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그림 그리느라 좀 바빠보였는데 어느새 또 공모전에 입상했나보다. 입상작들을 모아서 전시회를 여는 모양인데, 저번에 갔었던 그 전시회와 비슷한 모양이다. 이번에도 고양이가 그려져있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야키소바를 조금 집어서 입에 넣는다. 저번이랑 비슷한 장소에서 하는건가, 싶어서 입에 있던걸 넘기고서 물었다.
" 그럼 전시회 같이 가요. "
예전에는 이런 사이는 아니었고 오히려 좀 냉랭한 분위기였지. 그래도 외투를 덮어주었던 기억이 나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른다. 그때는 봄이었고 이젠 가을이다. 분명 그때처럼 공기가 조금 찰테니까 외투를 덮어주면 어떤 반응일지 기대가 된다. 최근에는 예전의 요조라와 지금의 요조라의 반응 차이를 보면 행복한 기분이 들어서 예전과 비슷한 행동들을 조금씩 해보고 있다.
팔짱을 끼자고하자 팔을 걸고서 껴안듯이 안는 요조라를 보면서 웃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너무 가까운가 싶었지만 서로가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하니까 이럴때 조금 더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발견한 노점으로 가면서 요조라는 그 옆의 노점에서 파는 단호박 타르트를 봤는지 그것도 먹자고 얘기했다.
" 그럼 ... 당고 달달한 소스로 2개, 짭짤한 소스로 2개 어때요? "
당고 노점 앞에서 소스로 고민하는 요조라를 보고선 먼저 말을 꺼낸다. 요조라가 동의하면 저렇게 주문하고 아니면 그녀가 원하는대로 주문할 것이다. 그리고선 바로 옆의 노점에선 단호박 타르트 하나와 에그 타르트 하나를 같이 주문했다. 계산까지 끝마치면서 이 정도면 저녁에 간식까지 루트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문한 것들이 나오면 이젠 요조라네 노점으로 갈 차례였다.
노점의 간판은, 두근두근 신비로운 팬케이크였다. 신비로운 팬케이크라는 건 마법에 걸린다는 것밖에 안 떠올라서, 아키라가 반죽을 만드는 모습을 빤 쳐다보았다. 반죽에 무언가 섞기라도 하나 보려는 건데, 팬케이크를 만들어본 적이라고는 없는 코로리가 반죽 재료를 알고 있을리도 없었다. 소금이 들어가도 그런가 싶고, 설탕이 들어가고 그런가 싶은 것이다! 동화 속 마녀가 쓸 법한 말린 개구리 가루같은 것이라도 나와야 넣어서는 안 될 것을 넣었다 눈치챌 것이다. 한 마디로 지켜보는게 의미가 없었다! 그치만 소금 먹는다구 마법 안 걸려! 설탕도 그렇구, 나 같은 신님들이 마법 걸어준 것도 아니잖아!
"나 '아아ー 늘 먹던 걸로.' 라고 해보구 싶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라는 부자같은 말도 해보고 싶었는데, 다른 노점들에도 들러야 하니까 그건 재정 상 안 됐다. 코로리는 부자가 아니니까! 다만 '아아ー 늘 먹던 걸로.' 라며 단골 칵테일 바에 수트 차려입고 찾아가서 해야만 할 것 같은 주문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점이 하나 있다면 단골이라기에는 처음 보는 노점에 처음 온 것이라 단골 메뉴가 있을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냐, 이자요이 씨가 아니라 마녀님이니까!"
코로리는 넓은 모자 챙을 통 손가락 끝으로 튕겼다. 손목에 걸어운 호박 모양 간식 바구니도 보여준다. 회장님도 'Trick or Treat' 하면 간식 줄 수도 있다구!
"그러니까 공부 얘기는 금지야. 이건 '고마워!' 대신에 줄게ー"
호박 바구니에서 사탕을 하나씩 뒤적뒤적 꺼낸다. 포장지 색깔 별로 꺼내는 것 같은데, 빨강, 주황, 노랑, 초록, 보라 순으로 사탕 5개가 줄지어진다.
공모전과 전시회 얘기를 하니, 저번과 같은 곳에서 하는지, 그럼 같이 가자던지, 하는 얘기가 돌아온다. 요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장소는 저번보다 조금 더 큰 곳이고,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정해지면 같이 가자고, 일정 나오면 얘기하겠노라 말하며 지난번을 떠올린다. 그 어떤 선약도 예정도 없이 마주쳐, 어쩌다보니 같이 갔던 전시회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분명 그 날이 코세이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날이라 그럴테지. 관계가 달라진 지금, 다시 가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 기대감이 요조라의 마음 한켠에 슬쩍 차오른다.
"으음... 응, 그렇게 해요. 다른 것도, 먹을 거니까."
팔짱, 보다는 거의 요조라가 팔을 안다시피 한 채로 당고 노점에 가자 코세이가 단 맛 두개와 짠 맛 두개 어떠냐고 물어온다. 종류는 여럿있었지만, 역시 이런 건 기본이 제일 맛있는 법이니, 그러자고 하며 주문을 했다. 그리고 이번엔 요조라가 재빨리 동전을 내밀어 계산을 가로챘다! 계산을 빼앗은 순간의 요조라의 표정은 정말 뿌듯한 고양이, 가 아니라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그렇게 주문에서 계산까지 만족스럽게 하고, 잘 포장된 것들을 받아들면 이 거리 끄트머리쯤 있을 호시즈키 노점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역시나 먼저 갈까요, 묻는 코세이에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서인지, 오후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하늘에 붉은빛이 서서히 번져온다. 바뀌는 하늘빛에 맞추듯, 길가에 늘어선 노점들이 제각기 울긋불긋한 조명을 밝힌다. 희미한 노을과 조명이 섞여 비추는 거리에 이형의 모습을 흉내낸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이 어울리는 풍경은 어딘가 오묘한 분위기가 있어, 잠시지만 별세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변을 살짝씩 돌아보며 걷던 요조라는 그 시선을 코세이에게 돌리더니, 잠시 바라보다 다시 앞을 향하며 말했다.
"매년 마츠리마다, 혼자 집보거나, 자거나 했는데... 여름도 그렇고, 지금도,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게, 솔직히 너무 꿈 같아요. 잘 때도, 잘 안 꾸는데, 꿈은..."
그래서 지금이 더욱 꿈은 아닐지, 어쩐지 코세이와 함께 있으면 매번 그런 생각이 든다며 짧게 웃는다. 웃고, 팔짱을 약간 고쳐 잡고서 말을 잇는다.
"저만, 코세이한테, 너무 많은 걸 받는 거 같아요. 과분하달까..."
자신은 해줄 수 있는게 거의 없으니 말이다. 너무 과분하지만, 그렇다고 놓아주기도 싫은 사람이라고, 그런 얘기를 차분히 하며 같이 거리를 걷는다.
애초에 아키라로서는 코로리가 늘 먹던 것이 뭔지 알지 못했다. 아마 그녀가 진심으로 주문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장난스럽게 주문을 한 것이겠거니 추측하며 아키라는 뭘 대접하면 좋을지 머리를 살며시 굴렸다. 물론 팬케이크야 어차피 크게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달콤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름대로 구상을 하며 그는 가만히 머리를 위아래로 천천히 끄덕였다.
이자요이 씨가 아니라 마녀라는 그 말에 아키라는 또 무슨 말인가 싶어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 그러고 보니 할로윈과 겹치던가. 지금.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기분이다. 이 장난에 맞춰도 나쁠 것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라는 그녀가 주는 사탕을 확실하게 챙겼다.
"사탕 고마워요. 작은 마녀님. 그래서 마녀님의 이름은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이자요이 씨가 아니라면 고객님, 손님. 이라는 말 밖엔 할 수가 없으니까요."
참으로 넉살 좋게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키라는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앉으라는 듯, 가만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어 고개를 내려 슬슬 팬케이크를 만들려는 듯, 반죽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가장 많이 팔리는 것으로 드릴테니 앉아계세요. 일단 이것만 묻고 싶은데, 좋아하는 과일 음료수는 뭐가 있어요? 아. 음료수가 필요없으면 팬케이크만 먹어도 되고요. 음료수와 세트로 사면 800엔이에요. 팬케이크만 사면 600엔이고요."
당연하지만 엄연히 노점으로 여는 이상 이건 무료 메뉴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격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어떻게 하겠냐는 듯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답레와 함께 갱신하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오자마자 질문이 보이니..
1.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키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폭발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거군요. 사귀지도 않는데 뽀뽀는 조금!! 이렇게 반박하다가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그냥 자신의 뺨만 콕콕 찌르지 않을까 싶네요.
2.1번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어요. 어쩔 수 없이 꼭 해야한다고 한다면 아마 뺨에 아주 살짝 입을 붙였다가 떼어내고 바로 성큼성큼 갈 길 갈 것 같네요. 뒤에서 불러도 못 들은 척 하면서 말이에요.
아르바이트비가 막 들어온 날이었다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를 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키라가 능청맞게 늘 먹던 것으로 준비하겠다고 했다면 꺄르륵 웃어버렸을테지만, 그럭저럭 장난스런 주문을 받아주었으니 만족했다! 팬케이크 같은 디저트류에 편식하는 것은 딱히 없었으니까 팬케이크에 당근 시럽을 뿌리고 토핑으로 호박과 피망을 올리진 않잖아! 어떤 팬케이크가 나와도 상관없었다. 아키라가 고개 끄덕이는 걸 보고나서, 옆에 있는 믹서기 너머로 보이는 과일들을 본다. 생과일 주스도 있다고 했는데 어떤 과일이 있나 보는 중이었다.
"응ー 근데 조심해, 마녀님의 사탕은 남들보다 이가 더 빨리 썩어?"
코로리가 충치의 신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 잠의 신으로서 갖고 있는 힘도 일절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사탕일 뿐이다. 그거 아키라가 장단을 맞춰주니,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개구지게 웃는 것 뿐이었다.
"마녀님은 이름이 없대, 그냥 마녀님이야!"
잠의 신 대신 잠의 마녀, 신으로서의 이름이 없으니 마녀로서의 이름도 없다. 코로리는 아키라가 가르킨 테이블로 다가가서 얌전히 폭 앉았다. 쓰고 있던 마녀 모자에는 리본으로 묶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리본을 푸르고서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내려둔다. 테이블 위에는 손목에 걸고 있던 호박 바구니가 놓였다.
"나 오렌지! 딸기랑 복숭아도 좋아해ー 레몬은 내가 졌구, 사과랑 포도도 좋아해!"
좋아하는 과일 음료수를 물어보길래, 이번에는 순순히 어느 과일이 좋다고 답하나 싶더니만 결국은 또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코로리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키라에게 선택을 넘기고 말았다. 그치만 스타후르츠 같은 건 없을 거잖아! 스타후르츠를 먹어본 적도 없다.
"마녀님은 인간들의 음식 좋아한대!"
마녀에서 신으로 바꾸어도 뜻이 맞았다. 코로리는 인간계의 음식을 좋아했고, 음료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 정도로 달콤한 것이라면 다른 이들과 나눠서 먹어야겠네요. 제가 아는 동생이라던가, 학생회 사람들이라던가."
나중에 렌을 만나면 코로리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에게 이 사탕을 줬다고 장난스럽게 말해볼까 라고 아주 잠깐 생각하긴 했지만 그는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물론 자신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나중에 고자질한 것처럼 되어버리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사탕은 나중에 단 것이 끌릴 때마다 하나씩 꺼내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었다.
"그럼 그냥 손님이라고 부를게요. 마녀건 뭐건 가게 앞에서는 다 손님이니까요. 그리고 음료수는 오렌지로 할게요."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인만큼 가장 좋아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라는 우선 팬케이크를 굽는데 집중했다. 평범한 팬케이크라면 둥글둥글한 느낌이겠지만 그가 이번에 구운 팬케이크는 둥근 느낌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처음에는 둥글게 굽긴 했지만 틀을 이용해서 이내 반죽을 어느 정도 걷어내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내 접시 위에 담겨있는 것은 용 모양의 팬케이크였다. 적당한 크기로 잘 구워낸 팬케이크 위에 버터를 올리고 그 위에 생크림을 살짝 바른 후, 취향 여부에 따라 추가로 뿌릴 수 있는 허니 시럽을 함께 동봉한 후, 그는 오렌지를 믹서기에 갈았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섞지 않고 얼음을 동동 띄운 생 오렌지 주스를 잔에 따라냈고 카운터 밖으로 나온 후, 코로리의 자리에 가져간 후에 내려놓았다.
"주문한 신비의 팬케이크와 오렌지 주스입니다. 손님."
아마 코로리는 팬케이크에서 아주 잔잔하게 느껴지는 신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이전 성스러운 샘으로 갔을 때 느낀 기운과 비슷했었을 것이다. 그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노점에서 사용하고 있는 물은 모두 그 동굴에서 직접 떠온 샘물이었으니까.
"정말로 신선한 재료만 사용했으니까 맛은 있을 거예요. 일단 맛없다는 분들은 보지 못하기도 했고."
덧붙여서 정말로 굳이 말을 하자면 코세이가 요조라 관심 끌려고 사쿠라마츠리 때였나? 그때 즉석에서 유성우 쇼를 만든 것도 원래는 어떻게 보면 진짜 제대로 아웃이에요. 말 그대로 신의 힘이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고 다른 유명한 과학자들도 다 예측하지 못했던 것을 '코세이'만이 알고서 그걸 요조라에게 알려줬다는 거니까요. 사실 가급적 신의 힘은 정말로 단 둘이 있는 것이 아닐 때, 그것도 커다란 범위로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안된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뭐 예외는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이 안 끌리는 정도의 힘...이라고 해도 저것만으로는 판단이 힘들다는 것이 캡틴의 생각이에요.
이런! 코로리는 아키라가 말한 아는 동생이 렌일 거라고 차마 생각하지 못 했다. 후배라고 말했더라면 설마 렌을 이야기하는 거느냐고 물어보기라도 했을텐데, 동생이라고 하니 정말 조그맣고 작은 어린 인간을 상상해서 그러지 않았다. 아무튼, 나눠 먹겠다고 상냥한 말을 하는 아키라에 왜 저는 못 살게 굴었느냐는 생각을 하며 코로리는 조금 풀이 죽었다. 어쩐지 마녀 모자에 장식으로 달린 모란 꽃도 시든 것 같고, 모자도 푹 꺽여 기운 없어 보인다. 개미가 아니니까 5개는 작아! 그럼에도 나눠먹기에는 사탕 5개가 적어보여 다시 호박 바구니를 열었다. 초콜릿이나 젤리도 주는게 좋을까 고민한다.
"응! 오렌지 좋아~."
오렌지가 제일 맛있다거나 해서 정해진 기호는 아니었다. 세이가 레몬을 좋아하니까, 난 레몬 친구 좋아해! 주황빛 색도 좋았다! 쌍둥이의 눈은 빨갛다가 노랗게 물드는데, 물드는 부분은 엷게 주황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리는 얌전히 앉아서 회장님, 축제 때 메이드였다더니 요리하는 메이드였나 봐! '오이시쿠나레' 해달라구 하면 해주려나! 아키라가 팬케이크 만드는 걸 구경했다. 그런데 구경하면서, 팬케이크가 만들어가질 때마다 코로리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와아, 용이다아…."
버터와 생크림이 올라간 팬케이크라는 점, 은은하게 느껴지는 그 동굴 속 샘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문제였다! 웃고 있는데 어째선지 달갑지 않아보인다. 코로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회장님 진짜루 나만 괴롭히는 거지이! 코로리 눈에는 이사장님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 강력하던 기운의 주인되는 고위신!
기껏 팬케이크를 맛있게 신경써서 구워서 가져왔더니 코로리의 표정이 썩 좋지 못하자 아키라는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웃는 것이 웃는 것이 아니었고 영 내키지 않아하는 것 같았기에 그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이 코로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 와중에 전부 용을 잘라서 먹었다는 말, 그것도 용님이라는 하는 그 말에 아키라는 가만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애초에 이건 용님이 아니라 그냥 용 모양의 팬케이크일 뿐인데요."
뭐지? 용 알레르기라도 있나?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애초에 용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알레르기는 말이 안된다고 아키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아키라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한숨을 약하게 내쉰 후,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확실히 동그란 팬케이크는 아니지만, 이래보여도 이 용 모양은 나름 의미가 있어요. 호타루마츠리때 개방했던 그 성스러운 샘을 제공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 신이라고요. 물론 실제로 이렇게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용의 형태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그것을 기념해서 이 가미즈미에서만 먹을 수 있는, 그것도 그 가미즈미의 샘의 물을 이용해서 반죽을 만든 신비의 팬케이크라고요."
물론 코로리가 보는 관점은 전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아키라로서는 대체 왜 저런 태도를 취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데이트 약속이 잡혔다. 요조라와 함께 가는 전시회는 두번째가 되겠지만 첫번째와 두번째는 많이 다를테니까 더욱 기대를 하게 된다. 요조라가 어떤 그림을 그렸을지도 기대가 되고. 당고와 타르트를 주문하고서 계산을 하려고하니 요조라가 재빠르게 돈을 꺼내서 건네어준다. 노점 주인들도 재밌다는듯이 웃으며 돈을 받았고 요조라의 표정도 의기양양하다. 이런거 보면 진짜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는게 한두번이 아니다.
" 감사합니다. "
주문한 간식들을 받아들고서 호시즈키 노점으로 향한다. 한쪽 팔은 요조라가 차지하고 있어서 다른 한쪽 손에 당고와 타르트를 들고서 걸어가는데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중간에서 끝으로 접어들고 있어서 그런가 낮은 많이 짧아졌고, 하늘은 슬슬 주홍빛이 번져오기 시작하고 주홍빛은 다시 붉은 빛으로 바뀌어간다. 밤이 오기 전의 노을색은 우리 남매의 눈 색과 같기에 지금 내 눈은 마치 하늘을 담고 있는 느낌이지 않을까.
" 어쩌면 리리가 요조라에게 꾸게 해주는 행복한 꿈일지도 모르죠. "
내 동생은 잠의 신이라 행복한 꿈을 꾸게 해줄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웃으면서 요조라의 말에 대답한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잠깐 가던 길을 멈춰선다. 그리고선 요조라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가 내 쪽을 돌아본다면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줄 것이었다. 아니라면 볼에 해줬겠지. 어쨌든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 하지만 꿈이 아니라 행복한 현실이에요, 요조라. "
진심으로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간다.
" 나도 요조라에게 많은걸 받고 있어요. 오히려 내가 해주는게 없는것 같은걸요. 적어도 이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삶을 지금의 순간으로 나는 보답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
여동생과 함께 지낸 삶은 인간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간이다. 여동생이 아니라면 정말 지루하다고 느꼈을 법한, 아니 여동생의 존재를 제외하고 너무나도 지루했던 삶을 한번에 보답 받는 느낌이었다.
코세이와 함께 하는 순간이 꿈 같다 하니, 어쩌면 코로리가 꾸게 해주는 행복한 꿈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온다. 아, 정말 그럴지도. 아닐 걸 알지만 농담 삼아 그런가봐요 라고 말하며 걷는데, 몇걸음 더 가다가 돌연 코세이가 멈춰선다.
"왜 ㄱ..."
자연히 따라서 멈춰선 요조라는 코세이가 부르는 것보다 반박자 먼저 고개를 돌린다. 갑자기 멈췄으니까, 왜 그래요, 하고 물어볼려고 했는데, 입술에 닿는 감촉 때문에 말을 다 못 했다. 말 대신 순간 벙찐 눈이 두어번 깜빡거린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혼이 살짝 빠져나가던 요조라의 귓가에 코세이의 속삭임이 들리자 갑자기 정신이 확 든다. 동시에 창백한 분장 너머로도 보일 만큼 얼굴이 붉어지고, 코세이의 팔을 쥔 손에 힘이 꼬옥 들어간다. 꼭 잡고 약간 풀었다가 다시 힘주어 잡는다. 마치 손이 간질거려 참기 어려운 것처럼, 그러면서 코세이를 그저 바라만 본다. 진심 어린 표정으로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코세이를 응시하다가, 고개 숙여 코세이의 어깨에 이마를 툭 대며 중얼거린다.
"해주는게 없긴요. 그렇게 말해주는 것도, 너무 과분한데..."
자신은 가늠조차 못 할, 아득하게 보내온 시간들을 고작 자신이 옆에 있는 걸로 보답 받는다고 해주면, 요조라에겐 그 이상으로 기쁘게 들릴 말은 없었다. 무수한 시간들보다 요조라와 함께 하는 지금이 더 가치 있다고 해주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코세이가 같이 걷고 싶다 말하는데 요조라가 싫다 할 리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다시 앞을 보며 천천히 걸어갔을 것이다.
가는 길에도 여러가지 노점이 있어서 한번씩은 눈길을 끌었다. 군데군데 특이한 분장을 한 노점 주인들도 이목을 끌었지만, 요조라의 시선을 잡은 건 주로 음식 쪽이어서, 한두군데쯤 걸음이 멈칫하거나 하나쯤 더 샀을 듯 싶다. 제철 밤이 듬뿍 들어간 몽블랑을 할로윈 분위기로 꾸민 거라던가. 이미 당고에 타르트가 있는데도 먹을 걸 고르는 걸 보면, 보기와 다르게 참 잘 먹는구나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기웃거리고 노닥거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거리 끝에 다다르고, 노점들도 드물어지는 그 즈음에 호시즈키 노점이 있었다.
요조라가 노점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노점에서 누군가 성큼 걸어나오며 반긴다. 요조라와 맞춘 듯이 창백한 분장과 뾰족한 송곳니, 검은 손톱 등등으로 뱀파이어 분장을 한 마히루였다. 큰 키에 어울리는 고딕풍 정장 차림의 마히루는 과장스레 말한 것에 비해 깔끔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카페 호시즈키에 어서와요. 오늘을 위한, 오늘만 선보이는 디저트들이 여럿 있으니, 사양 말고 느긋히 있다 가요. 유령 군?"
마히루가 요조라에게 그런 인사를 할 리 없었으니, 당연히 인사의 대상은 코세이였다. 요조라와 닮았지만 좀 더 장난기가 담긴 미소를 지은 마히루가 노점 쪽으로 안내하듯 움직인다. 마히루의 그런 행동을 으휴, 하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던 요조라가 코세이의 팔을 잡아 이끈다.
"얼른 가서 구경하고, 우리 사온 거 먹어요. 자자, 얼른요."
호시즈키 노점의 테이블은 노점을 지나간 뒤에 있었으니, 바로 테이블로 간다 하더라도 지나가며 한번쯤 슥 보게 되는 구조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가게에서 쓰던 낮은 유리 진열장과 그 안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디저트들이다. 해골과 박쥐, 유령 등등 무난하게 아이싱 그림을 그린 쿠키와 초콜릿 데코를 한 도넛들이 있는가 하면, 쉽게 보기 힘든 무언가가 그 옆에 있다. 마치 과학실에서나 볼 법한 원통형 케이스에 들어있는 새빨간 심장, 다양한 자세를 취한 손, 각양각색의 눈알들이다...? 저것이 과연 먹는게 맞는가, 맞는건가 싶을 만큼 리얼하게 생긴 것들이 진열장 안에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오~ 네코미미~ 아마 까만색으로 주려나? 무난한 코디템이면 고맙다고 하고 바로 쓰거나 하겠지만~ 진짜 복실복실한 고양이귀면 입 삐죽 내밀고 투덜댈지도~ 저 고양이 아니라니까... '3') 그러면서 예쁘게 딱 쓴 다음에 어울리냐고 물어보고~ 말끝에 냥 정도는 붙여줄거같기도 해~ ㅋㅋ
가벼운 입맞춤이라고 생각했는데 입술이라서 그런건지 한순간 고장난 요조라가 보였다. 아까는 귀만 빨갛던데 지금은 얼굴 전체가 빨갛게 달아오른게 보였다. 반쯤 이런 반응을 노리는거지만 그 반응이 너무 좋아서 볼때마다 즐겁다. 그리고 동시에 행복하기도 해서 나는 어깨에 이마를 톡하고 대는 요조라를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다른쪽 손이 비어있었다면 쓰다듬었을텐데 손이 비어있지 않은게 아쉽다. 전혀 과분하지 않다고 속삭여주면서 다시 앞을 바라본 요조라와 함께 호시즈키 노점으로 향했다.
노점으로 향하면서 요조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전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하나 정도는 더 사도 괜찮겠다싶어 요조라가 고른 몽블랑도 하나 더 구입한다. 그렇게 호시즈키 노점에 도착하자 할로윈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 배려 감사합니다. "
요조라의 오빠인 마히루였다. 요조라와 비슷하게 뱀파이어 컨셉을 잡은건지 뾰족한 송곳니가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몇번 안나누어봤지만 요조라와 비슷한 생김새에 더 활기차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유령군이라고 부르는건 요조라에게 그렇게 들었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감사를 표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정말 할로윈에 걸맞는 각종 디저트들이 가득했다. 이런거에 잘 놀라는 성격은 아니지만 거의 실물과 비슷하게 생긴건 놀랄만했다.
" 되게 비슷하네요. "
맛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호시즈키당의 과자니까 분명 맛이 있겠지. 하지만 저것들을 먹기보단 일단 사온 것들을 먼저 먹어야했다. 적당한 위치의 테이블에 앉아서 사온 것들을 늘어놓은 나는 먹으라고 권하면서 당고 꼬치 하나를 집어서 한 알을 쏙 빼먹었다.
회장님이 제일 먼저 잡아먹힐 거야! 수프가 펄펄 끓는 검은 솥에 풍덩 빠져도 모른다구! 코로리는 이 용모양 팬케이크를 절대 못 건드릴 것 같았다. 동굴에서도 그 기운에 도도도 도망나오듯 빠져나와버렸었는데, 그곳의 샘에서 물을 가져와 사용했다니! 학생회장은 학교의 이사장과 만날 수 잇는 위치인가 아닌가 고민했다. 코로리는 만약에 자신이 이사장님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자신의 학교에서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학생이 자신을 팬케이크로 만들어 판다면, 열심히 도와줬는데 왜 잡아먹어! 같은 느낌으로 허망하여 신계로 돌아가버릴 것 같았다.
"싫어하는게 아니라ー 양 백 마리랑 늑대 백 마리를 업고 있는 기분이야."
무겁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합쳐서 총 200 마리를 어깨에 이고 있으니 엄청 무거울 테고, 와중에 늑대가 양을 잡아먹을까 봐 불안한 느낌이 지금 팬케이크를 눈 앞에 둔 기분이었다. 코로리는 팬케이크를 보다가 한 입 먹으려고 손을 움직이나 싶었는데, 절대 팬케이크는 건들지도 않고 오렌지 주스만 먹었다. 오렌지만 갈아넣어진 순수한 생과일 주스는 오렌지 본연의 새콤달콤한 맛과 향에 싱그러운 향이 난다. 세트로 사서 800엔, 팬케이크만 샀더라면 600엔. 코로리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속으로 600엔 씨, 안녕. 작별 인사를 했다.
"그래도 용님, 착하시니까 회장님 안 잡아먹을 지도 몰라."
가미즈미에 내려오는 신들도 지원해주고, 이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그렇고 나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조금 무섭지만! 고양이 만난 생쥐가 된 거 같지만! 그래도 오렌지 주스는 잘 먹고 있다!
호시즈키의 노점은 유독 다른 곳보다 규모가 컸는데, 이는 디저트를 내놓은 것 뿐만 아니라 커피 드립기와 미리 준비한 음료의 매대도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카페라고 한게 아닌가보다. 전면에 마히루가 주로 있으면서 주문이 들어오면 대기 중이던 그의 지인들이 움직여 주문받은 것을 준비한다. 지인들 역시 가지각색의 분장을 했고, 컨셉 확실히 잡은 덕분에 커피도 제법 나가는지, 요조라와 코세이가 앉은 자리까지도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내음이 진하게 흐른다. 커피와 별개로 핏빛의 어떤 음료도 팔리고 있었는데, 그것의 향인지 커피향 사이로 상큼한 과일향이 드문드문 섞여들고 있었다.
진열장을 지나가며 코세이의 반응을 보던 요조라는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에 흐음, 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신님이라 그런걸까. 대부분의 손님들은 호들갑을 떨거나 신기해하거나 조금은 꺼림칙해 하는 둥, 여러 반응을 보였는데 말이다. 어쩌면 개인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코세이와 함께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는다. 좀전의 간이 테이블과 달리, 카페 테라스에 있을 법한 제대로 된 철제 테이블과 의자다. 그 위에 사온 것들을 늘어놓자 요조라는 잠깐 일어나 뭔가를 가지고 돌아온다. 일회용 나이프와 포크, 종이냅킨 등을 가져와 쓰기 편하게 놓고 요조라도 먹을 것에 손을 뻗었다.
"코세이도, 맛있게 먹어요."
단호박 타르트를 나이프로 반 잘라 한쪽을 든 요조라가 싱긋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자신도 타르트를 크게 한입 먹는다. 위에 단호박 크림이 봉긋이 올라가 있었으니, 와앙 하고 제법 먹성 좋아 보이게 한입 했겠지. 미처 입에 넣지 못 해 입가에 크림이 묻지만 혀가 날름 핥는다. 부드러운 크림과 바삭한 타르트지, 절묘하게 섞인 단호박의 맛은 요조라의 얼굴에 행복감이 퍼지게 하기 충분했다.
"이거 맛있다... 크림 안에 밤도 들어서, 씹히는 맛도 좋구, 마츠리 한정인게 아쉽네요..."
타르트의 맛을 조잘거리며 먹다보니 크리 작지 않던 반쪽짜리 타르트가 사라지는 건 금방이다. 식사 속도는 보통이지만, 디저트를 먹는 속도는 그보다 조금 더 빠른 느낌일까. 곧장 당고 꼬치를 집어들던 요조라, 갓 내린 커피향이 코끝을 스치자 앗, 하듯 코세이를 바라본다.
"커피, 마실래요? 이것만 먹으면, 좀 달지 않을까 해서."
커피가 별로라면 다른 것도 있는데, 라면서 요조라가 보는 건 커다란 음료 카트리지에 담긴 붉은색 음료수다. 그쪽을 한번 보고, 다시 코세이를 보며 마실래요? 하고 묻듯 고개를 갸웃 한다.
"글쎄요. 진짜 있다고 한다면 신이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이니, 가능하면 보고 싶긴 하네요. 본 이후는...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요."
신이 있냐 없냐. 굳이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아키라는 있다를 선택할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행동을 다 조심조심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설사 정말로 있다고 해도 자신을 본뜬 핫케이크를 만들었다고 해서 자신을 해할 정도로 아오노미즈류카미가 쪼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아무튼 확실한 것은 의미불명의 표현법을 쓸 정도로 자신의 팬케이크를 싫어하는 것 같았기에 아키라는 괜히 풀 죽은 표정으로 코로리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뭔가요. 양 백마리와 늑대 백마리라니. 그냥 먹고 싶지 않으면 먹고 싶지 않다고 하면 되잖아요.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핑계를 대지 않아도..."
아무래도 자신이 만든 팬케이크가 별로인가보다. 그렇게 스스로 판단하고 납득하며 아키라는 괜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용 모양이 문제인건가. 그냥 둥그런 것을 기대했는데 안 나와서 실망이라도 한건가. 그냥 둥글게 구워줄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라는 아무런 말 없이 반죽을 이용해서 이번엔 정말로 평범하게 팬케이크를 둥글게 둥글게 굽기 시작했다.
"그건 저 줘요. 동그랗게 다시 구워줄테니까. 용 모양 알레르기가 있는 이는 처음 봤지만... 뭐, 세상이 그렇게 넓은데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고. ...그리고 애초에 용에게 잡아먹힐 것 같으면 한참 전에 잡아먹혔겠죠. 오늘 처음 파는 것도 아닌데. 무엇보다 용이 이 마을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적어도 자신은 잡아먹힐 일도 없고, 용이 자신 앞에 나타날리도 없다. 그렇게 생각이라도 하듯, 아키라의 목소리는 상당히 확고했다. 만약 그녀가 팬케이크 접시를 가지고 온다면 아키라는 잠시 후, 동그랗게 구워진, 정말로 평범하게 생긴 팬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코로리의 자리에 내려놓았을 것이다.
할로윈 컨셉에 걸맞는 그로테스크함이 느껴지는 과자들과 함께 향긋한 커피향이 주변을 채운다. 말 그대로 카페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커피 뿐만 아니라 붉은빛이 도는 음료수도 같이 팔고 있었는데, 과일향이 나는 것을 보면 음료수가 과일맛이 나는듯 했다.
다른 곳과 다르게 철제 테이블과 의자라서 흔들거림이 심하지는 않았다. 테이블 위에 사온 것들을 늘어놓으니 요조라가 일회용 식기들과 종이 냅킨을 가져와준다. 그렇게 먹기 시작했고 타르트를 반 잘라서 자신의 몫으로 가져간 요조라는 맛있다는 말과 함께 금세 먹어치워버렸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먹는 속도는 절대 느린 편이 아니다.
" 이것도 먹어요. "
내 몫으로 잘라놓은듯한 타르트를 요조라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저렇게 맛있게 먹는데 남은 반쪽을 내가 먹는 것보단 요조라가 먹는게 타르트한테도 더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요조라가 먹는 것을 구경하며 당고 꼬치 하나를 거의 다 먹어갈때쯤 마실 것을 권하는 요조라의 말이 들려왔다. 생각해보니 오면서 마실 것 하나 안사온 것을 이제야 깨달아서 나는 잠깐 고민을 하고선 말했다.
" 기왕이면 오늘만 마실 수 있는게 좋겠네요. 붉은빛 음료수가 좀 궁금했거든요. "
카페 컨셉을 생각해보면 피를 표현한걸까 싶었다. 물론 피처럼 진한 붉은색은 아니었지만. 향긋한 과일향이 코를 타고 들어와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요조라가 마실 것까지 주문하고선 눈이 살짝 아파와서 지그시 감고 눈두덩이를 누른다. 아무래도 일하고 바로 온게 좀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지금 눈 앞에도 있잖아! 라고는 말 안 해서 다행이다. 코로리는 이미 많이 만났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다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말을 바꾸었다.
"ー을 수도 있지. 봤을 수도 있지!"
학교에 있는 신만 몇이고, 지금 여기 있는 자신도 신이다. 그러니 아키라가 신의 존재를 '만약에' 라는 가정으로 상상하고 있으니 말이 툭 튀어나와버릴 뻔 했다. 어떻게 수습하기는 했는데, 이 수습이 완벽하게 됐다기에는 불안해서 아키라가 더 말을 걸지 못하게 오렌지 주스를 먹는다. 말 못해! 도토리 볼에 다 넣은 다람쥐야! 오렌지 주스를 먹으면서 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부 입을 다물어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꽃 향기와 오렌지 향기가 가득해졌다. 천천히 오렌지 주스를 삼키고 있으니까, 회장님 바보야?!
"아냐! 먹기 싫은 게 아니라!"
청포도 씨 타로 너무 잘 맞잖아ー! 망했다더니, 악화된다거나 앙금이 있다거나 자존심이 상하다던가 하는 모든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노골적으로 핑계를 댔다니 억울해서 눈썹이 휘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지만 아키라는 이미 새로 팬케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우물쭈물 아키라에게 다시 팬케이크 접시를 들고 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계속 안절부절 앉아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개를 푹 숙이고서 고민하는데, 정말 방도가 없다. 사실 정말 신은 있고, 나도 신이고, 가미즈미에 내려오는 이야기 속 주인공 되는 용님은 우리가 다니는 가미즈미 고등학교의 이사징님이고, 그 용님은 엄청 높고 대단한 신님이라 그 용님을 잡아먹는 기분이 들어서 못 먹겠다ー라고 이실직고 하는 수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봤을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신을 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거예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아키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자신이 신을 봤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건지. 아키라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어 고개를 절로 갸웃했다. 보통은 저렇게 이야기를 안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며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아키라는 코로리를 정말로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으면서 굳이 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특유의 표현법과 묘사를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슬쩍 팬케이크를 구우면서 코로리를 바라보니 이내 그의 눈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대체 팬케이크가 뭐라고 저러는건지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용 모양을 싫어하거나, 혹은 용 모양을 무서워하거나 자신도 모르지만 아무튼 용 모양 알레르기가 있다고 한들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아주 당연하지만 코로리의 속을 알 리가 없는 아키라는 그저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일단 저로서는 방금 그 말의 의미가 뭔지부터 정확하게 묻고 싶은데요. 마녀님. 바보지만 똑똑하지라니."
왜 냅다 또 시비를 거는건지 알 수 없었기에 아키라는 그저 웃음소리를 작게 냈다. 하지만 당연히 웃는 것이 웃는 것이 아니었다. 뜬금없이 바보지만 이라는 소리를 들어버렸으니 대체 이건 또 무슨 짓거리인가 싶은 것이었다. 허나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면서 아키라는 가만히 두 눈을 깜빡였고 이내 태연하게 두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한들 저는 지금 무슨 사태인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그런데 애초에 사이가 좋아지기 위해서 비밀을 말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전 마녀님의 비밀은 솔직히 별 관심도 없는데. 아니. 애초에 친해지는 것을 운운해서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그 비밀을 입에 담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담지 마요. 뭔가 되게 난감하고 곤란한 사태가 있는 것 같은데. 딱히 제 뒷담을 까는 것이 비밀이다. 뭐 그런 것은 아닐테고..."
아닌가? 그것이 비밀인건가. 잠시 그렇게 생각을 하던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면서 팬케이크를 제대로 접시에 담은 후, 이내 깍지를 끼고 쭈욱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저는 지금 이것도 사이가 마냥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친구 아니에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보다 더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예요? 그렇다면 비밀이고 뭐고는 필요없고 그냥 이대로만 지내줘요. 연락 안 끊고 적당히 보면서 교류하면 그게 친해지는 거고 사이가 좋은거지. 별 거 없잖아요? 원래 친구끼리는 투닥투닥도 하고 말싸움도 하고 티격태격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런 거예요. 전에도 말했지만... 전 마녀님 딱히 싫어하진 않는데."
그렇게나 입에 맞았는지, 손바닥만한 타르트의 반을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버릴 정도였으니, 코세이가 남은 반을 밀어줬을 때의 표정은 볼만 했을 것이다. 눈빛 반짝이며 베시시 웃는 얼굴로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했으니까. 어찌 보면 먹을게 코세이보다 좋은가 싶을 수도 있지만, 제대로 구분은 되어 있다. 먹을 건 먹을 거, 코세이는 코세이, 라고 말이다.
"응, 그럼 저거, 달라고 할게요."
양보받은 타르트를 먹기 전에 음료를 가져올까 하고 물으니, 코세이는 저 붉은 음료가 굼금하다고 대답한다. 그 말에 요조라는 음료 쪽을 힐끔 보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선다. 직접 가져오려는 걸까, 싶다가도 가서 마히루와 몇번 투닥거리더니 금방 돌아온다. 빈 손인 걸 보면 마히루가 가져다 주려는 듯 하다. 요조라가 다녀온 건 금방이었으니, 코세이가 두통이 있는 듯 눈가를 누르는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요조라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코세이의 옆으로 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의식중에 약 갖다줄까요 하려다가, 코세이가 인간이 아니지 하는 생각에 혹시 라고 말하고, 손으로 등을 살살 쓸어주려한다. 혹시나 먹은게 잘못되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체한 거라면 찔리는 구석이 없지 않은 요조라였기에 그렇게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주문한 음료를 든 마히루가 다가오며 보곤 말한다.
"주문한 샹그리아 두 잔 나왔는데, 유령 군은 왜 그러고 있어? 머리 아픈가? 약 필요하면 얘기하고, 아니면 가게 가서 잠깐 쉬게 해주던지."
노점에 사람을 여럿 쓰는데다 쉴 곳이나 여유분을 둘 곳도 필요해서, 오늘은 호시즈키당 영업을 안 하고 그 내부를 간이 휴게실로 쓰고 있었다. 두통이 너무 심하면 거기 가서 쉬게 해주라고, 마히루는 그런 설명을 해준 뒤 음료컵 두개를 놓고 돌아갔다. 보통 카페에서 쓰는 투명한 일회용 컵에 담긴 음료는 투명한 붉은빛에 레몬 한조각 살짝 잠겨있는, 포도 주스인가 싶게 보인다. 마셔보면 약간의 알싸함과 떫음, 그리고 상큼함이 어우러지며 기분이 살짝 들뜨게 될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요조라는 코세이 걱정에 마히루가 오고 가는 것도 건성으로 대하곤 조심스레 말했다.
반쪽으로 나뉘었던 타르트의 다른 반쪽도 밀어주자 눈빛을 반짝이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 요조라. 정말 맛있는걸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괜히 뿌듯해진다. 붉은빛 음료를 주문하자 요조라는 가져온다고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앉아서 잠시 핸드폰을 봤다가 아파오는 눈에 잠시 눈두덩이를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금방 돌아온 요조라가 그걸 보고 말았고,
" 괜찮아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거니까요. "
사실 원래 같았으면 자고 있을 시간이기는 하니까. 주말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서 잠깐 자고 일어나서 별을 보곤 했다. 오늘 좀 무리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긴하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내 옆에 와서 등을 쓸어주는 요조라를 보며 나는 살짝 웃어주었다. 음료수를 가져와서 걱정해주는 마히루에게도 괜찮다면서 웃어준 나는 옆에 쪼그려 앉아서 바라보는 요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 나는 진짜 괜찮으니까 얼른 타르트 먹어요. 식으면 맛없어. "
이럴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조금 자고 오는건데, 하필 일이 있어서 정신이 없던게 지금 이렇게 돌아온다. 괜한 걱정만 시킨것 같아 미안했기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볼로 가져가서 쓸어주며 말했다.
" 3년째라 좀 안익숙해서 그런 것도 있어요. "
신일때는 이런거에 피곤해하지도 않았는데, 인간의 몸이 되니까 이런 불편함이 아직도 적응 되지를 않았다. 한 5년 정도 더 살면 괜찮으려나.
코세이가 괜찮다며 웃어줘도, 요조라의 걱정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아직 코세이의 생활에 대해 전부 알지는 못 하지만, 오늘 오기 전에 아르바이트를 다녀온 건 알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는 많이 피곤해 보이지 않아서 괜찮은가보다 싶었는데, 적잖게 신경 쓰이게 하고 제법 돌아다녔으니 없던 피로도 생길 만 하다.
"정말요...?"
진짜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줘도 머뭇거리자 코세이의 손이 뺨에 닿는다. 쓰다듬에 보태듯, 요조라는 그 손바닥에 뺨을 살살 부빈다. 잠시 그러고서야 일어나 자리에 앉는다. 앉은 뒤에도 걱정의 시선을 보내는 건 그대로였지만, 코세이가 얼른 먹으라던 타르트를 마저 가져와 손에 든다. 달달한 크림을 한입 물자 표정이 조금은 풀어진다. 씹을 것도 거의 없는 부드러운 크림을 오물거리며 코세이를 바라보던 요조라,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입에 든 걸 삼키고서 말한다.
"신일 때랑, 지금이랑, 많이 달라요...? 감기, 같은거... 걸리기도 해요?"
사실 그건 전부터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요조라는 체질 탓에 수면 패턴이 엉망이고, 그래서 건강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코세이와 같은 신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이들도 과연 그런게 있을까 싶었다. 코세이가 피곤해하는 모습을 자주 본 것도 있고 말이다. 당장의 걱정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계속 걱정하는 모습만 보이면 되려 코세이가 신경 쓰일테니, 분위기를 환기할 겸 다른 얘기도 해본다. 일단 앞에 나온 음료수에 대해서라던가.
"이거, 와인으로 만든 샹그리아, 라는 칵테일? 그걸로 만든, 에이드에요. 그냥 달랬더니, 어린게 어딜 넘보냐고, 이거나 마시래요."
샹그리아 치고 상당히 투명한 붉은빛인 음료수는 샹그리아와 탄산수를 1:1로 섞고 수제 레몬청을 더해서 그렇게 연한 색이 된 것이다. 그래도 맛은 왠만한 카페의 에이드에 비교가 어려울 만큼 맛있을 것이다. 머리 아픈게 좀 가시면 마시라며 코세이 앞으로 음료컵을 살짝 밀어주고, 요조라는 다시 타르트를 먹었다. 그새 크림이 차가워졌지만 그래도 정말 맛있는 타르트였다.
정말로 몸이 아프거나 한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 상태가 오래 가면 분명 어딘가 탈이 나겠지만 그러지 않게 몸상태를 조절하면 그만이니까, 괜한 걱정을 시킨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볼을 만져주자 잠시 뺨을 부빈 요조라는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고 남아있던 나머지 반쪽의 타르트도 먹기 시작했다.
" 아무래도 인간의 모습이다보니 ... 피곤하다거나 그런건 다 느끼는 편이죠. 근데 감기는 한번도 안걸려봤네요. "
생각해보니 겉모습만 인간이고 사실 신이라서 감기를 안걸리는걸까, 아니면 그냥 운좋게 감기를 피해간걸까. 피로감 같은 것들은 모두 느끼고 있으니 아무래도 후자겠지. 그리고 앞으로 몇십년은 이렇게 살아야하는데 감기는 수도 없이 걸릴 것 같다. 안걸리면 더 좋지만. 근데 안걸리면 수상하게 보지 않을까?
" 아직 미성년자라서 알코올은 안주시나보네요. "
일단은 인간계의 법도로는 난 술을 못마시는 나이니까. 원래의 음료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긴 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일까 이 음료수만 맛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까보단 좀 나아져서 빨대로 에이드를 조금 마셔보았더니, 진짜 웬만한 카페 음료들보다 훨씬 맛있었다. 우리 카페에서 파는 것들보다도 맛있어서 한번 더 마신 뒤에 말했다.
"그렇구나... 으음, 병은 안 걸릴수록, 좋죠. 아프고 나면, 괜히 더 피곤해지고, 그러니까..."
인간의 모습, 이라는 건 단지 겉만 그런 걸까, 육신 자체가 그런 걸까, 한번 시작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곧 엉뚱한 생각으로 이어질 듯 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적당히 자르고, 타르트를 다 먹은 뒤 손을 살짝 턴다. 맛있었지만 입안이 조금 텁텁해졌으니, 요조라도 에이드로 입가심을 한다. 한모금 쭈욱 마신 다음, 짭짤한 소스가 묻은 당고를 집어들며 말한다.
"사실 밖이라서, 괜히 저러는 거에요. 집에서는, 가끔 주거든요. 츄하이 정도지만."
이것도 집이었으면 그냥 줬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요조라가 마히루 쪽을 힐끔 보자, 때마침 이쪽에 시선을 주던 마히루와 눈이 마주쳤는지 메롱, 하고 혀를 내민다. 요조라의 태도에 마히루는 참나, 하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요조라도 다시 당고를 한알 빼먹고 빨대로 에이드를 휘휘 저었다.
"오늘, 보다는 이번 마츠리 기간 동안, 이에요. 그날 그날, 파는 양은 정해져 있을거고... 마츠리 노점은 이래도, 화과자 가게니까요. 호시즈키당은."
어디까지나 이벤트성에 가까운 노점이었으니, 쿠키 몇몇을 제외하곤 마츠리가 끝나면 다시 나오지 않을 것들이다. 대신 겨울에 열릴 마츠리에선 와인을 데운 음료인 뱅쇼를 할 거라던 마히루의 계획을 슬쩍 흘려준다. 어느새 다 먹은 당고 꼬치를 내려놓고, 이번엔 몽블랑을 반으로 나눈다. 데코한 부분이 조금 뭉개졌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요조라는 반 가져가고 남은 반을 코세이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건, 코세이도 같이, 먹어요. 같이, 맛있는 걸 먹은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테니까요."
꼭 먹은 것만 기억에 남진 않겠지만, 그래도 같이 먹으며 맛있다고 한 순간은 조금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남은 간식을 먹고, 음료수를 마신다. 천천히 먹긴 했으나 하나둘 줄어든 간식의 자리는 빈 자리만 남았겠지.
피노키오는 거짓말쟁이니까! 모르고서 하는 말이니까 신을 보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느낌이 달랐지만, 코로리는 눈을 도르륵 굴리면서 얼렁뚱땅 답을 했다. 그저 이 주제로 더 물어보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표정 관리도 어려워 시선을 피해버리고, 입술도 꾹 다물었다. 태연하게 웃는 척 하는 것도 어색할 것만 같아서 눈과 입이 다른 모양을 그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아키라가 역시 바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에 파고 들었다면 당황했을텐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아키라의 표정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새로 구워지는 팬케이크는 기운이 폴폴 느껴지더라도 눈 딱 감고 먹어주는 선심을 베풀기로 했다.
"바보지만 똑똑하다는 건 바보지만 똑똑하다! 라는 거지, 회장님 진짜 바보야?"
코로리는 헛똑똑이다, 헛똑똑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뜻으로 물어본게 아닐텐데!
"응, 비밀을 밝…히지 않았어두 회장님은 잔소리쟁이였을 거 같아. 계모 회장님."
내가 신이란 거 알았으면, 그것도 잠의 신이란 거 알았으면 잔소리 안 했을 거잖아! 밤에 일하는 걸 안다면, 낮에 학교에서 잔다거나 체육 시간을 땡땡이 치고 숨어 잔다고 해도 잔소리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순간 아키라라면 그래도 잔소리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가서 말을 고친 것이다. 코로리에게 아키라는 늘 일 열심히 하고 저한테 늘 잔소리만 하는게, 신데렐라 계모! 였다.
"…회장님, 왜 계속 뒷담 얘기해? 회장님이 내 뒷담 했지."
뒷담화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데 저번의 서점에서도 그렇고 계속 뒷담화 이야기가 나오는게 마음에 안 들었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도 했지, 사이 좋아지고 싶다고도 말했는데 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코로리는 아키라가 제 뒷담화를 했기 때문에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오해하기로 했다. 렌 씨가 좋아하는 사람인 거 같으니까, 그래서 더 잘 지내려구 하는데! 입술 삐죽거린다. 나눠먹는다는 말에 더 주려고 했던 사탕 주지 말아버릴까 치사하게 굴기로 한다. 그런데!
"우리 친구야?"
표정이 바로 풀렸다! 친구라고 생각 안 했다는게 티 팍팍 나는 놀란 표정이다. 동그랗게 뜬 눈이 깜빡거리는게 빠르다.
"피노키오? 아. 뭐, 거짓말쟁이는 그리 좋아하지 않긴 하지만... 그거와 이게 무슨 관계가 있는거죠?"
틀림없이 의미없이 하는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스스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 그 상관관계를 찾아내려고 머리를 굴렸다. 허나 적어도 그로서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신을 보는 것과 피노키오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이 사실은 거짓말쟁이라기라도 한단 말인가. 역시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는 괜히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현법은 적어도 아키라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어려웠다. 자신에게만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는 안 그러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만 해석을 못하는 것인지.
"...이전부터 느끼는 건데 왜 자꾸 그렇게 시비를 거는 거예요? 이자요이 씨는."
진짜 바보냐고 묻는 것도 그렇고 계모 회장님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역시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지금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아키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세는 또 뭔가 상당히 신선한 느낌 그 자체였다. 도련님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 일단은 시미즈 가문의 장남이건만, 저렇게 시비를 툭툭 걸어대는 것 또한 상당히 그에게 있어선 신선한 느낌이라면 신선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이가 처음은 아니긴 했지만. 괜히 다른 이들을 떠올리다가 그는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두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튼 팬케이크를 온전히 접시에 담은 후, 그는 그녀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번엔 둥그렇게 만든 정말 일반적인 팬케이크였다. 탄 흔적도 없고 덜 익은 부위도 없는만큼 상당히 잘 만들어진 팬케이크임에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아키라로서는 용 모양이 아니라 평범한 모양이니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용 모양은 싫다고 하는데. 뭔가 자신이 몹쓸 짓을 한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며 그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당신이 저를 싫어하고 멀리하고 싶고, 친하게 지낼 마음이 없다면 친구가 아니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같은 반 친구라고 생각하는데요. 정말로 사이가 나쁘면 애초에 이런 말싸움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상대에 대한 관심은 있기에 그런 것도 가능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며 아키라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뒤이어 손님이 오는 지 체크하다 딱히 오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하며 그는 근처에 있던 사과를 믹서기에 집어넣고 돌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사과주스를 먹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왜 갑자기 그런 물음을 던진 거예요? 그러니까 비밀을 안 밝히고 사이가 좋아지는 방법 물은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3년동안 감기 한번 안걸리는게 말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건강한 사람은 안걸린다니까 내가 신이라서 안걸리는건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 아직까지 안걸린건지는 모르겠다. 요조라가 타르트를 다 먹고 당고를 하나 집어드는걸 보고 나는 에이드로 다시 한번 입가심을 한다. 역시 호시즈키당에서 만드는건 맛없는게 없다. 요조라가 마히루에게 메롱하는걸 보고 귀여워서 손을 뻗어서 머리를 몇번 더 쓰다듬어준다.
" 아쉽네요. 시즌 한정 메뉴라니. "
시즌도 이렇게 짧은 시즌이라니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가득 묻어난다. 그래도 이런건 한정된 기간에만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생기는 것이니까. 붉은 음료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요조라가 밀어준 몽블랑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반으로 갈려서 데코레이션은 좀 망가졌지만 충분히 맛있어보여서 나는 작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 고마워요. "
그렇게 포크를 들고 몽블랑을 작게 잘라서 한 입 넣는다. 그렇게 간식들은 하나 둘씩 없어지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들만 남아있었다. 이 정도면 저녁으론 정말 잘 먹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요조라를 보고 말했다.
" 이 정도면 저녁으로 먹었다고해도 손색이 없겠네요. "
잔뜩 배가 부르니까 말 다했다. 이젠 뭐하러 가는게 좋을까, 하고 고민을 하니 사실 마츠리때는 항상 거기서 거기라 이것저것 둘러보면서 구경하는거 말고는 할 것이 없긴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으니까, 소화도 시킬겸 산책이나 하러갈까 싶었다.
메롱은 마히루에게 했는데, 코세이로부터 쓰다듬을 받자 혀를 빼문 채 요조라가 바라본다. 쓰다듬 받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가, 손이 떨어지면 소리없이 눈을 접어 웃는다. 웃는게 어색하던 것이 얼마전 같건만, 이제는 눈웃음도 제법 치며 꽤 잔망스러워졌다. 요조라가 그렇게 바뀔 수 있었던 것에 코세이의 영향이 매우 컸음은 두번 말할 필요 없겠지.
에이드가 기간 한정이라 아쉬워하는 코세이를 보며, 마히루에게 이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해볼까 생각한다. 내년 여름이나 가을 마츠리에서 또 내놓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직접 술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직접 만들어주고 싶어졌으니까, 몰래 알아둬야지 하고 다짐하며 달달한 몽블랑을 즐긴다. 같이 먹는 코세이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러게요. 저녁에, 후식까지, 다 먹어버렸네요. 이러다 살찌겠어요..."
양도 양이지만 거의 달달한 음식들 위주로 먹었으니 포만감에 한동안 뭔가 먹고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듯 하다. 먹을 땐 좋았지만 다 먹고나니 칼로리도 살짝 걱정된다. 조금은 소화를 시키는게 좋을까, 생각하며 빈 접시나 식기들을 대강 정리해두다가, 코세이의 물음에 요조라가 눈을 깜빡인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저 정리하던 것을 마무리한다. 남은 종이냅킨으로 손을 닦고, 테이블에 살짝 기대어 다시 바라보더니, 생긋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행복할 거에요. 언제나, 코세이랑 함께일 테니까요."
떨어져 있어도 이어질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시대다. 그러니 따로 살아도, 늘 함께이지 않아도, 서로를 생각하고 이어져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매일이 행복할 수 있다. 마냥 행복해보이는 얼굴로 솔직한 대답을 한 요조라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코세이의 옆으로 간다. 팔로 코세이의 어깨를 슥 두르는 행동이, 또 안으려고 그러는 걸까 생각이 들 쯤, 고개를 같이 숙여 목덜미에 뺨을 부비는 듯 한다. 예상대로 부드러운 감촉이 몇번 스쳤겠지만, 그 감촉 사이로 두개의 뾰족한 것이 살갗을 콕 찌르는게 예고 없이 느껴지고, 약하게 물었을 때 나는 간질한 느낌도 더해졌을 것이다. 그래놓고 능청스레 천천히 고개를 든 요조라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바라보며 말한다.
"이제, 먹는거 말고, 남은 곳 구경하러 가요."
같이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사서 같이 쓰자며, 조금은 솔깃할만한 얘기를 하면서 코세이의 팔을 살짝 당긴다. 남은 거리에 무엇이 있을진 아직 모르지만, 코세이와 함께라면 분명 뭐든 재밌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마주보는 미소가 조금 더 즐거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가을밤이 상당히 깊어지고 있었고 추위가 점점 찾아오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슬슬 학기말이 다가오고 있었고 학생회장의 임기도 점점 끝나가는 어느 날이었다. 많이 친해진 학생들, 그리고 아직도 친해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가미즈미 고등학교에서 매년 준비하고 있는 파자마 파티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하루, 집에 가지 않고 미리 파자마를 챙겨와서 밤에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거나, 산책을 하거나, 같이 먹을 것을 먹거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것은 없으나 소소한 행사였다. 물론 굳이 꼭 필수적으로 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루 밤을 보내면서 걸즈 토크, 보이즈 토크 등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으며 본격적으로 학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말고사를 치기 전, 학교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즐길 수 있는 행사이기도 했다.
이 파자마 파티가 끝나면 사실상 학생회장은 은퇴를 앞두게 되고, 다음 학생회장이 될 이와 1:1로 인수인계를 하게 되었다. 그런만큼 이 파자마파티는 어떻게 보면 1년을 마무리하는 가미즈미 고등학교의 전통 행사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가을 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파자마를 입은 학생들의 이야기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가미즈미 고등학교에서 제공하는... 못한 말을 나눠요! 시간. 아직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 이가 있거나, 혹은 이 친구에게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혹은 아직 기회가 되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이런 것이 있다면 이 이벤트를 이용해주세요! 그게 아니라 보이즈 토크, 걸즈 토크를 해도 되겠지만요!!
6월 18일부터 그냥 넉넉하게 인심써서 6월 26일까지 드립니다! 사실상 가을 시즌의 마지막 이벤트에요!
점점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 입김을 부니 하얗게 김이 서렸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바닷가의 추위는 생각보다 빨리 오는 편이었고, 하루하루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겨울이 코앞이라는 이야기였고 이건 곧 다시 말하면 아키라의 임기도 머지 않아 끝이 난다는 것에 가까웠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장소, 정확히는 시미즈 가문이 관리하고 있는 낡은 신사 앞에 서서 아키라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어두컴컴한 밤하늘 위에는 별이 왜 그리도 반짝이는지. 오늘따라 굉장히 아름답게 그 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 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키라는 조용히 입김을 내뱉었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도 좋았으나, 때로는 이렇게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고작 열여덟밖에 되지 않는 학생이 무슨 생각이 그리 많냐고 할지도 모르나 아키라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학생회장으로서의 임기도 슬슬 끝나가고, 정말 본격적으로 성인이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조용히 준비중인 대학입시 등. 참으로 생각할 것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 후회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물론 후회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너무 일에 집중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온천과 스파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갔다고 가정했을 때, 자신은 선택을 다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미즈 가문이 아니겠는가. 누군가는 상당히 무겁다고 느낄지도 모르고, 실제로 무겁다는 평을 받긴 했으나 그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그에게 있어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것이 많았다.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 밤하늘이 어둡고 맑으면서도 참으로 깨끗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고뇌나 생각 등이 모두 쓸데없는 무언가가 되는 것 같아. 그야말로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조만간에 생각을 온전히 정리할 수 있을테고, 그러면 자신도 미련없이 졸업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학생회장으로서 좋은 사람이었는진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특별히 뭔가를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학생회장이 다 그렇고 그런 자리 아니겠는가. 커다란 개혁가적인 무언가를 하는 것은 만화나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일이었다.
"일단 당분간은 인수인계에 집중하는 것으로 하고..."
그 외의 것들은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인과 연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 외의 많은 것들도 스스로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졸업식때까진 정리가 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도 다음 학생회장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입김을 조용히 내뱉었다.
"일단 지금은 조용히 구경이나 할까."
밤하늘도, 다른 것들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학생회장은 조용히 그림자 뒤로 숨었다. 자신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야 할 순간은 아니었기에. 그저 조용히 입시를 준비하고 졸업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나아가기로 한 그 길을 향해서. 그 과정 속의 끝맺음을 정리하며, 또 다른 새로운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서.
더 자세히는 절대 말할 수 없다! 회장님은 분명 신을 봤으니까, 지금도 보고 있으니까 신 안 봤다구 하면 거짓말이라구 해도 되잖아! 회장님 코 달님에 닿는다ー. 발음이 조금 부정확했다. 바로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혹시나, 혹시나 싶어서 발음마저 뭉개고 우물우물거리듯 말한 것이다. 코로리는 아키라를 보았다가, 오렌지 주스를 보았다가 시선을 가만 두지 못 하고 있었다. 계속 힐끔힐끔거린다.
"시비 아냐! 그리구 내가 왜 그러는지는 거울이 되면 알 수 있어!"
좌우가 반대이기는 해도, 거울을 보면 자신을 똑바로 비추어 보여준다. 아키라가 코로리가 된다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신이란 걸 밝힐 수 없으니, 잠의 신인 코로리와 학생회장 아키라의 입장 차이를 말할 수도 없는 것이라 이런 답밖에 하지 못한다. 코로리는 그래도 명답을 내놓은 것 같아 뿌듯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회장님이 거울 되면, 이 마녀 옷 회장님 줘야겠다! 그러다 아키라가 새로운 팬케이크를 완성해서 내오면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쓰인 물 때문에 여전히 기운이 폴폴 느껴지기야 했지만, 눈 딱 감고 먹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기운을 가리고 싶어서 허니 시럽을 다 부어버렸다. 달콤한 향기가 난다고 신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아."
포크로 팬케이크를 한 입 크기로 쇽 잘라서 입에 넣었다. 시럽도 달고, 생크림도 달고, 팬케이크는 폭신폭신했다. 설탕으로 만든 구름이려나, 솜사탕이려나 오물오물 먹으면서 아키라를 빤히 바라본다. 먹고 있으니까 아까 그 용 팬케이크를 먹지 않았다고 삐지면 안 된다는 것 같다. 먹고 있다는 시위를 하느라, 팬케이크 콕 찔렀던 포크를 계속 입에 물고 있으니 팬케이크를 먹는건지 포크를 먹는건지 모르겠다.
"회장님이 안 싫어한다구 했어도 미워는 하는 줄 알았는데."
나 회장님이랑 친구인가 봐! 친구한테는 비밀 말해도 되는 거 아니야? 인간들은 그러던데! 꿈 밖에서도 안에서도.! 팬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잘라서 입에 넣는다. 맛없다는 말도 맛있다는 말도 없지만 잘 먹고 있는 걸 보면 맛있나보다. 팬케이크나 오렌지 주스의 맛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 건 친구인건가, 친구려나, 계속 친구였던가 하는 생각에 좀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청포도 씨 타로가, 나 회장님이랑 망할거래. 악화되고 앙금이 있고 자존심 상할거래.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이 나쁘기는 싫잖아."
"죄송한데 전 거짓말을 한 적은 없거든요? 아니. 살면서 거짓말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신을 봤는데 안 봤다고 한 적은 없거든요."
물론 눈앞의 여학생이 신이긴 하지만 아키라가 그 사실을 알 방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대로 피노키오가 되기 딱 좋을지도 모르나 아키라로서는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그 와중에 거울이 되면 알 수 있다는 그 말은 아키라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참 특이한 표현법을 쓴다고 그는 생각했다. 뭔가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비유법을 사용하는 것이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며 아키라는 그만 소리없이 피식 웃고 말았다.
"거울이 될 일이 없으니까 이자요이 씨가 왜 그러는지는 이해를 못하겠네요. 별 상관없지만."
적어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는 더 신경쓰지 않을 생각인지 그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을 넘겼다. 뒤이어 그는 그녀에게 돌려받은 용 모양의, 원래 팬케이크를 잘라서 자신의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꽤 잘 구워졌다고 생각하며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정말로 전문 팬케이크에 비하면 맛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만든 것 치고는 나름 잘 구워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 자화자찬을 하면서도 아키라는 코로리의 말에 귀를 가만히 기울였다. 물론 팬케이크를 천천히 먹는 것도 그는 나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데 용 모양 하나 때문에 못 먹는다니. 용이 나오는 영화를 보다가, 혹은 동화를 읽다가 무서워서 벌벌 떤 과거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을 하면서 그는 손수건으로 자신의 입가를 천천히 닦았다.
"...아니. 미워하는 것이 싫어하는 것보다 더 마이너스 감정이잖아요. 왜 싫어하지 않는데 미워한다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이자요이 씨는 싫어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것이 가벼운 감정인 거예요?"
물론 사람마다 개인 차는 있겠지만, 보통은 싫어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가벼운 감정이 아닌가 생각을 하며 그는 영 미심쩍한 표정으로 코로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 와중에 타로라는 말이 나오자 그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청포도 씨는 또 누구야? 아니. 아마도 토와겠지. 타로를 본 것은 토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묻는건데 이자요이 씨는 저와 사이가 나쁘기 싫은 것이 단순히 이자요이 씨가 좋아하는 이가 좋아하는 이라서 그런 거예요?"
타로는 그렇다고 쳐도 후반 부분은 영 그로서는 내키지 않은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이가 좋아하는 이니까 자신도 좋아해야만 한다. 라는 느낌이지 않은가. 이내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도리도리 저었고 코로리를 바라보면서 목소리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애초에 타로 카드는 그냥 재미일 뿐이잖아요. 그런 것에 휘둘릴 필요 없어요. 애초에 미래가 딱 정해진 것도 아닌데. 저도 타로라면 봤고 안 좋은 결과도 나왔지만 그냥 넘겼어요. 애초에 그런 거 과신할 필요도 없고. 그냥 이자요이 씨가 저와 더 친해지고 싶다면 앞으로 더 친해지면 되는 거고, 단순히 좋아하는 이가 좋아하는 이라서 친해져야 한다고 느끼는 거라면 그냥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딱히 이자요이 씨를 나쁘게 대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주 잠시. 4DX에 대한 처참한 결과가 나온 것을 떠올렸지만 그는 애써 그 결과에서 눈을 돌리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 후에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나......... 자야하는데 。゚(゚´ω`゚)゚。 짚어주려나 싶은 부분들 시원하게 짚어줘서 역시 아키라는 미래의 인재 세대의 리더가 맞았다~! 답레.... 이어주고 싶은데 오늘도 내일도 시간이 없어서 안 될 거 같고 지금 자야만하고 졸립고 。゚(゚´ω`゚)゚。 그래서 간략하게 정리할게........
"신 엄청 많이 봤어, 엄청. 난 마녀니까 알아." "회장님 바보지만 똑똑이 맞잖아!" "회장님이랑 친구할래ー 이거 그동안의 사과의 의미, 앞으로 잘 부탁하는 의미, 지금 고맙다는 의미!" 정도의 대답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마지막에 사과의 의미라면서 사탕이랑 초콜릿이랑 젤리 와르르 줬을 것 같구......... 아키라 덕분에 코로리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대하는게 옳은지 하나 배웠다구 합니다~! 아마 잘 하면................ 졸업 전에 친한 친구까지 될 수 있으려나 싶구?!? 근데 친구라고 해도 유치한 투닥투닥은 안 멈출 걱 같구..... (*´ー`*)
>>330 시험 응시한 내가 바보였어........ 자기계발 같은거 (`・ω・´)....... 하지말아야만 했는데~! 다행이다, 식사 맛있게 한 거 같네! 건강하자구~!
저도 슬슬 자러 갈 생각이었기에! 아무튼 코로리의 답변도 잘 봤어요! 사탕과 초콜릿과 젤리를 준다면 아키라는 고맙게 받으면서 너무 많으니까 역시 나중에 아는 사람들과 나눠먹어야겠다고 이야기할 것 같아요. 하지만 팬케이크 값과 주스 값은 그대로 받아갈 예정이에요. (아키라: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저도 땅 파서 팬케이크 파는 거 아니에요.) ㅋㅋㅋㅋㅋ 코로리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에요!! 아무튼 제 생각에도 이 둘은 친구라고 해도 그 특유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을 것 같아요. 잔소리를 할 때는 하고, 왜 자꾸 잔소리야!! 회장님 아수라!! 이러지 않을까 싶고. 하지만 그렇기에 코로리와의 관계는 되게 재밌다고 생각해요! 저는! 단순히 사이가 좋다기보다는..뭔가 그 안에서의 자잘한 귀여움과 재미가 있는 느낌?
아무튼 시험 응시를 하셨다고 하니 정말로 파이팅이에요!! 그리고 저는 이 레스를 남기고 들어가볼게요! 두 분 다 안녕히 주무세요!
파자마 파티라? 아미카에겐 상당히 낯선 일이었다. 그 잠꾸러기 아미카가 파자마 파티를 해본적이 없다는게 이상하다고? 잠꾸러기랑 파티를 가는거랑은 다르니 말이다. 연보라색 파자마를 입은 아미카는 친구들이랑 잠시 얘기한 뒤 벽에 기대 있었다. 크게 할 것도 없고 그냥 이 상태로 자버릴까, 그런 생각만 들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으면 곤란했을거란 말에 아미카는 뻣뻣해 로봇 같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얕게 웃었다. 그럴때가 확실히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이요? 우와.. 대학 면접 같은 거였나요? 그리고..괜찮았나요?"
면접이라, 아미카에겐 상당히 무겁게 느껴졌다. 면접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을 보여주고 나쁘면 떨어지는 그런 시스탬인데다가 선수들을 수십명씩 자르며 불안정한 프로레슬링 단체들을 보며 뭔가 그런 것들에 대한 약간의 무거운 이미지가 생긴 것 같았다. 좋은 공간이어서 잘 봤다곤 했지만 그냥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대학 추천입시 면접이었습니다." 그리고 면접은.. 꽤 괜찮았지요? 라고 말하면서 얼마 뒤면 결과를 알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편하게 지내야죠. 라고 말을 잇네요.
"어차피... 센터시험은 봐야 하지만요." 센터시험까지 치면 본격적이겠네요. 라네요. 그러니까.. 보통 수시-추천입시. 수능-센터시험. 논술-본고사. 같은 느낌인가. 물론 토와주도 잘 모르지만(?)
"무슨 음료수 좋아하시나요?" 자판기를 가리킵니다. 에너지음료나 이온음료도 있는데. 아미카는. 잠 잘 오는 음료를 좋아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제품인데. 밤에 먹고 얼마 뒤에 잘 잘 수 있게 해준다. 같은 느낌?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건 아니라. 자판기에서도 다른 게 다 빨간 불이 들어올 때 이것만 남아있을지도?
"불쾌감은...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꾸준히 관리하다 보면.. 의외로 별 의미 없이 다니게 될 수도 있고요? 라는 건 토와의 일이지...
"앉았을 때 다른 사람들과 키가 별로 차이 안 나는 것처럼 보여도.. 다르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토와도 캔을 재활용통에 넣고는 부드럽게 걸어가려 합니다.
"으음.. 서너 사람은 몰라도. 여러 사람과 파티를 하는 건 조금 낯서네요." 파자마 파티라는 특수성도 작용하는 걸까. 라고 말하면서 잠이 오기 전에 양치를 해야겠네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묘하게 잠에 들기 전의 몸상태가 찾아드는 듯한 미묘함이 들어서일까요? 아니면 그냥.. 피곤해서였던 걸까요?
"부끄럽거나 작은 거라도 비밀은 비밀이니까요." 토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비밀... 말하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그걸 묻는 것은 곤란하니까. 이불이 참 좋겠다는 말에
"그렇겠네요. 살짝 선선한 날에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면 매우 기분은 좋아요." 침대에서는 잠만 자는 게 일반적인 만큼. 토와는 이런 곳에서마저 영단어나 수학문제를 풀 만한 인간은 아닌 것. 그러다가 전학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갸웃합니다. 아미카가 물어올 줄은 몰랐던 주제여서일까요?
"아. 그렇죠. 3학년에는 드문 일이니까 은근 화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전학을 안 올 수가 없더라고요. 라는 말을 합니다.
"이불에서 공부하면 잠이 잘 안오는걸요." 그게... 몸이 침대를 잘 곳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같은 게 있어서 그렇다네요. 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갑니다.
"으음.. 비밀은 아니긴한데.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시골에서 좀 있었는데. 문부과학성이..." 학원물 클리셰를 깨고 진짜 폐교되고 만 것이네요. 같은 말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전학을 간 이도 있고. 결정되기 전에 이미 떠난 이들도 많았네요. 같은 말을 가볍게 합니다.
잠시 갱신할게~! 파자마 파티 너모 귀여운데 ;ㅅ; 코요 커플 커플후드 입는다고 하니까 더 귀여운걸? 렌은 아마 코로리가 아무 말 없었으면 그저 추리닝 바지에 무난한 반팔 티 입었을 것 같지~ 아미카랑 토와도 너무 귀엽구.... 흑흑 일상 돌리고 싶은데 내 현생 무슨일이야 ㅋㅋㅋㅋㅋ....
소녀는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바람은 불고 있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한기가 굳게 닫힌 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목을 쓰다듬었다.
굳게 잠겨 있는 옥상의 문 앞에서 새하얀 기모노를 입은 소녀는 한 손에 약간 오래된 듯한 병을 들고서 취해있는 듯 계단 앞에 앉아 벽에 새겨진 오래된 낙서들의 흔적을 세어가고 있었다.
자신을 찾는 소리에도 귀찮다는 듯 한 손으로 반쯤 비어있는 병의 입구를 매만지며 새벽이 밝아 오는 것을 기다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학우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품는 것이 좋지 않을 감정을 갖는 이들도 없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구태여 이곳에서 찾을 필요가 있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리라. 그녀의 아버지를 맡고 있던 친우는 언젠가 소녀에게 도대체 무엇을 하러 내려온 것이냐며 훈계 아닌 훈계를 하는 일이 늘었다.
그렇다고 해서 먼저 나서서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구태여 하고싶지 않았다. 표면상이라도 자신은 아직 학생이었고, 소녀였으며 또한 한 명의 여인이라는 것이 사실이었으니. 인간의 몸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주 이런 감정이 들고는 했다.
감정에 날이 서고, 휘둘리기 쉬워진다. 소녀는 스스로 이것이 주변에 녹아들기 위한 편리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필요 이상으로 익숙해지는 것은 신으로서의 순결성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끔은 학교를 무단으로 빠져서 다시 고향, 아니 본당으로 돌아가 지내기도 했다.
“흠ㅡ 흠ㅡ 그다지 좋은 냄새는 아니네요.”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데다 이런 모습을 들킨다면 그다지 좋은 평가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니까. 슬슬 옮겨야만 했다.
회색 배경에 하얀색 점들이 찍혀있는 유타카형 파자마를 입고 있는 그는 조용히 학교 순찰을 돌고 있었다. 모두의 친목을 위해서, 그리고 학기가 온전히 끝나기 전에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한 자리로 파자마파티가 열리는 것은 그도 용인한 바였기에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이런 날, 꼭 무슨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학생회 멤버들과 서로 이야기를 해서 각각 다른 루트로 순찰을 돌고 있는 그는 학교 옥상 쪽으로 천천히 향했다. 이런 날, 학교 옥상을 굳이 열고 들어가서 뭔가 이것저것을 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자신은 풍기위원이 아니었기에, 벌점을 주거나 할 생각은 없고 가벼운 것은 그저 가볍게 주의만 줄 생각이었다. 도를 넘어선 무언가가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땐 그때 가서 생각해도 좋을테니까.
누군가가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는 정말 단번에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누군가가 오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그 전에 먼저 도망쳐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었다. 지금 자신은 풍기위원들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혼자서만 왔으니까. 그렇게 계단을 정말 빠르게 오르면서 그는 마침내 문 근처까지 도착했다.
그러자 보이는 모습은 하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봄에 한 번, 여름에 한 번. 그리고 가을인 지금 한 번. 참으로 기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아키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했던 말은 그냥 우스개소리로 한 말이었는데, 정말 계절마다 한번씩 보이는 것 같네요. 카미야 씨. 물론 겨울은 저도 졸업 준비를 해야하니... 아마 마주칠 일은 어지간하면 없지 않을까 싶지만."
3학년인 자신은 이내 겨울이 오면 슬슬 학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도 마무리를 해야하고, 자연히 그렇게 되면 학교에서 졸업하게 되니 아마 1학년인 그녀와 그 시즌에 마주할 일은 잘 없지 않을까. 허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또 겨울에 한 번 마주하는 것은 아닐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라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뭐, 그건 그렇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는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 대답해주실 수 있을까요?"
계단 위로 다가오는 소년을 바라보며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병을 집어 들어 안에 든 것을 마시려 하다가 멈추었다. 오랫동안 앉아있던 탓일까, 발목에서 약간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소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가 다시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어라? 키라키라짱이 아닌가요.”
그녀는 시선을 맞추었다. 회화를 멈출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떤 일이던 직접 마주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이 아닌가요. 봄과 여름, 가을에도 이렇게 만났으니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맞추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후후”
재미있네요 재미있어ㅡ 소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곳 까지 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순찰이라도 하고 있던 것일까. 곧 있으면 끝이 나는데도 이렇게나 제 역할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우두머리는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소녀는 이내 내려가는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옥상을 향해서 걸어올라가는 소녀는 처음처럼 마지막 단에 걸터앉은 채로 이곳까지 오라는 것처럼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그야 여흥을 즐기고 있었답니다. 곧 있으면 꽃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시기를 적절하게 즐기는 것이 인간적인 삶이라고, 어제 본 방송에서도 그러더군요.”
키라키라짱도 어때요? 어느새 소녀의 손에는 작은 잔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은은하게 차있는 달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친구분이 숨겨서 가지고 온 것을 제가 받았답니다. 듣자하니 어쩐지 저에게는 이런 것을 선물해야 좋아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인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단추를 잘못끼운걸까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평소와 같은 기괴한 웃음소리로 소음을 더했다. 시간이라면 죽을 정도로 남아돌고 있으니 이정도의 여흥은 언제든 즐겨도 괜찮을 것이다.
여전히 키라키라짱인가. 언제 봐도 참으로 당돌하기 그지 없는 후배라고 생각하며 아키라는 가만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이제 와서 그 별명에 뭐라고 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만날 때마다 여럿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쭉 그것을 고정시킬 모양이었으니까. 익숙하게 받아들이기로 하며 그는 그녀가 하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내려가는 듯 하더니 갑자기 또 다시 올라가서는 자신에게 옆으로 오라는 듯, 옆자리를 치는 모습에 그는 일단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 전에 그거 뭐예요?!"
친구가 숨겨서 가지고 온 것을 자신이 받았다라니. 뭔가 어투만 보면 지금 학교에 가지고 오면 안되는 것이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그는 두 눈을 절로 깜빡이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일단 오라고 하니까 그녀의 옆으로 간 후, 그는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이어 아무런 말 없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던 아키라는 살며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풍기위원장에게 알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괜찮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것을 입에 담기에는 저도 제 입장이 있거든요? ...뭐, 제가 생각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만약 술이라면 너무 많이 먹진 말고 들키지도 말아요. 교사나 풍기위원 쪽에게 걸리면 벌점이 문제가 아니라 봉사활동까지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뭐, 당연히 가지고 올 이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괜히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이어 그는 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인상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운치 있다는 그런 느낌 아니에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카미야 씨는 뭔가 살짝 특유의 분위기가 있으니까요. 인상이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뭔가 신비하면서도 모두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있는 느낌 말이에요."
“오사카의 아키시카라는 거랍니다. 학생이 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소문대로 맛은 좋네요.”
평소보다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럼에도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녀는 술에 취한 듯한 웃음으로 화답하고 이내 고개를 젓는 아키라를 보며 아쉽다는 듯 잔에 담겨있던 것을 한숨에 들이키고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때로는 입장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아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죠. 게다가 얼마 있으면 자리를 내려놓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서 떠나가야 할 거에요. 두 번 다시 밤의 학교에서 취한다는 경험은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죠.”
하지 않는 편이 낫지만 말이에요! 아핫하하.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풀어진 얼굴이었다. 마치 지금이 더욱 편하다는 것처럼 소녀는 즐거워 보였다.
“하핫, 아핫, 하하핫.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어쩐지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에요. 에에, 실제로 그러고 있답니다. 누군가와 너무 가까워진다면, 누군가의 색에 강하게 물들지요. 자신의 색을 잃게 되어요. 특히 저희 같은ㅡ 아니 키라키라짱은 그런 느낌이 아니니까 괜찮을까요?”
고개를 반쯤 떨구고 소녀는 그렇게 말한다. 어쩐지 아슬아슬한 선의 끝에 서있는 듯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미묘한 확신마저 가지고 있는 듯 하게 느껴졌다.
잔을 비우고 나니 보이는 것은 딱딱한 바닥에 유리창의 틈새로 기어 들어온 은빛의 별이 박히는 모습이었다. 소녀는 기계적으로 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거듭했다. 이미 녹아버린 듯 맛조차 알 수 없는 액체가 식도를 타고 돌아 차디찬 밤공기와 섞여서 한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어쩐지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소녀는 이내 병과 잔을 곁에 얌전히 내려두고 팔목에 오른 손을 가져갔다. 그곳에는 친구에게 받은 시계며 반지며 하는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제각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왼손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서투르게 만들어낸 장식품들에 푸른 빛을 내는 나비장식이 달린 팔찌. 소녀는 미련없이 그것을 풀었다.
“겨울에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니, 조금 이른 졸업 선물이라고 생각하시고.”
소녀는 누군가의 성의가 담긴 것을 언제나 사랑했으나 애초에 이것은 맡아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꽃으로 되돌려주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거라 생각했지만, 어차피 이번 겨울이 가고 나면 자신도 소년도 이곳에서는 사라지리라. 그렇다면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이 신으로서의 역할이 아닌가.
"제가 학생회장이 아니라면 한 잔 정도는 했을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학생회장이니까요.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어쩌겠나요. 자리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이 있고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지켜야 하기도 하고요. 세상사, 자신이 워하는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말도 맞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학생회장이 이런 시기에 술을 먹고 취한 모습을 보이면 무슨 말이 나오겠는가. 학생회 멤버들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면목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하리라 다짐하며 시작한 것이니 유종의 미는 확실히 거두리라 생각하며 그는 앞으로 남은 임기 날짜를 떠올렸다. 겨울이 되면 머지 않아 제대로 내려오게 되고 투표에서 당선된 다음 이가 학생회장이 되리라. 적어도 자신은 인수인계는 끝냈으니 후회할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그야말로 멋지게 마무리를 하는 것 뿐.
"고작 1학년이면서 자신의 색을 잃고 누군가의 색에 물드는 것이 무섭다고 하는 것이 저로서는 이해가 안 가네요. 저희 같은...이라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고요.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왜 그런 말을 하면서 고개를 아래로 향하고 있고 목소리를 떨고 있는 건가요? 마치 그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방식을 취한다라는 것 같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그 말은 마치 누군가와 일부러 가까워지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거든요."
대답을 안한다면 그것으로 자신이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나 처음 만났을 때도, 전에 여름에 만나 시간을 보냈을 때도 그녀는 뭔가 뒤로 몇걸음 물러난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듣긴 했으나 그 또한 다른 이유가 있는 이유 같았기에 아키라는 그렇게 질문하며 조용히 안경을 정리했다.
나비장식이 달려있는 팔찌는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풀어 조금 이른 졸업 선물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말에 아키라는 가만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애석하게도 이미 누군가에게 준 선물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은 없어서요. 이미 그건 제가 카미야 씨에게 준 물건이니 그 물건이 필요없다면 다른 곳에서 처분해주세요. ...뭐, 그래도 제가 보지 않는 곳에서 처분해준다면 감사할 것 같네요."
여름 시기. 정확히는 호타루마츠리 때 줬던 선물이었던가. 그 팔찌를 자신에게 돌려주겠다는 의향이라면 자신은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다. 이미 준 선물을 다시 돌려받는 것은 영 내키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졸업식을 한다고 해도 저는 언제나처럼 이 마을에서 쭉 살아갈 생각이에요. 대학도 이 마을에 있는 대학으로 갈거고. 그러니까 졸업선물을 주고 싶다면 졸업식 근처나 혹은 당일, 그리고 이후에 주세요. ...지금부터 졸업선물이라고 해도... 애매하기 그지 없고 사라지는 거 아니니까 지금 급하게 받을 이유도 저에겐 없어요."
소녀는 마치 지금이 전성기의 끝자락이라는 듯 자신의 지성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 무너져 있는듯, 또는 견고한 듯. 모순적이게도 두 모습이 자꾸 섞여서는 그녀의 존재를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나면 자신은 없으리라. 소녀는 지금의 온도가 마음에 들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장막은 취기를 적절히 식혀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멀리에서 들려오는 조그만 소란은 그저 쾌적했다. 이 이상은 필요 없다. 행복했었다.
“고작 1학년, 그렇기 때문에 물드는 것이 두려운 것이랍니다. 마지막 걸음을 떼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틀려버리면 의미가 없어요. 누군가의 위에 서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용서받아서는 안되고 말고.”
일부러는 아니에요. 그럴 수 밖에 없을 뿐이지. 소녀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웃을 수 있다면 행복하다.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그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만한 요소를 하나 둘씩 채웠다. 구태여 생각하지 않아도 소녀는 행복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사랑을 받는 존재로 태어난 것은 그런 것이다. 소녀는 양 손을 펼쳐서는 뭐 어떻냐는 듯 웃었다.
“아쉽네요. 처분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틀렸답니다. 키라키라짱은 이게 어떤 팔찌인지 알고 있나요?”
무려 저를 거쳐간 팔찌랍니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그녀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으나, 평소 그녀를 쫓아다니던 몇몇 아이들이라면 그것조차도 기쁘게 받았을 것이다.
“진심을 말하자면 제가 올해 겨울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르니 지금 드리는 거랍니다. 이 카미야 마사히로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겨울이 되고 나면 꽃이 지고 다음 해를 준비하는 것처럼. 저도 다음을 준비해야하지요.”
달이 밝은 밤이었다. 소녀는 잔에 담겨져서 흔들거리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 팔찌에는 저의 역사가 담겨있어요. 키라키라짱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믿을만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제가 담긴 것을 드린답니다. 그런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내딛지 않으면 그것이 틀린지 아닌지도 모르잖아요. 학생회장이 아니었던 학생이 그저 호승심으로 도전해본 것처럼, 내딛지 않으면 틀렸는지, 맞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설사 누군가의 위에 서는 이라고 하더라도, 틀렸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다르게 가면 되잖아요. 물론 그 인정이라는 것이 엄청 힘들긴 하지만..."
그럼 자신은 어떠했는가. 학생들의 대표이기도 한 자신은 어떠했는가. 적어도 자신은 자신만의 길을 내딛고 걸어왔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었다. 학생회장으로서 누군가의 기억에 조금이나마 남는다면 적어도 자신의 학생회장으로서의 길은 헛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학생회장으로서의 길을 전혀 모르겠다고 내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고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인생의 무언가가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조금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당신은 정말로 한결같네요. 자신을 거쳐간 팔찌라고 당당하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리고 갑자기 이게 무슨 시한부 인생 분위기에요. 누가 보면 저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면 내 목숨도 끝일거야...라고 말하는 사람 같거든요?"
그래도 어느 정도 분위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뭐,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그런 의미인걸까. 자신이 했던 것을 주면서. 물론 자신으로서는 역시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제각각이었다. 허나 바로 받진 않으면서 그는 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그 와중에 들려온 것은 이 타이밍에서 생각도 못한 무언가의 말이었다. 신을 믿느냐. 지금껏 여러 사람에게 질문받기도 하고, 답을 했던 것이기도 했다.
"직접 본 적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 존재를 믿어요. 그렇지 않으면 시미즈 가문이 지키고 있는 그 성스러운 샘을 설명할 방도가 없으니까요. 절대로 마르지 않는 그 깊고 깊고 넓은 샘을 보면 정말로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은 존재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딱히 뭐, 신앙심이 넘쳐나서 그 신을 모시고 살겠다...이런 것은 아니기도 하고. 그냥 있겠구나. 생각만 하는 정도지만."
만약 있다면 정말로 있구나. 라는 느낌일테고 없다고 해도 실망할 일도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가만히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굳이 그녀에게 신을 믿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가미즈미에 생명의 근원. 즉 물을 준 신은 참으로 불손한 자라고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뭐, 어쩌겠나요. 정말 이 이상은 생각도 못하겠는걸. 그래도 정말로 있다면... 한번은 마주해보고 싶기도 하네요. 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그 이미지일지도 궁금하기도 하고."
외지에 존재하는 옛 모습을 간직한 신사. 그곳에서는 이따금 씩을 오가는 사람들의 왕래를 제외하면 정적이며 한결 같은 그곳의 안뜰에서 그 신사의 무녀와도 같이 보여지는 한 여성이 빗자루를 바닥을 쓸면서 청소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녀는 주변을,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하늘에는 새 들과 함께 구름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날아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지져귀는 새소리에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소리가 섞여 있음을 그녀는 알아차렸고 그 진원지를 살펴보아 곧 달하였습니다
"가여운 아이로구나... 무슨 변고(變故)인지 이것 또한 생(生)으로서 하여금 지새우며 짊어지게 되는 업(業)일 수 있겠지?"
새 한 마리가 바닥에 떨어져 그 몸을 움찔이고 있었습니다. 제 질질 끌어가듯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날개짓 하지 못하는 것을 본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렀습니다. 그 새는 부상을 입은 듯 했습니다. 그녀는 동물을 보살피고 다루는 것에 대하여 전문 지식을 지닌 수의사와 같은 것은 아니 였지만 나름대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그녀는 그 새가 날개가 부러진 것으로 판단하여 보았습니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를 옮겨서는 손에 쥐었던 빗자루를 도구 보관실에 도로 가져다 놓고는 예의 그 장소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새가 남아있었고 그녀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어서는 새의 앞에 서서는 곧이어 한 쪽 무릅을 궆혀서는 양손을 새에게 뻗어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살며시 감싸 안으려 했습니다. 그런, 단순한 행위라 하나 그렇지만 새에게는 스스로에게 처한 이 상황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울 것이고 그것을 제 스스로 증명하듯이 그 몸으로 나름 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무릇 생명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당연한 행위. 이 새가 그녀의 의사를 알지 모르는지에 상관없이 그러한 모습에 그 새에 대하여 오히려 안심이 되는 그녀였습니다. 그 새가 처한 부상이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도록 하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신중히 하여 시간을 들여서는 새를 손수건으로 감싸여 들어 올릴 수 있었던 그녀는 천에 감싸진 새가 조금 이나마 안정을 취하는 듯 하는 것을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로 걸음걸이를 옮기어 신사의 뒷편으로 발걸음을 향하였고 도달한 곳은 그녀가 하루, 하루를 지새우며 생활을 하며 지내는 장소. 손에 든 새에도 아랑곶하지 않고 능히 문을 열어내서는 실내로 들어간 그녀는 탁자 위에 새를 감싸진 손수건과 함께 살며시 놓았습니다. 우선의 이 새의 안정과 치유가 우선이라고 그녀는 생각했기에 수납함들 뒤져 살펴보아서는 적당히 활용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였고 그녀는 마침 쓸만해 보이는 원할히 공기가, 숨을 쉴 구멍과 열고 닫을 수 있는 상자를 찾았습니다. 그녀는 곧 다시 살며시 새를 상자 안에 천과 함께 옮겨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자리를 옮겨 주방으로 향하였는데 그것은 새의 회복을 돕고자 하여 물을 데워서는 담아서 그것을 새가 담겨진 상자 안에 넣어두고자 함 이였습니다. 다친 새는 몸을 좀 더 따뜻하게 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워진 물을 가져와서는 상자 안에 같이 넣어두었습니다. 새는 첫 대면에 비하면 꽤 안정된 것처럼도 보여지고 있으나 그 눈빛에는 불안함 서려있는 듯 했습니다
이 새가 회복하여 다시금 자신의 날개로 하늘을,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노니며 날아가는 것에는 얼마나 걸리게 될까요,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녀조차도 호기심이 이는 것 이였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걸리든 일단 손길이 닿도록 뻗어낸 이상 이 새가 회복 될 때 까지 돌봐주도록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새의 본연의 상태를 존중하고자 따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딛지 않으면,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그렇더군요. 알아야 할 필요도 없이, 나아갈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요구 받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답니다.”
소녀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실제로 그러했다. 자신과 닮기 위해 악에 물들어버린 아이, 혹은 자신과 닮지 않기 위해 바보 같은 일들로 자신을 망쳐버린 아이들. 지나오면서 스쳐 지나간 것들은 많았으나 그 무엇 하나 손에 남은 것은 없었고 조금이라도 길게 그것들을 눈에 담고 싶어 저승의 문 앞 까지 되도 않을 농담을 섞어가며 쫓아간다. 데려가라, 데려가라. 꿈은 이미 떠났다. 16년 전의 일이다. 아무것도 남지않은 육신에 남아있을 꿈은 없었다. 그렇다고 삶을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추하게 살아왔으니 아주 조금은 더 보아도 되지 않겠나. 소녀는 비어버린 병을 치우고 잔을 높게 들었다가, 이내 땅바닥에 내던졌다. 나무로 되어있던 그것은 깨어지지 않았으나, 아주 약간의 금이 가버려 이제 제 역할을 하지는 못하리라.
“어떤 의미로는 그렇지만, 어떤 의미로는 아니네요. 복잡해라. 저에게 겨울은 떠나 보내는 계절이고 그렇게 잎새를 떨군 채로 혹한을 넘어 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말했던가. 참된 이치는 자연이니, 깨달음 역시 그윽히 부합한다고. 하지만 자연 그 자체인 소녀는 그 무엇 하나 깨닫지 못했다. 이치를 얻지 못했으니 열반도 해탈도 끊지 못했고 무엇 하나 알지 못한 채 본성만을 끝없이 외쳤으니 열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것에는 형태가 없다. 사물의 배후에 있으며 언어를 거쳐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신. 적어도 제가 깨달은 이치에서는 그런 거랍니다.”
마르지 않는 샘, 순환하는 생명. 넘쳐흐르는 강물. 평온한 잠과 그것을 감싸는 별빛. 그리고 온갖 불행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이름을 붙인다. 그 이전에도 스스로를 스스로라고 인지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모두가 인간과 접하는 것으로 인간의 입에 오르는 것으로 그 위용을 더해가니. 신이란 본디 그런 것이리라.
“그렇다면 눈을 감아보세요 키라키라짱.”
소녀가 걸치고 있던 기모노는 어느새 겹이 늘어나 있었다. 잠옷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에 화려한 장식, 그리고 그 사이로 흔들리는 분홍빛 머리카락. 소녀는 사춘기를 달리고 있었다. 끝나서는 안되는 방황의 끝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불타던 순간, 분노로 가득 차서는 날뛰던 순간.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 이제 눈을 뜨고, 이쪽을 보세요.”
소녀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장난기 있는 웃음에 옷이 달라졌을 뿐. 평소와 차이는 느끼지 못했으나 한쪽 팔을 휘감은 꽃이며 풀들이 금방 새벽 이슬에 닿은 듯 싱그러운 향을 풍기고 있었다.
자신의 말과는 정반대의 말이었으나 아키라는 굳이 거기서 더 반박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관이 있는만큼 그녀의 가치관도 있는 법이었다. 허나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살 순 없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요구 받는 사람이라니. 그건 그야말로 인형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자신은 그런 삶은 살기 힘들다고 생각을 하나, 그것을 굳이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기에 아키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그녀가 잔을 땅바닥에 내던지자 그는 움찔하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술을 마시더니 이 후배님. 취했나. 이거 반으로 데려가면 또 난리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이어지는 말에 그녀를 귀를 기울였다. 이전과는 다르게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으로 보아 혹시 최근 무슨 종교에 빠진 것이 아닌가...하는 소소한 걱정거리를 하면서 그는 입을 열려고 했다. 허나 그 와중에 눈을 감아보라는 말이 들려오자 아키라는 일단 눈을 살며시 감았다.
갑자기 눈을 감으라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무슨 장난이라도 치려고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 와중에 또 눈을 뜨고 이쪽을 보라고 하니 그는 가만히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팔을 휘감은 꽃과 풀. 그리고 방금 전까지 없던 향. 그 모든 것을 그는 느끼며 두 눈을 정말로 크고 동그랗게 떴다.
"...당신은..."
이어지는 말.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히 이야기했다. 신이 정말로 있다면 한 번은 마주하고 싶다고. 적어도 방금 앉아있던 곳에서 새로운 옷은 보이지 않았고, 그 짧은 시간 내에 저렇게 뭔가를 연출하듯 붙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분명히 앉을 때, 주변에 그 무엇도 없던 것을 자신은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매우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그거야... 지금 이 순간은...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지금 제가 파악하고 있는 것이 맞을진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맞다고 해야할진 모르겠는데. ...당신. 신 님?"
그와 동시에 이전 자신과 이야기를 했던 제 반의 동급생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신을 자주 마주하고 있다고 했던가. 그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피노키오가 어쩌고 말을 해서 대체 뭔 소릴 하나 싶었는데. 사람이 믿기 힘든 무언가를 마주하면 정리가 안된다고 하는 게 이런 말이었던가.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하하. 아니. 뭐라고 해야할까. 진짜 뭐라고 해야하나.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화려하네요. 그러면서도 뭔가, 평소의 분위기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해야할까. 솔직히 말해서 저에게 장난을 치려고 어떻게 어떻게 몰래 숨겨놓은 옷을 입고 장식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역시 그런 것일리는 없을테고. 지금 말로 추정해보면..."
이어 그는 크게 헛기침을 하면서 살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이어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는 헛기침 소리를 냈다.
"만약 당신이 신이라고 한다면... 왜 저에게 그걸 보여주는 거죠? 뭐, 무슨 특별한 이유는 없을 것 같지만...그래도...뭔가..."
여인은 제 팔을 감고 있던 꽃을 한송이 꺾었다. 이름은 없었다. 모든것에 이름이 붙어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그곳에 있었을 뿐. 어차피 제 몸에 붙어있던 것이니 그다지 큰 가치는 없었으리라 생각한 여인은 이내 골똘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등 뒤로 던져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꽃은 그대로 생기를 잃어버렸다.
"특이한 것을 바라나요. 특별한 것을 바라나요? 전에도 말했지만 신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독. 존재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의존하고 싶어지고 의존하고 나면 더이상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어요."
빛이 나지 않는 보석에는 아무도 몰려들지 않는다고 말하며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가도 되겠냐며 옥상의 문을 가르키고는 아키라를 향해 고개를 돌린 소녀는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저는 스스로를 가치있게 여기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꽃이 피고 지듯 이 짧은 삶을 불태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이야말로 신의 총애를 받아 마땅하지요. 저는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기를 들이쉬었다. 겨울이 오고있었다. 풀은 땅으로 돌아가고 저승의 문턱에서 자신을 쫓던 이들이 가장 많았던 그 계절이 오고있었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웃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렇다 하여 내가 아닌 타인의 미래를 무너뜨릴 자신은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신을 찾지 않도록 하세요. 용서를 구하지 말고 구원을 바라지 말고 스스로 꽃피워서 아름답게 지도록 하세요. 인간의 몸으로는 그저 의미없음을 알았으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네요. 저는 그런 오만하고 아름다운 이들을 신자로 받기 위해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저의 신자가 되도록 하세요."
전에 독백으로 한번 이야기 했었지만 카미야대사는 대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본산 이외에선 정말 쇠퇴해가는 신앙입니다. 죽고싶지 않아서 다른 신들의 일화도 삼키면서까지 남은 것들이 이제는 다시 사라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사히로는 이곳에 왔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이어나갈 수 있을정도의 재목을 찾기위해서. 사실 이곳의 누구라도 가능성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마사히로라면 정말 초면의 사람이라도 너 내동료가 되라는 식으로 덤벼들었겠지요. 그만큼 충동적인부분이 그녀가 여전히 동료와 신들에게 사춘기소녀라고 불리고 있는 원동력일겁니다.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오지만 아키라로서는 역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 없었기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바빴다. 정말 자잘하게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것도 있었으며, 왜 자신과 같은 반인 동급생이 그녀는 자신이 신을 많이 봤을 거라고 확신하듯 이야기를 했느냐도 있었고. 그렇다면 아오노미즈류카미에게 바치는 맹세. 그것도 모두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로서 전승으로 전해지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숨을 약하게 정리했다.
"말해두지만 당신이 신이라고 해도... 딱히 의존할 마음은 없어요. 아. 물론 가벼운 소원은 빌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신사에서 세전 넣고 비는 그런 자잘한 것 정도라면. 하지만...그렇다고 딱히 카미야...씨에게 뭔가를 이뤄주세요. 가미즈미 온천 앞으로도 흥하게 해주세요. 혹은 영화관 4DX 들어오게 해주세요. 라고 빌 생각은 없기도 하고."
그녀의 말대로였다. 신이 정말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의존하게 될테니까. 허나 그렇게 이뤄내는 것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라는 것이 아키라의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이 아직 인생의 쓴맛을 덜 느꼈기에 그럴지도 모르는 것이겠지만. 일단 조용히 눈을 깜빡이면서 생각을 하던 아키라는 그녀의 제안. 나가자는 그 말에 조용히 숨을 내뱉으며 따라 나섰다.
"신자라..."
생각도 못한 제안이었다. 꽤 건방지고 당돌한 1학년 여학생이 알고 보니 신이었고 지금 자신에게 신자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내 크게 그는 웃음을 내뱉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면 무슨 라노벨을 읽고 왔냐고, 정신 차리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했다. 이내 웃음소리를 조금 더 이어가던 그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아하하. 아니. 딱히 카미야...씨를 비웃거나 그런 것은 아니에요. 오만하게 구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뭔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아서. 신 님이 직접 모습을 비추고 저에게 신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일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일단은 저를 매우 높게 평가해주는 것 같아서 감사하고... 여기서 겸손하게 그런 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 긍정적인 평가는 받아들일게요."
적어도 빈말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 자신이 본 카미야 마사히로라는 존재는. 그 성격이 확 돌변한 것은 절대로 아닐테니까. 허나 신자에 대해서는 조금 말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신이라면, 시미즈 가문의 전승에서 전해지는... 그러니까 이 가미즈미에 있는 성스러운 샘을 부여한 신. 아오노미즈류카미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테고 저희 가문에게 내린 사명도 진실이겠지요. 이 땅에 대대로 뿌리를 박고 살면서 샘을 관리하고 지키라는 말. 그렇다면... 저는 아오노미즈류카미에 대한 신앙심은 둘째치고 그 사명을 지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아니. 이건 뭐, 원래 지킬 생각이었으니. 딱히 어디로 갈 생각도 없고 제대로 시미즈 가문의 당주가 되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저 역시도 그 샘을 지키고 관리하면서 살 생각이었으니까..."
그 부분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확고하게, 언제나처럼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만약 그 신자가 되라는 것이 아오노미즈류카미 대신 당신만을 따르고 당신의 말에 복종하라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렇기에 당신에게 물을게요. 당신이 말하는 그 신자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의미를 확실하게 받아들여야만... 저도 제대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당돌할지도 모르지만요."
소녀는 문을 열었다. 추상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으나 옥상의 문은 그녀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매끄럽게 한바퀴를 돌아 처연하게 뜬 달과 별들을 검은 하늘 위에 수놓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늘에서는 별이 내린다. 순간을 잊어버린 사람들을 스치듯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하늘에서는 구멍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어저면 자신이 떨어지고 있는걸지도 모른다고 소녀는 생각했었다.
"간단하죠. 사명도 지킨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도 받아들인다. 이제는 인간에게 신이 필요한 시대는 지났어요. 솔직히 말해서, 키라키라짱은 지금 지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신의 존재는 모른채로 많은 불경을 저지르며 살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소녀의 모습은 어느새 다시 하얀 기모노로 돌아와있었다. 마치 일부러 꾸미지 않은 듯 양 팔에만 덕지덕지 누군가에게 받은 장신구를 끼고 맨발로 콘크리트 위를 걸어가 소녀는 옥상의 중앙에 섰다.
"저는 신자에게 굴종을 요구 하지 않아요. 신의 말을 따르기만 할뿐인 존재는 인간이 아니니까. 제 신자가 되기위한 조건은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죠."
소녀의 손을 타고 능소화가 피어났다. 계절에 맞지 않는 꽃들이 그녀의 손을 타고.
"그저 아름답게, 인간답게 살도록 하세요. 키라키라짱. 명예를 챙기고 타인을 위하고. 자신이 즐겁다고 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사는것이ー제가 고르는 제 신자의 조건. 아름다운 자만이, 꽃을 받아 마땅하지요."
소녀는 피워낸 꽃을 화관으로 만들었다. 조금은 투박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일부를 담은 것이리라. 그에게 다가가서 선물이라며 화관을 건낸 소녀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명도 지키고 새로운 신앙도 받아들여라. 즉, 그녀가 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일까. 자신을 모시라고 하는 것 치고는 굴종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것은 정말로 신자가 맞긴 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신자와는 확연히 다른 개념이었으니까. 보통 신자는 특정한 신을 모시는 그런 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녀가 내세우는 조건은 자신에게 있어서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오노미즈류카미를 버리고 새롭게 자신을 모시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천벌을 받진 않은 것 같으니... 신들의 기준에는 불경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한 행동들은 말이에요."
어쩌면 천벌이 내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생각했을 때 크게 천벌이라고 인식할만한 일은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행동을 제대로 한 것인지, 아니면 신들의 마음이 넓은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라는 살며시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덧 돌아온 그녀의 기모노는 다시 한 번 그녀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제대로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허나, 갈아입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옷이 바뀌었다면 역시 믿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녀가 신이라는 것을. 이내 그는 자신에게 내민 화관을 받아들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싱긋 웃으면서 그 화관을 머리에 썼다.
"그냥 가볍게 하루 학생들끼리 마지막 학기가 끝나기 전에, 친목이나, 미처 못한 이야기들이 있으면 하라고 만든 자리건만, 정말 생각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버렸네요. 신자라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삶은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애초에 그렇게 살았고... 시미즈 가문의 사명을 지키는 것도, 장차 온천이나 스파를 이어가서 시미즈 가문의 사람으로서 있으려는 것도, 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한 거니까요."
물론 누군가는 부모에게 부여받은 레일을 탔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면 어떻겠는가. 적어도 자신의 의지로 지금 그 레일을 타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생각을 마치며 바닥에 드러누운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바로 옆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가 보고 있을 하늘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니까 카미야..씨라고 계속 불러도 될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당신이 신이라는 것은 잘 기억하고, 뭐... 따로 신사를 만들어주거나 할 순 없겠지만... 제가 가능한 선 안에서 이런 신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신화처럼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 같네요. 그러니까..."
이어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내뱉으며 하얀 입김을 허공에 깨뜨렸다.
"사라질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고, 당신이 무슨 신인지, 지금 뭘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으로 어쩔건지. 그런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지 않을래요? 오늘이 아니어도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적어도 지금 알게 된 신이 어떤 신인지는 알고 싶거든요. 하루이틀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면... 길게 길게 알고 지내도 좋잖아요. 신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소녀는 원래 겁이 많고 주눅이 잘 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떤 시점에서 생겨버린 병적인 긴장감이 언제부터인가 어깨를 짓눌러버려 이윽고 다소 피로에 찌든 듯한 어투로 상대를 대하고는 했다. 소녀는 자신이 만든 화관을 받아들인 신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어렸으나 눈에는 생기가 있었으며 또한 두려움을 알면서도 나아가려는 의지가 남아있었다.
자신과는 정반대로구나.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서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누군가의 삶에 기생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 만으로 멋대로 만족해버리고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해서 저승의 문턱까지도 쫓아가게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세요.”
소녀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읏음을 짓고는 당장 맞장구를 쳤다.
“누군가에게 받은 길이라도, 그 외의 것을 보고 스스로 걷기로 했다면 그것은 이미 아름다운 것. 신이든 뭐든 상관없답니다. 저의 이야기는 미적관점에서 시작되었어요. 인간으로 살고, 인간으로 죽고. 꽃이 피고 지듯이 그 삶을 축복할 수 있는 존재. 그게 저, 카미야 마사히로.”
소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시작한다. 이전에 없을 정도의 생기를 띠며 마주한 상대를 보며 쉴 새 없이 웃으며 마치 소년의 등을 떠밀 듯한 행동으로 천성에 대한 지론을 내뱉는다. 신화로서 존재하리라. 이런 아이들이 더욱 많다면 좋을텐데. 마음 한구석에서 나온 한숨이 밤바람에 섞여갔다.
“이름은 黃泉比婆花之姬. 이즈모에서 태어난 꽃의 신. 인간의 삶을 바라보며 그 앞길을 바라보는 존재. 카미야라는 이름의 적법한 주인. 피어나고 또 지는 존재.”
주변에 피어오르던 생기를 가라앉힌 소녀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이번 겨울이 지나고 나면 이곳을 떠날 생각이에요. 사람에게는 행복이 필요해요. 이 세상에 혼자 피어나는 꽃은 필요 없어요. 제 목적은ㅡ 그러네요. 세계멸망이라도 해볼까요?”
요모츠히바하나노히메. 순간적으로 왜 신이라는 작자들은 이리도 이름이 긴 것인가. 라고 아키라는 생각했다. 아니.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아오노미즈류카미라던가. 그 외의 신들의 이름이라던가. 한자로 쓰면 또 보통 길고 힘든 단어들이 아니었다. 신들은 이름을 지을 때 뭔가 그렇게 짓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괜히 그녀의 진짜 이름으로 추정되는 것을 곱씹었다.
"꽃의 신이라."
그러고 보니 가미즈미에서 가장 오래된 벚꽃나무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신들은 한 부류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사실 잘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말이었다. 당장 꽃의 신들중 정말로 유명한 신이 하나 더 있지 않던가. 그런 것을 생각하며, 어쩌면 다 같은 친족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괜히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그래도 세계멸망을 시키려고 하면 다른 신들이 가만히 있진 않을 것 같은데요. ...당장 제가 아는 신만 해도 아오노미즈류카미라고 해서 가미즈미의 수호신이나 마찬가지인 신이 있기도 하고."
정말로 수호신인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죽음으로 가득한 이 땅에 생명을 부여했다고 하니, 정확히는 정말 깊게 들어가면 다른 두 신이 더 있었지만, 아무튼 그런 신들이 가만히 있기는 할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이어 그녀를 어떻게 부를 지를 잠시 고민했다. 카미야 씨. 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요모츠히바하나노히메라고 불러야할까. 일단 그 부분은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며 그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굳이 이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나요? 사람만이 아니라 신에게도 행복은 필요할테고, 그 행복을 여기서 느낄 수 있다면, 여기에 정착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뭐, 온천에 들어갔다가 나온 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 부끄럽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나름 만류해보긴 하나, 굳이 붙잡는 어투도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가 신이라면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고 한들, 결국 자신의 뜻대로 할테니까. 자신이 본 그녀는 오만하면서도 당돌했고, 그러면서도 꿋꿋한 이였다. 그렇기에 그녀가 굳이 정말로 떠난다고 한다면 자신은 더 뭐라고 말하지 않고 받아들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괜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만약 정말로 떠난다면 조금 아쉬울 것 같네요. 일단 신이라고 하는 당돌한 1학년이 내년엔 또 무슨 일을 할까 나름 궁금했었는데."
“아핫!!! 하앗!!! 하하핫!!! 으음, 아쉬워라. 제 신도라면 저를 따라서 함께 해줄거라고 생각했는데. 으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써서 이루어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
소녀는 이전과 다른 감정이 섞인 냉소를 보이며 답했다. 문을 향해서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소녀는 곧이어 무언가 하려던 말이 있는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피고는 손 안에서 꽃을 피웠다. 몇 번이고 해낸 일이니, 이제는 특이할 것도 없으리라. 소녀는 소년을 지나치며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서 마치 재미있는 것을 본다는 듯 유심히 살펴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신을 너무 믿지 마세요. 편견이기는 하지만 신들은 대단한 듯 그렇지도 않으니까. 인간적인 고민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도 하지요. 이름을 부르기 힘들다면, 아가씨… 아니면 인간 쪽의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세요.”
그녀는 곧 손가락을 펼쳐서 자신을 가르켜 보였다. 이전과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으리라. 일부러인지 아니면 그저 평범하게 있으려 할 뿐인지. 그것까지 알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원래 꽃은 변덕스러우니까요. 여기는 정말로 좋은 마을이에요. 저와 닮은 사람을 찾았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모두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게 나아가는 이들이었지요. 그런 곳에 있으면 저는 감화되고 말아서, 너무 인간적이 되어버려요. 신으로 태어나서 신으로 살아온 것이 얼마였을까요.”
이제는 그 자아를 잃는 것이 두렵네요. 몇 번이고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두려운 것은 금방 나아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소녀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으나, 이상하게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하핫, 저도 그러네요. 만에 하나라도 제가 이곳에 남아있으면, 그러네요… 이 마을의 죽은 나무 전부에 꽃을 피워보기라도 할까요.”
신인 그녀가 저렇게 이야기를 하니 아마 신에 대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온전히 그 정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성격이 이것저것 있듯이, 신이라고 다를 것은 없지 않겠는가. 당장 그리스 로마 신화를 봐도 그 신들의 성격은 제각각이었다. 하물며 여기는 그보다 신이 많다고 하는 나라가 아니던가. 아마 그녀의 말과는 다른 느낌의 신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살며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꽃이 피지 않는 나무에 꽃이 피어난다면 카미야 씨가 계속 이 마을에 있다는 것으로 알도록 할게요."
이미 자신은 권유를 했으나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 긍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굳이 더 억지로 잡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또한 편견일지도 모르나 한낱 인간이 신을 붙잡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론 자신은 신을 맹신할 생각은 없었으나 그렇게 하겠다는데 자신이 뭘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괜히 화관을 장난스럽게 머리에 써보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 전의 그 팔찌는 역시 더더욱 받을 수 없겠네요. 당신이 저에게 당신을 기억하라는 듯, 신자로 삼겠다고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 역시 저를 기억해주는 증표 정도는 하나 남기고 싶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팔찌는 순수하게 당신의 것으로 남겨두세요."
나름대로 그렇게 이유를 덧붙이며 그는 선물은 이 화관으로 충분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신이 직접 만들어서 준 화관. 졸업선물로서는 최고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약하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졸업식 때는 얼굴을 비쳐줬으면 해요. 물론 오고 말고는 자유니까 안 보인다고 해도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슬슬 돌아가시겠어요? 일단은 파자마파티고... 졸업을 앞두고 있는 학생회장보다는 같은 반 아이들과 그 좋아하는 사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재밌지 않을까 싶은데."
그녀는 세련되게 혀를 굴렸다.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새로이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보듬는 어미마냥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 후에는 단순했다. 소녀의 손에는 팔찌가 들려있었다. 이제는 주지 않겠다은 듯 군데군데에 새로 돋아난 풀이며 잔꽃들이 섞여서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하핫, 아하하핫. 아쉽지만 이제는 돌려달라고 해도 돌려주지 않을거랍니다? 이건 이제 신자가 신에게 바친 공물이니까요. 저는 한번 받은 공물은 돌려주지 않아요 아키라."
하지만 역시 이렇게나 끼고 다니면 눈에 띄어버리겠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에 보이는 장신구를 모조리 숨겨버렸다. 큰 소란에는 엮이고싶지 않다는 뜻일까.
"졸업식인가요. 에에, 물론 참가할게요. 소중한 아이가 사회로의 걸음을 딛는 중요한 장면을 제가 놓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랑이야기는, 그러네요. 그렇지 않아도 곳곳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는 참이라, 슬슬 가봐야겠어요."
그녀는 그 이후 어디에서 꺼낸지 모를 숄을 하나 걸쳤다. 가을이 깊어지는 만큼 조금씩 추워졌으니 준비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돌려달라고 한 적은 없어요. 갑자기 풀어서 주겠다니 뭐니 말한 것은 카미야 씨잖아요. 전 줬던 것을 다시 돌려받을 마음은 없으니 잘 가지세요."
그 와중에 장신구들을 모조리 숨겨버리는 것이 저것도 신의 힘인가 싶어 아키라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모르게 대단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일단 이번 일에 대해서는 함구를 하는 것이 좋겠지. 물론 아키라는 신의 규칙이라던가 그런 것을 알지 못했고 함부로 그녀가 신이라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면 천벌을 받게 된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자신이 멋대로 떠들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같은 반 동급생과 한번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그 정도로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뭐, 일단 온다는 것으로 알고 있을게요.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서도 어딘가에선 사랑이 꽃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르죠. 이런 날일수록 사람은 센치해지는 법이니까요."
별을 바라보다 조용히 마음을 털어놓는 일도 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이어지는 이들도 있는 법이었다. 그럼 자신은 어떠한가. 가만히 어깨를 으쓱하며 그는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그렇고 이젠 키라키라쨩이 아닌가요? 뭐, 지금 것도 나쁘진 않지만요."
적어도 키라키라쨩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먼저 내려가보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좋은 밤 보내라는 인사를 하며 그는 계단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할 일은 어느 정도 해야만 했다. 적어도 이런 학생회장도 있었구나. 정도의 평은 받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적당히 두리번거리다가 나중에 마지막으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괜히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어두운 복도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아직 순찰길은 끝나지 않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