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두르는, 핏발 선 칼날 위에 서서, 나를 탓하듯 불타오르는 불꽃의 모습. 내 손을 물어뜯어, 붉은 피를 삼켜 타오르는 재의 불꽃.
- 목숨이 여럿인가보네.
쯧, 하고 혀를 차는 할멈에게 고갤 젓습니다.
못 죽어. 아직은,
한지훈은 묵묵히 선 채로 무소향을 길게 빼어듭니다. 향을 퍼트리던 무소향이 자신의 끈에서 풀려나 검신을 드러내고, 지독한 예기를 퍼트리고 있음에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 한 번 뿐이에요? "
찰박거리는 피가 바닥에 차오릅니다. 끈적한, 심장에서 갓 퍼올린 듯한 피와 혈액 부산물 같은 것들이 마구 흘러내립니다. 흘러내린 피는 세상에 스며들어, 온 세상을 붉게. 더욱 더, 붉게, 물들여갑니다. 세상은 격리됩니다. 이 곳은 게이트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혈해 血海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은 붉은 입술을 가볍게 햝으며 태식과 지훈을 눈에 담습니다. 그 풍경은 짐짓 익숙했습니다. 이젠 수 년도 지나버린, 자신의 오라비이자 계약자인 에릭 하르트만 역시 지금 태식이 들고 있던 책과 똑같은 책을 들고 있었으니까요. 작은 책 한 권이 검은 색에서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함에 따라 메리는 추억을 회상해갑니다.
태식에게서는, 지독히 쓴 향이 났으니까요.
손 쓸 기회조차 없이 놓쳐버린 길. 누구도 내게 진실에 대해 알려주려 하지 않고,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이어진 침묵. 스스로 알아보려 하더라도 부족한 힘과 능력, 무기력함 속에 내던지는 듯한 상황.
무력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였지만 아내의 곁에 설 정도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당연했습니다. 아내는 대단한 가디언이었으니까요. 누가 보더라도 반짝이고, 빛이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긴 장검을 빼어들고 사람들을 보며 웃어주던 사람. 가디언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 마치 첫 눈에 스며들어 기적처럼 사랑했고, 허락받지 못한 기적이라 떠나보내야만 했던 것처럼요. 발 아래로 차오르는 피들은 무엇을 뜻하고 있을까요. 아주 진득한, 끈적거리는 듯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피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누구이기에 이만한 피를 흘리고도, 이만한 피를 품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걸까요. 천천히, 숨이 멎어들듯, 태식은 피의 물결 속에 휩쓸려갑니다.
이대로 잠에 들면, 나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있겠죠.
이 흐름이 이끄는 길을 따라가면, 이 답답함도 흘러 사라질까요?
〃 아니. 〃
손을 파고드는 고통이 밀려듭니다. 새하얀 뱀은 태식의 손바닥에 송곳니를 박아넣곤 붉은 피를 삼킵니다. 이 곳, 어디에 고갤 돌려도 보이는 피가 아니라,
〃 너라면 안 그래. 〃
포기해도 괜찮을겁니다. 가디언 한이리는 태식에게 무리한 행동을 시키지 않았으니까요. 항상 그녀에게 우선순위는 첫 번째는 두 아들이었고, 두 번째는 태식이었고, 세 번째는 자신의 부모님과 조국 신 한국이었습니다. 자신의 순위는 저 멀리에 둔 채 바보같이 웃음 짓던 그녀라면 지금, 태식이 절망에 삼켜져 갈 때에 당연히 손을 뻗어 태식을 구해주었겠죠. 자신을 던져서라도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발에 닿던 피들은 천천히 흩어지고, 땅에 스며들어 작은 파문을 일으킬 뿐. 더이상 태식을 삼키려 하지 않습니다. 품을 지키던 황금색의 책이 웅웅거리며 당신을 찾고 있었을 뿐.
저 멀리에는 총교관이 긴 검을 뽑아들고 태식을 향해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기운에 삼켜 질식할 것처럼 다가오는 기운은 평소라면 기절할 법도 했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품 속을 지키는 히어로 모먼트는 태식의 심장을 대신하듯, 대신하여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독한 염세적인 색채를 띄고 있습니다. 붉은 색으로 가득한 세상처럼 자신의 피로 눈을 가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에 맞서 살아갑니다. 순응하는 이는 그저 흘러갑니다.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분명 존재하지만, 그 색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요. 마치 당신이 물들었던 때처럼요.
염세적인, 지옥을 닮은 이 세계에는 두 개의 인영이 있습니다. 하나의 인영은 너무나도 다채로운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도 스스로의 색으로 물든 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색은 감정이 표현됨에 따라 이 세상에 마구 흩뿌려집니다. 총교관, 한지훈은 지금의 상황이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로 검을 중단세로 길게 내세웁니다. 그는 전투를 사랑했고, 기꺼이 맞서는 삶을 살아온 인물입니다. 흩뿌려지는 피에도 흐려지지 않을 자신의 색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에 비해 태식은 자신을 내려다봅니다. 색에 아슬아슬하게 잡아먹히는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은, 황금색과 백색이었습니다.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에서 작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황금색과,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만 같은 백색. 만약 태식이 황금색을 선택한다면, 금방이라도 이 염세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색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터져나오려 하는 황금색의 빛은 자신을 택하라는 듯 태식의 심장 위에서 둥, 둥, 둥, 박동을 뱉어갑니다.
손을 올려 태식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립니다. 뜨거운 온기가 홍수처럼 터져나오고, 순식간에 황금빛이 붉게 물들었던 태식을 씻어냅니다. 지금 이 몸에 남은 힘을 휘두른다면 저 총교관, 한지훈에게도 충분한 위력을 휘두를 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손 위에는 희미한 백색이 태식의 팔을 휘감고 볼을 비비고 있습니다. 이따금 붉은 색에 부딪혀 깎여나가면서도 어떻게든 태식의 팔에, 끈질기게 남아있습니다.
기묘한 광경이다.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겠지. 심장은 황금색을 가리킨다. 그럴 리 없겠지만, 심장박동이 시끄럽다. 기적의 세대. 내가 그들과 같은 위치였다면 많은 것이 변했겠지. 이건 내가 그들에게 가진 열등감에 대해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의념기가 있다면 통하는 것처럼
"아니"
황금색은 찬란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는"
아직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어. 황금색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도달해도 된다. 적색도 아니다. 불을 떠올리게 하는 적색은, 지금의 나는 잊었으니까 그렇다면 무채색? 아니, 그건 더더욱 아니다. 비록 내 세상에서 빛을 잃었지만, 아직 빛나고 있는 것이 있다. 아내에 대한 내 마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인 순수한 사랑 그 백색이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꺼져버릴지언정 이 한 번에 다 쏟아버리고 완전한 잿빛의 세계로 변해도. 나는 이 백색은 포기 못 한다. 나는 사자왕도, 천자도, 가디언도, 훌륭한 반장도 하물며 좋은 아버지도 아니다. 그들과 같은 황금색은 언젠가 다시 도달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