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거, 거 참 우습네 산다는 거, 구역질이 나 산다는 거, 짐승과 내가 뭐가 달라 결국 죽으면 땅에 묻혀 썩을텐데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처음부터 선은 없었다. 흐려놓은게 아니라 없었기 때문에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여인에게 선은 타인이 긋는 것이었다. 여인이 타고 노는 줄은 여인의 선이 아니라 상대하는 타인의 선이었다. 그렇기에 여유로웠고.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많고 많은 걸 보고 있었기에 그 중 하나가 탐이 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순리 아니었을까.
여인은 제 앞의 제롬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짜증 섞인 말을 내놓는 것. 입술이 겹쳤을 때 눈을 감는 모습. 떨어진 뒤 확인하듯 입술에 손을 대는 행동.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 여인과 달리 같은 색을 한 제롬의 눈동자를 마주 응시하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난 네 맛이라서 만족했어. 처음이니까 더."
키득키득. 가볍게 웃은 여인이 제 목덜미에 숨을 흘리는 제롬을 재차 안았다. 검은 머리칼을 만지며 잘게 웃음을 흘리다가 예민한 살갗에 닿는 입질에 제법 간드러진 소리를 내었다. 이성을 깃털로 살살 건드는 듯한 소리. 그리고 또 킥, 웃었으니 겨우 그거냐는 도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든 제롬과 마주보았을 때도 옅게 웃고 있었을 테다. 좀전보단 홍조가 진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럼 잘 자리가 있어야겠네."
좀 자고 싶다는 말에 여인은 그리 말하며 그제서야 몸을 움직였다. 목을 안았던 팔을 풀어 두 손을 살포시 제롬의 허벅다리를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허나 차림새가 그렇다보니 행동도 자세도 매우 아슬아슬하다. 거기에 손을 떼는 척 한번 슥 훑고 지나가는 손짓이란. 그대로 제롬의 앞에 서서 스타킹의 레이스 부분을 올리는 척 매만지는 모습이란.
"이리 와."
생글생글 웃는 낯의 여인이 손을 뻗어 다시 제롬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자리에서 일으켜 데리고 간 곳은 잡화점 안쪽의 계단. 문 대신 비즈로 된 커튼을 걷고 들어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간다. 여인은 제롬보다 두어칸 앞서 올라갔으니 그 앞 시야는 말하지 않아도. 음. 층계참을 한번 거쳐 열댓개 남짓 되는 계단을 올라가면 긴 복도에 다수의 방문들이 보인다. 여인은 그 중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간이침대와 테이블, 의자 등등이 있어 아마 휴식을 취하는 곳 아닐까 싶어보였다.
"여기도 방음은 잘 되거든."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여인이 언제 챙겼는지 모를 제롬의 선물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제 옆을 툭툭 두드렸다. 준비가 되면 오란 듯이.
그래도 상대방은 예의상 돌려말한건지, 자신의 직설적인 대답에 긍정을 표하는듯 보였다. 이상하지도 않다. 아니, 이상하지 않은게 이상하지. 애초에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 뉴 베르셰바의 모두가 미치진 않았대도 대부분이 미쳐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부분을 꼽자면 그녀도, 상대방도 그런 '베르셰바 스러운' 상황엔 전혀 관심이 없단 것이며 따라서 서로에게 적의를 품을 이유도 없다는 것일까? 애초에 지금같은 상황에서 이렇게나 무난한 대화를 주고받을수 있다는 것은 곧 서로 싸울 의도가 없음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소개... 요?"
사람에 유독 의문을 표하는 상대방과 이 지독할 정도로 주변에 신경쓰지 않는 성미, 그 두단어만 대조해보면 바로 나오는 답이 있긴 했으나... 그녀는 구태여 그걸 머릿속에 프린팅 하고싶진 않았다. 왠지 그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실례일것 같아서,
과장된 몸짓과 연극톤의 목소리, 목을 가다듬듯 헛기침하는걸 시작으로 설명하는 모습은 확실히 장사꾼과는 하등 거리가 먼 이미지였지만 그럼에도 나쁘진 않았다.
마스터 엔지니어,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상대에게 다소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였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 이해가 갔을까?
"아... 그래도 되는 건가요...?"
직함이야 종종 그런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곤 하지만 자신을 성씨보다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하는 이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정말 어지간히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 이상,
시선을 천천히 돌려가며 잠깐동안 흐려지는 동공, 그러면서도 다시금 초점이 잡히며 권총의 그립부분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장사의 수완은 특허와 워터마크에서 비롯된다. 자신만의 네임밸류를 만듦으로서 얻어가는 이득이 더 압도적인 회사는 얼마든지 많으니... 그걸 마치 본능인양 계산하고 있는 자신이 좀 놀랍긴 했지만 말이다.
"아, 그게..."
역시 어지간히도 신경쓰였는지 눈길이 자주 갔는데, 상대가 아무리 다른걸 눈에 잘 들이지 않는다 해도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에 내걸며 유리진열장에 두 다리를 올려놓는, 전형적인 '사장' 같은 이미지... 그것에 더해 연분홍빛 시선이 자신을 주시하자 그녀 역시 웃으면서도 조금은 멋쩍은듯이 늘어진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