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돈된 사물함에 열에 맞추어 나란히 줄지어 자리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어두운 녹빛의 칠판까지, 영락없는 고등학교의 풍경 속 검은 생머리를 단정하게 늘어뜨린 여학생 한 명이 공책에 무언가를 필기를 하고 사정을 모르는 일반인의 눈에는 더없이 완벽한 일상적인 공간이 만들어졌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책상에 제대로 앉은 학생이 얼마 없다는 점일까.
"소녀의 대련상대는 창잡이라 하더군요."
열심히 대련이 어떤 방향으로 굴러갈지 예상하다 지우고 다시 온갖 화살표를 그려가며 소녀, 마츠시타 린이 앞에 자리한 헬멧에게 물어본다.
토고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크게 그리고 느긋하게 하며 졸려오는 눈을 애써 감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운동회의 시작. 그리고 퀴즈 대회와 대련 대회. 그것들에 참여하기 위해 사람들은 동분서주했으며, 토고 또한 그동안 자신이 배웠던 것을 필사적으로 읽고 말하며 쓰고 암기했다. 그 결과 제법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남은 대련 대회에 토고는 참여하지 않지만, 눈 앞의 사람은 참여하나보다.
토고는 귀찮아서 그런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 그냥 지친 머리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헬멧 때문에 보이지 않겠지만, 입을 크게 벌리며 다시 한 번 하품을 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려? 창잽이?"
토고는 창잡이는 운이 대대로 나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기운이 없었다.
"그려... 내는 토고.... 어우... 니도 뭐 내 이름 알제? 소개하기 귀찮은디 걍 토고라 불러라."
열심히 고군분투하는 사람 앞에서 대놓고 하품 하는 모양에 욱하는 성격이 올라오지만 초면에 차마 머리에 꿀밤을 날릴 수도 없고,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부러 더 나긋나긋하게 상냥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자의식이 비대하다고 해줘야 할지.' 그가 퀴즈대회에 나가지 않았어도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편입생이자 같은 학급의 일원으로서 그가 불러달라 주장하는 성 뿐만 아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까지 알았을 것이며 실제로 알고 있다. 전에 있던 길드였다면 이미 성깔대로 한 마디 쏘아붙였겠지만 이 곳은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공간이기에 소녀는 인내한다.
토고는 그런 축하는 됐다는 듯이 손을 휙휙 휘둘렀다. 별 뜻 없다고 말하였지만 토고가 신 한국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없었을텐데 그걸 안다는게 상당히 불쾌했다. 뭐 됐나. 토고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였다. 기분은 상당히 나빴지만 말이다. 지금은 주제를 바꿀 생각이니까 거기에 집중할 뿐이다.
"그런 거 있다. 리치도 길고 방어도 가능하고 온갖 기행을 벌이는 창잽이도 운이 나쁠수있다.. 막 그런 거다." "크크... 설마 니 모르나? 모름 됐고. 암튼, 창잽이가 상대라꼬? 창 쓰는 아 싸우는 거 관찰한 적 있지 않나?"
일본인답게 극단적인 표현을 피하면서 사과되신 유감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소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헬멧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이 무례했다는 말을 돌려 전한다. 이미 틀어진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녀의 신을 위해서라도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야 했다. 특히나 그, 본인의 말대로 마도사도 아니면서 퀴즈를 꽤 풀어내고 현 특별반의 외교 위기를 해결한 대곡령의 토고 쇼코가 대상이 된다면 말이다.
"리치도 길고 방어도 가능하고 온갖 기행을 벌이니 그에 신께서 균형이라도 맞출 심산으로 타고난 불운을 점지하셨다는 말씀이신지요."
이번엔 진심을 4할 정도 담아 재밌다는 듯 눈을 휘며 미소를 짓는다. 리치가 길지만 한정되어 있으니 그 주변을 빙빙 돌며 어지러히 공격하다 적이 참지 못하고 큰 공격을 내지르는 순간 은신하여 뒤에서 목을 날릴 생각이었던 그녀는 다음 말에 잠시 멈추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가 배움이 짧은 탓이온지 모르는 말이어요. 일전에 모의전에서 지한양이 전투하는 걸 잠시 구경한 적이 있사와요."
"니 눈치 없다는 말 듣제? 크크크... 와따, 임마야. 내 일부러 말 안 하고 딴 말 하는 거 보믄 모르나? 언급 안 하고 싶어가 주제 바꾸려고 한 말인데 하이에나마냥 끝까지 달려들어서 물어뜯네?"
토고는 이런 그녀가 기분 나빴다. 유려한 단어를 쓰고는 있지만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과? 유감? 고의? 토고는 그런 걸 모른다. 뒷골목에서 자란 아이의 사과를 받아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거기에 토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나 쓸수없는 패는 과감하게 버리는 편이다. 대화에서도 똑같다. 쓸수없는 대화, 필요없는 대화, 무의미한 대화. 그런 것들은 하지 않고 버리는 편이다. 이번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까지 달려들어서 물어뜯는다면... 토고는 자신의 가려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니 얼렁뚱땅 혓바닥 굴리려고 하는데... 말 안 하는 게 나은 게 있단 것도 알때 되지 않았나? 크크... 마, 여까지 하자. 내는 구경만 하믄 되는데 니는 앞으로 고생 꽤나 해야하제? 그럼 금마가 알아서 해줄테니 내는 걍 구경이나 할런다." "니가 어떤 방법으로 전투하는진 내는 모르지만, 적당히 조용히 구경하다보믄 방법 나오지 않겠나? 침묵은 금이다. 라는 말의 금은 황금인거 알제?"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치없다는 말은 자주 들어본적이 없었다. 세상물정 모를 어릴때라면 몰라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것을 좋아해서 사과드린 것이온데 이마저 그리 불쾌하시다면 소녀가 어찌해야할지, 워낙 세상이 험한지라 작은 흠 하나로 꼬투리 잡고 저 사람은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라 이런 식으로 말을 부풀리는 사람들이 워낙에 많아서 굳어진 습관이온데 이 마저 제가 귀하를 그러한 무뢰배 취급하는 것으로 느껴졌다면 더 이상은 말이 없사와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까맣게 칠해진 공책에 다음 페이지를 넘겨 다시 구도를 잡기 시작하며 아마도 상대가 지적할 눈치 없다 칭해질 태도로 하나하나 반박한다.
"소녀는 단순히 대화를 시도한것이지만 이쯤이면 저도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으니 토고씨의 말대로 쓸데없고 니글거릴 기름칠은 그만두도록 하겠사와요." "무엇보다 먼저 말없이 제 책상을 베고 계신건 토고씨어요. 피로해보여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뭐, 지금이면 방금 전에 말한 그대로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겠군요. 소녀는 예의를 지킨다 하였지 제게 시비를 걸어도 참는다고눈 하지 않았으니 말이어요."
그리고 침묵, 조용히 공책을 바라보다 탁탁 지우개 가루가 자신의 쪽으로 떨어지게 정리하고 덮으며 말한다.
"넘어가려고 했사와요. 그래서 적당히 창잡이가 불운하다는 말에 맞추어준 것이고요. 단순히 사과한 것도 물어뜯는 것으로 비추얼질 줄은 정말 몰랐으니 솔직히 당황스러운데 지금 이 대화도 그렇게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이 대화는 없던 것으로 하도록 하겠사오며 잊은 것처럼 굴어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