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거, 거 참 우습네 산다는 거, 구역질이 나 산다는 거, 짐승과 내가 뭐가 달라 결국 죽으면 땅에 묻혀 썩을텐데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393 오~ 막 돌아다니다가 건물 발견해버리기~ 압도적으로 압도적인 포스를 풍기는 수상할 정도로 수상한 고물상과 연결된 수상할정도로 수상한 주인이 있는 가게~ 그렇게 하자~ 정보 수집하기~ 비 맞는다고 녹슬진 않겠지~ 쥬는 고성능이니까~ 쥬: ~ 쥬주: 하지만 머리는 빠질걸? 쥬: ? 쥬주: 산성비 몸에 안좋아. (징징이처럼 머리카락 공중분해) 쥬: A
어느 정오였다. 나는 수백년만의 연차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쉰다 해도 딱히 하는 건 없다. 그저 빈둥거리며 공상을 할 뿐. 요즘은 마땅히 재미난 일이 없다. 얼마전의 그 일 이후부터는 사적 외출도 조금 꺼려진다.
그 때였다. 바깥에서 어느 청명한 소리가 들려온다. "카아알…" '칼갈이다!' 사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전부터 내내 칼을 갈고싶어서 좀이 쑤시던 차였다. 그도 그럴 게, 딱히 나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단 하도 괴롭혀대서 그렇다. "빨리 나를 갈아줘!" 라거나, "나한테 피를 먹여줘!" 같은 말을, 나이프가 자꾸 걸어대는 것이다.
물론, 나는 지극히 정상인이므로 칼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칼은 피를 먹지 않으면 녹이 슬어버리는데, 사용하려면 한번은 날을 세워줘야 하므로, 결국 외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그것이 내가 칼갈이 트럭 앞에 서게 된 경위였다. 얼굴에 격자 선같은 문신이 새겨진 아저씨가, 엉거주춤하게 선 나를 올려다보았다.
"으응, 뭘 바라고 한 건 아닌데. 펠 같이 멋있는 사람이 하는 칭찬이라면 당연히.. 부끄러운걸.."
에만은 희미한 웃음소리를 내며 잠시 안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손을 들어 안경을 목갑의 벨벳 천 위로 올려놓고 다시금 걸쇠를 채운다. 딱 소리에 어디선가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자상한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술김의 망상일 것이다. 이제 아버지의 유품을 찾았으니 한시름 놓았다. 남은 일이 꽤 많겠지만 천천히 풀어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 새 삶을 사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알지 못하게. —가 아닌 에만이라는 사람으로. 이후 에만은 조주 과정을 구경했다. 칵테일을 마실 줄만 알지,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 일절 없기 때문일까, 페로사가 새로운 칵테일을 만드는 과정은 늘 즐겁다. 가끔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영상으로 떠돌아다니는 마술을 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오늘은 어떤 칵테일을 추천해 줄까? 흥미롭게 바라보던 중 희미한 체리 향을 뒤로 레몬즙을 짜내는 과정에서 에만은 잠시 눈을 둥글게 떴다. 원래 조각 하나에서 저렇게 많은 즙이 나오던가? 에만이 짰더라면 안간힘을 쓰더라도 고작 몇 방울이 끝이었을 텐데. 새삼 저 경이로운 힘이 이제 바텐더의 일로 쓰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 그거 꽤 무서운데.. 그렇게 말하는데.. 펠, 자기를 두고 어떻게 가겠어."
페로사의 농담은 어쩐지 연인에게 바람피우지 말라는 뉘앙스 같았기에 에만도 농담을 던졌다. 이렇게 농담을 던지면서도, 새삼 진담이 섞여 있었다. 어차피 다른 바는 가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이만큼 자유로운 곳은 없다. 이곳에는 페로사가 있고, 얼굴을 드러낼 수 있으며, 미묘한 상냥함도 느낄 수 있다. 에만에게 작은 안식처나 마찬가지다. 사소한 일로도 올 수 있지만 괴로운 일이 있을 때도 도망쳐올 수 있는 곳. 감정을 안에서 썩히지 않고 우울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작은 응석 정도는 부려도 되는 곳. 에만은 다시금 연초를 물고 떼며 연기를 느릿하게 뱉었다. 흐릿하게 퍼지는 연기 뒤로 에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속을 가득 채우는 취기에 어느덧 시야가 흐렸다 넓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편하지 않다. 세상이 빙 도는 느낌은 언제라도 있었고, 취기를 불편해하는 타입도 아니었기에. 에만은 지금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1mg 얇은 녀석만 피우다 보면.. 차이는 큰 법인 걸."
에만은 능숙하게 손가락으로 연초를 두들겨 재를 툭툭 털었다. 재떨이에 떨어진 재가 차가운 종이에 젖어 죽어버린다. 명 다한 재를 뒤로하며 나른한지 눈을 감았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천성이 그런 건지 미세한 소음이 귀를 가득 채웠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노련한 손놀림에 흔들리는 셰이커 속 내용물의 소리, 가장 크게 들린 건 노랫소리다. 재를 털긴 했어도 여전히 내려놓지는 못하고, 담배를 끼운 손으로 턱을 괸다. 마지막 가사가 제법 감상적이다. 죽기 위해 태어났다. 아무렴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으리라. 셰바의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노래다. 죽기 위해 태어났고 미쳤지 않은가. 에만은 느릿느릿하게 턱을 괴던 손을 뗐다. 이내 다시금 연초에 입을 물고 있다가 밀려온 마티니 글라스를 보며 에만이 고개를 들었다. "으응, 잘 마실게." 하고는 차가운 글라스에 입을 댔다. 아직 연기가 입안에서 부스스 흩어지는데도 용케 한 모금을 삼킨다. 달고 상큼한 향, 진의 풍미는 둔감한 혀에 묵직하게 닿았다. 체리의 그윽함이 비강을 훑고 에만은 잠시 잔을 내려두더니 턱을 괸다.
"나- 이거.. 마음에 들어. 어떻게 내 취향을 잘 아는 걸까.. 고마워, 페로사."
에비에이션만치 선명하고 투명한 색조를 가진 눈이 사르르 접힌다. 눈부터 시작된 미소가 얼굴에 완전히 피어올랐다. 취기에 흐리멍덩해도 환한 미소를 가릴 수는 없었다. 사람은 취하면 본성을 드러낸다 하던가, 아니면 오히려 가면을 쓰게 만들던가. 이 맹랑한 꼬맹이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이 미소가 거짓은 아니었다. 이런 미소를 또 언제 지어 보였더라. 에만은 기억을 더듬어 자신에게 뻗쳐온 온정을 기억했다. 고기 한 점과 수프 한 그릇의 온정. 이 작은 행복이 깨지지 않는다면 참 좋을 텐데. 에만은 재떨이에 연초를 기대놓고 다시금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넘긴다.
여인의 눈빛에 그는 의아하다는 생각을 내심 했다. 의미도, 본심도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원한다면 전부 내어줄 것 같은 눈빛 뿐이었다. 저것이 장난임을 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신과 비슷한 자색 눈동자는 장난이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농담이지?"
후후 웃는 그녀를 보며 살짝 당황스러운 듯 침묵하다 중얼거린다. 농담이지? 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담겨있었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당황. 진심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반응에, 그러니까 예상치 못한 반응에 대한 당황스러움.
몸이 다시 눌리고, 이번에는 여인의 얼굴이 어깨에 기대진다. 가면을 쓰고 있던 방금과는 달리, 지금은 제롬 그 본연의 모습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심리적 장벽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 머리카락에서 나는 이름 모를 향의 냄새, 간질거리는 웃음소리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것 또한 농담인가? 아니면, 그녀의 말처럼 농담이 아닌가?
"윽..."
읊조리는 말이 가까워질 때 즈음, 귓볼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감촉에 그는 미약한 신음을 내었다. 눈을 살짝 감고는 여인을 껴안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다른 하나의 감정은 묘한 기대감. 그녀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해줄 생각도 없으면서. 됐으니까 원래의 아스타로테로 돌아와."
하아. 귓볼이 깨물리며 참았던 숨을 한순간에 터트린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여인이 그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면 그는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옆에 내려놓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여인의 목덜미에 다시 고개를 파묻으며 "피곤해..." 라고 중얼거렸을까.
칼갈이가 아저씨가- 청년? 아니면 중년?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칼갈이가 페퍼를 묘한 시선으로 올려다 봤다. 그 이유가 있다.
"앗, 저어...! 그-"
페퍼의 아래, 그 아래의 아저씨. 그리고 그 아래의 쪽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다보면 그곳엔, 당최 무슨 일인지 날붙이란 날붙이는 품 안에 가득 챙기고서 서있는 보라색 머리칼의 소녀가 있다. 소녀는 페퍼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시선을 얼른 피하면서 몸을 쭈뼛거린다. 그것이 칼갈이가 그런 시선으로 페퍼를 쳐다 본 이유였다. 사실 페퍼만을 그렇게 쳐다본 것이 아닌, 동시에 칼을 갈러 온 소녀와 그를 번갈아서 보고 있던 것이었다.
"머, 먼저... 하세요...!"
양보인가? 그리고 그 때에 소녀가 한발짝 물러나며 페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품 안에 들린 칼들이 '절그럭'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