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4 중간중간 갈래길이 있었지만 라임은 이 길이 맞다는 듯 확신에 찬 걸음으로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해가 쏙 넘어간 골목의 약간 퀴퀴하고 서늘한 공기에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귀엽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어두컴컴한 봄의 끝자락에서 다시금 밝아지는 거리의 풍경을 앞에 두고 라임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습니다. 잡았던 손을 놓고 뒤로 빙글. 장난기를 머금은 얼굴로 손바닥을 가로로 기울인 채 느리게 앞으로 내밀어 시윤의 시야를 가립니다. 그렇게 이 초 정도 가만히.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자 머리 위에 있던 기다란 토끼 귀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감추고 턱 아래로 차분히 떨어지는 단발머리만 눈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면 자그마한 인간 귀에 반짝이는 하얀 네잎클로버.
복잡한 뒷골목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할법도 하건만, 그녀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내가 목적지를 묻고 싶어지는 생각도 조금 정도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가끔은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결과보다, 함께 걷는 과정이 즐거울 때도 있는 법이니까.
어쨌거나 이러한 시간도, 이 뒷골목의 거리도, 영원할 순 없는 법이다. 길 끝자락에서 다시 밝고 넓어지는 거리를 보며 조금은 아쉽게 여기던 찰나. 라임은 문득 걸음을 멈추곤, 손을 놓았다. 그리곤 어쩐지, 재미난 장난이 떠오른 얼굴로 내 시야를 가리는 것이다.
" ? "
뭘 하려는 걸까 호기심이 들어 얌전히 시야가 가려진체 아주 잠깐 있었더니, 다시 손이 치워진다.
결과는 꽤 놀라웠다. 그녀의 토끼귀가 사라져있던 것 아닌가. 의념의 힘으로 감춘건가? 이종족의 신비에 눈을 잠깐 크게 떴지만, 그래도 눈을 가릴 정도의 장난인가 싶었을 무렵. 그녀는 아무 의도도 없다는 것 마냥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다. 그러나 그 귀에는 방금까지는 없었던, 명백한 의도가 담긴 하얀 네잎클로버가 반짝이며 매달려 있었다.
"........"
나는 마찬가지로 짐짓 모른체 담담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마치 시야의 높낮이 차이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릎을 조금 굽혀 얼굴을 가까이한다.
그리고는 짧은 정적 뒤에, 태연하던 얼굴을 부드럽고 상냥하게 웃어보이면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슥슥, 망설임 없이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잘 어울린다고 말할까 했지만, 그건 지난번에 이미 한번 얘기했으니까. 대신 차줘서 고맙다는 의미를 부드러운 손길로 전달하기로 했다.
눈앞의 사람을 바라본다. 헬멧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그 안의 안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일지 눈빛은 어떨지 굳이 보지 않아도 예상되지만 나는 기꺼이 우스운 광대놀음에 맞추어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려 그 얇은 구속의 끝에 위치한 거대한 손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이 텅 빈 미소를 짓는다.
힘없이 나풀거리는 인형의 머릿속에서 검고 긴 머리에 눈꼬리를 접어 고운 웃음을 지은 여자가 얼마든지 남들 보기에 어긋나지 않게 점잖게 비꼬아 화를 풀 방법은 있다며 간사스럽게 속삭인다. 어차피 '나'도 특별반의 인원으로서 왜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지, 순간의 감정으로 누군가와 사이가 어긋나 평판이 하락했을 때의 무게를 제대로 계산하지도 못하는 장사치와 대화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어떠한 집단에 엮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자신이 그보다 볼 손해가 적었음을 계산하지 않았느냐며 귓가에 대고 차가운 웃음을 머금은 말투로 말한다.
'그렇기에 일단은 물러나 설득하는 방법이 아니라, 대화를 그대 멋대로 끊어버리는 전략을 취해 임시방편으로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구도를 만들지 않았사옵니까.'
'아니, 난 그저 저 무례한 사람한테 화가 났을 뿐이야.'
다소 차갑고 무심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씨근거리며 저 한편에서 주장한다.
난 부당한 대우를 받았어. 기껏 예의바르게 존중해주고 배려해준 대가가 이런것이라니 헌터로서 수지가 맞지 않아. 솔직히 너, 아직도 저 사람이 왜 화내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르잖아? 오히려 화를 내어서 왜 화내었는지 근간이 되는 약점을 어렴풋이 알아챘다는 말이 맞으니까. 나를 화내게 했을뿐더러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쪽으로 멍청하게 행동했어. 그러므로 이건 당연히 나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야. 오히려 저 간교한 여자 때문에 정강이를 걷어차기는 커녕 제대로 항변도 못하게 되었으니까 답답한 건 나라고. 기껏 한 행동이 처음으로 되돌리기라니. 나, 참.
냉한 무표정의 16~17세 정도 되어보이는, 전투에 거슬리지 않게 머리를 올려 하나로 묶은 소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딱딱 끊어지는 말투로 항변을 하고 나는 멍한 눈빛으로 잔뜩 어이없다는 눈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그녀를 쳐다본다.
'왜? 무얼 그렇게 쳐다보는거지? 이제와서 네가 한 멍청한 선택에 회한을 느끼기라도 한거니?'
톡, 손가락이 불쑥 이마로 다가와 눈을 감으려는 순간 앞에 작은 손이 펼쳐지고 짓궂은 얼굴로 잔뜩 쌓인 화를 풀 겸 대체재로서 농락하려 들던 소녀가 제 손짓이 막히자 눈살을 찡그린다.
'전, 단지 그 분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였고 또한 저도 의도치 않은 악의적인 모습으로 보여지지 않기를 바랬어요.'
검은 단발머리, 작은 체구, 흰 빛의 깔끔하고 단정한 치맛자락, 앳되지만 조용한 목소리.
오랫동안 잊고 묻고 싶었던 아이가 고개를 떨구고 조금씩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최대한 모두와 잘 지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실수로 무례를 저지른 것에 당황했고 언짢으시지 않길 바래서 배운대로 사과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전 어떡해야 하나요. 어린 소녀가 손을 움켜지고 가슴팍에 가져다 대며 입술을 꾹 물고 서러워한다. 쉽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울음은 그쳤지만 여전히 눈시울이 붉은 투명한 눈이 시야 가득히 들어온다. 어른의 모습에 가까운 여성처럼 계산한 의도도 아니였으며 거친 세상에 억지로 시건방지게 구는 소녀의 말처럼 단순히 자신을 거칠게 대함에 되돌리듯 화낸 것도 아니었다며 계속 읊는다.
나는 아련한 형상을 바라보고 익숙하고 가증스러운 여인을 지나 친근하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의 소녀까지 차례로 훝는다.
'난, 나도 모르겠어.'
어쩔 줄 몰라하며 요동치는 머리가 아려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친다. 꼭두각시에 얽은 실이 서로 엉켜버리고 팽팽하게 잡여당겨지다가 끊어지고 엉망으로 늘어난다. 영영 차안을 떠나 피안으로 덧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단지 나를 죽음과 배신으로 저버리지 않을 신을 보고싶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리와요."
웃는다. 익숙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굳어지기 시작한 미소를 형상기억합금이 제 자리를 찾아가듯 서서히 그려낸다. 상대가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든지 오로지 제가 정한 기준에 따라 꼿꼿하게 입을 움직여 알맹이 없이 허울 좋은 말만 내뱉는다.
"시간이 늦어 앞으로 있을 대련을 위해 이만 소녀는 가보아야 할 것 같사와요. 토고씨가 전의 대회로 위상을 높여주신만큼 소녀 또한 그에 누가 되지 않게 노력해야하니 말이어요."
좋은 말이지만 사실상 축객령이라는 사실을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에게 염증을 느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행사 후에 서로 웃는 얼굴로 뵙기를 기도하겠사와요."
탁, 조용한 발걸음 뒤에 이어진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 죽은 자의 속삭임 같이 의미 없는 대화는 금방 끝나버렸다.
상대방의 인격을 기반으로 생각해 보자면 본인이 묘사한 것 보다는 더 많은 횟수의 악몽에 시달릴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어쩌면 매번. 데이트를 나가서 한 순간도 조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이유가 하나 더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유로는 당연히 나를 보는데 기뻐서 못 자는거지.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려놓는다. PTSD가 있음은 알고 있었다. 있음으로 인해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문제는 하유하가 생각해놓은 수준이 거기까지라는 점. 상대가 겪어내는 고통의 모습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놀랐지 그럼. 자고 있길래 귀여워서 조금 보려고 했더니 소리지르면서 주변확인까지 하는데 말이야."
방금 전 까지 엎드려 있던 책상에 손을 올려놓았다. 머무른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그 위로 검지를 툭 툭 두드렸다. 불편함이 아직 가시질 않는다.
"음....."
상대를 가만히 응시해본다. 어쩔까. 여기서 무슨 말을 하는게 맞을까. 정답은 없고 오답만 가득한 선택지를 내려다 보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