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최대 12인이 제가 받을 수 있는 한계입니다. ※총 10개의 대사건이 모두 일어나면 완결됩니다. ※이 스레는 슬로우 스레로서, 매우 천천히 진행됩니다. 진행은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보통 오후 2시~4시 사이에 진행되며 길면 2시간 짧으면 1시간 반 진행되니 참고 바랍니다. ※진행 때에는 #을 달고 써주시면 됩니다. 진행레스가 좀 더 눈에 잘 띄기 위해서 색깔을 입히거나, 쉐도우를 넣는다거나 하는 행위도 모두 오케이입니다. 스레주가 지나치지 않을 수 있도록 이쁘게 꾸며주세요! ※유혈 묘사 등이 있사오니 주의 바랍니다. ※이 외에 미처 기억하지 못한 주의사항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레주도 무협 잘 모릅니다...부담가지지 말고 츄라이츄라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참치어장 상황극판의 규칙을 적용하며, 이에 기속됩니다.
오늘 마신 차에는 독이 없었다. 걷는 동안 누군가와 부딪히는 얕은수를 당하지도 않았고, 날아오는 암기도 없었다. 진법 또한 마찬가지다. 재하는 몸을 일으켰다. 시야는 눈물이 차오른 것 같이 뿌옇고, 꿈결에서 깨지 못하고 몽중과 현실을 헤매는 것처럼 어둡다. 눈을 여러 번 깜빡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비벼도 닦이는 기색 없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재하는 손을 뻗었다. 내공을 써 주변을 훑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손을 거두며 아래를 더듬는다.
차분하게 하나하나 만져본다. 가장 먼저 종이가 사부작대는 소리가 난다. 희미하게 흰 것과 검은 것이 보인다. 조금 밀어 치우자 책상의 목재 재질이 느껴진다. 색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느리다. 옅은 갈색으로 정성껏 칠하고 무늬를 새겼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쯤이면 먹도 근처에 있을 것이다. 손을 천천히 스치자 먹을 갈아놓은 벼루가 느껴진다. 검은색. 이번엔 색이 잘 들어온다. 아마 일을 하다 잠에 든 모양이다. 여전히 시야는 먼지 낀 듯 잘 보이지 않는다. 색을 받아들이는 것은 느리고, 세상은 뭉개져있다. 이대로 일생을 살게 된다면 차라리 영영 보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사람을 부를까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긴밀히 사람을 불러 보이지 않는다 일러 괜한 약점을 흘리는 것보다 백 배 낫다. 몸을 천천히 앞으로 기울이자 흉곽에 딱딱한 목재가 닿는다. 뺨이 보드라운 것에 닿는다. 책상에 깔아두는 비단인 것 같다. 먹 냄새가 근처에서 코를 찌르고 비강에 담기더니, 폐부를 찌른다. 길고 흰 머리카락이 등으로 우수수 쏟아진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재하는 이대로 시야가 영영 깜깜해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람을 살피고 돌봐야 하니 어떻게든 방법을 써서 앞을 보고 싶다. 오늘도 누군가 부정부패에 휘말려 많은 것을 잃었고, 누군가는 가장 밑바닥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재하는 눈을 감았다. 세상이 까맣다. 이게 되레 익숙한 광경인 것 같다. 이게 자신의 위치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은데 봐야만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어느새 알게 될 수밖에 없고, 무언가를 놓기엔 이미 너무 깊게 발을 담가 잘못 뺐다간 많은 질타를 받는다. 그 질타를 견디기엔 재하는 마땅한 편이 없다. 제일상마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많은 정적을 한 번에 상대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재하는 한때 온몸으로 원하던 안정감,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은 진작에 사라졌다 생각했다. 그리고 일순 눈을 홉뜬다.
맙소사, 설마 나는 그때를 그리워하는 건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그때의 기억이 아른아른 샘솟는다. 재하가 처음 본 세상은 이렇게 어두웠다. 다섯 척의 너비를 가진 세상은 내부가 아주 습했다. 조금만 말을 해도 소리는 울렸고, 위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쥐가 기어 다니고 벌레가 이따금씩 고개를 비추던 곳은 하잘것없는 미물에게서 고개를 떼면 굳게 쳐진 철망이 어디로도 나갈 수 없음을 굳건히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놓을 것조차 없는 세상은 재하의 첫 기억이자 잊을 수 없는 족쇄다.
"어림도 없는 소리."
재하는 자신이 복에 겨웠다 생각했다. 이젠 그 족쇄로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다시 그때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미치고 만 것이 틀림없다. 열이 오르면 머리를 쓸어주던 그 손도, 최소한의 언어를 알려주던 그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리던 자장가 소리도……. 이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재하는 당신이 이미 영영 떠나버렸음을 안다. 사람을 구제하던 육신은 목매단 고깃덩이가 되어 썩어 무른지 오래다.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자신의 망상이라고 한들 그 사실만큼은 망상이 아니다. 재하의 세상은 매달린 그림자 밑에서 자장가를 엉거주춤 옹알거리던 날로 돌아간다. 자장가를 잘 부른다는 목소리도 없다. 그 이전 무언가를 먹어 삶을 영위했으나 이젠 그것마저 없다. 허기가 졌고, 날은 지난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참을 만큼 참았다 생각했다. 이젠 떨어지던 물도 없다. 가뭄인 것 같다. 결국 구더기가 생기고 썩어 무른 고기에 눈이 갔다.
그만! 재하는 머리를 움켜쥐듯 하며 팔 틈 사이로 고개를 웅크렸다. 숨을 들이켜자 세상은 다시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를 가진 23살의 감찰국장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무것도 없다. 돌아가고 싶다 생각하면 안 된다. 홀로 남아 지금까지 알아온 것을 광인처럼 되뇌다 결국 세상과 작별할 텐데, 그때를 그리워할 리가 없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도를 모르겠다.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고, 복에 겨웠으니 지금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기엔 어딘가 단단히 어긋났다. 어느 순간부터 이것만 하고 끝내버려야지, 이것만 하고 놓아버려야지. 하는 생각을 몇 번이고 되뇌게 된다. 대체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놓을까 싶으면 새로운 일이 닥쳐와 무언가에 대한 미련을 만들고, 그렇다고 이 미련을 놓기엔 아둔한 머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놓아도 되는 것인지 구분할 줄도 모른다. 재하의 삶은 점점 회색이 되었고, 이내 굳혀졌다. 무얼 해도 즐겁지 않다. 겉으로 웃으며 같이 있는 사람도 그 모습을 보고 좋다고 마주 웃어주나 정작 속은 텅 비어있다.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씹는 것은 종잇장을 질겅거리는 느낌이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재하는 어제 홀로 술 다섯 병을 비우고 잠에 들었다. 일은 끝이 없다. 오늘 깬 장소는 책상이다. 잠만 자고 싶은 날이 있다. 그렇지만 타고난 기감이 예민해 깨게 된다. 힘들다고 토로해 봐야 하는 걸까? 그렇다기엔 이것이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늘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기준을 가늠할 수 없다. 하물며 정적을 더 늘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어떤 것이라도, 사소한 약점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무결해야 하고, 흠이 가서는 안 된다. 도구로 살게 된 이상 그게 당연하다. 제일상마전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족쇄요 그 화려하던 세상에서 꺼내주시고 목숨을 구해주신 분인데 조금의 흠집이라도 생기면 교좌에 오르실 때 불이익이 갈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지금도 멍청하고 둔해 빠졌으며, 모자란 존재인데 모시는 주군께 흠결이 생기면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절대 역하면 역했지 좋아질 리가 없다. 비록 귀태 소리 듣긴 하지만 인두겁만 반반하여 지금까지 명을 붙여 살아온 것 같은데.
"범무구,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있다."
여전히 세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색을 받아들이는 것은 검은 것이 가장 먼저다. 흐릿하게 인영이 보인다. 손을 뻗어 한 번 범무구가 맞는지 확인하듯 쓸어본다. 촉감에 의존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남은 팔에 고개를 가누고 눈을 내리 깐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차라리 네 주체적인 삶을 살거라 말이라도 들어본 삶이었다면 참 좋았을 테다. 그렇지만 재하는 마땅한 스승도, 연도 없었다. 이미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겠다 마음먹을 시기는 놓쳤고, 완전한 도구로 살기에는 계기가 부족했다. 이도 저도 아닌 삶에서 요괴에게 자문을 구하는 꼴이 우스웠다.
"범무구, 내 어찌하면 좋을까요." "천유.. 양월..?"
요괴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을 짓고 범무구의 인영이 보이는 곳을 쳐다봤으나 되레 지금껏 고민한 것이 한 번에 풀린 듯 머리가 시원해졌다. 재하는 입을 다문다. 침묵은 길지 않았고, 재하는 고개를 숙여 다시금 팔에 고개를 가눈다. 이번엔 긴 머리가 흩어지는 것도 신경쓰지 못해 머리 한 터럭이 먹에 젖어든다.
"…그렇지요, 맞는 말입니다."
고민이 깊어봤자 어차피 흐르는 대로 살다 보면 해결되거나, 죽을 텐데 무엇을 두려워하였던가. 삶은 진작 회색이었는데 이제 와서 무엇을 바꾸려 들까. 신앙이 이끄는 대로 살면 될 일이다. 늘 그렇듯 살면 되는 일이었다. 내 삶이 지금껏 의사대로 흐른 적이 있던가. 그중에서 그나마 나은 길을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라도 쥐어 살아왔지. 지금처럼만 살면 될 것이다. 이제 영영 보이지 않는다 해도, 혹은 보인다 해도. 재하의 눈이 점차 흐려졌다. 이내 시야는 암전 된다. 묘시卯時.
문을 두드리다 응답이 없자 조심히 문을 열고 고개만 내뺀 감찰어사 하나가 눈을 둥글게 뜬다. 작게 새근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쌓인 서류더미와 편지 사이에서 잠든 젊은 감찰국장의 모습이 보인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등을 굽어 타고 있으며, 멀리서도 내리감긴 새하얗고 풍성한 속눈썹의 곡선은 완벽함이 느껴진다. 그런 감찰국장의 등 뒤로 여명이 밝아와 햇빛이 쏟아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여명의 빛은 생명을 영위하듯 오르락내리락하는 흰머리를 따라 춤추듯 너울거리며 바림하듯 물들인다. 감찰어사는 소리 없이 뒷걸음질 치더니, 눈을 살포시 휘어 미소를 짓고 문을 닫는다.
목을 죄던 외로운 새벽이, 밝아오는 여명에 산산조각 나며 끔찍하게 내지르던 단말마는 그렇게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