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힘들게 노력했고 멀리까지 도달했지만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나는 몰락해야만 했고 내가 가진 걸 전부 잃었지만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A-13 구역은 르메인 패밀리가 지배하고 있는 중앙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해있다. 뉴 베르셰바의 날씨가 변덕적이라고들 하지만 유달리 눈이 자주 내리는 지역이며, 규모는 제법 넓어 신도시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늘 검붉은 도시임에도 조경이 세련됐다는 점이다. 구역의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고, 답지 않게 흰 비둘기가 날아올 때도 있다. 아름다운 조경 사이로 조직 간의 피 튀기는 혈전. 그렇지만 민간인의 피해는 단 하나도 없어 평화로움 그 자체인, 셰바답지 않으면서도 무엇보다 셰바다운 지역이었다. 적어도 5년 전은 그랬다. 13일의 금요일의 궤멸 이후의 소식은 모른다. 의도적으로 소식을 끊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에만의 친구인 아스타로테와 제롬이 소식을 가지고 올 때도 A-13 구역에 대한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렇게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잊힌 도시 전설로 남아 현재의 집권자에게 늘 그렇듯 고개 조아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줄 알았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만은 지금 조수석에 앉아 창가에 턱을 괴며 가만히 핸드폰을 만질 뿐이었다. 핸드폰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에만은 흔들리는 사진을 트톡에 올리며 화면을 스와이프 했다. 금세 올라온 답을 엄지로 자판을 몇 번 두들겨 답장하고 다시 조수석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고 가면 틈새로 눈을 흘끔 굴렸다. 지금 옆에서 섬세한 손길로 도시를 향해 부드럽게 운전하고 있는 날선 인상의 여성은 리아나 글루코프스키로, 지금 가는 지역이 생사를 함께 했던 첫 만남의 장소였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려니 입 무겁게 운전해 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가면은 안 벗을 거야?"
방금 생각 취소. 링링이 요 깜찍한 지지배가 기껏 멋진 생각을 해줬더니 산통을 깬다. 이래야 내 친구지. 에만은 배 위에 핸드폰을 얹고, 그 위에 깍지 낀 손을 겹친 뒤 눈을 흘겼다. 나지막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오늘 가는 곳에선 벗을 거야." "친구 얼굴도 못 보고 대화하는 내 기분도 생각해 줬으면 하는데." "일이 잘 풀리면 앞으로도 벗고 다닐지도 모르지.. 링링이도 알잖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만 참아줘.."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알지?" "음."
에만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5년 전을 떠올렸다. 그 당시엔 오로지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깨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는데도 어떻게 리아나가 대기하는 차에 뛰어왔는지, 만약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두 번은 못 할 것이다. 차는 속도를 줄이고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익숙한 듯 낯선 전경. 그때는 밤이라 어두웠고, 지금은 낮이라 밝은 정도다. 바로 여기서 둘은 처음 만났다. 에만은 안전벨트의 버튼을 눌러 풀더니, 핸드폰을 꺼내 앱을 켜 리아나를 돌아봤다. "대금은 바로 보내줄게.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돌아가는 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리아나가 차를 돌려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에만은 움직일 수 있었다. 에만은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따스한 색감으로 깔린 보도블록은 깨끗하고, 문득 보인 흰색 가로등은 피에 녹슬지 않았다. 거리에는 쓰레기 한 점 없었다. 빵집을 지나쳤을 때 살집 두둑한 주인장이 에만에게 느긋하게 인사했다. "좋은 점심이오." 에만은 힘없이 손을 들어 화답했다. "안녕, 아저씨. 양배추 빵 남아있어?" 문에 기대 아이를 기다리던 주인장은 눈을 둥글게 떴다. "양배추 빵이라면 아직.. 잠깐, 라푼젤? 라푼젤이니?" 하는 목소리를 뒤로 에만은 계속,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길을 걸었다. 골목 사이에 나앉은 아이들이 보였다. 에만의 시선을 느꼈는지 빤히 쳐다보다 앞니 빠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뺨이 통통하고 발그레 상기해있고 공이 옆에 있으니 대낮부터 놀다 지쳐 쉬는 것 같다. 아마 이 구역의 보육원도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 A-13 구역은 기억 그대로였다. 이 도시는 말 그대로 바깥의 것을 빼닮았다. 느긋하고 평화롭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시체가 나뒹굴지도 않고, 피가 튀는 싸움, 하물며 총성과 작은 시비도 일절 벌어지지 않았다. 만일 시체와 피, 총성이 울린다 해도 민간인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권을 가진 조직을 처형하는 소리일 뿐. 과거 그로스만이 지배할 때는 볼 수 없었고, 붉은 마녀가 지배하며 쌓아올린 작은 자를 위한 낙원. 그리고 누군가 그 잔혹한 의지를 이어받은 곳. 이곳에서는 쓸데없는 피를 보지 않아도 됐다. 적어도, 쓸데없는 피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에만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 하늘 밑 분수대 뒤로 흰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답지 않은 평화다. 이도 저도 못하고 헤매다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정확하게 도착해버렸다. 낯선 길이 됐을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지. 에만은 헛웃음을 툭 뱉고 분수대 뒤로 보이는 화려한 건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무리 쌓아올린 낙원이라 해도 피를 아예 보지 않는 건 아니다. 이 도시가 평화롭다 해도 셰바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에만은 한때, 자신의 집이었던 곳을 올려다봤다. 붉은 마녀가 지배하는 13일의 금요일과 주변은 전부 사라지고 성채같은 건물 한채만 남아있다. 용궁龍宮. 레이스 호텔만큼 커다랗지는 않지만 제법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지노가 이만큼의 규모가 있어도 되나 싶지만, 그 밑의 지하 때문임을 에만은 잘 알고 있다. 카지노 입구를 향해 걷자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막아선다.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해 소지품을 검사하기 위해서다. 에만은 소지품 검사를 위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금속 탐지기가 삑 소리를 내자 주머니의 물건을 꺼내라는 듯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손을 까딱였다. "카지노 안은 무기를 들고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에만은 나이프 한 자루를 꺼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남성의 손에 턱 쥐여주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니 천장은 드높고 웅장하다. 위 층에서 아래를 구경할 수 있는 난간이 있고, 그 외에도 개인적인 게임이나 당구를 위한 룸, 담배를 물고 칩을 밀어놓는 딜러, 그리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평화로움 사이의 유일한 무법지대 같았다. 특이한 점은 1층부터 시작해 모든 층을 아울러 올라가고 왕래할 수 있는 높고 넓은 계단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이 쓸 수 없도록 군데군데 경호인력이 배치되어 앞을 지키는 높은 계단의 끝에는 웅장한 문과 함께 간격을 두고 누군가 앉을 수 있는 옥좌가 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장소. 이 카지노의 주인을 위한 것이었다. 마치 백성을 굽어살피는 왕처럼 카지노의 인원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에만은 그 계단의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감히 거들떠보지 않고, 거들떠볼 수 없는 계단을. 이 용궁의 옥좌 뒤 왕이 기거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경우는 단 세 가지뿐. 이 구역의 사람이 죄를 지어 재판을 위해 가거나, 특별히 허락을 받았거나. 에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6층. 계단을 조금만 올라가면 옥좌 뒤 알현실에 들어갈 수 있다. 복도와 이어지는 계단 근처에서 자신을 막아세우는 경호인력을 올려다봤다. 2m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남성 여럿이 작은 에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에만은 그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에만이 물끄러미 가면 너머로 남성들을 쳐다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에만은 그 기시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답할 수밖에 없었다. 느릿하고, 천천히.
"언제부터- 이 나에게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 있었지?" "이 구역의 규칙입니다. 따거의 명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습니다." "따거에게 혈전을 신청하러 왔다 해도?"
좌중이 얼어붙었다. 음악도, 웃음소리도 멈췄다. 시선이 온통 내리꽂혔다. 에만이 마지막 경우를 말했기 때문이다. 이 카지노의 주인 자리를 걸고 싸움을 신청하는 것. 경호인력도 놀랐는지 얼어붙어 있다 에만의 작은 체구를 보며 웃었다.
"꼬마야, 어느 조직에서 돈이라도 주디? 이렇게 하면 살려주겠다고?" "내가 혈전을 신청하러 왔다 했을 텐데." "허튼소리! 돌아가라, 따거는 받지 않을 테니!" "그 돌아가라는 말, 카드 병정에 불과한 너희에게 한 거야, 아니면 나한테 한 거야?"
경호인력 중 하나가 멈춰 서더니 에만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알현실 근처는 측근으로 이루어져 있고, 에만이 아까부터 구사하던 어투에서 누군가와 유사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너 뭐야." 에만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경호인력 하나를 툭 밀어내듯 팔을 뻗고 계단에 첫 발을 내디뎠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용궁의 주인에게 혈전을 신청하러 왔다. 됐나?"
아, 계단. 끔찍한 계단. 에만은 계단에 첫 발을 내디딘 뒤 바로 후회했다. 빌어먹을 체력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을 험난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아니다, 고작 2층 높이다. 에만은 숨을 짧게 들이마시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옥좌 뒤로 가더니, 그 웅장한 문을 열어젖혔다.
알현실의 안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졌고, 고풍스럽게 꾸며져있다. 최소한의 삶이라도 영위하듯 얇은 베일이 드리운 침대 하나, 소파, 그리고 그 주변으로 각종 물 담배를 비롯해 재력을 과시하는듯한 장식이 놓여있다. 우스운 점이라면 넓은 수조 안에 있는 것이 금붕어라는 것이다. 하늘하늘 베일이 쳐진 침대에 모로 누워 실루엣만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 앞 너른 대리석 앞에서 무릎을 꿇고 벌벌 떨고 있는 사람 두 명도. 모로 누워있던 실루엣 주변에서 짙은 연기가 드리운다. 손에서 무언가 불타다 몇 번 손을 휘저으니 사라진다. 그리고 무언가를 침대 밖으로 툭 던졌다. 지폐 다발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천만 벅이다. 여기서 살아남는 한 명에게 3배를 줄 테니, 한 번 기어서라도 싸워보렴. 너희 죄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더냐."
캐노피 너머로 들려오는 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달그랑, 하는 소리가 바닥을 차게 울렸다. 고작해야 커터 칼 한 자루다. "어서, 먼저 잡는 쪽이 임자 아니겠니." 두 사람이 눈치를 봤다. 한 사람이 불안한 듯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고성을 뱉으며 커터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 나는 아내와 자식이 있어!" "꺼져! 나는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단 말이야!!"
커터 칼을 쥐기 위해 싸우기 시작하자 끌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커터 칼을 집어 들며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 주먹 다툼이 시작됐다. 뺏고 뺏는 다툼 끝에 커터 칼이 가차 없이 누군가의 목을 파고들었다 빠지기를 반복할 때, 문이 열렸다. "어이, 용왕. 혈전을 신청하러 왔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가면을 쓴 작은 체구의 사람. 문의 경첩이 웅장하게 닫히는 소리와 목에서 피가 끓는 소리를 뒤로, 캐노피 너머로 불쾌한 기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力拔山兮氣蓋世..* 목소리 한 번 우렁차라.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한참 물오를 때 이게 무슨 짓이지?" "혈전을 신청하러 왔다고 했잖아." "에만, 이름은 알고 있네. 우리 조직을 노리는 멍청이들도 애용하고 있지.. 그런데 고작 자네 같은 부엉이 한 마리의 혈전이 내 유흥보다 중요하던가?" "중요할걸."
캐노피 너머의 인영이 코웃음을 치며 일렁이다 에만이 후드를 벗고 가면을 비틀자 몸을 일으켰다. 저 새하얀 눈을 그는 알고 있었다. 등을 쓸어주었고, 버터 쿠키가 담긴 보따리를 쥐여주던 기억을 알고 있다. 붉은 마녀 최후의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작은 아이를 알고 있다. 머리카락도 제대로 자르지 못해 무릎을 넘게 길어 라푼젤이라 부르곤 했던,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셰바의 사람.
"미카엘? 미카엘이니?"
캐노피 너머로 누군가 귀신처럼 뛰쳐나왔다. 흐트러진 긴 백발이 흩날리고, 걸쳤다고만 할 수 있을 정도로 흘러내린 옷자락이 휘날렸다. 피거품 사이를 지나치고 에만을 향해 팔을 뻗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그 작고 흰 뺨에 손을 올리며 몇 번 더듬거리더니 이내 품에 가득 안고 무릎을 꿇었다. 홀로 살아남은 남성 하나가 그 장면을 모두 보았다. 이 구역의 왕이 고작 저 작은 아이 하나 때문에 무릎을 꿇는 장면에 커터 칼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미카엘, 아! 미카엘. 살아있었구나. 나는 네가 죽은 줄만 알고.."
남성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에만은 말없이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몇 번 토닥였다. 금색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에만의 옷 깃을 적셨다.
"내가, 내가.. 그동안 이 구역을 지키기 위해 놈들의 뇌수로 목을 축이고, 머리를 뽑아내고, 남은 몸뚱이의 내장으로 목을 매달아 장식으로 걸어두며 하루하루를 달래던 것이.. 내 강호의 도리가 떨어진다 손가락질하는 놈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죄 짓뭉개며 여기까지 올라왔던 것이.. 허사가 아니었어. 하늘이 나의 편이구나, 하늘이 나의 편이야.. 아, 샤오티엔스, 네 살아있는 것이 내 삶 아와 허사 아니었으매 기쁘기 한량 그지없다.." "여전하네.." "여전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셰바인 법. 그러나 너는.. 왜 이리 말랐니. 응? 이 오라비 가슴이 미어지겠구나. 대체 어쩌다가.."
에만의 가는 팔을 꽉 쥐며 이리저리 불안하게 안색을 살피던 남성은 고개를 휙 돌렸다. 커터 칼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대리석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지폐 다발을 천천히 쥐려다 놓친 손도.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기다리렴." 하고는 살아남은 승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에만은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에만은 그의 셰바스러운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감동의 재회를 해도 순식간에 깨지는 것이 에만이 아는 용왕이었다. 순식간에 상반된 분위기에 승자는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아무,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이겼으니까.. 제발, 저한테는 병든 어머니가 있습니다. 제발.." "당연히 내가 살아남은 사람에게 돈을 준다 하긴 했지. 그렇지만 '여기서'라 했지 '너희 둘'이라고는 안 했을 텐데. 형제여, 무엇보다 네 죄를 짓지 않았던가?" "사, 살려.." "네 죄를 아느냐?" "감히 소리를 내었습니다!" "아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아내와 자식이 있는 자를 살인하였고, 용의 존안을 보며 역린에 대해 알았으니 죽을죄를 지었으리라." "죽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예, 예!! 그러니까 제발 용서를.." "죽을죄를 지어놓고 용서를 구한다라?" "제- 제발-"
순식간에 목이 잘려 떨어져 나갔다. 용왕은 어느새 손에 쥐여있던 커터 칼에 묻은 피를 탈탈 털었다. 새하얀 옷깃과 뺨에 튄 피를 닦지도 않고 뒤를 보며 환히 웃었다.
"샤오티엔스, 역시 너도 이 장면을 구경하는구나. 누이를 닮았어." "에만이라 불러도 돼." "오, 무슨 소리. 내 너를 아만*이라 부르고 싶지만 병 얻어 낙양에서 눈 감을까 봐* 이렇게 부르는 걸 양해하거라. 그래서 무슨 일로 이 용왕을 찾아왔을꼬?" "얼굴도 볼 겸.. 오라비에게 선물도 줄 겸.."
그로스만도 불태울 겸. 심연이 말갛게 웃었다. 아, 다시금 시린 겨울이 온다. * 역발산기개새-항우본가, 항우가 유방과 해하 전투를 치를 당시 사면초가에 몰리자 연인 우미인과 술을 마시며 읊은 시의 첫단락으로 알려져있음. * 조조의 아명은 아만이었다. 중국 애칭 문화인 '아'와 에만의 '만'을 합친 말장난. 조조는 병을 얻어 낙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돌연 혼자서 웃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다소 복잡한 심경이면서도 얼굴에 있는 미소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다. 필시 누군가가 저 박장대소를 보면 드디어 정신이 나갔다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만한 것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아무렴,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듯...
이내 웃음이 잦아들고서 가다듬은 목소리는 비록 상대방이 평범한 사람과 다른 노선을 향한대도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가치관과 사람이기에 존재하는 다소 철학적인 면모 역시 볼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로봇에게는 이론만이 있을 뿐이며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있을뿐 언제나 짜여진 규칙에 한해서만 움직이는 법,
로봇은 스스로 탐구하고 고뇌하며, 때로는 틀린 것을 맞는 답인양 제시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주어진 데이터를 분석하고 가장 이상적인 답을 도출할 뿐이었다. 자아가 없는 존재에겐 자아성찰이란 없는 개념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인지를 넘어서 진보된 과학은, 때론 마법과도 같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뭐... 엄밀히 말하자면 그저 제가 이레귤러였을 뿐일지도 모르구요~"
어째선진 몰라도 그녀는 가능했다. 고도로 확장된 알고리즘 탓일까? 아니면 학습이 가능했기에 인간에게 있는 감정, 의식, 자아 등을 자신에게도 받아들인걸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그녀에게 남아있는 뇌와 심장을 포함한 인간적인 부분이 그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던 걸까?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째서 그것이 금기시되며 역사 속에 사장된 것인지. 그럼에도 어째서 인간은 제 인간성을 버려가면서까지 그것을 원하는지...
그것은 광기인가, 애정인가. 집착인가, 미련인가. 아니면 이미 진화가 끝나 쇠퇴하는 인류의 새로운 발버둥인가,
그녀에게 남아있는 유일하면서도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
하지만 상대방의 입에서 나온 말로 인해 그녀는 순간 벙찌게 되었다. 이와중에도 상점 구인홍보라니, 게다가 근무조건이라며 술술 늘어놓는 설명은 베르셰바의 평범한 조항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야말로 풍겨오는 분위기부터 가치관, 그 모든 것이 로미라는 인물이 도시 바깥에서 온 존재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절 이곳에 묶어두고 싶으신가보네요~"
살짝 교차해 걸친 다리, 그래봤자 그녀의 차림새엔 어떤 노출도 없었기에 누군가가 기대할만한 구도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이것마저도 무시한다면, 저는 정말 '인정머리 없는 로봇'에 불과하겠죠? 이런 사람같은 말랑말랑한 몸도 의미가 없을 정도로..."
물론 그녀가 지금의 제안마저 거절할만큼 냉혈한인건 아니었다. 이제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그녀는 어째선진 몰라도 상대방의 저의를 읽을 수 있을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신처럼 이곳이 본래의 자리가 아니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좋아요. 그정도라면 해드릴 수 있죠. 바람을 가둬둘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은 바람을 만드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만약 그것이 로미 카나운트의 방식이라면, 그녀 또한 어울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이 넖은 도시에서, 이 황량한 도시에서,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도시에서 그나마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할 길이라면, 그걸 자신이 돕는다 해서 무엇이 더 이상해지랴. 어차피 미쳐돌아가는 세상이거늘,
"후후후... 그건 좀 의외의 발언인데요? 마치 처음부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절 끌어들이신 것처럼요..."
도시의 역사에 대해 조금만 살펴봐도 금방 알수 있는 것들이었다. 전쟁당시에 만들어진 독립식 인간형 병기, 뉴 베르셰바 설립 전 불어닥친 전란, '시티 헌트'라는 명칭에 걸맞는 장기간에 걸친 부분적 인류 청소, 어쩌면 그녀 또한 그곳에 포함되었을지 모를...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걸요? 물론 저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다 한들, 그게 철갑으로만 구성된 로봇이라 한들...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걸요? 신화 속의 골렘이 단 한 개체만 있는건 아니고, 우주의 지성체가 오직 인간 하나라고만 볼 수도 없으니까요."
손가락 끝을 맞대어 가슴 위에 걸치고선 엄지를 제 입가쪽으로 당긴 그녀는 보라색 동공이 보일듯 말듯 휘어진 눈매로 웃음지으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페로사: 저런 상황에서는 칼과 상대의 위치를 생각해야지. 칼이 상대방과 내 사이에 떨어졌으면 칼을 잡는 게 우선인데, 내가 상대방보다 칼을 빨리 잡을 자신이 없다 하면 그냥 상대방이 칼을 잡는 동안 무게중심을 걷어차던가 몸통박치기를 하던가 해서 넘어뜨려. 페로사: 상대방과 나와 칼이 삼각형으로 놓여있다면, 칼을 잡는 것보다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걸 먼저 염두에 두는 게 유리해. 페로사: 이걸 어떻게 아냐고? 페로사: 뭐... 나도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어. (쓴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