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내일에 꼬리를 말고 다정함을 겨루는 거대한 공기청정기 이런 류의 게임은 부모가 동반해야 하는데 승산도 없이 내기에 뛰어들었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1. 본 스레는 놀기위해 오는 거다 공부는 필요 없다. 2. 일상 중 불편하게 느낄 것 같은 사항이 있다면 사전 조율한다. 3. 본인이 뭐가 아니라고 느껴지면 웹박으로 쏘거나 넌지시 그리고 확실하게 상대에게 전달한다.
여인이 이성을 놓자 둘 사이에는 더이상 거리낌이 없었다. 첫날의 밤은 둘 모두 비밀이,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런 의심도, 시간의 제약도 없었으니.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침대가 살짝 삐걱이는 소리와 두 사람이 뱉어낸 숨이 방 안을 열기로 가득 채웠다. 퓨즈가 끊기기 직전, 남성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긴 것은 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그와, 제 품에 안긴 여인의 야릇한 표정이었을까.
결국 퓨즈가 끊기고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방은 밤낮의 구분을 없애고, 시간의 감각도 없애버렸다. 퓨즈가 끊기기 전의 기억을 차츰차츰 더듬었다. 그래봤자 기억나는 건 열기 때문에 어지러워 흐려진 광경 뿐이었지만.
"벨라...."
그는 몸을 옆으로 틀어 제 곁에서 자고있을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외로움을 타는 성격도 아닌데, 왜 부른 건지. 혼자 깨어있기 외로워서는 아니었고, 그렇다 해서 여인을 부를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냥, 부르고 싶었으니까. 자신에게만 허락된 애칭을 부를 때마다 여인이 자신의 것이라는게 확실해지는 기분이여서, 계속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참 묘했다. 처음 여인과 밤을 새운 날도 이렇게 어두운 방 안이었다. 그 때는 여인의 공간이었고, 여인이 먼저 깨서 제 이름을 불러 깨웠는데,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으니까. 만난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았으나 그 날의 기억이 마치 먼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사이에 있던 일들이 시간의 밀도를 꽉 채우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해."
여인이 들었을지, 듣지 못 했을지는 상관 없었다. 아직 반쯤 잠에 취한 의식은 사고하기보단 무의식에 가깝게 행동했다. 그저 떠오르는 말을 막 뱉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꿔 말하면 그게 거짓은 절대 아니라는 것일까.
그는 여인의 뒷머리를 끌어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커보였던 여인이 이젠 작아진 채로 제 품에 안겨있는 모습이라니. 여인과 만난 시간이 꽤나 긴 것을 직접 체감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긴 시간동안 여인을 만난 것보다 이 관계를 시작한 이후가, 더 많은 기억을 남겼다는 사실일까.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여인을 바라본 채로 조용히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답레 쓰면서 재미있는 썰이 생각났는데 아스랑 제롬이가 막레쯤 문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아침이라 벌써 하루가 흘러갔구나... 하고 둘이 생각하는데, 아스가 잡화점으로 돌아갔을 때 포레가 이틀동안 연락도 없이 외박했냐고 잔소리 하는 거 듣고 당황하는 거... 보고싶어졌어요(?)
"정말이야." 그녀는 확답했다.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많은 걸 줬는데, 내가 아직도 확언하지 못하면 네가 섭섭하지 않겠어." 당신이 갈망하여 내민 약속을 그녀는 기꺼이 수락했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당신의 삶과 섞기로 맹세했다. 당신의 현재가, 미래가, 당신이 채우고자 하는 무언가가, 당신에게 부족했던 무언가가... 당신이 찾아헤매던 무언가가 되기로 했다. 그 행선지가 지옥일지언정, 당신이 그것을 낙원으로 꾸미고자 한다면 기꺼이 함께하기로 했다. "맹세해."
부드럽게 뺨을 스치며 턱으로 떨어지는 당신의 손가락 끝에 파르르 하고 미세한 떨림이 와닿는다. 당신의 뺨을 거머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당신의 입가로 스르르 옮겨간다. 너무 진하지도 않고 연연하게 발간 그 색깔이, 이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어떤 붉은색보다도 매혹적이었기에, 페로사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당신의 입술 사이로 밀어넣었다. 더 갖고 싶다는 듯이. 더 깊숙이 자신을 남겨놓고 싶다는 듯이. 손가락 끝에서 술 냄새와 초콜릿 냄새- 그리고 그 너머의 그녀의 살냄새가 흐릿하게 입안으로 뻗쳐온다.
"내가 널 바라니까 너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네 스스로 날 욕망했으면 좋겠어." 마음은 순진할지 몰랐으나, 표현은 그녀다웠다. 지금껏 욕망을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마음 깊이 원해본 적이 없었을 뿐, 그녀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지극히 탐욕스러웠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몇 차례 당신의 입안을 느긋이 매만져보고는, 엄지손가락을 조금 비틀어 당신의 입을 벌린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널 바라는지..." 그리고 그녀는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어왔다. 이번에는 초콜릿도 없었고, 술도 없었다. 손가락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오늘 밤의 아찔한 향기가 어떤 여과도 불순믈도 없이 당신의 입 안으로 왈칵 쏟아져들어온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이 섞인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그것은 떨어져나간다. 당신의 애를 태우려고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금 여기서 맹세한다고 한 마디 하고 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아."
페로사는 당신의 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당신의 손목을 쥐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바 위에 올라앉아볼래?" 그녀의 말대로 발돋움을 해서 바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걸터앉으면- 다시 말해 당신이 허락한다면, 그녀의 팔이 당신을 끌어안는 것을 느낄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너와 함께하면서 충분히 표현해줄게.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 네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언제나처럼, 마치 동화책 속의 왕자님이 공주님을 소중히 들어올려 안는 것과 같이 그녀의 팔은 당신을 가볍게도 번쩍 들어올려 품 안에 소중히 들어안을 것이다. 동화라기엔 조금 이상한 동화였다. 때로는 잔혹했고, 때로는 어딘가가 일그러져 있었다. 셰바 사람에게 걸맞는 동화였다. "네 삶이 내 이전과 내 이후로 나뉘도록."
그저 서로에게 얽힐 뿐인 시간 동안. 여인은 한시도 제롬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도 애타는지. 조금만 멀어져도 손을 뻗었고 그에 응해주지 않으면 더 자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었겠지. 그래도 의식이 끊기기 전에는 제롬의 손을 붙잡았고 잠든 뒤에도 손만은 놓치지 않았다.
격렬히 보낸 시간 때문이었을까. 혹은 근래 바쁜 나날을 보내서였을까. 제롬이 먼저 눈을 뜨고도 한동안 여인은 잠에서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롬이 옆에서 몸을 움직여도. 머리를 쓰다듬거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건드려도. 가볍게 닫힌 듯 보이는 눈커풀은 그대로 굳은 것 마냥 꼼짝도 않았다. 대신 살짝 다물린 입술이 움직여 희미한 중얼거림, 잠꼬대를 흘렸다.
"ㅇ..왜... 네ㄱ... 여기..."
잠꼬대가 다 그렇듯 온전히 들리는 건 그 뿐이었다. 무어라고 더 하는 것 같아도 입술만 달싹거리고 소리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의 눈커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눈을 뜬 여인은 제롬이 깨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잠에 취한 눈으로 허공을 잠시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제롬의 품에 기대었다. 천천히 내뱉는 숨결이 제롬의 맨살을 간지럽히고. 메마른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아, 제제... 다행이야..."
여인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다행이라고. 다소 뜬금없는 그 말은 앞선 잠꼬대와 뭔가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여인은 단지 그 말만을 중얼거리고 제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파고들었대도 팔을 걸치듯 안고서 너른 가슴팍에 뺨을 대고 살살 부비는 것에 그쳤지만. 잠시 뒤에 맞댄 다리를 움직여 조금 더 가까이 붙으려는 행동은 살짝 자극적이었을 듯 싶었다. 여인도 그걸 아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제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추 잠이 깨었는지 작게 말도 했다.
"나 목 말라.. 소리, 너무 냈나 봐. 목 쉴 거 같아..."
그 말대로 여인의 목소리는 많이 메말라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헐떡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인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제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물 마시고 싶다고 징징대며 제롬에게 더 달라붙었다.
>>36 당 공급... 성공적... 페로사: 새삼 부끄러워하긴. (얼굴가리고 있는 에만 어깨 끌어안고 당겨서 품에 기대어누임)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어도, 당신이 도망칠 곳이라곤 그녀의 품뿐이다.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당신을 안아주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바디워시의 라임향이 남아있는 품이다.)
여인이 아무 반응 없이 잠들었다면, 제롬은 그냥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아니, 거의 직전까지는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여인의 희미한 목소리가 그것을 막았다.
"...무슨 꿈을 꾸고있는거야, 벨라."
남성의 목소리가 여인의 귓가를 속삭였지만 여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 잠꼬대를 한 것이 착각이라는 것처럼 입매만 달싹이자 그는 말 못할 답답함과 조금함을 느꼈을까. 아직도, 여인은 비밀이 많았다. 그 비밀이 언젠가 제 여인을 빼앗가갈까봐 불안해했다. 벨라가 제게 언젠가,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기를.
"난 여기 있어. 앞으로도, 네 옆자리에 있을 거야."
다행이라는 중얼거림. 무엇이 다행이라는 것일까. "벨ㄹ... 아니, 아니야." 여인의 혼잣말에 대해 조금이나마 물어보려던 그는 이내 그만두었다. 제 품에 파고드는 아스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아까의 그 순수한 여인의 모습에, 지금처럼 애교와 어리광이 많은 모습. 제 가슴팍에 뺨을 대고 살살 부비면 간지럽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지만, 곧 다리를 움직여 조금 더 붙어있으려고 하자 제롬은 여인의 평가를 수정했다. 다른 모습이 아니다. 같은 사람 안에, 다양한 모습이 있는 거지.
"시간도 꽤나 지난 것 같으니 당연한가... 여기 누워있을래? 아니면, 내가 옮겨줄까?"
물 한 모금 못 마신지 꽤나 오래 되었을지도 모른다. 목이 마를 이유는 짐작되는게 몇가지 더 있었지만, 굳이 꺼내진 않았고. 대신 그는 더 달라붙으며 제 품에 얼굴을 묻은 여인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여인이 누워있겠다 했으면 저 혼자 여인을 두고 일어나 가볍게 셔츠만 걸치고 주방으로 가더니, 물을 컵에 담아 돌아와서 여인에게 건네주었을 것이다. 옮겨달라 했으면 여인을 이불채로 품에 안아들고 일어나, 주방까지 함께 이동하고는 냉장고의 물통을 꺼내 건네려고 했겠지.
불안함은 당연한 것이다. 확언을 듣고자 하였고 설령 답하지 못한들 그 불안함은 치워두고 사랑으로 덮으려 했다. 절박했다. 언젠가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진다고 해도, 그 순간의 이전만큼은 곁에 있어주길 바랐기에. 확언을 들었을 때 지었던 미소가 벅차오른다. 당신의 존재가 천천히 스며들고 올라올 것이다. 이미 섞였지만 조금 더 농밀하게 채울 것이다. 혈관을 타고 흐르며 피, 살, 뼈가 될 것이다. 부족했던 것을 채우고 이 지옥을 낙원으로 꾸밀 것이다. 나와 당신이 부족하지 않게끔.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욕망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이 이 미래에 대해 잠깐의 불안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뺨에 얹힌 손이 입가를 스친다. 고작 접문으로 그새 발갛고 도톰해진 입술을 매만지는 손길에도 가만히 있던 미카엘의 눈이 홉뜬다. 입술 사이로 엄지가 들어온다. 입안은 뜨겁다. 흐릿한 살 내음이 말캉한 혀에 와닿는다.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눈을 가볍게 내리깔았다 들어 올린다.
"흐으.."
입안을 매만지는 손길에 가느다란 교성이 새어 나온다. 휘젓는 느낌에 혀가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어도 가느다란 숨소리만 역력하다. 입을 벌렸을 때 열감에 달아오른 뺨과 눈가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 맺혀있다. 그리고 접문. 선명하고 아찔한 밤이 찾아왔다. 접문은 길지 않고 정신이 아득할까 싶을 때 떨어졌다. 달뜬 숨을 뱉으며 안절부절한 눈길로 페로사를 응시했다. 그리고 인내하듯 숨을 몇 번 가다듬다, 손길에 부드럽게 이끌려 바 위로 걸터앉았다.
"약속했어. 맹세한 거야.."
온기에 몸을 맡긴다. 소중히 안기자 품에 고개를 파묻으며 느릿하게 뺨을 비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가를 덮어 가렸다. 어린 날 소망하던 것은 동화 속의 이야기였다. 지금 이 도시에서 그런 것은 당치 않았다고 몇 번이고 되내었으나 이젠 그 당사자가 되어버렸다. 당치 않던 것은 없다. 심장에 얼음이 박히는 소년, 오븐 속에서 불타는 마녀와 같이 일그러지고 잔혹하였으나 그것이 셰바 자체지 않은가. 당신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수줍게 속삭였다. "좋아해." 그리고 눈을 감았다.
제롬이 묻지 않았기에 잠꼬대에 관한 것도 그 후의 중얼거림도 그저 흘러가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묻는다고 한들 여인이 곧이 곧대로 답해주었을까. 제롬을 향한 여인의 마음과 여인이 품은 계획은 별개의 것이었으니. 물었어도 적당한 말로 대답했을 터였다. 아무 것도 아닌 듯.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여인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기세등등하게 상대를 농락하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한 명의 여자로서 제롬의 곁에 누워있었다. 비록 아직 감춘 것은 많았으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은 확실했다. 누가 보면 나잇값 못 한다고 한소리 하겠지만. 연인 앞에 나이가 다 무얼까. 여인은 속삭여오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옮겨줘. 떨어지기 싫어..."
여인의 대답은 곧 제롬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불에 둘러싸인 채로 들려지자 자연스럽게 팔로 제롬의 목을 감싸안았다. 그대로 어깨에 기대어 같이 주방까지 가서, 냉장고에서 꺼내주는 물통을 여인이 받아들었다. 물통을 열어 입구에 입이 닿지 않게 마시다보니 옆으로 조금씩 흘러내렸다. 턱을 타고 내려간 물이 옴폭한 쇄골에 몇 방울 고였다가 다시 또르르 굴러 더 아래로 내려갔다. 이불로 대강 가려놓은 그 아래로. 차가운 물이 흐르는 감각에 움찔거리는 것이 아마 고스란히 전해졌겠지.
그 상태로 조금 더 물을 마신 여인이 겨우 갈증이 풀렸는지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살겠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여인은 마실만큼 마신 물통을 닫으려다가 문득, 제롬도 목이 마를 거란 생각에 닫으려던 걸 멈추고 제롬을 보았다.
"너도 마셔야지. 같이 땀 흘렸는데."
키득. 웃은 여인이 한 행동은 물통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물통을 기울여 여인의 입에 물을 머금고서 고개를 들어 제롬과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물을 넘겨주었다. 한 번으론 부족할테니 두 번, 세 번. 넘겨줄 때마다 가볍게 입맞춤만 할 뿐이었다. 그저 물을 주는게 목적인 듯이.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더 마실래?"
더 마시겠다고 하면 더 해주고. 아니라면 물통을 넘겨주고 다시 제롬의 어깨에 기대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을 것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어지지 않은 질문의 대답은 말이 아닌 움직임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은 당신의 입 안을 질척하게 매만졌다. 당신의 혀가 향과 열을 참지 못하고 움찔거릴 때에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 순간에서야 당신은 그녀의 그 조그만 떨림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더 솔직하게, 더 본능적으로 당신을 갈구한다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눌러참고 있는 것이다. 입을 맞추어온 것은 손가락으로 만족하지 못했음일까. 체온이 올라가는 것 같다. 공기가 뭉근히 달아오른다. 당신의 체온이 오른 것인지 그녀의 체온이 오른 것인지 모르겠다.
"맹세할게." 탄탄한 팔이 부드럽게 당신을 끌어 품 안에 뉘인다. 탄탄하면서도, 근육의 굴곡 하나까지 어떻게 자리잡으면 편안하게 안아줄 수 있는지 아는 것처럼 당신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같이 당신을 편안하게 받아안는 품이다. 당신이 너무 많이 남아서, 이젠 당신을 위해서 준비되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은 그런 품이. 옅은 시트러스 냄새와 술 냄새들, 그리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분 냄새와 살냄새. 처음 접해보는 것임에도 당신이 그리던 것과 한없이 닮아 있는 낯선 향수가 그 품 안에 가득했다.
"네게 주어진 모든 이야기들 중에 나를 골라줘서 고마워... 좋아해... 사랑해." 참지 못한 감정이 열에 달뜬 말이 되어 가슴을 넘어 입 밖으로 흘러넘친다. 페로사가 입을 벌린다. 뾰죽한 이빨들. 입을 맞추려는 걸까, 하지만 당신의 아랫입술 바로 아래의 오목한 곳에 와닿은 것은 그녀의 도톰한 입술의 감촉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뜨겁고 말랑하며 축축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신의 아랫입술을 맛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의 온 입술을 훑고는 뺨을 거슬러올라 눈가까지 탐욕스레 핥아내며 그녀의 체취가 가득한 흔적을 마치 낙인이라도 찍는 것처럼 남기고 나서야 떨어져나갔다. 욕망에 한껏 사로잡혀 버린 감정의 표출이었다. 그녀가 후우, 하고 고르는 열띤 숨결이 느껴진다. 얼굴에 온통 열꽃이 핀 그녀의 얼굴에는 당신을 향한 탐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여기서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버리면, 저번에도 말했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뒷정리를 다 해둘 자신이 없으니까... 좀더 조용한 데로 갈까."
페로사는 찬장 옆에 나 있는 Staff only라고 적혀 있는 문고리를 달칵 열고는, 당신을 안은 채로 그리로 들어갔다. 항상 따뜻한 바와는 달리 좀더 을씨년스러운, 새파란 형광등이 걸려있는 직원용 복도는 조명도 공기도 차가웠지만, 그녀의 품에 안겨있으면 최소한 공기가 차가운 건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복도에 난 몇 개의 문들 중 그녀가 문 하나를 골라서 열고 들어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문 너머는 비어있는 직원 휴게실이었다. 불이 꺼져있었지만, 반투명 유리 안으로 어슴푸레 엘리시움 지구의 유흥가의 불빛이 비쳐들어오는 방 안의 모습을 대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를 작은 냉장고와 멀쩡해보이는 벽걸이 TV, 테이블... 그리고 개인실에서 본 것과 똑같은 1인용 소파 두 개와, 커다랗고 널찍해 침대 대용으로 써도 좋을 것 같은 긴 소파에 널부러진 담요와 쿠션 몇 개가 얹혀 있었다.
입구를 뒤로하고 그녀가 문을 발로 밀어 툭 닫고는 팔꿈치로 버튼을 눌러 문을 잠가버리자, 복도를 타고 선명하게 전해져오던 비스트로의 소음이 차단된다. 엘리시움 지구의 잡음은 멀리서 웅얼거리는 듯한 백색 소음으로 변하고, 아무런 냄새도 없던 공간에는 당신과 그녀의 온기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페로사는 당신을 부드럽게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였다. 당신의 어깨를 거머쥐고는 당신을 내려다보는 푸르른 열띤 눈이, 어슴푸레한 방 한가운데서도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달뜬 숨을 몰아쉬던 그녀의 손이 풀어헤치기 시작한 건 당신의 단추였을까, 자신의 단추였을까.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녀의 입술이 당신을 와락 덮쳐왔다.
>>71 ( ) 이제 말하지만 미안해.. 검색하자마자 그런 게 나올 줄이야.. (얼감) 페로사? 일단 자고 있던 에만을 자기 품에 끌어안아 뉘어주고, 그래도 일어나거나 표정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나직이 불러서 깨우려나. 에만이 눈을 뜨면 에만에게 입을 맞추는 페로사를 볼 수 있을 거야.
>>73 (페댕댕 귀여워) 난 괜찮아~😊 검색어의 이면인 탓이지 페로사주가 그렇게 만든게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말라구.(꼬옥) 상냥해.....역시 페로사는 천사..😊 악몽 같은 경우에는 품에 안는다면 그나마 진정하겠지만 깨고나서 입 맞춰주면 꽉 달라붙어서 잘 때까지 품에서 절대 안 떨어지려 들 거야. 0.<! 잠들어도 놓아주지 않겠닷!(찰싹 달라붙음)
>>75-76 느긋하게 써주고, 피곤하다 싶으면 자고 일어나서 혐생 끝나고 시간날 때 써주면 돼. 에만주 수면시간이 늘 모자란 것 같아서 걱정이야.. 88 찰싹 달라붙는다고 해도 페로사는 개의치 않을 거야.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 자신이 에만에게 의지가 되고 있다는 게 기쁘고 에만이 귀여운데다 조그만 몸에서 나오는 체온이 따뜻해서, 페로사도 기꺼이 같이 다시 잠들어줄 것 같은걸. 미리 말해두자면 페로사가 에만에게 했을 때 불쾌하지 않을 만한 일이라면 에만이 페로사에게 해도 불쾌하지 않을 테니 편하게 서술해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제 연인을 보며, 제롬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고민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와는 별개로, 여인이 자신을 상당히 많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을까. 제롬은 여인이 자신에게만이라도 여인의 연약한 모습을 쉽게 내보일 수 있기를 바랬다. 이 비탄의 도시는 잔혹했으니까. 누군가에게 연약한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였다간, 그대로 물어뜯기는 도시였으니까. 그런 도시에서 자신이 여인의 쉼터가 될 수 있기를 바랬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떨어지기 싫다는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정말 여인의 연약한 모습이 맞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남성을 자극하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여인의 모습이란.
"벨라는 의외로 어리광쟁이였네."
여인을 향해 놀리듯 말하면서도 기뻐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남성은 그녀를 들고가 물통을 건네주는 일까지 마치고는, 여인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을 대지 않으려 물병을 들고 마시는 것 때문에 물방울이 턱에서, 몸으로 흘러내려 살짝 가려진 곳으로 흘러간다. 움찔거리는 것까지, 어쩜 물을 마실 뿐인데도 그렇게 야릇한 분위기를 내비치는지. 어쩌면 그런 분위기 자체가,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물 마시는 모습에 집중하고 있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도 물 마셔야지, 라는 말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없어서, 먹여줄래?"
양 손은 이미 여인을 들고 있었다. 물통을 들 손이 없었으니, 여인이 대신 먹여주기를 기다렸을까. 물통을 넘겨주는 것도, 물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 여인이 제 입에 물을 머금었을 때는 뭘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입을 맞추자 그제서야 눈치를 챘지. 벨라, 넌 정말...
입을 맞출 때마다 물이 조금씩 넘어온다. 한 번, 두 번, 입맞춤의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입가가 젖어들어가고, 입을 맞출 때 흘러나온 물이 두 사람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단지 물을 줄 뿐인 행위다. 물을 줄 뿐인 행위였는데... 입맞춤을 할 때마다 야릇한 기분이 들어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 미치겠네. 씨발..."
목을 축이고 난 후 가장 먼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욕설이었다. 화가 나거나, 누군가를 비꼬기 위한 욕설이 아닌, 의미 그대로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더 마실 거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한번 내젓는다.
"이걸로 충분해."
무슨 의미일까. 이정도면 충분히 마셨다는 뜻? 여인이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기 시작하자 남성 역시 물병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여인의 쇄골로 입가를 가져간다. 살짝 고여있던 물 위로 남성의 입술이 닿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살갗 위에 난 물길을 따라 남성의 입술이 스치듯 올라갔다. 목덜미, 목선, 턱끝까지 이어진 움직임은 여인의 입술에 가볍게 쪽, 하고 한번 더 키스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계속 그렇게 장난치면, 내일 아침은 일어나지도 못 하게 만들 거야."
"그러니 장난은 그만." 여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속삭이는 제롬이었다. 여인의 장난을 다 받아주다가는, 자신의 몸이 못 버티든, 여인의 몸이 못 버티든, 둘 중 하나가 될게 뻔했으니까.
제롬은 여인을 보고 의외로 어리광쟁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저 알지 못 했을 뿐일 지도 몰랐다. 초면에도 친근하게 굴고 짖궂긴 해도, 거리가 필요할 땐 필요한 만큼 거리를 두어주는 그 행동들. 그저 변덕으로 보였던 그것들은 사실 어리광의 발로 중 한 가닥이었을 지도 몰랐다.
본디 마음이란 건 얄팍한 한 겹만 드러내도 속을 비추는 경우가 대다수이니.
손이 없어서 먹여달란 제롬의 요구에 여인이 택한 방법은 어떤 의미로 탁월했다. 거듭되는 수분 공급에 입맞춤은 질척해지고. 닿고 떨어질 때마다 물기 어린 소리가 야하게 울렸다. 제롬의 갈증을 만족시켰을 때는 여인도 제롬도 턱과 가슴팍까지 축축히 젖어 번들거렸다. 그런 모습으로 짧게 욕설을 흘리는 제롬은 어쩐지 조금 위험하게 보여서. 그래서 조금은 서둘러 제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물이 충분하다고 말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곧 혀 닿는 감촉이 쇄골부터 올라오자 몸을 주체하지 못 하고 부들부들 떨며 그에 걸맞는 소리를 제롬의 귓가 가까이에 내버렸지만.
"...장난은 제제가 치고 있잖아. 정말. 나는 그냥 물을 줬을 뿐인 걸. 물 주는 김에 키스하고 싶었던 것 뿐인 걸. 나는 잘못 없네요."
흥. 하고. 단호한 제롬의 시선을 홱 피해버리는 여인이었으나. 제롬에게 안겨 있었으니 피히나 마나 였다. 그게 약간 얄미운데 또 싫진 않아서. 고개는 반대로 돌렸어도 제롬의 어깨와 목을 두른 팔엔 조금 힘을 주어 몸을 더 꼬옥 붙였다. 그 탓에 물 묻은 곳이 맞닿아 미끌거리자 몸을 좀 정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하게 말이다.
"제제. 있잖아. 나 정말 장난 아닌 할 말이 있는데."
반대로 돌렸던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제롬을 바라보는 보랏빛 시선이 심상치 않음을 제롬은 느꼈을까. 반쯤 돌린 얼굴이 방금 전 토라졌던 이가 맞나 싶게 베시시 웃고 있는 표정도 왜인지 묘하게 느껴질 쯤. 귓가에 속삭여오는 말이 있었다.
"나 씻고 싶으니까, 제제가 씻겨 달라고 하면... 안 돼?"
쿡쿡. 웃는 소리가 말 뒤에 따라붙었으니 그 얼굴을 굳이 더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이었을지 눈 앞에 선했을 것이었다.
욕망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바라기 때문에 무한히 발전하며 탐하기에 쇠락한다. 우리는 바라고 또 바랄 것이다. 그 길이 요란한 믿음일지언정. 공기가 뭉근하게 달아오른다. 열감 있는 몸 때문인지 귀가 먹먹하다. 총성을 가까이서 들은 것처럼 먹먹한 귀 사이로 안겼을 적, 편안한 품에 기대자 열기가 천천히 식어간다. 화끈거리며 먹먹하던 귀가 일순 편해졌다. 페로사라는 사람 자체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옅은 시트러스 내음, 술 내음, 그리고 희미한 분내와 살 내음. 그 희미한 향이 그리운 향수였다. 모성을 느낄 수는 없으나 더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지는 그런 것.
"사랑해. 응."
빈말이 아닌 감정으로 꽉 차있는 말이었다. 달뜬 단어를 듣고 뱉은 답을 뒤로 입을 맞출까 싶었건만, 낙인을 찍듯 입술부터 뺨, 눈가를 핥자 눈을 지긋이 내리 감는다. 간지러운지, 아니면 낯선지 짧은 응석을 부렸다. "으응, 간지러워.." 하고는 부스스 웃는다. 안겼던 품에서 팔을 뻗어 페로사의 뺨 위에 손을 얹어본다. 욕망을 잘 알겠다는 듯 엄지와 검지로 뺨의 말랑한 살을 한 번 스치듯 잡아보고 잡았던 엄지로 슥 쓸어낸다. 열띤 숨결 뒤로 탐욕 가득한 눈동자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바스러질듯한 한숨을 쉬었다. 달뜬 숨이었다. 이전, 애태우듯 떼던 입술에 안절부절 하지 못하던 그 눈망울 그대로였다. 열감에 의해 물기 어린 눈동자와 상기된 뺨도.
찬장 옆 문고리를 열자 따뜻하던 공기와 달리 조금 선득한 공기가 뺨을 스친다. 새파란 형광등과 어두운 기조에 몸 떨법도 하지만 품에 안기고 파고들었기에 별다른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새하얀 눈망울로 주변을 볼 겨를도 없었다. 그나마 본 것이 있다면 다른 방에 들어갔을 때겠다. 직원 휴게실인지 소파와 긴 소파가 놓여있다. 사람 없어 온기 하나 없음에도 유흥가의 마젠타 빛, 온통 붉고 푸른 네온사인이 사람 대신 난색 머금고 방 안을 비춘다. 문이 닫히자 비스트로의 소음이 먹먹해진다. 일상적인 소음도, 도시 밖의 소음도 모두 광인의 속삭이는 중얼거림처럼 희미해진다. 소파에 비스듬히 뉠 적, 새하얀 눈동자가 가는 호선을 그었다. 새하얀 눈동자만치 새하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었다. 페로사의 목덜미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올라선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와락 덮쳐온 입술에 가쁜 숨을 내쉬고 다리를 천천히 굽혀 올렸다. 치맛자락이 허벅지를 타고 주름이 진다. 밤은 길고, 네온사인만이 숨죽여 둘을 비췄다. 시간이 흐르고 엄지와 검지로도 잡을 수 있을 만치 가는 손목 있는 그 팔을 쭉 뻗어 휘적이다 겨우내 등을 끌어안고는 정신을 잃었다. 점멸하는 의식을 뒤로 당신의 얼굴을 보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여기부터는 상황 변화를 위해 썼어! 0.<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부스스 눈을 뜬 미카엘은 자연스럽게 낯선 천장을 마주하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다 하다 이젠 남의 직장에서! 묘한 수치심과 만족감이 한꺼번에 치고 들었다. 셰바에서 느끼기 가장 어렵다는 배덕감을 이렇게 느낄 줄이야. 자신이 아무리 정상인이 아니라도 셰바 상위권의 인성은 아니라는 소리겠다. 고개를 돌렸을 때 당신이 깨어있었을까, 아니면 잠들어있을까, 어느 쪽이든 손가락 틈새로 원망스러운 시선을 한 번 찌릿 보냈을 것이다. 다리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최고의 발렌타인 선물이다, 그렇고말고. 앞으로도 이렇게 선물을 하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생각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바깥의 소음만치 희미한 소리였다.
여인의 어리광이 평소에도 드러났는지, 아니면 지금의 제롬에게만 보여주는 건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순한 요구에도 아주 탁월한 선택을 한 여인의 행동 때문에, 제롬의 머릿속은 지금 여인이 바니걸 복장으로 그를 유혹했을 때보다 더욱 혼란스러웠으니까.
물기로 축축하게 젖은 여인과 남성의 몸은 서로에게 자극적이게 보였겠지. 여인은 제 모습을 보며 조용히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지만 불행히도 남성에게는 시야를 가릴 것이 없었다. 아니, 불행인가? 오히려 그게 행운에 가까웠을지도?
그에 걸맞는 소리를 내는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안고 있던 여인의 볼에 부빗거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 여인은 의도하지 않아도 남성의 이성을 휘저었다. 의도했다면 더더욱. 이런 여성을 어떻게 당해내야 할런지. 타고난 요망함을 가진 여인이 장난은 제가 치고 있다며 발뺌하자 제롬은 헛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잘못 없다니, 그런 야한 생각을 떠올린게 어떻게 잘못이 아닐까.
"그렇게 말하는 벨라야말로 나를 계속 유혹하잖아. 벨라 잘못이지. 안 그래?"
토라진 척인지 토라진 건지, 제게서 고개를 홱 돌리는 여인의 모습도 귀여울 뿐이었다. 계속 토라진 모습도 보고싶고, 살살 긁어서 화낸 모습도 보고싶고, 아니면 아이 취급하며 달래주고 싶기도 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밀착되며 찰박거리는 소리는 무척이나 야릇했을까. 남성은 그 소리를 듣고는 숨을 들이마시더니, 입가를 여인의 목덜미 가까이로 가져가며 열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의 향취가 코를 자극하며 숨이 여인을 간지럽혔을까. 이 여인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장난 아닌 말? 그는 고개를 다시 돌린 여인의 말에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고는 눈을 마주쳤다. 심상치 않은 보랏빛 시선, 베시시 웃는 표정. 분명 자신을 곤란하게 할 표정이다. 그는 무슨 말을 할지 긴장하다가, 여인의 말이 들리자,
"...벨라, 나 미치는 꼴 보고싶어?."
라며 입을 다물고 작게 신음만을 흘렸다. 누가 보면 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겠지만 이건 다른 의미의 말이였다. 진짜로, 그랬다간 미칠지도 모른다. 아스타로테라는 여인에게 미쳐 자제력을 상실할지도 모르는데, 여인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쿡쿡 웃는 모습은 분명, 자신을 향한 장난기로 가득 차있는게 분명했다.
그는 여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바로 욕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인의 몸 위에 둘러진 거추적스러운 이불은 어느샌가 흘러내렸을 것이다. 그만큼 성큼성큼, 조심하지 않고 발걸음을 내딛었으니까. 얼마 가지 않아 남성은 안아든 여성을 욕실 앞에 내려주었다. 저와 욕실 문 사이에 서있을 여인의 뒷머리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여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미치는 꼴 보고싶으면, 데려가."
"내가 벨라에게 뭔 짓을 해도, 난 몰라." 라면서 벨라에게 선택권을 맡겼다. 네가 먼저 장난쳤으니, 네가 책임을 져 벨라. 그는 제 팔목을 여인에게 쥐여주고는, 조용히 여인의 말을 기다렸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레를 닫으려고 한다 스레를 계속해서 지켜봤는데 현재 연플 오너들 외엔 잡담도 일상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데다 참여자들은 거의 접속도 되지 않고 결국은 분위기적으로도 침체기라고 생각한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나의 스레가 이렇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스레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능력도 의욕도 내게 없다는 걸 느꼈어 끙끙 거리면서 고민만하느니 그냥 여기서 끝내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되네. 고생 많았어. 확실히 화력이 떨어지긴 했고, 캡틴도 고민하느라 속앓이 많이 했겠지. 그래도 캡틴을 원망하지는 않으니까 부디 익명에서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 그동안 고마웠어. 무통보로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나마 얘기해줘서 더 고맙고. 현생 힘든 것 같던데 잘 풀리길 바라, 부정형 촉수 캡틴.😉
그리고 페로사주는 잠깐 이 글을 확인하면 시간 좀 내주길 바라. 1:1로 이어갈 건지, 아니면 여기서 끝내고 익명으로 언젠가 만나길 바랄지 조율해야 할 것 같거든.
음... 사실은, 저도 어느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라... 네... 최근 상판 인구도 전체적으로 줄어든 감도 있고, 아무래도 화력이 떨어질 시기같으니까요.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캡틴. 무라사키랑 또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고, 다른 떡밥도 궁금했는데 그것도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캡틴이 있어서 즐거웠고 캡틴이 이 어장을 세워주셔서 그간 즐겁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장 관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도... 아스주와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1:1로 이어갈지, 아니면 여기에서 제롬아스도 엔딩을 낼지. 아스주가 보시면 앵커 달아주시길 바래요.
여러 가지로 추진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지만.. 음, 이렇게 되는구나. 멋진 설정의 스레에서 마음껏 이야기를 써줄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워. 좀더 좋은 이야기로 스레를 채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혐생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스레를 유지해주느라 고생했어. 만나서 반가웠고, 애써줘서 고마워. 다음번에는 또다시 다른 이름으로, 더 좋은 이야기를 갖고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이후에도 어려운 일이 모두 술술 풀리고, 줄거운 일들만이 캡틴에게 있기를 빌게.
그래... 고민하고 판단하느라 고생했어. 캡틴. 힘든 결정 내려서 이렇게 얘기해준 것도 정말 고마워. 두달 남짓한 기간 동안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 현생도 상판도 앞으로는 더 순조롭길.
>>133 내 개인적으로는 더 이어가고 싶긴 해. 해보고 싶은 에유도 많았고. 지금의 서사도 푸는 도중이니까. 제롬이 서사도 궁금하고. 제롬주 생각은 어때?
그리고 에만주랑 페로사주에게도 제안하고 싶은게 있는데. 이건 둘의 의견이 조율된 후에 고려해줘. 만약 일댈로 넘어가게 된다면 따로 나가지 않고 한 어장으로 같이 옮겨가면 어때. 1:1이 아니라 2:2일려나. 넷이 얽힌 서사도 있고 넷이면 둘보다 다양한 썰들을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146 만약 힘들다 싶으면 얘기하지 무통잠 할 사람은 아니니 걱정 말아. 느긋한 템포나, 작은 설정 정리같은 걸 확실하게 하고 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답레가 늦는다 해도 이틀 내지 사흘정도 걸릴 수 있다는 점..🤕 감안해준다면 고맙겠지만 정말 슬로우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 부분이 맞지 않는다면 천천히 조율할까 해.
그리고 한가지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이건 1:1 어장 파고나서 대화할까 해. 세계관선 변경이라든지, 그런걸 바란다면 언제든지 말해주고. 그런 부분도 조율하고 싶거든.
>>149 템포를 느긋하게 가져가는 것도, 설정 정리를 확실히 하는 것도 좋아. 답레가 이틀이나 사흘 정도 걸려도 괜찮아. 다만 나는 그만큼이나 자잘하게 잡담하는 것이라던가, 잡담 중에 나온 일상 모먼트를 소재로 대본식으로 짧게 굴리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라 그걸 에만주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응, 그건 어장을 파고 나서 이야기하자. 세계관선 변경이라면 >>148에 따른 본 세계관 전환을 이야기하는 걸까, 아니면 AU를 이야기하는 걸까? 어떤 쪽이든 좋아.
>>147 늦어서 미안.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할거 같아서 먹고 오느라. 제롬주도 동의한다면 1:1로 넘어가자. 그리고 나온 얘기들을 보니 우리도 세계관을 바꿀 필요가 있겠네. 일단 1:1로 넘어가는게 먼저일 듯 하니. 음. 어장 제목은 뭐로 할까. 혹시 생각나는거 있어?
>>154 괜찮아요 저도 다른 거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볼쪽) 세계관은 1:1어장을 세우고 이야기해봐요. 제목이라... 전에 아스주가 제게 추천해주셨던 노래 제목인 love or lust? 라던가요? 사실 제가 네이밍센스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음음...(흐릿) 아스주는 원하시는 제목 있으신가요?
에구구, 결국엔 닫기로 했구나... 확실히 요즘들어선 다들 활동빈도도 전체적으로 줄어들었고, 오는 사람만 오는 느낌, 갱신하는 사람만 하는 느낌이었던지라 그런점에서도 캡틴 역시 고민이 많았을 거야. 언젠간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은 했는데, 나도 좀더 활동적으로 움직였다면 좋았을 것을. ( ..)
그래도 고민을 한 뒤에 내린 결론이니까, 언제든 캡틴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른다 했던만큼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과 함께 현생의 캡틴 역시 응원하겠어~
일상이라면~ 음, 그렇긴 하지? 캡틴도 돌릴만한 컨디션이라면 제대로 마무리짓고 싶긴 하네~ 마지막이니까 의무적으로 돌리는게 아닌 가벼운 마음으로 한다는 가정 하에~~ 그러지 않으면 나 또한 불허하겠소~ ( ")//
그리고 약 두달동안 같이 즐겨주었던 모든 참치들 고마워~ 모두 현생도 무리 없이 잘 나기야~
그래, 유니폼. 이제와서 가게의 이미지니 뭐니 하는 허울좋은건 아무래도 좋다고 치더라도, 2년 정도 홀로 운영한 가게에 나타난 하나뿐인 직원 아닌가. (비록 붙잡아 둔 것이라고 해도) 사람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기계라는 점에서도 쥬라고 하는 존재를 흥미롭게 여기고 있는 로미에게 있어선 뭐 하나라도 챙겨주고 싶은게... 사장의 마음인지? 아니면 자칭 무기장인의 마음인지. 어느쪽인지 애매모호하다.
"그으러니까 입어보라는 거야! 눈대중으로 작업했다고는 해도 실제 맞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헤, 뭐어~ 이 로미님은 워낙 천재니까 아마 대충은 맞겠지마안."
그렇게 말하는 로미의 눈이 기분좋게 나른한 모양으로 있었다. 무해해보이는 눈을 하고 있지만 그 눈 안에 광기또한 숨어있다는 것을 쥬는 안다. '눈대중'으로 작업했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애초, 로미는 무기기술자이지 의상디자이너는 아니지 않은가.
어찌되었건 이런 도시에서 이렇게나마 여유롭게 대화할 수 있으며, 우호적이고, 큰 리스크가 없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건 천운에 가까운 경우라고도 할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고, 우연찮게도 그녀가 로미의 눈에 띄었기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부분까지 세세하게 따질 필요가 있을까? 어찌되었건 그녀 또한 싫지 않았고, 무엇보다 호기심이 가기도 했으니 좋은게 좋은 거다. 라는 조금 안일한 생각이라 해도 어느정도 정상참작은 될수 있을 터였다.
"'눈대중'인가요~ 그 단어의 의미가 평소랑 다르게 느껴지는건 기분탓이겠죠~? 애초에 눈썰미가 좋은 분일테니 어느정도 인정은 하겠지만..."
기분좋게 나른한 표정, 무해해보이는 눈매지만 문득 스캔하듯 자신을 훑어봤던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해야 할지... 이런 위험한 곳에서는 행여나 상대가 흉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나 살피는게 잘못된건 아니지만 그 결과가 '유니폼'으로 이어진다면 다소 부끄러운 상황이지 않을까. 아무리 그녀라고 한들, 어쩌면 그녀이기에 더욱 그러한 감정이 앞섰을지도 모른다.
"에이, 혼자서도 충분히 입을 수 있다구요~ 그정도까지 부탁할 정도로 염치없지도 않구요~ 이래뵈도 유연해서 뒤로 리본묶기 정도는 가뿐하게 해내는 걸요?"
...어째서 그게 가능한건진 사족은 달지 않겠다.
아무튼 로미의 말대로 그녀는 뒤켠에 걸려있을 유니폼을 향해 가보았다. 그러고보니 무기상 같은 곳에선 무슨 유니폼을 채용할지 개인적으로도 궁금하기도 했을까? 설마하니 마니악하게 메이드복이라던가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도 해보는 그녀였지만 설령 진짜로 메이드복이라 하더라도 별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평범한 작업복이더라도 아무 생각없이 입으려 했다는쪽이 더 강하겠지만,
"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눈대중은 '눈대중'이야! 그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 그나저나 혼자 묶는 것도 가능하다니, 그건 조금 놀라운데... 어쨌든 난 걱정 덜어놓고 있을테니 다녀오셔~"
쥬가 반쯤 떠밀려 들어간 카운터의 뒷 편. 일반적으로 사람은 들이지도 않고,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는 곳. 즉 관계자 외 출입금지. 그곳은 로미 카나운트의 작업장이며, 온갖 종류의 기계들이 살아나고 죽어가는 무연고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을 들이자마자 필터라도 씌인듯 회색조 일색으로 덮쳐오는 칙칙한 색감에 코끝을 수시로 스치는 기름과 화약의 내음. 천장에는 어디에 쓰일 물건인지 아니면 죽어있는 건지 모를 거대한 엔진이 걸려있는가 하면, 구석에는 양철과 고철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탑을 이루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쌓여있다. 그것도 모자른지 발치엔 볼트나 너트가 채이는 건 물론이고 탄피까지 반짝이고있다. 가게에서부터 느낄 수 있던 난장판의 기운은 바로 여기가 근원이었던 것일까. 그 중에서 가장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쥬는 역시 모른체할 수 없을테지. 그 한 가운데에서 버젓이 철제 스탠드에 걸려있는 메이드복을. 하지만 단순한 메이드복...이라기엔 가까이서 살펴보면 조금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소재의 차이나, 기존의 형태에서 덜어내고 또 추가 된 부분. 예를들면 끈을 덜어내고 지퍼를 활용했다거나 용도를 모를 조금은 이질적인 메탈파츠들까지. 완전히 현대식으로 재해석 되어 사복감각으로도 입을 수 있게 제작 되었지만 메이드복 본연의 미덕도 놓치지 않은. 단순 형태뿐 아니라 메이드복의 본래 의미인 '작업복'이라는 취지에 충실하게 맞춰져 제작된 의복인 것이다. 물론 캐스트오프도 없어서 안심. 조금 끼거나 널널할 수는 있겠지만, 아니라면 사이즈 또한 크게 엇나가는 일 없이 맞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눈대중이다. 로미 카나운트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하품을 쩌억 하면서 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카운터 너머의 공간이란건 항상 긴장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게 대개 그런 공간은 으레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태그가 붙어있었으니까, 그 '관계자'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하면 어지간히도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마치 집안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늘어져있어도 직장에서는 빠릿한 모습을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와우..."
원래도 무기상은 칙칙한 색이 가득하다곤 하지만 작업실이라고 불릴만한 곳은 그 이상이었다. 마치 흑백필터라도 끼워둔 세상마냥 보였을까, 아주 잠깐은 자신의 눈에 문제가 있었나 의심할 정도로 회색빛 가득한 공간이었다. 심지어 화약과 기름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듯 코끝을 간질였고, 온갖 자재들이 쌓여있는가하면 천장에는 부관참시가 끝난 것마냥 엔진이 덩그러니 걸려있기도 했다. 게다가 걸음을 떼는 족족 채이는 나사류와 탄피들까지...
그 사이에서 이질적인 모습을 드러낸건...
"후후후... 취향 한번 독특하셔라~"
메이드복이었다. 무려 철제 스탠드에 걸려있는,
물론 본 목적은 살리되 현대식으로 재해석된 옷이라고 할수 있으려나? 당장 소재의 차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을뿐더러 이유 모를 메탈파츠까지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작업복이라 함은 일하는 이들의 특성이나 성향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수 있었다. 마치 그것을 셀링포인트로 잡는 이들은 최대한 짧은 치마와 관능적인 맵시를 살리는 것처럼,
그런 부분에서도 로미의 개성이 느껴지는 것 같았을까?
"조금만 더 깔끔하게 사신다면 신붓감으로 딱일텐데 말예요~"
실없는 농담까지 혼자서 떠벌려봤을까, 눈대중이라고는 하나 제 신장에 딱 맞을뿐더러 우려했던 부분이 조금 답답하긴 해도 이정도면 실내에서 활동하는데엔 딱히 지장이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을 제 꾸러미에 넣어둔 그녀가 가벼운 심호흡을 한뒤 다시금 밖으로 나오자 로미 역시 기다리고 있었던듯 카운터에 앉아있었을까?
"사람은 입는 옷마다 마음가짐이 달라진단 말이 있던데, 이렇게 입고나니 왠지모르게 청소가 하고 싶어지네요~"
뒷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기 직원에게 눈길을 주며 언제나 그렇듯 시시덕 거리는 그녀. 카운터 위에는 쥬가 들고왔던 봉투가 좋을대로 흩어져선 서투른 손길로 개봉되어 있었다. 열었다, 라기보단 펼쳤다고 하는게 맞을까. 그런 식으로 봉투 안의 내용물이 드러나 있었다. 무엇이든 그녀의 손에 닿으면 그렇게 변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로미는 말한다.
"헤헤, 이야- 요즘 디저트들은 잘 나오네에! 요즘 설탕덩어리라곤 도넛정도밖에는 먹을 기회가 없었거든. 애초에 그런건 잘 먹지도 않지만, 가끔 있단말이지~ 너처럼 디저트로 무언가를 떼우고 싶어하는 녀석들은. 이런건 나쁘지 않아!"
그러면서 또 한 입 물어 우걱이고는 손목으로 입가에 묻은 설탕을 훔친다. 와중에 마실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탁상 한 켠에 있던 캔을 들어올려서 흔들어보지만 그건 너무나도 가벼운 무게를 자랑하는 빈 깡통이다.
"~아무튼, 옷은 마음에 들어? 불편한 곳은 없고? 사실 의복을 작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말야~ 그 옷도 원래 기성품에서 내가 여기저기 만지거나 붙이거나 해본 거야. 난 무기 기술자지 전문 의상 디자이너 같은건 아니니까! 헤, 옷또한 무기로 본다면 얘기는 좀 달라지겠지마안. 요컨대 그건 ver 1.00에 해당하는 옷이야. 네가 영광스러운 첫 사용자라는 거지. 간만에 신경 좀 써봤다구~"
그러고보면, 이미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쥬는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로미의 눈에는 적잖이 피곤한 기색이 어려있는 것이 보인다. 괴짜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맡은 작업에 한해서는 항상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 그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러니 저러니 말하고 있어도 그 '작업복'에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근래에는 그걸 입을 쥬를 늦게까지 내내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청소도 원한다면 해도 좋아~ 그런 용도로 만든 의상은 아니지만, 뭐 어차피 원모델은 메이드였으니까! 그 순기능을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무엇이든간에 '실측'이라는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어쩌면, 평소보다 가게가 난장판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가지 않는 물건에 쌓인 먼지는 기본이고, 진열하다 말았는지 박스에 그대로 놓여져 있는 모습하며... 가게라는게 가져가려하는 장물이 있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확실히 유니폼이라 생각하니 조금 머쓱해졌을까, 그래도 만든 이의 고민이라던가 신경쓴 부분들이 느껴졌기에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썩 나쁘지 않달까, 엄밀히 따지자면 오히려 좋은 부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후후후후...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도넛으로만 살 수는 없다구요~ 간식으로 끼니를 떼우는 것도 좋지 않은 행동이구요~ 아무래도, 식단 관리가 좀 필요하겠는걸요?"
이미 개봉되어져 차근차근 놓여진 것들은 마치 하나하나 분해되어 제 위치에 맞게 놓인 기계부품들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게 진짜 기계부품이라면 먹지 못하는데다 비교적 정갈하게 놓여있었겠지만,
"그런 간식들 말고도 세상엔 먹을게 많으니까 앞으로 잘 챙겨드시라구요~ 뭐... 손 많이 가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지만요...?
그리고, 일하는 장소와 먹는 장소를 일체화시켜서도 안된다구요"
그래도 역시 그런것들만 먹고나면 목이 막히기마련, 그녀는 따로 챙겨두었던 보온병을 꺼내어 컵에 내용물을 따라놓고선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향으로 보나 빛깔로 보나 홍차였을 뿐이지만,
"음~ 그래도 눈대중 치고는 얼추 맞는 걸요? 옷 길이도 디자인도 거추장스럽지 않고, 여러모로 마음에 드네요~ 로미씨가 의상 디자이너가 아니라 해도, 옷을 무기의 개념으로 생각해보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모델이라고 할까요? 음... 그래도 버전업 디자인은 조금 관심이가긴 하네요?"
물론 지금도 충분히 마음에 들지만, 그런 만족도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로미의 모습이었다. 단순히 평소의 직업정신으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 옷을 만들고 기다리는 동안의 노고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게 일단 눈빛에서부터 그런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으니까, 나른한 눈매와 피곤한 눈매는 엄연히 다른 것을 그녀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흐음~ 확실히 청소가 필요해보이는 환경이지만... 메이드복인데도 청소를 용도로 만든건 아니라니, 그 부분도 나름 신경쓰이는걸요~? 경호원이라 생각하면... 조금 매니악하구요~"
제법 가까이 있던 로미를 보다가도 역시나 관리가 필요한 주변을 살폈을까, 그녀는 잠시 돌아다니다가 다시 로미의 뒷편으로 다가왔다. 아마 슬쩍 피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차분하게 내려오던 손이 어깨에 놓여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찌되었건, 무언가를 먹는 상황에서 청소를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구요? 후후후~"
"나쁘지 않은걸~ 하지만 난 더럽게 말 안 듣는 수강생일테니까, 알아두셔. 아, 그리고~ 고기반찬은 꼭 하나 껴있어야 한다? 안 그럼 멋대로 피자 시켜먹을거니까-"
카운터에 층층이 올려져있는 빈 피자박스만 해도, 과장을 조금 보태서 거의 탑을 쌓고 있을 정도다. 항상 이곳에 앉아서 만화나 재미있는 영상물 (대부분 화기)를 들여다보다가, 자신을 '귀찮게 구는' 고객을 받거나 무언가 번뜩일때 작업을 하는 로미에게 있어서는 피자란 최고의 식사가 되어준다. 통신주문을 받지 않더라도, 차를 아주 잘 모는 친구가 배달해준다. 낙천적이기 그지 없다. 홍차를 받아든 로미가 '난 탄산이 더 좋은데'라면서 한 마디하고는 꼴깍꼴깍 잘도 마셔넘긴다. 푸하- 하고 목이 매였던 티를 내는 것도 잊지않는다. 그런 그녀가 쥬의 말에 이렇게 대꾸한다.
"헤, 뭐야 그게. 츤데레 어필? 신선한데! 그러고보니 요즘은 금발 트윈테일이 저-언혀 안 보인단 말이지. 나름 그거 좋아했는데 말야. 하지만 역사적으로 위대했던 츤데레들은 의외로 금발 트윈테일을 하고 있는 녀석들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 봐봐, 이런게 바로 사회통념이라구. '르메인에 거역하면 죽는다.'라거나, '일할 때 먹으면 안 된다.' 같은거 말이지. 걱정마셔~ 어차피 내겐 여기가 집이나 마찬가지인거니까. 바로 이 자리, 이 작업장이. 그리고 경호원? 일개 힘없는 고작 2000위 따리 무기기술자가 무슨 경호원이 필요하겠어~? 경호라는건 말야, 나보다 네게 필요한게 경호라구. 우리 계약할때 약속했었지? 내가 네 신변을 보호하기로 말야~ 그래서 그 옷을 준비해준거니까."
그러고보면 그 메이드복은 유니폼이라고 했다. 유니폼은 업무를 하기 위해 입는 일종의 작업복과 같은 것. 그리고 쥬가 난데모 메카니컬 상점에서 하게 될 주업무란 청소따위가 전부는 아닐테였다...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팔뚝이나 옆구리 라인을 따라 간격을 두고 박힌 작은 메탈파츠들이 미약하게 빛을 내는것 같았다. 하지만 장식이라기엔 무언가 여전히 이질적이었다.
"거기에 달려 있는 쇳조각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가 입고 있는 그녀석은 단순한 의복이 아냐.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변변찮은 무기라고도 할 수도 없지. ~요컨대 그건 순정버전의 '마운트'야. 사실 mk1, mk2도 이미 개발중에 있지만 말해주지는 않겠어. 나, 스포는 싫어하는 주의거든. 재미없잖아 그런거~ 헤헤. 전통적으로도 큰 일을 하나 내려면, 수트는 필요한 법이라구."
로미가 이름을 나열한다. 뿔테와 쇠지렛대를 든 자유인이니, 플라즈마 절단기를 들고 우주를 날아다니는 엔지니어이니... 혹은 힘으로 빛을 만드는 신화 속의 인물까지. 그들은 전부 수트를 입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 메이드복이 즉 '수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로미는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돌려 제 어깨에 손을 올린 쥬를 올려다보았다.
"니시시- 싫다면 지금이라도 벗어버려도 좋아. 당장 눈 앞에서 폐기해줄테니까 말야. 사실, 어디 이상한 곳에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그러니 말만 하시라~ 멋지게 터트려줄테니. 전의상실, 콰앙-!"
"음~ 물론 트레이너까진 아니겠지만, 피자까진 얼추 이해 해도 도넛으로만 떼우는건 절대 안된다구요~ 고기가 들어있는 도넛을 먹는게 아니라면요?"
고기도넛이라, 생각만 해도 악질적인 메뉴겠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그런 흉측한 음식을 마주한적이 있었다. 참고로 그것은 절대 비슷하게 생긴 베이글이 아니었다. 명백한 단맛 가득한 도넛이었고, 그것에 토핑으로 올려진 것이 갖은 양념으로 구워낸 고기였을뿐... 그것엔 단맛도, 짭조름한 맛도,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문화의 붕괴란 것이 그럴 때 쓰는 말이었겠지, 계란에 소금과 후추나 케찹, 식초나 레몬 같은 맛내기로 언쟁을 벌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레벨이었다.
"뭐어... 물론 제대로 균형잡힌 식단을 위해선 매 끼니마다 고기는 들어갈 거구, 콩고기를 고기라고 하진 않을 거니까요~"
당연하다면 당연하달지, 제 스케줄에 바쁜 이들은 대체적으로 간단하게 먹을수 있는 음식들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가령 배달음식이라던지, 그것마저도 따로 조리할 필요가 없는 패스트푸드라던지에 많이 의존하겠지. 모르고 지낸다면 신경쓰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녀의 눈에 띈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발 트윈테일은 오히려 츤데레 이미지보단 공주님 속성이 많지 않았나요? ...아, 그건 롤빵머리 한정이었나? 아무튼 그런 2차원적인 메타가 정말 현실에도 적용되는진 모르겠지만 말이죠~
물론... 갈데없는 제쪽이 오히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란거야 알고는 있지만..."
그러고보니 본래 메이드복의 용도가 아니라면... 이 옷이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것일까? 다소 당황스럽고 의아한 설정이었지만 얼마가지않아 납득하고마는 그녀였다. 생각해보면 인간과 유사한 유기체인데도 인간과 별 차이 없이 활보하고 다니는 자신도 있지 않은가? 여느 옷감과 다른 재질이 사실은 전투용 슈트의 소체라던가, 붙어있는 메탈파츠가 프로텍터라던가 할수 있는 가능성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조금 비약적일지언정 가능성이 아얘 없진 않을테니...
"헤에~ 스포일러는 하지 않는 건가요~? 왠지 이것만 입게 된다면 평생 모를 수도 있을거 같은데~ 뭐어... 그렇긴 하죠? 보호복 앞부분 가드가 유독 신경쓰이는 스페이스 엔지니어라던가, 헬멧이 없는데도 보호복에 의지한채 차원을 넘나드는 박사학위를 딴 물리학자라던가, 악마에게 사냥 당해야 하지만 반대로 사냥을 하고 다니는 초인이라던가~"
아무튼 역사적으로 큰 일을 해내는 이들은 모두 슈트가 필요하다는 모양이었다. 다만 그 '큰 일을 해내는 이들'에 자신이 부합되는지는 조금 의문이였지만...
"에이~ 아무리 그래도 만든 분의 정성이 있는걸요~ 게다가 마음에 들기도 하구요~?
뭐... 나중에 버전업을 한다면 살짝 타이트한 부분 정도는 해결해주셨으면, 하는게 있지만요~"
그런 쥬의 말에 당최 핀트가 어디에 잡혀있는 것인지 '그럼 피자로 괜찮은거지? 조아쓰-'라면서 헤실 웃는 그녀다. 어디까지나 로미의 주식은 피자였으니까 말이다...라곤해도, 제대로 된 식사를 챙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매우 드물게,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밥을 들고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로미의 생활습관에 대해 참견하는게 쥬뿐만인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예 식탁까지 참견하겠다는 것은 쥬가 최초였지만. 어쩌면, 그 편이 자연스러울테다. 그야 그 이 가게의 꼬락서니를 보면 누구라도 한 마디 하고 싶어질테니 말이다. 삶에 대한 그릇된 배덕과 배신은 이 도시 뉴 베르셰바만의 미덕이라고는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로미의 생활습관은 너무나 마구잡이다. 그녀, 자기 자신이 손으로 만들어내는 흉포한 괴작들처럼. 이 도시나 바깥이나 천재라고 하는 족속들은 죄다 이런 모양인 것일까.
"니시시~ 야아, 역시 내 조수 다운거얼."
어느새인가 호칭이 또 조수로 변해있었다. 첫 만남때는 분명 더블오니 007이니 하는 얘기로 열정을 불태웠던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아예 잊어버린건지 통 언급도 없다. 결국 그때그때의 느낌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메이드복을 닮은 유니폼이니, 신변보호니 하는 것도 결국 명목상의 이유인 걸지도 몰랐다.
"전부 말이 통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헤헤. 그러고보니이, 그 부분은 배려가 조금 부족했나- 미안하게 됐수다, 너만큼 빅사이즈인 인간들을 상대해 봤어야 말이지~ 그나마 내가 학창시절때 같은 클래스에 있던 녀석이 제일 근접하려나아. 헤, 도대체 언제적인지 기억도 안 나네. 봐봐, 나처럼 연약한 애가 어떻게 쉽게 상상이나 하겠어? 그래도 노력한거니까 조금만 봐주라~ 다음 버전엔 개선해줄테니까 말야."
피곤함따위는 익숙한건지, 지치지도않고 키들대면서 여전히 좋을대로 말하고있다. 순정버전이 가장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개선은 여지는 항상 필요한 법이라고 한다. 그것이 1911과 아말라이트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이유라고.
어차피 햄버거나 피자나 거기서 거기겠지만 그나마 채소의 비율이 높은 것이 햄버거 아니던가, 먹는 사람의 입장에선 어차피 구미가 당기는쪽을 택하겠지만 차리는 사람의 입장에선 제법 세세해지기 마련이었다. 언제부터 그런 것에 신경썼냐 물어본대도... 나오는 답은 없지만 말이다.
당최 속을 알아볼수 없는 인물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알기 쉽다 해도 내면엔 무엇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이들은 대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 법이다. 물론 이곳에선 흔하디 흔한 세상살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알기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크게 망설이지 않고 로미를 택할 것이다.
가끔은 투덜거리기도 하면서 평범하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과 아무 이유 없이 웃으며 선의를 베푸는 사람에 대해선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는 일이 흔했다. 이 도시라고 딱히 다를 것도 없지 않을까?
"어라? 오늘은 조수로까지 신분 상승인가요? 뭔가 재밌네요~"
저번까지만 해도 비밀요원 같은 느낌이었다가 오늘은 조수라니, 내면만큼이나 목적을 알기 힘든 로미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런 행동들을 즐기고 있었다. 일련의 행동들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은 얼핏 피곤할지도 모르지만 재밌으면 그만이니까,
"뭐어... 제가 좀 규격 외라는 이야기는 많이 듣긴 했지만요~ 제 원본과 차이가 없단 부분이 좀 걸리긴 해도 딱히 중요한건 아니기도 하고... 그래도 눈대중으로 얼추 맞추신걸 보면 역시 마스터 엔지니어에 겸해서 디자이너도 하시는게 어떨까 싶은데요?
음, 물론 어느쪽이든 무리는 안하시는게 최고지만요~"
원래 이런 일도 익숙한 사람이어야 쉽게 지치지 않고 금방 해내는 법이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칫 잘못하면 며칠 골골거리기에도 딱 쉬웠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머리쓰는 직업도 그러는데 이런 몸을 쓰는 직업이면 오죽할까,
"만든 이의 성의,라는 기본적인 옵션을 떼어놓고 보아도... 결국엔 '선물'이라는 거잖아요? 기쁘지 않을 수가 없는 걸요~"
"햄버거로 타협을 보겠다는거야? 그래도 괜찮지! 사실 별로 상관없기도 하거든- 헤, 난 말야. 그냥 피자 시켜먹는게 제일 편하니까 피자를 먹는 거라구. 우리 조수가 신경 써준다는데 왜 마다하겠어~ 안 그래?"
그다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로미는 굉장히 배타적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서는 자신의 생활에 사람의 손이 타는 걸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인간변절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긴 했어도 아예 사람과의 관계까지는 저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애초에 이 가게라는 것이 사람을 상대하는게 업이고 (자기 좋은 주문만 받고있지만) 놀랍게도 이 가게를 운영하며 친구니 주고객이니 할만한 사람들도 그녀의 주변엔 여럿 생겼기 때문이다. 2000위대라는 나름 상위에 집계된 순위가 반증이라면 반증일까. 그런 가게에 자신이 직접 직원이라며 들인 것이 바로 쥬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세워가며 잡아둔만큼, 멋대로 청소를 해놓는다거나 식사습관에 잔소리 정도 한다고 역정까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으응~? 놀라운데! 설마 거기까지 자연산이라는 거야? 난 그냥 널 만든 녀석의 취향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야. 헤헤. 아, 오해는 말라구~ 나도 규격 외라는 스펙 자체는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게 바로 네 옷을 아주 망쳐놓지는 않은 것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있지. 내가 의상 디자이너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건 쥬, 다른게 아니라 '너'의 옷을 새롭게 맞춰주고 싶었던 거라고. 단지 그것 뿐이야~! 다른 녀석들의 옷따위, 헤헤- 솔직히 내가 무슨 알바야?"
도시의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뭐, 결국은 이런 식이 될 뿐이지만. 의상 디자인이라고는 해도, 쥬가 입은 그 옷은 원래 있던 것을 토대로 그 체형과 용도에 맞춰 재구성한 것. 즉, '개조'. 로미가 저 뒤의 작업실에서 언제나 하던 것과 같다. 로미 본인도 그런 '감각'으로 의상을 설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디자이너까지 할 깜냥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무엇보다 그런것은 취미에 없다.
"선물이라아... 헤, 그렇게도 받아들여지는 건가.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녀석은 나도 좋아해. 그 옷은 네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줄 물건이야. 다른 녀석에게 입혀봤자 무용지물인 그런 물건이지."
그리고, 로미가 옷이라는 형태로 자신이 만든 것을 갖다 바칠 사람이 쥬 말고 누가 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