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3월 초이니 가끔 엄청나게 추운 날이 있기도 해. 봄에 오는 꽃을 시기해서 찬 바람이 부는 거래. 그래도 3월에 눈이 오는 건 심하지 않아? -3월 초순, 눈이 오는 날에-
1. AT필드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하지 않습니다. 항상 서로 인사하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2. 참치 상황극판의 규칙을 준용합니다. 편파, 캐조종 하지 않도록 유의해주세요. 3. 수위는 최대 17금까지로 과한 성적 묘사는 지양해주세요. 풋풋하고 설레는 고등학생다운 연애를 합시다.(연플은 3/11까지 제한됩니다.) 4. 느긋한 템포로 굴러갈 예정입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5.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어 일상을 풍성하게 해주세요.
대답엔 확신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미나가 지금 향하는 길에서 갑자기 노선을 틀 리는 없었다. 그건 여러 의미로 못된 행동일테니까, 아무리 자신이 눈치가 없는 성격이라 해도 가업을 잇길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에 찬 눈빛은 지금도 제 앞에 선했고, 애초에 그것 외에는 딱히 특출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부를 잘한다고 누가 밥먹여주는 시대도 아니거니와 기왕이면 재능을 키우는게 좋지 않은가,
...그것관 별개로 그저 요리하고, 누군가가 그것을 먹고 행복해하는 일련의 과정이 삶의 전부였던만큼 미나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제 부모가 같은 이상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라 무의식적으로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두께는 종류별로 있으니까 원하는대로 할수 있을 거야. 부원중에 고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애가 있어서 항상 구비해두거든."
마찬가지로 엄지를 치켜든 그녀를 보며 얕은 미소가 얼굴에 비추어졌을까, 책 정리도 전부 끝난 상황이고, 혹시나 싶어 물어봤지만 아직 도서실에 도와줄만한 일은 없다는 말도 돌아왔기에 미나 역시 슬슬 본업에 집중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응, 그건 그렇겠지. 예술인의 안목이라면 수긍할 수 있어."
꼭 그녀가 수공예에 일가견이 있는 예술인이라는 것만으로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의 행동이나 말 자체가, 다소 확고한 마음씨가 있다곤 해도 심성나쁜 사람이 아님은 얼추 알아갈듯 싶었기에...
"...그런게 2주밖에 안걸리는 걸까? 역시 예술인의 세계란 기이해."
본인이 할 말은 아닌것 같지만 미나는 전혀 놀라지 않은듯한 목소리와 표정을 짐짓 놀란듯한 포즈로 어떻게든 끼워맞췄다.
다람쥐에서 너구리, 크키가 커졌다! 그거 말고는 딱히 다람쥐에서 너구리가 된 이유를 찾지 못 했다. 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뭇잎이 서우의 고갯짓을 쫓아온다. 나뭇잎의 존재를 알아채기에는 꽤 걸릴 것 같다. 갸웃거린 후 따라붙는 말도 몇 마디 있었는데, 너구리는 은돌이 거라 안 돼. 은우 거야! 같은 반 친구 은우에게 이미 너구리로 이런 저런 별명을 지어뒀으니 중복은 금물이란다!
“물고기는 백조가 먹어야지! 내 정성이이이이이.”
3마리는 안 먹겠다고 말 끝이 늘어진다. 두마리씩 나눠먹자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늘어졌다. 이 칭얼거리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두마리 먹자는 말이 나오게 만들 작정이었고, 다행히도 맛 별로 한 마리씩 먹으면 될 결론이 끌어내졌다. 만족스러워진 서우는 자신의 소음공해는 없었던 일인 것처럼 다시 점심 식사를 잇는다.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세 숟가락. 백조가 서우에게 람쥐를 붙이는 이유일 지도 모르는 버릇, 볼주머니다. 볼이 톡 튀어나오게 가득 입에 물고서 오물거리는 버릇(동생과의 전투 식사에서 살아남으려다보니 생겼다.)인데, 그 상태에서도 서우할미라며 백조가 넣어주는 소세지는 또 쏙 받아먹는다. 백조에게 답해주기 위해서 꼭꼭 씹는 속도를 재촉했다.
“할미가 백조보다 더 튼튼혀. 하이고, 우리 백조 얼룩 백조 되겠네!”
아직 할머니 연기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말할 때만 등이 굽는 서우는, 연기에 충실하며 느릿한 속도로 백조의 입가에 묻은 얼룩을 닦아주었다. 손가락으로 쓱 훔쳐내는 행동저차도 할머니처럼 보이도록 리얼리티를 끌어올린다!
“옥상? 완―전 좋아!”
붕어빵 사러 나갔다 돌아오는 짧은 땡땡이가 아쉽기는 해서, 학교 옥상이기은 해도 밖으로 나가자는데 거절할 리가 없다.
빵을 건네 주던 중 ㅡ어라. 강하늘? 이라고 내 이름을 부르고서는 곧바로 사과하는 시호의 모습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하늘 같은 선배를 감히, 이름 석자 또박또박 존칭도 붙히지 않고 부르다니. 와 같은 수직적인 꼰대 마인드에 기반한 기울어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쪽으로 생각 하자면 그래봤자 한 살 터울인거 서로 편하게 반말로 불러도 되지 않냐는 생각이다.
내 고개가 기울어진 까닭은 그의 어조에서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느낌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알지는 못해도 내 이름을 들어보거나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달까..
"되도록이면 비밀은 나 혼자만 알고 싶었는데."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다가는 곧 빵을 받아 들며 농담을 던져오는 시호에게는 마찬가지로 농으로 응수했다. 본인은 농이라지만 피차 프라이빗한 공간을 잃기 싫어하는 시호에게는 어딘가 쌀쌀 맞은 말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이런 형식의 로비 행위를 의리로 치부하는 것은 딴죽걸기 귀찮으니 넘어가자.
나는 애초에 말 수가 적은 편인 데다 가볍게 수다를 떨 만한 화젯거리도 없었기에 빵을 건네주는 것을 끝으로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멍이나 때릴 요량이었다. 다른 이들이 잡담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말재간이 좋지 않은 내게로서는 꽤나 공을 들여서 쥐어 짜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그런 의미에서 한 편으로는 저런 농담들이 청산유수로 쏟아져나오는 시호의 성격이 부럽다고 생각하던 중 나를 보고 해랑초를 나왔냐고 물어오는 그의 말에 게슴츠레하던 눈이 뜨였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는 헝클어진 머리칼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에 홀로 수납정리 했던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튀어나와 중구난방하게 흩어진다. 하지만 그 형태는 더욱이 또렷했다. 해랑초, 홍시호, 19살. 어..?
"어...?, 홍시호.. 너야..?"
홍시호가 홍시호지 누구겠냐만은, 내가 말하는 시호는 해랑초의 한 때 나의 친구였던 홍시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는.. 이, 아이돌 녀석이.. 그 시호라고..? 문맥의 흐름상,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행간에서 모든 정황을 읽어낼 수는 있었지만, 갑작스런 재회에 굳어버린 두뇌가 그 정보들을 바로 처리해내기엔 혼란스러웠던 탓인지. 나는 그 자리에 경직된 채로 빠끔히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뇌수가 overflow 할 지경이다.
" 에이, 이 좁은 학교에 나만 아는 비밀이 어디 있어요. 여기 가끔 선생님들도 순찰 올걸요? 그래서 조심해야해요. "
어쩌다 한 번 선생님께 걸릴 뻔한 건 비밀. 시호가 그리 대꾸하며 툭툭 발을 굴러댔다. 아마 상대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겠지. 시호가 힐긋 옥상문을 살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또 다른 등장인물이 나오시진 않겠지? 조용한 옥상은 이 두 사내만으로 만원이 되었으니 다른 손님들은 그 발걸음을 돌려주길 바란다. 시호가 작게 기지개를 키며 펜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갑게 살랑대는 봄바람. 이상하게도 이 말랑대는 봄바람은 유독 학교에서 짙은 꽃내음을 내곤 했다.
" 맞죠! 아니 아니지, 맞지? 강하늘?! "
빙고! 조심스레 던진 다트가 명중했다. 홍시호, 기억력 아직 살아있는데? 조심조심 상대의 눈치를 살피던 시호의 기세가 눈을 밟은 강아지처럼 펄쩍인다. 신이 난 눈동자에는 묘한 반가움과 신기함, 또는 그리움. 갑작스러운 재회에 단단히 굳어버린 하늘을 두고, 시호는 그 당혹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입을 나불대기 시작한다. 아니 어쩐지, 묘하게 아는 사람 같더라고!
" 이열, 해랑초 정글짐 지배자 강하늘~! "
혹자의 눈에는, 시호의 담요 아래로 파닥대는 부슬부슬 꼬리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신이 나서는 낯부끄런 별명을 꺼내들고—물론 시호가 일방적으로 붙인 별명일테다— 친한 척 치대는 모습이 꼭 강아지 같지 않던가. 아차, 너무 신났나. 시호의 눈에는 그제야 잔뜩 경직된 하늘의 모습이 보였다. 하긴, 당황스럽겠구나! 시호가 제 머리칼을 긁적이며 헤헤 웃어보였다. 초딩 때와는 완전 딴판인 지금이니까...
" 아, 내가 해외에 좀 오래 살다 왔었잖아. 그래서 학교 1년 늦게 들어가서 그래. 우리가 동네 친구라 나이만 알았지 이건 몰랐겠다. "
시호가 뒤늦게 제 명찰을 흔들댔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자신을 못알아봤으리라. 한 살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은 K-유교 사회에서,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데. 게다가 초등학생 때의 자신은 좀… 호구 같았달까. 뭐 이제 알았으니 됐지! 진짜 반갑다!
" 야 너 완전 잘생겨졌네! 완전 몰라봤어! 이름 아니면 모르고 지나갔겠다. "
시호는 초등학생 시절의 하늘과 자신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하늘의 앞에서, 정글짐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찌질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 정말... 몰라봤네... "
…음, 하늘은 제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시호가 하하... 힘 없이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나는 지금 껏 옥상에 있다가 선생님에게 걸릴 뻔 한 경험이 없었기에 시호의 주의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메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땡땡이 빈도의 차이 때문일까. 그렇다면 시호와 함께 땡땡이를 치다가는 선생님께 걸릴 위험이 증가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보다. 기지개를 켜며 펜스 쪽으로 걸어가서는 내 이름을 연호하며 또 그 앞에 해랑초 정글짐의 지배자라는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붙여오는 그의 말에 나는 오른 손으로 눈가를 덮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버렸다.
어렸을 적에 알고 지냈던 친구를 이 학교에서, 그것도 땡땡이를 치러 온 옥상에서 만난 줄이야. 설마, 그 시절 방영했던 친구가 있어 행복한 목요일 해X투게더! 가 재방영 하여 특집 몰래카메라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마저 떠오를 정도였다. 여기에서 내가 '반갑다 친구야'를 외치면 상대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해버리고 저 굳게 닫힌 철문 뒤에서 팡파레와 함께 진행 MC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무래도 그건 아닐거다. 단순히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짜여진 이 만남에. 나는 그가 내 이름에 덧붙혔던 수식어에 얼굴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것을 눈가에 얹어 놓은 손을 녹이는 온기를 통해 느끼면서도, 푸스스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평소 감정에 큰 변화가 없어 다이나믹한 표정을 지을 일이 없었던 나라도. 그와 이런 식으로 재회를 하자 비죽거리던 웃음이 그 때와 같은 순수한 웃음으로 변해서 터져나왔다.
"푸하하~! 장난이지..? 너 진짜 그 홍시호야?"
의문문으로 물었지만, 그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홍시호였다. 나를 그런 별명으로 부를 사람은 그 밖에 없을테니까. 정글짐에서 떨어져서 눈물을 흘리던 그 홍시호. 내 유년시절의 추억을 함께한, 그 친구였다. 그때는 참 아찔했었지, 시호는 그때 정글짐에서 떨어져 눈물 지은 것을 부끄러워 했고, 나는 그런 그를 농담처럼 놀리면서도 걱정하며 챙겼었다. 그것 때문에 쓸데없이 투닥거린 기억도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그 이후로도 시호는 그 기억을 자신의 치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럼, 내가 그 때는 못생겼었다는 말이야?, 그러는 너야 말로 완전 고교 데뷔라는 느낌이구만."
고교 데뷔를 넘어서 아이돌 데뷔다. 농조로 덧붙히며 연신 키득 거렸다.
"오랜만이다. 울보."
나는 예상치 못했던 재회의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횡경막이 울릴 정도로 웃어댔던 탓인지. 찔끔 삐져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으엉 자기전에 아이디어 번뜩였다! 다들 개성이 강하고 모두를 포함하는 교집합이 없으니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성장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서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뿅하고 나타는 것이 아닌 생겨나는 것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일단 태식이가 서우를 보고 이렇게 평판 상관 없이 자신을 봐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니 나도 이제 더 이상 주변 평판 신경 쓰지 말고 나 자신을 봐줄 친구들을 찾아 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끼리 끼리 논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에서 친구의 친구는 그와 비슷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거나 놀만한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태식이는 자라는 새싹을 위하여 투자 해볼 생각 없냐고 이게 다 지역발전이라고 딜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비슷한 사례로 얼굴책에 열x에 기름 붙기 등을 들먹이면서 말이죠. 말은 공익을 위한 것처럼 했지만 친구를 만들고 싶었던 태식이의 사심도 들어갔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여 장소 빌립니다. 일단 서우와 연우에게 말하여 장소를 소개 시켜주고 그 두 사람에게 취지를 설명 해준 뒤 다른 친구들에게 혹시 이장소를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 알려준 친구의 친구에게도 이장소를 소개 해주고 그런 식으로 쭉이어서 다들 직간접적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신입 분들이 오면 마치 튜토리얼 처럼 아지트를 소개 시켜주거나 할 수도 있고 스레가 장수 해서 3학년들이 졸업 할 경우 대학생된 선배들이 와서 놀다가 가거나 하는이벤트를 만들거나 할수 있을 거라 생각 합니다. 막 암흑전골파티 같이 소소한 이벤트를 레스주가 열 수 있게끔 할 장소가 될 수도 있고요..... 근데 생각한 것 처럼 자주 안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막상 적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네요..
노래링크는 https://www.youtube.com/watch?v={code} 같이 해야하는 거로 알아~~~! https://www.youtube.com/watch?v=wUHBqw7N_Z4 이렇게 하면 들어가질 거 같은데~~~ MBC래서 뭐 연우 MBC 공채 들어갓나 이러고 잇엇던 잠덜깬 몽총이.......
흐음... 좋아. 스스로를 걸었으니까... 단순한 오해였다고 생각할게. 미안해...? 그치만 만약 거짓말 한거라면... 이거, 통째로 먹여버릴 거니까...... <<초장에 범벅이 되어 꿈틀거리는 산낙지
<<<장난스럽게 시작한 콩트가 재밌어서 위험하다>>>
유쾌한 친구들 좋으니까~~~~~ 물론 사람 하나 집어넣을만한 캐비닛을 장난 하나를 위해서 옮기고 그러는건 정상인의 범주가 아니지만..... 타케 이지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절반은 억울하지만 절반은 본인이 뻘짓 자주하는걸 알고 있기에 겸허히 받아들이는 대인배 타케 군.... 애초에 본인도 즐기는게 아니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들어갈 리가 없지. <<????
붕어빵 협상(?)을 마무리지은 아진은 슬슬 자신이 어떤 장난을 쳤는지 서우에게 공개하기로 마음먹고는, 창가의 탁상거울을 집어다가 서우에게 내어주었다. 그러면 서우의 머리에 머리삔에 꼭 집혀 매달려 있는 나뭇잎이 보일 것이다. 아까 난데없이 주머니에서 머리삔을 꺼내서 서우에게 끼운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아진은 서우의 머리로 손을 뻗어 나뭇잎과 머리삔을 쏙 빼내어주었다.
"이제 다시 서우램쥐구만~"
하고 느슨한 웃음을 띄며 아진은 그것을 식판 옆에 내려놓고 다시 수저를 집어들고 식사를 마저 시작했다. 자신의 뺨에 묻은 소스를 보고 손을 쭉 뻗어오는 서우의 손길에 아진은 거부하지 않고 뺨을 내밀면서도 테이블 한켠에 있던 곽티슈를 서우의 시야범위 안으로 슥 떠밀어주었다. 정말로 할머니라도 된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서우에게, 아진은 출처 불명의 어디 사투리인지도 모를 사투리를 쓰며 마주 농담조로 대답했다.
"할멈이라도 건강하시구랴. 나는 영 글렀는개벼."
하고 킥킥킥 웃는다. 서로 웃고 떠들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흘러가는 식사시간이 즐거웠다. 삶의 끝자락이 이런 즐거운 순간들로 채워진다고 하면 마지막이라는 것도 꽤나 즐길 만한 것이 아닌가, 하고 아진은 문득 생각했다. 물론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꺼내기엔 너무 을씨년스러운 농담이라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진은 1인분이 조금 덜 되는 양을 먹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이고, 난 진짜 여기까진가 보다. 배부르다야."
하고, 가볍게 입을 가리고 조그만 트림소리를 낸다. 식판에 뭐가 남았을지 남지 않았을지는 서우의 식성에 달렸다.
>>136 정말 큰 맘을 먹고 제주도로 간 은우주. 허나 그곳에서 기다리는 건 15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뭉쳐져있던 악의였다. 패키지 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이 하나하나 죽어나가게 되고.. 도저히 풀릴 수 없는 미스테리 속에서 모두의 목숨을 위협하는 정체불명의 괴인 '자캐'. 여기에 있는 이들은 모두 자캐커뮤 경험이 있는 사람들?! 설마 우리가 굴린 자캐들이 복수하기 위해서?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반드시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청개구리가 등장했다. 너구리라고 하지는 말라고 했지만, 나뭇잎과 머리핀을 빼버리니 표정을 찡그리고서 쳐다본다. 다람쥐도 나무에서 사는데 나뭇잎 붙어있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백조가 다시 머리핀과 나뭇잎을 꽂아줄 때까지 찡그린 표정은 절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서우의 고집은 쉽게 말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빼낸 것을 다시 가져와 앞에 가져다준 거울을 보고 다시 할 수도 있을텐데 심술부리는 표정으로 가만있는 모습을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백조라면 옆에서 지켜봐왔을테니 더 잘 알고 있을 테고.
“백조도 할미가 되면 으카누….”
아무생각도 없이 곽티슈는 고려치도 않고 손 끝으로 소스를 훔쳐냈다. 당연히 서우의 손에 소스가 묻었고, 백조가 곽티슈를 떠밀어주어 다시 휴지로 손을 닦았다. 능청스러운 할머니 연기의 끝은 백조와 함께 웃으며 나는 즐거운 소리다.
“나도 다 먹었어!”
편식쟁이의 등장이다. 서우는 여간 까탈스러운 입맛을 가져서 똑같은 재료여도 조리법에 따라 먹고 안 먹는 것이 있었고, 안 먹는 것은 절대로 안 먹어서 잘게 다져넣은 것조차 골라내버렸다. 입맛의 기호는 어린 아이들과 비슷했다. 푸르른 색깔의 찬은 백조가 먹은 몫을 제외하면 거의 다 남았다.
“쪼아! 가자가자가자~!”
식판 하나에 숟가락 젓가락 두쌍이 달그락 놓인다. 붕어빵은 우리 백조가 챙길 것이라고 믿고서, 서우는 식판을 들었고 쫑쫑 잠궜던 방송실 문 앞으로 가서 다시 문을 조심스레 연다. 문을 잠궜던 것과 같은 이유, 선생님이랑 방송부 선배에게 들켜선 안 된다!
"너무 성급하지 않아도 돼. 답안지는 네가 죽을 때 거둬가거든.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아직 시간이 많다는 거야."
" '일단 너의 마음이 화성이라던가 올바른 음악이라던가 하는 명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넌 네가 원하는 무엇이건 할 수 있어. 나도 그랬고 그래서 그 누구도 내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지. 내가 뭘 해야 한다는 모범답안이라거나 선례 같은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
특유의 심통난 표정을 알아본 아진은 키득거리며, 잔뜩 토라진 표정을 한 서우의 머리를 흡사 강아지나 고양이 어르는 것처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곤 다시 그 나뭇잎과 머리삔을 집어들어 쏙 끼워주었다. 이번엔 정수리 한가운데가 아니라, 머리 한켠에 앞머리 일부를 가르마를 내어주면서 끼워주었다. 서우의 머리에 다시 나뭇잎이 붙었다. 누가 보면 나뭇잎 모양 머리삔인 줄 알겠다.
"내가 더 할미였어야. 백조할미."
아진은 새하얗게 바래어버린 머리카락을 한줌 집어들고 손끝에서 늘어뜨리며 웃음지었다. 탈색 이후 관리가 잘 안된 모양인지 찰랑거린다기보단 부스스하게 떨어지는 그것들은 일부러 탈색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백발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갈색이던 머리카락이 이렇게 하얘진 것을 보고 있자면 어째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된 것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식사를 끝내고, 백조는 의자를 스륵 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판 위에 확실히 버려야 할 게 남아있긴 했지만, 눈길도 안 주던 섬유질에 입맛을 들이기 시작한 아진 덕에 푸른 찬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남진 않았다. 어차피 식판을 갖다주려면 급식실에 한번 들러야 되긴 한다. 식판을 덥석 챙겨든 서우를 따라, 아진은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놓은 종이봉투를 품에 폭 품고는 줄달음치며 따라나섰다.
다행히도 방송부 문 앞에 누군가 잔뜩 벼른 채로 두 말괄량이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없었다. 방송부 고문 선생님은 현장을 덮치는 스타일이 아니라 눈여겨봐뒀다가 나중에 잔소리를 하는 타입이라, 당장보다는 후환을 걱정해야 하는 게 아진의 처지였지만- 아진은 이런저런 부분이 많이 변했지만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있었는데, 나중 일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급식실로 내려가 얼마 남지 않은 잔반을 버리고 식판을 가져다놓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서우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서, 아진은 역시 자신의 다리가 퍽 예전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옥상 문을 열고 나설 때의 상쾌한 바람은 각별했다. 달캉, 하고 앞서 올라가던 서우가 옥상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고, 아진은 서우를 따라 부지런히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침묵. 동아리에 예산이 부족하다는 것은 대학 재단의 재력의 부족하는 것과 규모만 다르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대략적으로 아는 해인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외부자에 흥미가 있어서 찾아온 것도 아닌 친구 대신으로 온 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설픈 위로를 하는 것도 어쩌면 참견일수 있어서. 그저 "이번에 제 친구들도 그렇고 관심있는 신입생들이 올테니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요? 그래도 성의를 보이지 못한 건 맞으니까 낫자마자 가보라고 꼭 얘기할게요."
물러서는 듯 하지만 결론적으로 직접 오라는 말을 주장하는 대수를 보며 해인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자부심이 있다는 것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아있었고 조금이라도 이 무거운 파도에 가라앉는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웃으면서 밝게 목소리의 톤을 올리고 말했다. "걔가 말썽이 좀 심한데 대신 체력이랑 회복력은 좋으니까 금방 적응할 수 있을거에요." 음 거짓말은 아니고 사실에 가까우니까. 해인은 저를 이 곳에 보낸 끝까지 낚시부 노래를 부르던 웬수 한명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중학생때 계주로 뛰다가 넘어져도 씨익 웃으며 2등을 했으니 자신은 그저 있는 사실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덤으로 앞의 부장님이 조금 긍정적으로 부의 회생을 검토해 본다면 더 좋고. 해인은 무력하게 휩쓸려가는 해변의 모래가 아닌 겨울철의 여리지만 강인한 새싹을 좋아했다.
"음 크게 다친건 아니라서요..." 왜인지 신입을 받지 않고 싶어하는 듯한 눈치에 의아해하며 해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새로 누군가가 들어오면 홍보도 되고 이 고요하고 좋은 분위기의 부실도 알려지고 괜찮을텐데. 새내기의 한계인걸까 해인은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지금 다이빙해서 푹 쉬면 아무도 없는 새벽 4시에 비적비적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저녁에 신나게 떠든 흔적들을 훑어보며 외로워할 수밖에 없다구(절대 경험담 아님). 무엇보다 수면패턴이란 건 당겨져도 밀려져도 곤란하단 말씀. 해답은 하나. 지금 나가서 뭔가 시원하게 마실 것을 사온다. 잠깐 다녀올게에~
너무 관련된 정보를 흘리는건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특히 이 부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그랬다. 게다가 이 후배가 어떤 부에 이미 들어가있을 수도 있는거였으니. 어차피 학교의 예산은 정해져있고 그 한정된 예산을 여러 부에서 파이마냥 잘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것 치고는 1인 부의 예산 치고는 괜찮은 범위였다.
"뭐, 그 사람이 여기에 오는걸 원한다면야."
그녀의 말에 대답하며 말썽이 심하고 체력과 회복력이 좋다는 그 친구에 대한 말에 눈을 꿈뻑였다.
"본인 이야기가 아니고?"
어쩌면 친구의 이야기라고 해 놓고 자신이 부실을 구경온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그저 지나가는 듯 말하다가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을 보고 옆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잠시 얼굴을 찡그리고는,
"..만약 이 학교의 부에 묘하게 사람이 적고 부원 모집을 대충하는 부가 있다면 뭔가 특수한 사정이 있을거라고 생각해."
학교 내에서 운영하는 학생부종합전형에 유리할 대형 동아리에 들어갈 생각이었던 해인은 예상치 못한 변화구에 확, 머리속에서 작은 폭죽이 팍 작은 별가루를 흩날리며 터진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1학년이 공식적인 동아리를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내가 왜 자율동아리를 만들어볼 생각을 여태 하지 않았을까? 뒤에 이어진 힘없는 아니다가 아닌 앞말에 꽂혀 마음속으로 '부를 만든다면'을 되내었다.
"제 이야기는 절대 아니에요." 본인이야기라는 말에 얼떨결에 강한 부정을 하게 된 해인은 증거도 댈 수 있다며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당황스럽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세상에 내 얘기라니. 전교생 앞에서 계주를 하고 재주를 부리다 꽈당 넘어진 그 순간을 떠올리며 간접적이지만 다시 한번 머리가 하얗게 페이즈 아웃되는 기분을 경험한 해인은 어쩌다가 자신은 그렇게 활동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네? 그거야 신생 부서면 당연히 사람이 적을수도 있고 게다가 레저스포츠부가 인기 동아리도 아닐테니 사람이 적은건 어쩔수 없나? 중요한건 즐기고 경험을 누리며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지. 부실 부서라 하더라도 이미 일반적인 학업동아리와는 동떨어진 곳. 예산이 조금 딸리더라도 오히려 소수의 진정으로 동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의기투합하는 곳이 크지만 대충 돌아가는 곳보다 낫다고 생각한 소녀는 "그 애가 정말로 하고자 한다면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 않을까요?" 라 말을 했다.
"그렇다면 선배님은 왜 이 부실에 계세요?" 답답한 마음에 해인은 결국 최대한 말을 부드럽게 하려 애쓰며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오늘도 서해인은 직진을 한다.
자신답지 않은 선택을 했다며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이제와서 부가 해제된다고 해 봐야 크게 데일 일도 없긴 했지만. 그런데 눈 앞의 후배에게서 살짝 의외성이 있는 반응이 있었기에 조금 놀랐다. 혹시 뭔가 부를 만들고 싶은걸까? 어차피 그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조금 궁금했다.
"그래? 자신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눈 앞의 본인이 절대 아니라고 했으니 그건 사실이 아님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흘린 물은 더 이상 담을 수 없었기에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게 좋을 것 같았다. 요즈음은 흘린 물을 담을 방법은 충분하겠지만.. 그런 수고로움을 겪는건 또 싫었다.
"어쩌면 있을 신입 부원을 기다리기 위해?"
말하고는 다소 시니컬한 웃음을 보였다.
"글쎄..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어떤 목적이 있어서 부실에 들렸다고 생각하는게 더 현실적인 생각이지 않을까?"
그는 그녀의 직진을 살짝 비껴갔다. 하지만 그녀의 직진을 피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의 그녀에 대한 성의일까. 아니면 그저 귀찮은 방해물에게서 벗어나고 싶은걸까.
정정한다. 나뭇잎을 다시 꽂아줄 때까지 심술부리는 표정을 지을 예정이었던 것으로. 백조가 쓰다듬어주면 있는 힘껏 내리고 있던 입꼬리가 움찔거린다. 이래서야는 심술부리는 표정이 아니라 ‘웃음을 참으며’ 심술부리는 ‘척 하는’ 표정이 되고만다. 백조가 다시 머리핀으로 나뭇잎을 꽂아주어서 다행이다. 나뭇잎이 앞머리에 가르마를 쏙 타고 붙은 걸 거울에 한 번 비춰보고는 마음에 들어한다.
“백조할미야, 효도여행 가자!”
짓궂은 웃음소리가 높게 울렸다. 효도여행 코스는 급식실을 찍고서 옥상으로 간다. 본관을 나서 별관 뒤에 있는 급식실로 갈 때만 해도 눈이 내리진 않았는데, 백조보다 먼저 도도도 서우램쥐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날쌘 걸음으로 계단을 오른 서우는 옥상에서 눈을 보았다. 그 잠깐 새 봄눈이 내린다. 쌓이지는 못할 금방 녹는 눈이 폴폴 날렸다. 세상에 하얀 점박이 무늬가 총총 찍히는 것을 본 서우는 문을 열어 옥상으로 나가려다가 방향을 180도 돌렸다. 올라왔던 계단을 향해 보고서서, 뒤쫓아 올라오고 있을 백조를 향해 소리친다.
“백백조―! 눈 와―――!!!”
방송실에 처음 덜컥 들어섰을 때만큼이나 우렁차다. 빨리 뛰어올라오는 재촉으로서 눈이 온다는 알림을 백조에게 남기고는 홀랑 문을 넘어 옥상으로 넘어간다. 방금 내리기 시작한데다 여린 봄눈이 쌓였을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약이라는 기대를 품고 철책에 대롱 매달려 학교를 내려다본다.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인 대수의 반응에 해인은 시도때도 없이 뭉쳐져 마음을 쿵 내려않게 하는 작은 긴장의 덩어리를 풀어내며 다시 한번, 침착하게 부정을 했다. 누군가가 듣기에 매정하고 딱딱할 수 있는, 지나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는 발언이었으나 해인은 미리 자신이 이러한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게 옳다 여겼다. 소녀는 저의 정도를 고집하는 면에 부끄러움이나 껄끄러움이라고는 한 줌도 없었다. 특히나 서로의 시선에 따라 충분히 애매모호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신입부원이요? 아, 하지만..."
예상치 못한 시니컬한 반응에 속으로 주춤한 소녀는 자신이 조금이나마 주저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바를 제빨리 이었지만 날카로운 뼈가 숨은 웃음뒤로 이어진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가요. 신학기니 준비할 것이 많겠네요. 제가 방해했다면 죄송해요."
방해물일 수 있다. 불쾌할 수 있다. 생판 처음 보는 후배가 건방지게 참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여태껏 서해인이라는 한 사람이 쌓아온 '해보고 나서 후회함이 안한 것에 대한 회한보다는 낫다' 라는 자기자신과 정한 오랜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기에 소녀는 다시 한번 물러서는 듯 여지를 주다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솔직히 저 여기 부실이 마음에 들어요. 조용하고 분위기 좋고. 참견이고 오지랖이지만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제가 여기까지 와놓고서 그 애에게 약속한 밥도 못 얻어먹게 되어서요."
다음에 의심하지 않게 친구를 직접 끌고 올게요. 제법 뻔뻔했네 서해인. 소녀는 당당하지만 예의바르게 보일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는 초조하게 밤에 찰 이불을 그렸다.
>>230 사실 가장 무난한 것은 첫만남 일상이 아닐까 싶네. 아무래도 딱히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라는 느낌이 되긴 힘들 것 같으니까! 물론 어떻게든 짜보자면 짤 수도 있겠지만 해인이와 비슷한 느낌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니..(절레절레) 아무튼 선도부에 어느 정도 요주인물로 등록되어있는 은우라면 열이가 혹시 어떤 이인지 파악하려는 그런 게 있을까? 사실 그게 아니어도 은우 입장에선 새로 선도부에 들어오는 이들이 누구인지 정도는 파악하려고 할 것 같으니 곤란하다 싶으면 은우가 먼저 열이를 만나러 가볼게!
>>235 그렇다면 전자로 가보는건 어떨까? 그게 조금 더 자연스러울 것 같거든! 잘 모를 것 같다면 더더욱 말이야! 무엇보다 후자는 뭔가 그러면 선배 쪽에서 막 들어온 1학년에게 일을 시킬 것 같진 않기도 해서! 아무튼 그렇게 되면 내가 선레를 쓰는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타인이 나 자신으로 인해 바뀔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특히나 의견이 충분히 갈릴 수 있는 부분에서는 유감스럽지만 물러설 줄도 알아야 했다. 아주 어린 시절, 초등학생 때 자그마한 의견 차이로도 갈라지곤 했던 그 시절의 우정을 생각하며 해인은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고 가볍게 수용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저로서는 다행이죠.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떻게 보면 사정을 잘 모르는 후배의 참견이니까요."
처음으로 나온 애매모호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반응에 소녀는 온화하게 말을 이어가며 자신의 행동이 껄끄러울 수 있음을 긍정했다. 더 분위기 파악을 못했던 중학교 1학년 때는 조그만 갈등들이 벌어지곤 하였으니, 묘하게 회색지대에 걸쳤지만 강하게 밀어내지 않는 말에 완전히 어색하게 끼어있던 덩어리가 씻겨나가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치워낸 상쾌함에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라 인사를 했다.
"음...부원도 아닌 제가 저의 사적인 일로 부실에 들어오는 건 지금 보다 더한 방해겠죠?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도 가질수 있는거니까요."
길게 이어지는 문단에 다시 한번 숨을 쉬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꼭 물어보고 미리 말씀드릴게요. 그럼 선배님은 평소 어디에 계시나요?"
새로운 부원이 생기는 것을 반기지 않는 상대의 속내를 모르는 듯 해인은 부에 관심이 없음에도 여태껏 대수의 시간을 빼앗은 미안함에 오히려 꼭 친구를 데려오겠다며 약속을 했다.
"그러게요. 분식점에서 잔뜩 뜯어먹을 생각이에요. 나중에 말썽피우면 선배님도 편하게 요구하세요. 걔가 음식으로 자기가 한 행동을 때우는게 습관이라서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지도 모를 미래의 일을 가정하며 마지막으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다소 실없는 농담을 한 해인은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를 했다.
방과 후 시간. 하나둘씩 하교를 하는 시간이건만 유난히 학교 뒷뜰에선 망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을 가만히 바라봤다면 은우가 뭔가 열심히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남들 몰래 창고 뒷편에 숨겨놓았던 그 무언가는 마치 자동자판기와 비슷한 뭔가가 놓여있었다. 허나 그것은 음료수를 판매하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자판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망치질을 하며 확실하게 입구를 고정시킨 그는 드디어 입학식 날부터 열심히 시간을 내서 만든 그 결과물을 보며 크게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은밀하게 이동해서 슬며시 매점 근처 자동자판기 옆에 두었다. 앞 부분에는 [신입생 무료 서비스! 컴퓨터가 인식해서 얼굴을 그려드립니다!] 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인 그 자판기 모형의 안엔 A4용지와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볼펜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이내 그는 가만히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 빠르게 쏙 입구를 연 후에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문을 걸어잠궜다. 안에선 밖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렌즈가 달려있었다. 딱 앞에 선 사람 얼굴과 그 주변을 조금 바라볼 수 있는 구도가 완성되었고 은우는 그 안에 놓아둔 의자에 앉은 후에 가만히 사람이 오는 것을 살폈다. 물론 그것을 운이 좋다면 누군가는 봤을지도 모른다. 혹은 못 봤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는 누군가가 오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며 A4 용지와 볼펜을 손에 잡았다. 누군가 한 명이 이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으나 이쪽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근처까지 왔다면 마치 누군가가 온 것을 인식한것마냥 그는 국어책 읽기 톤 기계음을 냈을 것이다.
요리를 업으로 하는 직업에도 급식소, 호텔, 자영업 등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채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오로지 자영업뿐이었다. 길거리에 널린 식당만큼 제 눈에 가장 잘 보이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다른 요리사들은 주방에만 있느라 보기 쉽지 않으니까.
“좋네요. 가장 두꺼운 거 골라야지~”
채린은 희망사항을 흥얼거리며 제가 만들게 될 스테이크를 상상해보았다. 굽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게 떠올랐다. 아마 실제론 그것보다 작은 걸 요리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꿈은 크게 가지는 법이다.
“맛만 보고 만들 수 있는 요리인의 세계처럼?”
제가 느꼈던 신기함을 상대도 느낀 모양이다. 그게 재밌어서 채린은 웃으며 상대가 한 말을 따라했다.
“가기 전에 연락해야겠죠. 준비나 뭐 그런 거 필요하잖아요.”
적은 경험으로도 요리하려면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안다. 불쑥 찾아가서 당황시키는 것도 때로는 재밌는 일이지만, 이 경우엔 아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기다림은 싫다. 채린은 후드집업의 주머니에서 보라색 케이스가 끼워진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을 키고 수화기 그림을 터치하자 숫자를 입력할 수 있는 자판이 뜬다. 채린은 그 상태로 상대에게 폰을 내밀었다.
사고치지 마. 선도부잖아. 허리 위에 손을 얹고 매일 잔소리하는 선배에게 꾸중을 들은 후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일찍 종례를 한 탓에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열은 익숙하게 실내화를 갈아 신었다. 열도 이제 엄연한 고등학생이다. 풋내기 중학생이 아니라.. 무려 17살. 잔소리는 햄토리나 듣는 것이다. 무언가 한 건이라도 해서 선배의 마음을 사로잡는 편이 좋을까. 건물을 나서려다 1층 현관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잠깐 멍하니 우뚝 서있었다. 흐물텅한 구름이 굴러간다. 그리고 맑은 깡깡 소리도. 깡깡?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았으나 소리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열은 의문스러워 머리를 긁적이는데 다른 아이들은 자신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관심은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그냥 쭉 직진하여 집으로 돌아가 햄토리랑 놀아도 되지만... 뭔가 재밌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토끼장 설치라던가. 아니면, 음. 기물파손?
열은 귀를 쫑긋 세우고 깡, 깡. 소리에 의존하여 발걸음을 재빨리 옮겼다. 조그맣던 소리가 점점 가까이 크게 들리는 것을 보니 이 근천데. 열이 빨리 움직일 수록 턱끝을 살랑거리는 머리칼이 간지럽다. 뒷뜰. 여기 근천데.. 그 순간 커다란 자동 자판기 옆, 비교적 작은 자판기 하나가 덜컹 움직이더니 안에서 찰캉거리는 소리가 난다. 방금 저쪽으로 뭔가.. 사람이.. 들어간 거 같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신인가?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학생들은 이미 하교를 했고. 주위엔 아무도 없고. 호기심은 있으니 우선 발걸음을 옮겨 조심스레 그 자판기 앞으로 가니 재미있는 게 붙어있다. [얼굴을 그려 드립니다.] 아하. 게다가 노오란 명찰 덕에 쉽게 신입생이라고 판명까지 났다. 아까 그 깡깡 소리는 여기에서 난 걸까? 퍼즐이 풀린 열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린다.
"못생기게 그리면 죽을 줄 알아."
제 얼굴에 자부심이 있는 듯한 소녀는, 사근한 말투로 상냥히 말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방긋 지어보인다. 딱히 앉을 의자는 보이지 않으니 여기 대충 서있으면 되려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말 버릇 좀 고치라는 선배의 고함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열은 태연하게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열이가 ..장난기가 많아서or기계이기 때문에 그렇지 원래 이렇게 인성터진 발언을 막 뱉진 않아요!!!! ㅠ.ㅠ흑흑 지켜봐주세요
명찰로 보아 지금 자판기 앞에 선 여학생이 1학년인 것은 분명해보였다. 즉, 그가 이번에 준비한 신입생들에게 주는 나름의 '입학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이였다. 물론 얼마나 이 서비스를 이용할진 모르겠으며, 오늘 완전히 집에 갈 때 이것을 살짝 숨긴다고 해도 얼마나 선도부 멤버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진 알 수 없었으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하며 예쁘게 그리라고 요구하는 여학생을 바라보며 그는 웃음소리를 꾹 참고 다시 국어책 읽기 버전 기계음을 입으로 냈다.
"지금부터 얼굴 인식을 시작합니다. 컴퓨터가 근육의 움직임을 스캔중입니다. 명확한 근육 움직임 측정을 위해 지금부터 이 학교에 입학한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 이 데이터는 학교나 교사측에 제공되지 않습니다. 지시에 이행하지 않을시, 신입생의 안면 근육 측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확하지 않은 그림이 나올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불만사항으로 강아지와 너구리 그림이 나왔다고 불평한 사례가 4건 존재합니다."
이어 그는 핸드폰을 꺼낸 후에 미리 녹음해둔 마치 기계가 안에서 돌아가는 듯한 위이잉- 소리를 재생했다. 내부에서 뭔가가 돌아가는 듯한 위이잉- 소리가 났겠지만 당연하게도 전기가 연결된 것은 아니었기에 딱히 자판기에 특별히 불이 들어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부터 1분동안 스캔을 시작합니다."
당연히 스캔을 실제로 하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리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이어 은우는 열심히 손을 움직이며 렌즈에 비친 여학생의 모습을 대략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빠르게 그려야하니 자세하고 세세하게 그리진 못했으나 특징 정도를 잡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웹툰을 그려온 사람이었으니까.
강 낚시보다 바다 낚시가 꽝을 낚을 가능성이 높지만 역시 냄새나는 강 물고기보다는 바다 물고기가 더 좋았다. 사고가 날 수도 있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근처에는 사람이 많은 편이니 유사시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고. 그나저나 부실에 없을거라는 말은 완곡하게 '날 찾는건 귀찮은 일이 될테니 적당히 말만 해둬' 라는 표현이었지만 아무래도 이 정직한 소녀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귀엽다고 해둬야 하는걸까. 아니면 눈치가 없다고 해야할까. 어쩌면 저 후배의 말 처럼 때로는 정직함이 필요 할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정직해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그럴일이 있다면 그럴게."
그 가능성은 적을거라 예상하며 부실을 나가는 그녀를 눈길로 배웅했다. 저런 정직한 후배가 부실에 있는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여러개 구비해 둔 낚시대를 바라보았다.
사실 미나가 고민하는 이유도 그쪽이 더 가까울 것이다. 요리를 계속 할 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어떤 길을 걷게될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드러나는 계열을 선택하기엔 부끄러움이 너무 많았다. 이미 부모님께서 이름나신 분이니 그 자식인 미나에게도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것은 당연한 법이겠지만, 그것이 부담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 혼자만 그런 것일지도 모르기에...
"응, 할수 있어. 나도 도와줄 테니까,"
주먹쥔 두 손을 나란히 세워 화이팅 포즈를 취했을까, 여전히 응원하는 사람치고는 무감정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를 바라보는 미나의 눈길이 평소보단 잔뜩 기합이 들어간듯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이려나?
"음... 아마 그럴지도,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해할수 있을거 같아."
결국 제 느낌이나 그녀의 감상이나 크게 다르진 않았던 모양이다. 서로가 서로의 재능을 신기해하며 때로는 추켜세워주고, 때로는 다독여주기도 하는... 그런것들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으니까, 받는 입장이 아닌 그렇게 말하는 입장에서도 분명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져왔다고, 미나는 그런 추억을 되짚어보았다.
"......!"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그녀의 폰이 자기 시선 가까이 와닿자 미나가 갑자기 움츠러들더니 꾹 다물고 있던 입이 아닌 콧속에서 울리는듯한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마치 고양잇과 동물이 경계할 때와 비슷한 소리였을까?
"...아. 응, 그건 그래."
다소 늦은 반응이긴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평소처럼 멍한 표정이 되어 받아든 폰에 제 연락처를 차근차근 적어서 다시 돌려주었다.
준비라던가, 분명 필요하긴 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자신이 준비가 안되어있던 것일까?
단순히 연락처를 교환할 뿐인 '친구로서 당연한 행동'인데도, 지난 2년간에도 줄곧 겪었던 일인데도 어째선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제 폰을 꺼내 아직 켜지지 않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 만큼은 유달리 초롱초롱하게 바뀌어있었을지도, 단순히 폰을 쥐고 있을 뿐인데도, 밋밋하고 투명한 케이스에 사람의 온기가 가느다란 손가락 모양을 따라 뿌옇게 서려있었다.
남자 기계인가? 요즘은 그 전자여성..목소리를 흔하게 쓰던데.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열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기계니까 금방 나오겠거니 싶었다. 근데 이러고 있는 거 남이 보면 좀 우스우려나. 왠지 머쓱해서 주위를 둘러보려는 참에 다시 기계에서 음성이 나왔다. 안면 근육? 소감? 강아지와 너구리? 열은 너구리에서 웃음이 풉 터져 입을 막고 큭큭 웃다가 내부에서 들어오는 팬 돌아가는 소리에 다시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소감, 소감이라.. 그런 거 보통 생각 하던가? 일단 나는 아니오.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너구리가 좀 걸렸다. 정말 너구리나 코끼리가 나오면 기계를 한 대 쥐어박을 거 같으니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2학년이 3층 쓰고 1학년이 2층 써서 좋다."
깔끔한 감상이었다. 진짜 엄청난 장점이지. 열은 무던한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보통은 반대라던데. 1학년 때 고생하고. 급식소 가는 길도 제일 멀어서 급식 줄 서기 힘든데. 음. 최고의 장점. 다른 점은 생각해본 적 없는 듯 맑은 눈이 꿈벅인다.
1분 스캔을 시작한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열은 눈을 가운데로 모으거나 혀를 내미는 등, 4컷 사진을 찍을 때처럼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귀여운 얼굴로 히죽 웃었다. 무료니까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지만, 캥거루나 코알라가 나온다면- 열의 주먹이 자연스레 꾹 쥐어졌다.
"내년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내년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3층 쓴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은근히 빡셉니다. 그리고 1년 금방 갑니다. 본 대화는 AI 데이터 채팅 프로그램이며 절대 해랑고의 교사들과 교장 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참 의외의 소감평이 나와서 은우는 꽤 재밌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년에는 어찌 될까? 왜 2학년이 3층 쓴다고 불평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년에는 3학년이 되어 저 아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보기 힘들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뭔가 내년에 저 아이가 2학년이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 재밌을 것 같은데. 슬쩍 내년에 1~2학년들이 쓰는 곳도 한 번 가볼까? 그렇게 생각을 하나 과연 자신에게 그 정도 여유가 있을지는 또 의문이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표정을 짓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웃음을 꾹 참았다. 소감을 말하는 것으로 스캔을 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건만, 아무래도 상대는 잘못 인식을 한 모양이다. 그래도 괜히 여기서 지적을 하면 상대가 너무 부끄러울테니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하며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스캔 완료. 스캔 완료. 지금부터 그림 그리기에 들어갑니다. 약 3분 정도의 시간이 소모되며 중간에 가도 상관없으나 그렇게 될 시에는 물건을 찾을 때까지 계속 찾으라는 음성이 나오게 되기에 누군가는 호기심에 가져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덧붙여서 본 AI는 신입생...."
이어 그는 그녀의 명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잠시 렌즈에 가깝게 눈을 가져갔다가 떼어냈다.
"소열 양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부디 2학년이 되어 3층을 쓰는 것에 불평하지 마시고 즐겁고 재밌는 학교 생활 보내길 바랍니다. 본 AI 서비스에게 학교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은 점이 있으십니까?"
정말로 가볍게 그려지는 그림인만큼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예정이었다. 질문 하나에 대답을 하고 나면 아마 완성이 되지 않을까?
>>301 자주색 벨벳......???? 세상에나 화보 아닌가요......???? 채린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화보찍고 있엇네~~~~~!!!! 🥰 서우는 잠옷 모으기 좋아해서........... 엄청 다양한 디자인의 잠옷 세트를 모아!!! 그래서 요즘픽만 말하자면 >>303 여기 말한대로 별무늬 잠옷~~~~!
>>302 으악 하늘이 닉값한다 귀 여 워 ~~~~~~!!!! 🥰 하늘무늬 구름무늬 파자마라니.............. 위에도 세트로 입어달라고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고파~~~~!!!
>>51 보셨나요? 저런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 까요? 예전에 그 르네상스 시대에 메디치가문인가 거기서 막 여러 계층 이랑 직업을 가진 사람들 끼리 막 떠들면서 르네랑스시대의 초석을 다졌다거나 그런식으로 어디서 들은 게 있어서 가지고 그걸 모티브로 생각한 아이디어 입니다!
서우를 쓰다듬는 아진의 얼굴에 다시 서우의 웃음을 닮은 함박웃음이 걸린다. 나뭇잎 포인트가 서우가 하고 있는 푸딩머리에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같다.
"효도여행 조오치. 나이가 나이라서 무릎이 쑤시니까 천천히 가자~"
물론 그 말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급식실까지 도도도 달렸고, 옥상까지도 도도도 달려서 올라갔다. 서우램쥐만큼 날쌔진 못했지만 백조할미도 나름 순방했다. 계단통 하나를 앞서가는 서우를 뒤따라 옥상에 도달하기 전의 마지막 계단통에 다다를 때, 서우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아진에게도 들렸다. 누가 들어도 찐텐인 함성에 가까운 알림에, 아진의 초록색 눈동자에도 반짝 하고 생기넘치는 기색이 어렸다.
"에이 그짓부렁~ 3월이야 3월."
일부러 부정하는 말을 하면서 아진은 남은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가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3월의 눈이 내리는 하늘이 아진을 맞이했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흐린 하늘을 예쁘게 수놓는 별들과도 같은 싸락눈, 탁 트인 해랑시의 풍경, 그리고 철책에 대롱 매달린 서우의 뒷모습. 아진은 잠깐 옥상 입구에 멍하니 멈추어서서, 그 광경을 정신없이 눈에 담았다. 잠깐 멍하니 표정이 바래어버렸던 아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오른다. 미소는 이내 함박웃음이 된다. 오늘 봄 풍경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겠다고 아진은 생각했다. 다음 눈이 오는 날에도, 나는 이 풍경을 떠올리면서 웃을 수 있을까─ 아진은 얼굴에 핀 함박웃음을 평소의 느른한 미소로까지 사그라뜨리면서 철창에 매달린 서우에게로 다가왔다.
>>320 네! 누구나 올 수 있는 비밀 아지트! 3층으로 되어 있었지만 복층 구조라서 각각 층에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현관에는 인원수에 맞게끔 슬리퍼가 구비 되어 있는 신발장이 있고 바로 앞에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소파나 편하게 안거나 누울수 있는 쿠션이나 매트 혹은 이불 등이 비치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벽면에는 조리가 가능한 계수대가 있으며 간단한 음료 제작법이나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레시피가 있습니다. 불을 사용 하니 그 근처에 소화기가 배치 되어 있구요! 그리고 2층에는 3개의 스터티룸이 존재 하고 3층은 비품실과 2개의 다용도 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로 옥상이 존재 합니다! 다른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원형으로 되어 있고 전체적인 건물의 분위기는 오래된 건물에 피어나는 식물 이랄까... 약간 그런 느낌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아 한마디로 지브리식! 모여서 할만 한것은 영화감상이나 한가지 주제를 정하고 다같이 이야기를 한다거나 진실게임, 왕게임 , 다같이 합숙하는 느낌도 내볼 수도 있고 레스주들이 소소하게 이벤트를 열거나 할때 쓸 수 있지 않을 까 싶습니다. 다같이 마ㄹ오 파티를 한다거나!
일단 이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구상 했습니다! 약간 저의 청춘도 저렇게 지냈으면 좋겠다 하는 로망이 한가득 넣었습니다!
내년에 불평하지 말라는 말에 열은 태연하게 지금부터 불평을 하기 시작한다. 근데 방금, 나한테 토 단 거야? 고철 덩어리가? AI 프로그램이라지만, 아니 그 전에 너가 먼저 소감 말하라 그랬잖아. 심술이 난 열은 비죽한 입을 내밀더니 약하게 발 끝으로 기계를 툭 치듯 살짝 건드렸다. 발로 찬 것 까진 아닌데, 안이 텅 비어있으면 꽤 요란한 소리가 났을까..
"왜 그렇게 오래 걸려?"
스캔하고 바로 나오는 거 아니였나? 열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그냥 지나치는 건데. 열은 인상을 옅게 구겼다가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상당히 가오(..) 상하는 일이라 판단되어 몸을 돌리려 했으나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미아 찾기를 한다는 이야기에 입술을 꾹 깨물고 멈춰섰다. 소열은 무의식적으로 꾹 쥔 주먹을 귀 옆까지 높이 들었다가 화를 참는 법. 10부터 거꾸로 세기를 마음 속으로 꼭꼭 세고서 손을 차분히 내렸다.
"해랑고에서 제일 가는 미녀는?"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단순히 거울아 거울아, 이야기를 모티브로 생각해서 뇌를 거치지 않고 툭 튀어나온 질문이다. 고등학교가 다 거기서 거기니까. 딱히 물어볼 게 있지도 않고. 자칭 AI가 판단하는 학교 최고 미녀가 누가 될지 기대되기도 하고. 슬슬 오래 기다렸다고 판단한 열의 눈이 가늘어지며 슬며시 팔짱을 낀다.
서우라는 이름은 비라는 뜻을 가졌고, 동음이의어에는 무더운 여름날에 내리는 비라는 뜻도 있는데 이렇게 눈을 반기는 걸 보니 겨울눈으로 개명해야할 성 싶다. 철책망에 발을 몇 칸 디디고 올라간 덕분에 백조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백조 위로 하얀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하얀 날이다.
“백조할미, 미끄러져서 넘어지면 안 된다?”
서우의 할머니 연기는 끝났지만, 백조의 할머니 롤은 계속되고 있다. 눈웃음을 지으니 특유의 물결모양을 그리는 눈꼬리가 일렁인다. 서우는 내밀어진 팥 붕어빵 한 마리를 입으로 받아서 물고, 철책에서 가뿐하게 폴짝 뛰어서 내려온다. 서우가 붕어빵에서 제일 먼저 먹는 부분은 지느러미! 바삭바삭한 얇은 식감을 즐겼다. 그 다음은 꼬리다.
“그리고 할미도 먹어!”
붕어빵 반절이 이미 서우의 볼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반절을 쥐고 있는 손 말고, 놀고 있는 손으로 붕어빵 봉지를 뒤적거린다. 꺼내진 건 슈크림 붕어빵. 백조도 먹으라고 불쑥 들이민다.
채린에겐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요리사가 되는 건 확정이지만, 식당을 여는 건 불확실하다는 의미일까? 하긴 자영업도 여러 준비가 필요하고, 기반이 될 자본도 필요하니까. 속사정을 모르니 채린은 대충 자기 마음대로 납득했다.
“요리 천재가 도와준다니 걱정 안 해요. 기대된다~”
비록 상대의 얼굴이 무표정에 가까웠을지라도 행동이나 말로 전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전해졌다. 덕분에 채린의 머릿속에선 이미 완벽한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는 것까지 시뮬레이션이 끝났다.
“으응?”
희한한 소리. 의외의 반응에 채린은 눈을 깜빡였다. 번호를 주기 싫은 걸까? 아니면 줄 수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먼저 물러날 생각은 없는지 꿋꿋하게 내민 손을 유지했다. 그러다 당초 목적대로 번호를 건네받았다. 채린은 제 번호를 상대 폰에 저장시키기 위해 새롭게 등록된 번호를 눌렀다가 발신음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끊었다. 그러던 중 문득 화면에 뜬 시간에 눈길이 갔다.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나 이제 부실 가야 해요.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꼭 받아요!”
채린은 그 말을 남기고는 대출 신청을 하러 도서실 입구로 향했다.
// 막레할게~ 미나 표정이랑 행동이 자꾸 다른 거 너무 귀여웠다.. 며칠 동안 돌리느라 고생했어~!
>>326 >>327 와아아ㅏㅏ 엄청나 태식주의 로망 = 나의 로망이 되었다...! 굳이 외곽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차피 스레 내이니까~ 아버님 돈 많으시니까 어디든 상관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ㅋㅋㅋ 와 너무 좋아. 일단 관련 설정 관련해서 태식주가 다른 이를 초대하는 일상을 하는 것을 보고 난 뒤에 이벤트 장소 열리는 느낌으로 시트 스레에 장소 설명을 올리면 좋을 것 같은데~~ 태식주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지만 AT가 생기지 않도록 이벤트 장소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도 적극적으로 알리고 빠지는 이들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하나도 꼭 초대해 주구 ><
그녀가 발로 쿵 치자 자판기 내부에선 쿵 소리가 울렸다. 설마 발로 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은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여기서 괜히 더 걷어찼다가는 기껏 완성이 되어가는 그림이 망가져서 다시 처음부터 그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있는 힘껏 입으로 애용~ 애용~ 애용~ 소리를 내면서 그는 국어책 읽기 모드로 말을 이었다.
"외부 공격 감지. 외부 공격 감지. 지속되는 공격 감지시 시스템을 종료하겠습니다. 시스템을 종료하겠습니다."
더 이상 공격을 해서 혹시나 기껏 그린 그림이 망가지지 않도록 경고 표시를 한 후 은우는 다시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이제 저 머리카락만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았기에 속도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고 굳이 말하자면 여유로웠다.
그러는 와중 들려오는 질문에 이 후배는 만만치 않게 꽤 창의력이 있는 애가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학교 시스템이나 그런 것을 물어볼 줄 알았는데 최고의 미인을 묻는다니. 이걸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솔직힌 마음으로는 그렇게 막 특출나게 붙어다니거나 엄청나게 친하다라는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친분이 있지 않나? ㅡ물론 그건 은우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ㅡ 라고 생각되는 채린의 이름을 대는 것이 어떨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도 친구 좋은 거니까. 허나 AI가 이걸 직접 평가하는 것도 애매하지 않나 생각하며 은우는 삐빅- 삐빅- 삐빅- 소리를 입으로 내며 이야기했다.
"에러. 에러. 문의하신 해랑고에서 제일 가는 미녀에 대한 검색 결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시 그렇게 에러. 에러. 소리를 내던 그는 마침내 그림을 마무리지으며 기계음을 내서 이야기했다.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입생 인증을 시작하겠습니다. 신입생은 기기를 향해 한 걸음 가까이 접근해주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현 은우는 그래도 소꿉친구지. 하면서 채린이를 댈 것 같았지만 AI가 그런 것을 평가할 순 없지! 물론 이건 은우의 현 생각일 뿐이고 은우주는 그 누구도 고를 수 없다고 한다. (진지)
>>335 제 생각에도 AT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 했던 게 좀 후미진 곳에 낙서 같은 걸로 홍보를 했고 그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던가 나중에 가서 막 떠도는 소문을 듣고 왔다던가 하는 식으로 해서 신입 분들도 좀 자연스럽게 올만한 설정을 추가 할까 합니다. 선관으로 알고 있는 레스주가 알려 줘서 이미 아지트 라는 곳을 알고 있다! 라고 해도 되고용!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초대 해도 되니 레스주들이 돌릴때 쓸만한 상황이나 주제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 됩니다! 장소 스레에 올리는 거 환영입니다!
강아지들이 코를 맞대고 인사하는 것처럼, 신발 코로 툭 건드렸을 뿐인데 애용애용 소리에 열은 옷소매를 끌어올려 귀를 막았다. 근데 뭔가 묘하게 애용 소리가 일정하지 못한 거 같은데... 피어오르는 의심의 새싹에 열은 자판기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뭔가 애용소리가 작위적이랄까. 수상한데. 아니면 누가 직접 하나하나 녹음한건가? 그래도 수상하다. 아까 분명 사람이 들어간 것 같았으니, 안에 귀신이 스며들기라도 한 걸까. 열은 여기저기 빈틈을 찾기 시작한다.
"소열이에요."
열의 뻔뻔함은 우주 끝을 달리고 있었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퍽 만족스러웠으므로 열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입력해 달라는 듯. 소열은 마치 그 AI가 심심이 정도의 지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심심이도 답변을 입력해 두면 얼마든지 여러명에게 써먹으니까. 타 학년이나 동급생들이 알게 되어도 부끄럽지도 않은지 열의 태도는 매우 당당했다. 그러던 중에 또 수상한 기계음이 울려온다.
"귀엽게 그렸어?"
이만큼 기다렸는데 나름 기대는 되는지 열은 순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종이가 나올 것 같이 생긴 얇은 출입구에 양 손을 가지런히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받아서 어디다 사용해야 할 지. 복사해서 선도부 선배들에게 뿌려주면 상당히 좋아할 것 같기도.
"조금 더 유하게 말하는 편이 좋지 않아?" 휘야: "거.. 나도 고치고 잡은디. 잘 안 되드만. 그래도 요즘엔 입 싸게싸게 놀리진 않응께 그걸로 괘안타고 해줌 안 되나." "아니 학주는~ 쌤이 먼저 내 인형 등교중지 시켰잖아 거 뭐야 거시기 그거 인권침해야~ 나 씅 안냈다고~ 그거 유하게 말한거라고 쌤님 내 인형 뒤져뿌싼디요 아 좀 살려주이소 한게 뭐가 날섰다 하냐 억양 쎄믄 욕인줄 알어 이자식들이" < ?
"전부터 보고 있었어! 첫눈에 반했어! 사귀어 줄래?" 휘야: " .. 나가 와 첨보는 사람이랑 사귀는디. 싫다."
최미나 TMI 주세요! 우리 최미나... 가방에는 뭐가 들어 있나요? - 필기구와 공책! 책은 좋아하나요? - 좋아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변할까요? 혹시 안 변하나요? - 조금도 적극적으로? #shindanmaker #님캐TMI주세요 https://kr.shindanmaker.com/1084363
자신도 그랬지만 저 후배도 만만치 않게 참 뻔뻔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렌즈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보통 여기서 자신이라고 말 하는 사람이 있나 싶기도 했기에. 물론 저란 자세는 싫지 않았다. 그보다 자신으로서는 이런 결과가 더 재밌었다. 차후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아무튼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는 것을 확인하며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고 잠궈뒀던 잠금쇠를 열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둔 '폭죽'을 하나 꺼낸 후에 그것을 위로 향했다. 앞으로 향했다간 잘못하면 화상을 입거나 하는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이어 그녀가 어느 정도 다가오자 그는 닫아뒀던 자판기의 문을 열며 있는 힘껏 하늘로 향한 폭죽의 줄을 잡아당겼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 들어있는 종이조각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천천히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은우는 큰 목소리로 유쾌한 톤을 유지하며 말했다.
"서프라이즈! 아하하하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웃음소리는 정말로 만족스럽고 유쾌함 그 자체였다. 웃는 것을 도저히 감추지 않으며 그는 자판기 앞에 서 있던 후배를 바라보면서 오른손 검지를 양옆으로 살살 흔들면서 이야기했다.
"우리 고등학교 최고의 미녀를 자칭하는 소열 후배님의 당당함은 아주 잘 봤어! 야. 보통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는 없을텐데 말이야. 물론 난 그런 자신감이 엄청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아. 참고로 3층까지 올라가는 거, 은근히 귀찮긴 한데 익숙해지면 괜찮을거야. 나도 괜찮아졌거든."
참으로 가볍고 또 가벼운 목소리를 내면서 그는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방금 전 완성했던 그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덧붙여서 이건 그림! 엄청 성실하게 그려줬으니까 거짓말 한 건 아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사람 들어있다고 소문내지 말기. 알았지?"
그래도 웹툰을 연재한 그였던만큼 나름대로 포인트는 정말로 잘 살린 편이었다.
/실제로 내가 그림을 그린다면 그려보겠지만 난 은우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픽크루로 한 장만 만들어봤다! 그냥 대충 이런 느낌으로 나왔다고 생각해주면 좋을지도 모르겠어! 일단은 시트 스레의 묘사를 최대한 참고해서 만들어봤는데 이미지가 잘 맞을진 모르겠네!
종이의 출입구만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열이었는데, 무언가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뭔가 순식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열은 이런 데에 상당히 무방비한 인간이었기에 비명하나 지르지 않고, 미세하게 구겨진 표정으로 뒤로 주저 앉으려했다. 너무 화들짝 놀라면 몸의 체중이 뒤로 넘어가는 그것. 이렇게 튀어나와 줄 것이라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세상에. 게다가 보란듯이 크게 웃어 넘기는 저 웃음 소리까지. 저쪽은 상당히 즐거워 보이는데. 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비웃으시는 건가요?"
빠르게 상대의 명찰 색을 스캔한 열의 당돌한 첫 마디는 그거였다. 은우가 넘어지는 것을 잡아주거나 일으켜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미동도하지 않고 뒤로 주저앉은 채 은우를 빤히 올려다보며 날카로운 표정으로 뱉었을 것이다. 검지를 살살 흔드는 행동까지. 이건 동물의 영역에서 도발의 행위로 간주되는 것인데.. 우선 그와 열은 인간이니, 또 열은 선도부니까. 대화로 해결할 것이다.
"이의 있으시다면 선도부 소리함에 넣어 주세요."
친히 고쳐드릴 수 있다. 생각을. 자칭타칭,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이상으로 한다면 공주병으로 소문날 테니 장난도 이쯤에서 쳐야한다. 가벼운 목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우고 그의 등장 한 순간에 참으로 정신을 빼놓는다고 생각했다. 아까 애용거리던 소리와 비슷하게 소란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유쾌한 인간일까.
"응. 선배가 수상한 기계음을 애용거린다는 이야기만 할게요."
약속.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 상냥하게 웃어보이며 그가 그린 그림을 받아들었다. 보자마자 오. 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반사적인 순수한 웃음꽃이 번지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닮았네. 잘 그린다. 작게 중얼거렸다.
눈도 좋고, 비도 좋다. 아름다운 풍경이 좋다. 평범한 풍경도 좋다. 특별한 날도 좋아하고, 여느 날도 좋아한다. 올 한 해가 아진에게는 두 번 다시 없을 특별한 해이기에, 아진은 이런 순간만큼이나 다양한 순간들을 계속 소중히 담아두고 싶었다. 오늘은 3월의 싸락눈이 내리고, 언젠가는 꽃비가 언젠가는 장맛비가 내릴 날도 있겠지. 곱게 단풍 드는 날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또다시 한 번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많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의 한 순간을 서우가 채워주었다. 내게 남은 다른 순간들도─ 아진은 그제서야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안 넘어진다구."
하면서 너스레를 떨며 서우에게 붕어빵을 내민 아진은, 서우를 따라 철창 너머 해랑시의 풍경을 내어다보
"합."
려다가 입에 서우가 내민 슈크림 붕어빵이 쿡 박혔다. 아진은 붕어빵을 먹는 데에 먼저 먹고 나중에 먹는 부위의 구별이 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먹는 편이었다. 그래서 양손으로 붕어빵 봉지를 잡고 있던 서우가 거리낌없이 붕어빵을 집어서 아진의 입에 내밀 수 있었던 것이겠지. 우연히도, 서우가 가장 먼저 물어뜯었던 곳과 똑같은 지느러미가 먼저 아진의 입에 물렸다. 아진은 손 하나를 떼고 서우가 물려준 붕어빵을 쥐고는 냠냠 먹기 시작한다. 크리미하고 달콤한 주전부리는 여전히 먹을 만하다.
>>428 ㅋㅋㅋㅋㅋㅋㅋ 자 정은우군의 감상은 여기까지이고요. 다같이 다음 발렌타인을 기다립시다 과연 어떻게 될지.(두둥 귀여웤ㅋㅋㅋㅋ 물 마시자 은우야 ㅋㅋㅋㅋ
>>430 나는 어느쪽이든 괜찮아~ 만약 여동생과 친구라서 친구의 오빠 정도로 아는 사이라도 막 엄청 얘기를 나누거나 그랬을것 같지는 않아서 적당히 아는 오빠랑 동생 친구가 될것 같아. 하늘이가 해랑고에 재학중인걸 알고 있으니까 몇번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보았겠고 첫만남에 어색한게 덜한 정도이겠네
"비웃기는. 굳이 말하면 내 기준에선 정말로 신선한 후배였는걸. 애초에 누군가를 비웃거나 하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물론 상당히 신선했어. 세상사 살아가는데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 난. 이건 농담 아니고 진짜야."
넘어져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은우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일단 자신 때문에 넘어졌으니 자신이 일으켜세워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상대가 거부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굳이 억지로 내 손을 꼭 붙잡아서 일어나. 라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아무튼 꽤 기가 강한 후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은우는 괜히 두 어깨를 으쓱했다.
"이의는 없어. 스스로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런 거 아니겠어? 이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받는 후배인데 뭔가 흥미로운 이들이 많은 것 같아서 다행이야. 역시 신입생들은 이런 신선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난. 아.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야. 내 기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꽤 신선한 느낌이었다. 딱히 공주병이라거나 재수없다기보단 정말로 자신감 넘치는 그런 후배였기에 더더욱. 아마 자기 자신을 학교 최고의 미녀라고 이야기한 것은 조금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생각을 하나 굳이 그는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와. 그건 이야기하는거야? 나중에 또 선생님이나 다른 애들이 또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할지도 모르겠네. 나는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적어도 지금 것은 더더욱. 나름대로 신입생들을 위한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그것도 비밀로 해주면 안될까? 라고 일단은 물어보고 싶은데 안돼?"
물론 정말로 말한다고 해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자신이 즐거움과 흥미를 기반으로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알 사람들은 다 알테니까. 물론 그렇게까지 학교 유명인은 아니겠지만 자신에게 와서 그런 말을 할 정도의 이라면 너 또 그랬냐? 정도로 생각할테니까 더더욱.
"정은우야. 2학년. 아무튼 1학년들에게 이런 자판기가 있다고 내가 들어가있다는 것만 딱 빼고 홍보해주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아무튼 내년은 나도 고3이라서 어떻게 될진 모르겠으니, 적어도 1년 서로 오가면서 인사 정도는 하자고. 콜?"
인형 모으는 휘야 귀여워~ 인형 모아다주고 싶어~~~~~~~ <<<그러나 미나의 인형은 전부 설치류에 관련된 굿즈였다>>> <<<방 안이 쥐로 가득하다>>> <<<'저작권에 예민한 그 검은 쥐' 굿즈도 있다>>>
진단이 하늘이한테 나쁜 말 하고 있어!!! 진단 때린다!!!! <<?
초콜릿 조각상은 [미나와 친구 되기] 퀘스트의 보상이래~~~~ 나중에 얘기하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준다나~~~~~ 아, 헤어스타일은 사실 급하게 끼워맞췄다!! 재빨리 단발룩 촤라락 훑어보고 그나마 픽크루와 시트설명에 가까운 헤어스타일이 윈드펌이란걸 알아냈지!!!! <<<뿌듯함>>>
열은 별다른 대꾸없이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 은우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더러워졌을 치마의 먼지를 툭툭 터는 열의 표정을 그 생각보다 차분해보였다. 아직까지 놀란 심장이 쿵쾅거리긴 하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만약 은우가 친한 사람이었다면 주먹을 한 대 쥐어주었을 거야.
"그럼 인정하는 걸로."
이의가 없다면야, 다른 이의 이름을 댈 생각도 없다는 거니까. 수긍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겠냐며. 열은 단순하게 단정짓고 입꼬리를 생긋 올렸다. 이래나저래나 상관없지만 실없는 농담일 뿐이다.
"맨입으로?"
비밀유지를? 그러면 보장 못 하는데. 열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음소리를 내었다. 열의 입장으로썬 말하든 말하지 않든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니까. 선배라해도 게다가 초면이고. 또 신입생이 소문을 내봤자 얼마나 내겠냐만은. 그래도 깜짝 놀래켜서 나자빠진 것에 대한 보상을 당돌하게 요구해 보는 것이고.
"네 애용 은우 선배님. 애용 선배도 귀여운 것 같은데요."
이름으로 불러 줄 생각은 그다지 없어 보이는 열이 그를 깜박 응시한다. 홍보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서. 그리 사교적인 인물이 아닌지라 장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다. 애용귀신이 들어있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거와 이건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 굳이 따지자면 난 나와 친한 친구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으니 말이야. 아. 하지만 너도 예쁘다고 생각해. 축제 때 최고 미남, 최고 미녀 대회라도 개최해보자고 해볼까.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고 혼날 것 같지만 말이야."
스스로가 말하고도 그런 일이 설마 있겠나 싶어 그는 괜히 키득거렸다. 하지만 한 번 이야기는 해보고 싶다고 생각을 하며 누구에게 찾아가면 좋을지 그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학생회장에게 찾아가는게 좋을까? 그러고 보니 올해 학생회장은 누구였더라? 분명히 투표를 한 것 같지만 존재는 잘 떠오르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려고 끙끙거리던 은우는 이내 포기했다. 생각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하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좋아. 요구조건이 뭐야? 매점에서 빵이라도 하나 사줘야하려나?"
물론 이런 것을 바랄 것 같진 않아보였으나 그래도 일단 가벼운 예시를 들며 그는 그녀의 반응을 가만히 살폈다. 그 와중에 애용 선배라는 말에 그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낼 뿐 별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 대신 필명을 저렇게 바꿔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꽤 재밌는 아이라고 다시 한 번 인지하며 그녀를 자신의 일상툰에 캐릭터화해서 넣어볼까라고 생각하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지금 이 일은 에피소드로 넣진 못하겠지만.
"가능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부탁할게. 아무리 나라도 학생인 이상, 뭐든지 다 가능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 말이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가만히 떠올리며 그는 꽤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어쨌건 학생이 요구할만한 것은 대충 예상하는 범위가 있었기에. 그리고 그 범위내라면 충분히 자신의 돈으로 가능했다.
그래서 열도 담백한 감상을 내놓았다. 틀린 말 하나 없었으니 반박할 생각도 없고. 그럴 수 있지, 아무래도. 딱히 인정받고 싶다기보다는 상대의 반응이 더 궁금했을 뿐이다. 열은 볼을 긁적이며 흐물흐물 저물어가고 있는 주홍빛 하늘을 바라본다. 하교하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들도 잦아들었다. 방과후 동아리들의 소리들만이 맴맴거린다.
"부하가 되어 주세요, 선배님."
열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 짧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을 뱉었다. 내 부하가 되어라. 그런 것.. 재밌잖아. 단순히 재미다. 뭔가 할 생각도 없지만 그냥 저보다 선배가 부하가 되어준다면 재밌을 것 같아서. 목마라도 타고 다니면 웃기지 않을까. 거절해준다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아무튼 의견을 냈으니 yes or no를 위해 은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싫다면 잡지 않겠거니 하고.
"어렵나?"
순진한 얼굴로 갸웃거리는 열의 머리카락이 흩어진다. 나쁘지 않은 조건 같은데(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이 후배도 만만치 않게 일단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 아닐까하고 은우는 의문을 품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하가 되어달라니. 이런 제안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제안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자신은 누구의 부하가 되거나 하는 성향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의 부하가 되는 길에 즐거움과 재미가 있을 것 같진 않았던만큼 그는 빠르게 즉답했다.
"1학년의 부탁이라면 일단 어지간하면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하는 조금 힘들겠는걸. 하하. 하지만 재밌는 대답이었어. 95점 줄게!"
이어 그는 두 손을 짝 펼친 후에 차례대로 9와 5를 표현했다. 나름대로 두 숫자를 합쳐서 95점이라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으나 과연 상대에게 잘 전해졌을까? 아무튼 점점 노을이 짙어지며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오늘은 이 이상 하기에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자판기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바로 뺏길 순 없으니 적당히 창고 구석에다가 숨겨놓고 내일 또 꺼내올 생각이었다.
"그 대신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근처 분식집에서 뭐라도 하나 사줄게. 어때? 빵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학교 근처인만큼 맛있는 분식집은 꽤 많은 편이었다. 그 중 한 곳에 데려가면 되지 않겠나라고 생각을 하며 그는 최후의 협상카드를 내밀었다. 결렬된다면 더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 빠르게 다른 행동으로 옮기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에게 있어서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었다.
/큭! 슬슬 나도 잠이 오기 시작했어. 일단 답레는 써두고 자러 갈게! 혹시나 이후에 올리면 확인 후에 나도 빠르게 이을게! 모두들 잘 자라!
달갑지 않은 은우의 표정을 빠르게 읽은 열은 악수를 청했던 손을 거두었다. 아쉬운 이야기다. 맨날 매점의 바나나우유를 사달라고 찾아 갈 생각이었는데. 하긴 무료 이벤트니 그 정도의 간절함은 없을만도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열은 팔짱을 꼈다. 점수가 무슨 의미람.
"글쎄요, 정은우 선배님."
분식집 제안에 열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며 가방을 고쳐 메었다. 슬슬 해가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이번 일은 글쎄. 열이 과연 남들에게, 선도부 인원들에게 곧이 곧대로 바쳐 떠벌리고 다닐까? 아니면 혼자 꼭꼭 숨겨 묻어버리고 말까. 건조한 열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아무튼 이번 건에 대해 흥미가 팍 식어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해요."
그리 말하며 열은 부지런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학교 뒷문 쪽으로 유유히 걸어나가 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협의는 결렬 되었고, 볼장은 다 봤고. 이야기도 다 나누었고, 또 열은 귀여운 그림을 받았으니까. 책상에 붙혀놔야겠다고 생각하며 열은 유유히 자리를 떴다.
//>>477 저도 마침 졸렸는데 나이스 타이밍입니다 ㅠ.ㅠ 적당히 마무리 지어놨으니 답레 확인만 해주시구 일상 수고 많으셨어요! 재치있는 은우 덕분에 즐거운 첫일상이었어요 좋은 꿈 꾸세요 은우주 uu! 저두 이만 자러 가보겠씁니다 다들 굿빰되세요ㅕ!!! (사르륵..
그녀가 옆에서 툭툭 내 어깨를 치더니 내가 돌아보자 씨익 개구지게 웃어보이고는 검지 손가락을 펴서 하늘을 가리켰다.
ㅡ 저기 구름 말야, 예쁘지 않아? ㅡ 응..?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녀의 손가락 끝에 걸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구름보다. 그맘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봉숭아 꽃으로 물들인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더욱 시선이 꽂혔다. 내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자 그녀는 대답을 재촉하듯 다시 물어왔다.
ㅡ 어때? 예쁘지? ㅡ 어?.. 어. 그래, 예쁘네.
나는 구름이 아닌,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어딘가 내 대답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두 뺨에 한 번 공기를 불어 넣고 불리더니 그대로 포옥- 작은 한 숨을 내뱉었다.
ㅡ 재미없어. ㅡ ...
그녀가 항상 내게 하던 말이었다. 내가 그렇게 재미없다면 나와 놀지 않으면 그만일텐데, 그러면서도 그녀는 매일마다 내게로 먼저 다가와주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나를 보며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주는 것을 매일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식으로 그녀가 다가와 주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기에 정작 내가 먼저 다가갈 생각을 그 무렵에는 하지도 않았다.
ㅡ 잘 봐봐, 뭐 닮은 것 같지 않아?
그녀는 그런식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나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것을 좋아했다. 낮에는 구름을 가리키며, 밤에는 별을 가리키며. 내게로 수수께끼를 던져왔다. 그럴때마다 내 옆에 서 있는 밤색 단발머리의 소녀는 하늘에 무언가 아름다운 동경을 품은 것 처럼, 예쁜 두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봉숭아로 물들인 손가락 끝에 멈추어있던 시선을 들어 그녀가 가리키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게 구름은 그저 구름으로 보일 뿐이었다. 나름대로 무언가 닮은 것을 연상해 내보려고는 했으나. 내게로선 무리였다.
ㅡ 음.. 잘 모르겠는데. ㅡ 모모 닮았잖아. ㅡ 아, 그런가. ㅡ 바보.
모모는 그녀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이름이었다. 페르시안 종의 눈 처럼 하이얗고 복실복실한 털을 가진 뚱뚱한 고양이. 나는 그 해답을 듣고나서야 구름에서 모모의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좋아하는 만큼 하늘에 대한 지식도 나이에 비해 해박한 편이었다. 구름의 종류나 생김새를 보고 날씨를 알아 맞히기도 하고, 밤이 되면 별을 보고 방향을 찾기도 하는 등 별자리에 대한 것도 잘 알고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런 것에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았었다. 날씨를 알고 싶으면 일기예보를 보면되고, 방향을 알고 싶으면 핸드폰의 GPS를 사용하면 되니까.
넘어지지 말래서 안 넘어진다는 답을 받았는데, 그랬더니 아쉬워하고 있다. 백조에게 슈크림 붕어빵을 하나 입에 물려준 서우는, 먹고 있던 반쪽자리 팥 붕어빵도 제 입 속으로 감췄다. 우물우물, 다른 손은 곧 지느러미가 사라질 슈크림 붕어빵을 봉지에서 꺼낸다.
“그럼 다들 나 볼테니까 안 쪽팔릴거야.”
아무래도 넘어진 사람보다는 넘어진 사람 옆에서 옆돌기를 하는 사람이 어그로 끌리기 쉬워보인다. 히히, 훌륭한 계획을 말했다고 뿌듯한 웃음 소리가 장난기와 어느 정도 섞여 난다. 맛있다는 백조의 너스레에 빵끗(방긋이 아니다. 빵끗!) 웃으며 온전히 뿌듯함 100%로 채워졌다. 아슬아슬한 타임어택 붕어빵 레이스를 한 보람이 있다!
“이번에는 폭설 오면 좋겠다~.”
눈오리도 만들고, 대왕 눈오리도 만들고, 나뭇가지에 하트 열매도 달아줘야 하고, 펭귄 모양이랑 공룡 모양이랑 눈사람 모양이랑 곰인형 모양 눈집게도 있는데다가, 이글루도 짓고 싶은데, 눈으로 백조 만들면 예쁘겠다! 조잘조잘 재잘재잘 눈놀이를 하고 싶어도 눈이 오질 않으면 하지 못한다.
“뭐야. 방금 우리 백조야? 우리 백조가 한 말이야??? 우리 백조가??? 아까 밥 찌금 먹은 백조가???”
왁 주말 갱신!! 하늘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어제 내가 좀 바빴어서 스레에 못 왔네ㅠㅜㅠ 오늘 저녁~밤 즈음에 답레 달아둘게! 😭
안녕안녕! 나 오늘 버스에서 웹툰 보다가 알게 된건데... ㅋㅋㅋㅋ홍시 캐릭터가 모 웹툰 캐릭터랑 완전 이름도 똑같고... 외관도 비슷하더라...😂 내가 평소에 안 보던 장르라 몰랐어ㅋㅋㅋㅋㅋㅋㅋㅠ... 이름까지 똑같을 줄이야... 난 나름대로 싱크빅이군😎 했는데... 사실 어디서 본 캐릭터를 떠올린 거였나...! 🥲 심지어 시호 초기 컨셉은 키 작은 여캐였어서 더더욱... 당황스러워😂 즈엔장... 흑흑 아무튼 놀랐단 이야기.... (쭈절쭈절)
아진은 나하하하 하는 나른한 웃음마저 잊고 낄낄대며 웃었다. 정말로 웃기거나 정말로 유쾌할 때 그녀가 종종 보여주는 찐텐 웃음이었다. 바보가 둘이라. 아진은 그 말을 즐겁게 입 안으로 되뇌어 보았다. 나쁘지 않은걸. 그러고는 슈크림 붕어빵의 남은 부분을 밀어넣었다. 크림으로 가득찬 배도 머리도 아직까지 맛있다. 그러다 폭설을 언급하는 서우의 말에, 아진은 생레몬을 씹은 것 같은 우거지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으, 이번 겨울에 별로 못 논 건 맞지만, 봄인데 그러면 곤란하잖아. 그러지 말고 꽃놀이 갈 때 도시락으로 뭐 싸갈지나 미리 생각해두자."
이미 봄에 칠 땡땡이 계획까지 다 세워놓은 모양이다. 예전에는 오히려 아진이 서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닐 정도로 활기찼었고, 지금도 활력은 떨어졌을지언정 그 천성까지는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방송부실 안은 안락하지만, 종종 갑갑할 때가 있었다. 아직 신선한 공기가 더 필요했다. 좋은 추억으로 삼을 좋은 나날들을 더 많이 갖고 싶었다.
눈을 반짝 빛내며 팔을 내밀어오는 서우를 보고, 아진은 개구지게 온 얼굴로 씨익 웃어보였다.
"에이- 겨울 동안 좀 못 놀았다고 하서우 감 다 죽었네. 밥배 따로 있고 떡볶이배 따로 있지."
그리고선 서우의 팔에 자신의 팔을 걸고 팔짱을 딱 꼈다. 쨀까? 하는 말에 즉답했다.
"콜."
사실 째는 것까진 계획에 없었지만, 아 그야 서우가 째자는데 이걸 누가 참을 수 있겠냐고.
고3 올라가는 봄이다. 막 2학년에서 3학년 된들 달라지는 것 없자. 나이 한 살 더 먹고, 세상의 부담 다 끌어안은 기분이 들어 암울해지고, 바뀐 별관에 적응하랴 뭐 하랴 하노라면 첫날부터 지루하게 구구절절 늘어놓는 수업도 제대로 못 듣고(주변에서 암만 안 들었다고들 했으나 나는 겨를이 없어 제대로 못 들은 것이었다.) 하교하는 것이다. 인생사 낭만 따위 없지마는 다른 낭만 찾아 발버둥은 칠 수 있었다. 발버둥 친 설상산 계곡물은 맑다. 봄기운 가득 머금고 활기차게 졸졸 따르는 물소리 따라 걷노라면 네모반듯한 도시는 잊게 되는 것이다. 겨울잠 깬 개구리 한 마리 아직 쌀쌀함에도 때 모르고 개개굴굴 울어대고 변덕스러운 산들바람이 나뭇잎 쳐 싸르르 소리 내는 숲길 홀로 헤매면 이정표 없이 절간에 당도한다. 대대손손 터 지켜오는 곳 돌계단에 고양이 한 마리가 턱 앉아 내리쬐는 해에 눈 감는데, 계단에 발 올려도 거들떠도 안 본다. 절간 이리저리 둘러보다 목탁소리 울리는 법당 신발 벗는 곳에 걸터앉아 잠시 기다렸다. 맑은 소리 끝나면 손님 온 걸 아는지 머리 맨들하고 주름 자글하니 온화한 인상 노승 하나 걸어와 아는체한다. 휘야 할아방이자 30년을 넘게 설상사에 몸담았는데, 이중 9년을 휘야가 함께 하였다.
"휘야 왔냐." "예, 내 다시 가야하는디, 그래도 할아방 얼굴 보러 잠깐 짬 내서 왔시라요." "그냐. 느이 시장할 텐디, 장떡 먹을 시간은 있구." "충분허니 고추장으로 주이소." "글믄 향 꽂아라." "내 무굔디요.." "네가 무교지 부처님이 무교는 아니여."
노승은 말 한마디 없이 부엌으로 휭 가버리었다. 남들 눈엔 저 너머 도시처럼 삭막한 대화라고 보인다 한들 본인들은 말 몇 마디 안 해도 통하는 사이다. 노승 간 방향도 안 쳐다보고 대웅전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고개를 뒤로 조금만 꺾어 들어 올리면 커다란 불상이 보이는 것이다. 대웅전 익숙한 광경이라 막연하게 생각하기엔 뒤집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라는 것 안 하니 괜히 낯설고 가슴 뜨끔한다. 무교라도 종교적 배덕감이 끼치었다. 이대로면 부처님께서 싫어하십디다…… 신발 슥슥 발로 벗고는 법당 안으로 몸 뒤집어 무릎발로 설설 기어 들어갔다. 몸 일으켜 살살 걷고 반배한다. 촛불에 향 붙이고 중앙에 반듯이 꽂자 연기 일정한 방향으로 술술 흐른다. 불상은 무생물이요 생명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으매도 꼭 생명 된 것으로 이루어져 내려다보는 것 같아 마른 침만 꿀떡 삼키게 되는 것이다.
"나 대학 가믄 절간이구 뭐구 영영 떠날랍니다."
아무도 못 들었겠지? 못 들었으면 좋을 테다. 속으로 이같이 변명하여 보았다. 한마디 했다고 혀 버석하고 가슴 꽉 멘다. 절에서 숙제 때문에 성경 구절 읽었던 것마냥 배덕감 차오르고 불상은 말 없다. 말 없으니 요 마음이 또 근질거리며 가시로 쿡쿡 찌르어 밀려나오는 파도처럼 실토하는 것이다. 내 떠나 조용히 살 겁니다. 유명한 건 싫읍니다. 적당한 일자리 찾고 적당한 돈 벌며 살 겁니다. 어려운 문제는 찍고 노력 하나 안 하는 학생이 대체 무어가 유명해진답니까? 다들 작가 되니 간호사 되니 저들 꿈 말하는데 나만 아직 마땅한 것 못 찾구 문학청년 겉껍질 되어 적당히 살길 바라니 참 부끄러워 동창회도 안 가고 숨어살까 합디다……. 불상 여전히 답 없다. 막연하게 뱉은 말이니 암도 못들었음 했는데, 야옹 소리에 화들짝 놀라 훽 돈다.
"얼씨구, 너는 다 듣구 있었구나. 못 들은 척 혀라."
아까 괭이 반쯤 뜬 눈으로 쳐다보다 법당 안으로 들어와 자연스레 방석에 자리 깔고 앉는다. 고놈 참 해탈하듯 불상만 멀거니 쳐다봐 어차피 괭이라 말 못 한다고 하는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푹 쉬어도 쳐다본들 안 한다. 고작 고양이 소리에도 심장 철렁하니 들키면 얼마나 무서울지. 아무도 이해 못 할 바짝바짝 메마르는 속가지고 사는 것만으로도 묵직한데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괜히 괭이 따라 방석에 무릎 깔고 앉아 안 하던 짓까지 하고 있자니 노승 그릇 들고 온다.
"뭐더냐. 뜨실 때 묵어야지. 싸게 싸게 온나." "예에, 가유."
일어나 신발 챙겨 신다 괜히 고개 돌려 인자한 불상 쳐다본다. 시선 돌리고 나와 적당한 곳 찾다 누름돌에 엉덩이 붙여 한 김 식고 깻잎 넣은 장떡이나 질겅질겅 씹었다. 저놈의 고양이 법당에서 나와 어느새 발치 곁에 다가오더니 몸 비빈다. 시선 내리니 입 벌려 야옹 한다.
>>544 아진주가 집안인간인 관계로(+주변에 희한할 정도로 마라탕을 먹는 친구가 없음) 마라탕을 접해본적이 읎어서 그건 뭐라 말을 못해보겄는디 한번 먹어보고 말해주겄어야~ 뱅송독백은 내가 생각날 때마다 짜잘짜잘하게 푸는거니까 오랫동안 안풀리더라도 잊구 있으면 어느순간에 또 한줌씩 올라오고 그럴겨
작게 휘파람을 불고 오늘은 또 뭔가 흥미롭거나 재밌는 것이 없을까 싶어 은우는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마냥 정말 구석구석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눈에 담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저기에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매미옷을 만들어서 입은 후에 매미인척 매달리고 있으면 깜짝 놀래키는 장난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물론 실제로 할 정도로 나무에 계속 붙어있을 자신은 없었기에 곧 머릿속에서 철회되었다.
아무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는 와중,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오. 우리 반 애다. 솔직히 말해서 아주 잘 아는 애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저런 소문은 들은 바가 있었기에 꽤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이였다. 사실상 소문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기 힘든 사실이었던만큼 그는 딱히 상대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물론 자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부턴 좀 철저하게 피해다닐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성품은 마냥 부처처럼 넓고 고운 편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아무튼 태블릿과 펜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기에 그는 두 눈을 깜빡이며 그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바라봤다. 오. 저거 기종이 뭐지? 꽤 좋은건가? 물론 거리가 있었기에 바로 구분하긴 힘들었다. 아무튼 뭔가 말을 걸면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뭘 하는거지? 가만히 생각을 하며 그는 두 어깨를 으쓱하며 태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태식이는 모두의 비밀아지트를 만들기 위하여 나름 대로 노력했다. 아버지를 설득하기도 하고 체육관일을 도우면서 받은 알바비 여태까지 받아온 용돈과 세뱃돈등을 거의 다 집어넣었서 나름 아버지의 입김에서 당당히 말 할 수 있도록 말하였고 현재는 내부 인테리어 중인 그런 곳이 있었다.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면 초대하면 되지만 말을 걸기도 힘들 정도로 태식이를 피하거나 주눅들어 말을 잘 못하는 친구들 또한 있었다. 나름 표정 관리 한다고 나름 성격 죽이고 말을 걸었지만 자신이 다시 되돌아 보았을 때에 말이나 말투에 날이 서있었다. 태식이는 마음이 포근해지면 말투 또한 포근 해지지 않을까 싶어 푹신 푹신한 테디베어와 사근 사근하게 잘익은 감자등을 상상하고 있었고 때 마침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친구가 있었기에 그쪽으로 고개를 틀어 입을 열었다.
“ 홍보~ 할 일이~ 있어서 포스터 그려줄 사람 찾고 있는 중이야~♨ ”
드로잉 태블릿과 펜을 보여주었다. 이정도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다정하게 말한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을까 싶어 내심 반응을 시대 하는 눈치였다.
“ 친구, 혹시 그림 잘 그려? ”
이번에도 안된다면 자신이 직접 그려볼 생각이였다. 그림에는 그닥 소질이 없는 편이고 사람을 그리라고 그리면 스틱맨을 그리는 그런 수준의 그림 실력이였다. 아니면 글이라도 간단히 적어서 홍보 할 예정이였다.
뭐지? 대체 뭘 기대하는 눈빛인거지? 그저 말을 걸었을 뿐인데 저런 눈빛을 보이는 것도 그렇고 그림을 그려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자 은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이건 그림을 그려달라는 페턴이로구나. 물론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나름 잘 나가고 있는 웹툰을 그리고 있는 작가가 아니던가. 물론 다른 이들에겐 다 비밀이긴 하지만.
"뭐, 못 그리는 것은 아닌데 말이야. 뭘 홍보하려고? 그리고 굳이 힘들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실 부탁보다 이쪽이 좀 더 신경이 쓰였기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기웃했다. 뭐지. 점수 딸 생각인건가? 자신에게 점수 따서 뭘 하려고? 그런 의문만이 조금씩 커지는 와중에 일단 은우는 정확한 내용부터 듣고 싶은 의사를 밝혔다. 사실 그림을 그리고 뭐고, 애초에 아무 것도 모르면 시작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일단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거라면 최소한의 구도라던가 그런 건 있는거지? 그러니까 맨 땅에 헤딩이 아니라 적어도 여기엔 이거, 여기엔 요거. 이런 느낌으로 말이야."
일단 부탁하는 입장 같으니 어느 정도 계획한 것은 있겠거니 나름대로 짐작하며 그는 우선 상대의 대답을 들어보기로 했다. 더 흥미를 보일지, 아니면 관심을 끊을지는 일단 들어본 이후의 이야기였다.
‘ 굳이 힘들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데.’ ‘ 않아도 되는데 ’ ‘ 되는데..... ’ 태식이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면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밀아지트를 만들기로 한 이유가 나를 오롯이 봐줄 친구들을 모으고 태식 또한 오롯이 그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만드는 것인데 지금 여기서 이렇게 가식적으로 행동 하는 거 자체가 어불 성설이였다. 그래도 나름 다정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실패 하니 상심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한번 으쓱 올렸다.
“ 오 네이스! ”
못 그리는 편은 아니라고 했으니 적어도 태식이 보다 잘 그릴 것은 분명했기에 손을 쥐고 파이팅 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며 좋아했다. 슬슬 포기하려던 참에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았고 뭔가 느낌도 좋았다.
“ 그걸 지금 알려주면 재미없지! ”
홍보용 포스터를 그려달라고 의뢰 하는 사람에게 지금 그걸 알려주면 재미없다는 말을 하다니 아이러니 했다.
“ 최소한의 구도....? 아하! 그런거라면 있지! 멘땅에 해딩도 재미있었을 거 같긴 한데, 머릿 속에 구상해 둔거라면 있어! 지브리풍으로 붉은 색 벽돌집 하나 그려 주면 되! 정면에서 보는 느낌으로 아 사진도 가지고 있으니깐 그거 보고 그려줘도 되고 아니면 더 나아가서 너의 창작욕구를 불태워도 되고! ”
태식이는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건물의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사진에는 동화에서 나올 법한 붉은색의 벽돌집이다. 어느 정도 연식이 되고 꾀 많은 세월이 거쳐 지나간 것을 보여 주듯이 건물을 타고 자라는 줄기 식물과 이끼 같은 것들이 보였다. 하지만 누군가 손길이 닿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단정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그런 건물이였다.
“ 이런 건물이야, 원래 사진을 그대로 쓸까도 했는데 그림도 괜찮을 거 같아서 사진으로 하나 그림으로 하나 이렇게 하려고! ”
홍보를 해달라는데 뭘 홍보하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그림을 의뢰한다는 그 아이러니함에 은우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런 방식으로 하면 안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으나 그래도 일단 말은 더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계속해서 말을 들으며 그가 보여주는 벽돌집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꽤 오래 된 집 같은데. 저 식물을 보아하니 관리를 안한지 꽤 오래 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며, 무엇보다 이끼가 끼여있는 시점에서 뭔가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가 지브리풍을 그릴 수 있을지는 별개로 치고, 홍보하는 것이 이 사진 속 집인거야? 어. 그러니까..."
자. 생각을 해보자. 갑자기 홍보를 하겠다더니 집을 그려달라고 한다. 그것도 이끼가 끼여있을 정도로 벽면 관리가 조금 덜 된 것으로 보이는 집이. 물론 아예 방치한 것은 아닌 것 같아보였으나 이끼가 낀 집은 흔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집을 홍보할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박수를 짝 쳤다.
"그러니까 이 집을 팔려는거지? 좀처럼 팔리지 않아서 이렇게 홍보그림까지 그려서 뭔가 눈에 띄게 하려는거고!'
솔직히 그게 아니고서야 뜬금없이 집을 그릴 사람을 찾을리가 없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알려주지도 않는다는 것은 뭔가 꽤 큰.. 어쩌면 조금 기밀 사항이 겹친 것이 아닐까 그는 추측했다. 물론 그 추측이 맞을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이내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런 거라면 미안해. 뭐랄까. 그런 건 나보다는 전문...그러니까 부동산 사람들이 조금 더 전문적이지 않을까? 애초에 집을 살 정도면 그림 한 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태식이는 은우의 말을 듣고 그렇게 오해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긴 대뜸 보여 주는 것이 집 왠 관리가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는 집을 보여주니 저런 반응이 당연하지 싶었다. 태식이는 순간적으로 이것을 말해야 되나 싶었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연우나 서우에게는 자신이 직접 말 할 생각이다. 하지만 비밀이게 더 마음이 콩닥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단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 어....? 뭐 비슷하지! 추가적인 정보 같은 건 내가 나중에 포토샵으로 집어 넣을 꺼니깐 그림만 그려주면 오케이! ”
말이 포토샵이지 사실은 한컴에 이미지 불러오기로 집어넣고 글자를 입력할 생각이였다. 영 멋이 안난다 싶으면 그것은 그거 대로 마음에 들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 진짜 건물 파는 게 맞다면 그게 맞지만......! 이건 조금 다른 거야! 지금은 제대로 말 못해주지만 너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할 거야! ”
자신에게 뭐하는 중이야? 라면서 먼저 말 걸어준 친절하고 그림까지 그릴 줄 아는 친구를 지금 놓치기는 싫었기에 어떻게든 흥미를 돋구어줄 만한 말을 했다. 은우 또한 이 건물과 관련된 일에 포함 되어 있다는 듯이 말하였다.
“ 뭐, 그려주기 어렵다면 어쩔 수 없지 ”
태식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이 친구의 번호라도 얻어가는 것으로 나중에 초대장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
“ 이렇게 대화한 것도 나름 인연이고 무엇보다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대 연락처 좀 줄 수 있을까? ”
"파는 것도 아니면 대체 뭐야? 무슨 동물농장이라도 지을거야? 홍보를 하겠다면 적어도 그림을 요청하는 이에게 뭘 홍보하려는건진 말해야 할 거 아니야. 목적에 따라서 그 그림의 분위기나 그런 것도 달라지는게 홍보의 기본이야. 기본."
자신이 웹툰을 홍보하기 위해서 그린 4컷 만화를 떠올리며 은우는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를테면 개그툰을 홍보하는데 진지한 분위기가 나오면 전혀 작품 홍보가 안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지금 그가 말한대로라면 일단 집을 그냥 그려달라는건데 정말 그것만으로도 괜찮냐는 듯이 태식을 빤히 바라봤다. 그 와중에 굉장히 마음에 들거라니. 대체 또 뭐란 말인가. 엑티비티한 뭔가라도 하는건가? 허나 딱히 사진으로만 보자면 그런 것을 만들 정도의 규모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릴 수는 있지만 말이지. 그러니까 일러스트 정도면 괜찮을까? 그런 거라도 괜찮다면 그것만 그려볼 수는 있긴 한데. 그거 언제까지 그려야하는건데?"
애초에 여기서 한 시간 정도 그린다고 한들 절대로 홍보가 될만한 그림이 나올 순 없었다. 적어도 집에 앉아서 구도나 그런 것을 생각하고 채색까지 전부 한다고 가정한다면 아무리 못해도 정말 가볍고 간단하게 한다는 가정하에 이틀. 제대로 사람들 눈에 확 띄게 하려고 한다면 한 달.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 아니던가.
"정말 가벼운 일러스트 정도도 괜찮다면 그려볼까? 아. 전화번호?"
자신에게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 태식의 말에 은우는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별 상관없겠거니 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물농장이라는 말에 사실 동물농장이라는 말 또한 어느정도 맞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다람쥐랑 연어.... 은우의 말을 들은 태식이는 자기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은우 말대로 홍보물을 그려야 되는 사람에게 어떤 것에 관하여 홍보해야 하는지 일체 말을 안하니 듣는 당사자는 얼마나 답답 할까? 왜 홍보물을 제작하려고 하는지 해주면 지금 답답해 하는 만큼의 만족감으로 다가올까? 여러 가지 이 프로젝트에 대하여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태식이의 욕망이 더 강해서 그런지 태식이의 머릿속 어딘가로 의문점은 금새 밀려 났다.
“ yes! 간단한 일러스트 정도면 완전 땡큐지 ”
그래도 그려준다는 말을 듣고 안도 했다. 태식이는 생각보다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하는 은우를 보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초대장을 보냈을 때 이 친구 또한 응해 주고 거기서 노는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거 같았다.
“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3월 중순까지 그려서 보내주면 되! ”
전화번호를 찍어줄 생각인지 자신에게 손을 내밀 은우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어주었다. 번호를 물어 보았을 때 거절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쿨하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을 보고 한시름 덜었다.
지금이 3월달이니 생각보다 엄청 짧은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높은 퀄러티를 바라는 것은 아닌걸까. 그렇다면 자신도 그냥 정말로 가벼운 일러스트 느낌으로 그려주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나름대로 구도를 떠올렸다. 가볍다고 해도 그냥 잠깐 잡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일단 자신도 그림을 그려서 모두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제공하는 아티스트가 아니던가. 물론 웹툰 작가를 아티스트라고 해도 좋을진 알 수 없었으나 그냥 대충 그리고 끝내는 건 역시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알았어. 그렇다면 다 그리면 파일을 네 톡으로 보내줄게."
메신저를 이용하면 그림파일 한 장 정도는 아주 손쉽게 보낼 수 있었다. 그걸 이제 어떻게 활용할지는 상대의 몫이 아니던가. 어차피 웹툰이야 세이브 원고들이 있었으니 조금 여유롭게 해도 좋겠거니 계산을 하며 그는 막 받은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은 후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 3초 후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그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좋아! 이게 내 번호. 아무튼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사실 어느 정도 수준을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역시 내 나름대로의 프라이드라고 해야할까. 아니. 아무튼 대충 그리면 뭔가 좀 그렇잖아?"
괜히 피식 웃으면서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렇고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역시 조금 다른데? 그렇게 느끼며 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애초에 소문은 크게 믿을 것이 못되는 법이었다. 역시 직접 보고 듣고 판단하는 것이 제일이라 여기며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수는 어느 정도? 아. 나는 크림빵 하나 정도면 충분한데!"
애초에 같은 반 친구가 그려달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며, 정말로 가볍게 그리는 것이니 큰 것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웹툰을 그릴 정도의 퀄러틸르 요구한다면 그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정말로 가벼운 일러스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각기 다른 빛으로 흩뿌려진 지상의 별빛이 몇 세기를 거쳐 흐려진 천공의 별을 대신하여 검은 물살의 물결을 희고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사나운 밤의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붉게 녹아내린 태양과 같이 사그라졌는지, 유난히 별이 없는 밤의 창백한 달이 외로운 점처럼 어두운 허공에 박혔다. 거센 겨울철의 물보라가 기세등등하게 해변을 밀고 거칠게 올라온다. 해인은 곱아드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을까 고민하다가 뼈를 에일 듯 무자비하게 부는 바람에 손을 빼내어 재빨리 모자를 뒤집어썼다.
몇 년을 걸쳐 알게 된 겨울날의 바다는 여전히 손님이 어색하다고 모두를 몰아내는 요새의 주인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제 밑으로 들이거나 혹은 모든 것을 쳐올려 내보낼 것처럼 몰아쳤다. 어디를 가든지 웅웅거리는 바닷바람이 집까지 따라오니, 방에 들어선 팔과 다리에는 그 한기가 묻어있었다. 해인은 내키는 대로 해랑시 전역이 제 것인 마냥 들쑤시는 바다가 싫었다. 거친 붓으로 그린 한 폭의 수묵화처럼 검고 희게 해변을 타고 넘실거리는 바다 앞에서 해인은 의지할 사람은 제게 많은 것을 숨기려고 애쓰는, 저를 사랑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남편 하나 밖에 없이 맨덜리에 막 입성한 어린 ‘나’처럼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턱 막혔다. 어디에도 바다는 존재했다. 제 방에서도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창 넘어 고요한 물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잘한 소품과 장신구, 곳곳에 자리한 횟집에서도 고풍스러운 저택에 남아 여전히 웃고 있던 그녀같이 자리에 남아 언제든지 너 따위는 밀어내고 돌아올 수 있다며 말했다.
밤늦게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추웠다. 해인은 주머니에 손을 깊게 푹 찔러넣고 멈추어 섰다. 곧 고등학생이 되는 만큼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도로 공부를 해야 했다. 언제나 새로움은 예고하지 않은 파도처럼 소녀의 마음을 타고 올라 출렁이게 했고 해인은 더 멀리 물이 닿지 않는 높은 언덕으로 내달렸다.
마음속 작은 물보라와 같이 눈 앞에 펼쳐진 큰 물보라가 넘실거린다. 달빛을 받아 흐릿한 은빛으로 물든 검은 파랑이 철썩거리며 해안에 부딪혀 부서져 내렸다. 차갑지만 상쾌한 바람이 시리게 나부끼고 검은 바다는 일렁이며 그 속에 무엇이 있을지 여전히 내보이지 않았다.
해인은 갑작스레 검은 파도에 뛰어들어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푸른 파도는 대놓고 매력적으로 빛나며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온 가족이 신나 한명 두명 차례로 바다의 손을 잡는데도 소녀는 해변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텁텁해지고 묘한 감상에 휩싸여, 제 생각은 모르고 여전히 폭군처럼 거대한 해양을 주무르는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다. 달빛은 저 홀로 동떨어져 물 한 방울도 손에 적시지 못하고 희미한 빛을 내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새 학기는 조금 달랐으면 좋겠어. 제 생각에 놀란 해인은 첫눈의 차가움에 물러선 어린아이같이 몸을 획 돌려 빠르게 집으로 돌아갔다. 밤의 물결과 같은 색의 머리를 휘날리며 돌아가는 소녀의 머리에 한 마디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작가님이라는 말에 은우는 괜히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럴 때는 정말로 입이 간질간질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말해볼까? 말할까? 하지만 말해면 또 괜히 여기저기 소문 나는 거 아닌가. 비밀이라고 아무리 당부해도 결국 퍼지던데. 그렇게 생각을 하니 결국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비밀을 그는 결국 숨기는 쪽으로 향했다.
"응. 크림빵 하나. 내가 여기서 돈을 받겠어. 뭘 받겠어."
이런 작업으로 돈을 받는다는 것이 오히려 양심없는 행동이 아닐까 싶었기에 은우는 그에 대해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허나 선금으로 크림빵 하나, 전달 받으면 크림 빵 하나 더라는 그 말에 은우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선금제도까지 말하시겠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저쪽에서 더 보수를 주겠다고 말할 것은 생각을 못했지만 딱히 자신에게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내가 이상하게 그리면 어쩌려고 그렇게 선금을 말하는거야? 아하하하. 물론 열심히 그릴 거지만, 다음에는 무작정 선금을 걸지 말고 상대방에 대한 실력을 확실하게 본 후에 걸어. 세상사 진짜 어떻게 보면 간사하게 속여서 등쳐먹으려는 이들이 많거든."
말을 마치며 은우는 쓴 웃음소리를 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아주 한 순간, 그의 눈동자가 정말로 멀고 먼 무언가를 보듯 아른한 색채를 띄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 평소처럼 정말 한없이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그럼 크림빵 하나 받을게!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정말로 열심히 해야겠네."
주겠다고 했으니 거절은 하지 않겠다고 그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이어 그는 저 편에 있는 편의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 못 그리면 또 어때? 홍보물에는 나의 의도만 들어가 있으면 난 만족 한다는 말씀! 못 그리면 못 그린 만큼 흥미롭지 않겠어? 막 이런 건물이 있어 하고 더 찾아오는 거지! ”
태식이는 지갑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금을 확인 하기 시작했다. 아지트에 들어간 돈이 많이 자기 수중에 돈이 적기는 하지만 크림빵 두 개를 못 사줄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다. 그리고 피씨방에서 먹는 음료수 같은 것을 포기 해도 넉넉히 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피씨방에서 배는 좀 허전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 마음은 풍족하니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가 아닌가!
“ 우리 작가님 말대로 간사하게 속여서 등쳐먹으려는 애들 많지! 이미 하도 많이 당해서 뒷통수가 얼얼하지... 하지만 나한테 뒷통수 친애들은 지금 얼굴이 얼얼할 거야! ”
‘난 사람 보고 선금 준거라서 정당한 거래지!’ 라고 끝까지 말하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왠지 저 말을 하면 친해지기 보다는 생각보다 서먹 해지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저렇게 말하고 태식이 자신이 먼저 어색해 할꺼 같았다. 태식이의 기준으로 생각 보다 오글 거렸기 때문이다. 정말로 열심히 하겠다는 말에 태식이는 대답 대신에 엄지를 치켜 세우며 보여 주었고 은우가 가리킨 편의점을 향하여 앞장 서서 걸어 갔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건물을 홍보하려는거야. 적어도 그런 것이 알려지면 더 홍보 효과가 좋을 것 같은데. 뭐라고 물어도 안 가르쳐줄 것 같으니 포기할래."
굳이 억지로 캐묻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답을 들어봐야 딱히 흥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굳이 더 캐묻지 않으며 아무렴 어떠랴 하는 마음을 품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건물 하나 그렸다고 홍보 효과가 생기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깨버릴 마음 또한 그에겐 없었다. 그러다가 논쟁이라도 벌어지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고 그는 그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질색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많은 것을 목구멍 속으로 꿀꺽 삼켰다.
"세상사 그렇게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참 좋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알아서 잘 한다는 것 같으니까 나도 굳이 말은 아껴볼까!"
굳이 더 깊은 말은 하지 않으며 은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대신 신나는 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해 사푼사푼 걸어갔고 편의점의 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예쁘게 울렸고 그는 망설임없이 빵을 파는 코너로 간 후에 거기서 빵 하나를 집었다. 몇 개 남아있는 크림빵이었다.
"그럼 난 이거! 난 이게 제일 맛있더라! 아. 나중에 다 받고 못 준다 이러기 없기다!"
물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분위기상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 그는 일부러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내며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가 물건을 살 것이 있으면 살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 위해서라도.
계속 물어봤다면 태식이는 결국에는 말했을 것이다. 두 번 정도만 더 물어 봤다면 굳이 말 안해도 될 정보까지 TMI하게 말했을 것이다. 은우 입에서 먼저 포기한다는 말이 나오자 마음 속으로는 안심했다. 물어봤으면 인생사까지 말한 뻔 은우 말따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안 모이거나 아지트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다거나 다른의도로 사용 된다거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예 무로 돌아가 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오호 맛잘알! 난 옛날 크림빵.... 빵이 푸석거리고 날라다녀서 오히려 좋더라고... ”
은우는 이미 자신이 먹을 빵을 골랐고 태식이 또한 자신이 먹을 크림빵하나와 1+1로 묶어서 파는 포도맛 탄산음료수를 골랐다. 괜히 목이 퍽퍽 할 때 없으면 아쉬운 탄산음료수로
“ 그 크림빵 배터지도록 먹게 만들어주지 ”
아지트에 간식창고에 박스 단위로 넣어 놓기로 마음속으로 메모 했다.
“ 사실 홍보 효과가 그렇게 안 쌔도 상관 없어, 볼 사람들만 보면 되는 거라 일부로 외진 곳에 붙 일 생각이야! 일상속 소소한 비일상이 목표 라서 ”
태식이는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음료수 하나를 은우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는데 신나는 비트에 올드하게 느껴지는 음질이 흘러 나왔다.
>>680 어렸을 때라면 어린 휘야랑 형동생 하면서 놀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상처가 났다면 휘야가 그때 충격을 받아서 수술자국을 이따금씩 바라볼지도 모르겠어요.. 태식이 소문에도 넌 그런 애가 아닌디. 하구요. 아참, 어린 휘야는 조금 날카롭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점 괜찮으실까요?
3월 초라면 애매하고 또 애매한 날씨다. 겨울이면 겨울일 것이고 봄이면 봄일 것이지 얇게 입으면 물코 훌쩍이고 두텁게 입으면 더워 땀 흘리기 때문이다. 적당한 대안 찾겠다고 아침부터 옷장을 뒤집고 찾아 입은 저지가 그렇다고 마냥 적당했냐면 그건 또 아닌니다. 아침에는 쌀쌀한 바람에 아따, 추븝다만 여러번 되내이고 4교시 체육 나가니 또 덥다가 추워서 슬리퍼 직직 끌어대다 수업 끝나기 10분 전에 기어이 성질 내는 것이다.
"염병. 날씨 한 번 지랄맞네.."
날씨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 너는 핸드폰 한 번 슬쩍 꺼내서 시간을 보고 이젠 5분 전에 본관으로 슬슬 걸어가려 했다. 야, 지금 가면 벌점이래! 다른 친구 하나가 어딜 가냐며 제지해도 손 흔들고 중지를 치켜 올리었다.
"어차피 벌점 X됐는디 뭐가 더 중요하겄냐." "아야. 태식이 있냐."
2학년 반에 대뜸 처들어간 건 점심시간 종이 치기 무섭게 문이 열렸을 때다. 와라락 쏟아지는 사람 헤치고 반으로 들어가니 남은 사람끼리 흘긋흘긋 시선 몰린다. 누가 태식이를 찾나 싶은 것도 있으나 명찰이 3학년이기 때문이다. 너 주머니에 손 쑤셔넣고 눈 게슴츠레 뜬다.
태식이 그냥 누어서 자는 척 하고 있었다. 학교 급식에서 나오는 단백질양으로 자신을 만족 시킬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순수한 단백질이 아니였기에 싫었다. 그렇다고 태식이가 탄수화물을 함유한 음식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만들고 더 많은 근육량을 만들어 놓고 싶었기에 식단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따가 조심스럽게 집에서 가져온 닭가슴살과 파프리카를 먹으려고 했지만 어디선가 태식이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사투리가 들려온다.
“ 형! 당근 있지! ”
1학년때부터 태식이네 반까지 찾아와서 태식이를 찾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시비이거나 일부러 싸움을 걸러오는 무리가 많았었다, 하지만 항상 예외는 존재 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장난치고 심심치 않게 알고 지내고 있는 휘야였다.
“ 밥.....! 프로틴! ”
태식이는 서둘러 자신의 가방에서 두 개의 통을 꺼냈다. 위에서 서술 했다 싶이 하나의 통에는 닭가슴살 샐러드가 있었고 다른 한 통에는 밤고구마가 있었다. 휘야를 보고 태식이에게 떠오른 것은 바로 마라탕이였다. 오늘 운동양을 배로 늘리고 있다가 마라탕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고 말할까 했지만 꾹 참았다. 근육량을 늘릴려면 어쩔 수 없기에...
“ 급식 싫다고 하는 거 보니깐 매점? ”
태식이는 무언가 까먹에 생각 났는지 다시 가방에 손을 넣어서 종합비타민 약을 두 개 꺼내어 작은 지퍼락에 집어넣고 책상 위에 올려 놓았던 커다란 물병을 집어 들었다. 점심 먹으러 가느데 필요한 짐이 몇 개 인지 태식이의 손은 그의 점심으로 가득했다.
“ 형,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만들고 있는데 형도 참여 할꺼지? ”
그게 뭐냐 질문 해도 비밀이라고 할 예정이지만 왠지 저 형이면 딱히 뭐 안물어보고 승낙 할 것 만 같았다.
때는 3월 초. 겨울에 잡히는 감성돔. 오늘따라 감성돔을 회로 먹고싶었다. 하지만 근처의 횟집에서 사서 먹기에는 감성돔은 매우 비싼 가격. kg에 적어도 2만 5천원은 주어야 하는 그 비싼 어류는 학생의 용돈으로 사먹기에는 너무나도 비싼 사치품과 같았다. 게다가 한번 먹기 시작하면 눈 깜짝도 못하고 그대로 증발하는 작은 량은 성장중인 고등학생의 식성으로는 도저히 그 양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구해야지."
배를 타고 더 멀리 가서 낚시를 하거나 그물을 펼치는 어부들이야 많이 볼 수 있겠지만 항구 근처에서 겨우겨우 구한 미끼로 그것을 낚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무언가 낚인다고 하여도 잡어이거나 너무 작아서 먹을 수 없을 물건 들 밖에 없었다. 다 모아서 잡어탕을 끓일 수야 있겠다마는..
나는 지금 당장 감성돔을 먹고싶다.
"덜덜덜."
곧 봄이 온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겨울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날씨. 얇은 교복으로 바닷바람을 계속 맞는건 역시나 고된 일 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마지막 입질에 큰 감성돔이..
하지만 대수는 잊고있었다. 애초부터 감성돔이라는 어종은 큰 한 개체가 나올 수 없는 어종이라는 사실을.
"잘도 타네.."
그리고 가끔 사람들이 피서차 오는 바닷가 근처에서는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핑을 하고있는? 아니, 준비하는 여성이 보였다. 정대수, 그라면 이 날씨라면 절대로 그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가까이 하지 않을 것 이었다. 당연히 무더운 여름에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다.
>>755 그건 내일 상황 보고 일상을 구해볼까..라는 말이었는데 말이지! 아무튼 글쎄. 뭔가 화이트데이가 4판부터 시작인 것을 보면 되게 애매하단 말이지. 화이트데이 일상 가능하면 해보고 싶긴 한데! 해인주 혹시 정말로 다이스를 가지고 은우랑 데스캔디룰렛 해볼래? 다이스가 맛있는 사탕을 선물할지, 아니면 타바스코를 잔뜩 뿌리다 못해 아주 듬뿍 담근 사탕을 선물할지 정해준다! 아. 물론 나하고 정말로 시간이 맞을 때라면 말이야! 뭔가 지금부터 돌리기로 확정하면 약간 찜해놓은 느낌이라서 시간 안 맞으면 계속 기다리게 할 것 같기도 하고! 결론은 다른 이와 돌려도 괜찮다라는 뭐 그런 이야기!
코다리 강정은 이름만 강정이라 먹기가 싫다. 암만 겉 번지르르한 껍질 뒤집어쓴다 한들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급식에서나 느낄 수 있는 질깃한 식감이 특히 그렇다. 고추잡채도 그렇고, 학생의 호불호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급식은 포기하고 내일 나온다는 스파게티나 노려야겠다.
"여전허네. 오늘은 쌈박질 안혔구."
안부차 묻는 얘기지만 진심 어느정도 있다. 너 어떤 사람이냐 하면 태식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다. 나름 동생이라 생각하는 아인데 소문 안 좋다고 질 떨어지는 것들이 동급이라 생각해 치근대니 여간 곤란한 것이다. 프로틴 소리 하며 희멀건 닭가슴살 좍좍 찢어 얹은 샐러드와 고구마를 보니 절로 속이 답답하다. 저걸 먹는다니, 너 평소 마라 아니면 먹는 것도 귀찮아 샐러드는 이따금 사먹는다지만 매일 먹으라 하면 질겁할 테다.
"어야. 스테비아 빵이나 묵을까 허는디, 맛스타는 매일 떨어지잖아."
전자레인지에 40초 돌리면 빵은 물렁하고 매운 소스와 머스터드 소스는 혀를 데게 한다. 싸구려 소시지 든, 맛있는데 맛없는 스테비아 빵은 5교시 지나기도 전에 금세 배고프게 하지만 500원 하는 나나콘 살 테니 괜찮다.
"아따, 바리바리 싸들고 가네. 뭐 허는진 몰라두 혀야지."
품안 가득한 물병이며 락앤락이며 보다 슬리퍼 지익 끌어 한 발 내딘다. 뭘 하는지는 몰라도 나쁜 건 아닐 테니 괜찮겠다. 어차피 부활동도 없고.
"근디 보고서 내고 그런 거면 활동은 어려울 텐데. 고3.. 아, 어차피 나 공부 안 하는구나."
학원도 안 다니지, 인강은 듣다 말았지, 남들 다 부활동이며 열심히 하는데 혼자만 중3 같은 것이 너다. 그래도 상관 없다. 적당히 일 찾겠지. 문 나서자마자 열린 복도 창문에 바람 쐑 지나가자 중얼거린다. 씨벌거 존나 춥네..
3월초.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 서핑을 하기에 이른 감이 있다. 그럼에도 다운은 착실히 해변에 나왔다. 흠. 역시 춥군. 돌아갈까. 분명 집에 있을때는 그토록 하고 싶은게 서핑이었는데 이렇게 바다에 와서 바닷물에 몸을 담구니 후회막심이다. 얌전히 수영장이나 가든가 실내 운동을 찾아봤어야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하듯이 서프 보드를 꺼냈으면 서핑을 해야하는 것이 옳다. 결론을 내린 다운은 파도를 보다 적당히 자세를 잡았다.
역시 괜히 왔다. 내가 거센 해풍을 잠시 얕본 모양이다. 칼날같은 바람은 뼈에도 세겨질 듯이 차다. 역시 그만두자. XX게 춥다. 적당히 타는 척 하다가 돌아가자. 그래도 바로 돌아가기 애매한 것이 기껏 서핑타겠다고 준비해서 나왔는데 30분도 안타고 집에 돌아가면 얼마나 없어보이겠는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때문은 아니고 저기 서 있는 남학생 때문이다. 보아하니 같은 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몸만 담구고 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공부하겠다고 독서실 와서 10분도 안돼서 돌아가는 모습이 낯부끄럽듯이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운은 그렇게 파도를 타면서도 남학생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언제쯤 사라지나 관찰하고 있는 것이... 맞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는데 하는 모습이 마치 낚시를 하는 것 같아서... 잠깐, 너무 가깝지 않나?
"아차."
순간 당황한 나머지 중심을 잃고 만다. 대수와 부딪칠뻔 한걸 가까스로 무마한 대신 다운은 볼성사납게 해변을 향해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나를 반기는 무수한 거품과 모래들. ...춥고 따갑다. 그렇게 일어난 다운의 모습은 결코 멀쩡해보이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까지 모래가 붙어있는 모습에 추위때문에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그럼에도 팔짱을 낀 모습이라든가 앙 다문 입술에 움푹 들어가 그늘진 눈 두덩이를 보자니 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방금 넘어진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뻔뻔당당했냐면 주변사람들이 '어라? 방금 넘어진 거 아니었나? 내가 잘못봤나?'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온 몸에 붙은 모래때문에 착각이 아닌건 확실하긴 하다만.
오호, 역시 이 추운 날씨에 하러 온 이유가 있었는지 그 여성은 보기에 파도를 잘 타고 있었다. 딱 봐도 아직 미성년자인..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데도 낚시하다가 보면 대충 보이는 대학생들보다 더 잘 타는 것 같았다. 애초에 대학생들은 서핑이 아니라 바다 근처에서 마시는 술과 안주를 더 좋아하더라. 하지만 잘 타는 그 사람과 달리 낚시대에서는 입질이 오지 않았다.
"흐음."
이는 분명 파도를 타고있는 사람이 있어 근처에 있는 물고기들이 달아났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건 분명 나의 자리선정이 나쁜게 아니야. 이렇게까지 입질이 안오는게 영악한 물고기가 미끼만 살금살금 먹고 도망친게 아닐까 싶어 낚시줄을 올려 확인하는게 좋을까 하고 낚시대를 바라보니 앞쪽에서 그 여성이 마치 충돌할 듯 파도를 타고 다가왔다. 부딫히겠다! 하고 눈울 감았으나 그 충격이 오지 않아 의아해하며 눈을 뜨니 상당히 재밌는 모습을 한 그 사람을 해변에서 볼 수 있었다.
"푸큽."
아니지, 웃음을 참아야지.
겨우겨우 심호흡을 하며 참아내고 보니 일어서서 뭘 하고있느냐는 말에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낚시를..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물통과 낚시대를 든 사람에게 도대체 뭘 물어보는걸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 진의를 파악하려 했으나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웃음을 참아주다니 과연 강호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다. 아니, 바다의 도리인가. 글너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운의 얼굴에는 균열 한 점 없었다. 대신 손을 올려 잠시 양해를 구하더니 몸에 묻은 모래를 바람에 날려보냈다. 물이 묻어서 그런지 모래를 떼어내는게 쉽지 않았다. 젠장... 다운이 작게 중얼거린다.
"낚시를? 신기하네. 내 주변에는 낚시하는 애 하나 없었거든."
진의를 파악하려는 대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다운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뭐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정도. 사실 다시 바다로 돌아가기도 뭣하고 부딪힐뻔 했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도 뭣해서 말 한 번 걸었을 뿐이다. 아, 맞다. 사과. 다운은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방금 일은 미안해. 원래는 잘 안 이러는데 잠시 딴 생각을 했어."
사과치고는 과하게 침착하고 느린 감이 없잖아 싶지만... 저 비장한 얼굴을 봐라. 진지하면 진지했지 가볍게 사과하는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얼렁뚱땅 물에 술탄 듯한 사과를 마치고서야 원래 흐름으로 돌아와서,
"여기서도 고기가 잡혀?"
하고 묻는다. 더 묻는 대신에 터벅터벅 걸어와 턱하니 대수 곁에 섰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자리를 바꾼 것이지만 설명이 너무 적었다. 힐끗 시선을 돌려 물통을 가만히 본다. ...아직 하나도 못 잡은 것 같다고 말하는 건 실례겠지. 희미한 사회성을 발휘하여 말을 순화하기로 했다.
"낚시는 보기와 달리 쉽지 않다고 들었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운의 영역이 크다더라."
대충 아무것도 잡지 못한 걸로 너무 상심말라는 말뜻이다. 앞뒤 다 잘라먹고 이렇게 말하니 그 목적이 조금 훼손되는 것 같다만... 다운은 그걸 몰랐다.
"나도 주변에 서핑을 하는 사람은 없었어. 하지만 겨울낚시보다 겨울서핑이 더 신기하다고 생각되는데."
겨울의 바닷바람이 매섭다지만 바닷물은 더 심각하다. 그러다 저체온증이라고 오면 어떻게 하려고. 모습을 보아하니 그냥 샤워하고 몸을 씻을 타월정도나 가져온거라고 생각되었다.
"그건 괜찮다고 생각해. 결국 고꾸라진건 너 혼자였기도 했고."
고기가 잡히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통 안에는 물고기는 있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잡았던 작은 물고기라도 그냥 놓아주지 않고 넣어뒀어야 했을까. 뭔가 여태까지 아무것도 잡지 못했느냐고 추궁을 받는 것 같아서 억울 한 기분이었다. 그저 감성돔이 잡히지 않았을 뿐, 충분히 탕을 끓일만한 양을 낚았는데.
"많이 잡았는데. 그냥 놓아줬으니 비어있는거고."
하지만 지금 그걸 증명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라면 근처에서 낚시를 하고있는 다른 사람이 증명할 수 있었겠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주변에 낚시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다운은 반박하기 위해 팔짱을 풀고 검지 손가락을 올렸다. 3월달은 봄의 시작이니부터 날이 따뜻해진 것 같아서 어쩌고 저쩌고...
"..."
그러나 딱히 설득력 있는 것 같지 않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 손을 다시 접고 팔짱을 낀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지나치게 솔직한 답을 내놓기로 했다. 다운은 정직의 미덕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래서 후회중이야."
추운데다가 고꾸라 넘어지기까지 했다. 나도 서핑을 좋아하지만 '진짜'는 되지 못한 걸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괜찮다. 이 일을 교훈 삼아 겨울 서핑은 시도도 하지 말아야지. 긍정적인 생각을 해서일까 다운은 생기를 되찾는다.
"아...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순순히 믿겠다 말했지만 다운의 얼굴에 미심쩍다는 기색이 잠깐 머문다. 뭔가 안쓰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운은 드물게 웃으며 손에 힘을 꽉 줬다. "화이팅!" ...이러면 더 상처라는 사실을 다운은 모른다. 다운은 조금 더 고민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다시 닫았다. 분명 '힘내!'라든지 '그래도 이 나이에 그정도면 엄청나지!'따위의 말을 하고 싶었던게 분명했다. 다운이 과묵해서 다행이었다.
"대단하네. 불가능해보이는 목표라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보면 언젠가 이룰 수 있을거야. 일단 시도한 거에 의의를 두자고."
감명을 받아서인가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전에 핀트는 약간 나간 것 같지만 다운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운은 대수를 초보 낚시꾼으로 멋대로 오해하는 중이다. 감성돔은 비싼 만큼 잡기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주변에 낚시 하는 사람 하나 없는 걸로 보아 이곳은 낚시하기 좋은 스팟이 아니라 오해 중이다. 무엇보다도 대수는 자기 또래 아닌가. 낚시 경험 많아보이는 낚시 고수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다. 대수에게는 억울한 이야기겠지만.
하지만 말을 하고 있는 본인도 감성돔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계속 바닷바람을 맞고있는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수확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차라리 적은 시간이라도 서핑을 즐긴 그녀가 상황은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 미심쩍다는 얼굴을 뒤로하고 그는 예전에 낚시꾼들이 쓰다가 방치 해 놓은듯한 고정대에 낚시대를 고정시키고 불이라도 쬐라는 듯 가지고있던 버너의 불을 피웠다.
"(감성돔은)겨울에 맛있어."
자신이 감성돔을 잡으려는 이유를 말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눈길을 주며 쟁여두었던 RTA 라고 써져있는 라면 두 봉지를 꺼내 작은 냄비에 물과 같이 넣었다. 곧이어 냄비에서는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감성돔이 필요하단말이야."
게다가 불가능한 목표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걸까. 어디 전설의 포켓몬을 찾는것도 아니고 그냥 물고기 좀 낚겠다는데 불가능하다고? 역시 많이 억울했다.
아니지, 실력으로 보여주면 그만이다. 지금까지 운이 나쁜거지 슬슬 낚일때도 되었을테고 딱 보니 돌돔이랑 감성돔도 구별 못할 것 같은데 다른걸 낚고 감성돔이라고 우기면 그만이기도 했다.
겨울 아닌데... 봄바다인데... 라고 말하기엔 날이 너무 추웠다. 오늘 서핑은 글렀다고 생각하고 다운은 주섬주섬 수건-담요에 가까운-을 꺼내 몸에 둘렀다. 다행인 점은 상대방이 버너의 불을 피우면서 몸 녹일 곳을 찾았다는 점이다. 다운은 몸을 쪼그려 버너로 손을 내밀었다.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상 자체는 달라지지는 않아 부드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평소처럼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는 또 아니었다. 다운의 시선이 잠시 라면 봉지에 머문다. 라면 두 개. 사람 두 명. 김칫국 마시고 싶지는 않지만 각자 하나씩 먹는게 자연스러웠다.
"친절하구나. 이름이 뭐야? 나중에 내가 밥 한 번 살게."
다운은 라면까지 얻어먹고 입 싹 닫을 정도로 은혜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이랬는데 혼자 두 개 먹는 거라하면 그냥 입 싹 닫겠다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통성명이나 하기로 했다. 주섬주섬 라면 끓이는 걸 돕기도 했다.
"지금? 오... 그래..............."
아무리 눈치 없는 다운이라 할지라도 분위기가 이상한 걸 깨닫는다. 슬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더니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다운이 생선에 문외한이므로 설령 돌돔이 아니더라도 아무거나 큰 거 낚아놓고 감성돔이라 우기면 믿어줄 것이다. 대수에게는 다행인 일일지도.
"..."
바다가 땅과 맞물리며 들리는 파찰음. 모래를 쓸며 떠나가는 물보라가 소란스럽다. 그 뒤로 보글보글 라면 끓는 소리까지. 다운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고가는 말은 줄었지만 낚시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분위기라 믿는다.
갑자기 친절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를 생각하니 지금 끓기 시작한 이 라면을 먹을 심산이라고 알게되었다. 나중에 밥을 사준다는데 거기서 이 라면은 내가 혼자 먹겠다고 하는것도 치사한 일이어서 입을 이죽거리며 나무젓가락을 두개 꺼냈다. 게다가 끓이는걸 도와주기까지 하는데 이미 이 라면을 제것이라고 생각하는게 틀림없었다.
"..."
파도소리와 어색한 침묵 그리고 라면끓는 소리가 들리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떻게 먹을 생각이냐는 말에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집에 가져가서 회로 먹을거야."
탕을 끓이는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추운 겨울날씨에는 그게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아니면 눈 앞에 있는 이 라면의 온기때문에 그렇게 느끼는걸지도 몰랐다. 있지도 않는 감성돔의 처리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데 드디어 입질이 왔다. 갑자기 낚시대에서 뭔가를 끌어들이는 힘이 느껴졌다.
"어어. 오? 오오?"
수면사이로 발버둥치는 그 물고기의 모습은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돔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나타났구나.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눈웃음을 지으며 낚시줄을 팽팽히 해 물고기를 수면 위로 올릴 준비를 했다.
라고 말하며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익숙한 이름이다. 정대수. 정대수. 정대수... 아, 같은 반이었던가? 아직 반 아이들 이름과 얼굴을 다 외우지 못한 상태라 물에 잉크 탄 듯 기억이 희미하다. 뭐 무슨 상관이냐. 학교에서 인사할 친구 하나 더 생긴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회로? 직접 회로 뜨게? 사시미칼로 이렇게 슥슥?"
대충 손으로 탁탁 써는 모양을 보여주는데 무척 진지한 얼굴과 달리 자세가 엉성하다. 저런 식으로 회떠는 걸 표현하는 걸로 보아 회뜨기 역시 전혀 모르는 게 틀림 없었다. 아님 말고. 작게 덧붙이던 차에 갑자기 상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낚시대 본 걸로 입질이 왔다는 건 당연히 모르고 대충 상대의 반응으로 무언가 잡혔거니 생각하던 차였다. 오. 멍청한 얼굴을 하며 다운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뭐야. 진짜로 잡히는 거야?"
뭔지는 모르겠고 엄청난 일인 것 같으니 박수를 치겠다 상태다. 사실 자리에 일어나면서 이미 박수를 치고 있었다. 라면은 이미 뒷전인 상태이다.
중얼거리는듯 말하며 낚시대를 고쳐잡았다. 낚시대에 걸린 이 물고기는 힘이 그리 센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700g 정도는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작지만 맛있을 그 야들야들한 고기를 상상했다. 분명히 맛있겠지. 이렇게 고생해서 낚는거니 엄청나게 맛있을거야.
"딱 낚는다고 했잖아?"
정말로 자신있는 표정으로 힘차게 낚시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낚시줄에 걸린 그 물고기는 역시나 감성돔이었다. 역시! 뭔가 느낌이 좋았지. 이걸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줄을 감는데 이상하게 물고기가 작아보였다. 그리고 잡아온 이 감성돔의 크기는 사람 손을 두개로 겹쳐놔야 겨우 비슷할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에휴."
낚인건 감성돔이었지만 너무 작아서 회로 먹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기대감은 곧이어 실망감으로 바뀌었고, 그래도 이거라도 가져가서 탕감으로 쓰자고 생각하며 통 안에 넣었다.
"봐봐! 낚이잖아."
그렇게 그는 크기가 너무 조그만해서 그렇지 낚긴 낚았다고 자기변호를 시작했다. 라면이 부는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 흘러넘치는 자신감, 근거는 있었다. 정시러라고 내신은 본체만체, 벌점도 차곡차곡 쌓아서 그렇지 모범생은 안 되어도 우등생은 되었다. 당당하고 뻔뻔한 대사를 친 후에는 ‘나하하하’ 대신 낄낄거리는 소리 위에 화음을 쌓는다. 까르륵 서로 즐거워 웃는 소리 합창만큼 듣기 좋은 합창 소리도 없지 않을까.
“히잉. 겨울에만 눈 오라는 법은 없는데!”
지금도 눈 오고 있는 것처럼. 이번에는 폭설 오면 좋겠다고, 겨울 폭설을 바라며 말한 것이긴 했지만 백조가 봄인데 그러면 곤란하다고 하니 바로 생각이 튀었다. 봄에도 폭설 오면 좋겠다고 속으로 바랐다. 봄 폭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위에 눈 쌓이면 그것도 멋이다! 꽃놀이 하다가 눈놀이도 할 수 있으면 즐거움이 합이 되고 배가 되겠지! 그리고서야 도시락 메뉴를 고민해본다. 꽃놀이 도시락, 무난하게 샌드위치에서 시작해 쇼룽보우까지 흘러간다. 뭐, 그때 되면 알겠지!
“진짜?”
서우는 들고 있던 슈크림 붕어빵을 입 속으로 우겨넣었다.
“마저 먹고는 없어! 가면서 먹어!”
팔짱도 제대로 꼈고, 서우는 다시 방송실로 백조를 끌고 가려고 한다. 점심방송 마감 독촉을 위해서다. 5교시는 분식집이다! 이렇게 설레는 말이 있다니,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봄눈을 맞은 것과 견주어도 지지는 않을 것 같다. 분식집 수업을 열심히 들으러 가보자.
아진은 서우와 함께 시원하게 웃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오랫동안 먼지 핀 골방에 들어앉아 있다가 창문을 열어젖혀놓고 밖으로 나온 듯한 그런 상쾌함이 느껴졌다.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골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못 느낄 건 아니지만, 역시나 사람은 바깥공기를 쐬어줘야 하나 보다. 쐴 수 있을 때 실컷 쐬어둬서 나쁠 것은 없겠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아진은 생각했다.
"구왁!"
슈붕을 호로롭 흡입해버리는 서우를 새심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진은 서우의 파워풀한 스트록에 순식간에 거의 무게중심이 무너지다시피 하며 우찔근 이끌렸다. 다행히도 서우에 뒤지지 않는 민첩성과 균형감각은 어디 가지 않아서 용케도 왈칵 자빠링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고, 꼭 쥐고 있던 봉지 안의 소중한 팥붕도 건사해냈다.
"아니 내가 너처럼 볼주머니가 있는 줄 아냐!"
하고 끌려가면서도, 아진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방송 마감하면서 호로록 먹어버리면 되겠지. 꽃놀이라. 토스트를 싸도 좋겠고, 오늘처럼 붕어빵을 사먹어도 좋을 것 같고- 그렇지만 역시 서우램쥐 먹보를 생각해보면 든든하게 도시락을 싸가는 것이- 그것보다는 지금 떡볶이집 메뉴 먼저 생각해봐야겠다. 지금은 떡볶이집에서 5교시를 보내기로 했지 않은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서우와 함께 노는 순간은 언제라도 질리지 않았다. 매 순간이 설레는 모험이었고, 행복한 기억이었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좋은 하루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진의 얼굴에선 활짝 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아진이가 더 쿰쿰하게 가라앉아있는 버섯같은 애였는데 같이 다니는 서우가 너무 풋풋하고 발랄하게 꽥꽥거려서 전성기 텐션이 나와버렸구마이... 아아 초봄인데 이 과일 한 입 크게 베어먹는 느낌의 상큼한 청춘일상... 나그에 청춘이 여깄었구먼... 이 할미한테 청춘 한 자락 안겨줘서 고마우이. 나는 이제 새벽에 뜬금없이 깨어버린 잠을 마저 자러 가보겠으...
일찍 일어나야지~~ 했는데 지금 일어났다~~~~!! ☺️☺️☺️ 다들 좋은 아침.......... 하고 싶지만 점심~~~
>>805-806 막레 잘 받았어~~~! ☺️☺️ 나른하고 게으른 아진이도 보고 싶지만 독백과 다른 캐릭터와의 일상 속 아진이를 쳐다보는 수밖에 없는건가....!!!! 🥲 청춘 한 자락 안겨주기는~~~~~ 아진이랑 같이 만든거지~~~~!!! 서우랑 놀아줘서 고맙구 일상 돌리느라 수고햇서~~~~! 🥰
다운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꾸 딴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학생이 감성돔을 낚는것도 이상하지 않나? 팔짱을 끼고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세상 살이가 다 저 같지 않아서 이해하지 못할 일이 생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운은 단백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더 딴지를 걸고 싶어도 못 거는 상황이었다.
"그러게 너 생각보다 낚시 잘하는구나? 재능 있나봐."
다운은 거의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얼굴에 감정은 희미한데에 반해 박수소리만큼은 우렁차다. 잡은 감성돔를 뽐내는 대수에 모습을 보니 자신이 잡은 것 마냥 뿌듯했다. 과연 초심자의 운이 대단하구나. 대수가 들었다면 기함을 토할 생각이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운은 자신의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미묘하게 자화자찬을 하고 결국은 얻은게 고작 이 작은 감성돔 1개라는건 조금 상황이 안타까웠다. 고작 이거 한 마리 낚았다고 이런식으로 칭찬을 받는것도 참 한심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뻔뻔스럽다고 해야할지. 크기는 작지만 결국에는 잡았으니 이걸로 만족하는게 좋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오늘은 날이 아닐지도 모르고.
"큰놈도 나오긴 나오는데 그건 찾기가 힘들어."
결국은 1kg도 안되는게 대부분이니 1마리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아."
불었다는 그녀의 말에 밑을 바라보니 이미 미적지근하고 면이 딱딱해진 라면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나무젓가락을 두개로 나뉘어 라면을 한입 먹었다.
비 내리었다. 아침부터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잠 깨었다. 피부 조금만 스쳐도 축축하고 좋은 냄새보다 좋지 않은 냄새가 코 찌른다. 술 바닥에 엎고 보일러 때문에 끈끈하게 눌어붙은 찌든 내, 희미한 구토 냄새 맡노라면 창문 열고 싶으나 저놈의 비 세차게 내려 환기도 못할 노릇이다. 반박자 늦게 따라오는 묵직한 머리 일으키면서 눈 끔뻑, 끔뻑 감았다 뜨니 먹먹한 귀 사이로 눈 흘겼다. 코 고는 소리 귀 쟁쟁하고 침대니 바닥이니 엎어져있다.
"염병.."
들키면 X될 일을 나까지 혔네. 자취하던 방 전경 보며 얼굴 싸쥔다.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나쁘고 짜증이 치민다. 머리가 아프고 눅눅하며 비 오는 날이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그놈의 어른이 무언지 함 겪어보잠서 치기 어린 생각에 저지른 일탈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생각 할 여력 없다. 누가 분명히 울었고 소리 지르며 싸웠으며 뭔가 깨지는 소리도 나였지만 지금 내 알 바가 아니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학교 가는 월요일이었음 단체로 무단결석일 뻔한 상황이었다는 것과 방금 온 연락이 중요하다. 머리 싸쥐며 짐승 울듯 우우 소리 내는 여학우 S 양 앞에 쪼그려 앉아 어깨 툭툭 친다.
"아야, 인나라. 해 중천이다." "아, 씨.. 머리 아퍼.. 작작 흔들어.." "응, 네 업보죠? 인나. 대강 정리혀야지." "개짜증나.." "그랴, 짜증나지? 안 인나믄 느이 다 내쫓는다." "아 머리 아프다고!!" "할아방 온다고 말을 혀야겄냐?"
그것이 벌써 너 1학년 때의 일이다. 애들 다 배웅하고 뒷수습 나름 잘 했다 생각했는데 너는 집에 들어온 할아버지께 단박에 들키어 목탁 대용으로 쓰인 뒷이야기 있다. 불자가 살생 저지르믄 안 되는디 날 죽일라 허네, 하고 외쳐도 삭막한 도시 부처도 도망갔는지 아무도 안 도왔다. 너 꿈에서 깨어 눈 게슴츠레 뜨고 몸 일으킨다. 오늘 또 비가 왔다구 열어둔 베란다 창문 사이 눅눅한 공기 사이로 어디 집인지 모르겠으나 희미한 전 부치는 기름 내음 올라온다.
화이트데이가 되었다. 옛날에야 발렌타인데이때 초콜릿을 받은 남자애가 사탕으로 돌려주는 날이었지만 요즘 시대에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그냥 친구끼리 사탕을 돌리는 날로 바뀐 지금 딱히 큰 의미가 있는 날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좋아하는 이에게 특별한 사탕을 선물하거나 그런 일은 있겠지만 적어도 은우에겐 그 정도의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잖아."
은우의 행동지론은 언제나 어디서나 흥미와 즐거움이었다.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정말 별별 짓을 다하는 이인만큼 오늘 같은 날을 그냥 넘기는 일 따윈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미리 1주일전부터 준비한 사탕을 가득 통 안에 넣어두고 학교에 등교했다. 정말로 많은 알사탕을 1주일 전부터 최대한 많이 확보해서 절반은 그대로, 절반은 타바스코 소스를 아주 듬뿍 바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소스통 안에 담궈서 10분 동안 데굴데굴 굴린 사탕이었다. 당연히 그 맛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사탕을 준비한 그는 휘파람을 불며 가만히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낯익은 후배 ㅡ아마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1학년 선서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ㅡ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오. 거기에 있는 사탕을 받으실 후배님은 혹시 바쁘신가? 바쁘지 않다면 나랑 30분만 놀자!"
화이트데이가 되었다. 중학생때야 서로 아는 친구들이 많았으니 여기저기서 터지는 커플들의 이벤트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막 신입생이 된 만큼 이미 친해진 몇몇 아이들을 빼놓고는 쭈뼛거리면서 하나 먹을래? 라고 물어보는 것이 다였다. 작년에 누군가의 이벤트를 도와주겠다고 친구들과 수제 초콜릿까지 만들어봤던 해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모습을 예상했으면서도 새삼스러웠다.
이건 하나에게 줘야지. 운이 좋았는지 초,중을 내내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같은 반에서 만난 오랜 소꿉친구를 떠올리며 해인은 깔끔하게 포장된 초콜릿 바가 담긴 가방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긴장된 3월의 신입생은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젖어 표정을 풀어가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어, 여긴 1학년 복도인데요? 저절로 나오는 의문을 집어넣고 기분이 좋은 서해인은 "아니요 그렇게 바쁘지 않아요. 왜요?" 라 누가 봐도 선서 때 바짝 군기가 잡힌 1학년 대표가 아닌 3월의 소소한 이벤트를 맞이한 신입생의 모습으로 답했다. 바쁘지 않은건 사실이었고 뭐 선배와 사적인 친분을 다지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거니까?. 며칠 연속으로 바짝 긴장하다 학교를 오랜만에 감싼 달달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동화되어 풀렸는지 은우가 든 통의 정체는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넘겼다.
"음 마침 여유롭기도 하고 괜찮아요. 그런데 저 혼자면 될까요?" 마침내 은우가 든 통을 바라본 소녀는 "사탕을 주는 퀴즈 이벤트인가."라 중얼거렸다. 동아리 홍보차 나왔나보다.
"다행이네. 다행이네. 바쁘다고 한다면 남의 귀한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싶었거든. 그리고 혼자가 나아. 이런 건 다른 이가 끼이면 뭔가 영 복잡해진다고 해야할까."
물론 두 명 정도까지라면 상관없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이런 건 1:1로 하는 것이 제일이 아니겠는가. 그 쪽이 조금 더 스릴이 있고. 곧 어깨를 으쓱하던 그는 근처에 있는 창문틀에 살며시 통을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이내 거기선 정말로 색색의 알록달록한 사탕들이 들어있었다. 다만 골고루 섞여있는 것이 아니라 칸막이를 기준으로 두 개의 부류로 나뉘어져있었다. 수는 각각 얼핏잡아 50개 이상은 되어보였고 그는 통의 아랫 부분을 분리해서 또 다른 통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왼쪽에 있던 사탕 5개, 오른쪽에 있던 사탕 5개를 그 새로운 통에 집어넣고 있는 힘껏 흔들어서 섞었다. 정말 너무나 적절하게 섞여버린지라 뭐가 어디서 나왔는지 구분이 힘들었고 은우는 만족스럽게 그 새로운 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주 간단해. 지금부터 게임을 제안해볼게. 이 사탕 중 5개는 내가 진짜 어렵게 구한 정말로 맛있는 과일 사탕들이야. 딸기 사탕, 오렌지 사탕, 포도 사탕 등등. 아무튼 그렇게 섞여있어. 그리고 5개는 솔직히 먹기만 해도 엄청 매운 타바스코가 가득 발려있고 타바스코 소스 통에 담근 사탕이야. 솔직히 맛은 엄청 매워. 아무튼 그 사탕이 그렇게 섞여있어. 순서대로 하나씩 먹으면서 타바소크 소스를 덜 먹은 쪽이 이기는거야. 네가 이기면 그 기념으로 내가 좋은 선물을 하나 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타바스코 사탕 3개를 한번에 먹기. 어때? 공평한 게임이지 않아?"
물론 이 제안을 받을지, 거절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말을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는 화이트데이보단 이런 엑티비티 한 것이 훨씬 재밌지 않겠는가.
"아. 물론 거절해도 좋아. 솔직히 매운 거 못 먹는 이라던가, 후배에게 강제로 이걸 하자고 말할 순 없는 거니 말이야. 하고 말고는 네 자유. 어때?"
흐으으으으음~~~~~~~~ 느긋한 느낌으로 하늘이의 하늘구경에 딴죽걸러 오는 것도 있고~~~~~~ 한가하게 반에서 뒹굴뒹굴도 있고~~~~~~ 뭔가 먹고 싶거든 요리부로 찾아오고~~~~~~ 아니면 별관에서 혼자 텀블링하고 노는 미나도 있고~~~~~~ 그대에겐 많은 선택지가 있도다!!!!!!!!!!
미리 연습을 한 것처럼 착착 통을 열고 정성스럽게도 분리해 놓은 사탕을 꺼내어서 다시 아래층을 나누어 만들어진 통에 넣고 흔드는 것을 해인은 바라보았다. 수많은 양의 사탕에 정말 많이도 가져왔네 2학년들은 원래 이런가 아니면 이 사람이 지나치게 아는 사람이 많은건가 생각하던 소녀는 단순하게 사탕을 움켜쥐고 꺼내는 것이 아닌 칸 마다 동일한 수로 내려놓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선배라는 사람이 1학년 복도까지 내려와서 이름도 모르는 후배를 불러서 세워놓고는 요란한 장난을 치지는 않을거라 믿은 해인은 은우의 동아리가 이벤트를 좋아하는 부서인가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아주 간단해. 라고 진지하고 이어지는 말에 해인은 귀를 세웠다. 이미 참여하기로 했으니 어느정도 성의는 보여야 재밌겠다 싶어서 듣고 있자니 어느새 팔짱을 끼고 누가보아도 나 집중하고 있어요.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타바스코가 나오는 부분에서 끄덕임이 멈추었다.
"어, 왜 하필이면 타바스코인가요? 우승상품에 꽤 큰 게 걸려있나봐요."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나오는 동아리 홍보 게임은 처음 보았다. 해인은 웃으면서도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하며 질문을 했다. 공평한거야 전제 조건 자체를 처음부터 속였다면 제가 속아넘어가도 그 진실을 알 방법이 없으므로 신경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이런 확률성 게임의 룰이기도 하고.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거람? 어느새 승부욕과 계획광이 머릿속에서 주도권 싸움을 하는 통에 해인은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넘어가 술에 물을 타듯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좋아요. 속는 셈 치고 해볼게요. 대신 보상은 확실히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신X떡볶이도 곧 잘 먹는다는 평을 듣는데 타바스코 정도야. 타바스코를 별로 접해보지 못한 해인은 딱히 손해 볼 것은 없다는 생각에 시원스럽게 "지금 시작하면 되는 건가요? 순서는 제가 먼저 할까요?" 라 물었다. 이견을 제기한다면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은우가 상자를 섞었으니 해인 본인이 상대보다 불리하다는 말로 첫 순서를 고집할 생각이었다.
"그거야 그게 더 재밌으니까. 그냥 어설프게 조금 신 사탕으로는 게임의 재미가 안 나잖아?"
해인의 말에 은우는 정말 태연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그것 이외에는 이유가 없었다. 상대를 골탕먹이겠다거나 그럴 생각이라면 자신은 입에 담지 않았고 이렇게 보란듯이 섞지도 않았을테니까. 오히려 그냥 아무거나 하나를 주고 도망치는 것이 좀 더 현명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남을 괴롭히는 것일 뿐이며 그다지 재밌지도 않았다. 자신도 함께 똑같은 무대에 올라서야 재밌는 게임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녀가 조건을 받아들이자 그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게임의 조건은 달성되었고 그는 보상에 대해선 염려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손으로 톡톡 쳤다. 아무래도 보상은 그 주머니 안에 따로 들어가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페이크 동작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녀가 먼저 하겠다는 말을 하자 그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누가 먼저 해도 그렇게 불리한 게임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운이었으니까.
"좋아. 그럼 먼저 해도 돼. 아. 참고로 너무 매우면 바로 포기해도 괜찮아. 무리하게 먹다가 진짜 큰일날 수도 있으니 말이야."
타바스코 소스는 그렇게 쉽게 볼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중도 포기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인정해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그는 해인이 사탕을 고르고 먹는 것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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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은 매우 간단해! 1~10까지 돌려서 홀수가 나오면 노말 사탕. 짝수가 나오면 타바스코 사탕이야! 이미 나온 번호가 뜨면 +1 처리야! 자. 먼저 돌려보라구!
단순히 재밌어서라고? 초면인 선배를 단순하게 동아리 홍보 나온 선배에서 뭔가 이상한 선배로 격하시킨 해인은 순간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고 "하다가 중간에 교무실로 끌려가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 말을 받았다. 교칙상에 어딜 보아도 선후배간 타바스코 캔디룰렛을 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칙을 정한 사람들이 음식으로 내기를 거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지금의 서해인 본인처럼 말이다.
재미를 찾아 화이트데이를 틈타 자신마저 데스매치 치킨게임의 대상자로 올린 은우를 학업 스트레스에 벌써부터 정신이 나갔나 보다 라고 정리한 해인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은우의 주머니에 한번 눈길을 주다 고개를 끄덕였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건넌강은 되돌아 갈 수 없었다. 보상이 시원찮다면 그때가서 해결해도 될 일이겠지. 인생을 직진 한 방향으로 살아온 해인은 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통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난 원래 사탕이 있던 두 칸쪽 어느쪽이 정상적인 칸이었는지도 모르잖아? 묘하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눈썹을 살짝 오므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탕이 흔들려 이리저리 이동한 방향을 떠올려도 무엇이 매운맛 폭탄이 아닌지 알 수 없게된 무력함에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매운 거 먹다가 병원에 실려갔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해서요." 한 문장으로 그녀의 굳건한 의지를 표명한 소녀는 "한 번했으면 끝까지 가야죠. 물론 선배님도 각오 되셨을거라 믿어요." 라 뒤에 덧붙이고 포장지를 재빨리 까서 입안에 넣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언가 내게 닥친 사고나 상황이 아닌, 나 자신에게 놀랐다. 나는 평생 내가 행동함에 있어서 자신에게 놀라는 일 없이 살아갈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생활을 해 왔을 터이다. 내 행동에 나답지 않다든가, 믿기지가 않는다든가 그런 느낌을 받으며 놀라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오늘 점심 시간의 일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나의 굶주림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꼬르륵..
나는 곯는 배를 움켜쥐고 혹여나 그 소리가 주변으로 샐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지금 굶주리고 있는 것은 등굣길에 항상 들러 빵을 사오는 매장이 오늘은 문을 닫았던 까닭이다. 공휴일을 제외하고선 매일 새벽 5시 부터 문을 열고 따끈한 새 빵을 구워 ㅡ매점 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맛에 가격도 저렴했다.ㅡ 내오는 곳이었기에 복작이는 학교의 매점이나 식당 경쟁을 피하고자 매일 같이 그 곳에서 빵을 사왔던 것인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그런 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ㅡ점주의 개인사정으로 오늘은 휴업합니다.ㅡ 따위의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대응책을 마련해 두지 못했던 것이었다. 리스크 관리 실패다. 프로페셔널(?) 하지 못했다.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진다. 거기에서 더 이상 생각을 그만 두었다면, 내가 나 자신에게 놀랄 만한 이후의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식당을 이용 할 일이 없어 급식 신청도 해두지 않았었고, 수중에 돈은 있지만 살벌한 매점 경쟁에 끼어들 자신도 없었기에 그저 주려가고 있던 배가 이성을 걷어 차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하늘! 나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요리부로 가자! 아무래도 방과후 부실이니까 지금 이용하는 사람도 없을테고. 거기서 먹을 걸 조금 슬쩍하자~! 라고. 그리고 그 시점에서 굶주림에 의해 이성이란 억제기가 날아가 버린 나의 뇌는 그것이 합리적인 의견이라는 쪽에 거수했다.
너희들 정말 내 몸 뚱아리가 맞는거니?
여하튼간, 그렇게 된 연유로 나는 계속해서 찡얼대는 배를 움켜잡고 조심스레 요리부실을 향해 나아갔다. 그 곳에서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럴 마음이 없다면 처음부터 시도도 하지 않았어. 게임은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페어하게 해야 맞는 거잖아?"
그녀가 사탕을 고른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은우는 자신도 사탕을 하나 집어들었다. 자신 또한 어디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전혀 외울 수 없었기에 방금 잡은 사탕이 무슨 맛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먹어봐야 알 수 있었고 그는 정말 여유롭게, 그리고 태연하게 사탕을 입 속으로 집어넣고 천천히 혀를 돌려 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은우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입을 꾹 다물고 발을 동동 굴리면서 뒤로 돌아선 후에 자신의 옷자락을 꾹 잡아당기던 그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겨우겨우 다시 몸을 제대로 돌린 후에 해인을 바라봤다. 두 눈에서 눈물 기운이 보인다면 절대로 착각이 아니었다. 허나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애써 태연했다. 물론 어떻게든 쥐어짠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처, 처음부터 타바스코. 어우. 매워!!"
이내 그는 발을 동동 굴린 후에 자신의 입가에 손부채질을 하면서 애써 웃어보였다. 아직은 괜찮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운 그는 다시 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느쪽이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나이로 물고기 하나 낚았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을만 하다. 적어도 다운이 느끼기엔 그랬다. 보통은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하지 바다에 나와 낚시를 하고 싶어하진 않으니까. 다운은 털썩 포트 앞에 주저 앉아 자리를 잡았다. 불어터졌지만 문제는 없다. 다운은 나무 젓가락을 집어 들어 라면을 올렸다. 너무 불어버린 탓에 헛손질을 몇 번 하고, 면발 한 가닥을 죽처럼 만들어 놓고 나서야 겨우 짚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다. 그 일련의 과정 역시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다운이다.
"...! 맛있다."
다운의 음식 허들은 몹시 낮은 편이었다. 물론 대수가 신의 요리 솜씨를 가져 다 불어터진 라면도 맛있게 만들었다라는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요원해보인다. 모로가도 서울에만 가면 된다던데 다운도 만족, 대수도 만족이라면 이 라면은 성공적인 셈이다. 은은한 미소가 감돈다. 다운이 젓가락을 들어올리며 평소와 비교하자면 명랑한 어투로 묻는다.
"혹시 꿈이 횟집 사장이라도 되는거야?"
농담은 아니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물어봤다. 여기서 분위기가 싸해진다면 다운은 눈치껏 '농담이었어'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생긴것과 달리 실로 옹졸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했지만 내심 많이 떨렸던 해인은 입안에 퍼지는 달달한 맛에 다리에서 살짝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계속 가기만 하면 좋을것 같아. 바짝 긴장이 들어간 처음과 다르게 한 번의 성공에 자신감(?)을 되찾은 소녀는 의기양양하게 은우가 사탕을 집어드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처음에 별 다른 일이 없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볼을 우물거리던 상대가 갑자기 움찔하더니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아. 왔구나 해인은 자승자박에 안쓰러워 해야할지 아니면 자신이 제안해 놓고 당하는 것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며 웃는것도 동정하는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으로 은우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확률적으로 첫 턴을 가져가는 것이 맞았나 보다.
"뭐어..선배님 말대로 정정당당하게. 매우 페어하게 하는 거니까요."
"그러게 왜 하필이면 1학년을 붙들고 장난을 하는 거에요." 결국 안쓰러워하면서 할 말을 하기로 결론을 내린 해인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애써 괜찮은채 하는 은우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선배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할까...동생이 저보다 한 살을 더 먹으면 저런 모습일까 생각을 하면서 해인은 다시 사탕을 집어들었다. 이번에도 제발. 굵고 짧게 속으로 빈 해인은 입안에 알을 넣었다.
겨우겨우 자신의 혀를 진정시키며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생각보다 꽤 매운 것 같은데. 너무 많이 넣었나?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서면 재미없지! 결국 또 다시 재미에 몸을 맡기며 그는 그녀가 사탕을 들어올린 것을 확인한 후, 자신도 근처에 있던 사탕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 쏙 집어넣었고 천천히 혀를 움직여 녹여내렸다.
"우와아아악!!"
혀가 겨우 진정되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민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후끈거리던 혓바닥에 또 다시 타바스코가 천천히 녹아흘러내렸고 은우는 눈물이 핑 도는 눈으로 뒤로 돌아선 후에 머리를 잡고 으으- 소리를 내며 신음을 내뱉었고 이내 차가운 공기를 흡입하려는 듯 빠르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잠시동안 그렇게 호흡을 거칠게 하던 은우는 다시 뒤로 돌아선 후에 해인을 바라봤다. 방금 전보다 눈물이 더 핑 도는 느낌으로 해인을 바라보던 그는 겨우겨우 입을 열어 다시 이야기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 애초에 게임을...한 시점에서 각오한거야."
몸을 부르르 떨지만 그럼에도 이 짜릿함이 나름 재밌었는지 그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짜릿하고 재밌는 화이트데이가 아니겠는가. 피식 웃어보이며 은우는 해인에게 사탕을 고르라는 듯, 다시 통을 내밀었다.
그의 질문에 다운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검지 손가락을 올리니 -단순 습관인듯 싶다- 제법 진지해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요리를 정말 못하거든. 내가 라면을 끓이면 항상 짜거나 싱겁거나 불어터지거나 덜 익었거나 하는 편이야."
저주받은 손재주는 미술 뿐만 아니라 요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아직까지는 어디가서 요리 할 일 없어서 문제된 적은 없었다만 입맛이 날이 갈수록 너그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스파게티를 하려다 모든 것을 태운 것 역시 말할까 고민하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함구하기로 한다. 이제 막 만난 동급생에게 방화범의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도 이제 2학년이잖아. 슬슬 생각해두지 않으면 안 돼."
네네. 대충 진로 탐색 선생님이 할법한 말을 늘여놓는다. 다운은 어쩌면 꼰대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생긴 건 어디가서 삥뜯고 다닐 것 같이 생겨놓고 이런 교훈적인 말을 하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네가 커서 횟집 사장이 된다면 내가 홍보해줄게."
협소한 인간관계로 과연 도움이 될련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말로는 천냥집도 갚을 수 있다잖는가. 속담의 쓰임이 좀 이상한 것 같지만 넘어가자. 다시마를 보여주자 다운이 고개를 기울인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알 지 못해 생긴 일인데 이내 대수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아, 내 말은 횟집에서 라면도 팔면 좋겠단 소리였어. 그래도 횟집이니까 특색있게 해물라면이 좋잖아. 거기에 미더덕이랑 낙지, 새우를 넣고 20000원에 팔아버리자. 멋 모르는 관광객들이 좋다고 사먹고 가겠지."
이건 정말 농담이 맞았다. 문제는 전혀 농담같지 않은 분위기와 표정탓에 진지하게 바가지 씌우는 음모를 모의하는 꼴이 되어서 그렇지. 그나저나 왜 이렇게 진지하게 횟집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소심한 변명을 덧붙여 보자면, 그냥 해산물이 땡겨서 그렇다.
방심의 대가였는지 안도하자마자 찾아온 벌칙에 해인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렇다고 발을 동동 구르거나 대놓고 울수도 없고. 음식점에서 먹어본 타바스코 소스가 이렇게 매웠던가 피자에 뿌렸을때는 그냥 적당히 톡 쏘는 맛이었는데? 있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항의하고 싶은 마음으로 해인은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에 주먹을 꾹 쥐었다. 아니 이 선배가,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소스를 발라놓는데요! 라는 소리없는 비명을 꾹꾹 누르고 얼얼한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래도 생리적인 눈물이 나와 눈을 감고 뜨니 그래도 처음이라고 참아낸 저와 다르게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은우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기를 제안한 본인이 연속으로 당하는 몰골에 할 말을 잃은 해인은 멍하게 막 물에서 나온 사람처럼 심호흡 하는 상대를 보았다.
"...미안한데, 전혀 안 괜찮아 보여요. " 간신이 얼얼한 입을 떼고 말을 한 해인은 내밀어지는 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이렇게까지 상처밖에 남지 않는 게임에 사활을 거는 건지. 본인도 사활을 걸고 있으면서 남말하듯 생각한 해인은 머리를 굴렸다. 남은 사탕은 6개 그 중 타바스코는 은우의 말에 따르면 2개. 타바스코 사탕을 연속으로 먹어서 질 확률은 1/3X1/4. 10%보다도 더 떨어졌다. 90% 이상의 승률이면 할만하지. 마음을 다시 한번 비가내린 후의 땅처럼 굳게 다진 해인은 비장하게 손을 내밀어 사탕을 집었다.
물론 혀가 얼얼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듯, 그는 이를 악물면서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기합을 넣고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두 번 연속 이렇게 먹을 수 있는건지. 이제 남은 사탕은 다섯 개 뿐이었다. 그리고 타바스코는 두 개. 이 이상 먹으면 자신의 패배가 확정이 나는만큼 은우는 조금 더 신중하게 사탕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어 근처에 있는 사탕 하나를 집은 후, 그는 아까전과는 다르게 정말로 신중하게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혀를 천천히 돌리니 이번엔 상큼한 오렌지 맛이 느껴졌다. 겨우 살 것 같은지 그는 정말 여유롭게 웃으면서 방금 전과는 다르게 단 맛을 제대로 즐겼다. 마치 목이 타 들어가는 가운데, 시원한 탄산음료가 들어간 것처럼 여유롭게 웃음까지 보이면서 사탕을 먹은 은우는 살며시 통을 두 번 정도 흔든 후에 다시 배치를 섞어냈다.
"그건 그렇고 넌 괜찮아? 내가 말하기도 뭐하지만 먹는 것이 꽤 힘들어보이던데 말이야."
아주 살짝 걱정스러움이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먹은 것이 조금 걱정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자신은 이 게임을 그만둘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통을 한 번 흔들어서 또 사탕을 섞어낸 그는 두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 이젠 네 턴이야. 어때? 꽤 기억에 남는 화이트데이가 될 것 같지 않아? 그냥 평범하게 사탕만 나누면 뭔가 자극이 부족하잖아? 이런 날일수록 재미와 즐거움이 있는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래야 나중에 추억이 되는거고! 생각해봐. 졸업할 때가 되면 1학년 입학하고 나서 얼마 안 가 이런 일도 있었지. 이렇게 된다니까. 백퍼센트."
싱긋 웃어보이며 은우는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가슴가를 손으로 톡톡 친 후에 팔을 아래로 내렸다.
오히려 인스턴트라거나 이미 만들어진게 더 맛있게 만들어지는게 요즘 세상이다. 요리쯤이야 못한들 어떠랴. 하지만 라면조차 못 끓이는건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어쩌면 라면을 끓일 이유가 없는 아가씨가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네. 세상에 그런 신비한 보이미츠걸은 없지.
"하아.. 그럼 일단 해양탐사원이라고 하면 납득하지 않을까?"
해양탐사에 관심이 있는것도 아니지만 낚시도 하나의 해양탐사의 일종이 아닐까. 마치 자택경비원같은 느낌으로. 자신의 집을 지키는것만으로 직업이 되는게 있었다면 세상은 좀 더 행복했을거라 생각한다. 하고싶다, 자택경비원.
"요즘은 대게를 넣어도 2만원은 안 받아!"
새우와 낙지를 넣어서 2만원이라니 엄청난 폭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해물 조금 넣고 끓여주고 2만원을 받는다면 그건 정말로 좋은 일이 아닐까?
"흠. 좀 다른 라면을 사와서 작은것들이 낚이면 조만간 끓여먹는것도.."
낚시로 낚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지만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아저씨들마냥 귀찮게 고추장, 미나리, 마늘 같은 부재료를 가져가는것도 귀찮고. 라면 하나면 끝이기도 하니.
이번 한 턴으로 자신의 승리가 결정날 수 있는 만큼 괜찮다고 말하는 은우에게 딴지를 거는 대신 남은 사탕이 담긴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업을 들을때와 다를 것이 없는 집중력으로 상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슬슬 퍼지는 웃음에 입을 삐죽였다. 하기야 연속으로 3번 벌칙사탕을 뽑는것도 보통운은 아니겠지. 아쉽지만 "한 번 운이 좋았다고 방심하지 마세요." 라고 가볍게 투덜거리고 머릿속 계산기를 다시 돌렸다.
곰곰히 생각하며 재빨리 확률이 얼만큼 달라졌는지 따져보던 소녀에게 걱정스러움이 섞인 말이 들리자 은우의 의도와는 달리 저를 얕본다고 생각한 해인은 "아무리 그래도 선배님보다는 낫거든요..!" 하면서 저도 모르게 발끈하며 대꾸를 했다. 웃으면서 그런말 하지마! 얄미워! 숨겨왔던 마음의 소리가 극한의 상황으로 수비가 해이해진 방어벽을 뚫고 드디어 입을 여는데 성공했다.
"아직은 제가 이길 확률이 높아요. 전에 말한 것처럼 끝까지 계속할겁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은우를 흘겨보고서는 흠흠 목을 가다듬고 침착하려고 애썼다. "제가 방금전에 흥분한건 죄송해요. 하지만 이런식으로 남는 화이트 데이는 글쎄요 굳이 있어야 할지...평범하게 사탕을 나누는 것도 달콤함은 남으니까 나쁘지 않잖아요. 선배님은 누군가가 선배님이랑 이런 이벤트를 하면 어떨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다...과연 그럴까. 반론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미래에 이 일이 어떤 형태로 남을지 고심하던 해인은 괜히 심술이 나서 "만약 제가 이기면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만약 지면 다음 기념일에 똑같이 갚아드릴게요. 그때가서 다시 같은 감상평을 물어보고 싶네요." 라 어쩔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뿌리다가 결국은 살짝 미소지으면서 투덜거리고는 사탕을 집어들었다.
미나에게 있어 점심시간은 어찌보면 비공식적인 동아리 활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개별적인 부실이 있는 동아리요, 몇몇 동아리는 방과후 시간도 부족하다 생각해 점심시간을 이용해 모임을 가지거나 하는 일들도 허다했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있는 곳은 요리부, 다른 동아리들과 비슷한 이유를 핑계로 들어도 딱히 거리낄게 없는데다 어차피 몇몇 비품들은 자신의 사비로 충당하고 있었기에 가끔 끼니를 놓친 학생들에게는 매점 다음의 선택지가 되곤 했다.
차선책이라고 할까... 지난 2년간의 선배들의 행보를 보아선 사실상 갈곳 없는 굶주린 영혼들이 모이는 집합소였던것 같지만...
"......?"
오늘은 공교롭게도 부원으로서 간간히 어울렸던 동급생이나 후배들이 다른 약속으로 각자 점심을 먹는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있는 일이고, 자신도 그런 무리에 가끔 합류하기도 했기에 딱히 소외감 같은건 들지 않았을까? 오히려 괜히 힘주어 요리할 필요 없이 혼자서 여유롭게 즐길수 있을테니 미나에게 있어선 더할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역시 무난하고 쉽게 할수 있는건 파스타나 샐러드, 스테이크 같은 것들일까? 이런 때를 위해 따로 쓰려고 담아두었던 소스병도 양은 충분해보였다. 다만 요며칠동안의 메뉴가 토마토소스에만 집중되었기에 슬슬 케찹마저 물리려 했던지라 잠깐 얼굴빛이 어두워졌지만, 다행히도 생크림과 우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1더하기 1은 2라는 아주 간단한 수학상식을 잊은 그녀에게 있을 것이다.
'저녁 대용으로 싸갈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다시금 어두워진 표정에 이젠 미간까지 살짝 좁혀지려던 찰나,
"......!"
바깥 복도에서, 정확히는 부실 문앞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묘하게 곤두선 신경이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시간에도 학생이나 선생님들은 자주 드나들겠지만 그것 또한 버릇일까, 마치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문 앞을 노려보았지만... 정작 그 앞에 보인건 같은 반인 남학생이었다.
"...안녕."
누군지 알아채자마자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온 미나였지만 아무래도 제 앞에 있는 이는 의식의 끈이 흐물흐물해진 모양이었다.
자신처럼 그녀 역시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은우는 두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꽤 재밌는 후배라고 생각하며 다음에도 한 번 이렇게 게임을 하자고 해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사탕을 잡는 것을 바라본 후, 그는 남아있는 사탕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입에 머금으려는 순간, 그녀의 물음이 들려오자 은우는 정말로 태연하게 두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하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딱히 죄송하고 말 것도 없는걸. 물론 연인끼리 나눈다면 그것 자체로도 상당히 달콤할지도 모르지만 난 솔로기도 하고, 딱히 그런 느낌의 사탕을 줄 사람도 없어서 말이야. 우정캔디 정도야 얼마든지 나눠줄거고... 그러니까 이런 이벤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누군가가 나랑 이런 이벤트를 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딱히 나는 당하고 당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은걸. 응. 상대가 속임수를 쓰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이런 것을 한다면 나에게 있어선 즐거울 것 같고 차후에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솔직하게 숨김없이 자신의 생각을 태연하게 밝히는 그는 정말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상대가 이런 이벤트를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으나 정말로 기분 나쁘고 싫다면 그에 대해서는 사과할 생각이었기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묻는 거지만, 불쾌하고 그래? 그렇다면 사과할게. 나야 이렇게 게임하는 것이 재밌지만... 너는 받아들였다고 해도 재미없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아. 다음 기념일 때면 언제지? 발렌타인데이인가? 그때 나에게 초콜릿 주려고? 하하하! 뭐, 준다면 나야 얼마든지 환영이지. 이런 이벤트의 복수극으로 타바스코 초콜릿을 가져와도 환영이야."
그렇게 서로 알아가고 추억 쌓아가는 거 아니겠냐고 이야기를 하며 은우는 그제야 사탕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달달한 사과맛이 퍼지자 그는 싱긋 웃어보이며 자신이 평범한 사탕을 먹었다는 것을 태연하게 얼굴로 표출했다.
그쪽이 아무래도 재밌다는 말에 중학생때 이렇게 정신사나운 사람이 있었나, 다시 어질해진 머릿속에 한번 떠올린 해인은 건성으로 사탕을 집어넣었다.
앗! 이번에는 결국 외마디 소리를 낸 해인은 억지로 닫아지지 않는 입을 닫고서 두 손으로 눈을 꼭 눌렀다. 절대로 울지 말아야지 특히나 저 사람이 있을때는. 억지로 눈꺼풀을 비집고 나오는 액체를 꾹꾹 누르며 알싸한 입을 굴렸다. 재빨리 녹이고 얼얼해서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때 한번에 삼켜버리고자 눈에서 손을 때고 입을 살짝 가리며 켁켁거리던 소녀는 후우 길게 심호흡을 했다.
솔로가 이런 이벤트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 많이 제한된 것은 맞지만 굳이 이렇게 고약한 장난을 할 필요가 있나요. 은우의 이미지를 한 학년 위의 요주인물까지 하락시킨 해인은 "그냥 우정캔디만 나눠주면 어디 아프기라도 하나요. 아니면 그냥 신입생이 들어온 김에 그러는건 아니겠죠?" 라 물었다. 세상에 선생님들은 여태까지 저 선배가 하는 양을 두고보기만 한건가. 오히려 정말 진심인듯 맑게 웃으며 즐거운 추억이 될것 같다는 답을하자 해인은 머리가 아득한 우주로 떠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소녀는 "저는...모르겠어요." 라는 말과 입안에 남은 매콤함을 삼켰다.
"불쾌하지는 않고요 조금 짜증이 나요."
화이트 데이에 친구에게 초콜릿을 줄 생각으로 들떠서 걸어가다 동아리 홍보도 아니었던 일에 속아 넘어가서 억지로 매운 것까지 삼키고 이게 뭐람. 갑자기 울컥하는 통에 입술을 살짝 물다가. 작게 선배님의 의도가 좋았다는 건 알겠지만요. 라고 답하고 사탕을 집어들었다. 이게 뭐라고 정말로 내가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승부욕에 떠밀려 왔다는 생각이 들어 사기가 아니지만 속아 넘어간것 같아 묘하게 공연히 짜증만 났다. 마음 한켠이 어딘가에서는 색다른 일상에 환호를 할지도 모르지만 해인은 그 자그마한 한켠에 의사결정의 투표권을 주지 않은지가 좀 되었다.
바다를 두려워하면서도 선망함을 모르는 것처럼.
"언제나 환영이라니 다행이네요. 미리 허락받은 걸로 알고 이번에 지든 말든 다시 가져올 줄 알아요."
이후에 들었던 소문에 의하면 요리부실은 몇몇 아이들 사이에서 이미 점심시간의 숨은 맛집으로 공연하게 알려져 있다는 것 같다. 아니, 공연하다면 애초에 '숨은' 맛집이 아니라 그냥 맛집이잖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던 단어의 나열에 이미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는 것은 각설하고. 요리부실의 문 앞에 당도하여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젖히니 한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대리석 같이 하얗고 군더더기 없는 앳된 얼굴에 살짝 발그레한 홍조를 띄고 있는 검은색 단발 머리의 소녀.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어딘가 낯익음에 기억을 짚어보니, 같은 반의 동급생으로 있는 아이라는 것을 금새 떠올려 낼 수 있었다. 평소 친구 사귀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교실에서 주로 책을 읽었고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 엮이는 일은 없었기에 한 번도 말을 나누어 본 사이도 아니었고, 선생님이 출석부를 부른다 해서 호명하는 이름마다 그 아이의 얼굴을 내가 확인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름 또한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또래 아이들 보다 성숙한 체형을 가진 탓에 부각된 가슴께에 달려있는 명찰을 통해 지금에서야 최미나라는 그녀의 이름을 알아냈다. 뭐, 알아낸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 없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 곳에 있는게 하필이면 같은 반의 동급생이라는 것이 더욱 문제였다. 이 곳에서 음식을 슬쩍한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ㅡ그렇다고 같은 반의 동급생이 아니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도 아니다.ㅡ
"..어, 안녕.."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네오자 나도 마찬가지로 어색하게나마 그 인사를 받았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마주치니 올라오는 긴장 때문인지 찡얼거리던 배가 잠잠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성도 점차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자기가 무슨 일을 생각하고 벌이려고 했던 것인지 자각하고서 내 앞에 마주선 그녀에게 티를 내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흠칫 놀랐다. 정말 나 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점심 식사 한 끼니 거르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이라고, 지금 이곳이 19세기의 프랑스였다면 먹을 것 하나 훔치려다 5년 형을 받을 수도 있는 짓을 감행할 뻔한 것이다. 그마저도 탈옥을 시도한다면 19년 형이다. 그만큼 정말 엄청난 행동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덧붙혀 물어온 "배고파?" 라는 물음에는 그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하는 것을 보면 엄청 성실한가봐? 하기사 그 정도는 되니까 1학년 때 연설을 한 거려나."
저렇게 두 번을 먹었으면서도 아직까지 마지막 승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은우는 키득거리면서 가볍게 박수를 짝짝 쳤다. 애써 꾹 참는 것이 조금은 안쓰러웠으나 오히려 그것 덕분에 더더욱 흥미진진한 게임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는 남아있는 사탕을 바라봤다. 두 개. 즉 그녀가 뭘 고르냐에 따라서 모든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다음부터 이런 것은 하지 않으면 될까? 너에겐 말이야."
정말로 상대가 싫다면 딱히 이런 것을 할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에겐 다른 친구들도 많았고, 다른 이들과 재미로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러다 그녀의 물음이었던 신입생이 들어온 김에라는 말에 그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나중에 2학년 복도에서도 할거거든. 이거. 너희를 위한 이벤트라면 이미 했었는걸. 아. 혹시 소문 못 들어봤어? 매점 자판기 옆에 있던 무료로 그림 그려주는 자판기. 사실 그건 내가 만든거거든. 그리고 그 안에 쏙 들어가있었고 그 안에서 그림을 그렸고."
나름 재밌었다고 이야기를 하며 그는 태연하게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물론 이후 조금 한소리를 듣긴 했으나 적어도 그에게 있어선 후회되는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녀가 사탕을 하나 집어드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마지막 사탕을 집어든 후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아. 하지만 나, 그때면 고등학교 3학년이니까 조금 바쁠 수도 있으니 그건 양해해줘. 아무리 나라도 고등학교 3학년때는 조금 자제하고 공부를 해야 할테니 말이야. 하지만 네가 찾아온다면, 특히 이런 이벤트로 찾아온다면 조금은 시간을 빼볼게. 음. 한 시간 정도?"
실없이 웃으면서 그는 사탕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혀를 천천히 굴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식음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표정을 찡그렸고 뒤로 돈 후에 우와아아악! 소리를 내며 다시 발을 동동 굴렸다. 결국 마지막 타바스코는 그의 입 속에 들어갔고 그는 다시 한 번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차가운 공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3분 정도 그렇게 한 후, 그는 눈물이 핑 도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엄지를 위로 척 치켜세웠다.
"대단...하네. 아하하하. 너의 승리야. 설마 이렇게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간 후에 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