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은 깜짝 놀라는 유하의 반응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후후- 하고 가벼운 웃음을 흘리면서 유하의 보드라운 뺨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어주고서는, 유하의 맞은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라임의 옆모습을 보면, 체구에 비해 사이즈가 큰 셔츠가 무릎 위까지 흐늘흐늘하게 내려와 다리를 덮고 있는데, 엉덩이 위쪽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 것처럼 약간 볼록하다. 라임은 유하처럼 의상에 구멍을 뚫어 꼬리를 내보이기보단, 동글게 말린 꼬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사이즈가 큰 옷으로 덮어 가려버리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토끼의 꼬리는 예민한 기관이야."
'그러면 안 돼' 하고 어린아이를 부드럽게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였다. 라임은 의자에 옆으로 앉아서, 다리를 꼬고,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어 손등에 턱을 괸 채로, 고개를 약간 비틀어서 쿠키를 먹는 유하를 흐뭇하게 응시했다. 개나리처럼 예쁘고 귀엽다는 감상이었다.
지한의 드롭을 방어하기 위해 몸을 날린 강산. 그러나 너무 늦었는지 아니면 위치가 좋지 않았는지 셔틀콕을 얼굴에 맞고 만다. 악!
"졌다..."
얼굴를 감싸쥐며 중얼거린다. 관중의 환호성이 들린다. 그래도 둘이 각성자라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 강산이 셔틀콕을 맞은 걸 걱정하는 사람은 없어보이지만.
"음료수 그리고 개인기 내기."
강산은 빠르게 털고 일어나며 잊지 않았다는 듯 말한다. 진 사람이 이 공원에서 잠깐 개인기를 보여주기로 하는 것이다. 아마 처음에 청소당번 내기가 나왔었다가, 조금 고민하던 강산이 내기의 내용을 틀어 이렇게 된 것이었겠지. 음료수는 덤이고. 때마침 구경꾼도 있겠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끝내고 가야겠다. 인벤토리에서 가야금과 받침대를 꺼내, 몇십 초 가량 짧은 -그러나 성의없지는 않은- 동요를 연주하니, 구경하던 일가족이 박수를 친다.
"으하하, 가자. 어후, 청소당번 내기가 아니어서 다행인가."
진 것이 살짝 부끄러운 듯 볼을 희미하게 붉히면서 강산은 지한을 이끌고 도망치듯 자판기로 향하려 한다.
기다란 꼬리를 가리는 엄청 긴 치마를 입고 뿔을 다 가릴 정도로 커다란 아프로 머리를 한 유하의 모습을 떠올리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라임은, 귀엽다는 말에 목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제 침대로 풀쩍 뛰어드는 유하를 눈으로 좇다가, 유하가 쿠키를 먹다 흘린 접시 위의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꾹 찍은 다음에, 손가락을 입에 쏙 집어넣고서, 옆에 놓인 은박지로 접시를 덮고 나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체취가 가장 많이 남는 곳이 이불이라서, 유하가 그것을 맡는 게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어른스러운 라임은 눈에 띄게 당혹감을 표출하거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다 먹었어?"
적당히 테이블을 치우고 침대로 걸어가 머리맡에서 유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라임. 눈처럼 하얀 시트, 베개 근처에 눈에 띄는 녹빛 머리카락, 그리고 여기에 왜 있는지 모를 기다란 검은색 머리카락 하나. 유하는 그것을 보고 말았을까?
라임이 쿡쿡거리건 말건, 동생의 체면을 이용하여 남의 침대에 마음대로 올라가서 소리를 내고 뒹굴거렸다. 다 먹었냐는 질문에는 응, 하고 짧게 대답 하고는 조금 더 눈을 감은 체로 있었다. 다른 사람의 침대에는 이토록 강하게 개인의 체취가 묻어나온다. 잠시 어떤 냄새가 섞인건지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본다. 그냥 체취가 어디까지인지도. 살짝 눈을 떠서 침대에서 턱을 괴고 뒹굴 뒹굴 거리니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방금 전 침대에 날아들어와서 생긴 금색 머리카락, 라임 언니가 안 치워서 생긴 초록색 머리카락, 그리고...
"...."
상황 맥락적으로 별로 기쁘지 않은 검고 긴 머리카락.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빤히 시선을 그것에 고정했다가 라임을 바라보고는 웃었다.
라임은 침대를 안 치운다는 소리에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창피함을 느끼고서 침대에서 뒹구는 유하를 골려줄 생각으로 가볍게 발을 떼었는데, 유하가 빤히 바라보았던 것이 똑같이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어지는 말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처참해졌다. 시윤이 둘이서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소문 내지는 않을 거라고 했었지만, 그것이 유하에게까지 적용되는 말은 아니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토라져 있는 앞에서도 유하를 좋아한다고, 소중하게 여긴다고 숨김없이 말할 정도로 솔직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유하에게도 똑같이 말했겠지. 어쩌면 그 이상으로.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곧바로 그의 이름이 나온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야.
"... 걔가 어디까지 얘기했어?"
한순간에 싸늘해진 목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웃음기를 거둔 유하를 반쯤 비어버린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며, 다시없을 수치심과 배신감을 느끼는 라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