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거, 거 참 우습네 산다는 거, 구역질이 나 산다는 거, 짐승과 내가 뭐가 달라 결국 죽으면 땅에 묻혀 썩을텐데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쿵쿵거리며 발작하던 심장이 본래 상태로 서서히 되돌아갔다. 피피는 눈을 내리깔곤 핫초코를 다시 한 입 머금었다. 다 식어 설탕물이나 다름없어진 것이 입 안에서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식어버린 건 단순 음료뿐만이 아니다. '조심하겠다' 한 마디로 그 말을 무를 생각이었어? 재미없다. 흥미가 떨어져갔다. 피피는 흥분으로 식은땀에 젖었던 손바닥을 코트에 문질러 닦았다. 나가는 제롬을 일어나 배웅하려던 그 순간,
검은 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 안에 있는 것은 공허다. 공포다. 그리고 차가운 총알 하나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쿵, 쿵, 쿵, 이번에는 날 실망시키지 말아줘, 제발. 한 번 뛸 때마다 손바닥이 다시 축축하게 끈적거렸다. 땀이 배어나온다. 입꼬리 뒤틀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게 계약인한테 굴 태도인가, 미스터 발렌타인?"
목소리 제어가 잘 되지 않는다. 떨지 않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무렴 좋다. 이유는 다를지언정 떠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다. 딱한 발렌타인. 당신 총 잡아본 사람이 맞긴 해?
"죽일 테면 죽여 봐. 호의에 답하는 태도 치고는 정말... 경우 없다고 생각하지만, 뭐, 발렌타인 씨는 어디까지나 나보다 강하니까. 내가 어떻게 저항하겠어. 당신 마음대로 해."
어린아이 달래는 투로 조곤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당장 살아남는 것엔 의미가 없다. 집도 노출됐고, 적대감은 살 대로 산 모양이지. 오늘 밤 몰래 달아난다 해도 죽이려 하면 충분히 죽일 수 있다.
"해보라니까, 뭘 망설이고 있어."
목 언저리가 가려웠다. 피피는 손톱을 세워 가려운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지금은 곤란하다.
"립서비스해도 뭐 안 나온다구." 페로사는 셰이커를 열고 계량도 하지 않고 탱커레이를 따른 뒤 Luxardo라는 빨간 글자가 쓰인 리큐르 병을 열어 또르륵 따랐다. 체리 향이 알코올을 따라 희미하게 난다. 그리고 그녀는 개수대로 가서 손을 한 번 비누로 싹 씻고 냉장고에서 싱싱한 레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4등분해서는 한 조각을 셰이커 위에서 느긋하게 꾹 쥐어짰다. 레몬 1/4개에서 나올 양인가 싶은 주스가 셰이커 안으로 쪼르륵 흘러들어간다.
"못 가면 다행이네. 내 바를 두고 다른 바에서 취하면 파우스트를 원샷시켜 버릴 생각이거든." 키드득 웃으며 더 짓궂은 농담이 날아온다. 애인을 더러 바람피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과 어째 뉘앙스가 비슷한 것 같다. 우연하게도 이렇게 에만이 머무르기 좋은 조건을 갖춘 바가 드물어서 다른 곳에나 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지만. 얼굴을 내어놓고 숨쉴 권리마저 빼앗긴,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 아이. 숨쉬는 것도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원치 않는 고된 노동과 바라지 않았던 목숨을 건 싸움을 강요받고서야 겨우 먹을 수 있었던 투기장에서의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여서, 페로사는 에만에게 조금 물렀다. 값싼 동정이라고 비난한다면 할 말 없겠지만... 그러는 한이 있더라도, 페로사는 적어도 이 앤빌이 에만에게 있어서 언제까지고 낯설어도 좋으니 언제까지고 안식처가 될 수 있었으면 했다. 자신이 앤빌을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자신의 자리를 혼자서 찾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고 싶어하는 그것- 에만과 함께 입에 물린 창백한 담뱃개비 끄트머리에 붙은 불똥을 나누면서, 페로사는 다시 한번 속으로 자신이 그것을 바란 게 아니라 경호원의 직업병이라고 부정했다. 불똥 사이에서 이국의 석양을 연상케 하는 향이 가져본 적이 없던 낯선 향수와 함께 흐릿하게 퍼져나갔다.
"그것도 그렇게 타르가 센 건 아닌걸."
하며 페로사는 입에서 꽁초를 떼어, 얇은 철제 접시에 젖은 종이를 올려둔 재떨이에 재를 탁탁 털고, 남은 꽁초를- 아직 꽤 길게 남은 그것을 재떨이에 기대어놓은 뒤에 다시 랙으로 손을 뻗었다. 은빛의 길다란 푸어러가 끼워져 있는 보라색의 리큐르 병을 들고, 셰이커 안에 약간 따라넣고 페로사는 그것을 닫았다. 노련한 손놀림으로 셰이커를 흔들며 페로사는 문득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불렀다. 그게 그녀의 애창곡이었기 때문이다.
이리 와서, 험한 길을 걸어. 쏟아지는 비 속에서 네게 입맞추게 해줘. 넌 제정신이 아닌 여자를 좋아하잖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골라, 마지막 기회야. 너와 나,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는걸.
코러스를 부르는 동안, 냉동고에서 차게 얼린 새 마티니 잔을 꺼내 손잡이를 냅킨으로 감싸고는 그 위에 셰이커에 들어있던 것을 따른다. 그리고 잔 모서리를 남은 레몬으로 꾸욱 문질러서는 에만의 앞에 내어준다. 우연일까, 에만의 앞에 새로 놓인 두 번째 잔은 에만의 눈을 닮아있다. 페로사는 자세를 바로하며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바텐더의 추천인 에비에이션입니다, 손님."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꽃향기와 가감없는 진의 풍미, 그러면서도 상큼함 뒤에 숨은 체리의 그윽한 맛이 녹아있는 클래식 칵테일이다. 페로사는 그제서야 재떨이에 기대어둔 꽁초를 다시 꺼내물었다.
얼굴을 살짝 뒤로 무르는 걸로 팽팽히 당겨졌던 주도권의 줄이 느슨해졌다. 다시 당긴 건 제롬이었다. 표정을 고치고 여인의 허리를 더 당기며 무방비하게 드러난 여인의 목덜미에 숨결을 맞대온다. 체온 섞인 제롬의 접촉에 여인이 가늘게 목을 울렸다. 야살스러운 소리가 났다.
"몸도 마음도 다 내어드린 걸로 부족하다면. 제게 무엇을 원하시나요."
여인의 살갗 위를 노니는 제롬의 손가락이 턱 끝으로 와 고개를 들어올리니 순순히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턱 끝을 세우고 제롬과 시선을 마주친 여인이 말했다. 원한다고만 하면 전부 내어줄 듯이. 지그시 바라보는 자색 눈동자에 오롯히 제롬 만이 비치는 이 순간 처럼.
천천히 제롬의 말이 이어졌다. 영혼까지 바치길 원한다면. 그 말에 여인의 눈이 조용히 가늘어졌다. 허나 웃는 건지 다른 의미인지 애매한 표정이었다. 흐려진 말끝을 굳이 잡지 않았고 한박자 뒤늦게 이어진 말에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인 채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장난 아닌데."
곧 백기를 든 제롬을 보며 여인이 대답했다. 그리고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후후. 후후후. 제롬은 손을 뗐지만 여인은 제롬에게서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 역시 장난인가. 아니면. 혼란을 가중시키듯 여인의 얼굴이 슥 다가오더니 옆으로 기울어 제롬의 어깨에 특 기댔다. 그만큼 몸이 다시 눌리게 된 건 당연했다. 일부러인지 아닌지. 킥킥. 재차 나온 웃음소리가 제롬의 귓가에 퍽 가깝게 들렸을 것이다.
"네가 정말 내 영혼까지 바치길 원한다면."
나긋한 목소리는 좀전과 같았지만 말투는 여인의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조금 더 나른하고, 가벼웠긴 했지만. 지금은 말투가 문제는 아니었을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