며 총을 찾지 않았으니까.
“....”
눈동자가 깜박, 깜박. 천천히 띄였다가 감긴다. 멍한 시선에는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는 천장만이 어두컴컴하게 비치고 있었다.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선 머리맡에 놓아둔 안경을 집어 귀에 걸치고 상체를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비치된 손목시계를 슬쩍 집어 확인하니, 새벽 3시가 조금 더 넘은 시각이었다. 주변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모두 자고 있는 것이다. 평화롭게.
세수를 하러 가는 편이 좋겠군.
속으로 짧게 중얼거린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이동한다. 전등 버튼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으로 더듬거려 대충 누르곤,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오는 걸 느끼며 세면대 앞에 기계적으로 선다. 그대로 아무런 생각 없이 수도꼭지를 밀어 올리면, 따뜻한 물이 당연하다는 듯 기세 좋게 뿜어져 나온다. 왜냐면 그렇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솨아아.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얼굴에 가볍게 끼얹고, 그대로 몇 번 쓸어내리듯 문지른다. 촉촉한 감촉이 얼굴을 적시며 수면에 가라앉아있던 의식을 낚싯줄에 걸어 끌어올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본다.
피곤한 듯 가늘게 떠져 있는 눈매지만, 젊다. 아니, 젊다기보단 어리다.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가. 묶지 않아서 길게 흐트러진 머릿결과 타지 않은 피부. 가느다란 손가락과 앳된 이목구비. 언제나 봐오던 익숙한 나의 얼굴이다.
익숙한 나의 얼굴? 거짓말이다.
사실은 이럴 때면, 익숙하지 않기도 한다. 내 과거의 얼굴이 어땠는지조차 명확하게 모르면서도, 그 기억이 강렬하게 나를 훑을 때면 지금의 나는 낯설게 느껴진다. 침침한 눈을 두 손가락으로 누르며 스스로의 현재 상황을 되새긴다.
윤시윤. 15살. 미리내고 특별반. 이종족 여자애와 좋은 분위기. 최근에 있었던 일은…….
그렇게 몇 번 중얼거리고 나서야, 정처 없이 떠다니는 배에 닻을 내리듯 나는 지금의 나로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이번엔 어쩐지 쉽지 않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서, 생각과 기억은 진득하게 달라붙어 서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욕실에서 나와 방에 걸려있는 상의 주머니를 덤덤하게 뒤적거린다. 그러자 아주 간단하게 새하얀 담배 한 갑을 찾을 수 있었다. 마츠시타에겐 늘 신세를 지고 있다. 어른처럼 무게 잡아놓고선 담배심부름이나 부탁하는 모양새가 멋있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학교 기숙사 내에서 담배를 폈다 걸리면 곤란한 일이 될 것은 명백하여서, 나는 대충 옷을 걸쳐 입고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슬리퍼를 신은 체 건물을 나선다.
여름이 가까워졌지만 꽤나 으슬으슬한 새벽, 아무도 없는 뒷골목을 천천히 걷는다. 이렇게 걸어도 습격당할 일은 없다. 질서와 치안의 유지란 얼마나 달콤하고 소중한 가치인지.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개같은 고생들이 밑바탕이 되는지. 요즘 아이들은 알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올려본 하늘에는 아름다운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빼 들어 입에 물고는 불을 당긴다. 진한 연기가 목으로 넘어가 폐를 채우면서 날카롭게 갈려있던 생각들이 차분히 내려앉는다.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듯 길게 숨을 늘여 뱉으면 연기가 머릿속 불순물과 함께 빠져나간 것처럼 다시금 사고가 명확해진다. 일련의 과정은 마치 호흡과도 같다.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그래서 좋아하는거였군.”
들을 사람 같은 건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입으로 내뱉어 말했다. 손에 들린 담배 개비를 보면서, 이제야 알았다는 듯. ‘나’ 는 그래서 담배를 좋아했구나. 스스로이면서도, 스스로가 아닌 대한민국의 중위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금 한 모금 삼킨다.
“영감, 인가.”
실은 어렴풋이 떠올렸다. 대련 대회의 1회전에서, 저격의 기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을 때. 아니, 그 이전에 유하와 대련할 때에도. 역성혁명을 사용하려 할 때면, 나는 누군가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에게 저격술을 알려준 노인의 기억을. 그가 정확히 어떠한 인물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사실은,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전해준 조언이, 그가 가르쳐줬을 기술이,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 한 번의 죽음으로도 완전히 잊히지 않고, 나의 무의식에 남아있었다.
“높으신 분이셨군요.”
꺾인 작대기 네 개는 원사, 그 이상을 의미하는 단계. 어지간히 대단한 사람이었겠지. 고작 중위가 편하게 대할 계급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담배를 삥뜯으러 갈 정도면, 무척이나 친한 사이였을 것이다. 하, 하고 스스로도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웃음이 담배 연기와 함께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웃음을 멈추고는. 나는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이다.
마치, 편지를 쓰는 것처럼.
“지금 보고 계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영문도 모른체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를 영감이라고 부르던 ‘나’ 는 지금의 ‘나’는 아니다.
“엿같은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더군요.”
그러니까 완전히 동일시해서, 거기에 얽매인 삶을 미련하게 살진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학교도 있고. 이종족 애들도 꽤 차별 없이 잘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운동회라고, 서로 실력을 뽐내는 행사까지 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에서 느껴지는 명백한 감정들이.
“짬밥이 아니라 맛있는 밥과 간식을 제 돈 주고 먹을 수 있고,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당장 죽을 걱정 없이 편하게 잘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를 정말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나에겐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와서.
“여전히 거지 같은 괴물들은 많고, 억울하게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래도, 하.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습니다. 요즘 애들은 아는지 모르겠지만요.”
바위에 육편이 되어 짓눌린 그를 뒤늦게 추모하듯, 미어터져 나오는 감정과 함께.
“이 좋아진 세상을, 보실 수 있었다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툭, 툭, 주르륵.
아무도 없는 뒷골목에서 자그마한 비가 흐른다. 오로지, 이곳에서만 흐르는 비는 눈에서 볼을 타고 흘러내려 지면으로 추락한다.
아지랑이처럼 흩날려 사라지는 담배 연기와 같이, 들을 사람 없는 흐느낌이 그저 조용한 거리에 실려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