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그냥 머리나 쓰다듬어주고 말 줄 알았어. 변명이라기엔 우습지만, 너를 끌어안은 건, 어린애가 아저씨에게 애교를 부리는, 그런 거였다고. 너는 날 어린애로 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널 좋아하더라도, 너는 받아주면 안 되는 거였어."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할까. 그에게서 아저씨를 겹쳐 보고 있었다는 것까지 다 말해야만 엉켜버린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만의 착각이고 실수였다. 라임은 제자리에서 돌아앉아 시윤에게 등을 기대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기엔 스스로가 부끄럽고 그에게 미안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새부턴가 착각하고 있었나 봐. 네가 진짜 아저씨라고. 너는 내가 선을 넘어가도 다 받아주고 이해해 줄 줄 알았어. 그냥 귀엽게만 봐줄 줄 알았다고. 먼저 갑자기 입을 맞춘 건 미안하게 생각해. 솔직히 나도 내가 그렇게 해버릴 줄은 정말 몰랐어. 네가 날 마냥 어린애로만 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에도 많이 놀랐고."
한쪽이 받아주지 않아야만 유지될 수 있는 애매한 관계를 망상했다고 털어놓는 건, 너무 이기적인 짓이겠지. 그를 그저 감정을 소모하기 위한 도구로 보고 있었다는 말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라서, 죄책감을 되로 주고 말로 받아서 땅에 다 쏟아버린 기분이었다.
"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라임은 시윤에게 등을 보인 채로 푹 눌러썼던 모자를 뒤로 젖혔다. 기다란 토끼 귀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장갑을 벗고, 손을 내려서 시윤의 손목을 조심히 잡아올려 제 머리 위에 얹어놓았다. 그가 어쩌다 친구에게 절교당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그랬구나. 별로, 네 잘못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어. 지난번 만났을 때, 나는 너를 상처받은 아이로 보고 어른으로써 응석을 받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너는 정확하게 봤던걸꺼야. 내가 바뀌었을 뿐."
상처받은 아이를 달래주고 싶다는 것은, 내 분명한 진심이었다. 일방적으로 응석 부리는 아이와, 그것을 능숙하게 받아주는 어른. 정에 굶주린 아이를 달래 채워주면서도, 일선을 넘지 않는 그러한 관계. 그것을 그녀가 바랬다면, 그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정확하게 본 것이다. 내 무릎 위에 앉아 등을 돌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저격수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그마한 위화감은, 원치 않아도,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건 내 추측이지만.......그렇게 해주었으면 바라는, 소중한 누군가가 있는거지? 방금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이. 방금전 무척 실망했던건, 내가 전혀 그 사람답지 않은 행동을 해버렸으니까."
작은 한숨과 함께, 나는 씁쓸함이 배어나오는 목소리로 애써 웃으며 그렇게 묻는다. 방금전의 흐름은, 단순히 아이가 어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깊은 애정과, 묘하게 성숙한 요염함이, 마치 늘 그러고 싶었다는듯 자연스레 이어지는 대범한 행동속에 담겨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녀에겐 그렇게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본인에게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태연하게 받아줄 것 같은 어른에게 표현하고. 다만, 어디까지나 본인이 아니라 대역이기에. 상대가 아저씨의 투영에서 벗어나 감정을 고백해오자, 실망했던 것이다.
하하. 하고 결론에 도달한 나는 작게 웃는다. 결국 이번에도 나는 상대가 바라는대로 행동하는 광대였고, 형편없는 연기를 한 끝에 막을 내리는 건가. 아니, 엄연히는 그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거기까지 눈치챈 이상, 아저씨 연기에 철저할 수 있다면. 그녀는 내게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줄 지도 모른다. 내 손은 그녀에게 이끌려, 그 부드러운 머리 위에 얹게 되었다. 여기서 어른스럽게 쓰다듬으면서, 그럴듯하게 달래준다면, 분명 할 수 있을터다.
"나는 안될까."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는 똑똑한 대답을 알면서도 바보같은 대답을 하기로 했다. 인간관계의 요령이 좋은척 훈계하지만, 사실 나보다 더 서투른 놈이 드물지도 모른다. 그저 모른체 넘어가거나. 돌려서 말해도 되었을텐데. 더 능숙한 방법 따윈 얼마든지 아는데. 굳이 솔직하게 달려들어, 결국 엊어맞고, 바닥을 뒹굴어 울게 되는 것은. 젊은 날의 치기일까.
"아까도 말했지만, 별로. 그저 사귀어달라던가, 여자친구가 되어달라던가. 그러한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야."
그래도 나는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 말을 내뱉으면, 시원스럽게 차여버릴지도 모른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이후론 어색해져서, 기껏 친해졌다고 믿고, 기껏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는 허무하게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두려워하며 어물쩡하게 넘긴다면, 아마 오랫동안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색하게나마 그녀를 웃으며 내려다본다. 나는 지금, 무슨 표정으로 비춰질까.
"그렇게 멋진 어른이 아니고, 가슴이 두근거릴 때도 있지만....그래도 응석을 받아주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안될까. 좋아한다는건, 결국 그런 일이잖아. 나는....너를 좋아하면 안될까?"
적어도 너를 귀엽게 보고 있는 것은 나도 그래. 하고, 나는 조금 민망해하면서 덧붙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