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과 개학이 잦아들고 슬슬 어느정도 정리가 될 때쯤. 3월 14일, 화이트데이가 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들려온 소식. 3월 말 즈음에 3월 모의고사가 있다고...?
1. AT필드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하지 않습니다. 항상 서로 인사하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2. 참치 상황극판의 규칙을 준용합니다. 편파, 캐조종 하지 않도록 유의해주세요. 3. 수위는 최대 17금까지로 과한 성적 묘사는 지양해주세요. 풋풋하고 설레는 고등학생다운 연애를 합시다.(연플은 3/11까지 제한됩니다.) 4. 느긋한 템포로 굴러갈 예정입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5.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어 일상을 풍성하게 해주세요.
제가 성실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실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1학년이 주가되는 행사이다 보니 입학식에 참여한 재학생들이 행사에 집중을 그리 하지 않을거라 생각한 해인은 조금 놀라웠다는 것처럼 침묵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저번에 심부름을 하다 도와준 선배님도 자신를 알아보었는데 해랑고가 명문고라 평균적인 학생들도 다 기억력이 좋은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석적인 공부파의 분위기라기에는 무리가 있던 태식과 앞의 은우를 생각하며 "선배님도 성실하시니까 해랑고에 온 게 아닌가요." 라 말을 했다.
"적어도 다음에 제가 찾아가고 난 다음에 안하는 것으로 하죠."
"잘 모르겠으니까 더 겪어봐야 알지 않겠어요? 그리고 매점 자판기는 아직 못 들어봤는데. 같은 반의 누군가가 얘기하던걸 듣던 것 같기도? 그림 잘 그리시나봐요." 일부러 지지 않겠다는 듯 살짝 웃으면서 대꾸하고 사탕을 삼켰다. 긴장하면서 살살 굴리니 단맛이 입에 붙고 그리고...아무일도 없었다.
"...."
눈이 살짝 커지고 이내 작은 웃음이 제법 알아볼만한 크기의 미소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앞에서 약속하기라도 한것처럼 비명이 들렸다.
마침내 여유를 되찾은 해인은 괘씸죄로 30초 정도 은우가 괴로워 하는 것을 두고만 보다가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무사하네. 녹지 않고 본래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초코바를 확인하며 안심하고서 손을 휘휘 저어 그 옆에 있던 차가운 무언가를 꺼내었다.
"딱 봐도 힘들어 보이는데 그냥 이거 드세요." 해인은 의기양양하게 음료수 캔을 건네들었다. 친구들과 마시기 위해 몇 캔 사온것이 여기에 쓰일 줄이야. "대신 다음에 장난 칠때는 봐주지 않고 똑같이 갚아드릴거에요." 이름은 뭐..그 매점에 가본 친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것 같고. 그렂니 숨을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부정은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내 입으로 내 스스로 난 성실해! 라고 하긴 좀 그렇잖아?"
일단 누가 뭐라고 해도 이곳은 명문고였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 올 수 있는 곳인만큼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증명서 한 장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제 입으로 말하는 것도 참 멋없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기에 은우는 그녀의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는 그녀가 좀 더 성실하게 느껴졌지만 굳이 그런 것까지 입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자신과는 다르게 달콤한 사탕을 먹었는지 환하게 웃는 표정을 바뀌자 그는 조금 얄미운 듯이 삐죽 입을 내밀었다. 저리도 이긴 것이 기분이 좋을까. 그러면 만약 졌을 때는 어떤 느낌일까? 괜히 그렇게 생각을 하며 일단 그녀가 내미는 음료수 캔을 받아든 후에 황급하게 그것을 따고 입에 털어넣었다. 매콤한 타바스코 맛이 조금은 시원하게 가시며 그는 겨우 안정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고마워! 덕분에 살 것 같네. 설마 이렇게 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아. 물론 내가 꼭 이긴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이런 건 이긴다라는 생각을 해야 조금 더 재밌기도 하고 말이야. 그리고... 똑같이 갚겠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 또한 신선한 자극이 될 것 같으니까. 나에게 있어선 플러스면 플러스지. 절대로 마이너스는 아니거든."
경우에 따라선 조금 변경해서 웹툰 소재로 쓸 수 있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기분 좋게 웃어보였다. 아무튼 그녀가 이겼으니 그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상품'을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이건 약속한 상품! 그렇게 비싼건 아니고, 요 근처에 있는 디저트 카페의 무료 이용권이야. 최대 한 명까지 데려갈 수 있으니까 데려가고 싶은 이가 있으면 데려가. 타바스코의 무서움을 이겨내고 승리를 쟁취한 후배에게 보내는 선배의 화이트데이 선물이야!"
물론 이용권은 따로 돈으로 사야 했으나 그에게 있어서 크게 부담이 될 건 없었다. 어차피 원고료야 작품을 연재할 때마다 들어왔으니까.
먼저 시비가 걸려와도 잘 안 싸우지만 말이다. 싸워봤자 주변에 소문만 키운다. 무엇보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 손 벌리는 것도 싫고 엄한 일로 피보는 것도 싫다. 아무리 인자하게 지낸다 한들 모기가 앵앵거리면 잡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모기들만 주변에 없기 바랄 뿐이다.
“ 맛스타? ”
맛스타라고 하길래 최근에 유투브에서본 군대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이 바로 떠돌랐지만 스테비아 빵이야기 다음에 나온 것이기에 바로 빵을 이야기 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빵 이야기가 나오자 태식이의 머리에는 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탄수화물을 섭취하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 왔지만 간식히 억눌렀다.
“ 근육량 좀 늘릴려고 그냥 내 생각인데 어릴 때 근육량 늘릴 수 있는 만큼 늘려놓으면 유지 하기 쉬울 거 같아서 성장 호르몬 팍팍 나올 때 근육도 팍팍 키워야지! ”
“ 형 춤 기깔나잖아, 그걸로 밀고 가는 거 아니였어? ”
태식이는 머릿속에 기억을 최대한 짜내기 시작했다. 언제인지 잘 기억은 안나는 듯 했지만 휘야가 댄스부 였고 간혹 춤 추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 댄스부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이 휘야의 춤이였다.
“ 근데 형은 뭘하든 다 잘 할 거 같은데 의욕이 없어 보인다 말이지.... 이참에 형도 나랑 같이 격투기 하자 재미있어! ”
사실 스파링을 빌미로 휘야를 괴롭히고 싶어하는 속셈이 숨어 들어있었기에 다소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태식이는 프로반에서 맨날 지고 그러니 의욕이 꺽이는 중이였다. 그와 동시에 승부욕과 호승심이 생겨서 더욱더 열심히 하고 있지만 노력을 해도 성과가 안보이거나 허사가 된다면 사실상 포기 할 생각 이다. 문을 나서자마자 태식이 기준에서 다소 시원하다고 생각되는 바람이 불었고 바람소리에 제대로 안들렸지만 휘야의 욕설도 같이 들은거 같았지만 적당히 무시하였다. 여차 저차 학교매점에 도착했고 태식이는 빵 같은 것을 사러갈 휘야를 대신하여 자리를 잡기 위하여 자신이 바리바리 싸고 온 도시락을 두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살색 테이프를 꺼내어 자신의 오른쪽 눈에 있는 수술자국에 붙였다. 가끔 휘야가 그 상처 자국을 애잔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고 태식이는 그런 반응을 보기 싫었다. 그때 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함을 느끼곤 하는데 태식이는 그 어색함이 무엇보다 싫었다.
“ 형, 근데 빵만 먹어도 배불러? 고구마랑 같이 먹을래? ”
빵 말고 다른 군것질도 할 거 같기는 했지만 괜히 친한 사람이 끼니 제대로 안 먹으면 뭐라도 한소리 하고 싶어진다. 잔소리를 할까도 했지만 꾹 참았고 급식이 맛있으면 아주 맛있게 먹을 형이니 상관 없겠지 싶어 했다.
"그건 그래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 성실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선배님도 그 범주내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럽겠죠?"
오히려 터무니 없는 일을 겪어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더 풀어진 해인은 웃으며 은우의 말을 긍정했다. 한창 폭풍우 속을 헤매이다 탁 트인 바닷가로 나온 뱃사공들의 느낌이 이러할까. 긴장이 탁 풀려 평소에도 다소 단정하게 자른 듯한 표정을 만들어내던 얼굴에 자연스러운 웃음이 그려졌다. 누군가는 제가 정말 성실하다고 할지도 모르며 실제로 그런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각자의 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해서 해인은 말 없이 객관적인 지표로 생각되는 해랑고를 함축하는 대사를 던졌다.
막상 지니 조금 심통이 난듯 여태의 쾌활한 행동을 멈추고 입을 삐죽이는 은우에게 캔을 쥐어주었다. 진짜로 선배와 척 질 생각은 없었으며 미움받는건 더더욱 싫은 해인의 지금까지 게임을 하며 했던 틱틱거림을 무마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자신이 이겼지만 이를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 다음 게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핑계도 되겠지만은. 이윽고 은우가 안정된 표정을 지으며 금방 유쾌하게 신선한 자극에 대해 연설을 하자 소녀는 그러면 그렇지가 이마에 쓰인 것 같은 얼굴을 만들었다. 저 선배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회복력이 끝내주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괜찮아요. 제가 이기기도 했으니 기분이 좋아서 드리는 거에요. 혹시나 제게 쌓인게 있다면 풀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해인은 털털하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손에 걸친 가방줄이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왔다 갔다 자그마한 포물선을 그렸다. "무엇이든 이긴다는 생각을 해야지만 의욕이 나서요. 단순하게 경험이 소중해서 이런 게임을 할때도 이기면 기분이 좋았던 것이 떠올라서 더 의욕이 생겨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자체를 즐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요."
기분 좋게 웃는 앞에서 마주 웃으며 당당하게 화이트 데이 선물이라고 치켜든 물건을 보았다.
"디저트 카페 이용권...?"
하나가 좋아하겠네라는 생각 뒤로 매운것 주고 달콤한 것 주기인가 뭐야.라는 감상이 잇달아 떠올라서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지못해 감정을 누르는 대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어이없고 즐거웠고 또 짜증나도록 매웠다.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싶은데 그러기가 힘드네요." 조그맣게 이어진 웃음뒤로 여전히 그 흔적이 남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여태 놀아주신건 음...그래요 감사해요. 선배님도 좋은 화이트데이 보내세요. 다음에는 제가 기프티콘하고 통과 함께 찾아갈게요." 이용권 잘 쓸게요. 마지막 인사를 뒤로 해인은 웃으면서 다시 반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표정하나 없는 포커페이스였던 미나였지만 다른 학년인 학생도 아니거니와 자신과 같은 반이었기에 한결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을까? 나른하나 싶을 정도로 처진 시선으로 훑어본 그의 모습은 확실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알고 있다, 라곤 해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입장이겠지만... 키에 비해 좀 말라보이는 인상이라던가, 저 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자칫 헝크러지기 쉬운 곱슬기가 있음에도 까치집보다는 훨씬 나아보이는 스타일, 무엇보다 나른해보이면서도 꽤 미형으로 잡혀있는 이목구비가 굳이 명찰을 살피려 노력하지 않아도 강하늘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학생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
돌아오는 인사는 살짝 어색했을까, 무엇보다 미나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배가 고프기에 이곳에 온것이 아니냐는 자신의 물음에 아니라고 부정을 표함에 있었다.
그렇기에 이해를 못했다는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을까? 눈 앞의 동급생이 딱히 사람을 꺼리는 인물이었던 기억은 없지만 먼저 어울리려 했던 적도 없었기에 자신을 보려고 이곳에 올 이유도 없을 뿐더러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서야 자신이 점심시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는건 그저 우연일 뿐이었을까? 라고 하기엔 다른 동아리 부실이 아니라 굳이 요리부에 들어온 것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
하지만 진짜 말하려던 대답은 그의 입이 아닌 배쪽에서 들려왔을까? 그저 소화가 안되어 고록거리는 소리와는 달리 명백하게 배고플때 내는 신호라는것을 알고 있던 미나는 살풋 웃어보이면서 식기를 한세트 더 집어내 테이블에 올려두고서 자신이 늘 앉아있던 맞은편의 의자를 살짝 빼어 앉기를 권했다.
"금방 준비될 거니까, 여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줄래?"
그가 먹지 않겠다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먹이지 않을 이유도 없는 그녀였기에, 속속들이 놓여지는 것들은 음식점이라기엔 단촐했고, 학교 급식이라기엔 호화스러운 것들이었다.
먼저 시비 걸리지만 않으면 싸우지 아니 한단 말에 안도하는 척한다. 태식의 말버릇을 아는 넌 걱정하는 편이지만 이제 태식도 알아서 할 나이가 되었다. 더 참견하면 요즘 말로 꼰대라 불리요 어린아이 아니라는 말 귀로 들을까 싶어 이제 되었다고 긴하게 생각만 하는 것이다.
"치즈빵 말이여."
겉면 튀김옷 입히었고 속은 비어 매운 소스랑 치즈 들어있는 빵은 유달리 빨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1교시에 가야 좀 보일락 말락 하지 3교시만 지나도 음료랑 같이 들어있는 냉장고 매대 텅텅 비어있다. 식단 관리하는 사람 앞에서 잔인한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너 자각하는 법이 없다. 그것은 무심함이다.
"느이 몸 관리 열심이네. 내라면 몬혔다."
그나마 인간성 있다.
"에이, 그걸로 뭘 벌어먹고 산다구. 그것도 잘생긴 애들이 춰야지 내가 춰봤자 뭐여, 어디 오디션 프로그램도 못 나가구 광탈이쟈."
너 아직도 춤사위 보이라면 당연히 출 수야 있지만서도 고3 딱 되고 나니 그마저도 버거웁다. 대학이요 어른이니 많아야 9개월 성큼 다가오니 춤이 대수랴, 중압감에 몸 눌려 뭘 하도 못한다. 남들 다 잘 하는데 의연치 못하다.
"인마, 암만 의욕이 있다 혀도 격투기는 느이 성격을 알아. 이 자식이 말이여."
너 툭하니 도끼눈 치뜨는 것이다. 팔이라도 퍽 칠까 했건만 바리바리 싸 든 점심밥 떨어질까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원하게 욕 갈기고 매점으로 비적비적 걸었다. 사람 참 많다.인파 헤칠 생각에 벌써 한숨이 땅을 뚫을 것 같으나 매진만 아니면 되었다.
"다녀온다. 자리 맡아줘."
인파 사이로 파아란 머리 비적비적 비집고 들어간다. 체구 작아 남학우 몇 우르르 과자 사러 몰리자 금세 가리어진다. 북적거리던 인파 뚫고 겨우 빵 사면 또 음료가 탐이 나 600원 하는 카프리썬 결제하게 되는 것이다. 전자레인지도 소시지요 빵이요 뜨겁게 먹고자 하는 사람 많았으나 운이 좋게도 자리 난다. 잽싸게 봉지 조금 뜯어 넣고 40초 기다린다. 뜨거운 김 풀풀 나는 빵 조심조심 들고 온다. 오는 길에 끼이고 치여 표정 벌써 진 빠져있다.
"너 근육 키운다며. 많이 묵어야지.. 나는 이따 나나콘 묵음 돼. 우리 할아버지도 안 그러는디 태식이 거 많이 컸어."
흐물해진 빵 입에 물다 뜨거워서 표정 구긴다. 이 맛에 먹는 거라 입술로 빵 지익 물어뜯고 우물댄다. 빵 단맛 혀에 묵직하다.
입으로는 부정을 표했지만, 몸은 솔직하게 나 배고파요! 밥 주세요! 라는 것을 토로했기에 그렇게 된 이유로 나는 그녀가 살짝 빼서 앉기를 권하는 의자에 우물쭈물 다가가서 앉았다. 와아아.. 엄청 쪽팔려!, 말 한번 나누어 본적도 없는 여자애 앞에서 꼬르륵, 꼬르으으으르르륵이라니!!!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통해 그녀는 내가 지금 이 상황을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응..."
앉아서 조금 기다리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원래도 말이 짧긴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꼬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배가 고파서 힘이 없었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을 거다. 그리고 새삼스럽게도, 이제와서 그녀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있자니 단발 숏컷이 잘 어울리고 나른하게 풀린 눈매와 더불어 표정의 변화가 적었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ㅡ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내게 듣고 싶진 않겠지만.ㅡ 반듯한 이목구비가 예뻐 꽤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얼굴이다. 물론,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내 멋대로 한 생각이었다.
여하튼, 그녀는 나에게 그렇게 말해두고 요리를 준비하러 갔고 나는 머쓱하게 구부러져 내려 온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요리부실이라는 이 곳을 곁 눈으로 둘러보았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로 내어져오는 음식에 무심코 우.. 우와.. 라고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거기에 덧붙혀 먹어 보지도 않고서 매일 아침 스테이크를 구워줘. 같은 말도 튀어나올 정도로 꽤나 본격적인 비쥬얼에 올라오는 향까지 매우 감미로운, 딱 봐도 나 맛있어요! 라는 어필이 듬뿍 묻어나오는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내가 그렇게 진중하지 못하고 호들갑스러운 성격이 아니라 헛나올 뻔한 말이 그저 미수에 그친 것과, 앞에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에 감사를 표하며 합장했다.
잘먹겠습니다.
종교는 없었지만, 굶주린 와중에 학교라는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진수성찬에 경외감 마저 느끼며 주기도문을 읊듯이 합장을 마친 나는 신중하게 식기를 들고서 무엇을 먼저 먹어볼지 탐색했다. 이내 결정을 마치고 손에 들린 식기가 뻗어진 곳은 로제 파스타. 가장자리를 포크로 찍어 돌돌 돌려서 감은 뒤에 입에 가져가 넣었다. 냠냠.
눈 앞에 지중해가 펼쳐졌다. 수염난 이탈리아 어부 ㅡ누군지 모르겠다.ㅡ 가 쪽배를 타고 그물을 거두자 신선한 새우나 바지락 같은 해산물이 풍요롭게 끌어올려지는 다큐인지 뭔지 모를 영상이 자동 재생된다.
그 다음에는 시저 샐러드. 로메인 상추와 크루통을 함께 찍어서 입에 가져가 넣었다. 얌얌.
이번에는 솜브레로를 머리에 눌러 쓴 멕시코 농부가 ㅡ역시 누군지 모르겠다.ㅡ 튀어나왔다. 뙤약볕 아래 이마에 송골히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생그러운 상추를 재배하고 집 안에서는 그의 부인이 크루통을 튀겨내고있는 목가적인 그림이 보여졌다.
이게 배가 고팠어서 그런건지, 음식이 굉장히 맛있어서 그런건지 뇌가 자꾸 오버를 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아직 손 대지 않은 것이 하나 남아있었다. 미디엄 웰던으로 구워진 안심 스테이크. 나는 나이프를 들고서 작은 조각을 썰어 낸 뒤에 입에 가져가 넣었다. 쩝쩝.
음메에에에에~~~ 푸르른 하늘이 지평선에 걸쳐있는 드넓은 목장. 행복하고 건강해 보이는 소들이 울며 나를 반긴다. 그리고는 장면 전환 ㅡ도축 장면 편집ㅡ 지글지글. 팬 위에서 구워지는 안심 위에 꽁지 머리를 하고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 ㅡ소.. 솔트배..!?ㅡ 가 시그니쳐 포즈로 소금을 뿌린다.
맛스타, 나중에 치팅데이로 정해서 마라탕과 맛스타까지 꼭 사서 먹을 것이다. 한입 밖에 못 먹을지라도 그 맛이라도 느껴 볼 것이다. 꾹꾹 다짐 했다. 근데 식단을 언제까지 할지는 안 정했기에 언제 쯤 마음 것 먹게 될지 생각 해보았다. 적어도 선수 은퇴하거나 도중에 꿈을 포기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고기는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지금은 탄수화물이 더 좋아졌지만 ‘ 내가 보기에는 형은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 거 같은데 ’ 라고 혼자 속으로 말하였다. 이말을 내뱉었다가는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태식이는 지금 이렇게 학교에서 같이 점심을 먹는 상황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태식이가 보기에는 이국적인 외형하며 반쯤 감은 듯한 눈은 오히려 신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태식이의 기준이긴 하지만 휘야는 잘생겼다. 왠지 모르게 못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 거 같았다. 하면 요령것 굉장히 모든 일을 잘 할 거 같았고 실제로 그것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도 몇 번 보았기에 고개를 갸웃 거리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 아, 역시 나를 너무 잘 알아 ”
눈치가 빠른 것도 있겠지만 같이 알고 지내온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척하면 척인 쪽이 더 강한 거 같았다. 금세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한 모습에 위와 같이 말하였다.
“ 으이, 다녀와 ”
인파 사이로 파란 머리가 비집고 들어가는데 나름 보는 맛이 있었다, 이윽고 다른 학생들이 매점으로 몰려 들자 금세 사리지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뚫어서 나오는 것을 보면 신기 했다. 밤 하늘에서 비행하는 UFO처럼 검은 색 머리의 친구들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슈웅하고 다시 나오는 것이 딱이였다.
“ 근육! ”
태식이는 많이 먹으라는 말에 마치 보디빌더처럼 포즈를 취하였다. 또래들 치고는 근육량도 많은 편이고 팔다리 그리고 덩치 도 큰편이였기에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나름 봐줄 만 하다고 여겼다.
“ 아 할아버지 이야기 나와서 그런데 아직 정정 하시지? ”
중학교 때까지는 예절교육 상으로 많이 갔었지만 본격적으로 운동 시작한 뒤로 부터는 그러니깐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방학에도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근처는 지나갔어도 제대로 방문 한 적은 없었다. 아니면 전에 봤었는데 태식이가 기억 못하는 것 일 수도 있다.
“ 당연히 힘들지, 형도 나 고기에 환장하는 거 알잖아... 근데 지금은 고기가 물려... 빵도 먹고 싶고 마라탕도 먹고 싶지만 목표점 찍었으니 결과라도 보고 돌아가야지! 그거 하나 때문에 버티는 거야, ”
/ 크헝 비몽사몽... 이번에도 답레 올려주시면 나중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굿밤되세영...
대수의 생각대로 다운은 라면 끓일 이유 없는 아가씨는 아니었다. 그냥 라면을 잘 끓이는 식으로 진화하기 전에 뭘 먹든 먹을만하게 느끼는 식으로 진화 했을 뿐... 각설하고, 다운은 잠자코 라면이나 먹고 있었다. 음. 맛있다.
"해양탐사원이라. 멋진 직업처럼 들려. 나도 그런 멋진 직업을 생각해둬야겠어..."
그런 얼렁뚱땅 대수의 대답에도 다운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수영장 탐사원이라든가 수영장 레이서 같은 걸 업으로 삼아볼까... 물론 개소리, 아니 개생각이었다. 왈왈왈. 그 생각도 잠시, 갑자기 대수가 옆에서 목소리를 높이자 다운은 깜짝 놀란다. 눈 끔뻑이는 게 다였지만 요컨대, 놀랐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뭐지, 왜 안 웃는거지?'
이제와서 농담이라 하기에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설마 진심으로 받아들었나? 젠장... 내가 이래서 농담을 못친다. 어떡하지. 다운은 급격히 초조해진다. 그래봤자 얼굴에는 금 하나 안 갔지만 말이다. 음... 뭐, 상관 없나. 커서 돈 많이 벌면 좋은거지. 자기 멋대로 자기합리화를 한 다운이 영혼없이 웃으며 말한다.
"그래, 응원할게."
잘 모르겠으니 대충 응원이나 하면 반이라도 간다 이 말씀이다. 그때였다. 다운이 표정을 굳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잠시.
"엣취-!"
...이 추운 날씨에 젖은 채로 밖에 있었으니 기침이 나올 만 하다. 다운은 미간을 조금 모으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터벅터벅 걸어가 옆에 대충 던져두었던 보드를 옆구리에 낀다. 코를 킁킁거리더니 입을 툭 내밀었다.
"난 이만 가봐야겠네. 아무튼 오늘은 고마웠어."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이었으니 이렇게 갑자기 떠나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운은 몇 번 더 코를 킁킁거리더니 -조금 신경질적여 보였다- 자리를 떴다. 발자국이 이어지다 바람과 파도에 묻혀 사라졌다.
-비록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대도-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다른사람 앞에서 꼬르륵소리가 나는 것은 만국 공통의 부끄러운 순간일 것이다. 하물며 배고프지 않다 부정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만큼 우물쭈물 앉아선 귀까지 새빨개진 채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그가 어떤 기분일지는 대강 알고 있었기에 굳이 그것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웃어보이는게 전부였다.
...단지 이전 기억이 떠올랐을까, 조금은 흐릿하기도한 막연한 기억에 지나지 않겠지만... 전혀 배고프지 않다며 잡아떼다가도 제 차려준 음식을 보고서 행복해하던 누군가가 기억에 맴돌았기에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바뀌어진 미소만큼은 따뜻했다.
"......"
테이블에 음식들을 차례로 놓아두었을 때 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꺼질 잔불마냥 맥을 못추던 모습이 아니었지만, 사람은 아무리 다죽어가도 앞에 음식이 놓이면 먹기 위해서 자기도 모르는 힘을 발휘한다는 말이 있듯 약간은 힘이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들떴다 해야 할지...
"잘먹겠습니다. 그리고... 맛있게 먹어."
가지런히 합장을 하는 모습은 적어도 음식 앞에서만큼은 경건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제 고향에선 으레 있는 일이었다지만 요즘은 간략화되기 일쑤였을까?
확실히 이렇게 먹고서 바로 체육이라던가 하면 배와 위장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미나가 알고 있는한 다음교시는 가만히 교실에만 있으면 되는 수업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걸 감안하고 만들었겠지만,
하나씩 음식을 맛보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딱히 부정적인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식사 중인 사람을 너무 빤히 보고있는건 실례이기에 자신 또한 조용히 포크를 들었을까,
그래도 역시 눈이 가는 것은 어쩔수 없는 버릇이었다.
"...... 다행이네."
한입씩 음식들을 맛본 그가 그때서야 고개를 들고 호평을 하자 미나의 무덤덤한 표정도 그때서야 안심한듯 활짝 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일반적인 코스에 비해서 많이 간략화되었지만, 그래도 즐기고 있다면 기쁘네."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무미건조함이었지만 줄곧 처지기만 했던 눈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미나의 심경을 대신해주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에 만족하는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은 언제든지 뿌듯했다. 물론 꼭 만족하지 않는다 해도, 그저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평소와는 다른 행복감을 느낄수 있었다. '혼자일 때의 행복함과 혼자가 아닐 때의 행복함은 전혀 다르다.'라는 것... 역시 부모님의 말씀대로였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점심 먹고 어딘가 갈 일이 있는게 아니라면... 비교적 시간은 널널할 거야."
딱히 가는 곳도 없거니와 점심시간은 대개 이런식으로 보내는 자신이었지만 그의 경우에는 혹시 모를 일이기에, 미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나의 호평에 그녀는 다행이네.. 라고 답하며, 안도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내 입맛에 맞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는 것이 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저 겸손한 말일 뿐이었을까.
확실히 나의 경우엔 음식을 가려먹거나 하는 호불호가 없는 타입이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녀가 차려준 음식에 대해 알러지가 있거나,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든지 맛있다는 호평을 할만한 그 정도의 솜씨를 가지고있었다.
"나는 평소에 빵이나 레토르트만 먹으니까. 오랜만이야, 이렇게 제대로 된 음식은"
집에서도 부모님께서는 맞벌이를 하시느라 평소에는 귀가도 늦었기에 가사를 돌 볼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나 동생이 요리에 흥미를 가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항상 끼니는 햇반에 밀키트 류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게 아니라도 뭐든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된다는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것이 입맛에 호불호가 없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답하고서 다시 식기를 움직여 음식을 먹는다. 한 입, 한 입 먹을 때 마다 또 다시 세계일주를 반복하며 맛의 향연을 즐긴다. 이런 맛에 익숙해져버리면 앞으로 레토르트 따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잡념 해보지만, 어차피 오늘 하루 뿐인 기회인 것이다. 음식을 훔치러 왔던 주제에 뻔뻔스럽게 밥 달라며 이 곳을 다시 찾을 만큼 능글맞은 성격도 못 되니까. 그러니 충분히 즐겨놓자.
"특별히 할 일은 없는데.."
그렇게 식사를 이어가던 중에 덧붙혀진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이 곳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얻어 먹은 건 있으니까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하자는 생각이었다. 내가 아무리 인간관계에 미숙하다 한들 그 정도의 사회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설거지는 내가 할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주거니 받거니 실강이를 하는 것도 귀찮으니까 나는 못을 박아두듯이 어조에 힘을 실어 말했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차려줬는데 오히려 값싼 대가라고 생각한다. 값싼 대가라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이거,"
덧붙히며 빵을 사기 위해 ㅡ매점이 문을 닫아 그러지 못했지만.ㅡ 가지고 있던 현금 5000원을 꺼내 테이블 위로 밀어주었다.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부분에선 확실하게 해둬야 뒤 끝이 없다. 물론 그녀가 내어준 음식의 재료값이라 치기에도 턱 없이 적은 금액이었겠지만.
무엇이 되었든 알고 지내온 시간은 깊었다. 어릴 때부터 예절 교육이니 절에 오는 날만 해도 수두룩하였으니 눈치는 물론이요 조금만 신통하더라면 미래도 알았을 것이다. 다만 미래 알지 못하였던 것은 이리도 인파 바글바글하던 것이요, 기진맥진 다녀오니 빵에 혀까지 데이는 것이다.
"아따, 거 성났네."
옷 너머로 울룩불룩 솟아 친 근육 보고 경탄 금치 못한다. 너 저런 몸 가지라 하면 절대 못 하는 것이, 이미 네 몸 근육 없고 야들야들한 사람이요 지금 키로는 징글 하여 그러하고 싶은 마음 없다. 그것이 네 운동을 멀리하는 이유요 되먹지도 않는 합리화다. 빵 물어 제끼며 도톰히 드러난 소시지 씹었다. 다른 손 카프리썬 올리어 빨대 엄지로 누르기 무섭게 비닐 포장에서 뚫려 나온다.
"정정하니 걱정 말어. 요전번에두 목탁 대신에 한 대 맞았다니까."
그것은 너의 잘못이었다. 학교 담 넘었단 사실 들키어 목탁 대신에 머리 치는 소리 맑고 고왔다. 너 학업에 뜻이 없다 해도 최소한 학생의 본분은 해야 한다지만 도통 의욕 없다. 흐르는 대로 살며 덕 쌓고 깨달음 얻는 것 꿈꾸었으나 본분 다하지 못하여 깨달음 한참 멀었단 꾸짖음 소리 선하다. 그럼 어쩌잔 겁니까, 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문학청년 나부랭이인데, 이제 와서 뭘 더 따라갑니까. 그것 대답 없는 네 속앓이다.
"고생이 많네. 그래도 해내는 게 어디여, 결과 보믄 꼭 말혀라. 마라탕 형이 사줄 텐게."
인간 되어 좋아하는 것 놓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욕망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들 하지 않았나, 발전은 욕구로 비롯되고 무릇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내려놓고 산들 그 내려놓는 것도 욕심으로 비롯된 것이요 그것 끝을 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너 카프리썬에 구멍 내고는 빨대 문다. 소리 없이 빵 반절 먹어치웠고, 한 입 입가심 하고 비어가는 통 바라본다. 종이 씹는 느낌 나는 닭가슴살을 저리도 잘 먹으니 참 신통도 하다.
사람은 저마다의 취향이 있는만큼 식성도 다양했다. 자신 역시 그러하고,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꾸준하게 좋은 평가를 얻어낼 수 있단건 자신의 요리가 여러 사람들의 입맛에도 그럭저럭 맞는단 것이었고, 그렇다는 것은 곧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 있어서 더할나위 없는 칭찬과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요리만화처럼 먹은 이들 모두가 맛의 감미로움에 오열하지 않았다. 그정도의 수준이 가능하다면 그건 이미 음식이 아니라 마약일 터...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의 입을 만족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모든 이에게 완벽하진 못하다 하더라도 무난하게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달려있는 평생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 그건...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
평소에 빵이나 레토르트로 끼니를 떼운다는 그의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 했지만 그저 살짝 들썩인 것과 평소보다 눈이 잠깐 크게 떠졌던 것 말고는 별다를게 없는 미나였다. 이내 스스로도 잠깐 흥분했다는걸 깨달았는지 제 머리카락을 얼굴쪽으로 끌고와 가리려고 시도했지만... 완전히 가리기엔 유감스러우리만치 짧은 길이였다.
"그래도... 조금은 간편식을 이겼단 기분이 드네... 그런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니까..."
조금 분하지만, 그녀가 앞서 생각한 '모든 이에게 완벽하진 못하다 하더라도 무난하게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는 음식'이 바로 그 레토르트 식품들이었다. 요리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선 공장제 식품은 평생의 라이벌이자 강적이겠지. 우스운 점이 있다면 그런 공장제 식품을 만들어낸 이들도 결국엔 똑같은 요리사들이란 것이었다.
"그럼... 더 느긋하게 즐겨도 좋지 않을까? 후식도... 있고..."
물론 그가 디저트까지 섭렵할 정도의 위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몰랐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아? 아니... 괜찮은데..."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단 그의 말에 평소와 달리 동그랗게 변한 눈매, 그저 생기가 있겠거니 할만큼의 적당히 발그레했던 홍조가 눈에 띌 정도로 짙어졌다. 하지만 그런 반응과는 다르게 어찌 할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이 정중히 거절하기엔 쐐기를 박은듯 힘이 실린 어조로 말하는 그가 있기 때문이었다.
줄곧 그를 지켜보던 시선도 잠시 다른쪽을 향해있었을까, 만약 이 상황이 만화의 한 컷이었다면 마치 당황한 파란색 해달캐릭터처럼 어쩔줄 몰라하는 미나가 귀퉁이의 한컷에 조그마하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뭔가 생각난듯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로 밀어보인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가 하니, 아마 점심 끼니를 떼우기 위한 돈이었던듯 싶었다.
아무래도 그냥 먹기엔 뭐한것인지 그의 입장에서도 나름의 호의내지 댓가를 지불한듯 싶었지만 테이블 위에 올려진 현금을 본 순간 잠시 쎄하게 굳던 미나의 표정이 이내 전같은 누그러진 표정과 다르게 약간 시무룩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돈까진 필요없다.'라고 말하자니 도리어 그를 깔보는 것으로 느껴질수도 있었기에 미나는 그 말만은 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상대방에겐 나름의 감사표시이자 당연한 답례였을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비록 부족한 액수라도 음식을 차려준 것에 대한 댓가'라는 목적으로 건넨 것이라면 아직은 그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이러나저러나 학생일 뿐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방금전의 저조한 표정은 금새 사라지고 다시금 미묘하게 웃음을 띈 얼굴로 돌아왔다.
"딱히 무언가를 받을만한 행동은 아닌걸?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면 어쩔수 없지만..."
벚꽃은 꽃봉오리가 몽글몽글 맺혀있습니다만 아무래도 3월 하순이 되어야 꽃이 만개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몽글몽글 맺혀있는 벚꽃의 꽃봉오리만 보아도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쯤 되니 여러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지나가길 바랐던 것일지 몰랐던 3월 14일의 화이트데이가 다가왔네요. 여러분들은 어떤 화이트데이를 보낼 생각인가요?
아참, 화이트데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는 계속해서 기다려왔을 수도 있는 것이에요.
바로바로바로! 반장 선거!
누가 1반의 반장이 될 것인가. 너무 궁금하지 않는가요? 어때요. 여러분도 반장 선거에 출마해 보는 것은 어떤가요?
* 기간동안 재미있는 화이트데이를 즐겨주세요. 단, 스레 밖 시간인 현재 시간 3월 11일까지는 연플이 제한된다는 점 주의 바랍니다. * 반장선거에 출마하고 싶은 캐릭터들은 2월 28일까지 반장 선거에 출마하는 독백을 써주시고 그 독백 아래부분에 1 - 100 다이스를 굴려주세요. 경쟁자가 없으면 부전승으로 반장이 될 것이고, 경쟁자가 있다면 다이스가 높은 쪽이 반장 적은 쪽이 부반장이 되게 됩니다. 아무도 출마하지 않을 경우 모브캐가 반장이 될 예정이니 부담갖지 말고 즐겨주세요.
하이고 다들 안녕~!! 여행 다녀온다고 이벤트 레스가 늦어부렸다~~ 다들 이미 잘 즐기고 있느 것 같아서 뿌듯하고. 반장 선거 이벤트도 있으니 반장 하고 싶은 사람은 지원해보도록~~ 물론 지원자가 많으면 반장이 될지는 다이스 배틀이겠지만 후후 (그리고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무리 간단한 요리라 한들 그런 간편식보다 쉬울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현대인들이 자주 찾게 되는것 또한 어쩔수 없는 수순일까? 게다가 요즘은 그런 음식들 치고 영양밸런스를 꽤 챙긴 구성도 속속 나오고 있었기에 자신이 호들갑을 떨만큼 불안한 마음을 품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그래봐야 소위 말하는 '집밥'보단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그가 거기까지 신경쓰면서 먹을지는 미나가 알수 없었기에 그부분은 오로지 상대방의 몫인 것이다.
"...그렇구나.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지?"
그럼에도 자신의 음식이 더 맛있다고 해주는 그의 반응은 분명 나쁜 느낌이 들지 않았고, 기분탓이라고 해야 할진 몰라도... 뭔가 아주 희미하게 웃는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단순히 자신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의외의 호평에 생각의 끈이 느슨해진 것일수도 있잖은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긴 해도 지금까지 요리들을 배우고 만들어가면서 미나는 한번도 마음가짐을 허투루 한적이 없었다. 물론 암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틀어질 뻔한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바로세웠던 말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도 먹을 대상을 위한 마음이 없다면 단순히 찍어만든 공장제 음식과 다를 바가 없다고... 다소 비약이 심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마냥 허황된 말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요리하는것 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그런 정성, 애정이 맛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딱히 스피리츄얼한 개념의 망상은 아니었다.
물론 후식에 대해선 그정도로 잘 먹는 타입은 아닌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단순히 후식을 챙기는 성향이 아닌건지 사양하는 반응이 보였기에 미나의 눈은 잠깐 허공에서 맴돌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구나."
그 역시 딱히 무언가 받을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 말의 의미가 자신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면 딱히 부정적인 것도 아니었기에 갈팡질팡하던 시선도 얼마 가지않아 차분해졌다.
"...... 그래도, 이렇게라도 이야기 할수 있는건 기뻐. 나, 딱히 활발한 성격인건 아니지만... 이야기 하는건 좋아하니까."
겉돌진 않지만 딱히 먼저 다가갈 생각도 그다지 없는 성격, 어쩌면 그게 평범한 사람의 표본이라 할수도 있었으나 사실은 제 외모만큼이나 무기질적이고 무미건조하며 무채색일 뿐인 인생이었다. 아무렴, 무채색 또한 색이긴 하지만...
화이트데이, 좋아하는 연인들끼리 꽁냥대는 날이고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는 날이다. 이 기념일에 신난 건 연인들도 있겠지만, 사탕을 1+1이나 2+1 같이 행사상품으로 팔아줘서 신난 서우도 있었다. 서우에게 화이트데이는 사탕 많이 파는 날인 것이다. 치과 의사도 신날 것 같다. 연인들만 화이트데이에 사탕 사먹으란 법 있나! 츄파춥스를 맛 별로 쓸어담아 결제했고, 하나는 입에 물려고 꺼냈는데 파란색이다. 콜라맛. 파랗다면 바다지! 사탕이 와그작 깨져서 막대는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고, 달달한 사탕만 입 안에서 녹는다.
사탕이 녹아 사라져갈 때까지 보드가 도로록 바다를 향해 굴러간다. 오늘은 크루저보드가 아니라 스케이트보드! 다양한 트릭을 구현할 수 있다. 발로 공중에 띄운 보드를 손으로 잡아 돌린 다음에 다시 공중에서 보드에 발을 올려 착지한다거나. 이 트릭이 요즘 서우가 연습 중인 트릭인데, 무릎을 까먹고 손을 까먹는 최대의 원인으로 자리 잡는 중이다. 보드로 트릭을 할 때 제일 기본적이고 중요한 점은 보드를 봐야 한다는 것! 근데 항구에 다다라서 제일 기본적인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아는 사람 같아보이는데, 이름이 기억날락 말락하는 누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아! 아―――!!!”
보드를 손으로 잡는데까지는 성공했고, 착지하면 되는데 찰푸닥 넘어졌다. 말이 좋아 찰푸닥이지, 보드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꽤나 요란했다. 다만 이 소리는 아파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을 기억해냈기 때문에 나는 소리였다.
“정대수, 맞지! 안―녕――!!!”
우리 반이잖아! 우리 학교 우리 학년 우리 반인데?! 방금 넘어져서 몸을 일으켜 세우다 말고서 소리친다. 정답을 맞췄고 이미 확신하고 있는 웃음이, 방금 크게 넘어진 것 치고는 지나치게 밝게 웃고 있다.
즐겁다는 표정으로 달고나를 먹으면서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을 바라보다가 누군가가 엄청난 기세로 넘어지면서도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내심 기겁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활기찬 인사가 조금 부담스러운지 살짝 시선을 피하면서 조금 더럽혀진 주변을 치우면서 슬금슬금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더라.
분명히 그녀는 정대수, 그를 기억해 이름을 불렀지만 정작 그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반에 조금 시끄러운 여자아이가 있었다는 기억은 있었으나 그 이외는 기억하지 않았다. 애초에 접점도 없었기도 했으니. 그것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만나는건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곳엔 무슨일로..?"
라고 묻는 그녀의 옆에는 폐자제로 대충 만들어진듯 한 '사탕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주도록하지.' 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었으며 휴대용 버너와 더럽혀진 국자 등등이 돗자리 위에 올려 져 있었다.
오후 출근해서 내일 아침에 퇴근하는 일정이니 과연 좋은 것일까~~ 서우는 오늘도 활기차네!! 넘어지는 것 너무 아프겠다 88 보드는 조심조심히 타기... 대수 이벤트 넘 귀엽잖아ㅏㅏㅏ 달고나라니 나도 먹구 싶다~ 오늘 아진이 방송도 너무 좋아.... 아진이가 방송부인 해랑고 나도 다니고 싶은 기분... 흑흑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냐고 조심스레 물어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낼 때도 속으론 백 마디를 떠올려 내며 가려내는 성격이었기에, 허투루 흘리는 것 없이 내 심리를 그대로 투영하는 말이다. 그러니 그 표현법에는 하자가 있을지 언정, 그녀의 음식이 맛있었다는 말은 실속 없이 뱉어낸 형식적인 말도 아니었다.
그것은 행동에도 역시 반영되어 후식을 거절하는 제스쳐를 보인 까닭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처음 이 곳을 찾아왔던 목적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호의를 받아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든지 아니면, 그 둘 모두인 탓인지. 어찌되었든 간에,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ㅜㄴㅇ 어쩐지 아쉬워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로서 덧붙혀 두었다. 잘 먹는 타입이 아니라거나, 후식을 챙기지 않는 성향이라거나 그런 먹성에 관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는다.
ㅡ 활발한 성격은 아니라는 말.
확실히 겉보기에도 그녀는 활발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특유 ㅡ자신감이나 자기애가 넘쳐보인다던가 하는ㅡ 의 모습은 없었다. 무기질적이며 무미건조하고 무채색이다. 나와 비슷한 부류에 속한다. 같지 않고. 비슷하다. 무채색이라도 채도가 결여되어 있을 뿐, 백색과 흑색의 사이에서 명도의 차이는 있다. 내가 느끼는 그녀는 조금 더, 백색에 가까운 쪽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밝은 색이다.
ㅡ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
이것이 그 채도의 차이에서 나오는 차이점일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하진 많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입 밖으로 내는 말은 어떤 형태로든 가식이나 꾸밈이 있다는 말도 있고, 단순하게 입이 방정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타입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헛소리가 아닌, 이야기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심리를 드러내며 표출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말 한 마디라도 가려서 하는 나는 내 심리를 타인에게 밝히는 것에 조심스럽다.
그것은 그녀도 어느정도 나와 비슷할 것이다. 그녀의 언뜻 조심스러워 보이는 언행에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나와는 달리 침묵하지 않고 수단을 택했다. 그녀의 특기 분야인 요리. 그 요리 자체에 사람을 이끄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것을 수단으로 관계를 꽃 피운다. 혹자와는 내게 그러하였든 음식을 대접하고 맛있다는 말을 주고 받으며, 혹자와는 서로 요리를 가르쳐 주기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었던 내가 오기 전 까지의 점심 시간이 그녀에겐 쓸쓸했던 것일까. 라는 생각도 잠시지만 스친다.
ㅡ 같은 반인데, 말 조차 못 섞는 것은 아쉽다는 말.
회색 내지는 흑색에 가까운 나는 그것에 그다지 공감할 수 없었다. 아쉽다는 말 마따나 무엇을 뜻하고 있으며 그녀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해와 공감은 다른 것이다. 이해는 이성의 영역이고 공감은 감성의 영역이다. 내게 있어 같은 반의 학우라는 것은 대중교통 옆자리에 앉아있는 타인 정도의 인식에 지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과 말을 섞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타인일 뿐이다.
대수가 인사를 받아주자 넘어졌던 몸을 완전히 일으켜세웠다. 신나서 깡총 일어났는데, 방금 넘어졌던 사람이 하기에는 과한 행동이었다. 이미 상처가 있어서 붙인 밴드가 있었기에 더 까지지는 않았는데, 희생된 밴드가 너덜거린다. 대충 무릎에 꼭 밴드를 붙이고, 내동댕이 치고말았던 보드도 챙기고 표지판 앞으로 갔다.
“너 내 이름 모르지.”
요란스럽기도 한 등장에 이어서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는다. 비호감으로 보이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는데, 워낙 짓궂기가 짓궂고 장난치길 좋아하다보니 서우에게는 불가항력이었다. 대수에게 이름을 모르냐고 질문의 뉘앙스를 담아 말한 것은 맞았는데, 이미 서우는 대수가 제 이름을 모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좋은 핑계가 되었다. 대수에게 별명을 지어부를 핑계. 항구에서 달고나를 만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보니 대수에게 지어줄 별명이 퍼뜩 떠올랐기도 하다. ‘달’고나 만드는 대’수’, 달수. 그리고 바다에 사는 해달 친구 강가에 사는 수달.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이제부터 너 정달수달이야.”
방글방글 웃으면서 서우는 표지판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재밌어보인다면 흥미가 동한다! 서우는 손가락 끝으로 표지판을 가리키고, 대수를 바라본다.
서우 무릎은.... 본인이 신경을 안 쓰지 🤔 익숙한 트릭은 자유구사 가능하고.... 그렇지만 보드 탈때는 보호대를 꼭 합시다.... 서우는 스트릿(도심속 계단 난간 등의 기물을 사용해서 보드 타는거)은 안 타고 파크(보드를 타기 위해 조형된...지형...? U자로 오목하게 파이고 S자로 꺽이고 그런 지형! 에서 타는 거)는.... 헬멧은 한다고 합니다
아진이 방송 잘 들(읽)었다~~~~~~ 기념일도 챙겨주고 예쁜말도 해주는 방송부? 입학수속 밟지 않을 이유가 없다~~~ ☺️☺️ 무릎보호대는 줘도 안할지도......? 귀찮대 요 말안듣는 망아지가 🥰
이상하다는 말은 서우에게 칭찬이었다! 긍정적이라고 해야할지, 청개구리 기질이 튀었다고 해야할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라고 받아들였다. 칭찬받았다고 함뿍 웃는게 절대로 비꼬아 표현하는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서우에게 대수는 서로 대화도 안 해본 사이에 칭찬을 해주는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건 나중의 내가 해결한다!”
충고 아닌 충고를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정달수달’이라고 불린 대수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은 것이 매우 흡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미 반 아이들 지어준 별명이 몇 개인지, 은돌이, 채리, 우굥, 태식법사, 백조, 호랑쇼…… 이제는 정달수달도 추가 됐다. 무슨 뜻인지 설명 안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별명 짓기 전에 이름부터 알아내시지~.”
손에 국자가 들렸다. 나무막대기도 들렸다. 설탕이랑 소다도 있다. 만들어서 주는 줄 알았더니 만드는 거였던 것이다. 서우는 표지판을 다시 읽어보고 ‘당했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준다는 말에 달고나가 명시되어 있지도 않으니 꼼짝없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달고나 만드는 내내 ‘정달수달수’라고 부르면서 놀리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없는 일이 되었다.
“못된 정달수달수….”
달고나 어떻게 만드는지 생각해본다. 달고나 커피는 천번 저어서 만들던데, 얘도 천번 저으면 되지 않겠냐는 결론이 도출된다. 일단 젓자!
이 패턴에서는 그런 말을 하면 안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고 하면 고맙다고 하는 모습을 확인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것 보단 저렇게 웃는게 더 나을지도 모를 일. 일단 이대로 넘어가쟈는 생각에 침묵을 유지하려 했으니 이후의 그녀의 말에 말을 하게 되었다.
"나중의 너도 나중의 너한테 넘기지 않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무한루프, 순환이 시작될거다. 아, 지금 그게 중요한건 아니었다. 이름.. 그래, 이름을 알아야하지. 그렇다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것은 싫었다.
"흥."
나중에 반인원 명단이라도 보면 알겠지 뭐.
"못되든 잘되든 난 안만들어줄거야. 정 누가 만들어줬으면 한다면 네 연인이라도 여기에 데려오던가."
말하면서 그녀가 달고나를 만드는걸 지켜보았다. 재료는 한정되어있으니 그 만들고있는 달고나가 망하는건 그도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달고나를 만드는 방법은 불 위에서 설탕이 녹을 때까지 저어주다가 소다를 조금 넣고, 불 위에서 조금 떨어트린 후 젓는다. 하지만 서우는 달고나 만드는 방법은 몰랐다. 다 섞어서 저으면 뭐가 완성되기는 하겠다는 생각에, 조금 젓다 말고 소다를 들이부으려고 했다. 조금 부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서 일단 설탕과 1:1 비율로 부으려고 했다. 1을 10번 더해도 10이고, 1을 10번 곱해도 10인데 뭐가 나오긴 한다! 과감한 손길이다.
“오, 수달수달수 좀 똑똑한데. 당연한 말씀!”
선뜻 후하게 칭찬을 해준 서우가 다음에 들은 말은,
“흥? 흐으으응? 흐으으으으응?!”
서우의 어이가 증발했다!
“야, 반 친구 이름 모르는 건 너거든?! 흥은 내가 해야되거든?!”
왁왁대면서 손은 차분히 나무막대기를 쥐고서 젓고 있다. 마음 속으로는 몇 번 저었는지도 세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백쉰둘………
“아! 몇번인지 까먹었어! 누가 만들어달래?!”
이렇게 쉽게 자존심이 상했다. 이 달고나를 누가 봐도 훌륭하게 만들고 말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조심스러운 물음엔 꽤나 간단하고 직설적인 말이 와닿았지만 그것 또한 그가 깊이 생각하고 꺼낸 이야기라 받아들인 미나였다. 비록 상대방에 대한 탐색은 버벅거릴 뿐일지라도, 부분부분 조금씩 알아가다보면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들이 있었다. 단지 이해하는 과정이 힘들뿐 그것을 받아들이고서 대응하는건 쉬운 일이니까, 사람은 서로와 마주치면서 늘 그런 알아가는 과정들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게 곧 친분이자 관계성으로 변해나갔다. 그것이 흔한 방법이라곤 할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이해하기 싫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뿐이었다. 아무렴, 모노크롬일 뿐인 세상에도 명암 정도는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을테니까.
"신세랄지... 그정도까진 아니긴 하지만... 응, 그렇겠네.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어떤 이유에서간에 그는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배고픈 나머지 요리부에 몰래 숨어들려던 의도였든, 단순한 호기심이었든... 일단은 몇몇 당당한 학생들처럼 당차게 문을 열고 먹을 것을 요구하는 행동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신경쓰일만한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과한 참견이었을까? 너무 과한 호의가 도리어 그로 하여금 부담감을 느끼게 만든 것이었을까? ...역시 사람의 마음이란건 알기 힘들구나, 제 고향에서도 그러했건만 여기서도 딱히 다르진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미나였다.
비록 소극적이고 드러나는 감정이 별로 없다 해도 엄연히 모든 감각을 느끼고 있었으며 시시때때로 그 기분이 변해갔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런 감정이 드러날까 오히려 감추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게 꼭 악한 면만 감추려 하는 것은 아니기에... 어떤 이들은 그와 반대의 행동을 취하기에...
그 부분까지만 생각해도, 그의 성격은 대강 알수 있었다. 모든걸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도 있더랬다. 그렇게나 조심해도, 자신 역시 말에 있어 실수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사람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제 속내가 드러나는걸 달가워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역시 그건 좀 아쉽단 생각을 하는 미나였다. 그렇기에 사람은 누군가와 대화할 빌미를 만들고, 대화의 주제를 정해나가곤 했다.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아선 이들이라면 애초에 우리들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애초부터 자신만의 '동굴'에 둥지를 짓고 외부의 출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쯤에서 미나는 받아들일수 있었다. 딱히 꺼려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즐기는 건 또 아닌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는 걸...
"응, 그런 거야."
긴 침묵에 이어진 짧은 한마디와 그에 곁들여진 희미한 미소였지만, 그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는 단순한 대꾸여도 미나는 이따금씩 그랬던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 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어쩌면 그렇게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침묵은 때때로 오해를 만들기도 했다. 단지 말로 꺼냄으로서 오해받는 것보다 리스크가 적을 뿐, 그것조차 감안하고서 입을 닫은 사람이라면... 그녀는 어느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 역시 그런 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보였으니.
"물론 길거리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친근하게 굴진 않아. 그건 무리, 나같은 애가 어떻게 그런걸 태연하게 실행하겠어? 그나마 나은거라곤 이렇게 요리할줄 안다는 것 뿐인데..."
여전히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미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표정이 바뀌었다. 차분했지만 매마른 표정은 아니었고, 여전히 풀린 눈매와 동공이었지만 차갑다기보단 온화한 느낌이었으며, 가볍게 올라간 입꼬리도 보기좋게 휘어져 있었다.
"그치만... 거의 매일같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학교 친구들은, 아주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그게 비록 1년밖에 남지 않은 우리같은 경우라도 말야..."
어차피 같은 학년이겠다. 굳이 '우리'라는 단어로 강조해 기세좋게 쥔 주먹을 제 가슴께에 폭,하고 얹었을까? 곧 손을 거두고선 그대로 눈을 곱게 접어 비스듬하게 기울인 머리로 미소짓던 미나는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금 자기 몫의 점심을 위해 포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서 바라본 달고나는 ‘달고나’라고 부를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불을 줄이라는 대수의 말이라도 들어주어서 타지는 않은 듯 한데, 색깔은 이미 탄 색이다. 원래 달고나는 제대로 만들면 서우의 원래 머리카락색인 뿌리 부분과 닮은 색이 나오는 듯 했는데, 이건 화이트데이가 아니라 발렌타인데이에 연인들끼리 주고 받아도 될 것 같다. 좀 못 만든 초콜렛인 줄 알겠다.
“뭘 먹어, 뭘! 먹으면 암 걸리겠는데!”
탄 거 먹으면 암 걸린다는, 어디서부터 시작된걸지 모를 말. 근데 이걸 버리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대수에게 다 먹으라 하기에도 그렇고. 서우는 달고나를 반으로 나눴다. 둘이 나눠먹다 둘이 죽을지도 모를 맛은 아니길 바라면서, 반으로 나눈 달고나와 아까 샀던 츄파춥스 중 하나를 꺼냈다. 아무거나 하나 집히는 대로 꺼내서 무슨 맛인지는 서우도 모른다.
“내 사탕인데 진짜 특별히 준다, 특별히. 하…. 내 이름도 모르는 애한테 이렇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사탕 하나 주면서 말이 길다. 서우는 그러고서 거하게 망친 반쪽짜리 달고나를 조금 물었다. 얼굴로 말한다. 맛없어….
정말로 기분이 좋은 건지 드러나지 않은 표정 탓에 그녀의 속을 비추어보진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점심 시간을 같이 보낼 뿐인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와의 이야기 ㅡ라고 하기엔 단답 형식의 것들 뿐이었지만ㅡ 를 하며 그녀 역시, 표정의 변화가 그다지 많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알고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칭찬에 기뻐하는 것보다는 다른 생각에 매몰 되어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녀가 내 칭찬을 듣고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싶다든지 그런 흑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어쨌거나 상관 없는 일이다. 그녀의 표정 뒤에 숨겨진 심리를 파헤치기 보단, 표면적인 말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될 뿐이다.
ㅡ그 정도까진 아니긴 하지만.ㅡ 이 말 또한 표면 그대로의 의미로 그녀에겐 그 정도랄 것도 없는. 즉,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요리부실을 찾아오는 불특정다수의 굶주린 양에게 일용할 양식을 베푸는 것은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렇게, 어쩌다. 우연히. 불현듯. 내게로 베풀어진 특별할 것 없는 사실 호의랄 것도 없는 그녀의 습관에 더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그래도, 고마워."
고마워라는 이 세 음절의 말도 그녀는 아마 흔하게 들어봤겠지만. 나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호의를 나누고, 감사를 주고받을 만한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한 탓에. 여전히 낯설기만한 단어였다. 그렇기에 더욱더 나는 한 음절, 한 음절 조심스레 꾹꾹 눌러서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오늘 아침에 빵집이 문을 닫지만 않았더라면, 점심 쯤에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 이 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받아낼 수 없었던 그런 호의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언젠가. [그녀]가 내게로 했주었던 말과 어딘가 비슷했다. 그에 조금 놀란 탓에 나는 드물게도 나른하게 내려와 있던 눈꺼풀을 치켜뜬 모양이 되었다. 말 하지 않으면 모른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과 다를게 없다고.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거짓말.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거짓말.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기만하고, 모른척 하도록 내버려 둔다. 나는 어쩌면 거짓말쟁이 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치켜뜨게 되었던 눈은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며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침묵하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말 할게 없다면 어떻게 해."
평탄한 어조의 대꾸 어쩌면 그녀의 말에 대해 비아냥대는 말로도 들릴 수 있었겠지만,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옆에서 초등학생이 달고나를 만들때보다 더 착실하고 열심히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 모든 소리는 들을 수 없었나보다. 나는 이렇게도 열심히 했건만. 이래서 호의를 계속주면 둘리가 된다고 하는 것 같다. 초코렛처럼 생기긴 했지만 먹으려고 한다면 못 먹을 건 아니었다. 조금 쓴 맛이 마치 옛날 사탕을 먹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
내밀어진 그 막대사탕을 이해못한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그녀가 한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 누구보다 침착하게 그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나도 이름 모를 사람한테 무언가를 받는 사람은 아닌데.."
라고 뒷 말을 아꼈고 멍하니 사탕을 바라보았다. 그건 번역하자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였다.
발음이 다 뭉개진 이유는 표정이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서우는 무언가 먹을때 한 입 가득 물고서 오물거리는 버릇이 있는데, 이 달고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한 입에 다 먹고 싶지도 않았고, 맛도 없고, 손바닥 반절만한 크기의 달고나를 야금야금 먹으며 괴로워했다. 그래도 동생이랑 같이 먹을 밥도 차리고는 하는데 뭘 했다고 이렇게 맛없는게 나왔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츄파춥스를 하나 더 꺼낸다. 역경의 시간을 견딘 혓바닥에게 단 맛을! 이번에 집힌 맛은 레몬맛. 텁텁하고 쓴 달고나맛을 환기시키기 좋은 상큼하고 깔끔한 단맛이다.
놀이는 놀이. 허나 돌리는 사탕은 따로. 이것이 은우의 이번 화이트데이의 방침이었다. 물론 방금 전, 아주 제대로 타바스코 소스에 담근 사탕을 먹고 비명을 질러대면서 패배했던 그였기에 바로 새로운 게임을 하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름 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매워서 발을 동동 굴렸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괜히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제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의 반으로 돌아온 그는 우선 반에 몇 명이 있는지 체크했다. 점심시간인만큼 텅텅 비어있는 교실을 바라보며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간 후에 책가방을 열었다.
거기에 들어있는 건 일일히 하나하나 색색의 포장지로 포장한 작은 사탕들이었다. 사각형 모양이 찌그러지지 않게 잘 포장을 한 것이 보통 정성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비어있는 자리에 하나하나 몰래 놓아두며 은우는 만족스로운 표정을 지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람마다 랜덤으로 하나씩 넣은 색색의 츄파춥스 2개와 입에서 톡톡 튀는 팝핑캔디 하나였다. 굳이 팝핑캔디를 넣어야 할 이유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은우는 그쪽이 조금 더 재밌는 추억이 되지 않겠냐라고 답할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츄파츕스도 두 개나 넣었으니까 별 문제가 될 건 없지 않겠는가.
반에 있는 책상에 모두 하나하나 다 놓으니 그가 가지고 있는 사탕이 조금 남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남은 것들은 이제 또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아주 잠깐 자신과 놀았던 그 후배에게도 하나 줄까 싶었으나 지금 만나러 간다고 한들 왜 또 왔냐는 눈빛 공격만 당할 것 같았기에 굳이 가지 않기로 그는 마음 먹었다.
"그럼 이걸 다 돌린 다음엔 또 뭘 해볼까."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줄 생각은 그에겐 추호도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모두와 함께 즐기는 날. 이른바 은우에게 있어선 하나의 축제였다. 마음 같아선 화이트데이니까 사탕을 모조리 감춘 후에 괴도 캔디맨을 자청하며 사탕 복면이라도 끼면서 이벤트라도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담임인 산혁에게 얇은 공책으로 가볍게 맞을 것이 분명했으며 선도부 일원들이 자신을 쫓아다닐 것이 뻔했기에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다. 허나 조금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는 아주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를 지으며 그는 휘파람을 불며 교실 밖으로 나섰다.
"자. 그럼 어디로 가볼까."
아직 돌아볼 곳은 많았다. 남아있는 사탕도 많았다. 이렇게 돌아다니다보면 언젠간 다 돌리겠거니 생각하며 은우는 복도로 천천히 걸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일상이 시작하는 것이 보이는구나. 그렇다면 난 그것을 구경해보도록 하겠어! 그리고 소라고둥이라... 뭔가 하늘주가 쓰는 시는 대부분 하늘이의 과거 심리나 현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그럼 언젠간 밝은 느낌의 희망찬 시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으려나.
"조금, 신기한 이야기에요. 만남 말이에요. 상자 속에 있으면 알지 못할, 수 많은 사람들 중, 우리는 만났잖아요. 신기한 이야기에요.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바다에 발을 담그고 즐겁다는 듯 마주 웃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좋겠어요. 좋겠네요. 분명 좋아요."
열심히 치우고있는데 거기서 치우는걸 방해하는건 도대체 무슨 경우일까.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도 나쁜지. 점점씩 빠르게 빠르게 움직여 보지만 결국은 치우는 쪽 보다는 방해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이걸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며 콧등을 매만졌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이런 장난은 안 친다던데.."
결국은 완곡하면서도 음습한 말을 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기를 정리하고도 부실도 정리해야 했기에 그는 내심 초조했다. 집에 늦게가게 되는 시간낭비는 누구나 싫어할 일. 이럴 줄 알았다면 메롱은 하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이미 내뱉어진 말이고 그걸 취소 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이렇게나 삐지기 쉬운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넌 그런 속좁은 사람이 아니잖아?"
마치 타이르는 듯 그녀에게 말하고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이 정도 말했으면 그녀도 멈춰주지 않을까.
다운은 200원짜리 싸구려 사탕을 입에 집어넣으며 생각에 빠졌다. 사탕을 먹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이룬 기분이 든다면 그것대로 괜찮은 날 아닌가. 아니면 단순 내가 단순해서 그런걸지도. 혀로 사탕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쪼글쪼글해진 입안을 훑는 것도 잇지 않았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두세번 반복하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두운 구석 오래된 가로등 덕에 겨우 볼 수 있는, 그런 싸구려 커피 자판기가 눈에 보였다. 300원만 넣으면 코코아든 커피든 내놓는 작고 편리한 카페라 할 수 있겠다. 다운은 수영 가방을 잠시 옆에 두고 지갑을 꺼냈다. 퀘퀘묵은 오랜 취향이라 한소리 들은 적 있으나 다운은 이따금씩 이곳에 찾아오곤 한다. 특히 오늘은 날이 추워서 따뜻한 음료수가 마시고 싶었다. 여유롭게 500원을 집어넣고 코코아가 대령되기만을 기다리면...
"어."
이게 왠일인가. 나오라는 컵은 안나오고 대뜸 코코아만 줄줄 나오고 있지 않는가. 다운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을 허우적거렸다 코코아로 손을 잔뜩 적시고 말았다. 앗, 뜨거어...!! 만약 다운이 좀 더 말이 많고 표현이 다채로웠다면 분명 그렇게 소리질렀을 것이다. 표정도 잔뜩 구긴 채로 말이다. 그러는 대신 다운은 자신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날이 추우니 몸 녹였다고 생각하면 될까. 어두운 밤하늘 아래, 그보다 더 어두운 낯을 하고있다.
아주 가끔은... 제대로된 표현 하나 하지 못하는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해온 미나였다. 할줄 아는거라곤 그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중들의 시선을 받을 때, 자신의 재능이 축복받은 것임을 대변하기 위한 웃음 뿐이었다.
물론 그것이 거짓된 감정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실제로도 기뻤으니까... 누군가의 시선에 자신의 모습이 맺히고, 그것이 부러움과 존경의 시선이란걸 느끼는 것은 모두가 한번쯤은 꿈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웃기만 해서일까, 언제부턴가 다른 표현방법을 잊어버렸단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다투어 상처받아도, 애지중지 키우던 동물의 생이 다해도, 어쩌다 유감스러운 일을 겪게 되어도, 그저 멋쩍게 웃어보이며 별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모든 감정의 고리가 기쁨이라는 단어 하나에 연결되어버려서, 웃지 못할 상황에선 자연스럽게 입을 닫고 말았다.
그럼에도 한가지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감정이 있는만큼 무수한 사람들의 감정이 있다고, 비록 잘 닿지 않는 감정이라도 공유할 수는 있다고, 정말 이해와 공감이 별개의 것이라면 자신은 비록 타인의 마음을 쉽게 이해할수 없을진 몰라도 그 감정에 함께 녹아들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상대방의 말을 이해 못하기에 자꾸만 되물었고, 구태여 의미를 찾으려 했으며, 말하지 않는 감정엔 솔직하게 답해줄 수 없었다.
벽에다 대고 말해도 메아리치는게 훨씬 더 낫다 할만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눈칫밥으로 대강 상황을 넘겨가며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왔을 뿐이었다.
단지 순탄하게 살아왔을 뿐... 어차피 보다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않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반경도 의도적으로 줄였을 뿐이다.
"응, 나도 고마워. 이렇게 이야기 할수 있게 해줘서."
한음절씩 나눠진 그의 한마디는 아마 나름 진지하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나였다. 그렇기에 언제나 그렇듯 진심으로 웃어보였을까? 넖게 보면 모두에게 같은 감정, 관심, 호의를 품는 것이지만 그 개개인에 대한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아무렴, 자신이 대한 사람도 성격이 제각각인데 자신이라고 똑같을 이유가 있을까? 어떤 때는 사뭇 다른 이미지에 주의를 기울였고, 어떤 때는 정 반대인 사람에게서 동질감을 느꼈으며, 지금은 약간 다를지라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에 평온했다.
모두를 향한 호의, 하지만 개개인에 맞추어 신경을 쓰는 선의. 그것은 얼핏보면 비슷하되 마냥 같을 수는 없었다. 우리가 모든 별을 별이라고 통틀어 말하지만 그 별들에게도 각자의 이름이 있는 것처럼,
"......"
표정의 변화, 잠깐이지만 무언가 스쳐지나간 것인지 눈을 치켜뜨는 그의 얼굴을 미나는 확실히 캐치해냈다. 침묵을 깨고 돌아온 말은 비아냥거림으로 들릴수 있는 지극히도 평탄한 어조,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말을 꺼낸 이는 아니란것쯤은 지금껏 나눈 대화로도 얼핏 알수 있었다.
"애써 말하려 하지 않아도 좋아. 분위기에 억눌리는건 싫잖아? 입에 내놓을수 없을 만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스스로를 다치게 할수도 있으니까,"
몇번씩 생각해보고 내뱉는 말, 아마 그도 그럴 것이다. 말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해할 것이다.
"중구난방이어도 좋아. 이미 터진 말문이라면 이야기 하면서라도 생각을 가다듬으면 돼. 솔직히... 이 세상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입을 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니?"
사람의 실수 대부분은 입을 통해 일어난다. 그것이 악의를 품은 폭언이든, 잘못 이해하고 있던 오해든, 행동적인 실수보다도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언어적인 실수였다. 자신 또한 그래왔으니까, 완전히 같진 않더라도 어느정도는 비슷한 그 역시 별다를건 없으리라 생각하는 미나였다.
"그렇다고... 입을 닫진 말아줘.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거나 마찬가지니까."
아직 파스타의 소스가 묻어있는 포크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대는 미나의 모습은 얼핏 검지를 들어 제 입술을 지긋이 누르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건... 그렇네. 사람과 부딪히는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단 거겠지만... 응, 어디까지나 내 의견일 뿐이야. 지금 이렇게 말하는 나도, 가끔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때가 있는걸."
화이트데이. 사탕을 주고받는 날. 그를 기념하여 오늘 수예부에선 사탕 모양의 쿠션을 만들었다. 본을 뜨고, 천을 오리고, 박음질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 건 작은 분홍색 쿠션이었다. 아이들은 만들다가 떠들고 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하늘엔 해 대신 달이 떠올랐다. 그제야 더 늦으면 잔소리를 들을 거라 판단한 아이들은 집에 갈 준비를 하였고, 채린도 그 무리에 포함되었다.
가짜 사탕을 품에 안고 집으로 향하던 채린은 허름한 자판기 따윈 상관하지 않고 걸어갔다. 평소라면 그대로 지나쳐 정류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가로등 불빛에 비춘 얼굴이 생소했다면. 채린은 정확히 자판기로부터 세걸음 걸어갔을 때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아는 얼굴이다. 이름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너도 부 활동 이제 끝났어?”
채린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보고 그렇게 추측했다. 어쨌든 같은 반이니까 인사나 하고 헤어질 생각으로 다가가던 채린은 이상할 만큼 빨개진 다운의 손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또 메롱, 혓바닥을 내밀었다. 대수가 치우면 다시 가져다놓고, 속도를 올리면 똑같이 속도를 올렸다. 멈추면 똑같이 멈춘다. 서우에게 요즘 초등학생들은 이런 장난 안 친다는 말은 그닥 영향이 없었다! 청개구리에 사고치고 말 안 듣고 장난치기 좋아한다. 말광량이, 제멋대로 들판을 헤집고 뛰다니는 망아지다. 노려보는 대수에게 빵끗 웃는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을 줄 알았다. 정말 즐거워서 웃는 거였다면 좋았을텐데 약 올리기 위함일 뿐이다!
“속 좁은 사람 맞는데~. 그래도 내가 이겼으니까 그만할게!”
메롱도 서우가 두 번 더 했고, 이 정리 방해도 대수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고 판단했다. 서우는 눈꼬리를 물결표로 만들어 눈웃음지었다. 이겨서 신난 거다. 돗자리에 올려뒀던 것들을 다시 돗자리 밖으로 빼며 이제서야 도와준다. 정달수달수, 공책에 추가해 적어야겠다고 집 돌아가면 할 일을 하나 추가했다. 무릎에 반창고도 새로 붙…이기는 귀찮다.
“근데 내일도 달고나 만들어? 학교에서는 안 해? 우리 반 애들도 만들었어? 누가 제일 잘 만들어?”
조용히 도와주면 좋았을텐데! 질문들이 끊이질 않고 나열된다. 또 번복됐다. 다시 완벽한 달고나를 만들 마음이 든 모양이다. 오늘 답해주지 않으면 분명 내일 학교에서 쫄래쫄래 쫓아다니면서 귀찮게할 것이 분명해보인다.
마침 행인이 있는 줄도 몰랐다. 불쑥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다운은 고개를 틀어 채린을 보았다. 연보라색 머리카락에 처진 눈꼬리,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름이 채... 채....... 채민이었든가. 그런 실 없는 생각을 하며 다운이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수영 가방이 아니더라고 덜 말라 축축한 머리카락과 학교 체육복을 보면 부활동이 이제 막 끝났음을 알 수 있었으므로 다운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응, 너도 늦게까지 부 활동을 했나보구나."
다운의 시선이 사탕모양 쿠션에 머문다. 귀엽네. 자신의 손은 잊고 역시 영양가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 그런 속내와 달리 겉은 몹시 진중해보일 뿐이다. 우묵한 두 눈에 그늘이 서린다.
"별 일은 아니야.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상황 설명은 불필요하다 여긴 탓에 대충 얼버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멍청한 짓을 하다가 손을 데였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찬 물에 손 좀 담그고 하루정도 신경쓰면 다 낫는 상처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서도... 저 분위기에 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또 심각한 일처럼 보인다. 그도 잠시, 다운은 무언가 떠올렸다는 듯이 고개를 처들고 채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에게서 이겼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여기에서 반박하는건 멍청한 행동이라 생각해 그저 만족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무엇일까. 이 심장 가운데서 차오르는 기분은.. 뭔가, 뭔가 엄청나게 차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을 강제로 억누르고 말했다.
"이건 오늘만을 위한 이벤트. 내일은 안 할거야."
굳이 따지자면 이벤트가 아닌 부활동을 조작하기위한 작은 자원봉사의 일환이었지만 뭐 어떤가. 이 사실은 그녀가 알 필요는 없었다. 이 대답으로 학교에서도 하지 않을 것 이라는 대답도 되었기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또 다른 많은 질문이 있었고 정말로 질문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몸에 부족한 산소를 공급하며 말했다.
"우리반 애도 한 명 만들었지.."
그건 바로 정대수. 그 였다. 이벤트를 시작하기 전에 버너가 잘 작동하고 국자가 달고나를 하기에 적합한지 조사를 했어야 했으니.
화상만 아니었다면 부 활동을 했냐는 말에 채린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었기에. 자고로 환자의 입에서 나온 괜찮단 말은 믿지 말라고 했다. 눈이 크게 뜨였던 방금과 달리 이번엔 슬며시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이 이 꼴인데 별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원래 다쳤을 때 초기 대처가 가장 중요한 거 몰라? 너 운동하지? 그럼 몸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거 아냐.”
다친 정도는 의사가 판단할 일이지 환자가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괜찮다고 방치했다가 나중에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심지어 운동하는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더 심각한 일이다.
“어, 뭐? 있는데.”
채린은 뜬금없이 이 상황에서 포스트잇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포스트잇이 가방 안에 있기는 했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꺼내주는 거야 쉬운 일이었지만, 그 대신 채린은 다른 행동을 했다. 품에 안고 있던 쿠션을 한 손으로 잡고는 다운이 화상을 입지 않은 쪽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살짝 힘을 실어 제 쪽으로 당기려고 했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내게로 그렇게 말해오며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을 그저 마주 바라보았다. 그 시점에선 음식을 먹던 손도 놓아버린지 오래였다. 배가 전부 찼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리했듯 휘몰아쳐 오는 생각의 급류에 휩쓸려 다른 행동을 못하게 되었던 탓이다.
나는 단 한번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헤아려보려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신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이 두려웠다. 막연하게도 그것이 심연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에도 감정, 관심, 호의를 보이지 않으며, 스스로의 껍데기 안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런 내게 먼저 다가와주는 사람이 없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거부하는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다가왔던 사람들은 금새 나에게 질려 떠나갔다.
그들을 탓 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분명 나에게 있었겠지, 그들이 먼저 자신의 마음을 꺼내 보여주는 것을 나는 못 본체 하며, 내 마음을 꺼내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이 두려웠으니까. 그리하여 계속된 단절은 자의식의 껍데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갔다.
그런 내가, 내 앞의 그녀에게 속 깊이 묵어있던 고름을 뱉어내듯 [그녀]에게 조차 묻지 못했던 질문을 뱉어내었다는 것에 나는 동요할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던, 오늘 처음 이야기를 나누어 본 최미나라는 여학생에게 그런 말을 뱉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그것을 자각하자 나는 손으로 입을 급하게 틀어 막았다. ㅡ음식을 먹고 있던 중이 아니라는게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분명 사레가 들렸을 테니까.ㅡ 그 과정에서 포크 따위가 떨어졌는지 지면에서는 금속음이 울렸다.
한 순간에 내가 헐벗겨진 것만 같은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내가 던진 질문에 그녀는, 그런 나를 비웃거나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어오는 것이 아닌 ㅡ나 홀로 걱정하고 있었던 반응이 아닌ㅡ 진지하면서도 나긋한 말로 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언령이라는게 있다. 신앙적인 부분이지만, 말에는 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허투루 뱉은 말이라고 해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면전에 막무가내로 폭언을 퍼붓고나서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그냥 장난이었구나~ 하며 넘길 수는 없을거다. 과격한 발상이고 감정의 문제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어떤 형태의 말이든,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에 나는 동의하는 쪽이었다.
그렇기에 중구난방으로 말을 먼저 터뜨려놓고 이후에 수습을 한다는 건 꽤나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습에 실패한다면 그 이후는? 단절이 아닌 파탄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실수나 오해에서 비롯한 악의적인 말들이 오가기도 하며, 그 말들은 관계자 뿐만이 아닌 그 주변인들에게도 흘러들어간다.
학교라는 환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말에 의해 사람에게 소문이 생기고, 낙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을 봐왔기에, 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ㅡ그렇다고 입을 닫진 말아줘.
이후에 이어지는 말에 나는 그제서야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흔들리고 있던 동공의 초점을 맞추어 다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녀]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게 되니 순간 두 모습이 겹쳐보이기도 했다.
한쪽 눈을 감은 잔망스런 그녀와 마냥 해맑은 미소를 짓고있는 [그녀]의 표정이 서로 오버랩 되었다. 단발이라는 것 외에 다른 외양적인 부분 부터 성격적인 부분까지, 닮아있는 것은 없었지만 말 한마디에 그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말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일까. 방금까지의 희미했을 뿐인 미소가, 무기질적이었던 얼굴에 생그러움을 들이는 밝은 미소로 바뀌어 푸스스 웃고 말았다.
"알려줘서 고마워, 정말로."
역시나 짧은 말이었지만, 방금처럼 의식하여 조심스레 눌러담은 감사가 아니라 내가 그녀에게 느낀 감정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전했다.
치킨 부럽다! 치킨! 큭!! (털썩) 나도 다음에 치킨 먹을거야!! 아무튼 은우는 딱히 뭐 비설이 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보니. 어릴 적에 뭔가 상당히 큰 사건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를 긍정적으로 지내려다보니 즐거움을 추구하게 되었다..같은 건 없다. (시선회피) 그냥 어릴 때도 이런 놈이었어. 아니. 더 심했지. 일단 아파트 단지의 벨튀 장난부터 시작해서..(이하생략)
채린이 저렇게 진지하게 나오니 다운 역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긴 화상 입으면 따끔따끔할거고, 손에 물집 잡히면 그것대로 싫고... 나는 운동하니까 몸도 소중히 여기는게 맞고... 이렇게 생각하니 또 초조해진다. 그렇다. 다운은 귀도 얇았다. 다운은 평소처럼 무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묘하게 풀이 죽은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얌전히 채린 쪽으로 줄줄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멈추어서서는 손바닥을 보이는 것이다.
"잠깐, 포스트잇 좀 빌려줘."
그리 말하며 손을 약하게 풀었다. 멀쩡한 손으로 가방을 뒤적거린다. 가방속에서 꺼낸 것은 작고 볼품없는 필통이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그 필통을 썼는지 딱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헤져있는 상태였다. 다운은 거기서 또 샤프 하나를 꺼낸다. 역시 오래되어 보인다. ...지금까지 이미지로 보면 폴더폰을 사용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수준이다.
"사실 커피머신이 고장나 있더라고."
다운은 잠시 고민하다 겨우 말을 덧붙인다. "그래서 손이 데였어. 안타까운 일이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꽤 서글퍼보인다. 포스트잇을 받아들어 몇 글자 적는다. '컵이 다 떨어졌습니다. 주의.' 음. 예쁘게 써졌다. 다운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커피 머신 앞에 붙여놓았다.
"근데 이 시간에 여는 병원이 있을까? 난 정말로 괜찮은데. 찬 물에 잠시 손 담그면 될 것 같아. 근처 화장실을 알아?"
라며 또 얌전히 자신의 손을 내민다. 아까 잡았던 부분을 다시 잡으라는 듯. 끌려간다는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뭔가 서월이는 약간 시트에서도 느껴지는 거지만 뭔가 자신만의 영역이 상당히 강할 것 같은 느낌 아닌 느낌이야. TMI도 아주 잘 읽었다!
>>315 그다지 위험하지 않는 선에서라면 익스트림을 상당히 즐기지! 화이트데이 일상에서도 봤다시피 타바스코 캔디를 가지고 와서 자기 자신도 똑같이 캔디룰렛에 참여를 한다거나..(그리고 패배) 아. 내기는 은근히 즐기는데 돈이 걸리는 도박은 즐기지 않아. 그런건 은우 기준에서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고 그 끝이 절대 즐거울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아마 어른이 되어도 카지노나 그런데는 절대 안 갈거야.
‘오늘만을 위한 이벤트’라는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이고 눈을 깜빡였다. 이해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아 금방 알아챈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내일은 안 한다는 말에 시들시들 물 며칠 안 준 새싹처럼 풀이 죽어 노랗게 변한 것마냥 축 처지려 했으나, 화이트데이만을 위한 이벤트였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니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 하나가 더 나왔다!
“그럼 내년에도 해?!”
내년에도 화이트데이는 있다. 내년에도 한다고 그러면 분명 달고나 만들기 연습이라도 해올 기세다. 서우의 목표는 완벽한 달고나 만들기였지만, 더 세세하게 서술한다면 ‘정달수달에게 완벽한 달고나 만드는 것을 보여주기’였다.
“우리 반 애?! 누구! 아―설마. 걔 이름도 몰라?”
가장 잘 만드는 사람이 누군지 미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내일 반 아이들한테 ‘정달수달이랑 달고나 만들었어?!’하고 물어보고 다녀야 하나 싶다.
“누군진 몰라도 내가 이길거니까 기다리라 그래! 아, 모른댔지.”
대수가 모른다고 답한 적도 없는데 이미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그 달고나를 가장 잘 만드는 우리반 아이가 지금 눈 앞에 바로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고추 바사삭 맛있지........ 치킨도 먹고 싶고 국밥도 먹고 싶고 먹고 싶은게 많네~~~~~~~~ 으악
>>318 ㅋㅋㅋㅋ 맞아 그래서 5연속 걸렸던가..... (ㅋㅋㅋ) 그때 재밌게 구경했어. 아무래도... 도박은.. 응응.... 그렇지... 내가 말한 도박은 뭔가 리스크를 걸고 시도한다?의 느낌이 강했어. 아무튼 맞아... 건강하게 놀아야지..... 카지노 가면 이 할미는 울거닷....
은우 독백이랑 하늘이 독백 읽었다~~~~~~ 😋😋😋 은우 반 애들한테 사탕 돌린거 익명이겠지?!!? 익명이 아니라면 사탕으로 샤워를 시켜주는건데........ (적어도 책상만이라도) 😊...... 하늘이 독백 죽은 소라라는 단어가 너무.... 울려..... 소라 껍질은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닷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 또한 죽음이라고 하는 거 같고 우아아악 🥲🥲🥲
내년에도 이 레저스포츠부가 건재하다면 어쩌면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또 같은걸 하면 식상하게 느껴질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지금 당장 내년의 일을 생각 할 필요는 없지. 설령 할 확률이 1할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라는건 있는 것. 적당히 대답했다. 세간에서는 이걸 플래그라고 하던데.
"이름? 아는데?"
그런데 두 명중에 가장 잘 만드는 사람에 큰 의미가 있는건가 싶었으나 그런건 상관없었고 어떻게든 누군가에게 이기고 싶은 것 같았다. 도대체 뭐에 그렇게 경쟁을 하고있는건지.
"뭐..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전해둘게."
그건 나지만 말이야! 내가 나에게 전언이라니 웃기는 말 이지만 거짓말은 아닐테니 양심의 가책이란 없었다. 그렇다기보다 왠지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이 나라고 하면 뭔가 매우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며 당기던 손이 다른 힘에 의해 멈추어진다. 당연하게도 평소 운동을 하는 이와 운동이라곤 숨쉬기밖에 하지 않는 이의 힘 차이는 뻔하다. 저쪽에서 멈춘다면 더 당길 순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운이 무얼 하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곧 자판기에 포스트잇이 붙는다. 채린은 그것에 적힌 문구를 읽었다.
“뭐 하나 했더니 이거 쓰려는 거였어? 너 되게 착하다.”
자기가 다친 와중에 남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나 보다. 착하다. 성실하다. 착실하다. 채린의 머릿속에 그 정도의 수식어가 떠올랐다. 아마 저라면 그냥 병원이나 갔을 것 같아서.
“응?”
채린은 다운이 내민 손을 보았다. 아까야 병원 가는 걸 거부했으니까 일부러 끌고 갈 필요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굳이 잡을 필요가 없단 뜻이다. 하지만 모처럼 제안이 받아들여져 기분도 좋았고, 말을 바꿀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냥 잡아버리기로 했다. 채린은 방금 잡았던 곳을 살포시 쥐었다.
“응급실 가면 되잖아? 아, 너무 머네... 으음... 일단 근처에 공원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여기서부터 병원까지의 거리와 화장실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면 압도적으로 후자가 짧았다. 일단 다운의 말대로 차가운 물이라도 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채린은 손목을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실으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본인이 하고 싶기 때문에 하자는 의도를 숨길 생각도 없다. 같은 반이라고는 해도 이제서야 처음 대화해보는 사이인데 서스럼도 없이 원하는 바를 조르고 있다. 대수가 안 한다고 해도 별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걸 서우도 알았기 때문에 말 끝을 쭉쭉 늘리다가 그만두었다. 어쩔 수 없다. 혼자 집에서 달고나 만들어다가 제일 잘 만들어진 것 같을 때, 그걸 대수한테 갖다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겉보기에는 꽤나 시무룩해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 속내는 영 반대다.
“안다고?! 근데 왜 내 이름을 몰라―!”
또 삐진다. 아까 전 독 가득 오른 복어처럼 볼을 부풀렸었는데, 지금 한 번 더 그랬다. 또 폭 하고 공기 빠진다. 분명 그 누군지 모를 우리반 애 이름도 달고나를 가장 잘 만들어서 알고 있는게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꼭 전해, 꼭. 내일 눈 마주쳤는데 도망가면 걔가 범인이다….”
달고나 만드는 거로 이길 거니까 기다리란 말 듣고 도망간다면, 무서워서 피한다기보다는 이상해서 피하는 쪽이겠지만. 내일 2학년 1반 친구들은 갑자기 서우의 눈초리에 시달릴 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다운은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어 그저 고개를 기울였다. 묵묵히 채린의 얼굴을 바라본다. 확신의 찬, 그늘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다운은 대체로 이런 사람들을 편하게 대했다. 괜히 오해하지 않고, 말 섞기도 좋다. 그래서 다운은 불쑥 제 이름을 들이밀었다.
"다운. 한다운. 내 이름이야. 너는?"
너무 설명이 없나 싶어 뒤늦게 말을 이었다. 말과 말 사이 어색한 침묵이 급하게 메꾸어진다. "고마워진다면서. 빚 갚을 사람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음, 적절한 수습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다운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뿌듯함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잘했다, 나 자신.
"글쎄... 난 네가 친절하다고 여겼는데. 보통은 이런 거 별로 신경 안쓰잖아."
당장 본인이었어도 무시하고 지나갔을 터였다. 특히 병원까지 데려다 줄 생각은 일절 없었을 거고, 공원까지 가는 것 역시 귀찮은 짓... 아, 나 혹시 귀찮은가?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다운이 뻣뻣하게 굳는다. 나는 좋았다 생각한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귀찮은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운은 잠자코 채린을 따라가면서도 맥락 없이 묻는다.
"안 귀찮아?"
앞뒤 다 짤라머고 묻는 건 언제쯤 고쳐질지 의문이다. 이런 어투가 오해를 더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다운은 전혀 모르는 듯 했다.
푸석푸석한 새하얀 밥알갱이들이 이빨 사이에서 눅은내를 풍기며 형편없이 부스러진다. 돼지고기 고추장 볶음의 감칠맛은 짜고 매운맛은 쓰다. 입안을 씻어내려 깨문 김치는 눈쌀을 찌푸릴 정도로 시큼했고, 섬유질은 마치 낚싯줄을 한 다발 씹어먹은 것 같았다. 무나물은 시척지근했고 미지근해서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연근전을 입안에 넣고 씹자 어설프게 굳은 찰흙을 입 안에 넣고 씹는 것 같다. 맛이 변하지 않은 것은 물뿐이되, 물을 마셔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소녀의 밥그릇에 담기는 밥은 나날이 줄어가고 있었다. 밥공기가 불룩하도록 산더미같이 고봉밥을 쌓아놓고 원기왕성하게 먹어치우고는 쨍쨍한 목소리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꽥꽥거리며 뛰쳐나가던 소녀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밥공기의 절반을 겨우 넘길까 말까 한 양의 밥도 채 다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소녀에게 걱정스레 질문을 던졌다.
"...입에 안 맞니?"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순간을 끔찍히도 싫어했다. 그 순간 소녀의 얼굴에 스치는 감정들을 눈치채지 못할래야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죄책감. 두려움. 고뇌. 그리고, 그것을 덮어버리기 위해 황급히 지어내는 가벼운 웃음
"아니- 엄마가 해 주는 밥인데 항상 맛있지. 그냥, 그, 알잖아. 오늘따라 입맛이 좀 없네."
소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런 대답을 하는 순간을 끔찍히도 싫어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서리는 표정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깊은 수심과 고뇌. 무력감. 허탈감. 그리고, 그것을 덮어버리기 위해 이제는 익숙하게도 꾸며내는 인자한 웃음.
"입맛이 없다면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지. 아침에 너무 과식하면 안 좋기도 하고."
어떻게든,
"뭐 그렇지~ 우리 반에 애들 태반은 아침에 입맛 없다고 아침을 아예 거르는데."
일상적인 것처럼.
"그래도 과식하는 것도 안 되는 것이지만, 아침을 조금이라도 먹는 게 좋기야 하지. 아침부터 기력이 너무 없어도 곤란하잖니."
흔히 있는 아침처럼.
"그게 맞긴 해. 항상 맛있는 아침밥 고마워요, 엄마."
최대한 가볍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나누는 그런 대화들.
"얘는 별 소리를 다. 늦겠다, 어서 출발해야지."
자연스럽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이렇게 조심조심하지 않으면, 이 순간이 와르르 무너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왜 항상 내가 바쁠 때만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지 모르겠네." "어서 다녀와." "사랑해요, 엄마."
언제나 하던 것처럼, 어머니의 어깨를 한 번 안아주고. 옆에 놓아뒀던 가방을 집어들고. 양치는 학교에 가서 할 심산으로.
꺄륵거리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고, 두 손으로 뺨을 감싸쥐며 웃었다. 한여름 햇빛 아래 분홍빛으로 영글어가는 복숭앗빛이 두 뺨에 어렸다면 깜빡 속아넘어갈 만큼이나 수준급의 행동들이 자연스레 나열됐다. 반 갈라 진담과 농담이 섞인 말과 행동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 처음 대화해보는데 내년 2월을 기약하다니, 기쁘기는 했다. 장난으로 써먹어 티가 안나는게 문제다.
“왜 나는 잘 몰라!”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
“이제 집 가?”
그렇다면 빠빠이 인사를 올려야지. 서우는 정리를 다 마친 듯한 대수에게 손을 흔들며 내일 보자는 말을 하려다가, 대수가 하는 입막음에 합죽이가 되었다. 고개를 힘껏 꾸닥거리고,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까지 하고서 손만 붕붕 흔든다. 내년에도 해야 된다고!
빈말 하나 놓치지 않고 들러붙는다. 채린은 생글거리는 낯빛으로 다운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꼭 받아내고 싶어지는 고약한 성정을 지녔다.
“너니까 도와준 거지. 우리 모르는 사이 아니잖아.”
같은 반이란 이유만으로 길 가다가 인사하러 돌아왔던 것처럼 지금 도와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친하지 않아도 언젠가 친해질지 모르는 사람. 그 정도면 일단 채린이 그어둔 경계선 안쪽의 인간관계였다. 그 말은 만약 다운이 아닌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지나쳐갔을 거란 의미기도 했다.
앞을 보고 있던 채린은 들려온 질문에 다운을 보았다. 주어가 없어서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채린은 감정 표현이 풍부한 편이고, 그만큼 제 감정엔 아주 충실하지만 그게 타인에게까지 적용되진 않았다. 남의 감정 변화를 한눈에 알아차릴 만큼 기민하진 못했다.
그의 반응은 방금전의 행동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말하면 안되는 것을 무의식 중에 실토해버린 사람처럼 황급하게 입을 틀어막는 것이 보였다.
짤강,하고 바닥에 금속음이 들렸다. 침묵은 그 소리를 더 날카롭고 무겁게 만들었다.
어째서일까? 라고 의문을 표현해도 이유는 당연했다. 떨리는듯한 목소리, 그것은 분명 그에게서 나온 진심이었을 것이다.
진심이라는 것은 곧 내면이었다. 내면이라는 것은 곧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쉽게 보이지 않는단 것은 곧 함부로 보이기 싫은 부분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로 감싸고 있기에, 연약한 부분을 단단한 것으로 감싸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약점'이라고 부르곤 했다.
사람은 참 다양한 이유로 두려움을 느꼈다. 타인과 타인의 능력, 타인의 말에 의해서 상처를 입곤했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의 능력, 자신의 말에 의해 절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감정에 휩싸이게 되어 자연스레 몸이 굳어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의 그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단절을 고수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 나와있다는 것은... 사회 속에 얽혀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물리적으로 스스로를 사회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이상, 좋든 싫든 사람은 서로와 엉겨붙어 살아가게 된다.
당연하지만,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었다.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일방적으로 거리를 둔다 해도, 그것은 결코 격리가 될수 없었다. 그저 스스로를 철창 안에 가둘뿐이고, 철창 사이로는 모든 것이 보이는 법이었다. 안에서 밖을 볼수 있듯, 밖에서도 안을 볼수 있었다.
사람은 타인을 구분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알아간다. 타인에게서 자신과 다른 부분을 찾아가며 비로소 개성이란 것을 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건... 유감스럽게도 행동보단 대화의 비중이 더 컸다.
말이란건 위험하다. 아마 지구상의 모든 언어중 유일하게 위험하고 난폭한 언어가 있다면 그건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의 언어라 할수 있을테다. 동물처럼 발톱을 들이밀지 않아도, 송곳니를 찔러넣지 않아도 죽일수 있는 것은 사람의 언어가 유일했다.
미나 또한, 말이 가진 힘을 무시할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자신도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꾸준히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소통'이라고 불렀다. 소통은 무조건 서로 통하는 것이 아닌만큼 얼마든지 일방적일수도 있었다. 내가 내비춰도 남이 내비추지 않으면 그만이요, 남이 내비춰도 내가 내비추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 리스크가 있는데도 사람은 소통을 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미나는 그가 지금처럼 입을 꾹 다물고 스스로에게서도 멀어지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 역시 자신과 -같진 않아도-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어쩌면 통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도 어느정도 먹혀든 것인지, 입을 틀어막았던 그가 손을 내리고선 떨리고 있던 초점을 맞추어 미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내 희미했던 미소보다 한층 더 강렬하게, 싱그러움마저 느껴질만큼 밝은 웃음이 되어 푸스스 흩어졌다. 씨를 퍼뜨리는 꽃, 새롭게 퍼져나간 별의 씨앗, 아주 작은 향신료가 요리 안에 떨어지는 순간 제가 머금고 있던 향을 방 안에 가득 뿜어내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오히려 다행이야.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
비교적 간단한 한마디, 하지만 그것은 힘주어 눌러쓴 필담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높여 노래하는 것 같았다. 비교적 짧은 구절, 그렇다 해도 차분하게 웃는 표정으로 응수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서야 떨어진 식기를 신경쓸 겨를이 있었을까,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미나는 다른 포크를 꺼내와 그가 있는 편에 놓아주고선 싱긋 웃어보이면서도 이내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게 나 자신을 알라는 말인데 하물며 몸이 다른 타인은 오죽하겠니?"
집어든 포크를 바라보며 말하는 혼잣말, 딱히 그를 향한 이야기는 아닌 중립적인 독백이었다.
다만 사색에 접어드는 것도 잠시, 테이블을 빙 돌아 개수대에 그것을 내려놓기전, 장난스럽게 그것을 제 옆 눈높이에서 흔들어보이며 눈매를 휘어 미소짓는 미나가 있었다.
거기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끄러운 행동이라 생각하여 넌지시 말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 왜 자신은 모르냐는 말에 고개를 으쓱이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곧 가야지."
집이 아니라 부실에 갈 생각이었으니 집에 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중간하게 헷갈릴 말을 하고는 그녀의 반응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학교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사용한 물건들은 부실의 어딘가에 방치해두자. 어쩌면 나중에 쓰게될지 안쓰게되어 쓰레기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테니.
"너도 빨리 돌아가는게 좋을걸."
바닷바람은 네 생각이상으로 차니까. 라는 작은 소리를 내뱉고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츄파춥스 양치........ 어릴적 페인트사탕 양치썰만큼이나 무섭다........... 50원어치 무서워........ <<<뒷걸음질>>>
와아~~~~~ 서우주다!!!!!!!!!! 미나 중학교 졸업식???? 으음... 비록 리허설엔 참가 못했지만 졸업사진도 잘 찍었고 졸업식도 잘 마쳤다카더라~~~~~~ 여담이지만 반사진 중에서 '츠구나가씨와 꺼벙이들'이라는 컷엔 혼성멤버 총 6인으로 이루어진 인간 피라미드(!)가 있었고 그 꼭대기에 올라서서 ('Δ')←요 표정으로 태양만세 포즈를 취하는 미나코씨(!!)의 사진이 있었다카더라.
실망이란 말에 다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만 힐끔힐끔 채린의 눈치를 보는게 답지 않게 쩔쩔 매는 것 같다는 인상이 든다.
"다음부터는 안 잊을게. 류채린. 확실히 기억해놨어."
라고 덤덤하게 말했지만 내심 자신이 없었다. 다운은 기억력이 좋지 않아 방학이 지나가면 제 옆의 짝 이름도 잊어버리곤 했다. 이따가 핸드폰 메모에 적어놔야겠다. 그도 잠시, 어떻게 갚을 거냐는 말에 다운이 눈을 크게 끔뻑인다. 농담인가 싶어 채린의 얼굴을 유심하게 봤으나 보이는 건 장난기와는 거리가 먼 싱그러운 웃음 뿐이다. 꾸물꾸물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기는 했으나 이런걸로 턱도 없겠지 싶어 다시 집어 넣었다. 결국 한다는 말이.
"뭐, 원하는 게 있을까? 할 수 있는 선까지는 갚을게. 그, 음..."
남은 용돈이 3만원 있으니 2만원까지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다운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생각했다. 인생 최대 고민이라고 해야할까나.
"아, 그랬던 거야? 다행이다."
단순한 다운은 그저 잘해준 이유가 있다는 거에 기쁠 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면 지나쳤을 거라는 깊은 뜻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얼굴임 미세하게 밝아진 다운이 검지를 내밀며 명랑하게 말했다. '비교적' 명랑하게였지만.
"사실 조금 걱정했어. 잘 모르는 사람 도와준다고 이렇게 시간써주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잖아. 그게 귀찮지 않나..."
그렇게, 자랑하려고 보낸 사진이었으나 일일히 반응하는 최미나씨, 그리고 신나서 사진 더 보내는 채린이... 거의 대화수준으로 이어지는 모먼트는 채린이가 더 보낼 사진이 없을즈음에서야 멈추었다고 전해진다. 를 몇번이고 반복했다고 전해진다. 를 반복했다고 전해진다. <<???
아마, 유년기를 지난 이래 내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 타인에게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끈질기게 나를 찾아와서 나에게 감정을 끌어내려 했던 [그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그런 [그녀]를 상실한 아픔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내게 씨앗을 남기었고, 그녀는 그 씨앗을 발아시켰다. 필요한 양분은 그저 짧은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당장 실천이 가능한 영역인지 조차 미지수였다. 아직도 그런 의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미소는 금새 사그라졌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의 분기점이 될 것임이 틀림 없었다.
어쩌다 빵집이 문을 닫은 덕분에, 우연히 이런 점심 시간에, 불현듯 요리 부실을 찾았기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는 앞으로 '이야기'를 해 나가고 싶다는 어렴풋한 소망이 하나 생겼다.ㅡ나로서는 이조차도 매우 대담한 생각이 아닐 수가 없다.ㅡ 그것을 드러내기에는 아직 미숙한 마음이었으나 그녀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네 말대로, 쉽진.. 않겠지."
쉽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스스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런 생활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편하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이미 굳어버린 마음을, 두꺼워진 껍데기를 홀로 안에서부터 깨부수고 나올 힘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잠시 말이 멎는다. 이후에 덧붙힐 말을 고르는 것인지,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이 멎는다. 꼴깍- 울대가 오르내리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쉰다.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리고는 설거지는.. 내가 할테니까... 라고 부끄러워서인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힌다. 하하.. 하고 힘없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것은 덤이었다.
다운이 조용히 있는 동안에도 채린은 그저 눈만 깜빡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기억하겠단 말에 방금 들은 이름을 착실히 입에 올리며, 제멋대로 약속이라고 바꿔버렸다. 이제 채린의 머릿속에 다운의 이름은 확실하게 새겨졌다.
“뭐야? 방금 꺼낸 거 뭐였어?”
짧은 순간이었어도 채린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무언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주머니 쪽을 대놓고 바라보았다. 그나마 막무가내로 손 집어넣을 정도로 몰상식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글쎄, 지금은 없는데. 나중에 말하면 안 돼?”
상대가 고민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절대 안 받겠다고 하진 않는다. 걸어야 하므로 다시 앞을 보던 채린은 다행이란 말에 또 다운을 쳐다보게 되었다. 친절하다기에 진실을 말해줬더니 다행이라니?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게 다행이란 뜻일까? 그나마 납득가는 방향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던 중 제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난 또 뭐라고. 귀찮았으면 처음부터 말 안 걸었거든. 그리고 나 없으면? 여기서 나 없이 화장실 찾아갈 수 있어?”
사람은 이렇게나 동요하기 쉬운 존재였다. 옛말에 괜히 갈대처럼 휘어진다는 말을 붙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해력과 판단력, 자기통제력이 빠른 것또한 사람이었다. 금방 사그라들은 그의 미소 또한 자신의 말을 얼핏 인정은 하되 맹신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아무렴, 가까운 사람의 말이라도 한번쯤은 의심해보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거늘, 생전 처음 만난 또래 여학생의 제 철학만 담긴 말을 그가 곧이 곧대로 들어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수긍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금씩 자각하고 있었다. 당장 깨고 나오진 못해도 깨어지도록 금이 가게 하려는 노력만큼은 볼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였으며, 그에게 있어선 사실상 파격적인 시도나 마찬가지였다.
"응, 쉽지 않아. 여태까지 머뭇거렸다면, 지금은 어느정도 상처가 날걸 감수해야 하니까... 하지만... 스스로 깨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어. 이 세상은..."
금이 가야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며, 틈이 벌어져야 허물을 벗고 나올 수 있었다. 그것에 실패하면 그 이상의 삶은 보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나는 그런 이들의 모습은 본적이 있었다.
...그 몰골은 결코 좋은 형태라고 할수 없었다.
"......"
머뭇거리는 말소리. 덧붙일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보다 조리있게 말하려 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단지 말하긴 아직 힘들었는지 목소리에서도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침착한 심호흡, 그리고나서 내뱉어진 그의 말은 미나의 표정에 좀 더 환한 미소를 내걸게 하기엔 충분했다.
"응, 많이 노력했구나? 그래... 나도 그런면에선 아직 부족한면이 많지만,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도와줄수 있달까... 네가 허락만 해준다면 도와주려고 했으니까. 그런면에서도, 쌍방합의네?"
양 손가락 끝을 마주대어 뺨쪽으로 가져가고선 생글생글 웃어보였을까? 지금의 웃음은 제 어릴적과 같은 기쁨을 나타내는 표정이었고,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누군가를 의식해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웃어보일수 있는 감정은 오래간만이었다.
그동안의 연습이,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행복함을 이끌어내게 만들었다.
그녀는 문득, 여긴 별이 보인다고 말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나에게는 새까만 밤하늘만 보였다.
ㅡ 안 보이는데.
안 보인다며, 다시 고개를 내리려던 그때, 그녀가 손으로 내 턱을 살포시 받치고 시선을 다시 끌어올렸다.
ㅡ 저기, 잘 봐봐.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깊게 응시하니 그제서야 하늘에 무언가 밝게 빛나는 점 세 개가 보였다. 별하늘을 본 적 없는 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내려 그녀를 마주 보며 이리도 밝은 것은 인공위성이 아니냐 반문했다. 그저 인공위성인 줄로만 알았다.
별이 수놓인 밤을 볼 수가 없어서,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 믿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큼만 봐왔으니까.
ㅡ 아니야, 저건 인공위성이 아니라 별이야.
그녀는 내 반문이 웃겼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그런 나를 마주 보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제대로 봐봐. 덧붙여 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귀찮다는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다시 올려다 본 하늘은 정말로 별들이 흐르고 있었다. 세 개가 아닌, 다섯 개, 아니, 열 개, 스무 개. 어두워진 밤거리를 가로등이 밝혀오듯이 제대로 마주하지 않아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그녀가 나를 이끌어주었기 때문에, 제대로 마주하는 법을 알려줬기 때문에, 나는 별을 볼 수 있었다.
"상처가 곪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인걸."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면, 허물을 벗고 나오지 못하면,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깨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는 말마따나, 그날 보았던 별하늘처럼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것도 있다. 수고스럽게 고개를 들지 않는다면, 초점을 맞추어 제대로 응시하지 않는다면.
그 별하늘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이대로 침묵할 뿐이라면, 타인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 결과가 잘못되어 내가 상처받고, 누군가를 상처입히게 될 지라도. 그것을 감당하며 수습하고 나아갈 용기를 그녀에게서 얻을 수만 있다면.
쌍방 합의라며 양 손가락으로 뺨에 대고 생글생글 웃어 보이는 그녀의 미소를 마주 본다. 그에 나도 다시 아까와 같이 자연스레 웃어보려 했지만, 웃다가 실패한 모양의 자연스럽지 않은 표정이 될 뿐이었다. 아직 나에게는 웃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구나.
어색하게 하하.. 맥빠지는 소리만 내다가 다시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오물거렸다. '응.' 너무 무성의하다. '제발 부탁해!' 너무 그녀에게 의존하는 뉘앙스다. '곁에 있어줄 수 있어?' 이건 뭐,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오레노 나카마니 나레!' ....
약속이라는 말에 구태여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채린, 채린, 류채린... 중얼거릴 뿐이다. 생각해보니 이름이 체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다가 성격도 체리 같다. 남이 들었다면 무슨 소리냐며 반문했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바로 다운이다.
"아, 별 건 아니고. 화이트데이라서 사탕을 좀 샀었어. 싸게 팔더라. 2+1."
다운은 재차 사탕을 꺼내며 보여줬다. 마침 체리맛이 남아있더랬다. 다운은 가만히 제 사탕을 한 번, 채린을 한 번 보고는 뒤늦게 물었다.
"하나 먹을래?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이런 걸로는 느낌이 안 사려나."
손을 내밀며 체리맛 사탕을 건네는 폼이 퍽 담담하다. 다운의 시선은 사탕을 향해 있었으므로, 속눈썹에 가려 그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테였다.
"음... 좋아. 빚을 달아놓을게. 나중에 생각이 나면 말 걸어줘. 아님 그냥 말 걸어도 좋고."
새학기가 시작한지 여즉 2주가 지났는데 다운은 그렇다할 친구를 사귀지 못한 상태였다. 조바심은 들지 않았으나, 그게 좋다는 말은 또 아니다. 슬슬 친구를 사귈 타이밍이기도 했고... 채린은 사교성도 좋아보이고 친구도 많아보이니 나 하나쯤 친구로 둬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학교를 부유하듯이 다닌다지만 반에서 인사할 친구 몇은 있어야할 것 아니겠는가.
"...그때는."
다운은 잠시 말을 골랐다. 채린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운은 어떻게 애둘러 표현할까 고민하느라 또 시간을 소비한다. 눈가에 그늘이 지자 퍽 음울한 낯이 되었다. 실제로 우울한가 하면 애매한 것이 다운은 눈이 움푹 들어가있어서 눈가에 자주 그늘이 지고는 했다.
"그냥 집에 가서 해결 봐야지."
집이 가깝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일부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고 -다운은 그정도로 교활하지 못하다- 어찌저찌 채린을 따르다 보니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같이 화장실 갔다가 친구가 되면 그것대로 좋고, 되지 못한다 해도 서로 이름정도는 알았으니 그것대로 또 좋았다. 괜히 집이 가까우니 그럴 필요 없다며 면박주는 것보다는 뭐든 나았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미나라고 한들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어쩌면 그보다도 조금은 뒤쳐질수 있으려나. 언어적인-물론 그것도 조금은 고민이지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만의 고질적인 딜레마라고 할까, 상대적으로 감정표현에 무딘 편이었던만큼 다른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읽어내는 것에도 서툴렀다. 지금껏 만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터득한 처세술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답답한 인물이 되어있었겠지. 그렇기에 더욱 더 바뀌려고 노력했다. 더 변하려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갔다. 어찌되었건 사람은 사람 없이는 살수 없으니까,
"지금 곪아있는 상처도 문제긴 하겠지... 하지만, 안에서 곪은걸 바깥에선 알 수 없는걸? 그것도 결국엔 깨내야 알수 있으니깐,"
세상엔 겉은 멀쩡해도 속은 썩어버린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내면을 보여주기 전까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겐 곧 약점이기에 어느 누구도 쉽게 보여주는 법이 없었다. 그 역시 그럴 것이고 자신 역시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그걸 알기 원해서, 알아주길 원해서 사람은 서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러나 저러나, 이야기는 결국 '나'를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 말은 곧, 친구가 되어달란 걸까?"
그리고 그런 나와 다른 사람간의 차이를 깨달아 서로 타협하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친구라는 개념이었다.
"얼마든지야. 네가 원한다면 어떤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들어주고, 말해줄 수 있는걸."
미나는 태생적으로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기에 눈 앞의 남학생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역시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제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닌, 제 영역 안에 있는 사람이 그이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관점의 차이였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였다. 숲을 보는가, 나무를 보는가... 어두운 밤하늘을 보는가, 밝은 별을 보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거나 결여된 부분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쩌면,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차이는 존재한다. 실패를 감수하고서도 극복하기 위해 나아가며 노력하는 사람,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포기하고 정체되거나 도태되는 사람.
적어도 내 앞에 있는 그녀는 전자에 해당했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느껴져왔다. 그녀도 이렇게 말을 하고 표정을 짓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 그럼에도 아직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 또한, 계속해서 다른 이와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지라도. 상처받고, 슬퍼하며, 분노할 때가 있을지라도. 때로는 좌절과 상실을 겪게 될지라도 다시 한 걸음 내디뎌가며 점차 성장해 나갈 것이다.
많이 늦더라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 발자취를 따라 나도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다면 나도 언젠가 그녀처럼 예쁜 미소를 자연스럽게 지어 보일 수 있을까, 다시 방금과 같은 미소를 자연스럽게 지어 보일 수 있을까.
그런 상념에 잠겨있다가 ㅡ친구ㅡ라는 말의 울림에 눈을 들어 그녀를 마주 본다. 흔히들 친구라는 말로 간편하게 관계를 형성한다. 친구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언약을 함으로써 곧바로 서로 간의 우정이 싹 틔워지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닐 것이다. 방금 입을 열기 위해 떠올리던 말들 중에 ㅡ친구가 되어줄래?ㅡ라는 말을 기각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그저 서로 아는 사이로 시작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서 '친구'라는 단어는 흔히들 말하는 가벼운 의미의 친구가 아닌 더욱 진중하며 무게감 있는 단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가 말하는 친구가. 내가 생각하는 '친구'라는 의미에 부합한다면 ㅡ서로 같은 관계성을 지향하고 있다면ㅡ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내가 그녀와 맺고 싶은 형태의 관계였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응, 앞으로 잘 부탁해."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어조로 내 마음의 편린을 비추어 그녀에게 말했다.
"시시콜콜... 한 이야기라도 내가 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노력해 봐야겠지.
//이걸 막레로 하고 설거지를 했다던가 그런건 후일담 형식으로 따로 쓰고싶은데 미나주는 어때?
사탕이라면 하루 종일 봤다. 채린은 기념일을 허투루 넘기지 않기에 오늘도 친구들과 나누겠다며 가방을 잔뜩 채워갔었다. 다 나누어준 후에도 가방은 묵직했다. 친구들에게도 하나씩 받았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지금은 사탕이라고 해도 별 감흥이 느껴지질 않았다. 금세 흥미를 잃은 듯 보였던 채린은 껍질에 적힌 체리맛이란 글자를 보곤 다시 눈을 반짝였다. 확실하게 제 가방 안엔 없는 맛이었다.
“먹을래! 그것도 사탕인데 뭐 어때. 나 그거 좋아해.”
사탕을 받으려던 채린은 양손이 꽉 차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손엔 쿠션을 들고, 다른 손엔 다운의 손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둘 중 뭘 놓을까 고민하다가 쿠션을 가슴과 팔뚝 사이에 끼우곤 손을 내밀었다.
“좋아. 뭐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야지~”
달아두겠단 말에 채린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꽤 즐거워 보인다. 딱히 뭘 시키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재밌었다. 어쨌든 제 인간관계가 한층 넓어지게 되었으니.
“집까지 언제 가려고? 하여튼... 이런 때는 그냥 고맙다고 하면 돼.”
채린은 다운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니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었다. 화장실보다 가깝거나 비슷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화장실이 있는 공원이 여기서 금방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조금 더 걷자 공원의 초입이라는 걸 알려주듯 여러 그루의 나무와 깔끔하게 정비된 길이 나타난다. 입구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 도달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차저차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었던 최미나라는 요리 부원 여학생과 있었던 이번 일의 후일담.
처음에도 말했다시피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했고 그런 말들을 했다는 것이. 돌이켜보니 정말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야 하나. 제3자의 입장으로서 프레임 바깥쪽에서 영상 같은 것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감상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하튼, 그녀와 친구..라는 것 ㅡ라는 것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내게는 아직까지도 실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ㅡ이 되기로 하고서 점심 식사를 마친 나는 입으로 내었던 약속대로 설거지는 내가 하게 되었다. 그녀도 거든다고 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거절했을 것이다. 신세를 진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보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 비스름한 게 있는 성격이니까.
물론, 능숙하게 해낸 것은 아닌지라 ㅡ가사 전반의 행위에는 미숙한 탓에ㅡ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것이 일상이었을 그녀에겐 답답하게 보이는 것도 없잖아 있었을 테지만. 접시를 깨뜨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딘가?
그렇게 설거지를 마치고서는 그녀에게 신세를 졌다며 나름의 감사를 전하고서 부실을 떠나는 것으로 그녀와의 점심시간을 마쳤다. 그녀는 글쎄, 조금 남아있던 시간에 후식을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에 이어진 수업 시간부터는 내가 했던 일들을 돌이켜보며 몰려오는 놀라움과 부끄러움에 홀로 조용히 머리를 감싸 안고 책상에 엎드리거나 했다. ㅡ간간히 머리를 박거나 소리치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지만 그랬다간 내게 끌리는 어그로를 감당할 수 없다며 말려오는 이성 덕에 겨우 참아냈다.ㅡ 그런 모습을 선생님이 발견하고는 어디 아프냐고 물어오는 것에 부끄러움만 더해졌다.
아프다면 아팠다. 수치심에 아팠다!
괴로운 오후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하교 시간이 되었고 수업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은 딱히 부 활동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ㅡ한다고 해도 멍하니 하늘만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지만ㅡ 곧바로 귀가한 뒤에,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은 뒤, 비록 다리는 뻗을 수 없어도 내게는 익숙하고 안심되는 우리 집 욕조에서 몸과 함께 수치심을 씻어냈다.
내게 친구, 그것도 여자아이인 친구가 생겼다고 동생에게 보고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유쾌할지도 모르는 상상을 하며 쓴웃음을 짓고 얼마 있다 욕조에서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꼼꼼하게 닦은 뒤 양치를 하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니. 약간 말라 보이는 무기질적으로 보이는 표정의 내가 있었다.
"..."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떠올라 칫솔을 쥐고 있던 손을 뺨으로 가져와 대고 그녀가 내게 보여주었던 미소처럼 씨익ㅡ 웃어봤다. 어색하게 일그러진 썩소에 그만 피식 조소를 흘려버렸다. 더럽게 못생겼어.
그런 욕실에서의 뻘짓을 끝내고 옷을 차려입고 나와서 나는 오늘의 일을 정리하기 위해 일기장을 펼치고 제목 칸에 샤프를 꾹꾹 눌러 반듯하게 글자를 적었다.
방금 성의가 없다가 급격히 반응이 좋아지지 않았나? 제아무리 눈치 없는 다운도 그 온도차를 모르지 않았다. 다운은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려다 붙잡힌 손을 의식하고 다시 팔을 갈무리했다. 뭐, 문제될 건 없나. 그냥 단순히 체리맛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과연, 이름도 체리 닮았고 성격도 체리에 좋아하는 것도 체리... 다음에 볼때 슬쩍 애칭을 체리로 불러도 되냐 물어볼 요량이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사탕을 넘겨주었다.
"아, 그거 애인한테 받은거야? 내가 들어줄까? 난 손 비거든."
설마 직접 만들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손재주가 처참한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비애라고 해야할까. 본인은 상상도 못하는 세계가 수예부에 있을 것이라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대신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누구한테 쿠션을 받았을 것이다. => 쿠션을 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다. => 애인?'정도의 논리 과정을 거쳤다.
"아, 알려줘서 고마워. 거기에 나 데려다준 것도 고맙고."
평소 자신의 과묵하고 표현 적은 성격을 미워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사과와 감사인사를 깜빡할때에는 스스로가 미워지고는 한다. 다운은 드물게 입꼬리를 올리며 감사 인사를 남겼다. 멋쩍은 웃음이었다. 그 냉랭한 낯에 금이 간 것도 그쯤이었다.
화장실에 도착한 다운은 세면대에 서서 물을 틀어놓았다. 이제는 불쾌해질정도로 끈적거리는 손을 흐르는 물에 집어넣고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법 아플텐데도 다운은 반응이 없었다. 약간의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다운이 묻는다.
"집 가는 길이 어떻게 돼?"
별 생각 없는 물음이었다. 가는 길목에 만났다면 가는 길이 겹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반, 반대로 돌아서 왔을테니 늦어져서 미안한 마음 반이었다.
>>613 그거다~~ 뭔가 하나 산책하다가 대수 낚시하는 것 보면 옆에 조용히 앉아서 구경하다가 막 낚으면 박수 짝짝짝 치다가 서로 눈 마주치면 서먹. 말 안하고 딴짓하다가 돌아가고. 대화 하는 것도 막 날씨 이야기 같은 거 하고. 서로 나이도 이름도 모르면서 몇년 얼굴만 알던 사이었는데 학교에서 딱 마주쳐서 그제야 서로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거 어떤지~
받은 사탕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던 채린은 다운의 말을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없어서다. 채린은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살폈다. 가방, 사탕, 쿠션. 첫 번째는 누가 보아도 자기 것이니 패스, 두 번째는 방금 받은 것이니 패스, 그렇게 되면 남은 건 쿠션 하나다. 채린은 이거 말하냐는 듯 끼고 있던 쿠션을 다시 들고 흔들어 보였다.
“아니, 내가 만든 건데. 잘 만들었지?”
자랑스럽게 질문에 대답한 뒤에 쿠션을 도로 내렸다. 상대에게 들어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채린이 직접 말을 이었다.
“있잖아. 너 지금 손 다치지 않았어? 뭘 들어줘. 뭘.”
애초에 상대가 손을 다치지 않았다면 불편하게 쿠션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사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 들어달라고 넘겼거나 아예 사탕 껍질을 까달라고 했겠지.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뭐, 별것도 아닌걸.”
그제야 채린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 와서야 채린은 다운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다운이 손을 찬물에 대고 있는 동안 채린은 옆에서 ‘으...’하며 그걸 보고 있었다. 제가 아픈 것도 아니면서 엄살이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자 안에 든 사탕의 껍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러다 다운이 하는 말에 시선을 올린다.
“버스 타야 해. 아까도 버스 타러 가다가 너 만났거든.”
채린의 집은 학교와는 거리가 좀 있는 편이었다. 공원까지 온 지금은 좀 더 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근처에도 정류장은 있을 테니 상관없었다. 여차하면 그냥 택시를 타버려도 되고.
부의 모자란 활동을 챙기기 위해서 계획한 달고나이벤트는 끝이났고 그는 정리한 물건을 챙겨서 학교로 돌아왔다. 그 이름모를 같은 반의 여자애와의 시간은 여러의미로 대단했기에 그는 마음속으로 탄산음료 한 캔이 간절했다. 하지만 자판기는 교실에서 벗어나서 많이 걸어가야 했으므로 차라리 모든 짐을 정리한 후에 축하의 의미를 담아 마시는게 더 좋을 것이었다.
"앗."
그런데 정면에서, 그는 오늘 또 다시 이름모를 여자애를 만났다. 매번 바닷가 근처에서 보이던 앳된 모습의.. 이 학교 학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저번년도에서는 학교에서 그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1학년이 된 신입생이라고 생각하는데 옳았다. 설마 엄청난 확률로 1년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경우는 없을테니까.
"어. 안녕."
이름은 모르나 서로를 그저 모르는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서로는 서로를 너무 많이 봐 왔기에 그는 인사를 건냈다. 뭐지. 뭔가 엄청나게 어색하다. 특히 지금 이 건낸 인사조차도 너무 어색했다. '어.' 가 뭐냐 '어.' 가. 얼빠진 소리는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시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따스한 오후의 빛이 먼지가 쌓인 창을 투과하여 부드럽게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칸트도 아니면서 시계바늘이 가는대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해인이었으면 이 시간에는 분명히 기분이 좋아야 하건만 어쩐지 뿌옅게 맺힌 창밖의 서리가 자신의 마음에 낀 것 같았다.
"...이게 효과가 있을까..."
중학생때의 반장선거는 14살의 아무것도 모르는 패기로 나갔다지만 17살의 서해인은 그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중학생에게는 고입이 사실상 없는 것에 가깝지만 고등학생에게는 일상의 대부분이 대입과 직결되는 만큼 더 중압갑이 컸다. 소녀는 구석진 서고의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푹 쉬며 팔에 안은 책들을 보았다. 마틴 루터 킹, 에이브러햄 링컨, 등등...리더들의 연설을 보면 연설문의 개요가 조금은 잡히지 않을까 싶어서 보았지만 역시 너무 거했다.
그냥 평소처럼 보고싶은 책이나 볼 걸 그랬어.
점심시간. 하루 중 거의 유일하디시피 해인이 온전히 휴식을 누리는 오후의 한 때였다. 지금은 반장선거를 위한 배경자료를 모으는 시간으로 변질되어버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매일매일 칠판에 급식을 표기해 주거나 반 뒤의 사물함이 있는 복도에 돗자리를 깔아주는 공약이 현실적으로 백배는 나아보였다. 아니야 뭔가 더 임팩트가 필요해. 저는 제가 잡초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뽑아주세요! 어딘가에서 본 대학 면접 썰이 머릿속에 지나가고 더 머리가 아파졌다.
"신입생이니 학기초부터 부지런하네." 인자한 사서선생님의 말씀과 인사를 뒤로 하고 해인은 유난히 북적이는 도서관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할까. 몇 안되는 안식처를 빼앗긴 소녀는 의미 없이 몇 분동안 똑같은 복도사이를 오가다 계단을 올랐다. 바람이 쐬고 싶었고 한시도 쉬지 못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연설문에 참고할 책 두권과 개인적으로 빌린 책 한권을 가방에 들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학교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특이하게도 해랑고에서는 옥상을 개방해 놓았지만 이를 아는 신입생들은 아직 많지는 않아보였다. 해인은 문을 열고 확 들어오는 바람을 맞이했다. 여기에서 미리 연설이나 해볼까. 별 기척이 없자 마음을 놓은 소녀는 흠흠 헛기침을 열고 미리 써놓은 연설문을 낭독하다가 하늘이 맑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위를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하늘 오빠?"
오늘 옥상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전혀 계획에 없었다. 당황한 음성을 그대로 내뱉으며 해인은 기척도 없이 있던 하늘을, 그러니까 사람인 강하늘을 불렀다.
늘 그렇듯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점심시간이었다. 종이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별관을 빠져나와 본관의 옥상으로 향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3년 동안 매일 그리했던 것처럼, 이제는 내게 익숙하고 졸업을 하고 나서는 그립다는 생각도 들 것만 같은 칠 벗겨진 쥐색 철문의 경첩 쪽으로 붙어지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챙겨 온 빵을 꺼내 포장을 벗겨서 먹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점심시간을 보내며 이제는 한껏 산뜻해진 봄바람을 느끼며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 없는 내 인생의 낙이었다. 그렇게 절 반쯤 빵을 먹어 치웠을 무렵, 옥상의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여학생이 밖으로 나왔다.
정해인, 막 17세가 된 고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 대표로 나와 선서를 했던 그 아이다. 올곧은 성격에 두뇌도 명석하고 단정한 용모의 서글서글한 미인이라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이 아이가 어째서 내 ㅡ바보 같은ㅡ 동생과 친구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 또한 해인이라는 아이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러나 나는 경첩 쪽 벽에 붙어 앉아있었기에 문이 열리면 ㄱ 자로 가려지는 사각지대에 있었고, 그녀는 나를 바로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옥상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문득, 흠흠ㅡ 하고 목을 가다듬는 그녀의 헛기침 뒤에 낭송된 연설문을 듣게 되었다.
"..."
이 아이답게 선거 입후보라도 하려는 것일까, 연설의 내용은 내가 듣기에 꽤 괜찮게 들려왔지만 아마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이 옥상에 올라와 읊어낸 건 아니었을 거다. 그렇기에 모른척 하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배려해서 옥상을 빠져나가줄까.. 싶어서 조심스레 움직이려던 그때
ㅡ강하늘 오빠?
라며 그제서야 나를 발견하고 알아 챈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몰래 빠져나가려 했기 때문에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 도둑 같은 포즈가 되어있었지만..
그 말을 기점으로 다운은 쿠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눈이 커진 것이 여간 신기한게 아닌 모양이다. 채린 곁을 얼쩡거리며 쿠션을 관찰하는데 통행에 방행이 될 정도였다. 다운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응, 잘 만들었다. 너 손재주가 좋네. 난 이런 걸. 음... 수제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 그래서 오늘 늦게 끝난거구나."
내가 했다면 쿠션이 아니라 그냥 천뭉치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대단한데. 다음에 구경하고 싶어." 칭찬보다는 혼잣말의 가까운 말이었다. 남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던 다운이 채린의 거절-에 가까운 타박-에 또 머쓱해져서 손을 내린다. 별로 아프진 않는데 또 채린을 걱정시고픈 마음도 없었다. 다운은 침묵을 유지했다.
물에 손을 담그면서 채린의 인상을 되짚어본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수도꼭지를 잠그었다. 채 떵러지지 못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등을 돌린 다운이 뭔가 대단한 걸 깨달은 것마냥 검지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너 진짜 착하다. 같은 반이라 다행이야."
라고 또 쌩뚱맞은 소리를 한다. 그것을 전한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는지 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하고 바로 다시 등을 돌려 물기를 터는 걸 보아하니 채린의 반응은 기대하지 않은 모양이다. 정말로 갑자기 떠올라서 전해준 것처럼 보인다. 툭툭 물기를 얼추 다 털고 수영가방을 어깨에 맸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까? 밤이 어둡잖아. 혼자가면 위험하니까."
거절해도, 수락해도 문제 없는 담백한 제안이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그 가벼움을 증명했다.
날씨가 좋다는 말에 덩달아 날씨가 좋다고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야말로 이마를 탁 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양손이 바쁜 상황이었기에 그럴 순 없었다. '정말로 날씨가 좋나?' 싶어서 창문밖을 보니 날씨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긴, 날씨가 안 좋았다면 항구근처에서 달고나를 만들 순 없었겠지.
"사탕?"
오늘은 남자가 사탕을 주는 날이 아니었나? 연속으로 두 여성이 사탕을 주려는 모습이 보이니 사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는 반대되는 날인걸까. 이럴 거 였으면 차라리 발렌타인데이때 받았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여 아무에게도 초코렛을 받을 수 없었다. 근처에서 낚시하던 아저씨한테 받은 조각 초코렛을 받았다고 카운트하는건 너무나도 허무하지 않은가.
"어어, 들어주면 고마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까지 무겁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사탕을 받는건 또 어떤가 싶었다. 오늘은 남자가 사탕을 주는 날.
어색한 인삿말이 들리고 묘하게 어디론가 잽싸게 사라지려했던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선 하늘을 보는 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라 강하늘이란 사람은 볼 때마다 어디론가, 양지가 아닌 곳으로 사라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세상만물에 당당하고 싶어하는 해인으로서는 잘 이해가지 않았으며 자신의 친구 - 하늘의 동생- 도 그 부분은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응. 안녕 잘 지냈어?"
하지만 오늘의 해인은 그다지 당당하지 못했다. 아무리 국어책 읽듯 단순하게 낭독을 했다하더라도 덜 완성된 연설문을 읽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맑은 하늘아래 음영이라도 찾고 싶어진 소녀는 재빨리 종이를 가방에 넣으려다 실패하고 등 뒤로 돌리며 인사를 했다. 당황한 나머지 묘하게 인위적으로 텐션을 올린 듯한 발랄한 인사가 나왔다. 이제 어떤말을 해야지만 덜 어색할까. 얼굴은 익힌 사이라 존대를 하지는 않지만 단지 그 뿐일 관계라 해인은 오늘 날씨 좋지않아? 라는 뻔히 보이는 인사대신 할 말을 골랐다.
"옥상에서 쉬고 있었어? 여기 처음 올라와 보는데 경치가 좋아 보여."
바다가 안 그래도 오빠가 반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 잘 지내? 자신과 그 사이에서 부드럽게 넘어갈 법한 공통의 화제를 친구이자 하늘의 동생인 바다라 생각한 해인은 조심하면서 그녀를 화두로 두고 안부를 물었다. 고삼에게 잘 지내냐 물어보는 말은 사실 말뿐인 안부라 별 의미가 없다 생각하지만 그에게는, 해인 자신이 그를 인지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만약 대부분의 고삼처럼 불평불만이 쏟아진다면 들어주면 될 일이었다. 겸사겸사 2학년 때의 반장선거의 후보들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다운이 통행에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채린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밤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채린은 지금 관심 대상이 제가 만든 쿠션이라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다운에 맞춰 걷게 되었고, 속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잘 보라는 듯 쿠션을 들어주었다. 채린은 혼잣말에 가까운 소리를 놓치지 않고 끝에 초대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수예부로 놀러와.” 수예부는 외부 인원의 출입을 막지 않는다.
“갑자기?”
뜬금없는 칭찬에 채린은 눈을 깜빡였다. 다운이 손을 닦는 동안 어안이 벙벙한 채린은 그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감사를 전할 때는 직접 말해줘야 했는데, 칭찬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니까 뭔지 모르겠다.
“좋아! 근데 나 택시 탈 거야. 도로까지만 데려다줘.”
채린은 고민 없이 단박에 제안을 수락했다. 사실 혼자 걷는 길이 위험할 걸 생각하기보단 지루할 게 싫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변함없는 공원이 보인다. 3월 중반쯤 되니 밤에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도 몇몇 지나쳐간다. 채린은 걸어가며 아까부터 쥐고 있던 사탕의 껍질을 까 안에 든 알을 입에 넣었다. 달달하고 새콤한 체리맛이 가득 퍼진다. 입안에서 몇 번 굴리던 채린은 문득 생각이 미쳤는지 다운을 본다.
화이트데이 기념이라고 사탕을 받았으니 저도 주어야 마땅했다. 친구들이랑은 으레 그렇게 사탕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가 준비했던 건 이미 전부 친구들을 줘버렸으니 당연히 남은 게 없다. 그렇다고 가방에 있는 걸 줄 수도 없다. 그건 친구들이 제게 준 선물이니까. 고민하던 채린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쿠션을 다운에게 내밀었다.
좋은거라고 말은 했지만 과연 이 물건이 이 사람에게 좋은것일지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이렇게 사탕을 들고다니는 모습에서 보아하니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답을 미루고 다른 말에 대한 대답을 했다.
"그야 그렇겠지. 저번 1년간 이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으니까.."
표정을 보니 1지망이나 2지망이 이 학교였나보다. 좋은 학교라는 평이니 당연한가.
"오늘은 낚시가 아닌 다른걸 해서."
다양한 초등학생과 중학생 그리고 같은 반 학생을 보았다. 과연 그 안에는 사탕으로 인해 벌어질 로맨스가 있었을지 모르는건 굳이 비싼 돈 들여 달고나를 만들었는데도 모르는건 조금 재미없었다. 살짝 탄 달고나를 만들어 좋아하는 여자에게 주겠다고 달려간 그 초등학생은 잘 되었을지.
은우의 이름 TMI? 은우는 딱히 작명 관련해서 에피소드는 없어. 그냥 성을 정하고 이런 이름이면 어울릴까 아닐까 고민하다가 바로 지었거든! 그 대신에 원래는 신문부 설정을 붙여서 막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인터뷰하고 막 학교에 퍼져있는 소문이나 괴담이나 기타 등등을 체크해서 신문에 막 내고 권력에 굴하지 않고 할 말은 한다! 식으로 교사진들이나 학생회 쪽에서 뭔가 수상한 게 포착되면 은근슬쩍 꼬집고 콕콕 찌르는 기사도 쓰는 느낌으로 해볼까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웹툰 작가와 병행을 하긴 힘들 것 같아서 그 설정은 삭제했었다는 비하인드 설정은 있다!
지난 1년간이라고 했으니 아마 2학년이 아닐까 하며 하나가 말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큰 이유는 없고 낚시를 하니까 어른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리라- 혹시 선배라는 제 생각이 틀렸으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하며 슬쩍 가슴팍을 살폈으나… 명찰을 찾을 수 없어 하나는 조금 절망했다. 틀렸으면 어떡하지? 마구마구 화를 내실지도 몰라! 혹시나 3학년이거나 아니면 동급생인데 나를 놀리는 것이라면…?! 하나의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았다.
“다른 것…?”
하나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것과 다른 것이 연관이 되어 있는 걸까? 들고 있는 짐만 봐서는 어떤 것인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그 말은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걸까요?”
하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추리를 하려고 했으나 힌트가 너무 빈약했기에 끙끙거리는 모습만 보일 뿐 아쉽게도 성과는 없었다.
다운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배운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운에게 손을 이용해 만드는 모든 것은 여즉 어려웠다. 어려울 뿐만인가, 항상 처음 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그래서인가, 채린이 그저 대단했다. 다운은 그래도 되나 잠시 고민하다 종래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나면 찾아갈게." 빚도 갚아야하고 수예부에도 찾아가고 기억해야할 약속이 많았다. 다운은 잠시 머리를 정리했다. 자신의 기억력이 좋지 않음은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때그때 하고 싶어. 까먹잖아."
그래서 감사 인사는 까먹은거냐... 이건 다운의 잘못이 맞았다. 해야할 말은 다 잘라놓고 굳이 안해도 되는 말은 또 눈치 없이 하고 많은 저 성격이라니. 언젠가는 고쳐지리라고 믿는다. 그때까지는... 채린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택시? 으음..."
...설마 나 때문인가? 다운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곤란한 낯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2만원은 무슨 3만원까지 사용해서라도 이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손을 꽉 쥐며, 다운은 결심을 다졌다.
"아."
실수로 다친 손을 꽉 쥐고 말았다. 다운은 채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모르쇠 시선을 피한다. 조용하게 이루어진 일이므로 들키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믿는다. 그렇게 한창 눈치를 보고 있던 차에 쿠션이 불쑥 눈 앞에 들어왔다. 다운은 고개를 숙여 쿠션을 한 번 보고는 채린을 본다.
"...이거를? 그렇지만 열심히... 열심히 만들었잖아. 이런 걸 줘도 괜찮겠어?"
비상이다......... 다운은 마구마구 흔들리는 눈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빚 목록 밑에 한 줄이 더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싫은게 아니라 너무 기뻐서 그랬다. 아니, 기쁘다는 말보다는 감격스럽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까. 이렇게 된 이상 다음달 용돈까지 땡겨서 오만원을...! 다운이 눈을 질끈 감는다.
"고마워, 채린아. 꼭 갚을게. 진짜야. 빈말이 아니라."
감동 받아서 울 뻔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운의 표정은 변화가 거의 없었다. 눈썹이 조금 올라간 수준이라고 해야할까. 포커페이스도 이런 포커페이스가 없다. 속으로 지지리 궁상을 떨다보니 어느새 공원 초입이었다. 다운은 우물쭈물 핸드폰을 꺼내 채린에게 내밀었다.
마주 보고 있던 해인의 눈이 가늘어지자 움찔해버렸다. 미인인 만큼 저런 날카로운 시선을 한다면 뭔가 굉장히 무섭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고3 이 고1 여자아이한테 쫄아버리는 건..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버린 몸을 마치 스트레칭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마냥 어색하게 팔을 한번 돌리며 다시 고쳤다.
"뭐, 그럭저럭."
어제 점심시간에는 꽤나 쇼킹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화두로 꺼낼 만큼 말주변이 좋지도 않았기 때문에 간단하게 답하고 넘겼다. 그녀가 나의 수험 생활을 걱정해서 묻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문제가 없으니까.
"그런거지."
옥상에서 쉬고 있었냐는 말에도 보다시피라는 듯이 단답하고, 그녀의 뒤로 펼쳐진 풍경에 시선을 맞추며, 네가 말한 대로 경치가 예쁘잖아, 공기도 좋고. 그래서 자주 와. 담백한 어조였지만 어딘가 감성이 묻어 나오는 말로 덧붙인다. 여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비가 오는 날이 싫었다. 먹구름 낀 하늘도 나름대로 멋은 있지만, 이렇게 옥상에 나와있기는 힘드니까.
"..걔가 날 찾았어?"
가방에 넣으려다 실패한 종이를 등 뒤로 숨기고는 인위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텐션으로 ㅡ흔히 억텐이라고 하던가ㅡ 말하는 모습에 지금 꺼내온 말도 그녀 나름대로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에 ㅡ아마, 내가 들은 것을 캐묻는다면, 그녀가 상당히 부끄러워하거나 껄끄러워 할 것 같았기에ㅡ 순순히 받아주기로 했다. 뭐, 그런걸로 골탕을 먹이는 취미도 없으니
"무슨 일 있대..?"
집안에서는 암만 티격태격하는 사이라고 해도, 굳이 이렇게 학교에서 별일 없이 나를 찾아올 바다는 아니었기 때문에 혹시나 싶어서 걱정스러운 맘에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ㅡ시스콘은 절대 아님ㅡ
뜬금없는 칭찬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채린도 그 말에 납득했다. 하려던 말 잊어버려서 못하면 나중에 찝찝하니까.
채린이 택시를 타겠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제 편의를 위해서였다. 가뜩이나 학교에서 늦게 나왔는데 예기치 못한 일까지 생기니까 버스에서 내려 다시 집까지 걸어간다는 과정을 거치기가 귀찮아졌다.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놀려면 1분이라도 일찍 도착해야지. 이는 채린이 버스비와 택시비를 비교할 생각을 생략할 정도로 금전 감각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란 것도 한몫했다.
“으휴... 넌 일단 다쳤다는 것부터 잊지 마.”
타인의 감정 변화에 둔하더라도 귀는 밝다. 채린은 한순간 들린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어. 사탕 답례로 준 건데 네가 갚으면 내가 또 뭘 줘야 하잖아. 그냥 쿠션 하나인데 뭐.”
사탕의 답례로 쿠션을 줬는데, 쿠션의 답례로 또 뭔가 받는다? 그렇게 되면 답례품 주기가 끝나지 않는다. 물론 다음 거 받은 후에 입 닫아버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러기엔 매일 얼굴 볼 사이다. 애초에 채린의 기준에선 그리 대단한 걸 준 것도 아니었기에 다운의 반응이 잘 와닿지 않았다. 채린은 폰을 받아 제 번호를 입력하고, 다시 다운에게 돌려주었다.
공원을 나와 다시 거리로 들어서자마자 멀리에서 빈 택시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뛰는 건 별로 좋아하지만, 그보다 기다리는 게 더 싫다. 이 택시를 보내면 다음에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런고로 채린은 급히 달릴 준비를 시작했다.
“아, 택시 온다. 나 갈 테니까 너도 잘 가.”
채린은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우곤 그 안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를 말하곤 창문을 내려 다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내일 학교에서 봐!” 채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택시가 떠나갔다.
조금 더 찬찬히 고민하겠다는 말에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레저스포츠부의 활동에대해 물어보자 조금 놀라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한다. 달고나나 만들어놓고 무슨놈의 야외활동이냐고 물어보면 할 말은 없지만 이것도 다 부의 존속을 위한 행동. 이런걸 하고 봉사활동이었다고 해 놓으면 선생들은 좋아할테니까. 물론 눈치빠른 선생들도 있을테지만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랄 뿐이다.
"오늘은 화이트데이였으니 특별한거야."
결코 과자나 만드는 부가 아니다! 애초에 이 학교에는 요리부가 있는걸로 알고있고. 이런 조그마한 버너로는 고작해야 라면이나 해물탕을 끓이는게 고작이다.
자신에게 버거운 일이라고 말을 하니 하나는 아앗, 하는 소리를 내었다. 제 친한 친구인 해인이 아마 이 말을 들었다면 뭐가 버겁다는 거죠? 하고 승부욕을 불태웠겠지만 하나에게는 그런 승부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가요…”하고 시무룩해질 뿐이었다. 하긴 대수가 낚시를 할 때마다 그것을 지켜봤을 뿐이지 한 번도 낚시를 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화이트데이이기 때문에 특별한 행사를 했고, 그 달고나를 자신이 받았다니 더더욱 특별해지는 달고나가 되었다. 하나는 꼭 아껴서 먹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죠? 그래도 대수 선배님의 조언에 따라서 여러가지 알아보고 체험도 해보고 할게요. …감사해요.”
>>803 다운이는 아싸쉑이라 딱히 생각나는 선관이 없네..ㅋ..ㅋ.ㅋ.큐ㅠㅠ 그럼 바로 일상 돌리자 서우의 인싸력을 믿어보갔으.... (이럼 안됨) 혹시 원하는 상황 있어??? 나는 일단 생각나는건... 서우가 장난을 실수로 다운이한테 쳐서 우당탕탕 일상 시작하는 것도 좋고~ 같이 짝인데 수업도중 떠들다가 같이 쫓겨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ㅋㅋㅋ) 뭐든 좋다~ 옥상에서 만나는 것도 좋구 체육시간 임시로 배드민턴 짝 되는 것도 좋고 젠장 일상 소재 잔뜩이잖아~~~
수업이 끝났다는 종이자 점심시간이 시작했다는 종이 울렸다. 그렇지만 서우는 급식실로 달려가지 못 했다. 업보를 치르고 있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라는 그림처럼 허리를 숙이고서 바닥에서 무언가 열심히 줍고 있다. 날아가기 쉽게 깃이 달린 하얀 공, 셔틀콕이다. 무슨 업보인가 하면 체육 시간에 제대로 배드민턴을 치지 않고 장난을 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제대로 랠리를 주고 받지 않고 일부러 이상한 곳으로 공을 보내며 짝이 받기 어렵게 하질 않나, 셔틀콕 여러개를 한 번에 보내질 않나, 하나인 척 두개를 겹쳐서 속이기까지 재밌게도 놀았다. 체육 선생님 눈에 그것이 제대로 밟힌 줄도 모르고. 다들 밥먹기 시작하는 점심시간에 서우가 직접 이곳저곳 퍼뜨린 셔틀콕에, 반 아이들이 미처 찾지 못한 셔틀콕까지 찾게 될 줄 모르고!
“으아―아――!!!”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린다. 얌전히 셔틀콕이나 주울 성질머리가 아니었다.
“하―기―싫―어―!”
고작 두 개밖에 안 주웠다. 체육 선생님이 본다면 저 얄미운 머리통에 딱밤이라도 한 대 놓았을 것이다. 체육 선생님은 벌써 점심 시간을 즐기러 떠났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반 아이들이 전부 점심을 먹으러 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우의 배드민턴 짝이었던,
“우~니야…. 넌 밥 먹으러 가도 돼…….”
다운이, 다우니. 동명의 섬유유연제가 광고할 때 쓰는 그 음의 높낮이로 부르되 ‘다’만 뺐다. 멋대로 지은 별명을 부르고 하는 말은 ‘나 혼자 다하겠다!‘라는 뜻이었는데 제대로 전해지지는 못할 것 같다. 말하는 톤이 비오는 날 고개 숙인 봄꽃잎처럼 추욱 처진데다 조그맣게 웅크려있기 때문이다.
>>829 고민해봤는데 오늘따라 신박한 상황이 안 떠오른다.. 🥲 아직 화이트데이 안 끝났으니까 같은 반 애들한테 사탕 나눠주던 채린이가 은우에게도 하나 준다던지, 아니면 수업 시간 내내 멍 때리다가 노트 필기 빌려달라고 하던지.. 이 정도 부탁은 얼굴 아는 애한테 할 테니까.
다운은 서우 뒤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을까... 다운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과거를 헤아려보았다. 오늘따라 배드민턴이 쉽지 않았다. 뭐가 문제였는지 한 번 생각하고 두 번 생각해봤는데 객관적으로 자기 잘못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다운이 화가 났다는 건 아니다. 다운이야 워낙 별 생각 없이 살지 않던가. 후반에는 자기도 서우의 장난에 반쯤 장단맞춰줬으니 자기 잘못이 아예 없지는... 아니 근데 내 잘못은 아니지. 다운은 뻔뻔하게 생각했다.
벌러덩 드러누운 서우에게 다가가 몸을 굽힌다.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어서 주섬주섬 셔틀콕을 줍다가 서우를 재촉했다. 높낮이 톤이 일정한 게 마치 알람음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빨리 끝나야 밥 먹으러 가지. 얼른 일어나서 줍자. 내가 도와줄게."
하고 일어나 또 다른 셔틀콕을 주으러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점심이야 아직 여유가 있었고 다운은 식탐 많은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별로 조급하지 않았다. 느릿느릿 하품이나 하다가,
"아,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이것만 정리해놓고."
눈치 없이 대답했다. ...다운이한테 솔직하지 못하게 말한 서우의 잘못인지, 아니면 저걸 또 눈치 없게 진실로 받아들인 다운의 잘못인지 모르겠으나 상황이 영 이상스럽게 흘러가는 건 알겠다. 다운이 품에 모아뒀던 셔틀콕을 자루에 우스스 떨어뜨려 놓다가 등을 돌렸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다운은 잠시 고민하다가 느릿하게 덧붙였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시끌벅적한 하루가 쭉 이어지지 않을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당장 타바스코 사탕을 넣고 즐겼던 룰렛을 몇 번이나 즐기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주변의 분위기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이번 쉬는 시간엔 어디 안 가고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수업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 이내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기분 좋게 쭉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고 룰렛을 끝낼 생각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슬슬 피해다니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그는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아마 알고 있는 이도 있을테고 모르는 이도 있을테고.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자리에 앉아서 쉬기로 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가 방금 전에 공부한 것을 복습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공부를 아예 안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쉬는 시간에 쉬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겠는가..라고 그는 생각했다.
친구에게 받았던 알사탕 하나를 꺼낸 후에 그는 그 사탕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달달한 오렌지향과 맛이 혀 끝에 녹아내렸다. 와. 이거 맛있네. 무슨 사팅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포장지를 확인했다. 편의점에서 본 사탕인데 이게 이렇게 맛있었나? 나중에 하교하면서 하나 사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셔틀콕을 저렇게나 모았다니, 서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번 힘차게 내던진 탱탱볼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고 들쑤시고 쏘다니는게 서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일단 잎으로 나아가 부딪히는 재미로 사는 애한테, 반복 노동 단순 작업이 주어졌으니 하기 싫어 널부러지는게 이해된다. 업보라는 점에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고, 서우는 우니가 그렇게까지 말해준다니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세웠다. 휘말린 우니가 이렇게나 도와주는데, 계속 발라당 누워있을 수는―
“어엉?! 안 돼―!!! 나랑 같이 점심 먹어줘야지!!! 우~니는 서우 혼밥시킬거야……?”
밥 먹으러 가도 된다고 한 것은 서우였다. 말한지 1분은 지났으려나, 서우는 바로 번복했다. 정반대의 말을 한다. 눈썹을 여덟 팔 자로 갸륵하게 휘고, 울망울망 어린 아이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재촉하는 눈빛으로 우니를 바라본다. 우니가 농담이라고 말할 때까지 계속된 눈빛공격이다.
“―그럴 줄 알았어!”
농담이라고 말하자마자 자리에서 튀어오르듯 일어섰다. 방글방글 웃는게 이정도면 연기를 전공 삼아야할 것 같다.
“근데근데, 우~니는 내 이름 알아?”
서우는 반 아이들 이름을 다 알고 있었다. 출석부를 보고서 별명을 짓는게 새학년을 맞이하는 서우의 첫 임무이기 때문이다. 셔틀콕을 다시 이삭 줍듯 모으나 싶었는데, 그새 또 우니의 뒤꽁무니를 쫓아와 기대어린 표정으로 바라본다.
오늘의 학교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아무래도 그 원인은 화이트데이일 것이다. 기념일이란 건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법이니까. 아침부터 교실은 저마다 사탕을 나누는 아이들로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쉬는 시간일 때의 이야기. 수업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탕은 자취를 감추고, 글씨를 적는 소리만이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전히 손이 움직이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채린이었다.
채린은 칠판에 적힌 글씨를 뒤로하고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체육 시간인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인다. 몇 학년일까. 쟤 되게 빠르다. 하며 이어지던 잡생각을 멈춘 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아.”
채린은 책상을 보았다. 새하얀 공책은 새것과도 다름없었다. 아는 선배의 말에 의하면 이 교사는 불시에 필기 검사를 한다고 했다. 미리 적어두지 않으면 울게 될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채린은 주변을 살폈다. 마침 익숙한 얼굴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바빠? 넌 아직 안 준 것 같아서.”
채린은 생글거리는 낯으로 타이밍 좋게 비어있는 앞자리에 앉으며, 초록색과 주황색의 막대사탕 두 개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렸다. 본론은 숨기기 위해 공책은 아직 책상 밑에 들고 있다.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발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물론 그에게는 발소리만 듣고 그게 누구의 발소리인지 파악하는 능력은 없었기 때문에 발소리의 주인공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 알 수 있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며 그는 의자에 앉은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내 들려오는 바쁘냐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저번 시간까지는 좀 바쁘긴 했는데 지금은 프리해. 응? 그런데 사탕이야? 오! 땡큐! 잘 먹을게! 역시 살면서 친구가 있으면 이렇게 좋단 말이야. 아. 맞아. 나도 너에게 사탕 줬었는데. 챙겼어? 우주 사탕 있는 그거."
점심시간 무렵에 자신은 분명히 반의 모든 책상에 사탕을 돌렸다. 물론 그녀를 만나서 직접 준 것은 아니었으나 반 책상 전부에게 돌렸으니 당연히 그녀의 자리에도 사탕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안에 들어있는 팝핀캔디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자신도 알 길이 없었지만. 아무튼 어깨를 으쓱하며 그는 가만히 주변을 돌아보며 입에 남아있는 사탕을 가볍게 씹은 다음에 꿀꺽 삼켰고 방금 받은 사탕을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었다.
"음. 김에 왔으니 물어보겠는데 말이야. 이런 날에 검은색 사탕 복면을 쓰고 사탕을 몰래 숨긴 후에, 막 퀴즈 같은 것을 뿌리면서 최종장소에 숨겨뒀던 사탕에다가 플러스로 선물같은 것을 놓아두는 괴도 같은 이가 있으면 어떨 것 같아? 약간 이벤트 느낌으로?"
점심시간 무렵, 살짝 생각했었던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과연 어떨까 생각을 하며 그는 그녀에게 물어봤다. 물론 긍정적인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으나 그래도 물어서 손해볼 일은 없지 않겠는가.
천사라는 말에 입을 잠시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무언가 반박하려다 만 것 같다는 인상이 든다. 천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느니 이상한 말 하지 말라느니 주저리주저리 어깃장 놓는 대신 다운은 작게 툭 내뱉었다.
"나는 다운인데..."
딱히 반박하려는 말은 아니었고 혼잣말에 가까웠다. 다운은 사회성도 떨어지고 친구도 몇 없어서 서우 같은 친구를 대할때면 항상 어찌할 바 모르고 쑥맥처럼 굴기 일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는데 같이 밥 먹어줘야한다는 말에 다운은 잠시 사고가 멈춘 것처럼 보였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이다가,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다는 듯 검지를 내민다.
"근데 우리 옛날에 만난 적 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밥도 같이 먹고 애칭도 정해주고 할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기억을 잃었을지도, 내가 또 까먹었을지도, 아니면 내가 사회성이 떨어진 나머지 아싸처럼 구는 걸지도... 덜컥 겁을 먹은 다운이 심기불편한듯, 침음을 흘린다. 친구 사귀기가 이토록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건 서우가 곧잘 말을 붙여와 대화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잦아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정 안되면 또 지금처럼 농담이라 얼버부리면 그만이다.
"엇, 이름? ..........."
비상이다. 다운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하마타면 친구 이름을 까먹은게 아니라 제 어머니 이름을 까먹은 줄 알겠다. 아무튼 나름의 답을 찾은 다운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바빴다고 말하고서야 용케 타이밍이 맞았구나 싶었다. 채린은 매 쉬는 시간마다 사탕 교환하러 다닌다고 바빴기에 그가 자리를 얼마나 비웠는지도 몰랐다. 그냥 대충 비슷한 시간 보냈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화이트데이니까.
“나한테?”
채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한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것. 친구들에게 물어봤을 때 다들 자기도 받았다고만 해서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찾은 모양이다.
“아, 그거. 난 또 산타가 시기를 착각한 줄 알았잖아. 너였구나~ 근데 왜 애들 없을 때 놔뒀어?”
채린은 비밀이 밝혀졌단 게 유쾌해서 웃었다. 사실 채린은 사탕 자체보단 누가 그걸 놔뒀는지가 더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어떻긴. 당연히 재밌겠지! 왜? 어디서 그런 이벤트 열린데?”
채린은 지루한 일상에 찾아올 이벤트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수업 듣는다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야 훨씬 즐거울 테니까. 진짜로 열린다고 하면 친구들이랑 같이 갈까 싶었다. 관심이 생겨 의자를 당겨 앉으려던 채린은 들고 있던 공책을 떨어트렸다. 그제야 제가 이곳에 왔던 목적이 떠올랐다.
채린은 슬쩍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공책을 책상 위에 반쯤 걸쳤다. 그리곤 말을 하는 대신 웃었다.
"어. 뭔가 있을 때 놔두기도 뭐해서 말이야. 지금도 네가 이렇게 사탕 안 줬으면 굳이 말하지도 않았을걸? 좀 그렇잖아? 내가 모두에게 돌렸다! 하면 뭔가 되게 생색내는 것 같고, 애매하고 말이야."
물론 딱히 말을 한다고 해서 크게 변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생색내는 분위기는 살짝 피하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방금 말한대로 그녀가 사탕을 주러 온 게 아니라면 그녀에게도 딱히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테니까. 정말로 가볍게 대답하며 그는 두 어깨를 으쓱했다. 이어 주머니에 넣어둔 사탕을 언제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오자 그는 손뼉을 짝 쳤다.
"그치? 그치? 되게 재밌고 즐거울 것 같지 않아? 아. 이벤트가 열린다기보다는...그냥 그런 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그런 일을 꾸미려고 했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며 그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야 정말로 하게 되면 아마 내년이 될 텐데 자신의 정체를 미리 밝혀서 좋을 것은 없지 않겠는가.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였다. 고3이 되어서 공부를 제대로 하게 되면 그런 이벤트성 장난은 치고 싶어도 못 칠 가능성이 높았을테니까.
"아무튼 아저씨는 잘 지내고 있어? 우리 아빠가 가끔은 안부 좀 묻고 그러라는데. 옆집 아저씨도 아니라서 참 애매하단 말이야. 이게. 아. 그런데 그 공책은 뭐야?"
방금 공책이 떨어진 것은 그도 눈으로 확인했다. 저 공책이 갑자기 나왔을린 없고,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 여기로 공책을 가지고 왔는가. 가만히 생각하던 그는 살짝 의자를 뒤로 빼면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말해두는데 모의고사가 다가온다고 쉬는 시간에 공부할 생각 없어. 난. 알지? 채린아? 알잖아. 내가 그런 성향 아닌거 말이야. 우리 엄마가 공부 좀 시키라고 말이라도 한 거야? 아. 하지만 너도 딱히 그런 성향은 아닌 것으로 기억하는데."
생각해보면 그녀도 딱히 공부에는 관심이 없지 않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갈테니까 따라오면 안됩니다!" "하지만 아가씨..." "유모도 집에 있을때랑 다를게 없네요!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승리는 없다-입니다!!!"
다나의 유모, 헬렌 조는 그저 난처할 뿐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모시기 시작해 어언 17년, 아직까지도 행동패턴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제대로된 제어법이 식사나 고용주 말고는 없다는 것에 매일 고뇌할 뿐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 여기서는 차를 몰아도 되던가?" "사장님께서 운전은 집안에서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여기는 아빠가 없는걸요?"
이건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방금 전, 돌연 '그러고보니 아직 바다에 놀러가지 못했다'고 말한 이후에 막무가내로 수영복을 찾아대던 아가씨를 말리고 멀쩡한 옷을 준비해 입힌뒤 차를 대기시켜 해변으로 나오기까지... 2시간. 2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나오는것'에만 2시간이 걸렸는데 그것도 옷이 마음에 안든다던가 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아가씨가 쉴새없이 조잘거리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믿겠는가?
"...오늘부터는 집안에서 한국어만 쓰십시오." "에?왜요? 학교에서만 배우면 되는게 아닐까요?" "아가씨가 이 학교에 더 빨리 적응하게 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
헬렌은 나쁜사람입니다. 그렇게 정했습니다. 뭐가 마음에 안든건지 언어의 자유를 빼앗아가더니 이제는 한글공부를 마칠때까지는 디저트의 리퀘스트도 받지 않겠다고 하지 뭡니까. ...아예 안받는게 아니라는 잠이 그나마 위안이지만 '원하는게 없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도 이 이해안되는 한글...
"ㄱ...ㅠ...ㄹ... 납득, 안돼입니다."
세상에, 어느 나라 사람이 저걸 '귤'이라고 발음 합니까?! 분명 광고에서는 너도 할수 있다! 초등학생도 한다고 하던데 이 나라 사람들은 어린애한테 도대체 뭘 시키고 다니는 겁니까?! 삐뚤빼뚤 넓은 공책에 한글을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지만, 역시 납득이 안됩니다. 가나다와 아버지, 어머니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런 미묘한 발음은... 안되겠습니다. 여기는 도서관, 분명 무언가 답이 있을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마치 '도를 아십니까?' 라거나 '훨칠해보이시네요' 라고 불린 것 같은 그런 아주 수상함이 느껴지는 사람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이 사람은 외국인 이었으니 그냥 길을 물어보는거라 생각되었다. 이곳도 나름 놀 수 있는 장소도 있으니 관광객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지. 그래도 외국인 치고는 한국어를 매우 잘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여행을 하면 그 여행지의 언어부터 알아보는 그런 사람인걸까?
"귤..이라 부르지 않을까 싶은데."
당연히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인종 중 한명인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귤' 이라는 단어를 쓴단 말인가.
당연하게도 그의 입에서는 본토사람의 발음 '귤' 이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재현되었고 그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혹시 무언가의 촬영? 그렇다기에는 카메라가 있는건 아니고. 그렇다기보다 이 항구근처에서는 귤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텐데?
"(이 근처에)귤은 없을거라 생각해."
동네 마트라면 팔지도 모르겠지만. 아아, 혹시 그녀는 갑자기 오렌지나 귤같은 과일을 먹고싶었던걸까? 그거라면 어느정도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글쎄. 뭐, 내년 이 맘쯤에 누군가가 할지도 모르지? 원래 이런 날이 되면 막 활동하고 싶어하는 이가 생기기도 하고 그렇잖아? 당장 나만 해도 방금 전까지 타바스코 사탕을 넣고 번갈아가며 먹으면서 게임을 즐겼는걸. 아. 참고로 6전 4패야."
괜히 입이 얼얼하다는 듯 그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면서 자신의 입술을 부채질하다가 다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물론 먹는 순간엔 상당히 매웠지만 그 매움이 아직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전 타임에선 매점으로 황급하게 뛰어가서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기도 했으니 더더욱. 물론 그런 말은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았다.
"앉기야 앉겠는데... 아. 우리 아빠는 여전히 잘 지내. 요즘엔 낚시에 살짝 빠지셨는지 일이 없으면 바다에 낚시하러 간다니까. 그런데 은근히 구경하니까 재밌을 것 같아서 나도 배워볼까 싶지만 뭔가 기다리는 거 되게 지루할 것 같기도 하고..."
미덥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은우는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그렇다면 공책을 가지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곧 그녀의 입과 텅 비어있는 깨끗한 페이지를 보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은우는 정말로 빤히 채린을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런 것치고는 그다지 피곤해보이지 않는데? 너. 아무튼 뭐 때문인진 알 것 같아. 그야 난 당연히 필기했지! 어쨌든 시험을 아예 놓을 수도 없고, 일단 명문고니까 어느 정도는 공부를 해야 하잖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넌 정말 이 학교에 올 자격이 있냐는 말을 듣기도 싫고. 아무튼..."
이어 은우는 바로 옆에 둔 자신의 공책을 펼쳤다. 그래도 공부를 일단 조금은 하는지 페이지에 꽤 깔끔한 필체로 이뤄진 필기가 가득 매워져있었다. 이어 은우는 얼마든지 쓰라는 듯이 피식 웃어보였다.
"오케이.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서비스! 친구 좋을게 뭐겠어. 이럴 때 돕고 돕는거지. 아무튼 다음 시간까지는 돌려줘. 그러니까 3일 뒤였나? 아무튼 그때까진! 나도 계속 필기는 해야 하니 말이야. 아무튼.. 2학년 새학기인데 재밌는 일 겪은 거 있어? 혹시?"
"Thank you!그런데- 당연하다-입니다. 다나, 가지지 않고있다. 한국어, 공부한다-입니다. Two months 전에, 여기 왔다-에요."
어쩐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은 사람에게 맞장구쳤습니다. 그래도 몇번이고 들어도 저 발음은 익숙해지지않습니다. 게다가 어쩐지 저 사람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친절한데 그럴리가 없지요!!! 적어도 제가 공항에 내려서 지금까지 만난사람... 어... 몇명이나 되죠?! 학교에 들어오고 난 이후에 한 반에 들어간 사람이 제일 많았던 것 같은데?
"아, 그러면, 이건 어떻다- 입니까? Korean, 어렵다-에요. Help me. 도-캐비"
고구마, 도깨비... 뭔가 단어를 연결지으면 '의미'는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본 드라마도 제목이 이랬는데 헬렌이 어쩐지 이상한 웃음으로 바라보던게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분명 3월에는 모의고사? 라는게 있었을겁니다. 거기서 한국어 점수가 높게나온다면ㅡ 디저트 통제도 풀릴겁니다.
"모든 순갼이 눈부셔따- 맞다입니까?"
제가 느끼기에도 들뜬 것 같았습니다! 그야 이렇게 완벽한 대사를 말해본것도 처음이지만, 이대로라면 머지 않은 미래에 제 사소한 희망사항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거니까요!
“4패... 전적 너무 미묘하잖아. 아직 혀가 붙어있는 게 다행이네. 그보다 그 활동하고 싶어할 만한 사람은 너 아니야?”
채린은 부채질하는 모습을 보며 낯을 흐렸다. 타바스코라면 먹어본 적 있다. 그 매운 걸 굳이 6번씩이나 먹으려 하다니 게임이 좋은 건지, 승부욕이 강한 건지. 어느 쪽이든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앞의 사탕 숨기는 복면 이야기도 풍부한 상상력이더니 타바스코는 한술 더 뜬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본인이 하고 싶은 게 아닌가 싶었다.
“아저씨도 낚시 하시구나. 하긴 그 나이쯤에 많이 하긴 하더라. 바다면 배 타고 나가시겠네. 뭐, 그거야 해보면 알겠지? 별로면 다음부터 안 하면 되고.”
채린도 낚시는 해본 적이 없어서 무어라 평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의견을 내보았다.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지루할 것 같긴 하다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으응? 아닌데? 나 피곤한데? 너 말로만 안 한다고 했지 열심히 하구나.”
은우가 앉자 안심했던 채린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시선을 피한다. 일단 우겨보지만 어색함까지 숨길 수는 없다. 그러다 필기를 했단 말에 확 표정이 밝아진다. “알았어! 그때까지 돌려줄게.” 상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가져갈 요량으로 채린은 두 권의 공책을 품에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요리부에서 스테이크 만들기로 한 거? 요리부면서 도서실에 상주하는 선배를 만났는데, 요리 못하는 사람도 요리부 와서 요리해도 상관없대.”
채린은 제가 겪은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결과적으로 채린의 기준에서 새학기에 겪을 수 있는 재밌는 일이라면 역시 새 친구를 사귀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또 새로운 어휘가 나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자유 거래에서 보통은 선제라고 하면 대부분이 말한다-고 그랬던것 같은데 어쩐지 알 수 없는 거래의 세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묘하고도 놀라운 한국의 문화는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었습니다. 몇년이고 배워온 재패니즈하고는 다르게 겨우 두달이니 괜찮기야 하겠죠!!! ...그쵸!!! 그런데 여기선 이게 문제입니다. 보아하니 '선제반사'같은건가본데... 얼마나 줄수 있나를 하는걸까요? 우선은 지갑을 꺼내 곧바로 안쪽을 살펴보았슺니다.
"어... dollar, 있다-입니다. 원화, 없다에요. Hm..."
그러고보니 지금 한국사 수업의 교수님이 한번에 천달러정도고... 이분은 그건 아닌것 같으니까 빼면... 어...
"Ok!!! 만족하다-입니까?"
400달러정도면 충분하겠죠! 이 정도면 만족할 수 밖에없다는 생각에 한껏 흥이 올라서 자신있게 웃어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한다면 사실은 제법 고면한 학자일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아빠가 했던 '능력을 가진 사람에겐 그에 적합한 대가를 주어야한다'는 말에 그대로 위배되는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손발이 덜려왔습니다. 아바의 그런 취급이 싫어 원래 가려던 방도 무시하고 눌러앉은지 두달... 들킨다면 돌이킬수 없어지는게...? 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습니다.
"어. 글쎄? 내키면 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내년에 혹시나 그런 이가 보여도 모르는 척 해주기야. 아. 물론 어지간하면 아는 체는 안 하려나?"
정체를 아는 이라면 아마 같은 부류로 묶이기 싫어서 일부러 모르는 체 하지 않을까 은우는 나름대로 추측했다. 딱히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는 상처받거나 할 일은 없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라도 그렇게 할 것 같았으니까.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만 작게 내며 낚시에 대한 평에는 특별히 코맨트를 하지 않으며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니. 그래도 시험 공부는 하긴 해야하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상위권 차지할 정도로 그렇게 막 열심히 할 생각은 없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명문고라서 다들 공부 너무 잘한단 말이야. 애초에 우리 둘 다 다른 학교 갔으면 중상위권은 바로 따지 않았을까?"
물론 다른 학교의 수준을 알지 못했기에 정확한 비교도 하지 못하는 만큼 그의 말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까웠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살짝 내비치며 그는 등받이에 등을 살며시 붙이며 조금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러면서 그는 요리부와 선배라는 말에 누군지 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와. 나. 그 선배 누군지 알아. 3학년 선배 말하는 거 맞지? 전에 요리부 나도 갔었거든. 칠면조 고기를 먹었는데 엄청 맛있더라고. 다음에도 놀러오라고 해서 한 번 가볼까 생각 중이긴 한데. 아무튼 너도 아는구나. 아. 근데 스테이크 만드는거야? 내 것도 있어?"
진지하게가 아니라 정말로 가볍게 툭 던지듯 이야기하는 것이 그야말로 분위기상 말하는 드립에 가까웠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별 의미가 담겨있진 않은 가벼운 톤이었다.
"아무리 관광지가 많다지만 달러화를 받아주는 가게는 많지 않다고. 빨리 원화로 바꿔두는게 좋을걸?"
받는 가게를 어느정도는 알고는 있지만 역시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들이다 보니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쓸데없이 신경쓰는게 많아서 그만큼 가격도 더 나가고. 딱 봐도 오래 있을 것 같은데 계속 그런 곳에서 소비하다가 보면 돈이 남아나지 않을 것 이었다. 그나저나 말은 했지만 당연히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고 고작해야 그냥 김밥천국에서 라면이나 얻어먹을 생각이었던 소박한 그에게 내밀어진 400달러는 하늘이 다르게 보이게 했다.
"아니, 이게 뭔. 자자자, 잠깐."
뭐가 좋다고 웃고 앉아있는거람 이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도로 그 엄청난 양의 지폐를 집어놓도록 그 돈다발을 밀어냈다. 치안이 좋은 한국이라지만 분명 이 맹한 외국인을 호구잡을 사람은 있을거라 생각했다. 저 돈다발이면 감성돔을 몇 마리를 먹을 수 있는걸까.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비밀은 남들 다 알려주는 것보다 혼자 알고 있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다. 그것이 이벤트와 관련된 거라면 더욱 그렇다. 남들처럼 갑작스러운 일에 놀랄 순 없어도 다른 방식으로 즐기면 되고.
“으응, 그렇지. 그러니까 일부러 평범한 학교로 진학하는 애들도 있었겠지. 그래서 다른 학교 갈 걸 그랬다고 후회돼?”
중학교 때와 달리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빠르게 공부를 포기해버린 채린인지라 미묘했다. 물론 다들 공부 잘한다는 것엔 동의했다. 제 성적이 바닥에서 놀게 된 계기에 한몫했으니까. 그런고로 시험 기간과 평상시를 똑같이 살아가는 채린에겐 그의 감정이 완벽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저보단 성실한 사람이구나 싶긴 했다.
“응, 미나 선배. 나도 네가 알 줄은 몰랐어. 요리부 진짜 아무나 가도 되구나.”
요리부 아닌 사람을 흔쾌히 요리부에 초대하길래 그러리란 예상은 했지만. 그나저나 선배는 의외로 발이 넓은 편이었나 보다. 아니면 은우가 발이 넓은 걸까?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였다. 어쨌든 지금의 화제는 사람이 아니라 스테이크니까.
“글쎄, 그때 되어봐야 알겠는데. 남으면 줄 수도 있고?”
미나에게 제일 큰 고기를 부탁해서 확답을 받아냈다. 그만큼 확실하게 1인분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첫 번째는 저고, 두 번째는 미나이므로 과연 세 번째까지 차례가 돌아갈지 확신할 수 없다.
개인자산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살다보면 만에 하나라는게 있다며 받은겁니다. 원화가 아닌건 아쉽기야 했지만 그래도 달러가 통하지 않는 나라는 드무니까요! 앞에 계신분의 반응을 보면 어쩐지 그것도 아닌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달러를 가지고 다녀서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이 확실히 많았습니다. 묘하게 친절해진다던가. 멋진나라입니다!
"아아아!!! 팔이 빠진다-!!!"
전면 취소!!! 한국은 위험한 나라입니다!!!! 백주대낮에 사람을 납치합니까?! 지금까지는 이런일이 없었는ㄷ... 여긴 라면집 아닙니까? ...아니 납치범의 아지트일수도 있습니다!
어쩐지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나, 포기하는게 좋다입니다- 테러리스트와 흥정, 하지않ㅇ... 공짜? Free?"
아니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수강료는 받는다면서요?! 그래서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런걸지도 모릅니다. 겨우 이정도 금액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나를 모독하는겐가!!! 같은겁니다! 확실해요! 애니에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럴때 필요한건...
"두배까지는... ok!!! 다나 빈트 라시드 알하메드, 거짓말 하지 않는다입니다. 아빠도 그렇다- 우리 가족은, 거짓말하지 않는다에요."
"딱히. 여긴 여기 나름대로 재밌는 것들이 많거든. 물론 덕분에 선도부 사람들은 나를 안 좋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때!"
사실 실제로 그런지는 은우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러지 않을까 예측할 뿐이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끌려가서 징계를 먹거나 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것을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제약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것보단 역시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고 싶었으니까.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그는 고개를 강하게 양옆으로 세게 도리도리 저었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만난거야. 그때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선배밖에 없었거든. 아무튼 진짜로 달라는 의미는 아니야. 그냥 나중에 사진이나 한 장 찍어서 보내줘."
딱히 요리를 먹어보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떻게 조리를 할지는 나름대로 궁금했는지 그는 그녀에게 스테이크를 만들면 사진 한 장만 찍어줄 것을 요청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웹툰 소재로 어떻게 어떻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녀에게도 자신의 부업은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입에 담지 않으며 그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스테이크 모양의 그림만 그리다가 살며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 보니 너, 요리 실력이 얼마나 돼? 스테이크 굽는 것도 은근히 기술이 필요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닌가. 그냥 고기 굽듯이 구우면 되는건가?"
간단하게 고기는 구울 수 있었으나 스테이크 수준까지 가면 조금 애매하다고 생각하며 은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철판에 구워진 것은 여러 번 먹어보긴 했으나 자신이 직접 구운 적은 없는 탓이었다.
"아. 그것도 그건데 혹시 타바스코 사탕 도전해볼 생각 없어?"
이어 슬그머니 장난끼가 돌았는지 그는 자신이 가방 속에 넣어둔 그 타바스코 사탕과 일반 사탕이 섞여있는 통을 떠올리며 채린에게 살며시 제안하듯 물어봤다. 기왕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제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물론 거절해도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잇고...나는 내일 일 때문에 슬슬 자러 가야 할 것 같아! 잘 자! 채린주! 그리고 모두들!
팔이 빠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녀였지만 주변에서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정대수 그는 매번 이 항구에서 낚시를 하는 알려질대로 알려진 소년. 게다가 그가 김밥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기에 아무도 그녀를 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이야말로 일어날 사건을 막지못하는 안일한-
"free."
고작 고등학생이 뭘 얼마나 잘 가르친다고 400달러를 받을 수 있을까. 저어기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고나면 어쩌면 받을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무력한 고등학생이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생각도 없긴 하지만 기초적인건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가격이 늘어나는거지.."
그런데 그 400달러가 갑자기 800달러가 되어버렸다. 옳거니, 양놈이 아니라 중동놈이었구나. 뭐, 좋다. 그 달러 받는다고 하고 나중에 안 받고 도망치면 그만이지 뭐.
"오케이 땡큐! 4..백 달라!"
말하니 아주머니가 라면과 김밥을 가져왔다. 라면의 표준, 신라면에 계란을 풀고 부재료를 적당히 넣은 스탠다드한 맛.. 그리고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하디 평범한 기름을 잔뜩 바른 두툼한 김밥.
그게 아니라면 조금 김이 빠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뭐야 납치가 아니었던건가!!! 표정에서 알기 쉬운 실망이 드러나버렸습니다. 어쩐지 주변 사람들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을보면 잘 꾸며진 한편의 연극같은게 아닐까-했지만 그것도 아닌것 같고 아직 의문점 투성이입니다! 게다가 나온 음식은 평범한 라면에 김밥... 솔직히 헬렌이 한것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쁘지않은 향과... 모양...
"젓가락, 못쓴다입니다! 포크를 요구하다!"
저도 모르게 진심을 말해버렸습니다. 우선은 한쪽 손을 들고 종업원분을 기다려 봅시다. 이미 나와버린 음식이라면 거절하는 것은 주방장께 실례가 되니까요!!! 다행히 포크는 금방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푼에 포크, 이정도면 무난하게 먹을 수 있을것 같았습니다.
"으음...!!! 맛있다입니다! 이건 팁을 드려야한다입니다!!!"
...? 어쩐지 처음의 공부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지않습니까? 그래도 맛있으니까 괜찮겠죠! 문화를 배우는 것도 훌륭한 학습이다 라고 교수님도 말했었습니다! 중요한건 지금 어떻게 느끼느냐! 여기서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한겁니다!!! 우선은 노트를 꺼내서 곧바로 필기하기로 했습니다. 어렵기야 하지만 그래도 그린다고 생각하고 메뉴판을 따라 글을 쓰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이걸 본다-입니다! 다나, 학교를 다닌다- 시험을 넘기지 않으면, 중요한게 없어진다에요. 잘 썻다입니까?"
설마하니 천사라는 단어에 한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서우는 그저 우니가 갑자기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름 장난으로 우니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이름은 모르려고 해도 어렵다. 그리고 서우는 머리가 나쁘다고 하지도 못했다. 지옥의 정시파이터, 정시만 챙기는 우등생이란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서우는 우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혼잣말 같기는 했지만 서우의 귀에 들린 이상 혼잣말이 아니다.
“옛날에? 응!”
입학하는 학생이 다 모이는 자리, 그 자리에 서우도 있었고 우니도 있었을 것이다! 우니가 입학식에 오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아니면 예나제나 학교에서 사고치고 다니던 소란 속에 있던 서우를 목격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 가능성을 모조리 포함해서 쉽게도 응이고 답한다. 서로 얼굴을 보고 마주하며 대화를 한 적은 없음에도! 서우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대답하다가, 우니가 방금 말한 뉘앙스의 대사는 주로 작업멘트로 쓰인다는 점을 떠올렸다. 짓궂은 눈웃음이 물결친다.
“우~니가 작업 안 걸어도 난 이미 넘어갔는데―!”
만화였다면 ‘꺄아―’ 같은 효과음이 붙었을 것이다. 이 나잇대에는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륵 웃는다는 말을 증명하듯이 웃었다.
“시…우…?”
갑작스레 풀이 죽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시무룩한지 하마터면 친구가 이름을 까먹은게 아니라 제 어머니가 이름을 까먹은 줄 알겠다.
도망가려 했던 게 맞았던 것 같다. 움직이려다 동영상 정지버튼을 누른 것 처럼 어설픈 자세로 멈춰있던 몸을 엉거주춤 고치는 하늘을 더 가늘어진 눈으로 흘겨보려다 말고 대신 '다 이해하니까 난 괜찮아요'의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입술 사이로 살짝 바람이 새어 나왔다. 학교의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인 고삼 남학생이 막 입학한 신입생을 보고 도망간다니, 묘하게 즐거우면서도 학년과 별개로 한창 감성에 빠져있다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감정을 알기에 공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남일은 아니었지. 적어도 하늘은 입 밖으로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다 들으라는 듯이 읽기까지 했다. 등 뒤로 감춘 종이를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럭저럭 잘 지낸것 같아서 다행이야." 습관적으로 다행이에요를 말하려다 어색하게 고친 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삼은 많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아직 학기초라 별일은 없나 봐. 라 말을 이어갔다. 고등학교 삼학년이란...막 신입생이 된 자신도 이리저리 정신이 없는데 시원하게만 느껴지던 바람이 조금은 서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구름도 얼마 없고 날씨도 이 정도면 따듯하고 사람도 없으니까 머리 아플때 오기에 딱 좋아. 이렇게 말하니까 생각이 들었는데, 혹시 내가...그 하여튼, 모처럼의 쉬는 시간을 방해한 게 아니지?" 어찌되었건 조용히 쉬는데 들어와서 감성을 깨는 행동을 한 건 맞으니까. 해인은 잠시 머뭇거리며 물어보며 고개를 들었다. 맑고 차가운 늦겨울의 하늘에 걸린 새 봄의 햇살이 느긋하게 바람이 지나간 뒤 온기를 내렸다.
"응. 별 일은 없는 것 같고. 여기저기 친구들하고 돌아다니다가 3학년 교실까지 오게되었나봐. 그래서 겸사겸사 오빠도 찾아봤는데 1반에 없었다고 해서."
벌써 자신의 행동을 보았다면 건수를 잡았다고 신나게 놀릴 지난 중학생때 알던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가고 해인은 안도하며 차분하게 바다의 일을 전했다. 아마 당사자가 알았다면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며 어이없어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였지만 걱정이 된다는 어투의 물음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덧붙였다. 저도 동생의 친구가 찾아와서 서해준이 누나 찾던데-로 시작하는 말을 꺼낸다면 비슷한 반응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은우가 은돌이로 고정이 되어버렸잖아?! (갸웃) 딱히 일코라기보다는 은우는 사고를 치고 싶다라기보다는 그냥 재밌을 것 같고 재밌으니까 한다 주의라서 얌전히 놀 때도 많아. 보드게임이라던가 충분히 재밌는걸! 전략형 게임? 아주 좋아하지! 다만 자기가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전략을 짜기보단 판을 혼돈으로 만들어버리는 플레이를 더 즐겨. 분명히 저렇게 하면 1등 못할게 뻔한데 일부러 판을 뒤집어버린다던가? 아이고. 학원이라. 정말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 그렇기에 다른 삶을 조금은 즐겨보고 싶어하는거려나?
은우 은우구리 은돌이~~ 그만큼 잘 어울린다는거지 ㅋㅋㅋㅋ 사고보다는 재밌게 논다에 초점이 맞춰져 있구나. 학교안에서는 그럼 재밌게 놀 수 있는게 한정되어 있어서 더 사건을 벌이는 건가() ㅋㅋㅋㅋㅋ 즐겜러 은우랑 클루하다가는 다 같이 혼돈에 빠져버리는 거 아니야??? ㅋㅋㅋ 마피아나 어몽어스도 재밌게 잘 할 것 같아 ㅋㅋㅋ 완벽하지 못한것에 두려움이 많으니까? 다른삶을 즐기고 싶어하지만 성향적으로는 힘든 딜레마지. 그래도 금요일이니 만큼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있어~
제 혼잣말을 들어버린 이상 설명을 해야하는데, 이걸 입 밖으로 말하자니 또 마음이 참 어수선해진다. 이런 상황은 사교활동이 원활하지 않을때나 생기는 일인데 요즘 부쩍 이런 일이 많아진 기분이 든다. 이러다 나는 혼자서 밥 먹는 루저, 외톨이, 아싸가 되는게 아닌가 걱정이 들던 차엿다. ...그래 혼밥이 나쁜 것도 아니고 오늘은 이 친구와 함께 먹기로 했으니 문제될 것은 없다. 1학년때 나와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에게 눈치없는 척 합류해도...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다운은 무척 진지해보였다. 평생 중요한 생각만 하고 살 것 같은 얼굴이다.
"...우리가 만나본 적 있다고?"
다운은 진지하게 자기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음영이 지기 시작한것도 그때쯤이다. 먹구름 낀듯이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을 보자니 그렇게 진중하고 무거워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억을 뒤지고 뒤져도 다운은 서우와 함께한 기억이 없었다. 당연하다. 입학식에서 한 번 보고 반에서 몇 번 봤을뿐이지 둘이 유의미한 교류활동은 한 적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거였어. 그래서 우리 언제 만났다고?"
작업이라는 말에 다운은 기계처럼 삐걱거린다. 뻣뻣하게 손을 마구 흔들고는 눈을 마주치며 묻더랬다. 진짜로 기억 못하는 거면 다운이 사과해야하는게 맞았다. 다운식으로 표현하자면 울기 직전의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냥 무표정이다.
"잠깐만, 방금건 농담이었다."
하하하, 무척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머리를 팽팽 돌려본다. 수아? 서아? 수진? 시아? 스쳐지나가는 후보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만 고르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수아?"
다운이 서우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또 아니라 하면 이것도 농담이라고 하고... 그렇게 친구도 잃고.......
>>937 남에게 피해가 주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재밌으니까! 정말로 단순히 그게 이유야. 마피아나 어몽어스라. 마피아를 할 때 한번은 시작부터 내가 마피아니까 날 죽여라! 라고 공개하고 저거 또 트롤하네 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며 정말 하나하나 너무나 손쉽게 죽이고 승리한 후에 내가 마피아라니까. (으쓱) 이런 적도 있었지! 사실 내심 원하는 것과 성향이 항상 같을 순 없을테니까. 은우를 약간 철없는 동생처럼 보는 것도 어쩌면 그게 이유일까..하고 생각해보기도 하고!
>>941 (저거 또 트롤하네) 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얼마나 많이 그랬으면(은은)() 은우가 승리한 후에 친구들 표정이 상상가는것 같아 ㅋㅋㅋ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 지루한 일상을 부수고 즐거운 청춘을 보내고 싶어하는 걸까. 하기야 고삼이 되면 더 이상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기는 힘들테니까. 해인이는 속으로 낭만을 동경하는 면이 있으니까 더 갈등이 심하기도 하고. 그렇지(끄덕) 은우를 철없는 동생처럼 본다라,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해인이 개인은 아이인데 어른인척 하는 편이지
가늘어지던 눈빛 뒤에 이어지는 그녀의 미소, 겉보기엔 마냥 귀여워 보이지만 뭘까,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어깨가 결려오는 듯한 이 느낌은.. 스트레칭을 잘못했나?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던 것은 내 나름대로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서였지만 어째 내가 죄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미소에 어색한 웃음을 마주 지어 보일 뿐이다.
"아직 그렇게 체감되는 건 없네."
3 학년이 되면 확실히 신경 써야 할 것은 더 많아지겠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아직 학기 초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태평한 것인지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렇게 대꾸했다. 사실 1, 2 학년 동안에도 학업에만큼은 성실했던 탓에 내신도 부족하지 않게 챙겨놓았으니 평소처럼 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나보다는 네가 더 바빠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한 까닭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듣고 보았던 대로 입후보 준비도 하고 있는 것 같고, 필요한 일이 아니면 손 놓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모든 곳에서 강박이라 생각될 정도로 열심히라는 느낌이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항상 여유가 부족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한숨 비슷한 호흡을 내뱉으며 조금은 쉬엄쉬엄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그녀의 이어진 말에는 고개를 살풋 저어 보였다.
"아니야, 내가 전세 낸 것도 아닌걸."
나야 물론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선호하긴 하지만, 어차피 이 옥상도 학생 교사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오픈 된 장소다. 내가 이곳의 터줏대감도 아니고 지박령도 아닌데, 그녀가 나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보잘것없는 내 감성까지 챙겨주다니 참 마음도 넓은 아이란 말이지. 무엇보다 사람 한두 명쯤 늘어난다 해도 식당이나 매점보다는 백배는 낫다. 단순 머릿 수로만 계산해도 백배가 맞으니까.
"굳이 별관까지는 왜 왔대.."
굳이 본관 옥상에 까지오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일단 별일 없다는 것에는 안심이다. 뭐.. 사실, 무슨 일이 있다고 한들 바로 문제를 해결해 줄 만한 믿음직스러운 오빠도 못되고.. 동생이 내게 수학 공식 같은 걸 물으러 오는 것도 아닐테니 말이다. 그럼 굳이 친구들과 3학년들이 쓰는 별관까지 와서 돌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문득 떠오른 잡념에 사로잡혀 생각을 해보던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내었다.
...사탕 구걸하러 왔구먼.. 그러고 보니 오늘 화이트데이였지. 나에겐 평생 동안 기념해 볼 만한 일이 없었던 날이라 깜빡 잊고 있었다. 그 녀석 성격에는 그럴만도 하지. 휴우.. 다행이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탕을 뜯길 뻔 했잖아?
딱 그거야!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즐거움과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은우의 삶이야. 물론 자신도 아예 피해를 안 줄 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도를 넘어선..그러니까 이를테면 일진들이 만만한 애 하나 잡고 막 괴롭히면서 재밌다고 낄낄대는 그런 건 진짜 극혐하는 편이야. 만약 그런 모습이 보이면 정말 태연하게 양동이에 물을 받아와서는 뿌려버리면서 어이고 재밌네. 낄낄낄. 하는 그런 스타일. 물론 이후는 은우가 알아서 하는 걸로! 사실 고3때도 어쩌면 독백에서도 잠깐 나온 캔디맨 짓거리를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의 이야기! 아무튼.. 고등학교 1학년 한해 동안 해인이가 조금은 어깨에 힘을 풀고 약간의 낭만을 즐겼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걸?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했던가. 각자 벽에다 글씨를 쓰고 너머의 상대는 자신의 방식으로 글을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해인도 하늘의 반응을 자신의 해석으로 아, 멋적어서 자리를 피하려 했다 여기고 은은한 미소를 짓는 현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서로를 배려한다는 의도였지만 보기 좋게 엇갈린 사실을 모르며 해인또한 어색한 기류에 괜스레 "오늘 오래 앉아있었어?" 라 물어보고 바람에 흩날린 머리를 살짝 꼬다가 어깨 넘어로 넘겼다.
"그렇구나. 학원에서 만난 언니는 맨날 앓는 소리를 해서."
"오빠는 1,2학년때도 꾸준히 내신을 챙겨 왔으니까 강도가 덜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매일같이 학교가 폭파되었으며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입시반 언니를 떠올렸다. 그녀는 수시파였던가 정시파였던가. 1학년 때 논 여파로 내신이 목표한 대학에 미치지 못해 정시를 봐야한다며 웅얼거리던 모습이 지나간다. "평소처럼만 해도 아직까지는 시험도 없고 괜찮을 테니까..." 잠시의 침묵이 내려앉고 해인은 그 다음 말에 답을 고르며 머뭇거렸다.
"설마. 내가 바빠도 고삼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자꾸 부담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고삼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 같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해인은 생각한 바를 입 밖으로 내놓았다. 그럼 옥상으로 올라온 이유가 학업은 아닌걸까. 하늘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물어볼까 싶다가도 묘하게 어색한 기분에 질문을 내려놓았다.
"막 입학하고 새로이 고등학생이 되다보니 적응이 필요해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 벌써 이번주만 해도 몇 번을 우왕좌왕 했는 걸."
바보처럼 말이야. 입 안에 맴도는 마지막 말은 다시 삼키면서 옥상의 난간에 팔을 걸쳤다. 연설문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그리고 바로 들려온 한숨 비슷한 긴 호흡과 조금은 쉬엄쉬엄하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하다가 밝게 웃으며 걱정해줘서 고맙다며 말했다. 아직은 그렇게 지치지도 않았고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고 싶었다. 처음 시작할 때 사람이 제일 긴장하고 점점 가면서 적응이라는 명목으로 늘어져 가니 이 정도면 적절하지 않을까. 새로움이라는 이름의 밀려오는 파도를 즐길수는 없어도 종류를 알면 그럭저럭 대비할 수는 있는 법이었다.
"그러면 잠시 실례할게. 오늘 도서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용히 연습하기 힘들었기도 하고."
평소 바삐 지내는 만큼 사적인 공간을 중요시 여기는 해인은 살짝 고개를 적당히 기울이며 고맙다고 가볍게 인사했다. 이어진 질문에 몇 초 생각을 하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화이트 데이니까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러 간게 아닐까? 라 답했다. 묘하게 안심을 하는 하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 기억을 더듬어 가니 친구가 고등학생으로서 보내는 첫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별관까지 가보겠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비록 자신은 2학년 선배랑 얼떨결에 사탕내기를 하는 통에 가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살다 온 모양이다. 과연 팁을 준다면 얼마나 주는지 조금은 궁금했으나 이제와서는 늦은 행동이었다. 여전히 살짝 알아먹기 힘든 글자로 글을 쓰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며 이번에는 김밥을 라면국물에 적셔 먹었다. 밥과 그 안의 구성물이 물로인해 사르르 풀려나오며 느껴지는 맛이 일품이었다.
"아니. 여기서는 좀 멀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는 항구이고 집에서 항구까지의 거리는 좀 멀었으니 그렇게 말 했다. 이 녀석도 이 주변에서 거주하는걸까?
"이름은 정대수."
'너는?' 이라는 말을 하지 않음은 그 다운 행동이었다. 말을 마치고 다시 라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입 안으로 옮긴 그는, 순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맛을 음미했다.
이렇게나 확실하게 말을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가 잘못한 것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몇 개월간의 현지 생활로 이제는 겉 보기에는 내츄럴한 한국인이 된 건 아닐까 했지만 아무래도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하다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승리자는 존경과 명예를 얻는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제가 승리를 얻는 것은 조금 요원한 일이 아닐까 해보입니다.
“괜찮다입니다!!! 차로 가면 금방!!!”
이 근처에서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멀리 산다고 하기엔 이 시기에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이것으로 추리는 끝입니다! 강사의 집이 가깝다면 더할나위 없겠죠! 이것으로 헬렌에게 당하는 것도 배로 줄어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전대쓰? 멋있는 이름이 멋지다네요! 다나는, 다나 빈트 라시드 빈 무하마드 알하메드이다-입니다? 아버지, 라시드 빈 무하마드 알하메드. 저희 나라에서는, 기름을 캔다-입니다. Don’t worry.”
보통은 이렇게 말하면 괜찮았습니다! 항구에 자주 있다는 건 확실히 이 근방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이건 그건가요? 드라마에 나오던 그 애프터신청?! 여기서는 역시 일단 학생이라고 거절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괜찮다입니다! 학생이라면 학교에서 본다-입니다!!! Friend!!! 아빠한테 보낼 사진도 필요하다 입니다!!!”
은우의 말대로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만약이란 걸 가정해 봐야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어차피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결정되었으므로 채린은 빠르게 필요 없는 생각을 다시 머릿속 구석으로 밀어버리기로 했다.
“완성된 거? 보내줄 수야 있는데. 왜?”
어차피 말하지 않았어도 요리를 완성한 후에 반드시 기념 삼아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걸 보내주는 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 충분히 해줄 수 있다. 다만 남이 만든 음식 사진이 왜 가지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개인 소장을 하든 어디에다 쓰든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제 것이니 이유를 물어볼 권리가 있다.
“글쎄다. 다들 하지 말라고 하긴 하던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스테이크 굽는 거 어렵거든? 원하는 굽기 맞추기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요리 실력이 어떻냐는 말에 부루퉁해져 투덜거린다. 객관적으로 채린의 요리 실력은 형편없었다. 본인이야 인정하고 있지 않았지만, 주변인들의 반응이 확실했다. 스테이크를 구울 때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대령하거나 바싹 익혀 씹기 힘들 만큼 질겨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니 수많은 요리 중 스테이크를 배우겠다고 나섰지.
타바스코란 말에 채린은 조용해졌다. 잠시 생각에 빠진 탓이다. 굳이 지옥으로 걸어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이성과 재밌을 것 같다는 호기심이 대립했다. 정확히 5초가 지났을 때 채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7전 5패로 만들어주지.”
결국 승리한 건 언제나 그렇듯 호기심이었다. 어차피 이기면 그만이잖아? 채린은 얼른 꺼내보라는 듯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말로 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오해를 풀기 위해 혼자 연습하던 걸 누가 보면 머쓱할 테니 내가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주려 했어~!라며 구구절절 해명해 내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모른 척 하려고 했다는 목적성과 어긋나는 ㅡ그것을 봤다는 것을 시인하는ㅡ 말임과 동시에 지금보다 어색함만 더해질 것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서로 가벼운 오해를 하고 있는 채로 넘기는 게 좋지 않겠는가. 나는 그녀의 물음에 ㅡ그러게.. 몸이 좀 뻐근하네.. 하면서 팔만 한 바퀴 더 돌렸다.
"뭐, 그렇지."
그러니까 너도 고3 돼서 편해지려면 나처럼 착실하게 공부하라고. 라며 조금 장난스러운 농담도 덧붙여볼까 싶었지만 그러지 않아도 해인이라는 아이는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잘하면 잘했지 못할 리는 없을 테니까. 생각만 하지 입 밖으로 농담을 잘 하는 성격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재수없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니, 이것도 자의식 과잉인가.. 모르겠다.
"보통 고3들도 너 처럼 바쁘진 않을걸.. 너는 나름대로 입학생 대표였기도 하고,"
그녀가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급생이나 교사들 사이에선 주목받는 입장일 테니까. 막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한 새내기인 만큼 앞으로 3년 동안의 기대를 그녀에게 걸고 있을 여러 시선들에서 오는 중압감도 어느 정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어야만 하는 그녀에겐 당연히 감수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새삼 그런 그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내 동생이 네 4분의 1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네."
반도 바라지 않는다. 반의반만 해도 어디인가? 그런데 뭐, 사실 이것도 내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싶다. 하하.. 그런 잡념을 하다가 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내가 전한 걱정의 말에 감사를 표해오는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실례일 건 없어, 나도 여기서 점심을 때울 뿐이니까."
예의 바르게 다시 감사 인사를 해오는 그녀에게 손사래와 같이 하나 남은 빵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확실히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것이 내심 불편했겠지만, 안면이 있는 그녀였기에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다의 별관 방문 목적에 대한 것은 이미 스스로 해답을 내렸으니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바다 녀석 집에 가는 길에 사탕이라도 하나사줘야지.
"연습에는 방해가 안되게 있을게."
그렇게 말해두고 원래 앉아있던 자리에 도로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무슨 연습을 하려는 건지는 알고 있으니까, 조용히 있어야겠지, 원래도 조용했지만..
학생이니 분명 대신 운전해주는 양복입는 집사님이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사는 세계가 엄청나게 다른 부잣집아이가 아닐까? 설마 한글 수업해달라고 찾아오는데 리무진같은 엄청난 차를 타고 오는건... 아닐터다. 2개월이나 이 곳에 머물렀다는데 난 요즘 2개월동안 그런 엄청난 차를 본 적이 없다.
"전. 대. 수."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는 모습에 하나하나 띄워서 말해주어 정정시켰다. 그런데, 이름이 뭐.. 뭐라고?
"다나, 빈트, 무하마드 뭐시기? 이, 일단 알았어."
길다. '뱀은 길다' 처럼 짧은 시문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좋아, 귀찮으니 그냥 다나라고 부르도록 하자. 물론 그녀의 이름을 불러야 할 상황이 있을때의 이야기. 자신의 나라에서 기름을 캔다는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탁! 하고 쳤다. 리무진은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보고싶을지도.
"그으..래...?"
아빠한테 나의 사진을 보낸다고? 어? 이거맞나? 갑자기 양복입은 사람이 찾아와서 권총을 들이밀고 '돵신은 우리 아가쒸에게 어울리는 싸람이 아닙뉘돠.' 하고 말하면서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까?
"그야 뭐 어떤 느낌으로 나올지 궁금하니까. 요리부에 가서 요리를 만든다고 하니까 더더욱 말이야. 아. 그래? 확실히 미디움, 레어, 웰던 이런 것이 있었지? 아. 생각해보면 난 항상 웰던으로만 먹었던 것 같아. 미디움이나 레어는 확실히 시간 조절이 힘들긴 하겠네. 화력 조절이라던가 말이야. 그런 걸 전혀 생각 못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까다로운 요리라는 것을 인지하며 은우는 그와는 별개로 그녀의 요리 실력에 대한 답에 흐응- 소리를 내며 빤히 채린을 바라봤다. 보통 저렇게 말하는 이들이 요리를 잘 못하지 않던가? 허나 그것을 굳이 입에 담을 정도로 그는 심하게 짓궂은 성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니 굳이 자신이 사실은 못하는 거 아니야? 라고 입에 담을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버지끼리 친구 사이라 자주는 아니어도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던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은우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요리부 선배가 이것저것 가르쳐주겠지만 그래도 혹시 내 도움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줘. 요리부 사람들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 나름 가사 실력은 꽤 좋다고 생각하거든. 요리라던가... 아. 물론 진짜 전문가에 비하면 못하긴 해도 그래도 약간은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아?"
그래도 자신이 사용하는 방식이나 그런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확인하며 은우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봤다. 쉬는 시간이 그렇게 무한정 긴 것은 아닌만큼 여기선 빠르게 결판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가방에 넣어둔 사탕을 넣어둔 통을 꺼냈다.
아랫층을 분리해서 새로운 통을 만들어낸 그는 윗통에서 타바스코 캔디를 3개, 그리고 일반 캔디를 3개. 그렇게 옮긴 후에 빠르게 통을 흔들면서 사탕의 위치를 마구마구 섞었다. 넣은 사람조차도 뭐가 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버린 후에 그는 채린에게 통을 내밀었다.
"룰은 간단해. 원래라면 각각 5개씩 해서 10개로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조금 애매하니 말이야. 아무튼 번갈아가면서 먹으면서 가장 많이 타바스코 사탕을 먹는 사람이 지는거야. 네가 이기면 선물 하나를 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타바스코 사탕 3개 먹기."
지금이라도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하며 받아들일거면 먼저 먹어도 좋다고 이야기하며 그는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응한다고 한다면 다이스는 1~6으로 돌리면 될 것 같아. 홀수는 일반 사탕, 짝수는 타바스코 사탕. 쉬는 시간이니 아무래도 시간이 넘쳐나진 않을 것 같아서 양을 조금 줄였다!
“응. 잘 아네. 차라리 웰던이면 쉬울걸. 미디엄이니 미디엄 레어니 하는 것들이 문제지.”
채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법 많은 소고기가 불판 위에 올라갔지만, 마음에 들게 내려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역시 요리는 전문 요리사에게 맡기자는 교훈을 얻었을 뿐이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꽤 자신 있나 봐? 무슨 요리 제일 잘하는데?”
채린은 은우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은우도 제 요리 실력에 대해선 방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새삼스럽진 않았다. 소꿉친구긴 해도 어느 드라마에 나왔던 것처럼 매일 붙어다니거나 서로의 비밀을 잘 아는 게 아니었으니. 말 그대로 그냥 어렸을 때부터 알았을 뿐인 사이. 아마 같은 반이 되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계속 그러지 않았을까?
채린은 어떤 게임일지 기대하며 준비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단출한 준비물에 간단한 게임 방식. 어디에서든 볼 수 있을 법한 형태라 배울 필요도 없을 듯싶었다. 그저 운만 있으면 될 뿐이다. 간단하게 즐기는 거라 우승 상품이 있는 게 오히려 의외일 정도였다. 무엇이 준비되어 있을까?
“선물이 뭔데? 아니다. 끝나고 봐야 재밌지. 아무튼 준비해 놔.”
채린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사탕을 하나 꺼냈다. 살펴보아도 육안으로 일반 맛일지 타바스코일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하긴 그런 꼼수가 통하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겠지.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는 것 같아 채린은 제 운을 믿으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제일 잘 만드는 요리? 음. 두부조림하고 갈비찜. 물론 재료값이 좀 들어가서 자주 만들진 못하지만 엄마하고 아빠가 둘이서 놀러가고 나 혼자 집에 있으면 가끔 차려먹고 그래."
어디까지나 가정집에서 반찬거리로 해먹을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그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막상 말하고 보니 갈비찜이 먹고 싶은 탓이었다. 오늘은 무리고, 다음에 한번 재료를 사서 만들어서 부모님과 같이 먹을까 생각을 하니 자신도 모르게 또 침을 꿀꺽 삼키고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그는 괜히 웃음소리를 내며 무마하려고 했다.
아무튼 게임이 시작되고 채린이 사탕을 하나 챙기고 입에 넣는 것을 바라보며 은우는 가만히 사탕을 노려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탕을 집어들었다. 오늘 몇 번이고 했었기에 타바스코 사탕이 얼마나 매운지 아주 잘 알고 있는만큼 바로 입에 넣진 못하고 그저 뚫어져라 사탕을 바라볼 뿐이었다. 허나 이미 집어들었으니 바꾸진 못하고 그는 애써 태연하게 사탕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혀 끝으로 살살 사탕을 녹이다 느껴지는 너무나 익숙한 그 향에 은우는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교복 상의 옷자락을 꾹 잡고 발을 동동 굴렸다. 그래도 애써 태연한 척 하려고 입술을 꽉 닫고 몸을 몇 번 움찔움찔하던 은우는 겨우겨우 입을 연 후에 시원한 공기를 있는 힘껏 흡입하고 다시 크게 내뱉었다.
"왜 계속 처음은 타바스코 사탕인거야. 다른 사탕도 상당히 많은데. 오늘따라 운이 진짜 안 따라준단 말이야. 아무튼 내가 먹었으니까 네가 1점이야. 자. 골라봐."
이어 그는 시선을 내려 통에 들어있는 사탕을 정말 뚫어져라 노려봤다. 두 번 연속으로 타바스코 사탕을 먹는 것은 피하고 싶은 탓이었다.
어쩐지 방금 했던 ‘귤’만큼이나 어려운 것 같은 이름입니다… 이럴 때야말로 노트가 나서야 합니다. 분명 이름을 발음대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아니라면 그때야말로 글자를 보라- 헬렌이 언젠가 그런 말을 했던 생각이 들어서 빠르게 노트에 이름을 써내려 갔습니다. 하는 김에 제 이름도 써서 한글자씩 짚으며 발음했습니다
흠흠, 이정도라면 제쪽이 오히려 더 선생님 같은 느낌이 들어 어깨가 조금 으쓱했습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든 중요하니 이정도라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이름 정도야 얼마든 나중에 알아가면 되는 거에요!
“목표, 있어에요! 친구 100명은 만든다입니다!! 이 공부, 그래서 필요하다! 어떤 나라든, 그 나라에선 그 나라말을 하는게 맞다입니다!!!”
덕분에 이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지만 그 정도야 뭐 부가 사항이라는 거죠!! 원래 목적과는 크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라도 목표를 이루면 아빠에게 자랑할 것이 또 하나 생기는거니까요! 마침 또래인 것 같기도 하고 이 사람부터 시작해서 학교 전원과 친구가 된다면 ok! 입니다!!!
하지만 그냥 다나만 기억 해 두는게 좋을 것 같다. 그런 긴 풀네임을 부를 일은 분명 없겠지. 그녀의 언어로 된 그녀의 이름은 어떻게 봐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뭐 글씨는 좋구나. 역시 글씨를 못쓰는게 아니라 그냥 아직 한글을 잘 모르는 것 이었다. 나중에 초등학생용 받아쓰기 공책이라도 사줘야하려나.
"친구.. 일단 10명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 이런건 조금씩 목표를 단기적으로 결정하는게 더 추진력이 좋을거야. 아마도."
자신의 친구라며 100명의 한국 청소년의 사진을 보내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었기에 말했다. 받는 그 사람도 곤란할테고 친구가 된 댓가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사진이 먼 이국으로 보내지는 입장도 곤란할테니.
"그 중 하나가 일단 나였지.."
자조하듯 중얼거리다가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두통은 없어."
아, 아닌가? 어쩌면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낚시를 할 때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결국 이런 일에 보기좋게 휘말린 나의 자업자득이었다.
"친구 만들려고 했으니 한국어로 인사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녀의 실력을 알아보기도 하고 어차피 음식을 먹는동안은 한가하기에 그녀에게 인사를 한국어로 할 수 있느냐는 뜻으로 말 했다.
두부조림은 가볍게 스쳐 지나가고, 갈비찜만이 남았다. 그게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요리였단 말인가? 채린으로선 엄두가 나지 않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음식이었다. 정 먹고 싶을 때는 그냥 사 먹었다. 하지만 역시 직접 만든 것과는 좀 다르다고 할까. 우선 고기의 양이 너무 적다. 한창 이야기하느라 은우를 보고 있던 채린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지금 눈앞에 갈비찜이 있는 줄 알겠다.
사탕은 혀에 닿자 달콤함을 선사했다. 시작부터 운이 좋다. 채린은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는 동안 은우가 사탕을 집는다. 멀쩡한 저와는 확연히 반응이 달라 무슨 사탕을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타바스코구나. 보아하니 겉에만 살짝 바른 수준은 아닌 모양이다. 스스로 먹게 될 확률이 있는데도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큼 게임에 진심인 걸까? 어느 쪽이든 덕분에 집중은 잘 되겠다.
“내 운이 더 좋은가 봐. 힘들면 언제든 포기해도 되는데?”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굳이 말해보았다. 채린은 다시 통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제 남은 사탕은 4개. 이 중 2개만이 멀쩡하다. 채린은 더 고민하지 않고 바로 앞에 있는 것을 집었다. 어차피 생각한다고 사탕이 바뀌진 않으니까. 그냥 제가 고르는 것이 무조건 멀쩡한 사탕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이번에도 제 운을 믿으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이대로 무난하게 2점으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목표는 크게 잡는게 맞다아닙니까? 누구든지 이름을 나누고 나면 모두 친구인거입니다!!!”
그 정도야 쉬운 일입니다! 원래도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나 게임에서도 모두 쉽게 쉽게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얼마든지 할 수 있을겁니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러면 다행이다입니다!! 아는 사람 다친다? 마음이 아프다에요. 약은 가지고 있으니까 언제든 말해주세요입니다?”
우선은 노트부터 정리하기로 하고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더 이상 두면 확실히 불어버릴테고 불어버린 면요리는 그다지 맛이 없으니까요!!!
“응? 인사?”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만나서 대뜸 가르쳐달라고 했을 뿐 제대로 인사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건 저의 실책입니다! 자고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인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없는데 말이죠! 게다가 이렇게 인사도 나누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고 말 것이 분명했습니다! 먹고있던 포크를 내련놓고는 옷을 가볍게 정리하고 가지고 있던 세정제를 이용해 손을 깨끗하게 만든 뒤 오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no! 다나 빈트 라시드 알하메드! 우리나라는 성이 없다에요. 아빠의 이름을 쓴다입니다.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아빠의 이름이 셰이크 라시드 빈 무하마드 빈 술탄 알하메드였으니까요! 여기서는 왕가도 없고 저는 할아버지 이름을 쓰는게 맞을겁니다!!!
“어, 대수. 그건 맛있다입니까? 김밥, 먹어본 적이 없다에요.”
분명 여기에 와서 제법 많은 걸 먹어봤다고 생각합니다. 헬렌이 하는 음식은 맛있고 또 질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그건 그거 이건 이거. 백반집에서 사라다? 라는 요리를 먹었을때는 얼마나 놀라웠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건… 검은 해조류로 쌓인 소스가 없는 비빔밥?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대수가 먹는 것을 보면 맛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쉽게 손이 가는 음식은 아니에요.
“친구비는 팁… 이해했다입니다!!! 인터넷에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어쩐지 믿을게 없다-입니다!!!”
그래도 친구가 되려면 친구비가 필요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갸웃거리면서도 이내 고민을 접어두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교차검증이 되지 않은 정보니까요! 조금 더 많은 사람들ㅇ데게 물어보고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