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나 아끼던 두려움들은 돌아선 당신의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죠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사업을 시작하고 제일 귀찮았던 건 달에 한번씩 정산을 하는 일이었다. 라 베르토의 재정관리는 돈 좋아하는 벨 로노브에게 맡겨두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관리를 할 뿐, 최종적인 확인과 절차는 수장인 여인이 해야만 했다.
"하. 귀찮아. 그냥 다 허가해줄 테니까 벨로가 하면 되잖아." "안 돼. 빨리 와서 앉아. 투덜거릴 시간에 한장이라도 봐." "아아아 싫어 귀찮아아아. 못된 벨로. 나쁜 벨로." "그래. 못되고 나쁜거 내가 다 할 테니. 빨리 일 해주세요. 보스."
매달 하는 실랑이 끝에 고집을 꺾은 건 여인이었다. 비실비실 자리에 앉아 얄팍한 서류들을 하나 하나 보기 시작하니 투덜대던 것에 비해 일이 금방 진행되었다. 시작이 힘든거지 능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한달분을 한번에 보려니 제법 시간이 흘렀고, 마지막 것까지 끝냈을 때에는 이미 새벽 시간이 되어 있었다.
옆에서 처리가 끝난 서류를 챙기는 벨 로노브를 두고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다시 손질하고 겉옷을 챙겨입으며 나갈 채비를 하니 벨 로노브가 말했다. 적당히 해. 연락해도 안 간다. 거울 앞에서 가볍게 얼굴을 매만지던 여인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꼴아도 내 발로 기어올테니 걱정 마. 짧은 대화를 끝으로 여인이 방을 나갔다.
새벽이지만 그리 늦지는 않은 시간에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인은 고민하지 않고 셰바의 동부로 향했다. 라 베르토가 있는 서부와는 정 반대지만 거리는 문제가 안 되었다. 진청색의 얆지만 긴 코트를 잔잔히 팔락이며 거침없이 나아간 여인의 걸음은, 이 늦은 시간에서도 불이 켜진 한 횟집 앞에서 멈추었다. 들어가기 전에 한번 가볍게 코트자락을 털곤 횟집 해룡수산의 문을 열었다.
"여어. 카이. 오랜만이야."
여인은 언제나처럼 옅게 웃으며 가게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가게 내부에 비해 여인의 차림이 제법 화려하다보니 입구에 섰을 뿐인데도 존재감이 뚜렷했다. 여인은 카운터 앞에 있던 주인장 카이를 향해 인사를 하고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시간이 시간이지만 손님이 없는 걸 보고 농담마냥 말을 덧붙였다.
"혹시 폐점하려던 참이었어? 그럼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오고."
농담의 어조였지만 정말 폐점 시간이었다면 여인은 두말하지 않고 나갈 사람이었다. 다시 올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였다. 뭔가 나른하게 늘어지는 말투도 그렇고, 푸근해보이는 인상에 비해서 엄청 몸 좋아보이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말하면, 뉴 베르셰바에 있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뭐, 됐나...'
이 도시는 상식을 빗겨가는 온갖 특이점만 모인 퇴적지같은 곳이니. 안 그래도 온갖 사람을 만나는 직업인 운전수, 리아나의 인간 목록에 리스같은 특이한 군상이 하나 쯤 더 등록된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리아나는 개인적으로, 이 도시는 확실한 죄악의 도시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제불능에다가 나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엔 불행한 운명으로 이 도시에 엮여버린 사람도 있고, 딱히 도시 일에 신경쓰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이 남자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이상한 인간이 주변에 없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가볍게는 OD의 삼촌들과, 자식에게 빚을 떠넘기고 간 제 아버지부터, 혹시 차에다가 수납형 미니건을 달아볼 생각은 없냐고 말하는 정신나간 메카닉 프릭까지. '윽, 그건 절대 안 되지.' 나름대로 개인적이고 조용한 삶을 지향하고 있는 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는 고개를 두어번 흔든다.
"스튜로 할게요. 그거 먹으려고 온 거라서요. ...아, 설마 2인 이상 해야하는 건 아니죠? 혹시 그런거라면 1인분은 포장으로 부탁드려요."
리스를 따라가 자리에 앉은 리아나가 주문을 한다. 그녀는 확실히 리스 본인만큼이나 점잖은 태도의 여자였다.
"뭐, 나는 그냥저냥." 몇주를 못 쉬었지?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간 건 언제지? 스스로에게 되뇌이듯 질문한다. 그래도 집이라도 있는게 어디냐고 계속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왠지 어딘가 잘못되어있는 것 같다. "으음. 뭐…" 그러다 문득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에 뒤늦게 반응한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와 자신의 체격차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제대로 운동하긴 하는건가? 잘 챙겨먹기는 하고?" 그런, 할머니같은 말을 하며 챙겨주는 건 정말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살벌한 세계 속에서도 페퍼는 덩치하면 어디 안가는 사람이며 대개 그는 상대를 내려다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너무나 작았다.
"스물? 어리긴 어리네. 아닌가? 나도 스물부터 인정받아서 향수를 만들기 시작했으니까..."
하웰은 조금 놀랐다가 이내 인정했다. 전문성을 위해 어느정도의 어린 시절은 희생당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제 또래 친척들이 다 그런 전철을 밟았으니까. 열 다섯에 기초학문을 다 떼고 열 일곱에 독과 마약의 레시피를 다 외웠으며, 스물에 인정받아 의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스물 셋 쯔음에 지점을 냈으니까... 하웰은 제 인생을 잠시 돌아보며 으, 소리를 내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렇게 되겠지만 재미없는 삶이기는 했다.
"뭐, 원래 범죄 조직 내에 태어났다는 게 그렇지, 뭐. 배운 게 도둑질인데 어쩌겠어."
하웰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히려 누가 보기에는 특권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집안의 배경, 환경, 자원, 지식 이런 것들을 단지 가문 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졌으니까.
그렇게 보면 제롬과 자신은 조금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비전투원이라는 것도 그렇고 어릴 때부터 어떤 한 분야만 계속하여 파나갔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이 범죄의 길이라는 것도 그렇고. 꽤나 폐쇄적인 집단 안에 있었다는 것도.
"꿈?"
하웰은 제롬의 질문에 당황해서 눈을 꿈뻑거렸다. 꿈, 꿈이라... 하웰은 소주 한 잔을 비우면서 잠시 생각했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단어라 버퍼링이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누가 자신에게 꿈을 묻겠는가. 그것도 스물여섯이나 먹은 사람에게. 꿈, 있기는 했던가?
"꿈...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한참을 생각하다가 하웰은 조금 자조적인 미소를 띄운 채, 제롬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조금은 평범한 삶을 동경했던 것 같기도 해. 학교에 가고 게임을 하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그런 것 말이야. 너는?"
딱, 소주 한 병이 끝이 났다.
하웰은 잔을 들어 건배를 하자고 했다. 이제 슬슬 술자리는 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밖에 눈도 그쳤으니까.
그냥저냥. 에만은 저 말의 뜻을 아주 잘 알고있다.에만도 자주 둘러대는 말이었다. 그냥저냥 일하고 살지. 이 도시에서 그냥저냥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짜증나는 일인지도 안다. 개같이 일하고 조금의 안식을 얻었다는 뜻이겠거니 싶어 에만은 연초를 다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연기를 머금고는 고개를 올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면이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익숙한지 에만은 콧잔등까지 올라온 가면을 비스듬히 기울인다. 살짝 내린 가면 사이로 에만이 잠시 침묵했다.
"……그럭저럭 먹고 지내. 운동은 움직이는 걸로 됐어.."
먹지 않고 지낸다. 체력은 바닥날대로 바닥났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위장은 카페인과 타우린에 절었다. 고체를 씹어 삼키면 속이 도무지 받쳐주지 않아 구역질을 하기 일쑤고 지금 담배를 피우는 것도 내일분의 체력을 끌어다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에만은 그 사실을 부러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얘기해봤자 좋을 일은 없다. 에만은 연기를 힘없이 뭉글거리게 뱉다가 페퍼의 제안에 연초를 손에서 떨궜다. 소리도 없이 연초가 땅에 떨어지고 발이 힘없이 그 위를 짓밟고 땅을 비빈다.
'아니... 역시 그냥 이상한 사람일지도. 사족을 굳이 다는 것도 그렇고, 조금이지만 방금 침도 흘린 것 같은데, 이 종업원... ...설마 스튜를 상상하면서 군침을 흘린건 아니겠지?' 주문한 스튜가 나오는 동안 속으로 그런 생각을 부풀려 나가는 리아나는 '그렇게나 맛있다고...?'하며 중얼거리면서 미간 사이를 좁히고 있었다.
표정이 풀린 것은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유일한 종업원인 안젤리카와 눈이 우연히 마주쳤을 때다. 리아나는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눈치채고는, 금방 표정을 풀어 멋쩍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기울여 보였다. '나라고 좋아서 이렇게 생긴건 아닌데 말이야.' 하는 안젤리카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리아나는 좋게 말하면 냉철해보이는 미인이였지만, 길가다가도 취객에게 시비가 붙을 정도로 날카로운 인상이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온 스튜의 첫 인상은, '전례 없는 스튜'였다.
"흐음, 그렇구나. 과연 이래서 '로스트 스튜'..."
로스트 스튜는 그 간판 자체가 매우 직관적인 데다가, 리아나는 물론 그 중에서도 중의적인 별명을 듣고서 찾아온 것이기에 기본에 충실한 그림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이 가게의 스튜는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있는 어레인지 스튜를 내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전혀 이상하게 생각 되지 않는 맛. 오히려 확실하게 '자신의 무기'로써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고기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런 리아나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럽게 와닿지 않는 것이,
'맛집은 맛집이네, 여기...'
하는 생각을 들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튜는 굶주린 운전사의 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댑혀갔다. 이 부분은 꽤나 중요하다. 운전은 기본적으로 신경을 곤두서게 되는 일. 운전사를 배불리 먹이지 않으면 그 화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은 생각하지 않게 하는 음식이다...라고 리아나는 생각한다. 로스트 스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릇을 비우게 되었다.
가게 내부의 하얀 불빛이 어두운 거리에 새어나간다. 아직도 영업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듯 환하게 퍼져나간 빛. 그 빛을 따라 아스타로테는 해룡수산에 발을 들인다. 문짝에 달린 종이 청명한 울림을 낸다. 줄곧 요리 책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카이가 고개를 들며 상투적인 인삿말을 건넨다.
"어서오세요. ...아."
카이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자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아스타로테에게 대꾸한다.
"그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일견 무뚝뚝하게도 보이는 대답 뒤에 가벼운 질문이 따라붙었다. 아스타로테는 그가 살갑게 대해주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으니.
"아직 문 닫을 시간 아니야. 알잖아."
태연하게 농담을 던지는 아스타로테. 카이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꺼낸다. 농담에 진지하게 대꾸하는 것처럼 보여도, 카이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받아쳐준 거라 할 수 있다. 그게 그다운 것이다.
"뭐 주문할 거 있어?"
카이는 그렇게 말하고선 주방 쪽을 흘겨보았다. 재료나 반찬 등이 부족하진 않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서양식 건물이 죽 늘어진 거리에서 몇 블록 떨어졌다고, 마치 도시와 단절된 곳에 와있는 듯하다. 주차된 차량들을 몇 대 보기는 했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으니. 그 흔한 사이렌 소리도 여기에서는 듣기 힘들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다, 한걸음 물러나며 벽돌로 된 저택을 올려다본다. 집은 곧 계급의 표현이며 사는 이의 삶이 녹아있는 장소라던데. 그렇다면 지금 만나러 온 당신과 꽤나 어울리는 집이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떻게 한 번 더 벨을 눌러봐야 하는지. 그리 고민하던 참에 당신이 문을 열고 나온 당신을 본다. 현관문의 금속성 소리만큼이나 차가운 당신의 말이었지만,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았으므로. 시안은 마주 보며 그저 방글방글 웃는다. 돌아서 걸음을 옮기는 당신의 뒤를 따르며 능청을 떠는 양, 그 특유의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쉬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고서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시안은 제 손에 들고 있던 리본 달린 상자를 당신에게 내민다. 이전에도 종종 당신의 주문에 이런 리본 달린 상자를 가져오곤 했으므로. 열어보지 않더라도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일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