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기억들이 날 비웃어 멈춰서서 뒤돌아보는 나를 가슴 속에 남은 것은 언젠가의 기억 스스로 고르고 버렸을 터인 미래들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1. 본 스레는 놀려고 오는 거다 공부는 필요 없다. 2. 일상 중 불편하게 느낄 것 같은 사항이 있다면 사전 조율한다. 3. 본인이 뭐가 아니라고 느껴지면 웹박으로 쏘거나 넌지시 그리고 확실하게 상대에게 전달한다.
차가 멈춰선 곳은, 비스트로 & 바라고 쓰여져있는 어느 한 가게. 입간판 대신에 웬 큼지막한 모루가 떡하니 놓여있는 가게의 상호는 ANVIL이다. 두터운 유리로 된 자동문이 지잉 하고 열리면, 잠깐 차문을 나서 가게 정문으로 다가오면서 맞은 차가운 공기를 씻어내주려는 듯이 따뜻한 공기가 가볍게 훅 끼쳐온다.
바닥은 인테리어 시공을 할 틈이 없었던 건지 페인트칠이 까진 흔적이 투박하게 남은 시멘트 바닥이지만, 한때 공장이나 창고로 쓰인 건물의 옛 아이덴티티를 남기며 인테리어를 한 건지 벽돌이 고스란히 노출된 벽이나 각목을 맵시있게 쌓아만든 바, 나무 타일이 붙여진 천장의 난색 조명, 그 아래서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를 품고 랙에 주르르 걸려 정적인 패션쇼를 선보이고 있는 리큐르 병들. 생맥주 꼭지도 있고 와인셀러도 있다. 저편에는 비슷한 인테리어의 비스트로가 있는 모양이다.
바의 한가운데에는 키가 대단히 껑충하고 떡대가 좋은 셔츠와 청바지, 셰프앞치마 차림의 바텐더가 바를 행주로 가볍게 슥슥 닦고 있다. 길다란 금발머리를 말총마냥 질끈 묶어놓았기 망정이지 자칫하면 남자로 오해할 뻔했다. 도어벨이 딸랑딸랑 울리는 소리에 바텐더는 행주를 내려놓고는 일어선다. 쾌활하면서도 여유로운 어조의 인사가 건네어져온다.
[ 이봐 무라사키, 저번에 만났던 공원으로 와. ] [ 네 칼 놓고간 거 이번에는 놓고가지 말고. ] [ (장난스러운 이모티콘) ]
단말기로 미리 메시지를 보내놓은 제롬은, 머지 않아 약속장소에 도착해있었다. 시간은... 약속시간부터 30분쯤 전인가... 그래도 이번에는 일찍 오게 되었다. 원래는 약속시간 정각에 도착하는 것이 그의 규칙이었으니. 왜 그렇게 시간에 딱딱 맞춰서 도착하냐고? 기분이 좋아서... 는 아니고,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게 습관이 되어서, 라고 하는게 좋을까. 이 도시에선 약속 시간에 늦어도, 일러도, 어느 쪽이든 무시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나저나 너무 뜬금없었나."
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진 않았을까. 그는 단말기를 한번 더 들여다본다. 무라사키와 연락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단말기를. 르메인 패밀리라면 일이 꽤 많을텐데, 이렇게 뜬금없이 연락을 해도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만 날인가. 다른 날에 만나면 되겠지.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며, 그는 무라사키를 기다렸다.
무정하게 죽인단 소리는 안 한다니.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했으면 좋겠다.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까지 들었다. 단근 요정님! 미쳐버리겠다. 아까와는 다른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바니바니, 당근당근.. 에만의 시선이 소파로 향했다. 정확히는 저기 꽂혀있는 나이프에.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를 친구의 미간에 집중했다. 복수할 테다. 복수하고 말 테다.. 플라스크를 내밀자 에만은 뒤로 물러나듯 몸을 꾸물댔다. 다만 이동은 없었다. "나 숙취가 두렵다니까. 이 주정뱅이야." 하고는 한마디 더 붙였다. "내놔." 그래, 그러니까 이건 술기운 때문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약해진 간이 알코올을 제대로 분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 나름의 정당함을 붙이기로 했다. 우리는 어려운 달,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달. 정말이라는 단 두 글자가 망치를 내리치는 소리처럼 크다. 참 우스운 일이다.
적어도 에만이, 미카엘이 생각하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 미카엘은 다시금 도망치고 싶었다. 멀리멀리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로스만을 홀로 이겨내려 했다. 언젠가 다른 사람이 미카엘 윈터본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순간은 그로스만을 전부 쓸어버린 뒤 정당한 A-13 구역의 지배자로 올라섰을 때 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미카엘 윈터본은 피를 묻히려 했다는 소리다. 결국 어머니의 길을 걷고 참회하려 했다.
다들 셰바 사람이었다.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준 뒤로 찾아오고, 도망친 아이에게 인간일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고, 친구일 수 있게 도와주며 서로의 길을 개척하고, 곤히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깰 때까지 기다려주고,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을 대접해 주며 안심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같이 앞을 걸을 수 있게 길들여달라며 선뜻 다가왔다. 그 작은 온정 때문에, 모인 온정 때문에 전부 망해버렸다. 무죄가 되어버렸다. 유죄임이 마땅한 셰바 사람은 셰바 사람이기에 무죄가 되었다.
숨죽여 울었다. 감사와 원망이 양립했다. 난 적어도- 네게 듣고 싶지 않았어! 아이가 바락바락 속으로 외치고는 나쁘진 않았다며 툴툴대는 것 같았다. 토닥이는 손길에 몸을 조금 더 웅크렸다. 한 단어, 한 단어 떼며 "나 안 울어." 하고 아무도 믿지 않을 소리를 뱉어버린다.
침묵.
입술을 앙 깨물고 떨어지는 눈물을 삼키려 해도 그 무게는 제법 깊어 또 커다랗게 맺히더니 뚝 떨어져 시트를 적셨다. 목을 비집고 겨우내 소리를 낸다. "너는, 넌- 아으, 진짜, 이, 베르셰바 새끼야.." 하고는 잘게 떨었다. 독한 사람이었다. 그 순간까지도 목 놓아 울지 않고 이따금씩 작게 훌쩍일 뿐이었다. 한참을 그러다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봤을 때는, 콧잔등이 붉고 눈시울마저 새빨갰던 것이다. 꽉 깨문 입술은 기어이 피가 터졌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다 소맷단으로 얼룩진 얼굴을 거칠게 닦으며 크게 떨리던 숨을 몰아쉬다 뱉었다. 생각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너도 나쁜 사람이라 다행이야.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이라 다행이야. 나를 마녀가 아니라 인간으로 만드는 나쁜 사람들이라 참 다행이야.
"내 일에 누군가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내 탓이 아니라고 해서 다 망쳤어. 나쁜 새끼야."
"헤, 승리? 승리는 아직도 멀었어~ 이제 한 발짝 나아갔을 뿐인걸. 봐, 아직 네 마음조차도 완전히 빼앗지 못했잖아? 결과는 아직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일 뿐이지."
그렇게 말하는 로미는 어지간히도 쥬의 존재가 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 단순히 큰 것 뿐 아니라... 대뜸 첫 대면에 '사랑한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겉으론 기계가 돌아가는 소음이나 복잡한 전자회로나 좋아할 것 같은 너드나 긱(Geek)처럼 생겨서는 그 안에 품고 있는 야망은 퍽 대단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전부를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행동력을 가진 오타쿠는 위험하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쥬가 내린 그녀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다 볼 수 있겠지.
"~그냥 로미라고 불러! 내키면 '주인님'~ 하고 불러도 되지만. 아, '마스터'도 좋네! 헤헤. 하지만~ 흐음, 그러네에- 지금은 직원 유니폼이라도 구상해둘까~ 너도 이쁜 옷 입고 일하면 좋지 않겠어~?"
그런 면모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여실없이 드러내는 그녀. 이걸 솔직해서 좋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도가 지나치다고 해야할까. 여러의미로 광인이다. 그것도 이성도 멀쩡하게 챙겨간 광인. 어쩌면 정말 쥬가 생각한대로, 이렇게나 강렬한 에너지를 품고 있으니 언젠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지금이라는 순간으로 대번에 다가 온 것 뿐이지. 그렇다면 이 만남이 의미하는 바가 있을까? 그것을 이 무기 기술자가 증명해줄까? ...뭐,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턱받침을 하고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헤실헤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면.
"조-아쓰~ 그럼 나도 준비해둘테니까, 네가 지낼 곳 정도는 마련해 두도록 할게. 좀 좁을지도 모르지만 노숙보단 낫지? 우리 '슈퍼-핫-뜨거'씨도 있고. 그동안 어디 가서 괜찮은 그림이나 그리다 오시라~ 헤, 이런 '다소' 너저분한 가게에 계속 있고 싶진 않을 거 아냐? "
알긴 아는 건지. 그래도 쥬는 모를 것이다. 지금 여기에 늘어져 있는 물건들은 로미가 제 나름대로, 소위 '손이 닿기 쉬운 곳'에 정리해 둔 것이라는 것을.
"아니며언~ 이런 풍경이라도 그려주려고~? 나야 좋지!"
로미가 의자를 기울여 몸을 뒤로 빼면서 가게 안을 전부 담으려고 하듯이 팔을 넓게 펼쳤다. 쥬의 렌즈에 들어오는 광경은, 솔직히 쥬가 깨어난 곳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지는 않은... 난장판이 아니었을까.
"에이, 그래도 똑같은 칭찬 계속 들으면 질릴걸? 내가 너 생각해서 여러 버전으로 해주는 거라고."
이렇게 만나면 암살과는 거리가 먼 여자같다. 하기야, 우리 모두 무언가 감추고 있는 면이 존재한다.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너는 믿어. 믿다가 배신당해도 괜찮을 것 같아. 설령 네가 내 목을 조르고 칼을 쑤셔박는다 해도 한번쯤은 용서해줄 수 있어. 나름대로의 우정에 대한 답례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기괴한 선물이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진짜같아서 무섭다고, 안나..!"
암살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이번엔 이 쪽이 팔로 제 몸 감싸며 멀어졌다. 질색하는 표정이다. 팔 관절 부분을 괜히 손으로 폭 감쌌다.
"그래, 그래도 개미 새끼 하나쯤은 싱크대 밑에서 기어나와도 봐줘. 바퀴벌레보단 낫잖아?"
아무래도 놀리는 데에 재미들린 모양이다. 실실대며 헛소리나 해댄다. 그러다 필요한 게 있냐는 말에 잠시 침묵했다. 자신은 할 수 없고, 돈 주고 의뢰할 수도 없다. 이런 걸 부탁해도 될까? 하지만 너는 내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인걸. 너에게 부탁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부탁하지?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이걸로 네게 목을 졸린다 해도 한 번쯤은 용서해줄게. 그러니 너도 이 부탁을 용서해줘.
"...이불이나 옷이 아니라 다른 부탁이 있는데, 안나."
목을 긁적였다.
"...부탁이 아니라 의뢰로 생각해도 좋아. 돈도 줄 수 있어."
긁은 부위가 홧홧해져왔다.
"제롬 발렌타인의 주변인을 좀 알아봐줄 수 있어? ...그 중 무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으로..."
페로사는 얼굴에 시원스런 웃음을 띄며, 바 스툴 하나를 브리엘에게 권했다. 그러다 이리로 다가오는 브리엘에게서 뭔가를 눈치챈 건지 성가신 질문을 건네어왔다.
"벌써 꽤 드셨네요?"
저 바텐더는 이 붉은 하늘 아래에서 얼마나 되는 세월을 살아온 걸까. 어차피 이 도시에서 만난 이 도시 사람이니 이 도시의 다른 놈팽이들과 큰 차이도 없을 테다. 저 성가신 질문 뒤에 또 무슨 고약한 수작질 담긴 말이라도 더 하려는 참일까?
"세 잔까지만 드릴 수 있겠네요. 그게 괜찮으시다면 주문해주세요. 뭘로 드릴까요?"
...그게 다인가. 바텐더는 더 무언가 말을 하지 않고, 브리엘에게 주문을 청해왔다. 메뉴판에는 기주의 종류별로 분류된 충분한 구색을 갖출 만큼의 칵테일 이름들이 늘어서 있었다. 메뉴판 맨 위에는 메뉴에 없는 칵테일이라도 주문하시면 만들어드립니다, 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 페로사주 기준으로 이 정도면 장문 레스이다! # 설령 한두 줄 정도까지 짧더라도, 한 문장이더라도 잇기에 충분한 감정적/상황적 묘사만 있다면 별로 개의치 않는다!
무소식은 희소식이다. ...라고, 누가 말했던가. 슬슬 제롬은 불안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메세지는 보냈지만 답도 없고, 지금까지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림자는 보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니, 물론 확인은 했다. 메세지에는 분명히 '읽음' 표시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당최 무슨 일이 있기에 짧은 답장조차도 없단 말인가. 혹시, 설마. 그 마지막 만남 뒤 무라사키는 진즉 제거되고 그 단말기를 이용해서 '커넥션'인 제롬을 꾀어내려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그런 노림수라면? 허무할 정도로 최악의 시나리오이나, 이 도시에서는 그런 가정도 전혀 붕뜬 소리가 아니게 된다. 그리고 불안함이 두려움이 되어 엄습해오기 시작할 때-
"제, 제롬씨이...!"
탓탓탓탓- 제롬의 뒷편, 그 골목에서 급한 뜀박질 소리와 이미 귀에 익은 맥없는 목소리가 울린다. 큰 길가로 오지 않고 굳이 골목으로 쏘다니는게 퍽 소녀답다. 그녀는 단숨에 제롬의 앞에 달려와 터덜터덜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며 말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늦기는 했다. 제롬은 지금까지 거의 장장 15분 정도를 멀뚱히 서있었으니 말이다. 치안이 조금이라도 안 좋은 구획이었다면 이미 다섯번 시비가 걸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가, 갑자기...! 나간다니까, 선배님들이... 대, 대련을 시키는 바람에... 우... 저희 선배님들... 3 히트 시킬 때까지는 절대, 안 내보내준단 말이에요..."
제롬은 물론, 소녀의 진면목을 아직 본 적은 없을테다. 하지만 레스터에게 조사시켜 알아낸 매서커과 관련 정보들은 확실히 무시무시한 것들이었다. 무라사키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대련을 하고 제롬을 만나러 온 것이다. 그것도 3 히트...? 그리고 소녀는 문득 '아...!'하고 소리내더니 자켓(물론 칼날이 가득한) 안 쪽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대, 대신 이거... 가져왔으니까요...! 괜찮으시다면, 받아주세요...!"
그리고 두 손으로 정중히 건넨 것은 캔 음료수. 이곳으로 올 때 중간에 자판기에 들러 뽑아온 것일테다 솔직히 말해서, 쉬지도 않고 달려온 탓인지 그건 아주 시원하진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건네진 캔 뒤로 보이는 무라사키의 눈망울이 너무나도 무구하다.
바텐더의 시원스러운 웃음을 보다가, 브리엘은 나른하게 내리뜬 눈매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자신이 들어온 자동문 방향으로 가볍게 고갯짓을 해보이며 뱉는 말의 어투는 날선 말투로 느껴질 수도 있다. 존댓말이 분명하지만 존중보다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까지. 바텐더가 권하는 스툴로 걸어가던 브리엘은 이어지는 말에 눈썹을 한차례 찌푸렸다. 성가신 질문은 바텐더니까라는 이유로 넘어가기에는 브리엘의 성격이 그렇지 못했다.
쯧, 하고 스툴에 앉으며 혀를 찬 브리엘은 양손가락 끝을 마주해서 피라미드형태로 만든 뒤 바텐더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전히 눈썹을 찌푸린 상태였다.
"그런 배려는 필요없지만, 취할 생각으로 온건 아니니까 그렇게 하죠. 칵테일은 대부분 달아서 즐기지 않으니 위스키나 럼, 혹은 바카디 중에 한잔을 온더락으로. 괜찮습니까?"
예의 무감하게 사무적인 어조로 읊조리듯 중얼거리며 메뉴판을 내려다보던 브리엘은 메뉴판을 덮은 뒤 자세를 고치듯 상체를 비스듬히 틀어서 다리를 꼰다. 말의 내용 대부분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독선적으로 느낄 수 있었을 수도 있지만 웃음기 하나 없는 메마른 얼굴을싸쥐듯이 손바닥 전체로 감싸며 턱을 괸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을 것이다. 제롬은 계속 놀리며 술을 건넸을테고, 에만은 그것을 마시고는 저 나이프를 뽑아 당장이라도 제롬의 미간을 찍어버리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아무일도 안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순히 두 사람이서 즐겁게 농담을 하는 것 뿐이었으니까.
안 운다는 말에, 그는 기다렸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나. 가면을 부순 이후도 그렇고, 말 한마디 한 것도 그렇고... 울음이 많은, 여린 아이다. 그런 아이가 무엇이 두려워 가면을 쓰고 있었을지. 제롬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맺었다. 자신이 이녀석을 동정할 자격은 없기도 하고, 애초에 그럴 여유도 없었으니. 애초에 에만은 여리지만 독한 사람이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마 화를 낼지도 모른다.
"푸핫. 베르셰바 새끼라는 욕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럼에도 눈물은 참을 수 없었는지 우는 모습을 보인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욕하는 모습이,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절대로 나쁜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그는 베르셰바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단순한 이유로, 이 도시가 싫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평범한 인생을 빼앗고, 친구들을 데려가고, 차가운 현실 속에서 비참하게 기게 만들기도 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괴물들 사이에서 평생토록 벌벌 떨게 만든, 비탄의 도시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단어가 유쾌하게 느껴져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멍청아. 그게 왜 내 탓이야? 이런 말 몇마디에 홀랑 마음을 내준 네 탓이지."
"나는 누구랑은 달리 내 탓도 아닌걸 내 탓이라 하진 않아서 말이야~" 라며, 바로 놀려먹는 모습은 상당히 능청스러우면서도, 익살맞았다. 퉁명스러운 대답에 한껏 웃은 그는 에만을 향해 씨익 웃었다.
"내 손을 빌려줄게. 이미 더러운 손이니까 얼마든지 더 더럽혀도 괜찮아. 그 대가로 친구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야, 싸게 먹히는 거지."
그는 악수하자는 듯 에만에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붙잡으라는 듯, 도움을 주겠다는 듯, 입매는 웃고 있었지만 제 친구를 바라보는 눈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